Thursday, October 17, 2013

Trail Walk on Lake shore of ON. 아름다운 경관에 감탄뿐이다.

Condo의 거실에서 창문을 통해 쳐다보는 하늘이 파랗고 무척 높게 보인다.  가끔씩 하얀 새털구름이 높이 떠서 훨훨 날아가는 모습이 파란하늘의 균형을 잡아 주는것 처럼 느껴지기도한다.

온타리오 호수가를 끼고 시내쪽으로 걷는 Trail은 그오른쪽에 끝없이 펼쳐지는 온타리오 호수 저멀리에는 아직도 뱃놀이를 즐기는 yacht군들이 움직이지도 않고 그대로 물위에 떠있는 모습이 아스라히 점점으로 보여지고 마치  anchor를 내려놓고 갑판에 드러누워 파란 하늘의 비밀을 풀려고 응시하고 있는것 처럼 느껴지게 한다.   왼쪽으로는 Condo숲이 끝도 없이 이어져  한장의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고, 오솔길 좌우에는 수명을 거의 다한 갈대와 잡풀들이 이어져 있는길의 윤곽을 더 뚜렷하게 안내해주는 기분이다.





Humber River를 가로질러 세워진 다리는 그냥 산책객들이 강을 쉽게 건너게 만들어 놓은 그런 흔한 다리가 아니다.  아취형 Frame이 높이 솟아있고, 그곳에서 굵은 wire들을 내려뜨려 다리의 뼈대를 이루는 girder를 붙잡고 있고 그상판위에는 다시 콩크리트로 잘 다름어진 길이 펼쳐져 있다.  오늘도 Lunar와 같이 이다리위를 걷고 있다.  강왼쪽으로 시원하게 뚫려 있는 Gardiner Expressway를 달리면서 쳐다보이는 이다리는 마치 무지개를 보는것 처럼 반원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 주위 경관과 조화를 잘 이루어 주고 있다.  우리처럼 산책객들이 걷고, Biker들도 휙휙 지나가고....

Condo숲이 어우러져 있는 사이사이에는 아직도 건설중에 있는 Condo들의 뼈대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고 있고,  그위에서 기중기(Crane)긴팔에 매달린 hook에 자재들을 싣고 움직이는 광경도 구경거리가 된다.  Crane Operator는 곡예사임에 틀림없을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움직이는 모습이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보일뿐, 불안한 마음은 전연 못느끼고 옆을 스친다.





아스팔트 오솔길이 끝나고  앞에 나타나는길은 인조 나무로 건설된 board Walk 구간이 있다.
Board Walk위를 걷는 느낌은 또 다르다. 한발짝 옮길때마다 발자국소리가 드럼을 치는것 처럼 느껴지고 여러사람들이 거의 같은 시간에 같은 구간을 걸을때에는 마치 Drummer가 혼신을 다해 두들기는 그런 소리도 들린다.

Board Walk왼쪽의 넓은 잔듸밭에는  그수를 셀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러기떼들이 풀을 뜯기에, 산책객들이 옆을 지나가는것에는 전연 위험을 느끼지 않고, 아니 아예 무시해 버리고, 열심이다. 이들을 쳐다 보면서 걷다보면 이들이 실례한것을 밟을때가 종종있다.

오른쪽 호수위에는 한떼의 백조와 청둥오리들이 어우러져 유영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들로 부터 " 야 인간들아 뭐가 그리도 바빠서 걷고, 그것도 모자라 달음박질하고 그러느냐, 우리의 살아가는 광경을 보면 뭐 느끼는게 없느냐?"라는 암시를 해주는것 같다.

계속이어지는  Board Walk을 걷는 발자국 소리에 정신없이 걷다 무심코 멀리 보이는 Sky scraper 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토론토시내의 심장부가 보이고, 그가운데 우뚝솟아 있는 토론토의 상징 CN Tower의 자태가 믿음직 스럽게 보인다. CN Tower 오른쪽으로 인근 가까운 도시, 뉴욕, 몬트리얼, 오타와를 연결해 주는 비행기들이 도심안의 Centre Island에 있는 공항에서 뜨고 내리는 모습도 한장의 그림으로 잘 어울린다.

Board Walk이 끝나는 지점의 오른쪽 모래사장에  설치됐던  beach Ball 코트는 아무도 없이 텅비어있어  쓸쓸하게 보인다.  여름철 뜨거운 햇살이 내려쬘때는 여러개의 코트장에서 젊은이들이 팀을 이루어 힘을 발산하는 용광로 같은 곳이었는데.....지금은 그자리에 몇마리의 갈매기들이 앉아 있을 뿐이다.   갑자기 내가 살아온 인생의 햇수를 헤아려 본다.  왜 하필이면 지금 그생각을, 그것도 텅빈이곳을 지나면서 생각해 보는가?





자세를 돌려 지금까지 걸어온 그 흔적을 향해 쳐다본다.  멀리 내가 살고 있는 Marina Del Rey Condo 빌딩이 보이고 그주위를 둘러싼 더 높은 콘도 빌딩들이 온타리오 호수의 물위에 걸려 있는것 같이 보인다.   내가 하던일에서 은퇴하고 이곳에 정착했을때만해도 이지역에는 Palace Pier Condo와 내가 살고 있는 condo뿐이었었다.  그리고 Motel Strip들이 전부 였었다.

다시 호수를 향해 먼 남쪽 하늘을 쳐다본다.  수평선 저너머에는 미국의 도시 Rochester가 있을 것이고,  그옆으로는 Finger Lakes가 있을 것이다.  손바닥에서 다섯개의 손가락이 갈라져 있듯이 그런 형상의 아름다운 호수들이 그곳에 펼쳐져 있어 그렇게 이름을 부쳤다고 한다.   그호수중 가장 큰 곳의 옆 도시에는 Corning Ware를 생산하는 공장도 있다.  몇년전 그곳을 구경 같은때, 공장에 들려 도자기 생산하는 과정을 본 기억이 떠 오른다.  지금은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Kodak 필름과 인화지를 생산하여 전세계적으로 장사를 했던 코닥회사의 본사가 이곳에 있었다.  바로 내가 지금 걷는곳에서 똑바로 호수를 건너가면 그곳이다.

여름철이면 Dragon Boat 경주가 벌어지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water fowl들이 대신 그자리를 채우고 있을 뿐이다.  용의 머리형상을 하고 있는 보트 앞에 앉은 Leader가 치는 큰 북소리의 장단에 마추어 노를 젖는 팀원들의 일사 불란한 동작이 쳐다 볼때마다 멋있었다.  신이난 leader는 더 힘차게 둥둥둥둥.....고개를 앞뒤로 흔들면서 두둘겨 패던 그모습이 눈에 선하다.  Lunar의 발걸음이 뒤쳐져 있다.   이제 왔던길을 되돌아 가야 한다.

Summer residence에서의 여름철 생활을 접고 다시 토론토에 와서는 이렇게 거의 매일 호숫가 Trail을 걷는것이 생활의 일부가 된지도 무척 오래다.  살아온 세월이 길어질수록 적당한 운동을 해야 건강한 말년을 보낼수 있다는 의사의 조언이 작용 한것도 있지만, 또한 걷는 재미도 있기 때문이다.  시간에 구해 안받는 활동이기에 bench에 텁석 주저앉아 쉬기도 하고, 우연히 처음 보는 사람들과 어울려 이바구도 하고 .....Lunar의 걷는 모습을 cell phone을 이용하여 찰칵하고 순간을 포착해 보기도 하고.





반대편 서쪽으로 이어진 Trail에서 멀리 보이는 온타이오 호수와 토론토시내 중심부의 경관은 일품이다.  새삼 아름답고, 미를 살린 호수와 연결된 호반의 도시임을 심감하게 한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멀리하고 먼나라의 경관을 보겠다고 짐을 꾸려 집을 떠나고생하는 의미가 무엇일까?라는 생각도 하게된다.  옛말에 燈下不明이라는 사자성어가 인간들에게 암시해주는 그깊은 의미를 느낄수 있게 해준다.

