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anuary 31, 2009
Forks of Credit Valley Trail Walk.
무릎위까지 빠지는 눈속을 헤치며 Trail Walk하는것은 한마디로 무리인것 같다.
너무나 힘이 드니까 그양 눈위에 주져 않고, 모든것을 Give up하고 싶은 마음이 한걸음 옮길때마다 마음속에서 그래도 계속 걸어서 가야 한다. 아니다 주져 않았다 휴식을 취하고 가자로 계속 머리을 어지럽혔다. 몸이 더 지쳐 갈때는 '왜 중간에서 다른 대원들과 조인해서 회군 하지 않았나?하는 후회가 막심하게 느껴 지기도 했다. 아직 발길이 뜸한, 무릎위까지 빠지는 눈속에서 발걸음을 한발 옮기는데는 보통때 Trail걷는데 소요되는 에너지의 열배 이상이 필요함을 머리에 각인 시키는 좋은 경험이 되기도 하는 기회였다.
지도상에서 걸어야 할 route을 보면서, 계곡속을 걸어야 한다는것은 머리속에 그리고 있었지만, 특히나 언덕길을 오를때는 근육이 당기기도 하고, 반대로 내리막길을 만났을때는 발걸음이 미끌려 route밖으로 밀릴때는 온몸이 눈속으로 빠져 들어가지나 않을까?하는 정도로 미끄러지기도 부지기 수였다. Burce Trail을 몇십년 걸었지만, 각반을 차고 걸어 보기는 오늘이 그 테입을 끊은 날인 셈이다. 다른 대원들은 그동안 겨울내내 이러한 환경속에서 걸었기에 나보다는 훨씬 경험을 살려 잘도 걷는것 같았다. 전체 약 30명 정도가 동참했지만, 약 절반도 채 안되는 대원만이
끝까지 완주 하고, 대부분의 여자 대원들을 포함한 절반 이상의 대원들은, 계곡밑으로 이어진 Trail을 만나기전에 회군 했었다. 그들의 판단이 옳았다는것을, 제대로 밟아도 거의한걸음 옮길때마다 밀려 딴곳에 멈춰 더 힘들게 하는 고행이었다. 마치 마라톤을 달리고 나서 골인지점에 도착했을때의 탈진감 그것이었다. 계곡밑의 Creek가에서 그곳까지 걸어온 대원들이 점심을 했다. 어떤 대원은 눈위에 덮석 주져 앉아 싸온 점심을 펴기도 하고, 오손도손 모여 땀흘린 후의 음식을 입에 넣은 그기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상상하기도 쉽지 않을것이다. 나는 아내가 정성스레 준비해준 볶음밥이 들어있는 마호병을 꺼내 아직 따뜻한 밥을 한입 입에 넣는다. 총각무 한조각도 같이 곁들였다. 집에서 먹는 평소의 양이라면 다 먹고도 모자랄판인데, 다 먹지를 못했다. 너무나 힘드니까 그렇게 양도 줄어드는 것 같았다. 또 다른 마호병에 준비해간 커피를 한잔 마셨다. 속이 시원해 진다. 항상 해오던 데로 힘들었지만, 그냥 선채로 나는 음식먹기를 마쳤다. 다른 대원들 처럼 앉아 먹으면, 해오던 습관데로 혹시 더 앉아 있고픈 휴혹에 빠져 들지 몰라서 였다. 더이상 전진은 안하고, 두가지 route를 리더가 제시해 주었다. Side trail을 이용한 short cut route와 왔던길로 되돌아가는 route였다. 3명의 대원이 오던길로 되돌아 가고, 나머지 대원들은 short cut 을 택했는데, 나도 거기에 합류해서 언덕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대열의 맨나중에 서서 걷기 시작했는데, 반대편에서 백인 남녀 두명이 언덕을 내려 오고 있어 서로 조우 했다. 다른 대원들은 눈인사정도로 지나쳤고, 나는 그들과 대화를 좀 나누었다. 그친구들이 혹시 걷는 도중에 짐승을 본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게도 전연 그런 광경을 목격한 기억이 없었고, Trace도 없었다. 그대로 얘기 했더니,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다 어디로 가서 숨어 지내는지 모르겠다고 푸념이다. 올라가는데 길이 물론 쌓인 눈때문에 험하다고 귀뜸 해주는데, 그와 동시에 다리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Snow board Shoes 착용하고 있어 우리보다 훨씬 걷기가 쉬워 보였고, 그들처럼 준비해 오지 못한, 아쉬움이 그들과 헤여지고 발길을 옮길때마다 생각나게 했다. 한계곡을 올라서면 또다른 올라가는 계곡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서 가던 대원들은 시야에서 사라진지 오래인것 같았다. 혼자서 터벅 터벅, 이리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발길을 옮긴다. 장단지에서 쥐가나는것을 느꼈다. 길가의 나무를 붙잡고, 다리를 relax시키고, 굳어지면 안된다는 마음의 다짐을 또 다지면서, 그렇게 휴식을 취했다. 갈길은 아직도 멀은것을 알기에...... 약 2킬로를 남겨놓고, 왔던길로 되돌아 왔던 대원들을 만났다. 다시 나를 앞서 가면서, 아직 뒤에 한명이 뒤따라오고 있다고 알려줬다. 그가 누군지는 몰라도, 혹시 나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지는 않는지 신경이 쓰였다.
