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ly 28, 2011
연방총리 Harper가 참석한 6/25동란휴전 58주년 기념식(브람튼 - July 27th, 2011.)
휴전 협정서에 양측이 서명한날의 Globe and Mail의 머리기사는 아래와 같이 적고 있음을 봤다.
"11-minutes ceremony closes three years of hostilities"
공산측과 UN참전16개국이 참석한 가운데 이날 아침 판문점에서 3년에 걸친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휴전 협정서 서명하므로써 이날밤 10시부터 총성이 멈추게 됐다. 길옆에 공산측에서 임시로 설치해 놓은 막사에서 양측이 휴전 협정서에 서명했는데, 정확히 11분만에 끝내고 헤여질때 양측은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악수나 인사도 나눔없이 제갈길로 돌아섰었다 라고 그날의 신문은 보도하고 있다. 그날 이후로 지구상에서는 단 하루도 전쟁이 없었던 날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정치적 이념문제로 종교적 갈등으로..... 우리 서민들이 얻는 이득은 무엇인가? 불쌍한 중생들.
11시 정각에 한국동란휴전 58주년 기념식이, 한국전 참전 용사들과 한국측 재향군인회 동부지회 회원들과 수많은 외부사람들이 함께한 자리에, 연방총리 Steven Harper가 참석한 가운데 그동안 매년 해왔던 기념식에서는 볼수 없었던 성대한 기념식이 무더위 속에서 약 한시간에 걸쳐,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의 의미를 되새겼다. 불과 3일전에는 오타와에서 6/25동란과 7/27휴전기념식을 Combine하여 진행됐을때에도 우리 한국측 재향군인회동부지회원들이 아침 새벽부터 부산을 떨고 준비하여, 뻐쓰를 타고 오타와 까지 가서 10시 30분 부터 전쟁기념광장에서 거행된 식에 참석했었던 여독이 채 풀리기도 전에, 많은 회원들이 노구를 이끌고 다시 오늘 이곳에 모여 더 그의미를 되새기며, 전쟁의 참상을 다시한번 기억속에서 더듬게한 예식이었다.
삼복더위중이라 햇볕은 따가웠고, 또 연방총리가 모처럼 참석하는 기념식이었기에, 다른해에 거행됐던 때와는 달리 회원들이 더 일찍모여 대기 하느라 많이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볼수 있는 광경을 식이 거행 되는 동안에 정열하여 서있는 노쇠한 회원들의 얼굴에서 땀줄기가 흘러 내리는것이 보였고, 나 자신도 2일전 뜻하지 않게 무릎을 다쳐 걷기에도 힘들었지만, 의연한채 할려고 기수직을 수행 했는데 Pain이 있어 여간 불편한게 아니였지만 더 노쇠한 회원분들이 서 계시는것을 옆에서 보면서, 내불편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무사히 마쳤다.
지난 일요일 오타와 행사에 참석할때만 해도, 연방총리의 휴전기념식의 참석여부는, 뻐쓰에 동승했었던 한인회장의 발표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참석한다는 정보를 들었었다는 정도 였었는데, 오늘 현실화되여, 옆에서 총리의 참석을 지켜보면서, 더욱히 그는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용맹성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라고 운을뗀뒤, 오늘 58주년 한국동란 휴전일을 맞게 됐다라고 말했다
"자기 자신을 초개처럼 던져, 희생하신분들이 불의와 억압에 반대하여 불연히 일어나 싸워 캐나다의 명성을 세우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읍니다.
캐나다는 앞으로도 이러한 불의에는 서방세계의 동맹국들과 결연히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대처해 나갈것입니다. 또 그는 6/25일 한국전 발발후 2주만인 7월 12일에 캐나다군이 참전하기 시작하여 1953년 휴전 조인식이 서명됐을때까지 총 26,000며명의 캐나다군이 전쟁에 참석 했으며, 휴전후에도 7000명의 캐나다군이 계속해서 주둔해 있다가 1955년에 완전 철수 했으며, 한국전에서 캐나다 병사 516명이 목숨을 잃었었다"라고 회고했다.