Trail Walk을 여러곳에서 걸어 보았지만, 이구간 처럼 10여 킬로미터의  자연경관이 아름다운곳은 못봤던것 같다.   운동삼아 거의 매일처럼 무심코 걷곤했던 지난날들이  오늘따라 이오솔길을 걸을수 있는곳에 살고 있다는 자체가 남들보다 더 축복을 많이 받은 삶을 살아오고 있었다는점을 감사한 마음이 있다.  어떤분들은 평생 백조(Swan)을 실제로 목격한적이 없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었는데, 여기서는 흔하게 보기에 그만큼 귀한 존재인지도 최근에야 가슴으로 느꼈었다.

하늘의 새털같은 구름이 훈수를 두는것 같이 모여든다.  금새 또 모양이 바뀌어 흩어지고 있다. 우주만물의 존재 원리를 보여주는것 같은 느낌이다.  나도 그속의 한 끝점에 걸려 더 멀고먼 신비의 우주속으로 때가되면 여행을 떠날 것이다.





Sunday, October 13, 2013

Camp Firewood가 불꽃을 피우기까지

Mr. Doug이 그의 넓은 농장 약 1000 Acre를 구경 시켜주는 와중에, 그냥 지나칠수 없다고 차 한대가 겨우 빠져 나갈수 있는, 풀이 우거진 Trail 속으로 우리 부부를 앞장 서서 안내 한다.

한참을 천천히 풀밭속의 길을 달려 나타난곳은 Camp Firewood를 생산해 내는 작업장(?)이었다.  이곳에서 가공된 Firewood가 여름철 Camping Season에는 내손을 거쳐 Camper들에게 팔려서 그들은 밤에 모기떼와 싸우면서 불을 피우고 젊음을 불사르고 낭만을 만들고, 또 연인들끼리 추억을 만들어 주는 촉매제 역활을 하고 있었다.  그과정이 많은 Worker들이 참여하여 생각보다 여러단계를 거치면서  캠핑장의 불꽃으로  활활 타오른다는것을  새삼 확인했다.

그가 들려준 Camp Firewood가 Processing되는 과정을 설명해 주는데, 미쳐 예상치 못했던 여러과정을 거친다는것을 배웠다.  많은양의 Wood를 Cutting 해야 하기 때문에 요즘은 기계를 사용해서 쉽고 빠르게 하고 있다고 했다.  잘라논 나무를 토막내서 도끼로 쪼개서 다시 Packing해서 Camper들에게 팔려가면 되는것으로 이해 했었는데,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그의 농장에는 많은 단풍나무들이 아직 개발안된 상태의 원시림속에서  다른 여러종류의 나무들과 어울려 자라고 있었다.  이들 단풍나무중에서 병들고 잘못된 것들을 솎아 잘라서 한곳에 모아서  상당기간동안 햇볕과 비바람에 훈련(?)을 시킨다고 한다.

보기에는 엉성하고, 커다란 기계 한대가 쌓아놓은  나무들옆에 있다.  그옆에는 자가 발전기가 한대 놓여 있었다.  발전기에서 발전된 전기가 기계에 부착된 모터에 보내지면서 육중한 기계가 돌아가면서 자기 할일들을 한다고 한다.  기계를 이용하여 먼저 긴 통나무가 기계의 Bed위에 놓여지고 Cutter가 있는 곳으로  Worker에 의해 보내지면 미리 Setting된 Cutter로 토막을 만들었다.

기계의 한중앙에 커다란 칼(Blade)이 수직으로 고정되여 버티고 있었고, 토막난 통나무가 이곳으로 Push되면 필요한 크기로 쪼개져 장작이 되면, 다시 그옆에 있는 conveyor 옮겨져 그곳에 쌓여 산더미를 이룬다고 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장작은 바로 팔리는게 아니고 다시 거의 일년 이상을 야적해 놓아 햇볕과 비바람에 말려지는 시간을 보낸다음, 마지막으로 Wrapping기계를 이용하여 Bundle을 만들어 주문 받은곳으로 운반하고 돈 계산을 하면  한 싸이클이 끝나는셈이라고 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것은 현재 조금 쌓여 있는 장작개비는 그 크기가 Camper들이 사용하는 Size보다 훨씬 크게보여 이유를 물었더니 사유를 설명해 주었다.  현재 쌓여 있는 장작은 Camping 용이 아니고 겨울철에 각가정에서 벽난로에 사용될 장작들이라고 했다.  집에 벽난로는  한번 불을 피우기 시작하면  밤새도록 피우명서 천천히 오래 타야 하기 때문에 조각이 커야 한다는 설명이다.  camper들은 저녁에 불을 피우면 대개 초저녁에  몇시간을 태우고 끝나기에 불이 빨리 피어올라야 하기 때문에 장작개비를 잘게 쪼갠다는 것이었다.

지금부터는 각 가정의 벽난로에 사용될 장작을 준비하게 될것이라고 한다.

무심코 Doug이 큰 추럭에 일주일에 한번씩 300 Bundle을 싣고와서 3명의 인부들과 같이와서 약 한시간 정도 unloading하곤 했었다.  처음에는 Firewood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별수 없는 늙어가는 농부로 생각 했었다.  그는 부자 농부였다. 온타리오 호수에 접해 있는 Picton인근의 기름진 농장을 14세때부터 일구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며, 현재는 그의 큰 아들이 거의 맡아서 하고 있다고 한다.

여름철 Summer residence에서 약 4개월 보내면서, 오전중에는 Golf로 Lunar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는 바로 약 100 미터쯤 떨어져 있는 Presqu'ile Provincial Park안의 Camping장에서 자연을 즐기는 camper들을 상대로, 그가 공급해 주는 Firewood를 팔게되면서 그와 친구가 되기를 벌써 3년째 해오고 있다.  시즌을 접고 다시  Toronto에 올라가기전에 한번 놀러 꼭 오라는 연락이 와서 그의 농장에 들렸던 것이다.  그의 농장에서는 지금 메주콩을 수확 막 끝냈고, 현재는 짐승 사료용으로 쓰이는 옥수수를 수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른 봄에는 Green Pea를 생산해서 인근의 Super Market에 납품한다고 했다.  또한 매년 2월중순경까지는 Canada의 특산품인  Maple Syrup를 직접 채취하여 생산하고있다고 한다.

차로 이동하면서,  이곳은 옥수수 수확,  또 다른 곳에서는 콩수확,  또 다른 곳에서는 Green Bean을 생산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말과 소를 키우는 축사가 무척 컸다.  끝도없이 이어지는 그의 농장설명에 도대체 얼마나 큰 면적이냐고 물었더니 그때서야 정확히 1,000 Acre라고 했다.   그는 무척 부자였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열심히 생활하면서 삶을 즐기는 멋쟁이 이기도 했다. 그는 34피트정도 긴 Boat가 있었다.  그안을 구경 시켜주는데 마치 집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는 시즌이 끝났으니, 내년 여름에 꼭 같이 뱃놀이를 하자는 약속을 해준다.

갖 수확한 메주콩을 몇자루 준다.  농장방문온 기념으로 그냥 가져 가라고 그는 말했지만, 실랑이 끝에 나도 성의를 그의 손에 쥐어주고 편안한 마음으로 받았다.  콩알이 무척 싱싱하다.

대량으로 수확되는 옥수수와 콩은 농부들끼리 운영되고 있는 협동조합에 납품하기에 집에는 거의 갖다 놓은일이 없다고 했다.  나에게 준 콩은 일부러 준비한것임을 알았다.

이른봄에 수확하는 Green Pea는 각 Super Market과 장기 계약을 맺고 개인적으로 공급하고 있다는 설명도 해준다.  Maple Syrup 또한 생산과정이 여러 단계를 거치는데, 이 생산품은 인근의 주민들이 고정적으로 구입해 가기에 아무런 선전같은 홍보가 필요없이 다 판매되여 알짜 수입이 되는 셈이라고 설명도 해 준다.