파킹장에 무거운 발걸음을 디뎠을때, 같이 타고갈 일행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모두가 중간에서 회군한 대원들이었다.
차안에서 쉬고 있던 한 대원이 나를 향해 "무슨 귀걸이를 하고 다니느냐?"라고 소리 지른다. 의외의 소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더니 땀이 흘러내려 고드름이 된것인데, 마치 귀걸이 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피곤도 잊은채 한바탕 웃었다. 여전히 뒤에 온다던 그대원은 보이지 않는다. 그대원과 같이 차를 탄 대원들이, 우리를 향해 떠나라고 소리친다. 그들이 기다리겠다고 하면서..... 정확히 4시간을 걸었는데, 12킬로를 주행했다. 엄청난 무리였음을 바보처럼, 차속에서 알아차렸다.
다른 산행팀과 처음 조인해서 걸은 오늘의 산행날자,1월 31일의 기억은 오래 간직될것 같다. 힘들다. 뜨거운물에 푹 담그고 싶은 생각외에는 아무것도 욕심없다.
Thursday, January 29, 2009
매형, 안녕히 가세요. 다시 뵈올때까지....
인생살이는 슬픔과 괴로움의 연속인 장편 소설일가?
음력설이 지난지 2일만에 막내로 부터의 소식은, 나를 멍청하게, 회색빛으로 덮혀있는 그쪽 하늘을 시간의 정지속에서 응시하게 했다.
설날 막내와의 오랜만의 전화 통화에서는 가족들의 안부와 살아가는 얘기등등으로 채웠었고, 다른 얘기들은 없었는데,
오늘 아침 열어본 이멜에서는 나를 안타깝게하는 내용이였다. 2년전 스트록으로 쓰러지셨던 큰 매형께서 어제 하늘 나라로 여행을 떠나셨단다. 그하늘 나라에 가기전에는 뵐수 없는, 그런 곳으로 먼 여행을 가셨다. 문득 먼 기억속에서 매형의 흔적들이 보인다.
아직 사범학교 졸업반이셨던 그형은, 그때 두루마기를 입고, 큰누나를 부인으로 맞이 하기위해, 고향의 넓은 들판을 헤치며, 우리집에 장가 들러온 기억이, 당시 코흘리개였던 나의 기억에, 신기하기도 했고, 왜 누나는 그 생전 처음 보는 그남자에게 끌려(?)가도록 내버려 두는지도, 호랑이 같이만 엄하셨던 아버지를 이해 할수 없었던, 나는 결혼이라는 그이치를 모르면서, 더이상은 같이 한집에서 살수 없는것만 서러워 했었던 기억이 오늘 더새롭게 반추된다.
몇년전에 먼저 이세상을 하직한 작은 매형이 아직 신혼이었을때, 두분이서 같이, 당시에는 전기도 없이 호롱불을 켜고 지내던 그시절에,소달구지도 다니지 못할 정도의 좁은 처가집 가난한 동네입구에 있는 주막집에서 막걸리 몇잔을 마시고, 기분에 젖어 흥얼거리며 집으로 걸어 오면서, 길가에서 먹이를 쪼고 있던 남의집 닭을 날렵하게 붙잡아 목을 비틀어,아직 퍼덕거리는 암탉을 손에 들고 집으로 들어 오면서, '어머니(장모) 이것 잡아서 술안주 해 주시시요 이..' 나를 포함한 동네 코흘리개들은 그뒤를 줄줄이 뒤따르면서 재미있어 했었고, 이를 본 어머니는 '그려 우리 사위 잘 했어, 조금만 기다리소' 하시면서 금방 가마솥에 물을 끓여 펄펄 끓는 물에 튀겨서 요리를 해서, 그러면 두 매형과 형들과 동네 또래의 집안 형님들과 어울려 허탕하게 웃으시면서 술자리를 만들면서 처가집식구들과 그렇게도 잘 지냈었는데.... 엄하시기만 하셨던 아버님은 이 광경을 보시면서, '야 이놈들아 술을 마셨으면 입으로 먹었지 xxx으로 먹었냐?' 하시면서도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셔서, 어느새 피를 나눈 일가들처럼 오손도손 가깝게 지내던 닭주인댁을 찾아가 계산을 치르곤 하셨던 아버님까지도, 그렇게 사위를 사랑 하셨었는데......