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y 26, 2011

Fairway를 한때의 waterfowl 가족이 점령하여, 샷을 중지하고..






아직도 Fairway를 비롯한 온 골프장이 wet하여, 그렇치 않아도 잘 못하는 골프클럽을 휘둘러서 맞히는 공의 나가는 방향은 설명이 필요없이 내가 원하는쪽이 아니고 제멋데로 날아가고 싶은데로 날아가는것으로도 모자라 옷에 흙탕물이 튀는 그런 첫날이었다. 카테지에 금년시즌들어 처음으로 달려가, 첫날 골프는 그렇게 보냈다.

클럽하우스에서 클럽의 주인 Gregg와 Linda는 작년 시즌이 끝난후 처음 만났는데, 그들을 만나서 인사를 하는 마음은 또 이들 부부의 도움을 받으면서 한시즌을 즐길수 있는 때가 되였구나 였다. 그들도 무척 반가워 하는것 같았다. 밖에서는 오늘 당번으로 일하고 있는 마샬인 Charlie를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겨울 보낸 얘기도 했었다. 그는 3개월 동안 Texas에서 추운 캐나다의 겨울을 피해 잘지냈다고 한다. 나보다 약 4살 정도는 연상인것 같은데, 얼굴이 좋아 보였다. 라운딩 잘 하라고 격려해주면서, Lunar에게도 반갑게 한다.

날씨가 엎지락 뒷지락 하는가하면, 장단이라도 맞추듯이 가랑비도 내렸다가, 햇볕이 나는가 하면, 어느새 하늘은 흙빛으로 변하는가 하면, 소나기가 내리고..... 그렇게 금년에는 날씨가 나와 Lunar의 여름철 카테지 생활을 지난해에 비해 거의 한달정도를 늦게 하도록 발을 묶었었다. 첫날에 신었던, 방수가 잘된다는 Foot Joy골프화가 젖어들어, 다음날에는 다른 골프화로 바꾸어 신고 라운딩을 했으나, 이역시 젖어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햇볕이 내려쬐서 였는지, 첫날보다는 Fairway의 컨디션이 많이 좋아져서, 볼때리기는 좋았고 신발 젖어드는것도 첫날 보다는 훨씬 가벼웠었다. 아까 프로샵에서 인사 하면서, 주인 부부에게 시즌오픈이후로 비즈니스는 어떤가(?)하고 물었더니 울상이다 시피 하면서 거의 매일 내리다시피 하는 날씨에 죽을 쑤고 있다고 한말이 이해가 될것 같다. 장사가 잘되어야 그들의 얼굴이 밝아지고, 골퍼들 돌보는것도 더 신경을 써줄것이기에 좋은 날씨가 계속 되기만을 빌어야 할것 같다는 생각이다.

18 hole 을 라운딩 하는데 14 hole이 Pond를 끼고 있어 유난히도 이골프장에는 Waterfowl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들오리와 기러기가 많다. Back 9의 Par 5인 첫번째 홀에서 second shot을 할려 하는데, 그리 멀지 않은곳의 Fairway를 가로질러 한떼의 병아리 기러기와 앞뒤에서 엄마와 아빠 기러기가 Guard를 하면서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 솜털로 옷입은 새생명들의 움직임에서, 이세상의 모든 새생명들은 귀엽고 활기차고 또 겁이 없어 보이는 희망만을 가슴속에 안은채 전진 하고 있는 그자체를, 자세히 그리고 의미있게 보고 느낄수 있어, 행여나 내가 날린볼이 그들중의 하나에 맞을까봐 샷을 중지하고 그들이 다지나서 옆의 Pond로 들어간것을 확인한뒤에 샷을 날렸다.

Pond속으로 옮겨간 가족들, 특히 어린 새끼들은 두려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앞뒤에서 Guard를 하고 있는 엄마, 아빠의 빽을 믿고 재잘대고, 맴돌고, 먹이를 찾아 입을 벌리며 짭짭 거리고.... 엄마 아빠는, 그광경이 귀엽고,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다음 세대에 생명을 이어지게 하는 의무(?)를 자연스럽게 때를 맞추어 해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감탄되여 볼때리는것을 잠깐 잊고, 멍청히 쳐다보고 있는 나와 Lunar의 모습에서 마치 자기네들을 공격이라도 할려는 모양으로 보였던지, 그들의 만의 경고음을 계속 발하면서 경계를 서고 있는것같다. 그들이 새생명을 잉태 시키는 시기는 감탄할 만큼 정확하다. 이른봄에 알을 낳고, 날씨가 좋고 나쁘고, 햇볕이 있거나 반대로 비가 오거나 상관없이, Nest에서 품고 있다가 Hatching 하여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지축을 뚤고 나온 새순을 뜯어 먹으면서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이 짙어 가면 성년으로 자라 부모와 헤여져 그들의 만의 부부의 연을 맺고 추운 겨울을 보내고, 그다음 이른 봄이 오면 그들은 다시 그들의 삶을 다시 다음 세대에 이어주는, 매우 엄격하고 규칙적인 삶을 살아가는 광경을, 또 여름과 가을 늦게까지 골프를 하면서 수도 셀수 없이 그들과 Fairway에서 조우하면서 생명의 신비함을 가슴깊이 느끼곤 했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느껴지는 신비함이 가슴속에 더 깊이 자리를 매김하는것을 보면서, 우리의 인생살이와 비교도 해본다.

우리 인간은 새생명 잉태에 그들처럼 일년에 꼭 한번 때를 맞추어 하는 법칙이 없이, 사철 아무때나 낳아 기르면서 생명의 역사를 이어가고, 좋고 나쁜 숱한 사연들을 엮어내고 있는점이 크게 다른것 같다. 어떤 생명은 자손이 귀한집에, 부자집에, 하루 세끼를 먹기 어려운집에, 봄에 여름에 가을에 또 겨울에 태어나고, 어떤 생명은 자손이 많은 집에 태어나서 각기 주어진 부모의 여건에 따라 그렇게 환경에 익숙해 하면서 성년을 향해 달린다. 우리 인간은 성을 종족을 퍼뜨리기위해서 사용도 하지만, 쾌락의 욕심을 채우기위해 아무때나 활용하고 Control 하지만, 그들은 오직 종족 보존을 위해서 꼭 때가 되면 한번 사용한다. 이점이 오늘 나의 골프샷을 멈추게 한 기러기식구들과 크게 다른점이다. 그들은 적어도 내생각으로는 부를 더 많이 축적 했다거나, 더좋은 Nest를 소유했다거나, 더 많이 배웠다거나 하는 거추장스러운(?) 장식물하고는 무관하게 똑같이 평등한 삶을 누리고 있는것 같이 보인다. 내가 보기에는 그점이 무척 부럽게 보이기도 하지만. 창조주께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 주셔서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다스리게 하셨다는점에 대해서는 무척 고맙고 감사하게 믿는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다스리고 관리하기 위해서 특별히 다른 생명체에서는 볼수 없는 손을 자유자재로 활용할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것이 아닐까(?)라고 고마움의 의문을 제기해보면서, 때로는 그범위를 넘어 냠용되는 경우를 살아오면서 많이 보아온 경험이 있기에, 행여나 통치자께서 참다 참다 더 이상 못참으시고 격노 하실까(?)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느낌도 종종 생활속에서 본다.

우리 인간세상은 만물을 다스리는 특권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이에 만족치 않고 먹고 먹히는 살육의 싸움이 끝이지 않고 있다. 육신의 양식으로 삼기위해 기러기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붙잡아 배를 채우고 나면, 그들처럼 오손도손 삶을 이어가는 쪽으로 생각하지를 않고, 더 쌓아놓기위한 다음 방법을 찾아 몸을 움직이고 때로는 해서는 안될 만행을 저지르면서, 같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생명도 끊어 버린다. 저 Pond위에 떠있는 기러기 가족이, 그렇게 잔인한 인간속에서 어우러져 살아가는 우리를 쳐다 보면서 얼마나 냉소를 보낼까?라는 망상(?)을 해본다. 괜히 기러기 가족에게 미안해진다. 발길을 옮겨 잠시 잊었던 볼 때리를 하기위해 Stance를 잡고 클럽을 휘두르기위해 어깨와 허리를 꼬아 본다. 잘 맞히기를 염원 하면서.....


Sunday, May 22, 2011

개인의 능력이 증명되는 사회 - Oprah Winfrey의 퇴장을 보면서


TV를 가끔씩 시청 하는 사람이라면, Oprah Winfrey를 기억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믿고 싶다.
그녀의 가정생활은 우리 이민 1세들의 가치관으로 보면 보범적인 삶이 못된다는것을 모르는 사람 또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북미의 생활이 자유분망 하다는 내용일수도 있고, 먹고 먹히는 밀림지대에 사는 맹수들의 삶과의 비유일수도 있겠다. 그러한 그녀가 18개월전에 폭탄 선언을 했던 그약속을 이제 지킬려고 마지막 순간을 대비 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Oprah 토크쇼 막내리고...그녀의 다음 행보.

