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y 09, 2009

조상님들과 혈육들과의 오랫만의 재회가 주는 의미





















조상님이란 무엇인가? 나와는 어떤 인연이 있기에, 보이지 않는 그분들에 대한 자손들의 정성과 마음이 시공을 초월하여 두려운 대상이고, 공경의 대상이고, 삶의 지표 역활을 해 주시는걸까? 어려서는 추석성묘를, 지금은 조상님들 대열에 서 계시는 아버지를 따라 선산에 모셔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산소를 찾아, 하곤 했었다. 고향 시골의 조그만 야산에 모셔진, 윗대 부터의 할아버지에 절을 하고..... 그리고는 마냥 좋아 했었다. 그분들에 대한 생각은, 아버지나 훨씬 연장자이신 형님들께서 하시는것과는 어쩌면 정반대의, 배고프고 어려웠던 그시절에, 조상님들로 인해, 배(Stomach)가 오랫만에 화려한 음식물로 가득 채워져, 축복(?)받는, 그이상의 의미는 많치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번 방문에서는 서열에 의한 조상님들을 찾아 뵙는것은 없었고, '납골표'묘라는 곳에 모셔서 제사도, 성묘도 일년에 한두번 정도 방문하여 예를 드리는, 조상님들을 모시는 풍습이 완전히 다른 문화를 접했다. 대리석을 곱게 깍아 석축을 쌓아 집을 만들고, 각 봉분을 파헤져 탈골하고 남은 부분을 화장하여 남은 재(Ash)를 모아, 조그만 항아리에 모셔, 그집속의 만들어 놓은 선반에 서열대로 모셔 놓고, 한식이나, 추석때 온 후손들이 모여 합동 제사를 지내는 풍습으로 변한것이다. 이번 한식때의 합동 제사때는 시간이 맞지 않아 같이 모여 제사지낸 후손들과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막내 동생의 안내로 조촐한 방문을 하고, 조상님들께 두번의 절을 하는 예를 갖추었었다. 납골표옆에는 다른 비석들이 있었다. 조상님들이 생전에 활동하셨던 내역을 비석에 새겨, 후손들이 읽게 하기위함인것으로 이해 되였다. 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우리 가족들은 한번도 합동제사에 참석해 보지 못했지만, 앞으로도 그런 기회는 없을것으로 생각되였다. 예를 갖추면서, 세상살이를 하는 조건이 다른 후손들과 함께 할수없음을 용서해 주십시요라고 마음속에서 빌기도 했었다. 현대를 바삐 살아가는 각 씨족들의 자손들의 생활상을 눈여겨 본 어느 사업가의 아이디어(?)로 나라 전체에 수천년 동안 내려오던 조상모시기 풍습이, 불과 몇십년 사이에 바뀌어 버린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지금도 맴돌고 있다. 납골묘를 만드는데 수천만의 비용이 들어 간다고 들었다. 돈을 더많이 들이면 더좋은 납골묘가 돼고, 적게 들이면 덜좋게 보이는 납골묘가 돼고, 그것도 할수 없는 후손들이라면 아예 엄두도 못내고, 옛날 봉분그대로 존치돼고 있다고 들었다. 유교적 사상이 아직도 내면에 깊이 흐르고 있는 한국사람들의 정서로 봐서는, 빛을 내서라도, 남들이 하는 납골묘를 만들어 그속에 조상님들을 모시는 대열에 끼고져 온갖 노력을 다하는, 그렇게 해서, 현재를 살아가는 후손들의 '세'과시를 나타내는 지름길이 되기도 하는것으로 내눈에는 비쳐졌었다.