그런날들이 영원히 계속될것으로 꿈을 꾸곤 했던, 코흘리개였든 나는 그런 매형들의 모습이 마냥 좋기만 했었는데.... 처남(형님)이 어렵게 학교 다닐때는 얄팍한 박봉을 쪼개여 하숙비도 보태 주시면서, 털털 하면서도 챙길때는 챙겨주는 그런 매형이었었는데... 아직도 천진난만한 국민학교학생이었을때, 대농인 매형댁을 놀러가면, 농사일에 바쁜 그와중에도 식사를 챙겨주는 누나를 향해, 어느새 닭한마리를 손에 들고, '처남 동생 잘 먹여' 하시면서, 바로 물만 붙고 끓이면 먹을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곤 했던 그 매형이셨는데.....만남은 이별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나는 멀리 떨어져 산다는 핑계를 대고, 한번도 방문을 못했다. 그전에 고국을 방문했을때, 매형은 살고 계시는 동네의 노인회장을 맡아, 여생을 즐기는것을 본것이 그분과는 마지막이 된것이다. 집안 식구들이 모여 행사를 할때에도, 매형은 항상 분위기를 맞추어 위로는 형님들과 아래 처남들과 사이에 안계서는 안되는 존재로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정신적인 사랑을 참 많이도 받았었는데, 우둔하고 생각이 짧은 나는 그러한 사랑을 되돌려 드린 기억이 없다. 때가 되면 해야 되겠다고 마음속에서만 되뇌이곤 했을 뿐, 또 하나의 후회와 회한이 나를 꽉 사로 잡는다. 누나가 심장이 나빠 대수술을, 서울의 큰 병원에서 할때도, 옆에서 지성으로 간호하고, 그러면서도 말로는 그러지 않는것 처럼 표현하곤 하셨었는데... 이제는 아이들도 다 제 살길을 찾아 떠난 빈집에서 누나 혼자, 매형을 생각하면서 계실텐데.....인력으로 된다면은 누나 혼자 두고 먼저 가실분이 아닌것을 나는 분명히 아는데..... 생을 주관하는것은 창조주만이 하시는 일인것을, 나는 또 깊이 느끼면서, 고통과 눈물이 없는 그곳으로 가시는 매형의 발길이 가벼웠으면 한다. 지난간 세월은 참으로 빠르다는것을 이제야 조금은 느낄수 있을것 같다.
벌써 내나이도 환갑을 지나 삼년을 더 살았다. 위로는 형님들과 누나들도 계시지만, 오늘 매형의 소식을 접하면서, 또 이러한 이별의 고통이 오게 될날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음을, 누가 먼저 일지는 몰라도, 가슴이 저리도록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인생을 산다는 핑계로 나는, 아니 우리인간들은 바로 옆에 것을 보지 못한다는것 경험으로 안다. 잡히지도 않는 그무엇을 잡겠다고, 이렇게 한평생을 떠 돌다가, 집안의 윗 어르신들의 마지막 가는길을 지켜드리지 못한 삶을 어떻게 변명해서 정당했다고 악을 써야 할까? 기가 막힌다. 열심히는 살았다고 말할수 있어도 할 도리를 하면서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숙일수 밖에 없음을, 마지막 먼길을 떠나시는 매형앞에 고백 합니다. 매형, 세상에서의 이 못난 처남의 허물을 용서 해 주십시요. 남은 생애동안만이라도 사람도리를 잘 하겠다는 약속은 드릴수가 없네요. 삶은 현실이기에, 현실을 무시하고 꿈만 먹고 살아갈 자신이 없기에, 다만 노력은 하겠다고만 말하겠읍니다. 그리고 먼길을 떠나시는 매형에게 또 부탁을 안할수가 없네요. 언제일지는 몰라도 매형이 계시는 그곳으로 갔을때, 옆에서 같이 지낼수 있는 거처를 미리 부탁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처남이.
Tuesday, January 20, 2009
큐바 카데나스에 있는 M의 집을, 초청받아 방문했다.