5000번 이상의 대낯에 진행된 토크쇼, 시청자들에게 TV쇼의 진수,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어떻게 꾸준히 실천을 향해 가야 하는가를 가르쳐준 내용의 쇼가 이제 한번만의 녹화 방송을 남겨둔채, 이제 그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 그녀는 해방되는 기분이다 라고 소감을 피력했다.

그녀를 능가할 또 다른 인물이 나올까?

TV 방송국들은 그녀가 없는 오후의 대낯방송의 시청율이 떨어지지는 않을까에 대한 고심을 많이 하고 있는것 같다.
방송관계 내용을 제작하는자나 발표하는자들은 다음쇼의 흥행과 성공 여부를 위해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것 같다.

Oprah쇼를 시청해 왔던 시청자들은 대체프로그람을 보게 되기를 원하고 있으며 그들중 많은 시청자들은 그녀가 창설한, 내년에 좀더 시간적 여유를 갖고 그녀가 사회를 보는 또 다른 쇼인, 5개월된 케이블방송 OWN을 어느 방송국에서 하게 될까를 찾아 서성이고 있다.

"나의 열정을 이제 끝내야 한다. 왜냐면 이제 다른 재능을 갖인 사람들이 해야 한다는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쇼에서 물러 난다는것은 나만이 아닌 다른이에게도 또 다른 경험이기 때문이다." 라고 지난주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다.

오는 수요일에 방영될 " The Oprah Winfrey Show"의 마지막은, 20여년전에 "The Tonight Show"의 진행자 Johnny Carson이 마지막 방송을 한후 무대에서 사라진이후 TV역사상 가장 큰 순간이 될것으로 보인다.

Mr. Carson은 걸어서 무대 뒤로 멀어져 갔으며 결코 되돌아 보지 않았었다. Winfrey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일은 더 큰위험을 향하고 있을수도 있다 하겠다. 그녀의 케이블 방송 OWN은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더 큰 사업으로 키워 나가기를 원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시청율은 실망을 금할수 없을 정도로 저조하게 나타나고 있다.

"내가 사라지는게 아니고 다만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능력을 보여줄 또다른 면을 새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내용은 지금까지 해왔던 쇼보다 폭이 더 깊고 넓은 내용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OWN에 대한 우려는 무척 크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에, 부부가 서로 속이고, 친자확인을 주제로한 쇼의 진행자 제안을 받았을때 이를 거절하고, 대신에 심적으로 정서적으로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아라' 라는 쇼를 하겠다고 했을때 많은 이들이 잘못 선택한 그녀에 대한 걱정을 했었으나 한낱 기우였음을 증명한바가 있다.

텔레비젼의 상업성을 놀라게 하면서 그녀는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지금까지 미전역의 최고의 인기있는 토크쇼 진행자로 자리를 지켜왔다.

Winfrey와 연관된 사람들은 그녀가 OWN 방송에 걱정스런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나는 더 많은 시청자들이 즐겨 보기를 원하고 있읍니다." 라고 주간쇼 OWN 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그녀는 18개월전에 현재 진행하고 있는 방송프로를 그만 두겠다고 결정한 결정에 대해 매우 편안해 하는 마음인것 같다. 이제 몇개 안남은 쇼 진행을 앞두고 Ms Winfrey는 그녀의 마지막 쇼에서 어떤 얘길 꺼내야 할까?를 두고 고심중에 있다고 설명을 하기도 했다.


http://www.nytimes.com/2011/05/23/business/media/23oprah.html?hp


그녀의 입지전적인 삶의 내용은 보는이들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 넣어 주고도 남지만, 한편으로는 연민의 정을 끊을수 없게 하는 어려서의 불행하고 어려웠던 면이 강하게 마음속으로 파고 든다.

그녀의 삶의 일부를 살펴보면, 그녀는 TV 사회자, 여배우, 제작자 그리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선행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으며, 모든 상을 휩쓸은 토크쇼의 여왕, 20세기를 살아가는 아프리카-어메리칸으로서는 가장 부자로 묘사되는 인물, 미국 역사상 가장 선행을 많이 베푼 흑인여성, 지구상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여성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알려진 인물이다.

그녀는 미시시피의 한 시골에서 가난한 미혼모 가정에서 출생 했다고 한다. 그후 Milwaukee로 이주 했고,
그녀는 9살때 강간을 당했으며, 14세에 임신을 했다. 아이는 출생후 바로 사망하는 시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후 그녀가 아버지라 불렸던 이발사와 테네시주에서 한동안 같이 살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재학시 래디오 방송국에서 일자리를 얻어 근무하게 됐고, 19세의 나이로 Evening News 공동 진행자로 발탁되여 활동의 영역을 넓혔으며, 그녀의 호소력 있는 멘트는 그녀를 다시 한낯의 토크쇼 진행자로 발탁되여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시카코의 지방방송 토크쇼에서 3등으로 밑바닥을 헤메고 있는 쇼를 금새 최고의 인기있는 토크쇼로 끌어 올리는 이변을 낳게 했었다고 한다. 후에 그녀는 자신이 직접 토크쇼를 제작해 각 TV방송국에 제공하는 진행자겸 프로듀서가 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녀의 앞날에 더큰 행운이 함께 해서 그녀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 큰 웃음을 선사 하기를 빈다.

Thursday, May 19, 2011

전 IMF총재 Strauss-Khan 가택거주조건으로 보석허가를 보면서

전 IMF총재 Strauss-Khan 가택거주조건으로 보석이 허가되여 오늘 석방 됐다는 기사를 보았다.
관련 내용을 Globe and Mail 에서 발췌한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전 IMF총재 Strauss-Khan씨가 맨허탄의 최고급 호텔에서 호텔 여자종업원을 강간 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누명을 벗기위해 끝까지 싸울것이라고 선언한뒤, 뉴욕주 법원의 한판사가 보석 허가를 했다고 한다.

뉴욕주 최고법원 판사 Michael Obus 씨는, 그의 변호사들이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여, 62세의 Strauss-Khan씨가 백만달러의 현금을 걸고 보석됐으며 조건은 24시간 전자탐지기로 감시하게되며, 집안에서만 거주하는 조건이라고 한다. 또 그는 무장한 감시원 한명을 자비로 고용하여
그의 감시를 받아야 하고, 5백만 달러의 보험 본드를 구입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불란서 TV방송의 저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는 그의 부인 Anne Sinclair와 그의 딸 Camille Strauss-Khan은 서로 손을 꼭잡고 법정에 들어섰고, Strauss-Khan씨는 피곤한 얼굴에 푸른셔츠에 노타이 차림으로 회색자켓을 입고 법정에 섰다.

고급호텔과 1등석 비행기 여행에만 익숙해 있던 Strauss-Khan씨는 월요일 보석신청이 기각되여 지난 3일동안 Rikers Island 감옥에서 지내야만 했다.

만약에 그의 혐의가 인정되면 최고 25년까지 감옥 생활을 할수도 있다고 한다.

수요일 오후에 그는 IMF총재직에서 사임 한다는 편지를 이사회에 보내, 이사회가 그편지를 공개 한것이다.

그이 변호사들은 Strauss-Khan씨는, 범죄기록이 전연 없으며 "사랑받는 남편이자 아버지"이며, 외교관으로, 정치가로, 변호사로, 경제전문가로 그리고 교수로 살아온 인물이라고 발표하고 있다.

이사건을 관련하고 있는 공무원에 따르면 DNA 검사가 지금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그결과는 앞으로 3-4일이 걸릴것이라고 했다.

아프리카 Guinea에서 이민온 32세의 호텔 여종업원이 경찰에 증언한 내용은, Strauss-Khan씨가 변소에서 알몸으로 나와 그녀에게 다가와 바닥에 눕히고 오랄섹스를 하도록 강요 했으며, 그녀의 속옷을 벗기려고 할때 그를 밀어뜨리고 방을 빠져 나왔다고 말했다.

Mr. Strauss-Khan씨는 하룻밤에 $3,000 달러하는 고급 호텔에서 지내다가, 전염성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만 수용하는 Rikers감옥에 감금되여, 자살기도를 막기위해 감시원을 부쳐 감시 했고, 식사는 그의 독방에서 혼자 했으며 감옥안에서 이동시에도 꼭 간수가 밀착 동행 했다고 한다.

