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October 31, 2008

부강한 조국건설을 위한 박통의 고뇌와 멀리서 본 그분의 광채나는 눈빛.


내가 군대생활을 마친지 금년으로 41년이 지났다. 긴세월 같은데 하루만에 흘러간 시간같이만 느껴지는 이유는 군대제대후부터, 한치의 앞도 안보이는 어수선하고 당시 가난했던 조국의 상황이 나를 조금이라도 마음놓고 편히 쉬게 했던 기억이 없이, 조마조마한 상황에서 삶을 위한 발길을, 확실한 보장도 없는, 나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하는, 쫒기는 듯한 시간들을 보내왔기 때문인것 같다.

당시의 조국상황은 자주국방의 슬로건아래, 한손에는 이북의 공산주의자들로 부터 남한을 지키기위해 총칼을 들고, 한손에는 조국재건을 위해 농기구를 들고, 그렇게 바삐 뛰자는 위정자를 비롯한 모든 국민들의 참여속에 주야로 건설의 망치소리가 끝이지 않고 움직이던 때였다.

국비로 교육시켜주는 철도 학교에 겨우 턱걸이 입학하여, 과정을 마치고, 국가시험을 거쳐 공무원이 된후, 현장에서의 짧은 근무를 거쳐, 지금은 대우 빌딩인, 당시의 교통센터에 둥지를 툰 본청에서 근무를 하기도 했는데, 그무렵부터 민방위 훈련(물론 1/21사태로 시작된것이지만)과 CPX(도상군사훈련)를 주기적으로 실시하면서, 조국방위를 군대만이 아니고 후방의 국민들도 직장에서 분담하던 때였다.

정확한 시기는 잘 기억 나지 않지만, 야간근무로,신혼의 꿀맛을 내는 신부를 단칸삭월세방에 혼자남겨두고, 지하벙커에서 CPX훈련을 하고 있을때, 현장을 방문하여 훈련 독려와 위로, 그리고 훈련 점검을 손수 하고 다니시던 박통이 몇명의 경호원만 대동하고 나타났을때, 그분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뚜렷히 남아 있다. 까므잡잡한 얼굴에 미소는 전연없고, 검은 안경을 끼고, 조그만 지휘봉을 오른손에 쥐고, 군대용 그린잠바 차림의 모습. 도상훈련을 하고 있는 우리 모두는 자동적으로 의자에서 용수철이 튀듯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그분이 나갈때까지 취했던 기억도 남아 있다. 어떤 언급이나 지시도 없이 이곳 저곳 훈련장을 둘러 보고 나가셨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지근거리에서 내눈으로 직접 보았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오늘 아침 조국의 중앙일보기사에서, 월남전에 파견된 자식같은 군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영양 보충에 없어서는 안될 김치의 공급을 위해 미국측에 특별히 김치 보급을 허용해 달라는 내용의 친서를 전달 했다는, 역사속의 기록을 읽으면서, 지도자로서 그분의 자상함과 고뇌를 느껴 볼수 있었다. 다시한번 그때의 시절을 머리속에 그려 봤다. 참 세월은 빠르게 날아감을 또 한번 실감하는 이아침이다.

여기에 그기사의 일부를 옮겨 놓았다. 기회가 있을때 마다, 또 읽고 읽고 해 볼려고 그랬다.


월남전 당시 한 전투진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일, 매식, 빼놓을 수 없는 특이하고 고유한 전통부식이 있다. 그것이 ‘김치’인데 김치만이라도 하루바삐 월남에 있는 한국 장병들이 먹을 수 있게 한다면 사기는 훨씬 앙양될 것으로 믿는다.”

1967년 3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는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직접 존슨 미 대통령에게 전달하라며 보낸 친서 내용의 일부다. 박 대통령은 여기서 끝내지 않고 더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다.

“한국 정부로서는 한국 장병들이 한국 음식을 먹고 싶은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이미 9개월 전부터 통조림으로 된 야전식량(C-ration)을 연구했고 생산까지 완료해 성과는 매우 만족스러운 상태다. 만일 야전식량을 공급하게만 된다면 사기와 전투력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증가할 것으로 확신한다.”