큐바 휴양지에서 휴가를 보내는 외국인들이 큐바인들이 살고 있는 시내를 방문하는것은, 그것도 개인집을 방문한다는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여러가지로 제약이 따르지만, 여행객으로 그런 관계를 맺는것은, 보안면이나, 교통, 기타 보이지 않는 두려움등의 제약 때문이다. 그런데 이의 벽을 깨고, 하얀이를 들어내고 웃을 때는 수줍은 소녀같은 그녀가 우리 부부를, 그녀가 쉬는날 자기 집으로 초청해 주었다. 같이 골핑하던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우리 부부는 18홀만 끝내고, 먼저 골프장을 나와 호텔로 와서, 그녀가 보내 준다고 하는 차를 약속시간에 맞춰 호텔 앞 큰길가에서 기다렸다. 약속시간을 약 20분이나 넘겼는데도 온다는 차는 나타나지 않아 속으로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공산주의 사회라서 어떤 일이 벌어져서 약속을 못지키는것은 아닐까?라고 말이다. 그녀가 설명해준데로, 아주 조그만 빨간 고물딱지 차가 우리앞에 섰다. 그녀는 물론 차가 없기에 차를 사용하고 있는 그녀의 친구에게 부탁하여 온것이다. 큐바에는 개인 소유차량이 없다고 한다. 다만, 정부의 허가를 얻어 정부재산인 차를 개인이 자기것 처럼 사용은 가능하다고 한다. 그는 Dillio라고 하는 건장한 사내 였는데, 인상이 좋아 보였다. 그옆에는 골프장에서 field매니져를 하던 Shobi 였다. 그도 우리와 동행하여 마리아 집에 가기로 미리 약속했기에 일찍 일을 마치고 여기에 온것이다.
Shobi는 우리와 운전사를 서로 인사 시켰다. 운전사는 영어를 거의 못했지만, Shobi의 도움으로 의사 소통에 많은 도움이 됐다.
정말로 그의 차는 오래전 한국에서 보았던 티코처럼 작았지만, 우리에게는 융숭한 대접을 해준다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골프장에서는 별로 말이 없이 업무적으로만 대하던 Shobi가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 그의 과거 이야기를 즐겁게 해주었는데, 그도 캐나다에서 약 10여년을 캐나다 여인과 결혼하여 살았었다고 한다. 이곳 골프장에 휴가온 캐나다 여인과 알면서 사귀게 되여, 결혼까지 꼴인한것 같다. 캐나다와 큐바를 오가면서 생활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지금 현재 30년이 넘게 이곳 골프장에서 일을 해왔는데, 캐나다에서의 생활로 이직업을 놓칠것 같아, 캐나다 영주권을 포기하고, 큐바에 거처를 옮겨 살기를 거부하는 부인과 헤여져 고국인 큐바에서 삶의 터전을 틀고, 현재의 부인과는 현재 7년째 살아가고 있다고 솔직히 말해 주었다. 약 30분을 달려 마리아가 살고 있는 카데나스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이곳은 3년전에 골프여행 왔을때도 들렸던 도시라서 전연 낯설지는 않았지만, 시내를 지나면서 둘러본 시민들의 생활은 더 어려워 보였고,집은 더 망가져가고 있지만, 수리를 한 흔적들은 전연 보이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좁은 골목길을 약 20 여미터 들어가니 그곳이 그녀가 살고 있는 초라한 집이었다.
그녀가 반가히 맞아 준다. 아내가 준비해간 몇가지의 선물을 그녀에게 건네 주면서, Shobi와 Dollio의 부인들에게도 줄 여자용 핸드백을 그들에게 주었다. 고마워 한다. Shobi가 잠깐 나갔다 오더니 자기 부인과 같이 왔다. 몸집도 크과 아담한 부인이었다. 아내와는 금새 친해진것 같다.
듣던데로 거실에는 늙으신 노모가 조그만 낡은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노모는 젊어서는 예쁜얼굴였을것 같았다.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고 꽂꽂했다. 앉은 자세로 우리를 반겨주는 미소를 짖곤 했지만, 소리는 없었다. 나와 아내는 노모아 hugging으로 대신 인사하고 미소로 답례했다. 부엌에는 냉장고를 비롯한 몇가지의 가전 제품이 있었다. 그녀는 그래도 큐바에서는 비교적 상류층에 속하는 구룹에 속해 있는것 같았다. 3년전 이곳에 와서 마차를 타고 시내를 구경할때의 마부집에서는, 지금 마리아가 소유하고 있는 그러한 가전제품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집은 방2개, 거실, 그리고 부엌이 전부였는데, 우리의 방문때문이어서 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깨끗히 청소는 되여 있었다. 변소에는 변기위의 앉는 seat는 아예 없었다. 볼일을 볼때 얼마나 불편할까?를 곰곰히 생각타가, 사이즈를 주머니에 있던 볼펜을 이용하여 측정했는데, 이다음에 또 큐바에 오게 된다면 그때 하나 구입해서 갖다줄 생각에서 였다. 답답하고 불쌍하고, 공산정권에 대한 증오가 더 타오르게 하는 순간이었다. 시장에서 그러한 부품을 구입할수 없거나 있다해도 너무나 비싸서 못했을 것이다.