농장에서 멀지 않은곳에 있는 언덕위로 차를 몰았다.  그곳에는 시골의 전형적인 식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Menu를 보니 값이 Toronto의 잘 정돈된 큰 Restaurant에서보다 훨씬 더 비쌌다.  Special Burger와 Pizza종류를 주문했다.  그리고 식당주인이 직접 생산한 Country Cider한잔씩 주문했는데, 이또한 값이 맥주 마시는것에 비교가 안될정도로 비쌌다.  그의 점심대접이 고마웠다.  Food 맛은 값을 주는것에 아깝지 않게 맛이 있었고, Gourmet였다.
바로 옆에서는 그들이 오랫동안 사용해온 것으로 보여지는 야외 Oven에서 그들의 식단에 사용될 빵종류를 굽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다 보는 온타리오 호수의 전경이 무척 평화롭다.  옆테이블에는 미국에서 Boat를 타고 놀러온 나이든 부부가 점심을 enjoy하고 있었다.  이곳 방문을 즐기고 있다고 칭찬이 대단했다.  Doug이 설명하기를  멀리 보이는 호수 저편이 미국이라고 했다.
바쁠텐데 일부러 초청하여 구경시켜주고 점심까지 대접해준 그가 고마웠다.






Thursday, October 10, 2013

누가 거짖말로 사람들을 제일 많이 괴롭힐까? 정답은 모두가 알고 있겠지만....

국위를 선양하고, 국가 지명도에 한획을 그을 정도로 무대뒤에서 말없이 맡은바 직분을 충실히 이행하는 숨은 애국자들을 수도 셀수 없이 많이 봤고, 돈벌이도 잘 하고 있고, 세금도 충실히 국가에 바쳐서 국가 운영에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분들이 지금 이시간에도 세계 각곳에서 Korea를 빛내고 있습니다.

어떤분들은 좋은 생필품들을 만들어 세계 각국에 팔아 Korea의 명성을 높이고, 또 어떤분들은 타고난 강인한 체력에 투혼을 불살려, 빙상의 여왕, 골프여제, 그친구가 등판해야 마음이놓여,라는 대명사가 붙어 다니도록 국위와 국격을 높이고 있다.

Galaxy S4는 IT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Cell phone의 대명사가됐고, TV하면 LG, Samsung을 먼저 생각하게 돼고,  저렴한 가격으로 품질좋은 차량을 만들어내는 현대, 기아차가 북미, 유럽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쌩쌩 달리는 광경을 볼때는 조국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  TV시장에서 한때 세계시장을 석권했던 일본의 Panasonic은 LG와 Samsung의 기술을 상대할수 없어 아예 생산공장을 완전히 문을 닫는 정도로, 이들 산업역군들은 돈을 벌기도 하지만, 국위선양을 거짖말 한번 하지 않고 묵묵히 실행하고 있다.

Folk Song하면 K-pop으로 연결되는 어린 한국의 딸들이 빛을 발하고 있다.  이들 또한 거짖말 하지 않고, 돈벌면서 Korea를 세계에 자랑하고,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역군들이 국제무대에서 더 잘 활동할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어야 할 사람들이 있다. 다름아닌 고국의 정치무대에서 국민들의 대변자로 자처 하면서 혈세를 축내고 있는 자들이다.

요즘 한창 국내 정치판을 소용돌이치게 하고 있는 전직 대통령의 파렴치한 NLL관련발언이 담긴 대통령 실록을, 해당 대통령이 측근 몇명과 상의하여, 파기시키고 흔적을 감추려 했다가 들통이 나는, 역적질 한것을 놓고, 여 야로 나뉜 정치꾼들이 산적한 민생법안은 서랍속에 깊숙히 처박아 놓고, 서로 거짖말을 한다고, 마치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를 비난하는식으로 으르렁 대고 있는 꼬락서니로, 국익선양을 위해 위에서 열거한것 처럼 열심히 뛰고 있는 애국자들을 절망 시키는것은 물론이고, 국민들을 비탄에 빠지게 하고 있다.

NLL이슈를 놓고, 보수대 진보성향의 논객들이 TV에서 열띤 공방을 벌이는것을 본일이 있다.
그중의 한분이 한말이 새삼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대통령이 김정일과 정상회담에서 NLL을 이북에게 양보하는것이나 다름없는 발언을 한것은, 국가 통치권자가 국민모르게 주권을 적에게 팔아 넘기는 행위로써, 이는 사형을 받아 마땅한 '여적죄'에 해당한다"라는 대목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한 이씨왕조 500년 동안, 왕들의 행적을 기록한 실록들이 지금까지 전수해 오고 있는, 그래서 이실록들의 내용을 소재로 사용하여 TV에서 재미있는 역사극을 시청할수 있는것도, 전직 대통령 "노"씨처럼 자기가 한 발언에 대해 국민들의 원성 받을것을 두려워 감쪽 같이 숨기려 했었던 왕이 있었다면, 어림없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보통적인 이성을 갖고 삶을 살아간다.  간혹 잘못을 저질렀을때는 즉각 이를 인정하고 이해를 구하던가 용서를 구한다.  그러면 모든게 순수히 풀려 나간다.  오히려 잘못을 인정한 그용기를 높이 사서 다음에 더 득을 보는 경우도 있게된다.

정치꾼들은 절대로 잘못을 시인 하거나 용서를 구하는자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변명에 변명을 계속 이어 부치고, 말을 교묘히 바꾸어 국민들을 현혹 시키는데 최종 목적이 있는것 처럼 행동한다.  NLL이슈도  죽은 전직대통령은 그만두고 살아있는 관련자들이 깨끗이 전면에 나서서 변명하지 말고, 현재 보존되고 있는 자료를 보여 주면서 사실데로 설명하고 잘못된 것은 용서를 구하면 후일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수도 있으련만, 눈앞의 질책과 체면치레가 두려워 결국 Abyss로 떨어지고 마는 정치사기꾼들이 되고 만다.

그들이 할일은 민생법안들을 하루라도 빨리 입법화 해서 그법을 근거로 국민들, 특히 국위를 선양하는 많은 애국자들이 편하게 활동하도록 해줘야할 막중한 책임을 뒤로 하고, 사기나 공갈쳐서 개인착복이나 하고, 국민혈세를 마치 자기 주머니에서 꺼내 주는것 처럼 거짖말이나 남발하고.....  이러한 행위들이 앞을 향해 뛸려고 하는 애국자들, 선량한 국민들의 발목을 잡고 뒷걸음질을 하게하는 국가 반역자들이자, 고상한척은 혼자 다하는 고등 사기꾼들이라고 생각한다.  시민들이 즐겨찾는 시민광장을 불법으로 점령하여 천막치고 데모하는 그들 자신들은 법을 진정으로 지키고 있다고 떠들어 대는 그행위 자체가 불법임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좋은일, 국위선양하는 사람들에게, 이들 정치꾼들은 빈말로라도 "좋은일 하셨습니다"라고 칭송해주는것을 아직까지 한번도 본일이 없다.  옛말에 "말한마디로 천량빚을 갚는다"라는 글귀가 있다.  그들의 이러한 인정머리 없는 행동은 자기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부모까지도 욕먹인다는점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대신에 남의 약점을 파고들어 깍아내리는데는  일등선수들이다.  왜 이들의 보는눈과 생각하는 관점은 보통 사람들과 판이하게 다를까?


누가 진정한 애국자요 국위선양자들인가 등수를 굳이 매겨 본다면,
세계를 상대로 장사해서 외화도 벌고 국위도 선양하는, 스포츠를 통해서, Folk Song을 목이 터져라 불러서 국격을 높이는분들이 일등선수들이고 그다음에 묵묵히 맡은바 의무를 다하고있는 국민들이고, 또 그다음에 나를 포함한 순진하지만,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나는식의  고지식하고 어리석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고 그리고 제일 꼴찌가 가장 높은곳이자 신성한곳에서 시정잡배들도 잘 하지 않는 폭력을 휘두르면서 고등사기치고, 내발목을 잡고 꼼짝 못하게 붙잡고 물귀신 작전을 하고 있는 정치꾼들이 제일 꼴찌일 것이다.   이순서매김에 전부가 고개를 끄덕일테지만, 한부류만 수긍대신에 나를 향해 눈알을 돌려가면서 씩씩 거릴것같다.