나의 조상님을 모시는 납골표는 규모가 상당히 크게 보였다. 위로는 선대의 조상님부터 아래로는 부모님, 그리고 장형님도 그곳에 모셔져 있었다. 불과 몇년전에 만들었다고 들었다. 마치 조금만 공원안의 석탑같은 분위기였다. 그옆으로 아래로 눈을 돌려보니, 같은 한조상피를 이어받았지만, 계파가 다른 혈족들의 후손들이 우리계파와 같은 심정으로 만들어 모시는 납골표들이 여러개 보였다. 이번 방문에서 친지들과 고속도로를 타고 전국을 다녀보면서, 많은 납골묘들을 보았다. 조상님들을 모시는 풍습이 이렇게 천편일률적으로 불과 몇년만에 바뀐것은 우리 한국사람들의, 옆집을 깊이 의식하는 풍토때문이기도 할것이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마음 아프게 이번 방문에서 많이 느꼈다. 위로 작은 어머님과 사촌 형제분들, 누님들과 형님들이 계시고, 아래로는 동생들이 있지만, 항상 어리고 철부지로만 보여졌던 동생들 마져도 이미 생활전선에서 은퇴하여, 살아온 시간보다 더 짧게 남은 생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면서.....우리 형제 자매들의 시대도 서서히 무대뒤로 물러서고 있음을 보면서 마음이 안쓰럽기만 했다. 94세의 작은 어머님은 아직도 기억력과 활동은 여전하시나, 몸은 너무나 다르게 작아 지셨음을 보았다. 일찍 작은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어렵게 자식들을 키워 오면서 살아온 삶이기에 작아지신 몸을 보면서, 자기 자신의 존재는 아예 생각지도 못하면서 살아온 옛날 여인네들의 한많은 생을 보는것 같았다. 큰 매부도 몇개월전에 하직하셔서, 편찮은 큰누나 혼자서 아파트를 지키고 계시는게 마음 아팠고, 둘째매형 또한 몇년전에 먼저 가셔서, 둘째 누이가 큰 집에서 다행히도, 자영업을 하고있는 누나의 맏아들 부부와 같이 생활 하고 계셔서 보기 좋았지만, 노인의 모습은 숨길수 없어 보였고, 둘째 형수님도 팔순을 훨씬 넘겨, 형님과 함께 살으셨던 아담한 아파트에서 혼자 생활하고 계셨고, 그밑으로 전주형님 내외분도 오래전부터 은퇴 생활을 하시면서, 큰 아파트에 두분만 조용히 황혼의 생활을 즐기시는것 같았다. 수색형님은 아직도, 어려운 황혼의 삶을 혼자서 버티고 계셨다. 아래 여동생 부부도 은퇴생활을 강변에 있는 아파트에서, 회갑을 눈앞에 둔 막내부부도 은퇴하고, 지금은 낯시간을 소화해 내기위해, 어느 조그만 토종비료생산업체에서 판매사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것마져도 당장 아니면 몇년후에는 손을 떼야 할것이다. 우리 형제 자매들의 후손들도 무척 많았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 못하는 조카와 손자들이 많았다. 내자신이 그렇게 변했다니..... 항상 책보를 허리에 차고, 추운 겨울이면, 마른 소똥에 불을 부쳐 얼은 손가락을 녹이면서 들길, 산길을 거쳐 국민 학교에 다녔던 기억들이 엊그제 같은데.....세상이 변하여 이제는 손자 손녀들이 그또래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생활 방법은 완전히 다른 전자 게임기 시대를 바쁘게 헤쳐가고 있는 모습들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서, 어린그들에게서는, 우리어렸을때의 인간 냄새가 덜 풍기는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만의 착각일까? 귀마개를 하고, 소똥에 불을 부쳐 고사리 손을 녹이면서 학교길을 재촉하는 대신에, 따뜻한 자동차안에서 게임기를 돌리고, 신발이 닿는다고 뛰지 말라는 아버님의 소리치는 모습이 눈에 선한데, 학교가 끝난후 손자 손녀들은 체력단련은 뒷전이고 과외 하러 다니기에 바쁜 시간을 보내는 후손들.....이것이 문명의 발달에서 온 수확이라고 하기에는 마음 한구석에서 용납을 못한다고 신호를 보내는것 같다. 게임기에 매달리고, 과외공부에 짖눌려 있는, 커가는 후손들의 눈으로 나를 볼때는, 늙은 할아버지의 시대착오적인, 현대인의 삶을 이해 못하는것쯤으로 치부 되겠지? 그래도 할말은 없다. 왜냐면, 내 자신은 이미 무대에서 내려선 아무런 영향력 없는 왕년의 거창한(?) 사나이 일뿐이나까. 그래서 역사는 오늘도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는것 아닐까.