오늘 휴전기념일 참석을 위해 우리 부부는 어제 저녁늦게 토론토를 향해 Brighton Cottage에서 출발 고속도로를 달렸었다. 오른쪽 무릎이 2일전 사고를 당하여 걷기와 서있기기 무척 힘들었지만, 향군회장, 기수대장과 기수대원들께 간단히 전화로 연락해서 사고때문에 참석할수가 없다라고 얘기 하는것 만으로는, 시골에서 먼길을 별로 탐탁치 않게 여겨 핑계를 주는것으로 혹시라도 오해를 받을까봐, 도저히 내 마음이 허락치 않아, Lunar를 설득해서 일단은 참석하고, 거기서 너무나 힘들면 열외하는것으로 계획을 세우고, 오늘 식에 참석한것이다.
나이가 더들어가면서, 고국에서건 이곳에서건 전챙의 참혹함에 대한 젊은세대 사람들의 생각이 희미해져는 가는것 같아, 전쟁의 참상을 회상하게 하는 한국전 참전식에는 가능하면 참석하여 주는게, 전후 세대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는것으로 보여지고 또 이해했으면 싶어서 이다. 특히나 61주년이 지난 현재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간의 대치 상황에는 한치의 변화도 없이 더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고 지구상 어디에서도 볼수없는 가장 많은숫자의 병사들이 중무장한채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면서 지금 이시간에도 대치하고 있음은 세계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61년이 지나면서 보는 시각도 많이 무디어져 있음을 부인할수는 없다 하겠다. 더 마음이 아픈것은 이러한 참혹했던 한국전쟁이 그동안 잊혀진 전쟁으로 사람들로 부터 외면당해 왔었다라는 것이다. 총리께서도 연설 서두에서 한국전이 그동안 잊혀진 전쟁으로 묻혀 있었는데, 이제 서서히 그의미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언급한것을 보더라도, 한국전은 철저히 잊혀진 전쟁이었었던것 같다. 조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하여, 하계 올림픽을 치르고 앞으로 몇년후에는 동계올림픽까지 주최하는 경제적 강국이 되면서, 이렇게 성장하게된 원동력의 이면을 세계각국이 연구하고 높이 평가하고, 완전 초토화된 잿더미속에서 오늘의 조국 한국이 서 있는 저력과 의미를 사람들이 높게 재평가하면서 잊혀진 전쟁을 되새기게 된것이 아닐까?라고 의미를 부여해 봤다.
오늘 휴전기념식에서 한가지 놀란것은, 지금까지는 이러한 모임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던 많은 새로운 얼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참석을 보면서 반가웠다는 생각보다는, 아마도 한국전의 참상을 되새기는 뜻을 기리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동안에는 전례가 없었던 연방총리가 참석한다고 하니까, 얼굴을 내밀어 한번 번쩍 쇼를 하기위해서 참석한것이 아닌가 하는 서글품과 안타까움이 내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들도 분명 고국에 있을때, 분명히 군복무를 마쳤을 재향군인회원 자격이 있는 분들일텐데, 그렇다면 재향군회원으로 가입하여 떳떳하게 제복입고 같이 행군하고 같이 총리를 비롯한 Dignitaries들의 열병식에 참석했으면 더 빛나고 좋아보였을 것이다. 열외로 Podium뒤에 서서 기념식을 구경하는 그모습이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아 보였다. 초청 받지도 않았기에 앉을 좌석도 준비안된 그중간에 서서 있는 모습이 무엇을 의미 하는것일까? 이제는 제발 껍질을 벗어 던지고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황혼의 삶을 살아가는것이 더 가치가 있고, 적당한 운치도 있어 보일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위령의 벽에 새겨져 있는 516명의 Plaque에 기념식에 참석한 연방 총리를 비롯한 모든 재향군인회원들과 외부 인사들이 주최측이 준비해준 빨간 Poppy 한송이씩을 들고 마음에 와닿는 이름앞에 달아주는 의식이 있었다. 매년 기념식때 하는 의례적인 행사일수도 있겠으나, 이번에는 좀 기분이 다르다. 우리 살아있는 우리들도 지하에 묻힌 당신 전우들과 만나게 될 그날이 일년더 짧아졌다는 점을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할지....그런생각을 하면서 나는 오늘 한송이를 이름도 기억 못하는 516명중의 하나에, 그것도 벽의 맨밑쪽에 있는, 다른 헌화자들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그위패위에 꽃았다. 후배전우의 하나인 나의 마음이 전해졌으면 하는 간절함을 두손에 모아서......