누가 봐도 친서는 파월 한국군을 위해 대통령이 부식까지도 신경을 쓸 만큼 장병들에게 깊은 애정을 보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물론 박 대통령의 애정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김치까지도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자원이 된다는 것을 대통령이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미국도 기꺼이 환대했다. 정 총리가 러스크 국무장관, 맥나라마 국방장관, 험프리 부통령과 함께 김치 C-레이션 공급 문제를 거론하자 즉석에서 ‘우리도 좀 먹어보자’고 했을 만큼 거부감이 없었다는 것이 당시 언론이 전하는 보도였다. 이처럼 한편에서는 파병으로 우리의 반공이념과 우방에 대한 신의를 보여주면서, 한편에서는 경제개발 자금을 벌어들이는 시장으로서 월남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점을 정부가 분명히 했기 때문에 기업들도 외화를 벌 수 있는 길을 찾아 날개를 퍼덕이는 분위기가 확실히 살아나고 있었다.

말하자면 정부나 기업이나 월남은 희망의 땅으로 떠오른 셈인데, 그럴 때 한진이 달러 금광을 캐겠다고 나섰으니까 비록 미국 펜타곤 친구들을 등에 업고 떠난다고는 하지만 우리 정부로서도 적지 않은 기대를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조중훈 회장도 정부의 기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고 있었다고 했다. 다만 정부로서는 국가 차원의 경제개발을 생각했겠지만 조 회장은 그것과 함께 월남이 한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곳으로 확신했다는 것이다.

“11월 1일이 우리 한진그룹 창립기념일인데, 매년 그날이 되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고, 만감이 교차되기도 해요. 그동안 여러 역경이 있었지만 월남에 진출할 때나 빚더미에 앉아 있던 대한항공을 인수할 때 생각을 해보면 참 심각한 결단을 했구나 싶지요. 특히 월남은 전쟁터로 가는 것 아니었습니까. 눈에 금광이 보이기는 했지만 금광이 무슨 소용 있어요. 캐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는 게 전쟁터인데. 그러나 기업의 기회는 변화에서 오는 거니까 숱한 어려움과 고난을 각오하고 진출을 했던 겁니다. 물론 그 당시만 해도 개인이든 기업이든 1달러라도 벌어오는 사람이 애국자니까 수송을 전문으로 하는 우리가 나가서 외화 가득을 하면 국가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는 생각도 했고, 사실 정부도 그런 기대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확고한 신념 없이 그게 돼요? 우리가 무에서 유를 창조해냈는데 그게 기적이 아니에요. 그만치 노력했고 그 위험한 포화 속에서도 신용을 지켜 일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고 오늘의 한진을 만들 수 있었던 겁니다.”


월남이라는 무대에서 누가 더 주연급으로 활약했느냐에 따라 결과적으로 한진 같은 그룹이 솟아오를 수 있었다는 얘기로 들리기도 했다. 물론 한진 성장의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는 조중건 고문(전 부회장)도 한국의 경제사적 관점에서 보면 월남 시장은 분명 우리에게 약속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내가 보건대, 이런 얘기를 하면 듣는 사람들이 동감할는지 모르지만 한국 경제가 돌기 시작한 것은 월남 파병으로 받은 군인들 봉급, 또 한진 같은 유수한 기업들이 많은 외화 가득을 한 것이 원동력이 됐지 않았느냐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가 월남 파병을 안 했던들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기는 힘들었겠다, 그걸 하면서 미국에도 큰소리쳤고 경제원조도 더 받았고, 안보문제를 제기해 군사원조까지 더 받으면서 일어설 수 있지 않았겠느냐. 그런 데다가 월남으로 갔던 기업들뿐 아니라 개인들까지 이것저것 외화 가득을 많이 해서 형편이 좋아지고 그게 다 밑거름이 된 거 아니냐, 그 돈을 다 송금하고 산업에 투자해서 이만큼 발전을 가져온 거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분명히 월남은 지금 생각해도 은혜의 땅이었다구요.”

아무튼, 누구도 엄두를 못 내고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길바닥이 우리 자산이다’는 아이디어 하나로 국내 운송업계를 석권하다시피 했던 한진이 이제 월남 시장을 한진의 시장으로 평정하겠다고 나설 때 선봉대장을 자임한 인물은 조중건 상무였다. 물론 조중훈 회장이 쌓았던 경험과 닦아놓은 대로(大路)가 있었기에 가능했겠지만 조 상무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특유한 친화력과 미군 통역장교 시절 맺은 끈끈한 인맥을 최대한 발휘해 미군의 물동량을 단숨에 확보하는 수완을 보였다.