Friday, May 08, 2009

친지의 집을 HQ로 정하고 고국여행을 했다.













생활환경과 편리함 그외 모든면을 따지면, 더 쾌적하고 안락하고 생활에 편리한 그런곳이 가능했지만, 그런 보이는면과 편리함 보다는, 서로 눈빛만 보아도, 목소리만 들어도, 불편해도 이를 따지지 않고 편히 지낼수 있는 친지의 집을, 일방적(?)이다 시피, 고국에서의 여행기간동안, 같이 지내기위한 숙소로 정하고, 두부부가 행동을 같이 했었다. 지금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도착한지 만 하루가 지났는데, 그러한 결정을 하기를 참으로 잘 했다는 감사의 마음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진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이해 하기에 너무나 머무는 동안 편했던 것이다. 별도로 우리가 머무를 방을 만들어 주느라고, 김형은 땀을 흘렸었다고 부인이 귀뜸해 줬었다. 그런 얘기도 할필요가 없었지만, 평상시의 김형이 해 오던 방법에서 벗어난, 행동으로 보여주는 배려를 깊이 느꼈기 때문이리라.....방가운데 침대가 놓여 있었고, 건너편에는 아담한, 그러나 구식인 조그만 TV가 놓여 있었다. 이러한 구조를 보면서, 평상시 이친구 부부의 삶의 모습을 읽을수 있었다. 화려하지않고, 수준에 맞는 현실 그대로, 꾸밈없이, 내가 불편하지 않으면, 남을 굳이 의식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사회적 활동은 왕성하게 해가고 있는, 고국의 현실삶에서는 옆의 눈총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쉽지않는 생활자세를, 곧바르게 이친구부부는 해 오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것이다. 그래서 더욱 우리 부부를 내집처럼 정신적으로 편하게 같이 어울려 생활할수 있게 해주었다. 서울시내에 살면서는 쉽게 볼수 없는,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다 더큰 집을 지울수 있는, 넓은 뜰에서는 잘정돈되지않고, 헝클러진것 처럼 보이는 꽃나무들이 마침 제철을 만나 만개하여 아름다운 자태와 향을 내뿜어 주어 도심속의 복잡함을 잊게 해주고도 남는 안정감을 제공하고 있었다. 덕택에 까치 소리도 많이 들었고....
김형은 몇년전부터, 취미로 국화분재를 배우더니 이제는 달인이 되여, 전국contest에 출전하여 최고상을 비롯한 여러상까지 획득했음을, 침상옆에 놓인 탁자위에서 보고 알았다. 배운다는 얘기는 오래전에 들었었지만, 이렇게까지 준족의 발전을 할지는 상상도 못해, 밥상에서 얘기를 꺼냈더니, 평소그의 성품데로, '그거 아무것도 아닌데, 이형이 보았구나.' 하면서 자세한 그동안의 과정을 삶의 얘기처럼 들려 줬다. 3년동안을 매주 2번이상, 서울에서 전라남도 함평까지 달려가서 배우고 실습하고, 그리고 집에도 온실을 우리가 묶고있는 방옆에 꾸며두고, 겨울에도 매달리며 즐겼었단다. 이친구부부도 돈버는데는 재주(?)없는것은 확실하다. 돈에 목적을 두었었다면, 최고상을 빌미로 해서, 한국적인 현실에서는, 상당한 재물을 모을수 있는 길이 있었으련만......취미는 취미로 끝내는 욕심없는, 삶을 그렇게 두부부가, 소박하게, 신앙생활 하면서 살아감을 보았다. 캐나다 방문했을때의 기억을 가끔씩 하곤 했다. 김형한테는 신앙의 기본을 세우는 이정표 역활을 해줬던 소중한 여행이었었다고 했다. 그때는 우리 부부도 생활인으로 현장에서 뛰어야 했기에, 좀더 많은 배려와 신경을 써두지 못했던 아쉬움이 되살아 나기도 했지만, 의외로 좋은 여행후의 삶에 대한 얘기에 감사할 뿐이었다. 흔히들 '앞으로는 더 잘해줄께' 라는 식의 약속은 쉽게 할수 있어, 현실성이 희박한 얘기로 흘려 보내지만, 이다음에 다시 이곳 캐나다를 같이 여행하게될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편하게, 그리고 값지게 해 볼 방법을 찾아야 겠다는 마음 다짐을 해 본다. 김형은 지금 하얀 머리에 어울리지 않게 교회성가대원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번 방문에서 2번 서울에서 주일을 보낼수 있어, 예배에 참석하여 그가 대원들에 끼어 한tone의 일부를 담당하여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성숙 그것이었다.
물론 그의 목소리는, 나는 문외한이기에, 찾아 들을수는 없었지만, 모습에서 그렇게 느끼고 본것이다. 계속 하시기를........
그의 부인 숙자는 어려서 부터 해온 신앙생활이기에, 그모습 그대로 교회생활과 봉사가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것을, 이번에도 보았다. 그러면서도, 사회적 생활은 왕성하게 하고 있었고, 시간 분배를 해서, 서울이 서툴은 우리 부부를 안내해서, 다녀볼곳, 먹어볼곳, 구경할곳..... 그리고 우리도 알고, 그들이 가깝게 지내는 친지 부부들과 어울려 좋은 삶의 회포를 풀수있는 귀중한 시간들을 만들어 주었었다.
같이 어울려 좋은 시간을 보낸 다른 2 부부친구들의 배려에도 고마울 뿐이다. 언제 일지는 몰라도, 다음 만남의 그때까지 모두 건강하시기를.

