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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September 13, 2018

미군장교가 찍은 1952년 한국의 모습 - '온고지신, 감사,고마움' 모르는 Arrogant nation? 한국.

아래 사진들은, 서울에 살고 있는 나의 바로 아랫 동생이 오늘 아침 보내온 카톡에서 옮겨논것이다.  이사진들을 보는 순간 당시의 아수라장과, 머슴살이 하던자들이 죽창들고, 인민군들과 합세하여 주인들과 가족 또는 동네 어른들을 위협하고, 때로는 죽이던 생각이 떠올랐었다.
이자료 사진들이 나에게는 경험을 통해 봤던 순간들을 묘사하고 있기에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될것으로 생각된다.

사진에서 보는 이무렵(1952년경)의 어지러웠던, 1또는 2년전의 그순간을 나는 지금도 뚜렷히 기억한다.  비교적 큰 시골 우리집 앞마당에는, 인민군들의 세상이 되여, 집안에서 있는 모든 생활도구들과 이불들을 마구잡이로 끌어내어 그들의 부대로 실어가기위해 마당에 높이 쌓아놓고 있었고, 어머니와 누나들은 무서워서 벌벌 떨기만 했었고, 아버지를 비롯한 형들은 붙잡히면 바로 죽창으로 찔려죽임 당할것을 알기에 집뒤 언덕에 있던 숲이 우거져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넓은 대밭(Bamboo Forest)으로 숨어 목숨을 부지 하고 있었던 기억이다.


 그뒤의 기억은 없다. 누나들은 기억하고 있을수도 있겠다 싶지만, 큰 누나는 세월의 흐름에 거역할수 없이,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Eternal life를 즐기고(?) 계실 것이고, 바로 아래의 작은
누나는 지금은 연로하여 기억이 남아 있을지(?).... 기억은 세월에 따라 희미해질수밖에.


북한농촌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뉴스와 모든 자료를 통해서 볼때, 65년전 당시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사진보고 지나쳐 버릴수가 없었다.
못사는 나라일수록, 그국가를 통치하는 위정자의 통치 스타일과, 헌신의 정신이 잘살게 할수도 있고,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질수도 있게 한다는것을 나는 뼈가 사무치도록, 살아온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헌신으로 국가를 돌본 위정자의 애국적 통치에 감사를 항상 잊지 않는다.



요즘의 한국정부를 보면, 가슴이 미어질 뿐이다.  말로 형용할수 없는 민족 상잔의 어려운 세월을 거쳐, 일류국가의 문턱까지 가도록 만들어서, 배고픔을 털고, 인생의 참맛을 즐기는, 주변 국가들이 부러워 하고,  새마을 운동을 배우러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의 개발 도상국가들이, 한국에 많은 전문가들을 Dispatch해서 Know How를 배우겠다고 하는데, 정작 당사국인 대한민국에서는 "새마을운동"의 정신과 노력을 적폐의 대상으로 삼는 좌파정부가 들어서서, 나라의 근간을 뿌리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위로는 전직 대통령들과 국가경제와 정치적 성숙을 위해 노력해주었던 고위직 리더들을 콩나물 시루에서 콩나물 뽑듯이 뽑아서 감옥에 쳐 넣고, 우리 대한민국의 주적인 북한, 김정은 공산 독재 Regime의 구미에 맞게, 국방 백서에 "주적 북한"을 완전 삭제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쳐해있는 국민들은 내팽개치고, 오직 북한의 정은 집단에게, 국민들 모르게 남한의 경제적 부를 퍼주는데 혈안이 되여 있는 현실에, 온나라의 국민들과 여의도 국민대표들은 아무런 재재를 가하지 못하고 앉아서 장승처럼 쳐다만 보고 있다는게 더 큰 문제로 나를 괴롭힌다. 