Sofitel 호텔의 그가 묵었던 방에서 DNA 여부를 채취하기위한 검사를 실시 했으며, 검사원들은 호텔 여종업원이 그의 방에 들어가기위해 Keycard의 사용여부와 그방에 그녀가 머무른시간 등의 증거를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자세한 내용은 관련 기사 URL 참조.

http://www.theglobeandmail.com/news/world/americas/former-imf-chief-strauss-kahn-granted-bail-on-home-detention/article2028227/

전형적인 남자들의 속성을 선명히 보는것 같다.
남자들이 열심히 노력하여 바랐던바 목적을 성취하고 성취감과 만족감뒤에 정상에서 느끼는 허탈감을 달래기위해, 해서는 안되는 돌발 행동을 하다보면, 평생을 쌓아 올렸던 명성과 모든것을 다 잃어 버리는 얼간이 행동을 하게 되는것 같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그랬고, 며칠전에 세상에 밝혀진 전 캘리포니아주 지사 스와즈네거가 그랬고, 미국의 전상원의원 게리하트가 그랬고, 또 비슷한 관련 사건들은 손가락으로 이루 다 헤아릴수 없을것 같다. 여기서 남성과 여성사이에서 확연히 다른 본능을 보게 되는것 같다. 이러한 남성과 여성간의 본능 차이는 인류창조 이래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지만, 이를 보는 시각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해오고 있다는것을 역사를 통해 조금은 이해 한다. 오늘날에는 여권이 신장되여, 목소리가 예전에 비해 무척 커져있음을 무지한(?) 남성들이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 같기도 하다. 어쨋던 바짝 바닥에 엎드려 사는 지혜를 요즘의 남성들이 터득해야 한다고 믿는다. 속에서는 진실이 아닐지라도.....

들은 얘기인데, 일본의 정치판에서는 여당이건 야당이건 따지지 않고, 배꼽아래에 대해서는 알체 언급을 삼가는 불문률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바 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직까지 일본의 정치판에서는 배꼽 아래의 일때문에 정치적 파산과, 평생을 들여 쌓아온 명성과 재력이 몰락 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실질적으로 이러한 문제는 본능의 산물이기에 여,야를 구분하지 않고, 서로 상생하기위한 어쩔수 없는 방법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는것 같다.

이번의 사건을 보면서, 남성들이 교훈으로 삼아 앞으로는 비슷한 일이 발생 하지않을것이라는 생각은 굉장히 낭만적인 기우에 불과 할것으로 본다. Consensual 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갑자을축.... 한바퀴를 돌고도 5년 이상을 더 살아온 오늘, 이기사를 읽으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남성들의 처신폭이 계속 코너에 몰려가고 있다는 처량한 신세가 되여버린 세대의, 시대의 변화가 의미하는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해본다. 오히려 본능의 욕망이 사라져버린채 하루 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허무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서글픔이 역설적으로 다행으로 여겨지는 현실을 탓해 무엇하랴.

Monday, May 16, 2011

5/16, 50주년을 회고, 박통에 감사할줄 아는 성숙된 의식필요, "박정희 국제공항"으로 개명

나는 그때 중학교 3학년이었었다. 사회생활 시간, 아니면 역사시간(?)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나지만,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등등의 내용으로 꽉 차있는 혁명공약을 암기 시키는 선생님으로 부터 회초리 아니면 꾸지람을 피하기위해 우둔한 머리로 제6장까지 암기하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5/16혁명 5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아침, 영화 필름을 돌려보듯 희미하게 풀려 나온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남들이 박통을 비난하는 대열에 서서, 나자신의 자아 판단도 없이 '국민들의 안녕질서를 잘 지키라고 총칼을 쥐어 주었더니, 하라는 일은 안하고 그총뿌리를 국민들에게 들이 대고, 불법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무너 뜨리고, 정권을 탈취한후, 자유를 억압하고 못살게 군다'라고 비난 했었다.

그생각은 1974년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지하철을 건설하는 Project에 참여 하면서, 일본에 기술습득을 위해 파견되여,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일본 하네다 공항에 내려 Custom clearance를 통과할때 승객들을 검사하고 있던 세관원들의 복장과 자세를 보면서, 지금까지 박통과 그정권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무조건 비난만 해왔던 나의 생각을 순식간에 바꾸는, 마음속에 큰 쇼크를 받으면서, 나의 잘못된, 편견된 생각을 바꾸게되는 계기를 접하면서다.

그후 일본에 있는 동안, 공무원 졸병의 신분이라, 돈이 없어 호텔투숙은 엄두도 못내고, 여관에서 먹고 자면서 철도의 신기술 배우는데 몰두 하곤 했었다. 하루는 음식 시중을 드는 젊은 여성의 손을 우연히 만져보는 기회가 있었다. 첫순간에 놀란것은 그렇게 예쁘고 젊은 여자의 손이, 서울에서 보아왔던 여성들의 손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거칠고 군살이 박혀 있는것을 보았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시중드는 그녀의 무릎팍도 보게 됐는데, 거북이 등뚜겅처럼 군살이 박혀 있는것을 보면서, 일본이 잘사는 나라라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 이여성은 고생을 하는가?라고 속으로 질문하면서 해답을 찾을려고 하다가 풀리지않아 무례를 무릅쓰고, 그녀에게 물어 보았던 기억이 이아침에 새삼 떠오른다.

 "일본 사람들은 모두가 열심히 일하고 있읍니다. 제가 여관에서 시중드는것은 다른 노동자에 비하면 아주 가벼운 노동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그말에, 일본이 잘사는 이유를 어렴푸시 알수 있었다.


당시의 조국은 남녀 청년실업자들이 그수를 헤아릴수 없을만큼 많았었다.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터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 괴로웠던것은 겨울철이 채 지나기도전에 양식이 다 떨어져 보릿고개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돌맹이도 소화를 시킬수 있다는 젊은이들이 굶주린 허기를 채우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웠었다. 실무자로 현장에서 있었던 내가 본 관점은, 박통께서는 5천년 역사를 통해 보릿고개를 제대로 넘지 못한 가난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국가 기간산업을 발전시키고, 공장을 세워서, 양질의 젊은이들이 그곳에서 일하도록 하는길이 국가를 경제적으로 부강하게 만드는 첫길이라는 점을 통찰하고, 그과정에서 파생되는 어쩔수 없는 인권과 자유를 유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것도 간파 했기에,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서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고통이 될수 있는 정책을 수립하여, 24시간 개척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앞장서서 이끌었었다고 믿고있다.

역사가들이 기록한 자료에 의하면 당시의 조국은 전세계에서 꼴찌인 India 다음으로 GNP가 낮았었고, 이북의 김일성과 그의 Regime이 이끌고 있는 공산정권도 남한보다 3배이상 잘살고 있었다고 한다.

굶주림 앞에는 인권이니 자유니 하는것들은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배가 고픈데 그러한 이즘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져 열심히 일해서 그대가를 받아 배부르게 먹는것 외에는 아무것도 가치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오늘날의 조국 젊은이들,아니 60대 아래의 국민들은 비교적 배고픔을 덜겪었기에, 인권과 자유가 먼저인것 처럼 인식하고 있어 피부로는 그절박함을 잘 느낄수 없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배부르고 여유있는 삶을 살아가는 세대들에게, 어려운때 국가를 이끌었던 박통을 포함한 국가의 지도자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현재의 기준에 맞추어 하는 폄하하고 평가할려는 주위 여건 때문에 시대적 상황에 맞는 평가를 하기가 어려워 질것으로 걱정된다.

성군 또는 대왕으로 추앙받고 있는 세종대왕같은분도 오늘날의 자유와 인권을 구가하는 시대를 중심으로한 잣대로 평가한다면, 국민을 사유재산쯤으로 여긴 군왕으로, 악명높은 독재자로 밖에 평가 받을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재단을 했기에 성군, 대왕으로 오늘날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라고 나는 믿는다. 박통의 통치 시대도,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평가를 해야, 조국 근대화를 위해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자유와 인권을 일부 유보하면서,주야로 건설현장에서 뛰었던 결과로 아시아의 4용(Dragon)중에서 홀로 우뚝서는 경제성장의 발판을 만들고, 보리고개를 영원히 우리의 삶에서 사라지게 했던 공적을 제대로 평가 할수 있다고 본다.

자유와 인권이 일부 유보 됐었다고 하지만,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이 사회생활 하는데는 불편을 크게 느끼지 못했었다고 생각된다.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사회적 생활을 다 할수 있었다. 다만 대다수의 국민들이 불철주야 건설현장에서 경제의 초석을 놓기위해 뛰고 있을때, 민주주의와 인권유린등을 내걸고 박통을 공격했었던 몇명의 정치적 투사(?)들에게는 제약이 있었지만....

그중의 한사람은 훗날 대통령까지 했었지만, 당시 그는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에 투입된 불도져 앞을 막고 드러누워 시위를 하면서, 자동차도 없고,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운반할 물동량도 없는데 왜 비싼 차관을 들여다 낭비하면서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고혈만 더 착취하려는 수작이라고 외쳐 대면서 혼자서 애국자인양 쑈를 했던 생각이 난다. 훗날 그가 고속도로를 제일 많이 애용(?)했다는 얘기가 회자되고 있다고 들었다.