Thursday, May 07, 2009

생소했던 '석모도'에서 친지와 보낸 시간들














남미 여행에서 알게된, 그러나 지금은 오랜 지우처럼 되여버린, 아시아나의 기장 부부를, 그후 처음으로만나, 회포를 풀었다.
이번 고국방문하면서, 그부부에게 소식은 보냈었으나, 고국방문의 원래 목적을 먼저 해결 해야 했기에, 여행 끝 무렵에야, 그분들과 만날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에, 긴시간은 갖지 못하고, 그런 와중에서도, 그분들은 고맙게도, '석모도'에서 하룻밤 보내면서, 살아온 애기를 나눌 기회를 만들어 주신 것이다. 마침 long weekend가 되여 서울에서의 이동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아, 설악산 콘도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된다고 하면서, 그곳으로 차를 몰자고 주장하던 미세스 구의 고마운 배려는 마음에서만 받기로 하고, 대신 생전 처음 들어본 석모도로 차를 돌린 것이다.
석모도는 강화도에서 뱃길로 연결되는 조그만 Resort로 발전되여 가고 있는 조용한 서해 북단에 있는 섬이었다. 전에는 아마도 민간인 출입이 금지됐던 섬이었었는지도 모를 그런 외지고 휴전선에 접해 있는 곳으로 간주 된곳이었다.
구기장의 재빠른 동작으로 겨우 방한칸을 rent할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비용이 상상외로 많이 들어, 우리를 위해 모든것을 기쁜 마음으로 애쓰는 두분께 누를 끼치게 되는것은 아닌지? 그러나 그런것은 기우였다. 두분은 우리 부부를 너무나 편케 해 주었다.
그곳의 특산품(?)인 장어구이와 그리고 생선회등등... 옛날 염전으로 오랫동안 이용됐던곳은 지금은 폐염전이 되였고, 그곳으로 부터 한참 뒷켠으로 차를 달려 섬끝에 도착한곳은 한구룹의 생선횟집들이 관광객들을 맞이 하기에 여념이 없는 곳이었다. 바로 바다에서 잡아온 싱싱한 생선들이 헤엄치면서, 손님들에게 팔려 가기만을(?)기다리고 있는것 처럼 그들은 수조 안에서 물장구를 치면서, 그앞에서 구경하는 관람객들에게 물을 튀기기도 하면서, 그렇게 어촌속의 관광지임을 보여 주기에 족했다. 수북히 쌓인 방어회를 초고추장에 찍어, 상추와 기타 채소들과 함께 모아 입안으로 몰아넣는 이런 풍경은 얼마만에 접해 보는 기회인가? 써빙하는 아가씨도 푸짐해 보인다. 아직 한국적인 관광지로서의 때가 묻지 않아 더 그렇게 푸짐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빈자리가 없다. 나들이 나온 가족들로, 그들도 우리와 같이, 오랫만의 회포를 푸는건지? 오랫만의 만남은 그래서 이유없이 좋기만 한것같다. 미세스구와 아내가 더 좋아 하는것 같다. 구기장 부부한테서는, 바쁜 서울에서의 생활이 우리처럼 익숙치 않은것 처럼 보였다. 처음 전화후 만나기로 했던 장소는 우리 부부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곳이었는데, 찾기가 쉽지 않았었다고 했다. 대신에 살고 있는곳에서 가까운 야외에 나가 쑥을 뜯고, 나물을 캐고....... 꼭 우리 부부가 봄철이면 연례행사처럼, 달래 뽑기, 취나물 뜯기 등등을 즐기면서, 복잡함을 피하면서, 같은 서울에 살면서도 도심지를 넘나들지 않고 수수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분들의 모습을 이번 기회에 확실히 보면서, 더 정감을 느끼게 됐다. 오랜 친구관계를 이어온것 처럼 느껴진다고 구기장 부부는, 동심으로 돌아가는 모습이다. 소중한 만남의 시간임을 속으로 부터 감사하면서, 고맙고 더 잦은 만남의 기회를 만들어야 되겠다고 마음으로 부터 다짐을 해 본다.
