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uly 23, 2018

Riverside Cedar Campground Camping and Upper Canada Village,St Lawrence River 뱃길 탐방.(July 18-20,2018)






기회는 우연히 찾아온다는것을 오늘 캠핑 떠나면서 다시한번 느꼈었다.  생각지도 않았었는데, 평소 자주 Fellowship을 나누는 Mr. Park(미시사가거주)하는 친구 부부가, 우리가 시골에 있다는것을 알고, 이곳으로 달려와서 하룻밤 정담을 나누다 되돌아 갈려는 단순한 생각으로 이곳을 온것이다.
얘기 끝에 Upper Canada Village 가 화제로 올랐었는데, 어부인들께서 의기투합하여 온길에 그곳까지 가서 자연을 즐기자는 의견에 이르렀었다. 캠핑하면서 자연구경하고 외식도하고...

웬일이었는지, 토론토에 있었던 Tent와 캠핑장비를 이번에 이곳으로 다 옮겼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만은 아니었고, 넓은 이곳에 보관 할려는 뜻에서 였다.

뒷집 Gene and Barb에 마실갔다가 그얘기를 했더니, 자기네 Sleeping bags, Air mattress가 있다고 사용하라고 권해줘서, 모든장비는아주 훌륭히 갖추어져진 셈이었다.

Upper Canada Village를 visiting 하기위해, 어렴푸시 알고있는 Information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웹싸이트를 찾았는데,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캠핑장이 먼저 웹에 떠올랐었다. 혹시 Upper Canada Village안에 캠핑장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접지 못하고 찾았는데, Riverside Cedar Campingground가 떠오르고  전화번호까지 자세히 나와 있었다.

우선 전화를 해서 주변 사항을 알아보는게 좋을것 같아, 다이알을 돌렸는데,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를 Jennifer라고 소개한 그녀는 내가 개략적으로 문의 한것에 대해 자세히 Upper Canada Village에 대한 설명과 찾아오늘길을 포함함 입장료, 그리고 역사적 소개까지 자세히 해주기에, Senior Camping fee/night 가 27.45달러( Adult는 41달러)에 2 Night여서 Booking을 할려고 하는데, 그녀의 대답이 전화로 예약을 하면 Service Fee가 $13달러 부과된다는 설명에, 멈칫하자 그녀가 다시 친절하게

“그러면 예약하지 말고 그냥오시요. Campsite가 많이 남아 있으니까 걱정할것없다. 그리고 예약비를 면제 받으시요”
“아 그래요. 그럼 그말믿고 그냥 가서 정문에서 Register하겠습니다”라고.

Brighton Summer Residence에서 아침 10:30분경에 , 미시사가에서 방문한 친지, Mr. Park부부와 함께 차한대에 필요한 모든것 싣고 출발했었다. Waze를 이용하여 거리를 확인했더니 약 270킬로, 시간은 약 2시간 40분정도 필요한것으로 알려줬다.

가는길에 혼선이 약간 있어서 예정된 시간보다 약 30여분 늦게 도착하여, 등록하면서, Upper Canada Village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입수했다.




날씨는 무척 더워 32도를 가리키는 불볕더위속에서 우선 잠자리를 만들어야 했기에 텐트를 치기 시작했는데, 가지고간 2개의 텐트중에서 한개는 6인용으로 처음 Installation하는거라서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소요했고 우리 부부가 사용할 텐트는 2인용으로, 지난달 말에 Pinery Provincial Park에서 등산대원들과 함께 켐핑하면서 사용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한결 쉬웠었다. Air Mattress는 준비해간 Air Pump를 이용하여 별로 어렵지 않게 Inflate할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2일밤 지낼 보금자리는 완성된것이다. 캠핑장은 숲이 아닌 허허벌판에 조성되여 있었기에 땡볕을 맞으며 땀이 비오듯하여 Installation이 끝나자 마자 바로 Shower장으로 달려가야만 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이제 준비해간 음식을 펼쳐놓고,약간늦은 점심을 즐겼다. 나무그늘밑에서 정다운  친지부부와 같이 살아온 얘기들을 나누면서 나누는 점심맛은, 이런 경험을  해본 사람들만이 느낄수 있는 깊은맛의 표현을 다 할길이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차를 몰아 Camping Office에서 알려준데로 약 5분정도 동쪽(Quebec주)으로 County Rd 2를 달렸더니 Upper Canada Village 가 보였다.  파킹장까지 둘러 본후 내일 정식으로 방문해서 역사적 탐방을 할생각을 굳이고 나와 다시 차를 동쪽으로 몰아 약 20분 달렸더니, 그유명한 St. Lawrence River Park의 하이라이트인 11개의 섬들을 관통하는 공원 Parkway가 나왔다. 입구쪽인 Ingleside로 들어가서 약 11킬로를 달려 Long Sault로 빠져 다시 Country Rd 2로 연결되는 Route였다. 규모의 웅장함에는 탄성을 지를만 했지만, 아기자기한 맛은 좀 덜한것 같았다.