전쟁터를 헤매신 선배님들의 마음은 총탄이 퍼부어댔던 그때를 머리에서 기억하면서 꽃을 것이고, 군인들의 생활을 잘 모르는 여자분들의 마음은 또 어떤 느낌이 들것인가?
공식적인 기념행사가 끝난후 미시사가 Convention Center에서 캐나다측 참전용사들과 우리측 재향군인회원들과 행사에 참석했던 가족들을 초청하여 점심식사가 있었다. 조국의 관계당국에서 재정지원을 해주고 영사관이 이를 집행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온주총독 David Onley, 이제 이임을 앞두고 있는 홍지인 토론토 총영사, 항상 한국전 관련행사를 위해 힘쓰고 있는 Yonah Martin상원의원과 그외 국회의원들, 대사관 무관 그리고 브람튼시의원 Sandra Hames씨등이 luncheon event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었고, 식사중에 주총독의 말씀과, 총영사의 인사말이 끝난후 MC의 '오늘 공식행사를 마지막으로 총영사는 이임하게 된다'라는 멘트가 내귀를 때렸을때, 만났다가 헤여지는게 우리 인간사의 한면임을 증명해 주는것 같이 느껴졌다. 떠나는 그분의 앞날에 성장만이 계속되기를 마음으로 부터 응원했다. 매년 참석해 보지만, 오늘의 점심초대에서는 조국의 경제적 파워와 세계무대에서의 역활이 계속향상되고 있다는 점이 확연히 눈에 띄는 순간이기도 했다. 점심에 위에 열거한 Dignitaries들이 참석하기는 처음인것은 물론이고, 식사전 양국의 국가를 제창했는데, 애국가를 먼저, 그다음에 O Canada를 했다는점부터가 지난해와 다르다는것을 느끼게 했다.
시집간 딸의 심정으로 나를 포함한 모든 재향군회원들이 잘살아가는 조국의 소식을 듣는것만으로도,제2의 조국으로 선택한 캐나다에서 살아가는데 자부심이 더 강해지는것을 지금 이시간에 느끼면서 자랑으로 여기면서 Cottage에 돌아가면 Neighbor 들에게 자랑도 해야 겠다는 생각이다.
한국전에 참석한 캐나다측 용사들의 자부심도 이번행사에서는 대단해 진것 같이 보였다. 그분들을 포함한 우리측 재향군인회원들도 오래토록 건강을 유지하여, 오늘 처럼 기념식에 참석하는것만으로도 지금까지 잊혀져 오다시피했던 한국전에 대한 홍보를 충실히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어린 두학생이 고국의 가평으로 부터 날아와 오늘 기념식에 참석한것은 여러가지로 의미가 있어 보였다. 보기 좋았다. 그들이 순직한 참전용사들의 비석앞에서 화환을 놓을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오른쪽 무릎이 불편하여 힘들었으나 그래도 달려와 참석했기에 동료기수단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 보람을 느꼈으며, 이런것들이 바로 군인 정신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Brighton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8/02/2011080200089.html?news_Head3
http://www.youtube.com/watch?v=zCyhUdE-uz8
http://www.youtube.com/watch?v=pb73HMVRM6I
Monday, July 25, 2011
한국전 참전 및 휴전기념 행사 참석(July 24,2011)
해마다 한국전 참전 기념행사에 모이는 참전 용사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어감을 오늘 또 느꼈다. 우리쪽 재향 군인회원들만 해도 벌써 작년도 행사 이후 여러분이 세상을 뜨셨고, 이곳 캐나다쪽의 참전 용사분들도 엄청나게 줄어 들었다. 캐나다쪽 재향군인들과 우리 한국측 재향군인들이 오늘의 기념식에 참석한 숫자는 전부해서 100 여명 채 못되는것 같았다.
