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uly 25, 2011

한국전 참전 및 휴전기념 행사 참석(July 24,2011)




































해마다 한국전 참전 기념행사에 모이는 참전 용사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어감을 오늘 또 느꼈다. 우리쪽 재향 군인회원들만 해도 벌써 작년도 행사 이후 여러분이 세상을 뜨셨고, 이곳 캐나다쪽의 참전 용사분들도 엄청나게 줄어 들었다. 캐나다쪽 재향군인들과 우리 한국측 재향군인들이 오늘의 기념식에 참석한 숫자는 전부해서 100 여명 채 못되는것 같았다.

"살아 있은 우리는 늙어 가지만 당신들은 늙지도 않고 항상 젊은 용사들로 기억 될것이고 이렇게 당신들을 기억하는 일은 시간에 관계없이 계속 해서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것입니다."라는 자유수호를 위해 희생된 분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이제는 다 늙어 걷기조차도 힘든 역전의 용사들이 식장에 준비된 의자에 앉아 경청하고 있는 모습에서 이분들이 정말로 젊은날 한국과 한국민들을 공산침략자들로 부터 지켜내고 자유를 누리게 하기위해 목숨을 바쳐 용감하게 싸웠던 역전의 용사들이 맞을까?라는 의심이 날 정도로 육신이 쇠약해 있음을 보면서, 마음이 저며오는것을 안타까워 하지 않을수 없음을 마음 아프게 느꼈다. 잘하지도 못하는 내가 '기수'단의 일원이 되여 향군기를 들고 회원들의 앞에서 행진할수 있다는 긍지(?)를 오늘에야 실감할수 있다. Lunar는 아마추어 사진사가 되여 여기저기로 눈길을 옮기면서 디카의 셔터를 눌러대는 모습도 간간히 눈에 들어왔다.

오타와 국회 의사당 옆에 있는 전쟁 기념 광장에서 11시에 시작된 한국전참전 61주년 기념과 휴전58주년 행사가 금년에는 6/25날이 아닌 오늘 즉 7/24일에 한국전참전과 휴전기념일을 겸해서 열린것인데, 매년 해왔던 데로 내가 속해 있는 우리 한국측 재향군인회는 뻐스를 Charter 해서 새벽 4시 50분에 Dufferin 선상에 있는 서울관 식당앞에서 출발하여, 오늘 기념식에 참석한 것이다. 재향군인회장님을 비롯한 운영진들의 배려로 나는 Lunar와 같이 Hwy 401에 인접해 있는 Brighton 에서 탑승하는 기회를 허락해 주어 시간도 줄이고 편하게 동참할수 있었다. Lunar의 언니를 포함한 상당수 회원님들의 부인들께서도 오늘 행사에 참석하기위해 동석해 있는게 눈에 띄었는데, 늙어가는 회원님들이 직간접으로 부인님들의 도움이 있어야 편하게 시간을 보낼수 있게 된 시점에 와 있다는 표시인것 같기도해 마음이 든든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세월의 흐름에 역전의 용사들의 기상이 약해졌다는 안타까움을 보는것 같기도 했다.

식이 거행되는 동안에 캐나다군인이 간간히 불어대는 진혼곡의 나팔소리는 평화스럽게 진행되는 예식속에서도, 전쟁의 참혹함을 마음속에서 충분히 느끼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애절함이 되여 귓전을 울려 주곤 했다. 5년전 까지만 해도 참전용사들의 숫자가 많아 오늘처럼 역전의 용사들의 행진모습이 초라(?)해 보이지도 않았었고, 캐나다 정부측의 장관들이나 동급의 인사들과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석한 16개국의 외교관들과 캐나다주재 한국대사가 단상을 꽉메워 전몰장병들의 넋을 기리고, 참전용사들의 노고를 직접치하 해주곤 했었는데, 오늘은 우리 한국측의 대리대사와 그나마 고국으로 부터 달려온 보훈처장관이 기념식에 참석하여 체면을 유지해 주었었다. 외교적 관례로 봐서라도 최소한 캐나다에서도 보훈처 장관이 참석했었으면 더 빛나는 식이 됐을텐데....그래도 캐나다측 참모총장이(?) 참석하여 그나마 몇마디 축사를 해주어 참전용사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 주었다고 생각됐다.