바닷장어구이는 처음 먹어 보았다. 그만큼 우리부부가 살고 있는 토론토지역에서는 흔치 않다는 얘기도 된다. 맛이, 향이 감칠나도록 구수하다. 숫불속에 태워지면서 떨어지는 기름튀는 소리도 분위기를 더해준다. 마늘한쪽과 된장, 그리고 잘구워진 장어 한쪽을 상추에 쌓아, 입이 터져라 넣고 씹는 맛은, 글로 표현보다는 먹어본자들끼리 서로의 감정을 얘기하는것이 제일 좋은 표현 방법일것 같다. 몸무게가 또 늘어날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도 계속 먹었다. 맛이 좋아서 먹고, 만남이 너무나 값진것이고, 그래서 좋아서 더 먹고.....
석모도의 석양은, 아쉬었지만 날씨관계로 만족할만큰은 안되였지만, 그래도 한반도 최북단에서의 석양놀은 그런데로 운치가 있어 좋았다.
섬가운데 솟아 있는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섬전체 해안가로 뻗어내린 계속사이사이로 유락시설들이 줄을 이었다. 서울에서의 말로는, 콘도, 또는 팬션이라고 한단다. 팬션은 야외에서 비비큐를 할수 있는 규모의 콘도를 그렇게 호칭한다고 그들은 설명이다.
산기슭에 세워진 콘도에서 바라본 갯벌은 마침 썰물때여서 꽤 먼곳까지 뻘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가까이서 본 뻘은 '개(Crab)'들의 삶의 터로 보이는 구멍들로 뻥뻥 뚫려 있었다. 흔히 머리에서 상상할수 있는 조그만 어선이나, 놀이배들은 전연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도 휴전선 가까이라서 그러리라고 생각되였다. 그래도 멀리 바다물 건너 그림처럼 펼쳐지는 산들은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다음날 섬을 떠날려고 일찍 서둘러 선착장을 향해 떠났지만, 이미 배(Ferry)를 기다리는 다른 자동차들로 long line-up으로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거의 2시간 40분만에 우리가 타고간 차가 배에 오를수 있었다. 조그만 섬으로 보았었는데, 이렇게 많은 관광객들로 장사진을 치다니.... 우리는 그래도 운이 좋은 셈이라고 자위했다. 우리보다 늦게 나오는 차량들은 더 이상 긴시간을 길에서 보내야 할것을 생각하니, 그들이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괜한 남의 시름을 사서하는 초로(old people)들의 한갖 기우일뿐임을 느끼면서, 배에서 내려 우리는 어시장에 들렸다. 두 여인네들은 어패류를 사고...어물도 산다. 그냥 지나치지를 못하고 말이다. 아니면, 무사히 건너왔으니 느늦함을 이렇게 보이려는 마음에서 일까? 그러나 우리를 다시 서울까지 데려다 주고 헤어지면서 그런 여유로움이 아니고, 우리 부부에게 선물로 주려는 마음깊은 구기장 부부의 배려 였음을 알았다. 몽땅 우리에게 건네 주면서, 우리가 묶고 있는 친지집에서 같이, 상을 차려 우리가 즐겼던 그런 시간들을 갖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굳이 아내의 손에 쥐어 주면서, 헤여짐을 아쉬워하는 손을 흔든다. 고마운 사람들....
이제 아시아나 항공도 이곳 토론토에 취항하게 된다고 하는데, 그가 그 첫번째 주자가 되여, 우리 부부가 그들이 몰고온 산처럼 큰 보잉 747기를 맨 앞에서 맞이하는 그런 재상봉의 기쁨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해 진다. 그다음에 휴식시간동안에는 두부부가 골프백을 차에 싣고 시골 카테지로 달려가, 그곳에서 푸른 초원을 걸어가면서 또 다시 살아온 얘기들을 나누는 아담한 꿈이 이루어 졌으면 한다.
그들이 원하는 모든 삶의 일들이 이루어 지기를 빌면서.... 아쉬운 작별의 손을 흔들었다. 오래동안 기억에 남을 소중한 만남의 시간이었다.