"살아 있은 우리는 늙어 가지만 당신들은 늙지도 않고 항상 젊은 용사들로 기억 될것이고 이렇게 당신들을 기억하는 일은 시간에 관계없이 계속 해서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것입니다."라는 자유수호를 위해 희생된 분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이제는 다 늙어 걷기조차도 힘든 역전의 용사들이 식장에 준비된 의자에 앉아 경청하고 있는 모습에서 이분들이 정말로 젊은날 한국과 한국민들을 공산침략자들로 부터 지켜내고 자유를 누리게 하기위해 목숨을 바쳐 용감하게 싸웠던 역전의 용사들이 맞을까?라는 의심이 날 정도로 육신이 쇠약해 있음을 보면서, 마음이 저며오는것을 안타까워 하지 않을수 없음을 마음 아프게 느꼈다. 잘하지도 못하는 내가 '기수'단의 일원이 되여 향군기를 들고 회원들의 앞에서 행진할수 있다는 긍지(?)를 오늘에야 실감할수 있다. Lunar는 아마추어 사진사가 되여 여기저기로 눈길을 옮기면서 디카의 셔터를 눌러대는 모습도 간간히 눈에 들어왔다.
오타와 국회 의사당 옆에 있는 전쟁 기념 광장에서 11시에 시작된 한국전참전 61주년 기념과 휴전58주년 행사가 금년에는 6/25날이 아닌 오늘 즉 7/24일에 한국전참전과 휴전기념일을 겸해서 열린것인데, 매년 해왔던 데로 내가 속해 있는 우리 한국측 재향군인회는 뻐스를 Charter 해서 새벽 4시 50분에 Dufferin 선상에 있는 서울관 식당앞에서 출발하여, 오늘 기념식에 참석한 것이다. 재향군인회장님을 비롯한 운영진들의 배려로 나는 Lunar와 같이 Hwy 401에 인접해 있는 Brighton 에서 탑승하는 기회를 허락해 주어 시간도 줄이고 편하게 동참할수 있었다. Lunar의 언니를 포함한 상당수 회원님들의 부인들께서도 오늘 행사에 참석하기위해 동석해 있는게 눈에 띄었는데, 늙어가는 회원님들이 직간접으로 부인님들의 도움이 있어야 편하게 시간을 보낼수 있게 된 시점에 와 있다는 표시인것 같기도해 마음이 든든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세월의 흐름에 역전의 용사들의 기상이 약해졌다는 안타까움을 보는것 같기도 했다.
식이 거행되는 동안에 캐나다군인이 간간히 불어대는 진혼곡의 나팔소리는 평화스럽게 진행되는 예식속에서도, 전쟁의 참혹함을 마음속에서 충분히 느끼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애절함이 되여 귓전을 울려 주곤 했다. 5년전 까지만 해도 참전용사들의 숫자가 많아 오늘처럼 역전의 용사들의 행진모습이 초라(?)해 보이지도 않았었고, 캐나다 정부측의 장관들이나 동급의 인사들과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석한 16개국의 외교관들과 캐나다주재 한국대사가 단상을 꽉메워 전몰장병들의 넋을 기리고, 참전용사들의 노고를 직접치하 해주곤 했었는데, 오늘은 우리 한국측의 대리대사와 그나마 고국으로 부터 달려온 보훈처장관이 기념식에 참석하여 체면을 유지해 주었었다. 외교적 관례로 봐서라도 최소한 캐나다에서도 보훈처 장관이 참석했었으면 더 빛나는 식이 됐을텐데....그래도 캐나다측 참모총장이(?) 참석하여 그나마 몇마디 축사를 해주어 참전용사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 주었다고 생각됐다.