그러나 막상 떠날 때는 조 상무도 불안을 숨기기 어려웠던 것 같다. 전쟁 중인 나라에 기업의 장래가 걸린 신작로를 닦으러 출정하는 입장에서는 사실 심적 부담이 여간 무겁지 않았을 것이다.

“날짜는 1월 23일로 정해졌어요. 이미 비행기도 편도 티켓까지 끊어놓은 상태였단 말이죠. 근데 솔직히 막막해요. 관광이나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심정이다 보니까 집사람한테도 얘기를 못했어요. 가방도 내가 챙겼어. 더우니까 반소매 작업복 한 벌 쑤셔 넣고 타이프라이터 하나 챙기고 돈 3000달러 준비하고. 비행기 표는 왜 편도만 가지고 가느냐, 돌아올 땐 월남에서 번 돈으로 사면 될 거 아니냐, 그러니 죽기 아니면 살기로 가는 거지요. 집사람한테도 딱 떠날 때쯤 알리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불안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배짱도 생겨요. 내가 한국군에서 소금국도 먹어봤고, 일선에도 가 있었고, 미국 군대도 가 있었고, 미국에서 공부할 때 접시도 하루 2시간씩 닦아봤고, 신문배달도 해봤고, 내 나름대로는 인생의 밑바닥을 다 걸었는데 전쟁이야 한국전쟁도 경험했잖느냐, 그런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좀 놓이는 거지요. 1월 22일이 구정입니다. 잔뜩 차려 먹고 내일 떠나는데 이젠 말을 안 할 수 없잖아요. ‘여보, 나 내일 월남 간다.’ 깜짝 놀라는 거죠. 더구나 전쟁을 하는 곳인데.”