부엌의 조그만 식탁에 둘러 앉아 이야기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아내와 마리아는 거실고 가서 무슨 얘기들을 하는지 부엌에 얼굴을 내 비치지 않는다. 식탁에는 우리를 대접한다고, 치즈 슬라이스와 Cold meat를 초코릿 청크 크기로 잘라서 plate의 끝부분에 빙둘러 몇조각씩 놓고, 접시 가운데는 올리브를 떨어뜨려 놓았다. 그옆에는 Lobster meat를 소스에 버무려 놓은 dish가 하나 놓여 있었고, 우리에게는 너무나 어이없는 음식대접으로 보였었는데, Shobi와 Dollio는 선뜻 포크를 대지 못하고 눈치만 보는것 같았다. 한점을 먹고난 Dollio는 먼저 집으로 간다고 일어난다. 나는 고맙다고 다시인사하고, 우리는 다시 식탁에 앉아 이바구를 했다. Shobi의 설명에 의하면, 이러한 고급(?)음식은 일년에 한번정도 먹을수 있는 귀한 음식이라고 배경설명을 해줬다. 충분히 이해를 할수 있었다. 그래도 이북의 굶어죽는 동포들에 비하면 이들의 생활은 신선놀음 같아 보였다. 전에 방문했던 마부의 집을 생각해 보면서, 마리아의 생활은 엄청나게 좋은 환경이라는것을 느꼈다.
큐바에서는 좋은 직장이, 물론 공산당들이 필요에 따라 인력을 배치 하기는 하지만, Resort, 골프장 같은, 외국관광객들이 머무는 곳에서 근무하는것이 최상의 직장이라고 한다. 왜냐면은 팁을 얻을수 있기 때문이란다. 상류층구룹에 속하는 마리아나, Shobi의 한달 월급은, 큐바돈으로 약 400 패소라고 하는데, 우리 관광객들이 Resort 안에서 사용하는 패소와는 약 25대1로 가치가 없는, Money trading market에 상정도 안돼있는, 그들만이 사용하는 패소라고 한다. 지난번 왔을때는 미국달러와 1대1로 맞바꾸어 사용하곤 했었는데, 그사이 미국과의 관계가 더 악화되서 인지, 아예 미국달러는 사용이 거의 중지 상태에 있었고, 유로달러, 영국 파운드 그리고 캐나다 달러가 통용되고 있었다. 캐나다 돈 1.50달러가 관광객이 사용하는 1패소인점을 감안하면, 캐나다 돈으로 그녀의 월급은 약 30 또는 34달러 정도 밖에 안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큐바인들은 퇴근후 싸이드잡을 뛰어 여분의 수입을 만들어 생활에 보태고 있다고, Shobi는 설명한다. 마리아는 노모와 그녀의 여자동생과 같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44세인데 아직까지 결혼안했다고 한다. 그녀의 동생은 결혼했다고 했는데 웨딩가운을 입고 찍은 사진은 있었으나 정작 신랑과 같이 찍은 사진은 보이지 않아 우리를 혼란속에 빠뜨렸다. 결국 Shobi와 그의 아내 리사는 식탁위의 음식을 거의 손대지 않고 사양하기만 했다. 그의 설명데로 귀한 음식이기에, 또 구하기가 어렵기에 감히 손을 안대는 것 같았다. 마리아에게 필요한게 있으면 말해 달라고 했더니 펄쩍뛴다. 아마도 자존심을 다치고 싶지 않아서 인것 같았다. 나와 아내는 커피와 맥주를 마시면서, 가끔씩 흔하게 여겼던, 값비싼 음식을 안주삼아 찍어 먹곤했다. 아내가 리조트 안의 식당에서 싸가지고 간 여러 음식들을 곁들여 펼쳤더니, 모두가 깜짝 놀라면서, 놀라는 모습으로 보아 그들은 먹어보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꺼꾸로 우리가 음식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마리아와 Shobi 는 줄담배를 피워댔다. 담배는 무척 싸다고 한다. Shobi는 연기 뿜어 대는게 미안 했던지, 먼저 맥주를 마실때는 자기는 꼭 담배를 곁들인다고 넉살이다.
식탁에 앉아 얘기를 나누다 시간가는줄도 모르고 말았다. 결국 시내 구경은 불발로 끝나고 거의 저녁 7시가 되여 다시 리조트로 되돌아 가야 할 시간이 됐을때, Shobi 먼저 말을 한다. 자기도 리조트가 있는 바라데로지역에 살고 있다고 말이다. 자기는 그곳으로 가는 버스를 이용하는데 자기와 같이 가면 버스를 탈수 있다고 설명한다. 왜 버스를 같이 타야 하는지 버스를 타고 갈때까지 이해가 안됐다. 알고 보니 시민들을 태우는 시내 버스가 아니고, 리조트에 근무하는 직원전용 버스였기 때문이다. 우린 Shobi덕택에 무료로 동승하게 되는 행운도 얻었다.