오늘날 대도시의 발이 되고 있는 지하철, 국토의 대동맥 역활을 하고 있는 고속도로들, 중공업단지 조성,그리고 수출만이 조국이 잘살수 있는 길이라는 신념을 당시에 시도하지 않았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를 상상해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과 같이, 박통이 시동을 걸고, 할수 있다는 자신감을 국민들에게 심어 주었기에 오늘의 발전된 조국속에서 국민들의 삶이 선진국 수준으로 향상되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현실을 비뚤어진 눈으로 재단하지 말기를, 고국의 젊은이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고국에서도, 이곳 교민 사회에서도 성지순례여행을 터키로 많이 가고 있다. 다녀온 친지들의 여행담에서 근대터키공화국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Mustafa Kamal Artartuk의 시신이 안치된 Mausoleum을 방문해서 그분이 왜 터키사람들에게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가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탐구하고 왔다는 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아직까지 없다.

터키의 Capital City인 Ankara의 시내 언덕바지에 조성된 그의 성전은 일년내내 터키 전국으로 부터 찾아온 방문객들과 외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들끓었으며, 여행객인 나와 Lunar가 성전뜰에 들어섰을때는 마침 터키군 의장대가 그의 시신이 안치되여 있는 중앙성전으로 행진하고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여행객들속에 끼어 우리도 안을 구경하게 됐었다. 앞중앙에 그의 시신이 안치되여, 경의를 표하고.... 터키에는 크고 작은 도시 어디를 가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그의 동상이나 기념관을 만들어 그를 추앙하고, 후세들에게 연결시켜주고 있음이 너무나 부러웠다.

사실 Artartuk은 Ottoman제국의 장군으로 세계 일차 대전때, Ottoman제국의 군총사령관으로 호주 독일 영국과 불란서 군이 중심이 된 연합군과 갈리폴리 반도에서 싸워 Otoman 제국(터키)병사 십만명 이상을 전사시킨 패장이었다. 그결과로 Ottoman제국이 멸망하고 많은 위성국가들이 독립해 나가고, 현재의 터키 영토만 남게한, 대한민국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는 분명 Traitor 로 낙인찍힐 인물이었지만, 그런 오점은 모두 접어두고 그가 남아있던 터키영토에 공화국을 창설하여 근대 터키공화국의 기틀을 만들었던 공적을 높이사서,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고 했다.

박통을 여기에 비교 하는것 자체가 잘못일수 있겠지만, 역사를 통해서 알게된 Artartuk과 박통의 업적을 비교해 볼때, 박통은 5천년만에 처음 있을수 있는 경제중흥과 국가안보의 초석을 다진 영웅임에 틀림 없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오늘 조국의 현실은, 그를 기리기위한 기념관 하나 없고, 고향에 초라한 생가만이 있을 뿐이다. 기념관은 고사하고, 일제에 협력했고, 독재자라는 악담이나 안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기념관 또는 Mausoleum 건축이 재정적으로 어렵다면, 아쉬운데로 현인천 국제공항의 명칭을 "박정희 국제 공항"으로 바꾸어 부르면 어떨까? 터키의 이스탄불 공항이 "Artartuk International Airport"로, 미국의 수도 워싱톤 공항을,Reagan 대통령이 서거후 그를 기념하기위해 "Reagan International Airport"로, 필리핀의 마닐라 공항이 "아퀴노 국제공항"으로, 토론토 공항이 "Pearson International Airport"로 그외 영국, 불란서 등의 여러 국제공항들이 리더들의 공적을 기리기위해 개명하여 불리고 있다.

국제사회에서의 대한민국 위상이 OECD국가군에 가입했고, 그에 걸맞는 국가의 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믿는데, 그 첫단계로 공항명칭을 개명하는길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할 임무라고 나는 믿는다.  지구상 수백개의 나라중에서 역사가 반만년인 대한민국에서는 아직까지도 국가에서 인정한 "영웅"한명을 탄생시키지 못했다. 과연 인물이 없어서였을까?



Sunday, May 15, 2011

꽃사슴들의 서식처 Dundas Valley 숲속의 Trail Walk,TKPC와..











밑에서 올려다 본 Tiffany Falls와 Sherman's Falls는, 쌓여 있던 눈이 녹아 내려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많은 양의 물이 떨어지던 이른 봄철과는 달리, 양이 많이 줄었지만, 대신에 떨어지는 물속의 뒷켠에 폭포를 이루고 있는, 단단한 돌층으로 한겹한겹 쌓여 지층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훤히 들여다 볼수는 있었다. 지층을 이루고 있는 한장 한장의 돌층 두께가 믿어 지지 않을 정도로, 마치 벽돌을 쌓아 놓은것 처럼, 정교한데 마음속으로 부터 감탄을 금할수 없었다. 같이 Trail을 걷으면서 이폭포의 장관을 보고 있는 TKPC대원들도 한목소리로 똑 같은 탄성이다. 어떤 대원은 옷을 벗어 던지고, 떨어지는 폭포속으로 들어가 안마를 받고 싶다는 느낌을 큰소리로 외쳐 대면서, 이마에서 흘러 내리는 땀의 열기를 식히고 싶다는 기분을 그렇게 나타내기도 했다. Tiffany 폭포는 Main Trail에서 약 500 미터 정도 Side Trail을 따라 언덕위로 올라가면 그곳에 장엄한 폭포가 자리를 잡고 풀리지 않는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것 처럼 변함없이 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Tiffany Falls는 기록에 의하면, 미국의 Massachusettes 출신의 젊은 의학도가 이곳 Tiffany Falls가 있는 Ancaster 지역에 정착을 한후 무려 40 여년동안 주민들의 건강을 지켜 주면서, 부도 축적 했었단다. 그가 Dundas Valley지역의 넓은 땅을 구입하여 관리 하다가 말년에 전부 정부에 기증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의 남북전쟁에 Soldier로 참석 했었다고 한다. Tiffany Falls라는 이름은 그의 Family name을 기념 하기위해 붙여진데서 유래 한다고 한다.

Humberbay Park West에서 대원들이 모두 만나, car pool을 하여, QEW와 Hwy 403를 달려 약 50분후에 Wilson St.와 Tiffany폭포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Shoulder Parking장에 도착, 주차 시키고, 길을 건너 언덕 아래로 뻗쳐 있는 Trail을 따라 이어진 울퉁불퉁한 바위들로 덮혀 있는 Trail을 따라 산행을 시작했다. 오늘처럼 안개가 끼고 이슬비가 간간히 뿌릴때는 발길을 옮기는데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을 더 해야 하는 구간이 길다는것을 걸으면서 느낀다. 주위에 널려져 있는 바위돌에는 태고의 신비를 보여 주기라도 하듯, 파란 이끼들이 빽빽히 덮혀있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철의 뜨거운 낯에는 더위를 피해 숲속을 걷게 된다면 단연코 이곳을 추천 해주고 싶은, 산책에는 그만인 구간임을 오늘따라 머리속에 깊이 새기고 있는 내마음을 뚜렷히 읽기라도 한듯, 매번 산행때마다 보이지않게 앞에서, 뒤에서 열심히 힘써 오고 있던, 여자 대원한분이 '여름에 다시 이곳에 와서 이길을 또 걷고 싶은 마음이 생기네요. 오늘 산행구간 너무나 잘 선택 하셨어요'라고 좋아 하는 모습이 너무나 순수해 보인다. 이러한 마음들이 우리 TKPC 대원들간에 오래오래 Fellowship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이 갑자기 엄습해 온다. 별로 표현도 많이 하지는 않지만 행동으로 보여주고, 할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고마운 대원들.

주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산책로 역활을 대변이라도 해주듯 길이 넓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걷기에 아주 안성맞춤인것 같다. 대원들도 구룹을 이루어 발길을 옮기는 모습과 대화가,Back Pack만 안보인다면 영락없는 인근주민들의 산책을 보는것 같다. 한대원이 언덕윗쪽을 가리키면서 '와 정자가 저런곳에 있다니... 우리 점심 거기서 먹어도 되겠네..'라고 대원들의 시선을 그곳에 집중 시킨다. 고국의 깊은 산속에서 보았던 조그만 정자, 중국을 여행 하면서 많이 보아왔던 산등성이에 있는 신비스런 정자들을 연상케 한다. 갑자기 걷고있는 Trail윗쪽 언덕에서 돌짝들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 오기에, 발길을 멈추고 빽빽한 나무숲들 사이를 통해 응시했다. 수십마리의 사슴들이 우리처럼 행군을 하면서, 우리를 발견하고 놀라서 뛰다가 발길에 채인 돌짝들이 흘러내리는 소리였음을 알았다. 전체가 회색갈의 털로 싸여 있는데 오직 궁둥이의 한곳이 하얀털로 덮혀 있는 모습들이 할수만 있다면 같이 친구하고픈 생각이 들게 했다. 미쳐 카메라를 들이대고 찰칵 하기도전에 모습이 거의 사라져 버린다. 자기네들이 살고 있는 서식처임을 그들은 빠른 행동으로 보여주는것 같았다.