이섬들의 오른쪽으로는 그유명한 St. Lawrence River의 뱃길이 통과하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섬들에는 많은 Campsite가 조성되여 있어, 여름철에는 많은 캠핑객들이 이곳을 즐겨 찾는 곳이라는것을 터득하게됐다. 물론 우리가 지낼 Riverside Cedar 캠핑장도 큰 campsite중의 하나지만, Upper Canada Village를 방문할 목적으로 온 사람들에게는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캠핑을 목적으로 이곳을 찾는다면, 지금 우리일행이 통과한 이곳 St. Lawrence River의 뱃길에 접해있는 캠핑장이 훨씬 더 좋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린 Upper Canada Village방문목적이 있었기에 제갈곳을 제대로 찾아 간것으로 이해됐다.

우리가 묶는 캠핑장과 이곳 11개의 섬에 있는 캠핑장을 비롯한 이지역을 Upper Canada로 지역 사람들이 부르고 있으며, Upper Canada Village는 이지역에 있는 여러 탐방 지역중의 하나인것을 알게됐고, 이곳은 1820년대의, 영국 식민지였을때, 이지역 사람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재연해서 관광객들에게 당시의 생활상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곳임을 이해하게됐었다.




저녁노을이 물들때에 우리가 묶고 있는 캠핑장앞의 St. Lawrence River로 커다란 화물선이 통과 하는 장면이 무척이나 웅장해 보였었고 몇년전 St.Catherine에 있는 Welland Canal 탐방시 봤었던 커다란 화물선을 연상케 해주었었다.
강변으로 산책을 하는데 Dead Fish냄새가 고약하게 코를 찌른다. 마침 옆에 자전거를 타고 산책하는 노부부를 만나서 잠시 대화를 했는데, drought때문에 강물이 줄어 많은 고기를 들이 죽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해준다.

그들 부부는 Ottawa에서 왔는데, 이곳을 여러번 방문했었다고 하면서, 이곳에서 캠핑하는것을 너무도 좋아 한다고 자랑이다. 우린 토론토에서 왔노라고 인사를 해주었다. 같이 사진이라도 한장 찰칵했어야 했는데….


여기 보이는 입구 간판은 Upper Canada Campingsite로 Upper Canada Village와는 완전 다른 곳이다. 지나면서 한컷 해본 사진이다.

Upper Canada Region에 있는 11개의 섬을 이어주는 Parkway를 다 돌고, 돼돌아서 식탁에둘러 앉아 저녁식사를 즐기면서 내일시작될  Upper Canada Village 탐방에 대한 기대와 자료를 통해 얻은 이지역의 형성역사를 Review하기도했다.

우리가 캠핑하는 Site는 Senior들 전용으로 한구간을 설정해 놓은 곳으로 무척 조용했는데 아직 주중이라서 한가하게 캠프싸이트가 많이 비어 있었지만, 그내용은 잘 알수 없었다.  허허벌판에 조성된 곳이라서 Presqui’le Provincial Park에서 처럼 빽빽한 Campground가 Forest로 둘러 싸여 있을것으로 상상했던 나의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은 셈이다. 하늘에는 어느새 별들이 뚜렷히 자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누가, 편안하고 시원한 집을 놔두고 이런 고생(?)을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해줄말은 없다. 그러나 나의 Family Doctor가 농담으로 해준 얘기한마디가 기억난다.
“ 집있는것들이 꼭 집나와서 텐트 치면서 사고를 치곤 합니다”라고 한말이다.  이말을 하게된 이유가 있었다.  지난 6월말경에 Pinery Provincial Park에 산행대원들과 캠핑 갔었을때, Lunar가 밤에 대원들 아침 식사준비하느라 왔다갔다 하면서, 쳐놓은 텐트줄에 걸려 넘어졌었는데, 그후 집에와서 어깨에 통증이 있어, 주치의를 방문했더니 그런 농담을 했었던 것이다.  

Camp fire는 아무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주위는 더 조용하기만 하다. 벌써 약 한달째 비가 오지 않아 남부 온타리오지역에 Fire Ban in Effect라는 경고를 내보냈기 때문이다.  이곳에도 해당되여 그점이 무척 아쉽다. 캠핑은 Camp Fire즐기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간혹 주위의 친지들은, 지금 이나이에 캠핑이라니… 주책 부리지 말고 편안히 호텔 아니면 모텔에서 지내고 구경하기 하라고 성화지만, 아직까지는 몸의 컨디션이 허락해 주어, 야외에서 즐길수 있다는 이축복에 감사한 마음이다.