Monday, October 07, 2013

겨우 걸음마하는 유아, 연애할 정신연령까지는 오랜 인내의시간 필요.

고국의 먹물들이나, 언론들 그리고 정치꾼들은 한국이 요즘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는 빈도가 높아지는것을 보고 마치 그들과 같은 수준 또는 한수위에 있는것으로 착각을 많이 하는것 본다.  이런풍조는 한국의 앞날에 대단한 위험을 안겨 준다는것을 가슴깊이 새겨두고, 겸손의 자세와 성숙된 행동이 모든 국민들, 특히 지식인들인양 자처하는 먹물들, 정치꾼들 그리고 언론들의 책임이 막중하다는것을 국민들에게 보여줘서, 생활화 해야 진정한 한순간 높이 뜨는 애드벌룬이 아닌 의식수준이 높게 생활속에서 나타나야 한다는점을 깨달아야 한다.

요즘 고국사회의 돌아가는 사회적 현상을 곰곰히 들여다 보면, 모든게 모래위에 성을 쌓아놓고 싱글벙글 대는 정신적 미숙아들의 전시장 같은 아찔함과 불안함의 연속이다.  잘발달된 서구사회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사회적 신뢰"는 존재치 않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 갖 유아기를 지난 잘 양육된 어린아이에게 청년들 처럼 마라톤을 훈련과 정신교육을 시킬수는 없듯이 젖먹이 유아에게는 그수준에 맞는 영양식을 먹이고, 그수준의 지적훈련, 즉 이유식을 할수 있는 훈련을 시켜야  제대로 발육한다.

자양분이 풍부한 음식과 그에 맞는 훈련으로 단련된 청년과 같은 서방 세계의 나라들과 같은 수준에서, 시기적으로 이제 막 유아식을 떼고 이유식을 먹을려는 어린아이같은 한국이 자기 분수도 모르고 모든 정치적 경제적 국민의식수준에서 청년인 서방세계들과 어깨를 겨누겠다는 것은 망상도 그런 망상일수 가 없다.  할수도 없고, 해봤자 결과는 패배뿐이고, 잘못하면 어린아이는 과식해서 배탈이 나고 더 잘못되면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이 먼저 난다"라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현실로 증명돼게할 뿐이다.

고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몇개의 실례들이  아직 고국 대한민국은 이유식을 하고 이제 유치원생으로 성장하고 있는 증거임을 극명히 보여준다.

어제뉴스에 보면, 서울의 한오피스텔에서 불법으로 짝퉁물건들(시계, 고급백, 여성용품 등등)을 마치 진짜인양 진열시켜놓고, 밖에서 그곳까지 들어오는데도 3단계 이상의 보안 검사를 실시하여 고객을 입장 시키고 불법 장사를, 주로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판매하다 적발됐다는 것이다. 그장사꾼은 자기주머니에 불법으로 이득금을 챙겨넣기위해 국제사기를 친 행위가 한국의 국제적 명성이나 위상에 치명적인 망국행위를 하고 있다는 정신의식에서 발육이안된, 이제 겨우 이유식을 시작한 어린아이의 정신적 수준밖에 안되기 때문인것이다.

또 다른 뉴스에 의하면 어제 여의도 윤중제에서 세계여러나라에서 참석하여 시행된 불꽃놀이 시합이 있었는데, 모여든 구경꾼들의 몰상식한 행동은 낯뜨거워 볼수가 없을 정도로 정신적 의식수준이 발달안된 어린아이와 똑 같았다. 쓰레기 처리 수준하며, 옆사람들과 자리문제로 시비를 걸고 발광하는 모습, 도로가운데 버젖히 주차해 소방차가 움직일수 없게 만들어 버린 작태, 꼭 아직 의식 수준이 발달안된 어린아이 그이상 그이하도 아니였다.

요즘 돌아가는 정치판을 또 보자.  통진당대표라는 찌라시 여자는 선거에 관련된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다고 희희 낙락하는 꼬락서니가 가관이었다.  무죄를 받은 그선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왜 재판까지 받게될 의심스런 행동을 죄의식없이 공공연히 했었나를 반성했어야 했다.  아직 아직 자아의식이 없는,배고픈 어린 아이가 먹을것을 채웠을때 편안히 잠을 자는 그수준이기 때문이다.

여 야당 할것없이, 매일 같이 국민의 대표라는 정치꾼들은 입만열면, 국민들을 불모로 삼아 상대당을 향해 개거품을 품어 대면서 헐뜯기에 바쁜 꼬락서니들을 보면 마치 어린 불량 초등학생들이 패거리를 지어 우쭐한 마음에 주먹을 휘둘러 치고박고 싸우는 정신적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것 같다.  아이들의 싸움을 본 부모의 심정인 국민들의 마음은 얼마나 괴롭고 아플까?  이것들이 옳은길로 잘 자랄수 있을까?  때로는 치료비를 대느라 예상치 않았던 지출을 감내해야하는 그고통을 자식들은 어른이 될때까지 알수가 없음과 같은 이치이다.  감히 초등학생의 정신적 수준을 갖은 정치꾼들이 성년이 된 부모들을 앞에서 이끌고 책임을 지겠다는 발상과 다를게 하나도 없다.  결과는 뻔한것 아닌가.  초등생의 정신수준으로 쓴맛 단맛 다본 성년, 장년의 부모님을 모시겠다니.... 이것은 새빨간 사기행위이다.

조국 대한민국은, 괴물도  아니고 그렇타고 정통공산주의자들도 아닌 지구상에서 전대미문의 정치집단인 이북과 대치상황에 놓여 한시도 편한날이 없이 지내는 마치 밧줄위를 걷는 그런심정의 불안정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곳이다.  이런 난관을 극복하기위해서는 정부를 중심으로 온 국민이 똘똘 뭉쳐서 한목소리를 내고 같은 행동을 해도 될똥 말똥하는 곳인데, 국민들 모두가 마치, 어린아이같은 투정만 부리고 매일같이 울어대고 있다. 배고프다 밥달라, 새로운 장난감같은 Smart phone나왔으니 사달라 등등....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어린아이들은 그것으로 그속에 심취되여 그다음에는 아무것도 안중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의 부모격인 국가는 빨간물이 들건말건, 국가빛이 늘어나든 말든...... 이것이 오늘 조국 대한민국 국민들의 의식수준이다.

어떤 외신 기자가 말하기를 한국여인들의 얼굴은 이쁜데, 각개인의 독특함이  전연없는점을 꼬집은 기사를 본적이 있다.  옆집의 순이가 성형수술하면, 뒷집의 복순이도 질세라 수술에가담한다.  쉽게 얘기해서 도토리 키재기 같은, 소모성 경쟁을 죽기살기로 하기위해 힘들게 모은 부를 다 탕진해 버리는, 마치 유치원생들이 서로 시샘하는것과 하나도 다를바 없는 집단 소모성 경쟁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의식수준이 발달한 청년들은 절대 그러지 않는다.

소위 말해서 대학을 "상아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속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지식을 키우고 정신적 훈련과 단련을 쌓아 이다음 사회에 진출했을때, 훈련된 그 정신연령을 생활화 하도록 신체적 정신적 지적양식을 받아먹고 성장 시키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상아탑이어야 할 대학들이 앞장서서 불법을 학원 내에서 저지르고 학생들을 그속에서 훈련 시키고 있으니, 정신적 성숙도가 제대로 성장 할수 있는겠는가? 말이다.  그런 꼼수를 전수받은 청년들이 정신연령이 성숙됐다고 믿을수 있겠는가?  정식으로 허가받아 지은 학교건물은 뻐스회사에 임대해서 돈벌이에 사용하고 있고,  허가도 없이 불법건물을 지어 그속에서 위험물질을 다루는 상아탑 교육을 시키는 현실은 분명히 아직도 한국은 유치원생 수준의 정신연령인 국가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밖에 이해 안된다.