Thursday, April 23, 2009

홍천 친지방문과 대명리조트 구경




















오랫만의 또 다른 친구부부와 상봉의 순간을 맞이 하기위해, 우리 부부를 포함한 3부부가 오전 11시까지, 젊음을 바쳐서 열심히 일해온 생활 터전이었던 서울 생활을 접고,지금은 홍천에서 은퇴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 부부댁에 가기위해 차에 올랐다.
이번 고국 방운에서 4부부가 동시에 한장소에서 만나는 기회는 오늘이 처음인 셈이다.
매번 고국방문때마다 4부부가 모여 만남의 시간을 갖어온것은 일종의Routine이다시피 해 왔지만, 오늘의 만남은 흔퇴후 처음이기에 또 다른 기대와 그후의 삶에 대한 진지한 얘기들이 기대되기에.....
뭐가 그리 바쁜지, 모두가 은퇴후의 생활을 즐기고 있는 친지들이지만, 시간은 더 바쁘게 보내는, 그래서 좀처럼 큰마음을 먹기전에는 합류가 쉽지않음을 알았기에 더 뜻있는 상봉이 될것같다.
실제로는 나의 친지가 아니라, 아내들이 서로 친구지간인데, 그동안 살아오면서 같은 만남을 통해서 좋은 시간을 갖다보니, 지금은 아주 오랜친구이상으로 흉허물이 없기에 아주 편한 친지부부들인 것이다.
차안에서 들려준 다른 친구부부의 말에 의하면 홍천친구는 새로 거주할 집을 약 2년전에 건축했다는 것인데,전화통화는 셀수도 없이 했고, 서울에서의 만남도 셀수도 없이 했지만, 현지에서의 상봉은 오늘이 처음이라고 했다. 이해가 갈것같았다. 너무나 모두가 바삐 노후의 생활을 즐기고 있는 모습들을 이번 방문에서 보와 왔기에 말이다.
잘뜷려진 산계곡사이의 고속도로를 구비구비돌아 친지의 집에 도착했더니, 멍멍개들이 짖어대고, 요즘 유행이라는 황토벽돌로 아담히 낮으막하게 지어진 집이 편안하게 눈에 박힌다.
대머리인, 남편되시는 친지가, 환히 웃으면서, 뒷뜰에서 화단을 손질하다가 반가히 맞는다.
첫마디가 정중한 인사가 아니라, 모두를 웃기는 구수한 정경이 풍기는 어린애적인 '왜 이렇게 늦게와, 진직왔어야지...자기들끼리만 깨를 볶느라 그랬나? 이제는 그만 할때도 됐을텐데...'라는 등등....
'여기서 오늘 그시범을 보일려고 왔다네 이친구야...'대답도 걸작이다. 한바탕 웃은후에 안으로 들어가 여자친구분이 만들어 주는 향토커피와 과일을 나누면서, 다시 분위기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이순간, 누가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손자 손녀들을 둔 할아버지 부부라고 할수 있을까 할정도로
동심의 세계로 들어가 이성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소리들로 폭소를 만든다. 얼마만에 엮어지는 순간인가? 역시 캐나다에서 나오니까 만사제치고 이렇게 8명이 서로 바쁜시간들을 제치고 모이는 순간을 만들었다. 고로 캐나다 부부는 자주 나와야 된다고, 또 폭소다.
시골이라, 아직도 계곡을 통해 흐르는 시내물은 맑기가 옛정취를 느끼게 하는데 충분했다. 우리의 만남을 위해 현지에서 바로 잡은 '빠가사리'물고기를 넣고 끓인 매운탕이 기다리고 있는 시내천옆의 식당으로 가잔다. 40년이 훨씬 지난 오늘에야 시냇가에서 매운탕을 먹게 되는 것이다.
물고기의 뼈가 무척이나, 크기에 비해 억셌는데, 자연의 물속에서 자란 물고기의 특성이라고 한다.
고맙기만 했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려고 아침일찍부터 현지답사하여, 식당에 부탁을 해서 우리들을 먹일려고 했단다. 맛도 좋았지만, 정성을 더 높이 사면서, 진정한 우정의 나눔이 이런것 아니겠는가? 깊이 숨을 내쉬어 본다. 큰도시에서의 비싼 식당음식보다 훨씬 오래 간직하게될 그런 만남속의 철엽같은 음식나눔, 이친구가 이곳 홍천 산골속에 은퇴후의 삶의 터전을 마련치 않았더라면, 꿈속에서인들 상상이나 해볼수 있었을까?
이친구가 마음이 바쁜 모양이다. 다음 구경할곳으로 가잔다. 간곳은 바로 인근에 있는 대명리조트로 안내 했다. 그곳은 겨울에는 스키, 요즘에는 곤돌라를 이용해서 정상에 올라 둘러쌓인 산세의 전경을 둘러 보는 휴양지이고, 바로 스키 슬로프 밑으로는 9홀 골프코스가 있었다. 시설도 아주 훌륭해 보였고, 정상에서는 수십명의 어린 손자, 손녀들같은 학생들이 소풍을 나와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참많이 좋은 세상으로 변한 조국의 발전상을 느낄수 있었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산봉우리들을 각각 이름을 들어 설명도 해주고, 오래전에 등산하다가 길을 잃어 헤멨던 기억등등의 실수담도 들려준다. 우리일행을 산정상까지 올려다준 곤돌라의 성능도 훌륭했다. 아직은 Peak Season이 아니라서 많은 관광객은 없었지만, 그래서 파킹장에는 차들이 즐비하다. 골프코스는 모두 파3로 짧은 것 같았다. 한번 휘둘러 보고싶은 충동도 순간 일었지만.... 행동을 같이하면서, 오랫만의 만남속에 취해 있는데, 감히 어떻게 그런 얘기를 꺼낼수 있단 말인가? 리조트거너편으로 이어진 trail walk을 했다. 토론토에서 처럼 평평한 숲속길이 아닌 가파른 길을 걷는것은 또 다른 맛이 있었다. 무릎에 느껴지는 몸무게의 느낌도 더 무거워던 것 같다. 그것이 문제가 될수가는 전연 없다. 그것이 대수가 될수가 없었다. 헉헉 하면서 모두가 제각기 입을 놀려 그동안 품고있던 마음속의 생각들을 뿜어 내기에 바쁘기만 한다.