식사후 우리 Camping Site 앞으로  흐르는 St. Lawrence River의 뱃길뚝을 따라 Stroll했다.  커다란 Heron 한마리가 먹이감을  찾다가  우리가  가까이 오는것을 보고 날개를 활짝펴고 사라져 버리는 아쉬움을 남겨주었다. 왜 우리인간들을 보면 이들은  도망치는 것일까?  서식은 우리 인간들이  거주하는 지역근처를 맴돌면서....




산처럼 커다란 Freight ship이 Atlantic Ocean으로 향하면서, 이곳 우리 캠프장 앞의 St. Lawrence River의 뱃길을 헤치고 서서히, 급할것도 없이 유유자적이다.  이엄청난 쇳조각 이어부침이 물위에 떠서, 그것도 수만톤의 화물을 적재하고.... 그앞의 방파제에서는 Waterfowls가 군무를 추고 있고...평화롭다.



둘째날( July 19, 2018 ) Upper Canada Village Visiting



St. Lawrence River 뱃길옆에는 11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약 11킬로 길이로 펼쳐져 있고, 그사이를 Parkway가 연결시켜주고 있었고, 각섬들에는 크고 작은 CampGround들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Upper Canada Village까지는 차로 약 20분 정도 서쪽으로 가야한다. 캠퍼들이 주로 이들 섬중의 하나에서 캠핑을 하고, 우리처럼 Upper Canada Village 탐방을 주목적으로 하는 Traveller들은 가까운곳에서 캠핑을 한다.

커다란 “Upper Canada Village” 안내판을 옆으로 끼고 들어섰는데, 앞광장이 원형으로 길이 나 있고, 안쪽 맨끝쪽 위 언덕에는 그옛날 이곳에 있었던 “ Crysler’s Farm”에서 영국식민지로 이곳에서 농사짖고 있던 농부들과 남쪽의 American들 사이에 있었던 전쟁을 추모하는 높다란 기념비와 그양쪽으로는 커다란 대포가 St. Lawrence River를 향해 진열되여 있는 모습에서 그옛날 조상들의 살아남기위한 전투를 연상할수 있었다.


주차장에 Parking하고, 두장의 ticket을 구입하기위해 Price가 적힌 Sign판을 높이 쳐다 보았다. Adult $20.00, Senior $18.00 Plus Tax였다. 2장을 구입하고, 2장은 Camping site에서 Compliment ticket을 Free 로 얻어 입장할수 있었다.


Crysler's Farm을 끼고 강변에는 옛정취를 느끼게 해주는 기차여행 코스가 있어 많은 사랑을 받도 있었다.
한번 탑승하는데 성인 6달러.  객차안의 의자 배열도 강쪽을 편하게 쳐다볼수 있도록 돼여 있었다.



탑 양쪽에는 당시에 사용됐을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Cannon이 진열되여 있었고, 포신은 강건너 미국쪽을향하고 있었다. 지금은 맹방이지만, 당시에는 독립을 쟁취하기위해 심한 전투가  있었음을알수있었다.





학생들이 당시의 전쟁놀이를 Guide로 부터 설명을, 옛복장을 입고, 경청하고있다. 






당시의 Tilton가족들이 여행객들에게 간단한 Magic을 곁들이면서 악기들을 동원하여 Dance와 음악을 들려주면서,  Tilton가의 우수성을 설명해 주는 한 장면이다.



Performance가 끝나고, 그들과 한컷했다. 세월을 무상함을 문뜩 느낀다.
당시의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생각을 한마디로 표현해 놓은 문구같았다.

당시의 국회의원, 이곳 지역의 판사겸 기록관이었던 John Pliny Crysler 씨의 집이다. 원래는 이곳으로 부터 4킬로 떨어져 있는 Dundas County에 있었던 건물을 1956년도에 이곳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Signal Tower에서 내려다본 St. Lawrence River에는 커다란 화물선이 마침 통과 하고 있었다. 지금은 시즌이라서 큰 배들의 움직임이 무척많아보였다.




전쟁시 아군에게 신호를 보냈던, 한국 남산에 있는 봉화대 역활을 했었던 곳으로 설명문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여 있었다.

Before Morse code and the telegraph, towers like this one were used during the War of 1812 to transmit naval military codes along the frontier using a system of balls and pennants. Visitors can climb to the top for a beautiful panoramic view.
3층 벽에는 가느다랗고 긴 Open and close식 문이 있었는데, 이곳을 통해서 적진을 관측 했었던 것으로 추측됐다.

멀리 교회당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는 교회건물과 목사님의 사택도 함께 있었다.  청교도들이 건너와 이룩한 신천지여서 당시에는 종교에 의지하여 어려운 개척 생활을 했음을 알수 있었다.