아이가 엄마로 부터 태어나 엄마의 젖을 먹으면서 사랑을 느끼고, 자란다.  그다음 이유식을 먹으면서 신체적 발달을 추구함과 동시에 정신연령을 키우고, 초등학교에 들어가 지식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해야할 지켜야할 가치관을 배우기 시작한다.  중등교육을 받고, 상아탑이라는 대학을 가서 신체적 발달은 물론이고 정신적 성장을 발달시킨다.  그다음에 남자들은 처해진 특수성 때문에 군대의무를 마쳐야 한다.  이기간이 자그만치 20년에서 25년이 소요된다.  이러한 훈련을 거쳐 완전한 개체의  정신수양과 인격이 갖추어진 건실한 청년이 되는 것이다.  이과정이 보편적인 보통 사람들의 성장 과정이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삶의 과정이다.

지금 한국은 이러한 훈련 기간을 아예 단축시켜 유아기 아니면 아직 신체적으로 미쳐 성장이 덜된 초등생에서 감당못할 몇단개를 훌쩍 뛰어넘어 장년기의 사람들 처럼 행동할려는 망상에 국가 전체가 빠져 있다는것이 문제다.  외형적으로는 요즘 음식이 좋아서 거의 청년에 가까운 발육을 했음을 인정을 할수 있지만, 정신연령은 그게 안된다.  필요한 기본 세월을 보내면서 훈련을 받고 경험을 쌓아 받아야만 성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정상적인 발육을 하고 있다는점을 하루라도 빨리 깨닫지 못하고  이런 현상이 계속적으로 유지 된다면, 고국의 국제무대에서의 공연은 소리없이 무대뒤로 사라짐과 동시에 기억속에서 지워지고 말것이다.  서구세계가 오늘날의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전세계의 정신적 리더로서 성장하기 까지의 기간은 엄청나게 길다.  그기간 동안에 살인,전쟁, 혼란, 노예제도,경제적 어려움 등등의 수없는 훈련을, 어려움을 겪어 오늘에 이르렀다는점에 착안해야 한다.   즉 그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달려왔다는 설명이다.

조국 대한민국이 당장에 필요한것은, 국제무대에 Show off하는것 보다는, 겸손히 처신하면서  내가 행동에 옮기기전에, 더불어 사는 이웃에 내가 한 행동이어떤 영향을 미칠까라는, 예를 들면, 밤에 교통이 한적한곳에서 정지신호를 당연히 준수해야만 되는 생활자세,  주위를 쳐다볼 필요없이 양심적으로지켜지는 자세 같은 기본틀들이  정착되여 있는 속에서 경제적 정신적 내실을 하나하나 착실히 더해 간다면, 그때가 진정한  선의의 경쟁자로서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루는 동반자가 될것이다.  Show off해서 얻어지는 내실은 하나도 없다. 세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캐나다의 GNP는 고국의 2배 이상 높다.  그러나 국민들의 생활자세를 보면 확연히 표가 난다.  요즘은 전세계가 불경기속에서 헤매인다.  휴일, 또는 연휴때 인천공항, 김포공항등은 여행객들로 북새통이다.  이곳 서민들의 휴일과는  정말로 대조적이다.  잘 발달된 고속도로를 달리는것 조차 개스Gas)비를 생각하면서 절제된 생활을 한다.  물론 개스비도 이곳이 훨씬 싸다.  무엇을 의미 하는가?   소모적인 겉치레 보다는 오랜 기간동안  선대로 부터 보고 듣고 배운, 그래서 잘 훈련된 의식수준이 그렇게 스스로 절제된 생활을 하게 하는것이라고 본다.








Tuesday, October 01, 2013

가장 오래된 Kingston Penitentiary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죄수들을 가두어 교화 시키는 감옥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경범죄나 잡범들을 가두어 두는 감옥소, 살인범, 강간범등 악질적인 죄수들을 격리수용하는, 담장의 높이가 10미터가 넘는 으시으시한 철옹성의 감옥이 있다.

캐나다에도 여러곳에 감옥이 있지만, Kingston,Ontario에 있는 킹스턴 감옥은 죄질이 아주 나쁜 범법자들만 수용하는 곳으로 정평이 나있고, 또한 감옥의 역사도 무척 길다.
킹스턴 감옥은 온타리오 호수의 물이 흘러나가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St.Lawrence River초입의 호수가옆에 자리하고 있다.  밖에서 보아도 Watch Tower가 철조망에 둘러 쌓인채 기분이 으시시 해진다.

킹스턴 감옥은 악명높은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그명성에 걸맞게 많은 관광객들의 관광 코스가되기도 한다.  물론 감옥소 안을 구경하는것은 아니고 밖에서 관광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눈으로 높이 둘러싼 담장안이 세상과 격리된 범죄자들만의 세상이 그곳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몇년전 한번은 감옥의 정문이 개방되여 일반 관광객들이 들어가는 기회가 주어져 나도 그대열에 섰었던 일이 있다.  한감옥빌딩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그속에 나도 무심코 서서 차례가 되면 건물안 감옥을 구경할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서 였다.  드디어 내차례가 되여 담당자앞에 섰는데, 듣기에 생소한 질문을 하기에 재차 물었더니, 죄수들에게 점심을 나누어 주고 있는데, 네가 죄수냐?라고 묻기에 깜짝 놀라, 구경온 일반인이라 했더니, 퉁명스럽게 해당 안된다는 몸짖을 하면서 어이없어 했었던 기억이 난다.  킹스턴 감옥은 어느때가 되면 정문을 개방 하여 일반인들에게 내부를 보여주는 행사(?)가 있어온 것임을 그때부터 알게 됐었다.

킹스턴 감옥은 1835년도 부터 죄수들을 격리수용하기 시작했었단다.  당시에 수용된 죄수들은 서로 대화도 할수 없었고, 또한 서로 응시하는 눈짖도  허용되지 않았기에 무척 조용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감옥소가  이번 9월30일을 마지막으로 178년동안의 영욕을  뒤로 하고 영원히 문을 닫는다고 한다.

폐쇠의 근본적인 이유는 연방정부의 예산 절감정책에 따른 조치라고 한다.  악명높은 죄수들을 감시하는 비용이 무척 많이 들어가는 모양이다.  현재 이곳 감옥에는 악명높은, 지금도 상당수의 사람들 기억속에 남아 있는, 중범죄자들이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들중에는 십대여학생 수십명을 강간하고, 또 살해한 Paul Bernardo, 캐나다에서 가장큰 군보급창 역활을 했던, Trenton공군기지 8th Wing단장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부하 여군을 강간하고 살해한 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Russell Williams, 그리고 강간범, 강도범,살해범등 악명높은 죄수들이 수용되여 있었다.  범죄자들이 줄어들어 폐쇠 한다면 더 기쁜 소식이 될수 있을텐데..... 다른곳 어디엔가  많은 비용을 들여 새로 지은곳으로 옮기는것 같다.

감옥의 폐쇠를 앞두고 Toronto Star가 역사적 현장을 취재 한 내용중 한가지를 간추려 본다.

1923년도 있었던 강도범 Norman Ryan은 아침에 운동을 하기위해 같이 모인 죄수들과 모의 하여 탈옥을 하기위해 불을 지르고, 연기가 자욱한 속에서 동료죄수들과는 반대로 혼자 높은 담을 넘어 탈출을 하고 만다.