Saturday, October 25, 2008

향군창설 56주년 기념 및 캐나다 동부지회 연말 파티





조금 늦게 연말 파티에 아내와 같이 참석했었다. 벌써 많은 회원들이 동부인하여 참석해서, 벌써 순서에 따라
O Canada 국가를 합창하고 있었다.
해마다 하는 행사지만, 웬지 향군 선배들 파티에 참석하는 모습이 줄어지는것을 피부로 느끼는 안타까움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그런데 오늘은 또 내가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군 선배로 모셔왔던 설재련 장군께서 며칠전 돌아가셔서, 이시간 현재 가족친지들이 모인 가운데, 장례식장에서 가시는길에 마지막 Opening을 해서 조문객을 받고 있다는 지회장의 광고가 가슴을 쿵 내려안게 한다. 몇개월전 여름 하계 파티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뵙고 하루를 즐겁게 보냈었는데..... 세월의 무상함을 더느끼게 하는 슬픈 소식이다. 부디 좋은 세상에 가셔서, 앞으로는 근심 걱정없는 그곳에서 좋은 시간만 갖으시기를 기원합니다 라고,마음속으로 기원했다. 다른 선배의 그분에 대한 얘기에 의하면, 6/25전쟁을 치렀고, 5/16혁명의 주동자였던 박정희 전대통령과 육사 동기동창으로 같이 일하다가 일찍히 이곳에 이민을 오셨다고 들었다. 소년처럼 해맑게 웃으시던, 마치 미소년같은 그분을 이제는 만나볼수 없게 된것이다. 모두가 숙연한 분위기이다.
오늘의 파티는 참석한 회원들에게 기쁜 소식도 주었다. 한인상위원회에서 매년 한인사회내 각단체들이나, 개인에게 한인사회를 위해서 헌신한 공을 인정하여 주는 한인상에 향군동부지회가 수상하게 되여, 오는 11월 7일 한인회관에서 그시상식이 열린다고, 많은 회원들의 참석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현 향군지회장(이 진수)의 헌신적인 봉사와 노력으로 이러한 결실을 얻은것으로 나는 믿고 싶었다. 그의 leadership은 과히 칭찬 들을만 하다.
지회를 대표하여 수상하게되는 그를 encourage시키기위해서라도 참석하기로 하고, 15달러 티켓을 구입했다.
평상시 별로 연락이 없던 회원들을 이만남의 공간을 통해서 오랫만에 만나, 인사를 하고 살아온 애기를 나누고,옛날 군대얘기를 하는 시간은 그의미가 갈수록 더 해감을 느낀다. 반가운 얼굴들이다. 캐네디언 참전용사들도 향군의 크고 작은 행사에 상당수 나오곤 했으나, 그들도 이제 많이 늙어 매년 그참석수가 줄어 들곤 했는데, 오늘 저녁에는 아무도 안보였다. 지회장의 설명광고에서, 몇안되는 그들이 오늘저녁 같은 시간에 오타와 총독의 관저에서 초청을 받아 그곳으로 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년 6/25 참전 기념식이 있는 오타와에서나 다시 볼수 있게 될것이다. 몇분이나 참석하게 될지는 미지수이지만....
금년이 향군 창설 56주년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도에 창설된 것이다. 캐나다 지부는 22주년이 됐다고 한다. 56주년이면, 내가 7살때의 코흘리개 개구장이때이다. 그런 내가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중년의 노인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계산해 보면서, 오래전 5/16 혁명후, 당시 대학생이었던 형이 학보병으로 논산 훈련소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고 있을때, 어머님께서 면회가시면서, 초강 기차역까지 같이 따라가던 당신의 어린아들인 나에게 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네가 군에 갈 나이가 되기전에 통일이 되여 다시는 이렇게 면회가는일이 없었으면 원이 없겠다" 라고 머리에 떡을 비롯한 먹을것을 이고, 기차에 타시던 그 모습이 눈에 아스라히 초강역전경과 함께 스친다. 아직도 통일은 커녕, 총칼을 비롯한 새로운 전쟁무기를 앞세우고 날을 세워 총칼을 서로 겨누고 있는 조국의 현실을 생각해 보면, 답답기만 하다. 이지구상에 같은 민족이 둘로 나뉘어 서로 총뿌리를 겨누는 나라는 이제는 없다. 월남도, 독일도 다 통일이 되여 잘 살고 있다. 유독 김정일 치하의 북한만이 아직도 기아선상을 헤매고 있어 안타깝다. 역전의 용사들의 노력이 부족해서 일까? 아니면 우리 조국의 운명이 그런길을 가야만 하기 때문일까? 창조주만이 아실것이다. 제발 바라기는 우리 오늘 이자리에 모인 향군회원들이 생존해 있을때, 하나로 통일된 나라가 되는것을 보는 것이다.
회원들의 얼굴과 뒷모습을 다시한번 처다보게 된다. 머리는 하얗고, 대머리이고.... 어느새...
그래도 국기에 대한 경례는 용수철이 튀겨 흔들리듯 절도있게, 군인답게 보인다. 그것이 바로 군인 정신일것을.... 비록 몸은 세월의 소용돌이 속에서, 빛이 많이 바랬지만말이다. 부디 오래 건강 하소서...
오늘저녁 년말 파티에 참석하기위해, 카테지를 정리하고 골프채를 포함한 짐을 꾸려 어제오후 단풍이 한창인 보기좋은 고속도로를 달려 토론토의 보금자리로 달려 오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내년 연말파티에서도 오늘 참석한 모든 회원들이 그대로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면서 파티장을 나섰다.

Monday, October 20, 2008

Cuba could be a Korea's Beachhead to Caribbean



이 컬럼도 VANK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여기에 옮겨, 오래 보관 하고져 합니다.

Cuba could be a Korea's Beachhead to Caribbean
2005-02-01

Hi, it's Paul Lee. As you may know Cuba is one of two communist countries secluded from the global organization, the other one is, of course, North Korea. I just got home there, Varodera, Cuba, taking 10 days winter vacation fleeing the severe Canadian winter with snow. The Cuban government has never allowed their people to travel out of Cuba since Fidel Castro's regime in power that was late 1950. Until that revolution happened, Cuba was a kind of free country under western hemisphere, especially U.S. All the resorts opened to foreigners nowadays were built at that time. The living standard of people there were so poor which seems like never got better since revolution.