그렇치 않았으면, 그들의 한달 월급이 훨씬 넘는 많은 돈을 주고 돌아와야 했었을텐데.... Shobi는 바라데로 휴양지에 살기시작한지가 꽤 오래 됐다고 설명해 주었다. 휴양지에 근무하는 대부분의 직원들이 휴양지근처에 살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쉽지는 않다고 하는데, Shobi 뭔가 공산 정부고급관리들과 연줄이 있는가 아닐까? 혼자 생각해 봤다. 메니져인 마리아는 아직도 카데나스에 살고 있는데 말이다.
Shobi는 비교적 영어가, 프랜치 발음이지만, 그래도 유창한 편이다. 신나게 떠들어 댔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외국인이 큐바내의 민간인집에 장기체류할려고 할때는 미리 정부로 부터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휴양지의 택시들은 비교적 깨끗해 보였는데, 모두가 정부가 관활한다고 했다. 택시운전사는 팁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좋은 직장인 셈이고, 몇년전만 해도 종교에 대한 대화를 나눌수 없었는데, 지금은 완와 돼여 원한다면 얼마든지 종교의 자유를 만끽할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매주 교회를 가서 worshiping한다고 했더니, 그는 자기는 출석하지 않는다고 설명해 준다. 혁명 50주년이 지난 15일 이었으니, 그동안에 세뇌교육으로 안전 무장시켰기 때문에 아마도 종교의 자유라는 허울을 띄워준게 아닐까?라고 추리해 봤다. Shobi부부에게, 우리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종교를 갖게 되는데, 너희들도, 캐톨릭이든, 개신교든,아니면 다른 종료라도 믿고 의지해 보라고 권했다. 큐바는 혁명전까지는 95% 이상의 국민들이 캐톨릭 신자였었단다. 나는 그에게 주일날 교회 출석이유는 내자신을 되돌아 보면서, 세상 사는 동안, 나와 관련있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누를 끼치지 말자는 소박한 바램이 있어서 출석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자기도 생각해 보겠단다.
그는 또며칠앞둔 미국대통령 Barack Obama의 취임식과 새로운 큐바와의 관계 개선에 희망과 걱정을 동시에 갖고 있음을 표현했다.
큐바사회의 지성인중의 하나인 그의 고뇌는, 미국과 완전히 끊겨있는, 외교, 교역, 민간인교류등의 관계개선이 되여 미국과의 교류가 빈번해 질때, 현재는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그것 자체가 평준화되여 있어, 사회적 범죄나 문제가 거의 없이 평화롭게 지내는, 순박한 전통이 무너지지 않을까?라는 점이었고, 그런 분위기속에서 경제적으로 좀 낳아진다고 해서 얻는게 뭔가?를 심각히 우려하고 있음을 말했다. 고국의 보리고개를 넘기위해 주야로 열심히 뛰었던 대열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충분히 이해가 됐다.
마리아와 헤어져 뻐스를 타려고 벌써 어둑어둑해진 밖으로 나오는데, 뻐스 정류장까지 그녀가 같이 걸어나와 헤여짐을 아쉬워 했다.
좋은 관계의 이별은 항상 마음을 찡하게 해준다. 이시간에도 우리는 그걸 느꼈다. 다음 만날 기회까지는 또 헤어져 각자의 삶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
Monday, January 19, 2009
Matanzas시내의 유일한 약국 박물관
Matanzas시내의 중앙에는 커다란 건물이 하나 있었다. 정면에는 약국이라는 동판이 지금도 걸려 있었는데, 이곳이 지금은 약국박물관으로 개조되여, 관광객들에게 과거의 영화를 보여주면서, 헌신적인 약사 부부의 봉사정신을 볼수 있었다. 원래 이약국의 약사 부부는 France인으로 그들의 생을 마감할때까지 약사 부부를 비롯한 온 식구들이 약국에 매달려 약이 필요한 큐바인들을 손수 약을 정제하고, 제조해서, 건강을 돌보아 준 '마탄사' 큐바의 슈바이쳐라고 불려 졌다고 한다. 손님들이 들고온 처방전을 보고 처방한 다음, 지금도 약국의 의사들이 처방전을 카운터 위의 처방전 모아두는 송곳에 꽂아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옆의 카운터에는 처방전을 보고 환자에게 제조해준 기록장부가 마지막으로 기록된 날자가 1990년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옆방에는 이러한 처방 기록장부가 50권이 넘게 유리 책장서고에 잘 진열되여 있어, 약사 부부의 삶을 머리속에 그려볼수 있었다. 그옆 선반에는 당시에 사용하던 주사기들이 유리병속에 보관 되여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당시의 주사기 바늘은 지금처럼 Steel을 재료로 해서 만든 바늘이 아니고, 코끼리의 상아를 갈아서 썼다고 하니, 주사를 맞는 환자의 통증과, 주사기를 꽂는 의사의 고충도 충분히 상상할수 있었다. 바늘이 거의 새끼 손가락만큼 두꺼워 그렇게 상상이 된것이다. 또한 약사 부부는 모든 의약품 제조는, 지금처럼 Chemical을 원료로한 시제품을 실험실에서 제조,임상실험을 거쳐 환자치료에 사용되는 과정이 없이 , 천연약재로 각종 Plant, Vegetables이 주원료로 사용됐다고 한다. 당시의 약조제 과정을 보면, 마치 한방에서 사용하는 각종 천연약재를 조합하여 약을 만들었던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약재를 끓이기 위해 사용됐던 가마솥같은것도 보였고, 당시에 사용됐던 약병들에는 약의 이름과 사용처까지 유리병 자체에 새겨져 있음이 특이 했다. 조제실중앙에는 각종 성분의 중량을 측정하는 설비, 다른방에는 큰 유리통이 진열되여 있는데, 그안에는 당시에 사용되던 액체의 약재료가 지금도 보관되여 보관 되고 있었다. 또 흥미로웠던 것은 제조된 약물을 병에 담고 병마개를 만들기위해 재료로 Cork을 사용하였는데, 거북이 모양으로 생긴,병마개의 크기에 맞춰 그안에 집어넣고 돌려 깍는 것이었다. 마치 오늘의 연필깍는 기계의 원리와 같이 보였다.