이행사를 적극적으로 후원해주는 대사관의 노력에 항상 고맙게 여기고 있지만, 한국계 출신,Yu-na Martin이 상원의원직을 맡으면서 부터 한국전 참전 행사를 위해 적극적인 성원과 봉사를 캐나다를 대표(?)하여 항상 웃음띤 얼굴로 우리측 향군회원들이 편하게 기념식 참석을 마칠수 있도록 해주어 재향군인회원들로 부터, 특히 한국측 회원들로 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것이 눈에 띌정도로 아름답고 든든해 보이고, 또 상원의원으로서 그녀의 이같은 활동이 의정활동에도 직간접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것으로 이해가 됐다. 그녀가 비록 캐나다쪽 상원의원이지만, 한국의 자랑이기도해서 더 회원들이 사랑하는것 같다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공식적인 행사가 끝난후 제공되는 점심은 매년 캐나다주재 한국대사관에서 했었으나, 오늘은 고국에서 오신 박성준 보훈처장관께서 특별히 준비하여, 국회의사당 바로 건너편에 있는 고급호텔 Chateau Laurier의 Adam Room에서 Buffet로 제공 됐다. 식사중에 캐나다측 참전용사 11명에게 한국정부를 대표하여 장관께서 '평화의 사도매달과 증서'를 수여하는 행사가 치러지기도 했다. 이분들을 포함한 참전용사분들의 목숨바쳐 고국대한민국을 지켜준 고마움을 어찌 다 표현할수 있을수 있겠는가마는, 다부서져 버리고 잿더미만 남았던 전쟁후의 상처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노력하여 지금은 세계무대에서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루면서 선의의 경쟁을 하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롭게 잘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한증표가 되는것 같기도해 같은 피를 나눈 민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이광경을 지켜보는 나에게 자부심을 생기게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또 남성중창단 부르는 Country Song의 음율은 귀에 많이 익은 노래들로 친근감과 나도 모르게 저절로 몸을 리듬에 맞추어 움직이게까지 하는 구성진 노래들이었다. 어떤 캐나다측 참전용사부부들은 노래에 맞추어 Dance를 하기도해 마음을 여유있게 해주기도 했다. 아쉽게도 우리측 향군들은 이러한 여흥이 끝나기도 전에 호텔을 나와야 했다. 갈길이 멀기에 떨어지지않는 발길을 옮겨야 했다.

돌아오는 뻐스속에서, 항상그랬던것 처럼, 참전용사들의 전쟁경험담을 이번에도 들었는데, 오늘은 참전용사들중에서도 결사대를 조직하여 이북의 함경도 지역에 침투하여 적정을 살피곤 하면서, 때로는 붙잡혔다가 다시 탈출하기까지의 사선을 헤맷던 경험담을 손윗 동서되시는 분이 "제3의 생명"이라는 제목으로 해 주셨는데, 가족이라는 관계를 떠나서 한군인의 살아남기위한 처절하고 아찔했던 순간들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때는 저런분들 덕택에 오늘의 잘사는 조국 대한민국이 존재 할수 있었다는것을 깊이 느낄수 있었다. 그내용을 간략하게 여기에 옮겨본다.