좌파 남한정부가 북한에 퍼주는 그천문학적인 돈이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의 배를 채워준다면, 백번 아니라 천번 만번이라도 쌍수들어 환영할 일이지만, 지난 25년 넘게 퍼준 천문학적인 남한국민들의 세금이, 고스란히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공산독재 정권이, 남한과 동맹국 미국을 위협하기위해, 목숨걸고 개발하는 핵무기제작에 고스란히 들어가고 있기 때문인것을 하늘도 알고 땅도알고, 전세계가 다 알고 비난하고 있는데, 유독 좌파문통정부만 김정은 Regime에 퍼주지 못해 안달하는 그저의가 북한의 핵무기를 머리에 얹어놓고 사는 국민들의 마음을 괴롭힌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더 괴로운것은, 오늘의 조국이 있도록 군사적, 경제적으로 끊임없이 도와 주었고, 현재도 맹방으로 옆에서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는 미국에 "감사합니다"라는 인사 대신에 배신행위를 하고 있는 현정부정책에 앞날이 심히 어둡게 보여, 답답하기만 하다.

아래의 링크를 클릭해서 당시 사회의 현실감을 똑똑히 느낄수 있는 사진들을 더 보자.

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bestofbest&no=192620#

Saturday, October 18, 2014

기나긴밤,출출한 속을 달래주었던 "야식 행상"이야기 - 인정은 그때가 더 후했었다

"당고나 모찌이이이이...... 당고나 모찌이이이......"

나의 경우는, 이단어가 우리의 순수한 말인지? 아니면 일본식민지하에서 우리 선조들이 사용했던 말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http://newsplu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9/29/2014092901537.html?inside

6/25 동란직후, 그때 나의 부모님은 고향에서 멀지 않은 도시인 "김제"로 삶의 터전을 옮겨, 피난살이를 하면서, 기차역에서 조금 떨어진곳의 큰대로변(당시)에 있는 주택및 상가 건물인, 일본식 주택에서 대식구가 옹기종기 엉켜 살면서, 생업으로, 당시에 흔히 말하던, 구멍가게를 부모님께서 운영하셨던 기억이 어렴푸시 남아 있다.   지금계산으로 한다면, 자동차로 불과 30분 거리도 안됐을 지척간 이지만, 당시 나의 어린 생각으로는 구만리 이상을 떠나 객지에서 사는것으로 이해 됐었던것이다.

추운 겨울이되면 바람도 모질게 불어대서 가게밖 대로변을 걸을때는 정말로 살을 찢어내는듯이 엄습해 오는 추위와 싸우면서 살아남기위해, 너무나 커서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다시한번 움켜쥐고 떨어야만 했었다.   더춥게 느꼈던 이유중의 하나는 살고 있던집이 적산가옥이라서 밤에 잠을 잘때는 식구들 모두가 온돌방이 아닌 다다미(침대에 사용되는 매트레스 같은)위에서 구호물자로 받은 담요 아니면 피난 나올때 머리에 이고 간직해 오던 솜이불 조각을 덮었기에 더 한기를 느꼈었던것 같다.  그때 나는 여섯살 정도 였을 것이다.

피난집에서 약 1킬로 떨어진 기차 정거장에서 새벽에 화물열차겸 여객열차가 추위에 떨면서 기적을 울리는 소리에 일찍 눈이 떠지면, 옆에서 같이 자고 있던 형들이, 조그만 유리창문에 하얗게 서려있는  성애를 가르키면서, ' 내일이 크리스마스날' 이라고 말해주던 생각도 난다.
그말의 뜻이 무엇인지,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형들도 그말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옆에서 어른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그대로 옮겼을것으로, 지금의 나는 기억을 더듬는다.

"당고나 모찌이이이..... 당고나 모찌이이....." 크리스마스 이브의 늦은 밤에도 어김없이 그소리는 우리집앞을 지나치고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후에 모찌는 찹쌀떡속에 팥을 으깨어 넣고 동그랗게 골프공 크기로 만들어 밤에 출출할때 식구들이 모여 앉아 배고픔을 달랬던 일종의 스낵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당고'는 이름뿐이지 어떤 스낵이었는지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안타깝다.