다음날 공교롭게도 Toronto Star는 신참내기 기자인 Ernest Hemingway를 기차를 태워 킹스턴으로 취재를 보내는데, 그로서는 첫번째 기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2,600자의 기사 송고에서 "감옥에서 쓰고 다니는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지만 얼굴에 진하게 큰 반점이 있는 그는 쉽게 알아볼수 있는 인상"이라고 그를 묘사했었다고 한다.

탈출에 성공한 Ryan은 Toronto Bank에서 현금탈취를 한후 미국으로 도망하여 그곳에서 거주 했었다.  약 일년을 도망자 신세로 Minneapolis에 거주하면서 우체국에서 우편물을 확인하던중 다시 검거되여 캐나다로 이첩되여 다시 킹스턴 감옥에서 종신형을 복역하면서, 이번에는 마음을 바꾸어 모범수로 수감생활을해  신문에도 보도되곤 했었다.  당시의 캐나다 수상 Bennett가 감옥으로 그를 방문하여 그와같이 의젖하게 외출을 하게됨을 틈타 다시 도망친것이다.  이사건이 터진후 수상은 1934년 정치인들과의 meeting에서 "이친구를 보면서 많은 감명을 받았었다"라고 기술하기까지 했었다.


1936년 5월 23일, 그는 변장을 하고 이중생활을 하면서 도망다니다 Sarnia에서 경찰과의 총격전에서  그는 사살되고 경찰관도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때의 Toronto Star기사의 헤드라인은 " Ryan, 어리석고 냉혈한인 그는 결국 두려움에 떨다가 죽음을 맞았다"라고.

죄값을 치르면서도 반성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나쁜쪽으로만 머리를 돌리다 결국 생을 마감한 어리석은 죄수들의 기록을 보면서, 순간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 구만리같은 삶을 3평자리 방에서 보내고 있는 자들을 생각해 본다.  Paul Bernardo 그는 잘나가는 회계사 였었고, Russell Williams 대령은 사관학교 동기생들 중에서 선두주자 였었다.



178년전의 일을 우리가 마치 어제 일어난 사건처럼 읽고 느낄수 있는것은 기록을 잘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일개 죄인들에 대한 기록까지도 꼼꼼히 남겨 놓아 후손들에게 전수 시키는데,  지금 조국대한민국에서는 "한국사" 교과서 검증을 놓고 이념논쟁으로 역사를 마치 한 개인의 손익을 계산한 주장데로 끌고 가려는 어리석은 자들을 보면서 혈압이 오르는 기분이다.


Kingston Penitentiary’s storied history full of notorious inmates, riots, escapes

The maximum security institution closes its doors for good Monday, ending its 178-year run as home to Canada’s worst crimin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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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mates getting ready for a Sunday baseball game in the exercise yard in August 1954 used cigarette lighters to set buildings on fire, beginning a riot that lasted only two hours but caused extensive damage to the penitentiary.
/ TORONTO STAR FILE PHOTO
Inmates getting ready for a Sunday baseball game in the exercise yard in August 1954 used cigarette lighters to set buildings on fire, beginning a riot that lasted only two hours but caused extensive damage to the penitentiary.

When the Kingston Penitentiary first opened its doors in 1835, inmates were not allowed to speak, nod or even glance at each other.
It must have been quiet, then, within the prison’s ominous limestone confines. It is difficult to imagine that early silence, given the chaotic episodes that would follow.
A new hush falls over the 178-year-old institution this week as the pen ends its storied run as home to Canada’s most notorious criminals.
The federal government is shutting down the maximum-security facility as a cost-saving measure. Paul Bernardo, Russell Williams and the lesser-known among the still-living killers, rapists and burglars will serve their sentences else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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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longer a prison, the lakeside compound will sit idle for awhile as the government sorts out what to do with it. A tourist attraction à la Alcatraz — the decommissioned prison in San Francisco Bay — seems a good bet, given the high demand for tickets to a series of sold-out penitentiary tours set to run in October as a fundraiser for the United Way.
Those who enter the pen will wander the site of daring escapes, brutal beatings and savage riots.
“If walls could talk,” historian J. A. Edmison wrote in 1954, “we would indeed have a story of drama, of tragedy, of cruelty, of every vicissitude of human emotion. We would have a story of people who have been forever crushed in that penal environment and others who have found themselves in it.”
Empty of prisoners, yes, but the pen’s stories remain embedded in its foundation — those that have come to light, and many more that never will. As the prison closes, the Toronto Star delved into newspaper archives to bring you some of the most riveting tales of escape and revolt.
Great Escapes
Norman “Red” Ryan
One morning in September 1923, a few scheming prisoners lit a fire in the exercise yard to create a diversion. As smoke billowed across the grounds, they leaned a makeshift ladder against the wall and began to climb 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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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Ryan, a 28-year-old burglar, stood watch with a pitchfork as four accomplices made it to the other side. When a guard attempted to thwart the escape, Ryan impaled him and took off.
The following day, a novice Toronto Daily Star reporter, his first day on the job, was sent by train to Kingston. His name was Ernest Hemingway. In his 2,600-word report, Hemingway described Ryan as a “thick, freckle-faced man whose prison cap could not hide his flaming head.”
After the escape, Ryan robbed a Toronto bank and then made off to the United States, where was dubbed the “Jesse James of Canada.” After nearly a year on the lam, he was caught while picking up his mail at a post office in Minneapolis and sent back to Kingston to face 30 lashes and life in prison.
Changing gears, Ryan became a model prisoner — “Famous Bandit Proves Tender Nurse in Prison,” read one headline — and escaped Kingston again, this time by convincing Prime Minister R.B. Bennett to visit him in prison, then charming his way out.
“I was greatly impressed,” the politician later wrote of their 1934 meeting.
Freed the following year on Canada’s ticket-of-leave system, a precursor to parole, Ryan became the poster boy for prison reform.Hehosted a radio show, wrote a series of crime-doesn’t-pay articles for the Star and counted among his friends and acquaintances an archbishop, a senator and a top officer of the Salvation Army.
Meanwhile, however, Ryan was robbing banks in disguise.
On May 23, 1936, his double life caught up with him. Ryan, an accomplice and a police officer were killed in a gunfight during a holdup at a liquor store in Sarnia. The headline that ran with a Star story was unforgiving: “Ryan, Stupid, Callous, Goes to his Death Bungler and Coward.”
Tyrone “Ty” Conn
Just after lunch on May 6, 1999, a bank robber stuffed a dummy in his prison cell bed and went off to work at the pen’s canvas repair shop. On his calendar, Ty Conn had written “fishing trip 99.”
When the other canvas workers returned to their cells later that day, the 32-year-old hid under a pile of Canada Post mailbags and waited. Sometime in the evening, he assembled his tools: a ladder with a homemade extension, a steel hook and a 12-metre strip of canvas he would use as a rope.
It was after 11 p.m. when Conn broke through a locked screen door in the canvas shop’s loading bay and made a dash through the exercise yard to the wall. He had waited until the southeast tower guard went off duty, choosing a route guards in the other three towers couldn’t see. Conn sprinkled cayenne pepper along his path to mask his scent from the dogs. He went unnoticed on the security cameras and climbed easily over the 10-metre wall.
He made it to his mother’s apartment in Belleville, 75 kilometres away, before anyone even realized he was missing. It was 7:30 a.m. by the time a corrections employee noticed a rope hanging over the wall and sounded the alarm. It was the first successful escape in four decades.
Conn, who had robbed his first bank at age 16, was serving 37 years for a string of armed burglaries and property offences, as well as two previous escapes from other prisons. He was on Kingston’s list of prisoners most likely to make a run for it. “I’m beginning to think he has one motive in life, and that’s to escape from prison,” John Oddie, assistant warden at the time, said after the breakout.
The escape was instantly romanticized. The story dominated radio and television broadcasts and was splashed all over the front pages of newspapers for weeks. Many people felt bad for Conn, who had a terrible upbringing.
“Come on, be honest,” an editorial in the Kingston Whig-Standard began. “Part of you is cheering for Tyrone Conn.”
The convict was on the run for nearly two weeks before police tracked him down in the basement apartment of a home on Alberta Ave. in Toronto. He was on a cellphone speaking with a CBC producer when a gunshot rang out from the apartment and the line went dead. Whether by accident or on purpose, the escape artist killed himself.
Riots
Oct. 17, 1932
The first major riot in the prison’s history lasted six days, and came the year afterTim Buck, general secretary of the Communist Party of Canada, landed at the penitentiary on a conviction of “communist agitation.”
Naturally, early reports suggested Buck was to blame for the riots, and questioned whether a “communist uprising” was taking place. Turned out the problem was the cigarettes.
“Standing above every other grievance,” Arthur C. Carty wrote for the newspaper on Oct. 22, “is the question of cigarette papers, and the endless round of troubles growing out of forbidden uses of tobacco.”
Other concerns raised by inmates included favouritism or “small fry” treatment, a feeling of “dishonesty in high places” and the brutality of certain prison guards, Carty noted in his report.
Several shots were fired into the communist leader’s cell during the disturbance, but the government denied there was an assassination attempt against Buck.
The riot ended without casualties and led to calls for prison reform. Two decades would pass before the next major disturbance.
Aug. 15, 1954
Inmates were getting ready for a Sunday baseball game in the exercise yard when a group of them charged at the prison guards and used cigarette lighters to set buildings on fire, according to a front-page report in the Star.
“Penitentiary is smouldering ruin,” read the headline. “Blame hundred hard psychopaths.”
It lasted only two hours, but caused extensive damage and panic. One guard, held hostage in the blacksmith shop, managed to escape by dressing in prisoner’s garb and mingling with the inmates. With flames visible from the downtown market square, worried wives of prison guards gathered in the street outside the penitentiary. In an attempt to calm things down, warden Walter Johnstone mounted the wall and stood facing the street, a cloud of dark smoke hanging in the air around him.
“Don’t worry,” he shouted above the roar of the flames, “your husbands are safe!”
The army and RCMP were called in to help quell the uprising, which involved 900 inmates. There were no casualties, but the estimated cost of damages at the time was $2 million.
April 14, 1971
For four days, inmates held six guards hostage and went to work destroying most of the cellblocks. The army was called in to help restore control. It was the most brutal, by far, of the three riots.
On the final night, 14 prisoners considered “undesirables” — mostly sex offenders — were tied to chairs in the centre of the dome, a circular hall linking the prison’s four main wings. The area had been turned into something like a “Roman circus,” a coroner who interviewed victims told the Star. The “undesirables” were covered in bed sheets and beaten with metal bars while hundreds watched over the rails from each of the prison’s four levels.
As mock charges were read for each man, some spectators shouted, “Kill him! Kill him! Castrate him!”
When the inmates surrendered the next morning, police were warned there could be up to 15 bodies, and extra coroners were called in from Toronto. In the end, only two prisoners died and all six guards escaped unharmed. A prisoner named Barrie MacKenzie was credited with risking his life for the release of the guards.
Inmates were granted no concessions, but an inquiry into the cause of the violent uprising ultimately led to them having some concerns remedied. It was, and will now remain, the penitentiary’s last riot.
With files from Toronto Star archives and The Canadian Press