왜 이야기의 제목이 '제3의생명'인가 부터가 숨소리를 조리게 했다. 첫번째 생명은 부모님께로 부터 받은 것이고, 두번째는 해방후 남북이 갈라서면서 고향인 이북에서 20대 초기를 보내면서, 공산정권에 반대하여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주동이 되여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암약하던중, 낯에 아는 친지집에서 잠깐 낯잠을 자다가 내무서원이 그집을 조사하러 들어온것을 알고 뒷문을 통해 도망치다가 발각되여 잡힐려는 순간, 급하게 큰일을 보기위해 뛰어가던중이었을뿐 도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고 변명을 하자 허락을 해주어 숨게 된곳이 부엌의 아궁이 속이었는데, 이를 옆에서 무심히 보고 있던 아줌마가 슬쩍 부엌으로 들어와 타고 남은 재(Ash)로 아궁이 입구를 그럴듯하게 덮어주어 무사히 숨을수 있게 됐는데, 내무서원이 큰일을 보러 간다는 젊은이가 나오지 않자 뒷간을 뒤져보고, 나중에는 부엌으로 들어와 큰 가마솥뚜껑까지 열어보는데, 바로 그아궁이에 숨어서 아찔한 순간을 살아남았을때가 제2의 생명이라고 여기고 있었단다. 만약에 그때 아궁이를 뒤졌으면 꼼짝없이잡혀 바로 총살 되였을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다음 세번째 생명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여러 경로를 통해 이남으로 내려와 부산영도에서 같은 또래의 이북에서 내려온 젊은이 900명이 특수 훈련을 받고, 이북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적정을 살피는 특수 부대원이 되여 함경도에서 활동하던중 붙잡혀 이제는 죽었구나라고 모든것을 체념한채, 심문에 응할때마다 "나는 절대로 너희들에게 내가 무엇을 하기위해 이곳에 들어 왔는지를 얘기 해줄수 없으니 바로 총살 시켜달라." 라는 식으로 얘기를 한것을, 이들이 아주 큰 먹이감을 잡은것으로 생각하고 윗선에 보고하여, 평양까지 이송하라는 명령을 받고, 양손목을 뒤로 하여 전화줄로 꽁꽁 묶인채, 다른 죄목으로 붙잡힌 사람들과 같이 걸어서 끌려 가는데, 그중에 한사람은 이제 17세된 학생도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뒤따라서 끌려 갔었다고 했다. 꽁꽁 동여맨 손목을 전화선의 철사가 손목을 파고 들어 아파오고 결국에는 피가 계속흘러 이대로는 안돼니 손목이 아니고 어깨 바로 아랫쪽의 팔을 묶어서 좀 편하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는데, 정말인지의 여부를 살피더니 상처가 심한것을 확인한후 요구한데로 이번에는 철사줄이 아닌 노끈으로 동여 매고 끌려 갔었단다. 끌려 가면서도 항상 찬스만 있으면 튈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기에 팔뚝을 자꾸 흔들어 묶은 줄을 풀어 볼려고 그들의 눈이 안볼때마다 노력 했는데, 줄이 신기하게도 느슨해져 팔아랫쪽으로 저절로 내려 왔는데, 이를 뒤따라 끌려오던 17세된 아이가 보고, 끌고 가는 내무서원에게 보고 할려고 하는것을 얼른 막아서면서, 네가 보고 한다고 해서 평양가서 남아 남는다는 보장은 없으니 같이 살아남는 방법을 찾아 보는게 더 긴급한것이라고 말하여 간신히 무마 시킨후 계속 끌려가는데, 그들 내무서원들도 지쳐서 여러명이 먼저 앞서가고 내무서원 한명만이 붙잡힌 무리들을 감시 하면서 끌고 가는데, 갑자기 앞이 잘 안보이게 하는 짙은 안개가 덮쳐 이때다하고 옆으로 슬쩍 빠져 줄행랑을 쳤었는데, 내무서원들이 놀라서 인근 주위를 다 뒤졌으나 안개에 가려 결국 찾지 못하고 헤매는 사이 그자신은 벌써 그들로 부터 멀리 달아나 무사히 그들로 부터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다시 부산기지로 돌아올수 있었단다. 같이 작전에 참전했던 900 여명의 대원들 대부분은 작전중 현지에서 붙잡혀 총살당했거나 중노동에 처해져, 불과 몇명만 살아 남았다고 한다. 그 부대의 소속은 한국군에 소속된 부대가 아니어서 국방부 기록에도 없었고, 오직 미군들만이 인정하는 부대여서, 전후 이들의 전적을 한국전사에 알리기 위해 무진 노력도 했었다고 설명해 주셨다. 그래서 3번째의 삶을 살게 되면서 '제3의 생명'이라는 명으로 특수임무수행내용을 정리하여 책으로도 발간하여 이들의 활동상을 남겨 놓지 않으면 아무도 이를 한국전사에 알릴방법과 사람이 없을것 같아, 이렇게 되면 먼저간 동료들에게 너무나 많은 죄를 짖는것 같아, 임무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 이민 오기전 청와대와 국방부를 비롯한 관련 기관에 우편으로 보냈었다고 한다. 그후 고국방문시마다 국방부에 들려 특수임무수행내역을 설명해주어, 이제는 그부대와 활동상황이 국방부 전사에 정식으로 등재되여 먼저간 동료들에게 진 빗을 일부나마 갚게되여,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여 있는 옛전우들을 방문시 마음 편하게 보고하곤 한다고 말씀 하셨다. 이내용이 뉴스 미디아에도 알려져 TV방송과 인터뷰도 하고 해서 이부대의 존재를 많은 국민들이 알고 있다는 얘기도 해주셨다.

오래전 형님께서 주셨던 "제3의 생명"을 읽고 대강의 내용은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본인이 밝히는 내용은 책에서 읽어본 내용과는 또 다르게 온몸에 전율이 느껴옴을 함께 하면서, 역전의 용사라는 말이 꼭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로 드라마 같은 인생, 84세인 동서분에게 이렇게 좋은 세상에서 더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셔야 될 충분한 이유를 당신은 소유하고 계시니, 옛동료들을 생각하면서 무병장수 하시라고 지금 이순간에도 마음속으로 빌고 있다.

뻐쓰는 어느새 Brighton에 도착하여 우리부부를 내려 주려고 정차한다. 오늘 오타와 행사에 참석하신 참전용사님들, 그리고 재향군인회원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그분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뻐쓰가 다시 시야에서 사라질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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