더 계속해서 전진하면 가을철이면 자주 찾곤했던 Spencer Gorge를 만나게 됨을 지도에서 확인 했었다.
마음으로는 그곳까지 시간의 구애을 받지않고 걷고 싶지만, 발길을 되돌려 왔던 길로 방향을 잡았다. 정자가 있는곳에 이르러 점심을 먹으면서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짐을 풀었다. 정자는 멀리서 보았을때와는 달리 아주 튼튼하고, 정교하게 잘 건축되였고, 또 관리도 잘되여 있다. 정자에 앉아 윗쪽으로 나 있는 길위로는 가끔씩 차들이 달리는 소리도 들리고, 아래로는 자연경관과 흐르는 얕은 물소리가 잘 어울린다. 다시 윗쪽길을 따라 오른쪽을 보니 안내 간판이 보였다. Gate Museum 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표시판이었다. 아까 전진을 끝내고 되돌아 왔던 지점에서 조금만 더 갔었으면 바로 Gate Museum을 볼수 있었던 바로 그박물관이다.

옷이 젖게 땀을 흘린다음의 점심은 꿀맛이다. 한대원은 요즘 채취한 나물무침을 준비했고, 또 다른 대원은 오이를 먹기좋은 크기로 잘라 한그릇 준비해서 대원들에게 제공하기도 했고, 팥이 들어 있는 간식용 식빵을 곁들여 온 대원, 식도락가인 한대원은 떡볶기를 해와 입맛을 한층 돋구어 주기도 했다. 서로간에 계산이 없는 가족의 분위기가 어떤 것이라는것을 바로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육신을 건강하게 지켜주는 것은 지금 바로 나를 포함한 대원들이 먹고 있는 음식이다. 여기서 우리 대원들만이 축복받고 있다는것을 더 깊이 느끼게 하고 있는점은, 영혼을 살찌우게 하는 양식인 사랑을 대원들 서로가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산행후 Ancastor있는 Tim Hortons에서 마시는 한잔의 커피향은 육체적 피로를 싹 가시게 해준다.
이곳은 분위기가 다른 coffee점에서 마실때와는 다르게 느껴진다. 주위를 둘러 보니 우리대원들을 제외한 모든 손님들이 백인인것을 보면서, 이곳 조금만 타운에는 아직 우리처럼 이민자들이 거주하고 있지 않다는 감을 느끼게 해주었고, 조그만 Strip Mall이었지만, 안정되고 깨끗해 보였었구나 라는 이유를 알것 같았다.
걸으면서 못다한 삶의 얘기들을 서로 나누다보니 많은시간이 흘러간것을 느낄 겨를이 없이 지나갔다.
켜피향은 집을 향한 차속에서도 계속 풍겨나오는 기분이었다. 감사.

Saturday, May 14, 2011

년중행사인 봄철 나물채취 드디어 끝났다.




캐나다의 폭설과 춥고 긴 겨울이 끝나 간다는 신호는 봄철 나물캐는것으로 부터 느끼게 된다.
아직 잔설이 곳곳에 조금씩 남아 있거나, 갑자기 춘설이 내리는 속에서, 아직 파란 잔디를 포함한 풀들이 지지개를 펴고 지표를 뚤고 세상에 나오기전에 먼저 나오는 전령은 우리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달래'들이다. 아직 어리지만 때로는 눈속을 헤집고 파란잎파리가 솟아 나와 있는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생명력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좋은 건강식품이다. 그뒤를 이어 다른 종류의 봄나물들이 따스한 햇볕을 따라 고개를 들고 기지개를 펴기 시작하면서 겨울은 완전히 가는구나라고 느끼면서, 나무숲속을 이러한 나물들을 찾아 헤매는 회수가 늘어나면서 바쁜(?) 일과를 만들어 보내게 된다. 겨울내 차거운 땅속깊은곳에서 이때를 기다리다가 지표를 뚫고 세상으로 나와서 세상의 맛을 채 보기도전에 우리는 기다렸다는듯이 연한 순을 채취해서 나른해 지기 쉬운 봄철의 밥상을 풍성하게 만들어 몸 보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확실히 기억은 하지 못하지만, 봄철이 오고 있다는 봄맞이 행사처럼 여기면서 숲속을 헤치며 나물을 채취하기 시작한것은, 길고 지루한 캐나다의 겨울은 밖에 활동이 많은 제약을 받아 집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갑갑함을 하루라도 빨리 탈피 하면서 봄냄새를 맡고 싶은 간절함에서,약 이십오년전부터 밖으로 나가게 된데서 시작된것다. 올해도 채 찬바람이 가시기전에 Lunar가 먼저 달래가 자라고 있는 우리밭(?)으로 가보자고 채근하기에 매년 다니던 물가(Creek) 나무숲속으로 지난 4월 중순경에 차를 몰았었다.

아직은 연녹색의 야들야들한 달래순들이 미쳐 잡풀들도 올라오지 않은데서 나홀로 군데군데 올라와 있는것을 보면서 이제 긴 겨울은 다 지나갔다라고 정성스럽게 Spade를 이용하여 한뿌리 한뿌리씩을 뽑기 시작했었다.
달래는 농가에서 키우는 실파보다 더 가늘고 캐기도 쉽지가 않아 팔목이 아프게 흙을 파헤쳐 두어시간씩 채취해도 양이 쉽게 불어나지 않는다. 조금채취한 달래를 다시 물가로 가서 흙을 깨끗이 씻어내서 비닐백에 담아 차에 싣고, 바삐 집으로 달려온다. 시간은 벌써 저녁에 가깝다. 다시 부엌싱크대에서 수도물로 깨끗히 씻어서 TV가 있는 Living room의 탁자위에 달래를 올려놓고, 과도를 이용하여 뿌리 하나 하나를 떼어내는 작업을 하면서 TV 채널을 돌리고,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고국에서 보내오는 연속극을 보면서, 땅속에서 Spade로 캔 시간만큼을 소비하면서 뿌리따내는 작업이 끝난다. 다시 수도물에 깨끗이 씻어서, 저녁 밥상에 올려놓기위한 요리를 Lunar가 부지런히 한다. 고추가루를 이용한 양념을 이용하여 달래 겉저리를 만들어 상에 올리면 마음부터 밥상은 풍성해진다. 입에 한입을 넣은 순간부터 '아 이제 봄철 나물캐는 고행(?)의 시즌이 시작됐구나'라는 희비가 교차하게 된다. 희는 새생명을 몸속에 영양삼아 넣을수 있어서이고, 비는 쭈그러트리고 앉아 아픈 허리를 참아 가면서 지루하게 하나씩 채취할 생각이 머리속에서 그려지기 때문이다.

달래를 캐기 시작하면서 뒤따라 지표를 뚫고 나오는 참나물, 취나물, 고비, 산마늘, 야생마늘 등등....을 채취한다. 달래를 제외한 다른 나물들은 조금만 노력하면 금방 먹을만큼 양이 불어나서 좋다. 달래를 제외한 다른 나물들은 아는 친지분들과 같이 가서 채취하는 경우가 많지만, 달래는 절대로 비밀(?)에 부쳐놓고 Lunar와 둘이서만 필요할때마다 가서 채취하는데, 달래가 제일 먼저 봄의 전령노릇을 하는대신에 그만큼 고고함을 유지 하기 때문에 다른 나물채취에 비해서 열배이상 힘이들고 어렵기도 한점이 있지만, 달래가 서식하는곳은 다른 나물들 서식지에 비해 매우 드물기 때문에 있는곳을 알려주게 되면, 그날로 부터 우리 부부가 다시 채취할 기회와 양은 없어져 버린다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모든이들에게 최고(?)의 인기 봄철 보양식이기 때문이리라.

요즘은 식탁위에 올려지는 반찬은 파란색일색이다. 우선 나물에서 뿜어 나오는 특유의 향이 맛을 돋구어준다.
TV앞에 Lunar와 둘이 앉아 Sit com을 보면서 나물을 손질하는 등등 자연에 나가서 노동한 결실로 겨울내 축났을 팔과 다리의 근육이 활성화되여, 건강을 회복시켜서 좋고 그노력의 결과로 밥상이 풍부해져 봄철 나른해지기쉬운 입맛을 돋구어 튼튼한 몸을 유지해주고 있다는것을 느끼기에 나물채취가 이어지는것이다.