Other notorious inmates
Roger “Mad Dog” Caron
During his 24 years behind bars, Caron is said to have made more escapes than any other convict in Canada. The bank-robbing author’s 1978 prison memoir, Go-Boy! Memories of a Life Behind Bars, was published the year he was paroled. He wrote three more books and was later rearrested on further robbery charges. In 2005, he was acquitted on five counts, including one accusation that he burgled a Loblaws, which Caron considered a slight to his reputation. He died April 11, 2012.
Clifford Olson
The British Columbia serial killer pleaded guilty in 1982 to first-degree murder in the slayings of 11 children and teens. He was later transferred from a Vancouver correctional centre to Kingston, where he spent years in isolation. Olson died of cancer two years ago in a Quebec prison. He was 71.
Wayne Boden
Known as the “vampire rapist,” Boden sexually assaulted and murdered four women in Montreal and Calgary between 1969 and 1971, leaving bite marks on his victims’ breasts. The serial killer died of acute skin cancer at Kingston in 2004.
Michael Briere
Briere is serving a life sentence for the 2003 murder of Toronto’s Holly Jones, a 10-year-old girl he abducted, strangled, sexually assaulted and dismembered. The killer was taken to Kingston after pleading guilty to the crime in 2004.
Paul Bernardo
From the late 1980s to the early 90s, Bernardo raped more than a dozen young women, most of them in Scarborough. In 1995, the schoolgirl killer and serial rapist was convicted in the kidnapping, rape and murder of Kristen French, 15, and Leslie Mahaffy, 14. His wife, Karla Homolka, served a 12-year term for manslaughter. Bernardo was sentenced to life and locked up in a Kingston pen cell the size of a walk-in closet.
Russell Williams
The former commander of CFB Trenton, an air force colonel, pleaded guilty in 2010 to the sexual slayings of Marie-France Comeau, 37, and Jessica Lloyd, 27, as well as a series of other sexual assaults and fetish burglaries. He and Bernardo were both held in a segregated section at Kingston, away from the other inmates.
Source: Toronto Star archives, Toronto Star library with files from The Canadian Press

Kim's regime의 Trick에 놀아난 이산가족 상봉연기 통보(21/09/2013)

이산가족 상봉이 있을 것이라는 뉴스가 나왔을때, 나는 이를 전적으로 믿지도 않았었고, 또 진행된다 해도  과거에 해왔던것 처럼 맛보기식으로 겨우 몇명정도만 허락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우려가 현실로 내눈앞에 벌어지고 말았다.

김정은이 마누라 이설주의 포르노 동영상에 관련된 소문이 퍼지는것이 두려워 관련됐던 9명의 동료들을 총살 시켜 이세상을 하직하게 만들었다는 뉴스는 충격이다.  그래도 남한정부나 정치꾼들 그리고 언론은 한마디 비난없고, 그대로 보도만 했었다.  야당 정치꾼들은 툭하면 인권이요, 민주주의를 그렇게도 외쳐 대지만, 신기할 정도로 북괴의 만행에 대해서는 꿀먹은 벙어리이다. 인권도, 민주주의도 그들에 대해서는 2중 잣대를 적용하는 Farce노릇, 이제는 국민들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다는것을 알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설주가 아직 김정은이의 처가 되기전, 그녀가 행한 행동은 분명히 먹고 살기위한 수단과 Regime에게 충실한 개가 되기위한 충성심이 관련이 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녀의 예술적 연기를 보고 마음에 들어 마누라로 들어앉힌 것은, 그녀가 김정은이를 사랑해서라기 보다는 젊은 김이 그녀를 보고 마음에 들어 하면서 내마누라로 삼아야겠다는 통보를 했을때, "NO"라고 했으면 어쩜 그녀는 벌써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살아남기위해 "Yes"라고 대답을 하고 지금 First Lady가 된것일것이다.
그녀가 공연배우가 아니였었다면 아까운 9명의 젊은 생명은 건재해 있었을 것이다.  김일성이  남침을 감행하지 않았었더라면 지금처럼 가슴이 미어지는 이산가족의 고통도 또한 없었을 것이라는 가정과 맥을 같이 한다고 이해된다.

지난60여년전에  쏘련의 동조하에  김일성 Regime은 일요일날 고요히 편히쉬고 있는 남한의 동족을 향해 선전포고도 없이 남침을 감행하여 한반도를 잿더미로 만들어 놓는 참혹한 살육을 3년간 했으나, 그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Armistice를 하면서, 38선을 가운데 두고 한반도는 두동강이 난채 오늘에 이르렀다.