이곳은 한국식으로 표현 한다면, 소작농이 살던 농장집이었었다.  설명문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Tenant farmers leased their house and land, and relied on oxen and simple hand implements to farm. The openhearth is used to cook and provide warmth.

방안에 있는 부억겸 난로에서는 주부가 음식을  만들어 놓고, 남편이 농장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여름철에는 무척 뜨거웠지만, 겨울철에는 난방을 겸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식탁에는 준비된 음식물이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Lunar가 주부가 음식준비하는 순간을 찰칵 하고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너무나 편한 생활이다.
집밖에서는 기르고 있는 송아지가 메어져 있고, 한소녀가 친구삼아 즐기고 있었다.

농기구들이 전되여 있는 Barb, 각종 멍애틀이 걸려 있다.  옆방에는 돼지를 기르고 있었고, 이들이 유일한 영양공급원이 됐었을 것이다.

울타리는 나무로 얼어매여 하나씩 하나씩 쌓아 올렸는데, Brighton시골집에서도 옆집과 경계로 만들어 놓은 나무 울타리도 이와 같은 Concept에서설치해놓은 것임을 이해할수 있었다.  좀특이한 것은 나무 울타리가 서로 얽히는 곳에는  Cap을 씌워놓아 Post가 흔들리지 않고 오래 버틸수 있도록한점이 특이 했다.
이곳은 Loucks Farm 건물 전경이다.  이곳에는 각종 가축및 농기구들이 옛날을 보여주고 있었다.

The Loucks family farm practised 'mixed' agriculture and demonstrates the impact early mechanisation on well-established progressive farms of ths period. Meals are prepared on the wood stove in the winter or summer kitchens.





 이곳은 10명의 농부들이 함께 하는 농장집의 부엌이다.  대식구들이 함께 농장에 나가 일을 하는사이, 주는 이들이 먹을 저녁준비를 하고 있었다.  Wood Stove에 커다란 냄비를 올려놓고, Soup을 끓이고 있었는데, 그녀가 지금하고 Cooking하고 있는것은 저녁준비라고 했다.  옆으 식탁에는 오늘날의 도시인들이 보면 ㅟ생적이라고 난리를 피울수 있는 파리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개의치 않았는데, 바로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이곳은 옷 만드는, 오늘날로치면 일종의  Tailor-made 양복점이었었다고하는데, 이곳에서는주로 여성용의류를 지었었다고하는데,  특히한점은, 여성들이 옷주문을 하러 이곳에 올때는 꼭 옷만들 천을 손수들고와서자기가 선호하는 스타일로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했단다.  
 그래도 이곳에 오는 여성들은  가정형편이  좀 낳았었나 보다.  당시의 유행은 주로  뉴욕,런던, 파리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의 옷을 선호 했었다고 한다.



이곳은  치즈 만드는 공장으로  설명문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By the 1860s, an increase in milk production led to the emergence of privately owned and co-operative cheese factories.  Canadians cheddar was made and exported to Britain.

위에 보이는 조그만 2개의 유리병중 하나는 오렌지 색갈을 내는 색소이고, 다른 하나는 우유를 응고시키는 일종의 간수역활을 하는 재료라고 했다.
소젖을 큰 Container에 넣고 한창 응고 시키고 있는 장면인데, 여기서  나온물은 펌프를 이용하여 퍼내고있었다.  주로 Cheddar Cheese를 만들어 영국으로 수출했다고 하면서 한마디 설명을  덧부치는데 가슴이 찡해졌었다.
왜냐면, 당시는  영국의  식민지였기에  이치즈 공장 주인은  영국인이었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인부는 케네디언들이었는데, 치즈를 직접생산 하면서도 일체  먹지를  못했었단다.  너무도 비싸서 사먹을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하루일당은 약50센트로 그돈을 치즈를 살수가 없었단다.  영국인주인은 이곳에서 생산된  치즈에 Orange color 색소를넣어 영국으로 수출했는데,  영국현지에서는 치즈의 색상을보고,  캐나다산치즈임을 알수있었다고한다.  직접공장에서 생산하면서도 비싸서 사먹을수가 없었다니....

이곳은  당시의  학교를 재연하고 있었다.  설명문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The Common School was open to all who wanted to learn, though attendance was not compulsory.  Students were drilled in manners and morals as well as reading, writing, and arithmetic.


교실은 한가운데에 난방용 난로가  있었고,  양쪽 벽에 기대어 남녀 학생들이 구분되여 따로 앉아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있었던점이 오늘날의 학교생활과는 다른면이었다.  옛날 남 여 학생들의 의상이 지금에 비하면 많이 불편했을것 같이 느껴졌었고, 선생님을 비롯한 여학생들의 치마는 발등까지 덮고 있었다.