Saturday, January 17, 2009
Bellamar Cave in Matanzas in Cuba.
골프 라운딩을 잠깐 접고, 오후에는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약 서남쪽으로 약 25마일 떨어져 있는,큐바의 아테네 라고 불리는, Matanzas도시와 도시 외곽에 있는 Bellamar 동굴을, 호텔 로비에 상주해 있는 Tour Agent를 통해, 개인당 25 패소를 지불하고 투어 팩키지를 구입해서 우리 일행 8명이 나섰다.
시간이 되여 전용 버스가 호텔로비앞에 도착하여 5시간의 투어를 시작했다. 버스는 중형으로 다른 호텔에서 온 관광객들을 포함하여 약 20명 정도가 동행이 되여 같이 구경하게 됐다.
투어 Guide는 50초반의 남자로, 먼저 자기를 소개 했다. 그내용이 재미 있었다. 자기 이름은 큐바사람들이 다 아는 유명한 이름이라고 하면서 좌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을 향해 맞추어 보라고 질문을 던진다.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다른 소리를 해대자, 웃으면서, '카스트로'가 자기 성이고 이름은 Alex라고 소개했다.
먼저 Bellamar Cave 의 발견과정을 설명했다. 1861년경에 평지에 놓여 있는 약간 큰 바위덩위를 옮겨 다른곳으로 이동시키고져 Bar를 이용하여 움직이던, Justo Wong이라는 중국계 큐바인이, 실수로 사용하던 지렛대를 손에서 놓쳤는데, 지하로 빠져 들어가 없어져 버렸다. 이상히 여긴 그간 계속 파혜져 보았더니 속이 텅빈 지하 동굴이 발견됐다고 설명한다. 동굴의 길이는 총 3킬로 347미터이고 지하 30미터에 위취해 하고 있으며, 현재 약 750 미터가 개발되여 관람되고 있다고 전했다.
입장료는 무료였으나, 휴대 카메라 한대당 5패소를 징수 했다. 우리 부부는 똑 같은 모델의 디카를 각각 하나씩 소지하고 있어 10 패소를 징수 당하는것은 좀 억울한 생각이 들어, 내 카메라는 주머니에 넣고, 아내것을 내가 손에 들고, 한장만 구입해서 검문소를 통과해서 들어 갔는데 무사하게 통과 되였다. 형식적이면서도, 돈을 징수하기위한 행위였기에 검표원이 표를 받기에만 바빠, 다른 검사를 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굴안에는 굉장히 습기가 많아 축축한 기분이었고, 무척이나 더웠다. 조명도 매우 빈약해 아름다운 지하동굴의 참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돌 고드름과 괴암은 수정같아 보였고, 웅장 했으나, 관리 소흘로 본래의 모양이 많이 훼손되여 안타까웠다. 그런데도 동굴안에는 아무도 감시하거나 안내자가 없어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파괴하거나 작란을 칠수 있는 위험이 뒤따르고 있다는것을 느꼈다.