이행사를 적극적으로 후원해주는 대사관의 노력에 항상 고맙게 여기고 있지만, 한국계 출신,Yu-na Martin이 상원의원직을 맡으면서 부터 한국전 참전 행사를 위해 적극적인 성원과 봉사를 캐나다를 대표(?)하여 항상 웃음띤 얼굴로 우리측 향군회원들이 편하게 기념식 참석을 마칠수 있도록 해주어 재향군인회원들로 부터, 특히 한국측 회원들로 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것이 눈에 띌정도로 아름답고 든든해 보이고, 또 상원의원으로서 그녀의 이같은 활동이 의정활동에도 직간접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것으로 이해가 됐다. 그녀가 비록 캐나다쪽 상원의원이지만, 한국의 자랑이기도해서 더 회원들이 사랑하는것 같다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공식적인 행사가 끝난후 제공되는 점심은 매년 캐나다주재 한국대사관에서 했었으나, 오늘은 고국에서 오신 박성준 보훈처장관께서 특별히 준비하여, 국회의사당 바로 건너편에 있는 고급호텔 Chateau Laurier의 Adam Room에서 Buffet로 제공 됐다. 식사중에 캐나다측 참전용사 11명에게 한국정부를 대표하여 장관께서 '평화의 사도매달과 증서'를 수여하는 행사가 치러지기도 했다. 이분들을 포함한 참전용사분들의 목숨바쳐 고국대한민국을 지켜준 고마움을 어찌 다 표현할수 있을수 있겠는가마는, 다부서져 버리고 잿더미만 남았던 전쟁후의 상처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노력하여 지금은 세계무대에서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루면서 선의의 경쟁을 하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롭게 잘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한증표가 되는것 같기도해 같은 피를 나눈 민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이광경을 지켜보는 나에게 자부심을 생기게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또 남성중창단 부르는 Country Song의 음율은 귀에 많이 익은 노래들로 친근감과 나도 모르게 저절로 몸을 리듬에 맞추어 움직이게까지 하는 구성진 노래들이었다. 어떤 캐나다측 참전용사부부들은 노래에 맞추어 Dance를 하기도해 마음을 여유있게 해주기도 했다. 아쉽게도 우리측 향군들은 이러한 여흥이 끝나기도 전에 호텔을 나와야 했다. 갈길이 멀기에 떨어지지않는 발길을 옮겨야 했다.
돌아오는 뻐스속에서, 항상그랬던것 처럼, 참전용사들의 전쟁경험담을 이번에도 들었는데, 오늘은 참전용사들중에서도 결사대를 조직하여 이북의 함경도 지역에 침투하여 적정을 살피곤 하면서, 때로는 붙잡혔다가 다시 탈출하기까지의 사선을 헤맷던 경험담을 손윗 동서되시는 분이 "제3의 생명"이라는 제목으로 해 주셨는데, 가족이라는 관계를 떠나서 한군인의 살아남기위한 처절하고 아찔했던 순간들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때는 저런분들 덕택에 오늘의 잘사는 조국 대한민국이 존재 할수 있었다는것을 깊이 느낄수 있었다. 그내용을 간략하게 여기에 옮겨본다.
왜 이야기의 제목이 '제3의생명'인가 부터가 숨소리를 조리게 했다. 첫번째 생명은 부모님께로 부터 받은 것이고, 두번째는 해방후 남북이 갈라서면서 고향인 이북에서 20대 초기를 보내면서, 공산정권에 반대하여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주동이 되여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암약하던중, 낯에 아는 친지집에서 잠깐 낯잠을 자다가 내무서원이 그집을 조사하러 들어온것을 알고 뒷문을 통해 도망치다가 발각되여 잡힐려는 순간, 급하게 큰일을 보기위해 뛰어가던중이었을뿐 도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고 변명을 하자 허락을 해주어 숨게 된곳이 부엌의 아궁이 속이었는데, 이를 옆에서 무심히 보고 있던 아줌마가 슬쩍 부엌으로 들어와 타고 남은 재(Ash)로 아궁이 입구를 그럴듯하게 덮어주어 무사히 숨을수 있게 됐는데, 내무서원이 큰일을 보러 간다는 젊은이가 나오지 않자 뒷간을 뒤져보고, 나중에는 부엌으로 들어와 큰 가마솥뚜껑까지 열어보는데, 바로 그아궁이에 숨어서 아찔한 순간을 살아남았을때가 제2의 생명이라고 여기고 있었단다. 만약에 그때 아궁이를 뒤졌으면 꼼짝없이잡혀 바로 총살 되였을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다음 세번째 생명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여러 경로를 통해 이남으로 내려와 부산영도에서 같은 또래의 이북에서 내려온 젊은이 900명이 특수 훈련을 받고, 이북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적정을 살피는 특수 부대원이 되여 함경도에서 활동하던중 붙잡혀 이제는 죽었구나라고 모든것을 체념한채, 심문에 응할때마다 "나는 절대로 너희들에게 내가 무엇을 하기위해 이곳에 들어 왔는지를 얘기 해줄수 없으니 바로 총살 시켜달라." 