지난 목요일(5월 12일)부로 금년도 나물채취는 마감을 했다. 잡풀이 이제는 너무나 많이 자라 그속에서 달래를 찾아 캔다는것은 물속에서 물고기를 손으로 잡는것 만큼이나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날것으로 먹기에는 늙어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비도 늙었고, 참나물도 늙었고, 다른 나물들도 거의 비슷하게 너무나 자랐기에 다시 나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Lunar는 달래김치를 담아, 마치 늦은 가을철 김장을 하는것 처럼, 잘 모셔놓았다. 오래된 김장김치처럼 깊이 익은 달래김치의 맛을 느끼게 될때는 또 긴 캐나다의 겨울이 한창일것이다. 지금부터는 달러채취하기위한 허리아픈 고통(?)이 있을 필요가 없게되여 마음이 가볍다. Lunar가 '여보 한번만 더 가보자' 라고 나의 의향을 물어올때 거절 하지는 못하고 나갔었다. 해온 나물들은 내가 거의 다 먹어 치우기 때문에 마음속에 양심이 '노'라고 쉽게 대답을 할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캐나다의 넓고 좋은 자연속에서 이렇게 봄을 맞이 할수 있다는점에 깊은 감사를 항상 느낀다. 이제 부터는 날씨가 허락되면 골프로 시간들을 보내게 될것이다. 감사.

Friday, May 13, 2011

식탁을 풍성케 했던 금년도 봄철 나물채취 오늘로 마감

긴겨울이 지나고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 온다는 3월이 지나고 4월이 다 끝나갈 무렵이면, 년중 행사중의 하나인 봄철 나물채취가 시작된다.

LA Times의 '숭례문 복원공사 기사를 보면서....


국보로 지정되여 뭇사람들의 사랑을 600년 이상 받아오던 남대문(숭례문)이 어느때 부터였던지, 시민들의 접근이 허용되면서, 마음만 먹으면 아무때고, 누구나 남대문속으로 들어갈수 있게 허용 되더니, 드디어 3년전에 어느정신병자의 방화로 어이없게 전소 돼고 말았었다. 그때 고국의 모든 언론들이 한반도의 서울에 무슨 큰 재난이나 난것처럼 앞다투어 화재현장의 소식을 생중계로, 신문은 Extra를 발행 하면서까지, 당초에 시민들의 접근을 허용 안했어야 했느니, 당시 서울시장으로 재직중이던 이명박 현대통령이 시민들의 접근을 허가해준 장본인으로 그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지와, 이를 관리하고 있던 문화재청의 관리소흘로 이런 어마 어마한 보물이 타버린것이다라고 관련 부서들을 공격 하면서, 법석을 떨었던 기억이 지금도 머리속에 생생하다. 그뒤에 복원을 위한 목재를 찾아 전국의 산림을 탐사하고, 강원도에서 복원에 쓰일 소나무들을 확보 했다는 소식이 있은 이후로는 오늘 현재 까지 아무런 복원공사의 진척 상황을 언론에서 보거나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LA Times에서 서울발 기사로, 숭례문(남대문) 복원 공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5월 8일자에 계재 한 기사를 읽어 보면서, 당사국인 대한민국의 Media들은 화재시에 보도했던 그열정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아니면 다른 기사가 넘쳐 미쳐 기회를 잡지 못해서 였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일체의 후속기사가 없었다. LA Times가 아니고 고국의 Media들이 이러한 중간 보고 형식의 진척 상황을 먼저 보도 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동시에 아직도 내면적으로 자기것을 중히 여기고 또 아끼는 마음이 겉치장에 불과한 고국의 현실을 다른 나라의 Media가 간접적으로 대변해 주는것을 보는것 같아 씁씁함이 가슴속 깊이 내려 앉는 기분이었다.

LA Times의 기자가 이기사를 작성할때, 그는 분명히 복원 현장을 찾아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목수들을 포함한 관련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역사적 의미를 되새겼을 것이다. 그들의 현대 건축공법으로는 이해가 잘 안될법한 공법에다 사용공구도 600 여년전에 선조들이 사용했었던 연장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연장들을 만들기위해 현장에 대장간을 설치하여 그곳에서 공구들을 만들어 조달하고 있다는 내용까지 아주 자세하게, 생동감 있게 묘사 했다. 이기사를 고국의 Media들이 분명히 보았을텐데, 그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기사를 읽으면서, 대목장과, 사용되는 재료들을 서로 이어 부치고 조이는데 쓰이는 것은 목재와 나무를 깍아 만든 못(Nail) 그리고 목수들의 손을 빌려서 사용되는 연장을 사용하여, 그렇게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었음을 신기한듯 묘사하고 있는것을 나자신도 새롭게 감탄스러워 할 따름이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역사적 의미가 깊은 국가보물을 재건축하는데, 국민과 커가는 아이들 교육 차원에서라도 보고형식의 기사를 간간히 계재하는 마음의 여유가 없을까? 이다음에 완성되고 개통 Tape을 끊을때에는 거창하게 소나기 내리듯 한번 쓰고, 그것으로 다시 남의 일처럼 뒷전에 밀쳐지고 말것이라는 안타까움이다.

기사의 내용을 대충 간추려 옮겨 보았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한 남자가 3년전에 땅값보상에 대한 화풀이를 한답시고, 숭례문 이층에 올라가 방화를 하여 숭례문의 90 %가 소실됐던 이화재로 대한민국의 보물이 없어져 버린것을 다시 그자리에 옛선조들이 활용했던 공구들만을 사용하여 재건축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공구들, 즉 못, 망치 그리고 다른 연장들을 만들기 위해 건축 현장에 임시 대장간까지 만들어서 그곳에서 직접 필요한 공구들을 만들어, 목수들이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대장장 신응수옹은 이번 숭례문 복원 공사와 깊은 인연이 있다고 한다. 1962년 당시 숭례문 개축공사를 할때, 애송이 애송이 목수로 참여하여, 당시의 대장장 및 목수들로 부터 공법을 배워, 외길 인생을 살아온 산증인인 것이다. 70이 넘은 그가 지금은 대목장으로 직접 대패질까지 하면서, 손자벌 되는 젊은 목수들에게 그가 평생 지니고 지켜온 옛공법을 전수 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한다. 610년전 선조들이 사용했던 공구들과 공법을 그대로 접목 시키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편 국민들간에도, 재건축을 놓고 뜨거운 설전이 끝이지 않고 있다고한다. 재건축을 반대하고, 현재 있는 그대로 두어, 이를 보는 사람들과 정부관리들에게, 다른 비슷한 국보급 건축물에 대한 철저한 보호를 위한 경각심을 우러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와 반대로 다시 옛모습 그대로 복원하여 우리 조상님들의 얼을 후손에 넘겨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어, 문화재청 주관으로 국고예산 $25백만불을 투입하여 2008년 부터 재건축을 시작하여 오는 2012년 12월에 완료하게 된다고 한다.

대목장 신응수옹은, 옛모습 그대로 복원은 자신 있다고 일부에서 우려하고 있는 걱정을 일축하고 있다.
신대목장은 "남대문은 분명히 국가적 보물이며, 불타기전의 주춧돌은 여전히 그대로 존재하고 있어, 그위용을 자랑하고 있읍니다" 라고.

http://www.latimes.com/news/nationworld/world/la-fg-korea-wall-20110508,0,382943.story

LA Times의 남대문 복원공사 진행 기사를 보면서...

Thursday, May 12, 2011

P형 부부의 초청으로 오랫만의 골프회동과 맛있는 저녁도

P형부부와 우리 부부가 오랫만에, 아니 금년 시즌들어 처음으로 골프회동을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바람이 불고 아직 마음을 을씨년 스럽게 했던 날씨가, 쾌청한 날씨에 바람도 거의 없다시피 해서 골프 하기에 최적(?_)인것 같았다. Aurora에 있는 Highland Gate골프장에서 오후 2시30분 Teed-off. 지난 겨울 큐바 골프 여행 다녀온 후로 금년도 시즌이 시작된후 Lunar는 처음 나들이 한것이고, 나는 두번째다. 2 Decade전에 와서 라운딩해본 기억이, 첫번째홀 Tee Box에 올라서면서,되살아 났다. 그사이 주위는 완전히 고급 주택들로 둘러싸여 처음 와본것 처럼 혼돈이 있었던 것이다. 콘도에서 부터 시간을 계산하여 약 한시간의 여유를 두고, 달려 갔는데 교통이 잘 소통되여 생각보다 약 20분여 빨리 도착 했었다. 아직 P형 부부는 보이지 않고.....
많은 골퍼들 사이에 한국분들도 부부끼리 팀을 이루어 한적한 오후를 즐기는 모습이 보기에도 좋았다. 우리의 Tee off시간 10분전 쯤되자 P형 부부가 멀리서 바삐 Pull Cart를 끌고 우리가 있는 첫번째 홀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분들은 오후 1시까지 아들이 하는 store 에서 일을 해주고, 이렇게 달려온 것이다.