이전쟁으로 수천만의 이산가족을 만들어 냈었다.  이제는 세월의 흐름에 많은 실향민, 이산가족들이 가족의 생존여부도 모른채 세상을 떠난 숫자가 수백만에 달하는 긴 시간이 흘렀건만, 아직까지도 이북의 김정은 Regime은  기회가 포착되면 생색내는식으로 겨우 몇백명만 상봉을 허락하는 Conspiracy를 계속하고 있다.  김정은 Regime이 이산가족의 아픔과 고통을 절대로 이해 할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누라가 포르노 영화 연기자였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고통이 심할 것이다.  그고통을 못이겨 파리채로 파리를 잡듯, 간단하게 관련된 9명을 처형시킨것이다. 혈육의 생존 여부를 몰라 고통받는것과 자기 마누라의 과거 행적을 비교해 보았을때, 어느쪽이 고통이 더 심할까?   김씨왕조는 모든것을 자기네 위주로 재단을 지난 60여년동안 해왔기에 9명의 목숨을 한마디 이유도 안들어보고 끊어 버렸고,  한마디 협의도 없이 이산가족 상봉을 무산시켜버린것이었기에 이제 더이상은 이런 형태로 끌려다니는 Trick을 용인하는것은 안된다고 믿는다.

조국 대한민국정부는 김일성, 김정일,김정은 Regime에 애걸하듯, 이산가족 상봉 제의가 와서 그들이 이산가족상봉숫자를 무우 자르듯  자기네 마음데로 제단하여 겨우200-300여명으로 허락하면, 마치 큰 성과라도 거둔것 처럼 할지언정,  더많은 이산가족들이 상봉할수 있도록 수정 제의한번 못하고 받아 들이곤 하면서 당당히 맛서지를 못해온 그저의가 무엇인지 나는 지금도 이해를 못한다.

그나마 이번에는 추석을 전후해서 이산가족 상봉을, 그것도 적진인 금강산에서 하기로 제의한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잘 진척되는것으로 모두가 기대하고 있었으나, 상봉4일을 앞두고 김정은 Regime은 또 "Unidentified conservatives"들의 최고존엄에 대한 모독을 이유로 들어 무기한 연기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 버리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또 저지르고 말았다 한다.   이들집단에게는 이성과 상식은 사치에 불과한 단어일뿐이다.

김정은 Regime은 대한민국 정부를 항상 "괴뢰도당"이라는 깡패들도 잘 쓰지 않은 언어구사를 거침없이 해대고 있지만,  남측의 언론은  항상 "김정은 위원장"으로 표현한다.  어째서 일까?  내가 어렸을적 초등학교에 다닐때 사용했던 "사회생활" 교과서에는 이북의 김일성 Regime에 대한 표현은 "북한괴뢰도당"이었었다.  쉽게 얘기해서  맏받아치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으로 대응해 주었었다.  그때는 남한이 경제적으로도 열세 였었는데도 반공에 대한 의지만은 절대적이어서 당당했었다.  어찌하여 지금은 북괴의 김정은 Regime보다 약 40배나 잘살고 있는데도, 처신은 40배 이상으로 비굴하게, 마치 상전모시듯 살아가는 조국 대한민국이 되였는가.

다시 이산가족상봉에 대한 협상이 있다해도, 이제는 숫자에 제한을 두지 말고, 북쪽으로 건너가든, 아니면 남쪽으로 건너오든(물론 김정일 Regime이 허락할리 없지만), 원하는 사람은 모두가 만날수 있도록 해주는 조건으로 협상에 임해야 한다.  그것도 같이 지낼수있는 날자에 제한을 두지 말고 말이다.

김정은 Regime은 마약 환자와 같은 존재들이다.  마약기운이 떨어지면  미치광이가 되여 마약을 획득할려고  갖은 못된짖을 해서 목숨을 연명하는 중독자들 처럼, 그들은 그들의 체제를 유지하기위해 마약기운이 필요하면 이번 이산가족상봉과 같은 Trick으로 대한민국정부로 부터 마약을 받아 연명해온지가 벌써 4반세기가 넘어간다.  마약을 하는자도 나쁘지만, 근본 치료책을 처방해주지않고, 협박과 난동을 피하기위해 대신 이를 보급하는자는 더 나쁘다.  이것이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부, 즉 남한측이 해온 행동이다.  이는 이산가족들을 보살피는것이라기 보다는 그들에게 더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는점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반성해야 한다.

서방 언론은 김정은Regime이 보낸 뉴스를 그대로 번역하여 보도한다.  그들이 아무리 연구하고 공평하게 보도를 한다해도, 당사자인 우리만큼 내용의 정확성과 아픔을 마음깊이 느낄수 있을까?  절대 아니다.  남북간의 두정부와 이산가족상봉에 대한 역사적 흐름과 관점을 잘 모르는 서방사람들이 서방세계의 뉴스를 접하면서,  이산가족 상봉 무기연기에 대한 뉴스내용을 봤을때는  어쩌면 남한 정부를 비난할 소지가 많은것 같다.  더이상 이산가족 상봉 문제로 세계의 뉴스거리를 만드는것도 바라지 않지만 Farce취급받는것도 챙피한줄 알아야 한다.   꿈속에서마져도 그리워하며 흩어졌던 혈육 상봉의 꿈을 펼쳐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실  어르신네들,  편안히 제대로 눈을 감을수 있었을까?





http://news.donga.com/Main/3/all/20130921/57741579/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9/21/2013092102301.html?news_Head1

http://www.nytimes.com/2013/09/21/world/asia/north-korea-postpones-family-reunion-program.html?ref=asia

http://www.youtube.com/watch?v=ZPE7QPWiOx4

http://www.cnn.com/2013/09/21/world/asia/korea-family-reunions-cancel/index.html?hpt=hp_t2

http://www.cnn.com/video/data/2.0/video/world/2013/09/30/north-korea-failed-escape-hancocks-pkg.cnn.html



N Korea postpones family reunions over South's 'hostility'

File photo (1 November 2010) shows North Koreans (on bus) waving to their South Korean relatives as they bid farewell following their three-day separated family reunion meeting at the Mount Kumgang resort on the North's south-eastern coastFamily reunions are usually highly emotional affairs enjoyed by only a few hundred participants each time
North Korea is indefinitely postponing scheduled reunions of families separated by the Korean War, a government statement has said.
The statement did not provide details other than accusing unidentified conservatives in South Korea of "hostility" towards Pyongyang.
North Korea regularly makes such claims about the South.
The postponement is an apparent setback after weeks of gradually improving ties between the two countries.
The South Korean government has not yet responded to the announcement.
Relations reached a low point earlier this year when the North cut a military hotline to the South in March. That followed its third nuclear test in February, which triggered international sanctions.
'Hostility and abuse'
The two Koreas were due to hold six days of family reunions from 25-30 September for people separated by the 1950-53 Korean War, following which millions of people were separated from their families by the dividing of the peninsula.
North Korean refugees and their family members wait to pay their respects to their ancestors in North Korea during a ceremony to mark the Korean version of Thanksgiving Day, at the Imjingak Pavilion, near the demilitarized zone of Panmunjom, in Paju, South Korea, Thursday 19 September, 2013. Millions of Korean families were separated during the 1950-53 war
But the North's Committee for the Peaceful Reunification of Korea was quoted as saying: "We postpone the impending reunions of separated families until a normal atmosphere is created for talks and negotiations to be able to move forward."
"As long as the South's conservatives deal [with] inter-Korean relations [with] hostility and abuse... such a basic humanitarian issue as family reunions cannot be resolved."
Correspondents say the reunions would have been a highly symbolic event and would have been the first in three years for families separated by the war.
The reunion programme was suspended after the North's shelling of a South Korean border island in November 2010.
It is estimated that there are about 72,000 South Koreans - nearly half of them aged over 80 - on the waiting list for a chance to join the family reunion events.
But only a few hundred participants are selected each time. Most do not know whether their relatives are still alive, because the two countries prevent their citizens from exchanging mail, phone calls and emails.
The reunions are often tearful and emotional occasions, correspondents say, in which North and South Koreans usually meet in the North for two or three days before the South Koreans head home again.
The reunion programme began in 2000 and sporadic events since then have seen about 17,000 relatives briefly reuni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