이곳에서 교육받고 있는 학생들은 전부  각 처소에서 일을 돕고 있었던 어린 학생들로, 시간이 돼자  여기학교에모여 공부를하고있다는것을 금새 알수 있었다. 벼짜는공장에서, 꽃틀만드는교실에서, 밀가루방아간등등에서  봤었던 어린학생들로 귀여웠다.



이곳은 문래(Spinner)를 돌려 실을 만들어 천을 짜는 McDiarmid House로,  설명문은 아래와 같다.

Here the weaver spins yarn and works at the loom to produce cloth and other textiles. These products were an important source of income for many families.

나이든 중후한 할머니는 돋보기 안경을 끼고 바느질을 하면서 설명을 해주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이곳에서는 춥고 긴 겨울이 있는 곳이어서 주로 실(Yarn)은 동물의 털을 재료로 사용 했었다고 한다.
그할머니와 대화를  나누었다.  나의 출신지를 소개하고, 그쪽 북동쪽 Asian 지역에서는, 가까이는 나의 부모님 세대에서도 주로 목화를 이용하여 실을 뽑고 무명옷을 입었었고 가끔씩 즉 살기가 괜찮은 집에서는 명주옷을 해 입기도 했었고 엄마들이 이옷을 손질하기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던 기억도 설명해 주었더니 고개를 끄덕 끄덕 한다.  아마도 지역특성상 동물의 털보다는 솜이 더 이용가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또 버마 캠보디아 여행시 그곳에서는 지금도 Silk Worm을 이용한 명주천을 많이 생산하고 있었으며, 비싸게 팔리고 있었더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이곳에서는 원형틀에 말을 매어 끌어 동력을 전달하여, 통나무를 잘라, 겨울철 난방용 Fire Wood를 만드는 일종의  Fire wood 생산공장이었다.  우리가 방문했을때는 기계 하나가 고장나서, 직접 말이 끌어 힘을 전달하는 동력 장치를 볼수는 없었던 점이 아쉬웠다.  Barn에는 두마리의 튼튼한 말이 한가롭게 쉬고 있다.



이곳은 Cabinet Maker공장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었다.

The cabinet maker produces custom-made furniture and othe items for customers. Hard-pressed by large mechanised furniture and chair factories, he also did repairs and assembled mas-produced parts to stay in business.

점잖케 보이는 목수는 평생을 여기 목공소에서 보냈을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하는 모습이었다.  Lunar가 현재 이곳에 있는 대패(Planner)가 몇개나 되는가?라고, 그는 적어도 약 200개 정도는 될거라고 설명해준다. 이렇게 많아도  다 쓰인새가 다르다라고.  진열되여있는 커다란 검은 색갈의 관은, 나를 가르키면서, 너처럼 적은 체구의 사람용이 아니고  거인이 죽었을때  사용되는 Coffin이라고 설명도 해준다.  잠시 벽에 걸려 있는 Tool들을 봐도 엄청나게 많아 보인다.
Village안을 정기적으로 순회하는, 2마리의 마차가 끄는  Wagon은 사용료가 무료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지나는 곳마다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다. 이웨곤의 바퀴는 타이어다. 그점이 약간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벗어나긴 했어도, 아마도 승차한 승객들이 느끼는 Bumpping을 줄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런지?


대장간의 간략한 소개는 위에도 있지만,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The blacksmith shoes horses, repairs wagons, and fixes machinery for this neighbours and local businesses. A good blacksmith was essential to a thriving community.

내가 대장간에 들렸을때는, 대장장이 아저씨가 다른 탐방객들에게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전연 이해할수가 없었다. French로 설명해주었기 때문에.  그러나 대장간에는 커다란 Anvil이 2개가 있었고 또 수많은 공구들이 있었던걸로 봐서 과연 설명서에 있었던데로 말발굽신발, 웨곤수리,농사기구수리등등...
당시의 모든 생활용품은 이곳에서 다시 재생되여 나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저버릴수 없었다.
영어 설명을 듣기위해 마냥기다릴수만은 없었던 상황이 못내 아쉬웠었다.

이곳은 제빵공장이다.  설명문은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Using flour from the mill, the bakers mix a large batch of dough then weigh and pan individual loaves which are baked in the wooded-fired oven. Bakeries felied on travellers and migrant workers to prosper, as most families made their own bread at home.

우리가 방문 했을때는 아직 빵굽는 시간이라서 판매까지 기다리기에는 긴시간이 필요로 해서 아쉽지만, 빵맛은 볼수 없었다.  테이블위에 있는 individual pan들이다. 이곳에서 굽는 빵은 Yeast외는 다른 첨가물이 들어 있지 않을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었는데.....
옛날의 약국이다.  당시에는 동양의학처럼 자연에서 원료를 많이 채취했었던것 같았다.커다란 저울이 유난히도  눈에 띈다. 이아가씨는 현시대의 Pharmacist에 해당되는 약사다.