첫번째 홀에서 내려친 볼은 P형은 Fair way에서 약간 왼쪽으로 빗나가 Rough에, 내볼은 Fairway 오른쪽의 Sand bunker바로 앞에 떨어지는, 좀 골프를 했다는 사람들이 볼때는 엉망인 샷일텐데, P형이나 나 역시 '볼이 살았다' 라고 만족의 너털 웃음을 날리면서, 두분 여자분들이 Tee shot 하는것을 지켜 봤다. 우리 남자둘보다 실력이 좋아서 였을까(?) Fairway에 안착 시킨다. Cart를 제각기 끌면서 볼을 찾아 발길을 옮겼다. 마침 뒤따라 오는 다음 team이 눈에 안보여 여유가 좀 느껴져서 한가롭게 칠수 있어 더 좋았다.

며칠전에 P형이 전화를 걸어와 같이 골프 라운딩을 하자고 제의를 했다. Club Link에서 금년도 멤버쉽을 구입 했는데, Rolling Hill골프장에서 주로 라운딩 하는데, 5월 말까지는 Highland Gate에서도 라운딩 할수 있는 ticket이 여유가 있다고 설명까지 해주면서 수요일에 하자는 것이었다. 매일 오후 5시에는 그분들의 따님의 아이를 Kindergarten에서 Pick Up을 해와야 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저녁 늦게까지 즐길 시간이 없는데, 오늘 즉 수요일에는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따님이 쉬는 날이기 때문에 같이 라운딩 하고 저녁식사도 같이 할수 있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월요일에 Brighton의 Cottage에 올라갈 계획을 세워 두었기에 초청은 고마우나 시간이 맞지 않기에 다음에 하자고 후일로 미루었는데.....예상치도 않게 월요일에 Cottage에 갈수 없게 되였다. P형의 제안을 받아 들일수 없었던 거절이 마음에 부담이 되여, 다시 연락을 하여 수요일에 같이 라운딩 할수 있다고 했더니, 좋아라 하면서 Booking을 먼저 해놓고 다시 연락을 해주겠다고 했었다.

P형은 아직 이곳에 이민 오기전 고국에서 같은 직장에 다니면서 알게 됐던 사이인데, 이민은 그분이 우리 보다 약 1년 먼저 왔었다. 당시 언니네가 하는 가게의 물건을 구입하러 Cash and Carry 도매상을 따라 갔었는데,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P형이 먼저 나를 알아보고 반가워 하면서 부터 지금까지 우정을 나누고 있다.
지금은 모두 결혼한 자식들의 아이들 보살펴주고, 또 아들의 가게에서 도와 주느라 마음놓고 시간을 내여 집을 비우는 기회가 거의 없이 열심히 자신들이 촛불이 되여 자식들에게 빛을 발하고 사는 분들이다.
우리 이다음에 은퇴하면 한곳에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편하게 여생을 즐기면서 여행 다니고, 또 골프도 하고....등등의 장미빛 그림을 얼마나 많이 그렸었던가. 은퇴를 하면 모든게 그렇게 마음 먹은데로 이루어질거라는 희망은, 열심히 살겠다고 뛰어 다니는 새끼들을 보면서, 나 몰라라 외면만 할수가 없어, 오늘처럼 시간 내기가 무척 어렵게 은퇴 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인데, 우리 부부를 Invite한것이다. 고마울뿐이다.
매년, 매번 만날때마다, Cottage에서 며칠 쉬면서 같이 라운딩 하자고 제안을 했었지만, 자식들이 더 걱정이 되여 기회를 만들지 못해, 그분들도 우리가 느꼈던것 처럼, 마음속에 늘 미안함을 안고 있었던것같다.

볼은 잘나가도 Nice shot, 못맞혀도 Not bad 으로 아우르면서, 그져 같이 걸으면서 살아가는 얘기들을 가식없이 있는 그대로 나누면서, 세상에 대한 불만, 자식들에 대한 서운함, 캐나다가 좋은 나라인것을 우리가살아 가면서 느낀점, Gas값이 천정 부지로 뛰어 앞으로는 골프치러 멀리 운전 나가는것도 쉽지않겠다는 일상에 대한 푸념, 밤에 기쁨조 노릇을 이제는 잘못하니 낯에 기쁨조 역활을 잘 해드리겠다고 말해 모두들 볼 때리는것을 잊어 버리고 한바탕 웃어 제끼게 해주는 Mrs P의 천연덕스러운 Joke 등등..... 여기서는 골프 스코어적는 카드도 필요 없다. 그만큼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를 간파하고, 샷하면서, 발걸음 옮기면서 스코어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어쩌다 다른 분들과 라운딩 하다보면, 스코어에 신경쓰는 경우, 진정한 Fellowship을 나눌기회를 잃어 버리는 경험이 있음에 비추어 볼때, 오늘의 라운딩이 더욱 값져 보이고 마음에 새겨두고 싶다.
그래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오늘 나의 샷은 다른때와는 다르게 비교적 Steady한것 같았다. 그만큼 라운딩 하기가 편했다는 뜻이다.

저녁식사까지도 푸짐하게 잘 대접 받았다. 저녁은 우리 부부가 부담하고 싶어, 잠깐 변소좀 다녀와야 겠다고 핑계를 대고 카운터로 갈려고 했더니, Mrs P가 꼼짝을 못하게 했다. 그래도 마음이 안놓였던지, 식사가 다 끝나기도전에 아예 계산을 다하고나서 다시 식사를 계속한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 하기도 하고....
며칠후 Cottage에 가면, 연락을 할테니 며칠 시간내여 같이 골프도 즐기고, 주위 자연경관도 둘러 보자고 다시 제안을 했더니, P형은 그분 특유의 미소만 짖고, Mrs P는 나와 Lunar를 두눈으로 응시 하면서, 마치 "우리 사정을 다 알면서 그런 제안을 하면 내가 뭐라고 답해야 하겠소"라는 눈치다. 골프를 좋아하는 그분들의 마음은 왜 즐기고 싶지 않겠는가? 이민와서 지금까지 열심히 일한 그분들이기에 경제적으로 큰 부자는 아니여도 노년을 경제적 걱정없이 보낼수 있는 터전을 닥아논 성실함이 우리 부부가 그분들을 좋아하는 이유다.

헤어진후 열시가 넘어 집에 도착하자마, 바로 P형의 셀폰으로 고맙다는 Text message를 보냈는데, 아마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을 가능성이 높다. 얼마전에도 같이 Fellowship을 나누고 메세지를 보낸일이 있었는데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Function에 대해 오직 전화통화 하는것만 이용하고 있다는 증거인데, Text 메세지의 편리함을 알려준일이 있었다. 그분부부가 메세지를 읽고 안읽고와는 상관없이 그져 나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였으니까....그만큼 세상을 복잡하게 살지않고, 주어진 여건속에서 평범하게, 꼭 필요할때만 문명의 이기를 간단하게 생활에 활용하는 정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로 나는 보고 있다.

이제는 Cottage에 가서, 여름 생활을 즐겨야겠다. P형 부부가 시간을 내서 한번 온다면 더좋은 시간을 보낼수 있을테고, 그렇치 않으면 매년 해온데로 Lunar와 같이 세상사 복잡함을 뒤로 두고 한적하게 길지않은 여름시간을 골프와 주위 자연경관을 둘러 보고, 비오는 날이면 한시간이상 달려 Kingston으로 쇼핑도 가고....주말이면 다시 토론토로 되돌아와서 친지들 만나보고, 공과금 납부도하고 그렇게 보낼것이다. 감사.

Tuesday, May 03, 2011

보수당 대승 - Canada Votes 2011







보수당 대승 - Canada Votes 2011

보수당수상, Stephen Harper의, 침체에 빠져 있는 경제를 활성화 시키기위해서는 보수당이 재집권해야 하며, 그것도 Minority 정부로서는 경제정책을 밀고 나갈수가 없어, 다시 선거를 치르게 되야 할지도 모르니, Majority로 정부를 구성하게 해달라고 호소했던게, 불황의 늪에서 헤매고 있는 캐나다인들에게 먹혀들어, 대승, 그것도 캐나다 역사상 거의 처음 일어난 사건 정도로 압승을 거두고 말았다.

지난 3월 22일 선거 실시를 발표하기전, 소수정권인 보수당은, 경제활성화를 염두에 둔 예산안을 짜서, 의회에 승인 요청을 했었다. 제일 야당인 자유당, 제3당인 블록 퀘백당, 그리고 NDP가 연합하여, 예산안에 대한 불신임 대신에, 보수당이 국회에 충분한 설명없이 밀어 부쳤다는 명분을 부쳐, Non confidence 투표를 실시하여, 결국 보수당을 좌초 시키자 마자, 바로 선거에 돌입 하여 37일간의 선거운동을 거쳐 어제밤에 그결과가, 보수당의 대승으로 마감하고 만것이다.