춘천에 나가서 춘천 막국수를 먹어야 제맛이 난단다. 다시 차를 달렸다.
대도시에서 먹었던 유명타고 하는 냉면 먹는것 보다 더 맛이 감칠났다. 구수한 맛이 나는 숭늉과 후덕하게 생긴 주인마님의 손길도 정답게 느껴진다. 오늘은 배가 너무나 혹사를 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한가닥의 국수가락을 남김없이 깨끗이 해 치우면서, '육군정량을....'라는 변으로 맛을 대신했다.
한밤을 이곳에서 새우고 싶었지만, 내일 아침에 다시 중국으로 여행을 떠나야 했기에 늦은 저녁 같이 이곳에 온 친지부부와 같이 그들의 서울집으로 핸들을 돌렸다. 만남은 설레이면서 좋고, 헤어짐은 아쉬움움과 기약없는 다음 만남을 마음속에 새기면서....

Wednesday, April 01, 2009

화전역, 모래내 그모습을 신문에서 보면서....



처음 직장생활을 할때 수색역뒤쪽 상암동에서 한동안 살았었다.
아직 수도물도 보급이 안돼 남의집에 있는 우물물을 퍼오기위해 물지계를 지고, 차거운 겨울날 동네 고샅을 지나던 시절이 어제 같았는데....
직장을 끝내고, 집에 오기위해서 문산선 열차를 서울역에서 타고, 아현동 굴속을 지나 화전역(모래네) 지나 수색역에 도착하면, 때로는 수색역 광장앞에서 시작되는 굴다리(아마도 하수구로 만들어 놓았던 것을 수색역뒤에 새로 형성된 상암동 주민들이 통로길로 사용 했던듯)를 지나 신세를 지고 있던 바로 윗형님의 집으로 향하곤 했던 기억이, 오늘 본국의 신문기사를 보면서, 그때의 어렵고 고달펐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때로 부터 40년이 훌쩍 지나갔다. 모래내 시장, 그때는 간이 기차역 플렛폼이 주위 시장이나 주택가보다 더 높았었는데.....
그곳을 매일 통근열차를 타고 지나면서, 그아래로 무질서하게 널려져 있던 시장들.....자세히는 생각이 안나지만, 오늘 신문기사는
당시의기억을 되새기게 하는데 도움을 많이 주었다. 주위는 붉은 황토흙이었던 기억도 새롭다. 철길건너 언덕위에는 또한 무질서하게
들어선 주택들..... 그집주인들이 그렇게도 나를 당시에는 부럽게 했다. 나는 그런집을 살 엄두도 내지 못했던, 풋내기 직장인생활을 하고 있었던 때였으니까. 고국을 방문하게 되면, 꼭 들려 보고 싶은 곳이다. 기회가 닿을지 모르겠지만....
여기에 신문기사를 옮겨 싣는다.