우연히 조선일보의 그옛날 신문기사를 보았을때, 야간 행상에 대한 추억담을 되살아나게 한점 고맙게 생각하면서,  당시에 사용했던 단어들도 서울과 지방간에 서로 달랐었지만,  내용물은 거의 대동소이 했었다는것도 뒤늦게 알았다.

사진에서 보는 야식행상들은 내가 보고 겪었던 당시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사진에서 처럼 구룹으로 다닌것은 아니었고,  내가 살던 피난처에서는 야식장수 혼자서 외롭게, 그리고 처량하게 구호를 외치면서 지나쳤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직 젊어서 사회생활 할때는 가난하고 찌들고 궁상맞은 그런 광경을  가끔씩 볼때는 지금처럼 연민의 정을 느끼지는 못했었다.  대신에 왜 선조들은 지금의 젊은 우리들 처럼 열심히 일하지 않고 그런 궁상맞은 삶을 살아갈까?라는, 제법 통큰 인생살이를 할것 처럼 속으로 비웃기도 했었다.

똑 같은 당시의 사회풍경의 한장면을 다시 보는 느낌은 저런 어려운 삶을 선조들은 자식들을 위해서 살으셨구나 라고 질곡하고, 배고픈 삶을 살으신 부모님 세대들에게 미안하고 감사하고 그런 마음이다.  세월이 흘러 온갖 삶의 경험을 몸으로 터득한 어느덧 노인 세대에 나자신이 살고 있기에 보는 방향이 달라서인것만은 아니다.   그런 어려운 고난의 삶을 살았기에,  당시의 사회상의 한장면을 다시보는순간  가슴이 아리고 죄스러워짐을 느끼기 때문이다.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있을때, 아버님, 어머님께서 당신네들이 살아온 삶의 경험이 곁들인 Discepline을 하실때는, 직접 대고 말대꾸는 못했어도 속으로는 잔소리하시는것으로 간단히 치부하곤 했었다.  지금은 왜 그때 그랬을까?라고 후회와 이세상에 안계시는 부모님에 대한 죄스러움에 가슴이 메여지곤 한다.  그때문인지 지금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나의 아이들에게는 할수만 있다면 말을 아끼고, 간섭을 안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대신에 행동으로 아빠 엄마가 살아온 삶의 경험을 보여 줄려고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사람사는 냄새가, 그때와 비교해서, 매말라가는 요즘의 이웃간에 인정미를 배푸는 자세로 살아가기를 항상 Emphasizing 하면서.

'온고지신' 이라는 idiom을 연상해 본다.  이문구표현이 제대로 됐는지도 나는 잘모른다. 한자로 표현 했으면 더 뜻이 확실할텐데,  이상하게도 한자와는 인연이 없었던지, 집에서나 학교다닐때 절차를 밟아 배운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시골집에서 중학교 다닐때 아버님께서 보시는 신문을 어깨 넘어로 흩어본것중에서 몇자 정도 기억할 뿐이다.

이말의 뜻이 품고 있는 내용들을, 오늘의 풍부한 세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몸에 비유한다면, 허리부분정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잘 이해하고 평상시 생활에서 교훈으로 삼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90세의 아버지는 70세의 아들을 바라볼때, 어린아이를 물가에 둔것처럼 불안해 하시는것 처럼, 요즘의 젊은 세대들을 바라볼때는 spirit of conservation이 조금은 결여되여 있는것은 아닐까?라는 조바심이 있다.   오늘의 젊은 세대들은 전쟁후 페허로 잿더미만 남았을때 창자가 베베 꼬이는듯한 배고픔을 느껴본 그런 경험이 없기에, 더 냉소적으로 치부하고 지나칠 확률이 더 많을것 같다. 해방둥이로 어려서 전쟁을 겪었던 내자신도 젊어서 그랬던것 처럼........그것이 큰 실수였음을 나처럼 늦게 깨닫는 우를 되밟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