조명이 약해 사진을 촬영했지만, 바라는데로 잘 찍히지는 않았다. 마침 중국의 젊은이들과 조우하게 되였는데, 그들은 십대 후반의 학생들로 큐바의 수도 하바나에서 서반아 어학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이었는데, 교육비는 전액 중국정부에서 부담하고, 다만 본인들은 이곳까지 오고 가는 Air Fair만 지불 했다고 하는 설명을 해줘 깜짝 놀랐다. 중국정부에서 세계를 상대로 젊은 인재들을 육성하고 있다는것이 내 눈으로 확인된 셈이었기 때문이다. 대국이 돼기위한 한발 한발을 잘 다지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들도 휴일을 위하여 우리처럼 관광을 왔다고 당당히 설명한다. 부럽기도 하고, 고국 대한민국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라는 의문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기둥처럼 생긴 돌기둥, 여러모양의 종류석들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Matanzas라는 본래의 말뜻은 영어로 Massacre로 대량 학살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연유는 1510년도에 29명의 스페인들이 하바나 큐바를 공격하기위해 이곳에 도착하여 이곳의 원주민들을 징용하여 그들이 사용하는 Boat를 이용하여 항해 하는데, 이상하게도 스페인 정복자들이 항해중 다 죽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연유하여, 마탄자스라는 말을 사용하게 됐는데, 도시이름으로 불리게 됐다는 유래였다.
이동굴을 발견한 '웡'씨는 당시에 건축중에 있던 극장이 완성되자, 평생을 무료로 관람할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아 극장출입을 마음데로 이용했다고 한다. 큐바 전체 인구는 약 11.2백만명인데, 그중에 약 8백만명이 캐톨릭 신자로 등록되여 있다고 한다. 허지만, 캐톨릭 교회로 이용될듯한 건물은 눈에 많이 띄지 않았다. 극장 옆건물은 경찰서이고, 극장 건너편 건물은 재판소라고 설명했다. 그사이에는 조그만 시민 광장이 있었다. '수도 하바나'는 2.5백만명이 상주하고 있는데 비해, Matnazas Province는 겨우 인구가 15만명밖에 안된다고 설명하면서, 이곳은 두개의 강(River)합류해 바다로 흘러 가기 때문에 유난히 다리(Bridges)들이 많다고 설명한다.
4개의 지방정부가 Matanzas 주안에 있으며, 이곳의 Bay는 그깊이가 650 미터로 북미에서는 가장 깊은곳이라고 전했다.
또 특히한 점은, Matanzas Province, Matanzas City, Matanzas Bay, Matanzas Section등 Matanzas 라는 단어가 지명에 사용되고 있었다. 도시 한복판에 설탕공장으로 오래전에 사용했었던 건물이 있고, 건물밖에는 큰 나무 한그루가 지금도 자라고 있는데, 설탕공장에서 사용됐던 Sugar Mill에 사용됐던 큰 Gear wheel가 나무 Trunk기대여 전시되여 있고, 그위의 나무 가지에는 종이 걸려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1843년 11월 15일에, 노예로 팔려와서 이곳에서 일하고 있던 아프리칸들이 만여명이 넘었는데, 반란을 이르켰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그 반란의 리더는 여성으로 Carlotta 였는데, 그들을 기념하기위한 조치에서 이렇게 당시의 물건들을 진열하여 관람시킨다고 했다.
그래서 그나무 이름은 Savia 즉 반란운동을 honor하기위한 뜻으로 Gear wheel과 Bell을 나무에 묶어 진열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한블럭 건너 현재 Art Centre로 사용되는 커다란 빌딩이 아름답게 단장되여 있었다. 대부분의 건물이 낡고, 보수유지가 안되여 있는데, 이건물은 달리 새건물로 보였다. 설명에 의하면, 이빌딩은 1970년까지 성냥공장으로 이용되여 왔었는데 1997년에 화재로 전소되여, 2003년에야 다시 당시의 모양을 유지한 건물을 몇명의 자본가와 Professional 들이 중심이 되여 신축하여 현재는 Artists Centre 사용되고 있으며, 이곳에서 훈련받은 졸업생들만이 Certificate를 발부받아 다른 지방으로 가면 같은 업종의 장사를 할수 있게 된다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같이 구경간 일행중 한명과 그곳의 Senior woman과 함께 기념 촬영도 했다. 이곳의 관람이 끝날무렵, 가이드가 특별 써비스 한다고 하면서 건물안의 한 상점에 들어가, 우리 일행에게 맥주를 포함한 음료수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것도 무료로....
큐바 혁명(1959년도에 카스트로 주도)전까지는 Matanzas Bay를 중심으로 한 살기좋은 지역에는 미국의 부자들이 살면서, 설탕농장이나 기타 다른 산업을 장악하고 있어 큐바인들은 고통을 많이 당하면서 살았다고, 혁명의 당위성을 가이드는 역설했다.
Matanzas Freedom Square 에는 큐바 독립의 지도자 Jose Marti 동상이 아담히 서 있었다.
Labels:
Bellamar Cave,
Jose Marti동상,
lakepurity,
Matanzas,
Savia,
설탕공장,
세계여행,
어학정책,
큐바의 아테네
Subscribe to:
Posts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