천막촌・물지게・재래시장 … 사라져가는 모래내의 추억 [중앙일보] 2008 풍경 담은 뉴타운 민속지 『가재울』


“거기서 나는 살았다 선량한 아버지와/볏짚단 같은 어머니, 티밥같이 웃는 누이와 함께.”(이성복 ‘모래내 1978년’ 부분)

‘가재울 뉴타운’이란 이름으로 더 익숙한 서울 북가좌동과 남가좌동 일대. 고지도에 ‘사천(沙川)’이라 표기된 홍제천 옆 이 땅을 사람들은 ‘모래내’라 불렀다. 옹기종기 집 짓고 수십 년 살았던 사람들이 재개발 때문에 이곳을 떠난다. 서울역사박물관은 가재울의 마지막 풍경과 기억을 기록한 뉴타운 민속지 『가재울』 전 3권을 냈다.


가재울 3구역 수재민 정착마을. 철거가 덜 된 빈집 앞마당에 풀이 무성히 자랐다. 멀리 새로 생긴 아파트촌이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가난이 다스리던 동네=홍제천으로 가로막혀 교통이 불편했던 모래내는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땅이었다. “물이 많으면 철로 다리(경의선 철교)로 건너와야 돼. 한 반쯤 갔는데 빽빽 기적을 내잖아, 기차가. 그래서 살려고 그냥 다리 밑에 내려갔지.”(이대용・84세)

1950년대 말 이후 이촌동 수재민과 용산 철거민 천막촌이 들어섰다. 홍제천을 가로지르는 사천교가 놓이면서 ‘서울 드림’을 꿈꾸는 각지 사람들이 몰려들어 판자촌을 지었다. “송장뼈를 얼마나 내왔는지 몰라. 뉴타운 되어 밀면 뼈다귀 꽤 나올 거예요. 공동묘지였거든.”(이보금・70세)

송옥태(72)・강춘송(67)씨 부부는 상경해 모래내로 이사오던 첫 날, 미로처럼 얽힌 판자촌 골목에서 딸을 잃어버렸다 간신히 찾았다.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빗물을 독에 받아두거나 이웃 동네에서 물지게를 져 날랐던 그곳엔 1968년 첫 대중목욕탕이 들어섰다.


방 한 칸 짓고 가재울에 정착한 수재민들 은 식구가 늘면서 다락방을 올리고, 방을 붙여 지으며 집을 늘려갔다.
◆모래내시장 사람들=1966년 모래내시장이 들어선다. 소상인들의 삶은 잡초같았다. 30여 년간 기름가게를 해온 김규섭(64)씨. 처음엔 가게 안쪽에 한평 남짓 방을 만들어 살았다. 겨울이면 소방서에서 불법 건축물 점검을 나와 해머로 방을 깨부쉈다. “갈 데가 없으니까 일주일(소방점검 기간)간 애들 두 놈 어깨쯤에다 업고 가게에 앉아 날 새 버렸어.”

42년간 포목점을 운영한 홍용선(70)씨가 갖고 있는 자는 40년이 넘었다. 1년에 한번씩 동사무소에 갖고 가 치수를 속이지 않았나 검사를 맡던 자다. 어렵던 시절에 사기꾼, 잡도둑은 더 극성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에게 “첫 손님이 하루를 좌우한다”는 등의 ‘속신’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서울 서북부 최대 상권을 형성하며 남부럽지 않게 벌어먹고 살았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던 그들은 이제 일찌감치 문을 닫는다. 모래내시장 일부는 뉴타운지구에 편입돼 사라진다.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 나왔던 그 풍경도 사라질지 모른다. 조사를 총괄한 오문선 학예연구사는 이렇게 제언한다.

“다른 재래시장들은 아치형 지붕을 단 획일적인 모습으로 리모델링 됐습니다. 번듯한 걸 좋아하는 한국인들은 가난한 시절의 풍경들이 언제 사라지는지도 모르는 채 잊어버립니다. 재래시장의 원형을 보존한 모래내시장은 산업화 시기 서울의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문화콘텐트 산실로서의 가치가 높습니다. 그 공간을 생태박물관의 형태로 보존해야합니다.”

이경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