옛날에는 하얀 종이위에 생화꽃잎(Petal)을 배열한 다음, 종이에 맞는 나무판자사이에 끼어넣어 Press 시킨다음 약 3개월 기다린후 그꽃무늬를 Picture frame에 끼워 장식용으로 사용했었다고 한다.  그옆에는 생활를 말려서  같은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었단다. 그사이사이에  그림도 그려 조화를 이루기도 했었고....
어린 학생들은  지금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옛날을 배우고 있었다.

당시에 풍부하게 살고있는  중산층이  살던 집의  내부를  공개한 집이다.  설명서는 다음과 같다.

The Robertson home showcases a prosperous middle-class family whose Loyalist roots are evident in the furnishings and early 19th century architectural style of the house.

당시 중산층 집의 부엌내부 일부 이다.  아래는 Master Bedroom이다.

이곳은 주로 채소류를 재배하는 농장이다. 화학배료를 사용하지 않던 시기여서 오늘날의 채소처럼 풍부하게 자라지는 않아 보였지만,  오늘날 모두가 선호하는 일종의 Organic produce라고 봐도 무난할것 같다. 찌들지 않은 몸매의 두툼한 농부 아저씨가 Lunar가 묻는 질문에, 금년에는 가뭄이 길어 계획된 수확량 확보가 어렵지 않을까?라는 농부다운 걱정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곳은 빗자루(Broom stick)공장이다. 설명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었다.

Broom-maker uses imported broom corn(Sorghum vulgare) to make locally sold products. Corn brooms were popular and considered superior to those made from twigs, splints, or corn husks.

우리가 방문했을때, Instructor는 이제 시작하는 어린 직공에게 Broom을 이용하여 빗자루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고있었다.  그런데 이아가씨가 너무나 세계 기계를 돌려서 이들을 함께 묶는 Stem 속으로 실이 파고 들어가 결국 부서지고 마는 일이 벌어졌었다.  선생님은 너무세계 누르면 안돼고 감각을 이용하여 압력을 가감해야 한다는점을 주지시키는데 중점을 두고있었다. 
이들을 보면서, 내가 아주  어렸을적에 동네  사랑방에서  밤이면 머슴살이 하는 동네 일꾼 아저씨들이 모여 앉아 잡담하면서, 수수깡 빗자루를 발가락과 손을 이용하여 만들었던 광경을 기억나게 했었다. 그때 우리 아저씨들은 손과 발을 이용해서 만들었지만, 이곳에서는 기계를 이용해서 간편하고  쉽게 만들어 생활에 활용하고 있었던 점이 비교됐다.  완성품을 젊은 여직원이 Mrs Park과 함께 포즈를 취해주어 찰칵했다. 감사.

이곳은 목재소(Saw Mill)다.  당시에 풍부한 St. Lawrence River의 물을 수로를 이용하여 이곳까지, 물론 멀지는 않지만, 강물을 끌어들여 Turbine을 돌려 발생한 동력으로 커다란 톱을 사용하여 커다란 나무들을 잘라 판매 했었다고 한다.  설명서는 간단히 적고있다.

Using a water-powered muley saw, the mill cuts lumber for local customers.  Sawmills were common and indispensable to a society largely dependent on wood for shelter.

한직원이 관련수로(irrigation)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당시에 이런 구상을 하여 동력을 얻었다는 선조들의 발상에 고개를 숙일수 밖에 없었다.  커다란 목재 (Lumber)가 수력을 이용한 톱날에 End-user가 원하는데로 잘려졌다니....




가장 기억에 남을 설비로는 옛재제소 였는데, 멀리 St. Lawrence River로 부터 수로를 만들이 이곳까지 물을 끌어들여, 낙차를 이용하여 Turbine을 돌려 동력을 얻어 커다란 나무들을 잘라 필요한 데로 기둥 혹은 판자들을 만들어 내는데, 시늉만 내는게 아니고 실제로 당시의 제재소를 보는것 처럼 옛날 복장을 한 Operator가 열심히 재제하는 모습이 너무도 인상적이었었다.





이곳은 커다란 통나무들을 재제하여 필요로 하는 규격으로 만들어 내는 목재소의 내부전경이다.



당시의 털가공 공장이다.  설명서는 이렇게 당시를 묘사하고 있다.

The Woollen factor uses impressive 1860s machinery to transform raw wool into yarn and clothblankests.  The factory provided custom services to spinners and weavers, and represents the emergence of the new mechanised factory system.