라는 식으로 얘기를 한것을, 이들이 아주 큰 먹이감을 잡은것으로 생각하고 윗선에 보고하여, 평양까지 이송하라는 명령을 받고, 양손목을 뒤로 하여 전화줄로 꽁꽁 묶인채, 다른 죄목으로 붙잡힌 사람들과 같이 걸어서 끌려 가는데, 그중에 한사람은 이제 17세된 학생도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뒤따라서 끌려 갔었다고 했다. 꽁꽁 동여맨 손목을 전화선의 철사가 손목을 파고 들어 아파오고 결국에는 피가 계속흘러 이대로는 안돼니 손목이 아니고 어깨 바로 아랫쪽의 팔을 묶어서 좀 편하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는데, 정말인지의 여부를 살피더니 상처가 심한것을 확인한후 요구한데로 이번에는 철사줄이 아닌 노끈으로 동여 매고 끌려 갔었단다. 끌려 가면서도 항상 찬스만 있으면 튈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기에 팔뚝을 자꾸 흔들어 묶은 줄을 풀어 볼려고 그들의 눈이 안볼때마다 노력 했는데, 줄이 신기하게도 느슨해져 팔아랫쪽으로 저절로 내려 왔는데, 이를 뒤따라 끌려오던 17세된 아이가 보고, 끌고 가는 내무서원에게 보고 할려고 하는것을 얼른 막아서면서, 네가 보고 한다고 해서 평양가서 남아 남는다는 보장은 없으니 같이 살아남는 방법을 찾아 보는게 더 긴급한것이라고 말하여 간신히 무마 시킨후 계속 끌려가는데, 그들 내무서원들도 지쳐서 여러명이 먼저 앞서가고 내무서원 한명만이 붙잡힌 무리들을 감시 하면서 끌고 가는데, 갑자기 앞이 잘 안보이게 하는 짙은 안개가 덮쳐 이때다하고 옆으로 슬쩍 빠져 줄행랑을 쳤었는데, 내무서원들이 놀라서 인근 주위를 다 뒤졌으나 안개에 가려 결국 찾지 못하고 헤매는 사이 그자신은 벌써 그들로 부터 멀리 달아나 무사히 그들로 부터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다시 부산기지로 돌아올수 있었단다. 같이 작전에 참전했던 900 여명의 대원들 대부분은 작전중 현지에서 붙잡혀 총살당했거나 중노동에 처해져, 불과 몇명만 살아 남았다고 한다. 그 부대의 소속은 한국군에 소속된 부대가 아니어서 국방부 기록에도 없었고, 오직 미군들만이 인정하는 부대여서, 전후 이들의 전적을 한국전사에 알리기 위해 무진 노력도 했었다고 설명해 주셨다. 그래서 3번째의 삶을 살게 되면서 '제3의 생명'이라는 명으로 특수임무수행내용을 정리하여 책으로도 발간하여 이들의 활동상을 남겨 놓지 않으면 아무도 이를 한국전사에 알릴방법과 사람이 없을것 같아, 이렇게 되면 먼저간 동료들에게 너무나 많은 죄를 짖는것 같아, 임무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 이민 오기전 청와대와 국방부를 비롯한 관련 기관에 우편으로 보냈었다고 한다. 그후 고국방문시마다 국방부에 들려 특수임무수행내역을 설명해주어, 이제는 그부대와 활동상황이 국방부 전사에 정식으로 등재되여 먼저간 동료들에게 진 빗을 일부나마 갚게되여,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여 있는 옛전우들을 방문시 마음 편하게 보고하곤 한다고 말씀 하셨다. 이내용이 뉴스 미디아에도 알려져 TV방송과 인터뷰도 하고 해서 이부대의 존재를 많은 국민들이 알고 있다는 얘기도 해주셨다.
오래전 형님께서 주셨던 "제3의 생명"을 읽고 대강의 내용은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본인이 밝히는 내용은 책에서 읽어본 내용과는 또 다르게 온몸에 전율이 느껴옴을 함께 하면서, 역전의 용사라는 말이 꼭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로 드라마 같은 인생, 84세인 동서분에게 이렇게 좋은 세상에서 더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셔야 될 충분한 이유를 당신은 소유하고 계시니, 옛동료들을 생각하면서 무병장수 하시라고 지금 이순간에도 마음속으로 빌고 있다.
뻐쓰는 어느새 Brighton에 도착하여 우리부부를 내려 주려고 정차한다. 오늘 오타와 행사에 참석하신 참전용사님들, 그리고 재향군인회원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그분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뻐쓰가 다시 시야에서 사라질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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