But the most of people I met kept friendly with smiling that I believed because of hot tropical weather through whole year round. Cutting the relationship with western countries meant Cuban economy heading backward since that forced Castro's regime open the resorts area to foreign tourists later to feed their people, I believe. Still horse driven bogies are a major transportation at the most of cities in Cuba including Havana, capital city. Taxis, trucks, buses are very old that spews black smoke like chimney nobody seems like concerning of.

Sometimes I saw new cars, mini vans from Hyundai, Kia Co. of Korea, my homeland. Also I met a few descendants of Koreans who have lived there more than 3 generations who were hardly speaking Koreans. I have told them about myself in exchange information with them. But people there, from my view, didn't make any complaint of regime hardly which I believe that during the last 50 yrs they haven't seen out of Cuba that impossible for them to compare. Instead they have been brain washed with regime's propagandas only. And regime's power in control seems all most over since the top leader is weakened with old age. Then I believe whoever in power has to open their door to the world that may make Cuban people open their eyes widely to see and feel.

Seeing these kind of tendency in Cuba, Koreans can use Cuba as a vanguard to expand relationship with Caribbean countries, especially on economy, I mean, international trade. Cars I saw there made me feel competency a lot. Telecommunication industry with cell phones will be a major item for Korean manufacturers to be thought. Of course I believe big companies of Korea would have been in ready for their business. Still I want to inform these kinds of phenomenon in Cuba to Koreans who may have intention there. I really enjoyed my vacation playing golf, sunbathing, touring cities etc. The birds sat on bed made by room-maid who used bath towels were so impressive. Many thanks.

Paul Hankyun Lee
Canada (Retired businessman)

But I love my motherland,Korea.(그래도 나는 내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할수밖에 없다.)






















































오늘 갑자기 거의 16년전에 기고했던 글을 다시 여기에 옮겨논 이유는 간단하다. 어제 일요일 아침에 삼성의 이건희 회장님께서 긴기간동안 와병중에 계시다가, 하늘 나라, 영원의 나라로 여행을 떠나셨는데, 고국의 언론을 비롯한 많은 국민들이 애도의 조의를 표하는것을 언론을 통해 봤었다.

오늘 아침뉴스에는 이회장님이 떠나시면서, 후손인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비롯한 자손들에게 많은 재산을 상속해 주셨는데,  당장에 내야할 상속세가 적게는 10조원, 많게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걱정섞인 보도였던것이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당장에 그렇게 많은 상속세를 내기위해 소유하고 있는 주식을 팔아야 하는데, 그럴경우, 팔게되는 주식을 구입하는 사람이 외국인, 특히 중국기업이 구입하게 될 확율이 높아, 이경우, 앞으로 삼성의 운영권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것이라는 염려 기사를 봤었다.

내가 알기로는 미국이나 캐나다를 비롯한 많은 서구나라에서는 상속세가 거의 없는것으로 알고있다. 그만큼 기업의 역활이 나라의 경제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데 대한 답례가 아닐까?라는 이해를 하게 됐다.  왜 우리 한국의 세법은 기업에 대한 배격을 분명히 하는 내용의 악법을 계속 고집하고 있는지?가 너무도 궁금해서다.  전문가들의 설명에 의하면 중소기업도 똑같은 처지에 고민이 많아, 어떤 기업인들은 다 팔아서 처분하고 이민을 떠난다는 슬픈 얘기도 전해줬었다.

이렇게 비합리적인 상속세는 제발 하루속히 바꾸어, 기업들이 조국에서 맘놓고 맘껏 기업활동을 할수 있도록 좋은 나라를 만들도록 도와 주기를 바란다. 기업이 잘돼야 Job creation이 많이 발생하는 간단한 원리를 생활화 할수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해서다.



몇년전 고국을 방문 했을때, 느꼈던 점을, 고국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웹싸인트 VANK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보도에 의하면 VANK웹이 국가에서 삭감한 예산 문제로 곤란에 처하고 있다기에, 여기에 옮겨 보관 하고져 함입니다.


2005-01-05

But I love my motherland, Korea
Happy New Year! My name is Paul Hankyun Lee, though my original is Hankyun Lee, but living here in Canada adapting an English name is easier for being remembered by people and another reason I took Paul is that through my life I have wished to live like the Paul, one of desciples of Jesus in the bible. As you guess, I am a Korean-Canadian who's been living here in Toronto almost 30 years as of Jan. 2005, holding Canadian citizenship. And I have retired since 2 years ago from my own business in retail industry. Currently I have 2 regular e-mail friends. And I got home just 3 weeks ago from motherland Korea staying 45 days. Of course during that staying I also traveled Hong Kong, Vietnam, Cambodia and China on top of every corner of Korean peninsula travelled with 3 couples of my friends.