당시의 Fabric factory는 규모가 제법 커 보였다. 이곳은 추운지역이기에 기후가 따뜻한 Asian지역과는 달리 재료가 모두 짐승들의 털이었다.

당시대의 복장을 입고서 직조기를 운영하는 아가씨들에게서 정말로 그때를 확실히 느낄수 있었고, 그들의 설명또한 매우 상냥해서  자꾸  옆으로가서 더설명을 부탁하게됐다.  그중의 Manager로 보이는 중년의 후덕한 부인이 우리일행과 함께 사진촬영 기회도 주는 여유로움을 주었다.
전부 모직천이어서 입으면 따뜻했을것 같았지만, 염색 가공법은 당시에는 매우 열악해 보인것 같다. 지금처럼 화려한 색상은 안보였기에 말이다.
나도 그들틈에 끼어  한컷 했는데, 내 복장이  현대판이라서  분위기를 망친것 같아 조금은  미안했었다.

실(yarn)을 만들기위한  털이  잔뜩 쌓여 있는 Barn이다.   아랫사진은 석간 Confederation News의 일부내용이다.

이외에도 보아야 할곳이 여러곳 있었지만, 주어진 여건과 시간이 짧아서 다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게 지금 생각해 보면 무척아쉽다.  다음 기회가 있을때 또 들려 오늘 Missing한곳들을 둘러 볼생각이다.



토론토에는 Black Creek Pioneer Village가 있고, 멀리 고국에서는 용인민속촌이 있다. 이들 마을도 Concept 은 같은데, 다른점은 이곳 Upper Canada Village에 있는 대부분의 Historical Building들은 인근, 멀리는 250킬로 떨어져 있었던, 역사적 인물이나 빌딩을 이곳으로 이전 시켜 그본래의 모습을 볼수 있게 하고 잘 정돈, 유지하고 있었다.

셋째날 ( July 20, 2018 Friday) 캠핑장 철수 및 텐트 Folding, 다시 Brighton Summer Residence로

텐트에서 Air Mattress 깔고 잠자는것은 침대에서 자는것 만큼이나 Cushion이 있어서 불만은 없는데, 변소에 가기위해 일어나야 할때는 무척 힘들다. 텐트가 3인용이라서 천장이 매우 낯아, 방에서 처럼 똑바로 서서 움직일수가 없어, 기어서 이동해야 하는데 이게 여간 힘드는게 아니다. 많은 세월을 보듬과 살아온 증거라서.  그나마 다행인것은 Senior들을 위한 Camping Site는 멀지 않은곳에 변소가 있고, 또 수도물도 연결되여 있고, 전기도 있어서 Facility이용하는데는 불편이 무척 덜한다.

Camp Fire를 할수 없기 때문에 비교적 일찍 각자의 텐트로 들어가 잠을 청한다. 소변을 보기위해 겨우 텐트 밖으로 기어나와서, Cell phone에서 가르키는 시간은 새벽 3;30분 경인데, 밤이라서 더위는 싹가셨고, 바람도 산들거려 분위기는 최고인것 같았지만, 주위는 너무도 고요하고, 옆집의 텐트에서 켜놓은 불빛만 깜박 거리고 있다.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을 온통 가리고 있는 별들의 숫자는 너무도 많은것 같다. 그곳 별있는곳에도 우리와 같은 생명체가 살고 있을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Happy house 불은 대낯처럼 밝게 켜져있어, 마냥 평화롭기만 하다.
어렷을적 배웠던 동요의 한구절이 생각난다.  “별하나, 나하나, 별둘 나둘….”어느새 나는 살만큼 살고, 앞으로 남은 삶은 지나온 세월의 1/7정도 남지 않았을까?라는 엉뚱한 생각이 머리속을 어지럽힌다.

Happy house를 나와 옆에서 쳐다본 우리의 Camp site는 Lunar가 준비해온 미니 크리스마스 트리용, 마치 반딧불처럼 보이는, 몇개의 전구불빛이 우리쪽 텐트와 친지쪽 텐트 문입구에서 깜박거리고, 식탁으로 사용하고있는 Picnic Table위에서도 껌뻑 거리고 있다. Cellphone에 담아 볼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컴컴하게 보일뿐이다. 아쉽다. 이광경이 낯에 처럼 뚜렷히 카메라에 옮겨졌었더라면….



추운듯해서 깨었다.커피 생각이 나서 텐트 밖으로 나오니 안개가 자욱히 흐르고 주위에는 간간히 큰나무들이보이는데, St.Lawrence강은 보이지 않는다. 밤사이에 나는 어디까지 와 있었다는걸까?  "Mist".
둘이 손잡고 강쪽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깊은 밤에 동물들이 떼지어 싸우는 소리에 잠시 잠을 깬적이 있어서 그 여운이 남아 있어서다.
아니 둘밖에 없는것 같다.  어제 낯에 연꽃( Water Lily)피어있던 강 한쪽도 보이지 않고, 가물어서(Drought) 죽은 고기떼의 썪은 냄새도 나지 않았다.
새벽은 빠르게 어둠을 잠재우는 그때, 안개속에서 뱃고동 소리가 아련히 들린다.