제일 야당이던 자유당은, 자유당수의 행적에서 국민들로 부터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그위에 또 부인이 시민권자가 아니라는점이 유권자들에게 알려지면서, 크나큰 악재로 작용 하여, 자유당의 아성이라고 하는 온타리오주에서 마져 몰락하고 말았다. 블록퀘백당은 캐나다를 대표하는 정당이 아니라 퀘백주를 대신하는 정당이라는 이미지때문에, 그렇타면 퀘백정부가 있는데..... 라는 개념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갑자기 Surge하기시작해, 등을 돌리면서, 그여세가 색갈이 크게 다르지 않는 NDP로 쏠려, 그야말로 노다지를 캐는, 복권이 당첨되는 행운을 얻어, 퀘백당이 차지하고 있던 퀘백내의 의석을 거의 다 쓸어 않는 행운을 얻었다. 퀘백주를 포함한 전국에서 NDP가 선전하고, 퀘백당과 자유당이 몰락한 큰 이유중의 하나는 젊은이들의 애호품인 컴퓨터의 공이 크다고 하겠다. Twitter에서는 직접 Twitting하여, 젊은이들 사이에서 공감대가 급속히 형성되는 이변이 크게 작용했었다고 보겠다.

내가 살고 있는 구역은 자유당수 Ignatieff가 재선을 노리는 구역이었다. 이와 맞서 싸우는 보수당 후보는 Trottier였다. 나는 그의 얼굴도 모른다. 그러나 보수당의 정책을 지지 했기에 그에게 표를 던졌는데, 자유당수를 누르고, 그것도 가볍게 당선되여, 내가던전 귀중한 한표가 큰 역활을 했구나 라는 안도감을 갖기도 했었다. 초라하게 몰락해 버린 자유당의 패배와 당수인 그자신마져도 의석을 잃어버린후 선거에대한 평을 하는 그의 모습을 TV에서 보면서, 한편으로는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이 정치 생명은 어제밤으로 마감된 셈이기 때문이다.

퀘백당수 Deceppe도 그의 선거구에서 낙선하고 말았다. 결과가 발표된후 강단에 오른 그의 모습은 당황 그자체였다. 연방선거에서 퀘백당의 말뚝만 박으면 당선되는 전례를 상상 하면서 선거에 임했을텐데..... 지역당으로서의 역활을 젊은층이 한마디로 거절해 버린 결과라는것을 퀘백당이 늦었지만 깊이 느끼고, 정신 차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NDP는 예상치도 않은 선전에 제1 야당이 됐다. 퀘백에서 불기 시작한 NDP의 훈풍이 전국적으로 삽시간에 퍼져 선거일을 불과 10여일 앞두면서, 여론이 뒤바뀌기 시작했던게 주효한것 같다. 그러나 제1야당으로서의 역활을 제대로 해 낼지 벌써 걱정이 앞선다. '졸부'라는 말이 머리에 떠오른다. 없던자가 갑자기 부자가 되면, 겸손해 지기 보다는 목에 힘을 주고, 돈의 위력을 과시하여 자기의 처지에 걸맞지 않는 행세를 할려다 보면 좌충우돌 하게 되는 광대놀음을 하게되는데, 그러한 졸부의 속성이 캐나다의 국정을 흔들어 놓지는 않을지 걱정이 들기도 하다.

보수당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한껏 살려서, 우리 모든 캐나다인들이 지금 불황에서 헤매고 있는 어려움을 하루속히 빠져 나올수 있도록, 선거공약에서 외쳐 대면서 호소했드시, 밀고 나가는 정부가 됐으면 하는 바램이다.


각당의 의석 획득수를 어제밤 12시 현재로 보았을때,
보수당 167석, NDP 102석, 자유당 34석, 퀘백당 4석, 녹색당 1석.

이번 선거중의 이변은 녹색당이 의석을 처음으로 획득 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적어도 앞으로 4년 내지 5년동안은 연방 선거가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Monday, May 02, 2011

동토의 토론토에도 봄맞이하는 뭇사람들이 모습이...








4월의 마지막날 오후, 얼마만에 걸어보는 호숫가의 산책길이였던가?. 아침에만 해도 가랑비가 내리고, 몸의 컨디션은 감기의 곤욕으로 부터 헤여나질 못해, 매주 나가던 Trail Walk도 2주째 빠져, 안에서 TV만 보면서, 창문 너머로 넓게 보이는 온타리오 호수위를 유유자적하는 Waterfowl들의 행렬을 초점없이 쳐다 보기를, 그옆으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호숫가 산책로를 따라서 아직도 부슬부슬 내리는 이른봄비속을 헤쳐가면서 한가롭게 발길을 옮기는 뭇사람들의 모습에서 꿈속에서나 맞아 볼수 있을 것처럼 멀리만 느껴지던 봄이 오고 있다는것을 어려푸시나마 느낄수 있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걸으면서 웃음이 끊이지 않는 젊은 남녀들, Baby Cart를 밀면서 Board block위를 평화스럽게 걷는 젊은 엄마들(?), 다정스럽게 손에 손을 잡고 지나온 삶을 회상하기라도 하듯 산뜻한 옷차림을 하면서 걸어가는 나이드신 짝들, Bench에 앉아서 뭔가 열심히 손짖들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부터 열기를 뿜어내는 사람들....천태만상으로, 나에게는 아직은 스산한 공기의 느낌이지만, 흘러오고 있는 봄기운을 그렇게, 실종해 버린 햇볕을 그리워 하면서, 희뿌연 구름속아래서 제각기 느낌으로 맞이하고 있음이 눈에 확연하다.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부터 희뿌연 구름은 걷히고 대신에 햇살이 대지를 내려쬐기 시작한다. 햇볕이 몰고 오는 봄의 향기를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나도 소중한 순간같아, 아직 감기에서 완전히 헤여나지 않은 몸상태를 염두에 두고,봄맞이 하는 옷차림보다는 좀 두텁게 준비하고Lunar와 같이 우리도 호숫가 산책로를 동쪽으로 향해 걷기 시작했다. 멀리 downtown쪽의 skyscraper들의 선들이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산책로 왼쪽 옆으로는 몇년사이 빽빽히 들어선 콘도건물들이 서로의 위용을 자랑하듯 독특한 모습들을 뽐내고 있는것 처럼 끝도없이 이어진다. 그들 앞으로는 공원처럼 조성된 빈공간에 푸른 잔디들이 봄의 전령역활을 확실히 해주고 있는 모습도 장관이다. 호숫가 공원의 놀이터에는 아이들, 젊은 엄마들 그리고 아빠들.... 서로 어우러져 오랫만에 찾아온 봄햇살을 놓칠세라, 그네를 타고, 미끄럼틀을 오르내리고, 씨소오게임을 즐기고, Tricycle를 즐기는 꼬마들과 엄마들..... 와글 와글 하는 소리로만 내귀에는 들린다. 그들의 모습에서 봄이 오고 있다는것을 느낀다. 그들도 우리처럼, 모처럼만에, 환히 개인 하늘속을 뚫고 내려쬐는 햇볕을 타고 밀려오는 봄의 냄새를 흠양하러 온 것이리라

얼굴에 부딪치는 미풍에서 봄의 냄새를 맡을수 있을것 같다. 향이 나는것 같다.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여인의 모습에서도 봄 냄새를 맡을수 있었다. 호숫가의 백사장과 물속에서는 백조를 포함한 기러기 갈매기 청둥오리들이 한데 어울려 봄을 찬양 이라도 하는것 처럼 그들만의 노래 소리가 끊이지않고 울려 댄다. 어떤이가 준비해온 빵조각들을 던져 주면 더 요란해 진다. 봄이 오고 있기에 이러한 광경이 전개 되고 있다고 믿고 싶다. 하늘도 모처럼만에 파란색이다. 긴 겨울동안을 회색으로 도배되여 그렇게도 마음을 무겁게 해주던 하늘이 파랗게 변하면서, 기분과 마음이 순식간에 봄을 맞이하는 자세로 변하면서, 그환희에 젖어 이렇게 봄맞이를 환영하는 인파로 호숫가의 Board Walk을 포함한 산책로가 봄의 향기로 지축을 흔들고 있는 그속을 우리도 가슴을 펴고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만물이 새로 생명의 역사를 이어가기위해 용트림 한다는 그모습이 어느곳으로 눈을 돌리더라도 훤히 보인다. 물속에서는 mating 하는 waterfowl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나무가지에서는 연보라색 새순이 솜털 처럼 모습을 들어내고, 젊은 남녀들의 옷차림에서도 Mating의 시작을 알리는것 같이 보인다. 주인을 따라나온 개들도 봄이 오고 있음에 마냥 즐겁기만 한 모습이다. 꼬리를 흔들어 대고, 주인의 바지자락에 몸을 부벼대고..... 원치 않는 감기기운도 오는 봄속에 다 녹아 내렸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