The paying system at tour areas should be changed not to give a bad impression.

Here are some points I experienced with good feeling and bad feelings too. The good points were so many High ways have been constructed in the short period of time which can be cheered by tourists and Koreans abreast. The bad point was that too many times of entrance fees being collected at any tour areas. For example, I was Seorak mountain (Seoraksan) with my friends mentioned above. We paid 4 times of it to tour, first at the parking lot, then National Park entrance fee, then temple entrance fee, then again lifting fee of cable car to a peak. Also each of fees was so expensive that could give the tourists a bad impression on visiting Korea.

Nobody can understand that 4 times of fees to see a resort of a mountain. I paid only one time entrance fee at the Ocean park in Hong Kong which has two parks in it with huge facilities to see and free ridings including cable cars that runs over 15 minutes that was so long compared with two minutes ride on Seorak mountain (Seoraksan). The most of resorts I have been in Korea were same on collecting fees. This should be changed to one time collecting right away, otherwise foreign travelers won't suggest any Korean tours to their friends after tour in Korea. I am sorry I couldn't say good feeling a lot. But I love my home country. Since I saw those as a outsider without any prejudice on it, it would be helpful for you to judge it.

Many thanks.


Paul Hankyun Lee
Canada (Retired businessman)

Wednesday, October 15, 2008

눈에 선한 단풍절경속에 Trail Walk-추수감사절 휴일에.



































눈에 선한 단풍절경에서 Trail Walk.