저 높은 곳에서, 그리고 내마음속에서 새미하게 불러 세운다.  



물밀듯이 감사함이 우리를 감싸온다.
그때, 엄청나게 커 보이는  커보이는 뱃머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나며, 춤추며 떠돌이 하던 안개(Fog)는
보이지 않고 맑고 상큼한 빛이 강물을 비추어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침이 들어선것이다.
St. Lawrence River  아침의 감동이다





서둘러서 커피를 끓이고,  항상 그래왔듯이, 남은 식재료로 아침을 먹고, 며칠밤을 예쁘게 지켜주었던 사랑스러운 이쁜 줄전등들을 거두고, 크고 작은 두개의 텐트를 접고, 그릇들을 챙기고, 주위를 말끔히 청소하고나니, 땀이 비오듯해서, Shower 하고, 그리고 지난 2박 3일간, 친구 부부와 함께 나누고 즐겼던 아름다운 추억을 묻어두고 아쉬운듯 떠났다.



인터넷 첫머리에 문재인 대통령이 기무사계엄령 관련 사건을 보고 받고 격노했다는 소식이다. 군은 통상적으로 항상 계엄령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는 조직이라는것을 전문가들의 의견과 또 군생활을 오래한 친지분들의 얘기를 들어서도 알고있는, 별로 특별한 사건도 아닌데, 문통이 격노를 했다니….관련 고위직 군지휘관들 또 고생하게 생겼구나 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수가 없다. 전임 정권에서 헌신했던 고위직들은 민간인, 군인 할것없이 다 잡아 들이고 있는 요즘 문통 정권에 대한 반애국적 행동은 뜻있는 국민들뿐만 아니라 나처럼 해외에 살고 있는 다수의 교민들을 무척 실망 시키고 있음에 서글픈 생각이 많이 든다. 조국이 경제적으로 잘 살아야 하는데….

CNN에서는 Trump대통령이 미-러 정상회담에서 Putin에게 당했다는 내용의 비난 기사가 도배를 하고 있고….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에 왜 정치꾼들은 온세상을 구정물로 만들지 못해 안달들일까.  결국 마지막 가는 길은 다 똑같이 겨우 옷한벌 얻어입고 6피트 Under로 가는데....




 Upper Canada Village는 1960년대 초에, 북미주 5대호수를 연결시키는 St. Lawrence River의 뱃길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위해 Locks를 현대식으로 건설하는등의, 대대적으로 Improve하면서, 인근에 있는 유명 인사들의 집과 공장들이 수장될 위기에 처하자, 이곳으로 옮겨와 원래의 모습으로 재현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약 40동의 건물들이 Upper Canada Village에 옮겨왔으며, 멀리는 약 250킬로 떨어진 곳에서까지 옮겨 왔다는 설명이다. 목재제소,시장통,공장등등이 현재도 이곳을 찾은 Tourists들을위해 매일같이 현실에서 처럼 가동시키고 있다는점이 특이하다.  특히 Weaving, Spinner(물레)로 실뽑기, 옷만들기등등, 기성세대에게도 좋은 학습자료가 될수 있겠지만, 어린 학생들에게는 1860년대에 살았던 선조들의 삶을 탐구할수 있는 좋은 현장 실습이 될것같다는 생각이다. Upper Canada Village에 들어서면 멀리 보이는 Commemoration tower가 눈길을 끈다.

1812년, 이곳에서 Crysler 농장을 중심으로 이곳을 식민지로 점령하여 농장을 경영하던 영국인들과 캐나다인들 그리고 아래쪽의 미국인들 사이에 전쟁이 있었던, 아픔을 추모하는 추모비가 눈길을 끌었다. 식민지에서 점령군의 밑에서 삶을 살아간다는것은, 많은 한을 남게하는 것을 깊이 느꼈다.


많은 한국분들이 여름철이면 캐나다 동쪽의 Maritime 지역을 관광하는것으로 알고있다. 특히 고국에서 여행온 분들이 많이 가는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쪽으로 가고 오는 길목에 Upper Canada Village및 St. Lawrence River 뱃길이, 마치 한국의 한려수도처럼 쭉 펼쳐져 있어 경관이 그만인데, 한번씩 들려 보도록 권하고 싶다. Hwy 401에서 불과 20여분 거리에 이러한 경치좋은 곳이 있다는것을 큰 축복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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