야….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 색의 조화가 잘 이루어질수 있는 또 다른 경치를 어디서 보고, 맛을 느낄수 있단 말인가? 어려운 계획과 실행이었지만, 만추의 단풍절경을 보면서, 오랫만의 Trail Walk을, 항상 친지요, 동생 또는 형님 그리고 조카, 손자 손녀처럼 생각해 왔던 회원들과 어루려, 1 박 2일간을 한창 무르익은 가을 단풍의 절경속에서, 잠시 세상살이의 시름과 기쁨, 그리고 모든 짐들을 벗어 던지고, 곱디곱고, 아직 때묻지 않은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노랗고 빨갛게 색칠된 숲속을, 그것도 가장 채색(?)이 잘된 Trail Course를 골라, 쏜살같이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잠시 붙잡아 둔것같은 세계속에서 보낸 아주 보람된, 기억에 남을 순간들을,그것도 추수감사절 휴일에, 잊을수 없을것 같다. 중국 장가계의 여행때 감탄했던 절경이 기억에 오래 남아 있어 지금도 가끔씩 떠 올리곤 했지만, 오늘 산행중에 Mazinaw Lake건너편에 있는 기암 절벽의 풍경은 절경이었지만, 색갈의 조화는 장가계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표현의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할 정도로 감탄 연발의 절경중의 절경이었다.
매년 이맘때면, 이곳 저곳을 찾아 트레일 웍도 해 보고, 이곳 캐나다의 상징인 단풍나무숲을 수없이 걸어 보았지만, 오늘 걸은 Bon Echo Provincial Park속의 불타는듯한 단풍절경은, 그많은 시간과 계절을 보내면서, 왜 일찍이 이곳을 찾지 않았었던가 하는 후회같은 아쉬음을 느끼지 않을수 없게한 곳이었다. 남부 온타리오의 고속도로를, 10월달 단풍계절에, 달려 보면 운전자 모두가 느끼는것처럼, 단풍의 절경이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음은 모두가 알고, 그것에 대한 일가견들이 즐비한것으로 인식되여 있지만, 이곳의 절경이 유난히도 돋보이는것은, 호수건너편에 떠 있는 병풍처럼 펼쳐지는 섬의 앞부분을 이루고 있는 기암절벽과 구색을 맞추어 어우러진 색채가 특이함 때문인것이다. 한창 더울때 무더위를 피해 이곳에 몇년전에 들렸던 기억이 아직도 새로운데, 그때는 푸르다 못해 검은 색을 띨 정도로 우거진 숲의 웅장함을 느꼈었다. 회원들 모두가 감탄의 연발이다. 더 늦기전에 불타는듯한 가을의 마지막 단풍을 보기위해, 우리 회원뿐만이 아니고, 여러곳에서 우리처럼 달려온 수많은 구경꾼, 산책객들이 같이 어울려 카메라에 아름다움을 옮기느라 여기저기서 셔터 누르는 소리가 끝이지 않는것 같다. 나도 계속 눌러 댓지만, 그래도 다 못담는것 같아 아쉬움이 끝이지 않는다.
어떤 회원은 내년에 다시 와서 camping 을 해야 겠다면서, 되돌아 가는길에 Park Office에 들려 아예 Reservation을 하겠다고 벼르기도 한다. 바다처럼 넓고 멀리 펼쳐져 있는 호수의 그끝을 봐도, 그리고 반대편 북쪽의 호수 건너편의 숲을 봐도 온통 빨갛게, 불타는듯한 절경이다. Timing이 아주 잘 맞은 점도, 한몫 거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하늘은 티하나 없이 순수 그대로의 코발트 색이다.
우리 모두를 아쉽게 한것은 호수를 건너 절경의 섬까지 운항하던 Ferry Service가 중단되여 우뚝 솟은 섬위의 Trail을 걸으면서 더 가깝게, 그리고 더 멀리 볼수 있는 비경을 놓친점이다. Ferry Service Season이 끝났다는 Park Ranger의 설명이 야속하기만 했다.
이곳에 오기전에는 Presqui’le Provincial Park에서 생태계를 자세히 관찰 할수 있는 Jobes Wood Trail을 아침 일찍 걸었었다. 태초 이래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을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우거진 숲속에 쓰러져 딩굴다 썩은 나무위에는 무수한 종류의 버섯들이 때를 만난듯 버섯특유의 냄새를 내품으면서 촉촉함을 한껏 자랑하는것 같은 모습들이 신기했다. Trail 시작점에 세워진 설명판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200년전쯤에 초기 Settler가 이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었던 곳이라고 밝히고 있었다. 그래서 Trail 이름도 초기 정착민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이러한 숲속에서 농사를 짖고, 가축을 기르면서 살았다니… 쉽게 믿어 지지가 않았다. 피부에 그감각이 와 닿지는 않지만, 다만 역사 공부를 한다 셈치면 편할것 같은 기분이다.
긴 섬처럼 온타리오 호수를 따라 펼쳐진 Presqui’le Park은 대략 서쪽에서 동쪽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반도(Peninsula)인데, 남쪽은 호수에 접해 있고, 반대편인 북쪽으로는 Marsh벌판이 끝도 보이지 않게 펼쳐저 Main Land와 접하고 있다. 공원 Ranger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자라고 있는 갈대들이 물을 정화 시키는 일등 공신이라고 한다. 온타리오 호수를 거쳐 St. Lawrence강을 따라 대서양으로 흘러 가는 물이 맑은 이유는 바로 이 갈대들의 숨은 정화 노력이라고 보면 지나친 과장이 될까? 이넓은 갈대밭에는 각종 생명체들의 서식처가 되고 있었다. 봄에는 종족 보존을 위한 각종 동물들의 생산지가 되고, 가을철과 겨울철에는 이곳을 지나가는 철새들의 쉼터가 되고, 학생들의 방학철에는 야간 실습장이 되여, 고사리같은 손에 Flash light를 쥐고, 조심 조심 발길을 옮기면서, 곤충들의 삶을 살펴 보기도 하는 현장 경험을 겪게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현장 체험을 돕기위한 차원에서 갈대들이 자라고 있는 Swamp속을 가로 질러 건설된 Board Walk이 약 1.5 킬로 정도 된다. 운이 좋을때는 Board Walk을 걸으면서, 사슴들이 그속을 헤메는 장면도 볼수 있고, 요즘은 휘귀종인 Crane과 Heron들도 여름철에는 가끔씩 보기도 한다. 긴다리로 엉금엉금 한발짝씩 떼어 놓을때마다, 긴목도 같이 춤을 추는것 처럼 움직이는 모습도 볼수 있곤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한 Board Walk Trail 을 할수 없었다. 오랫동안 사용되왔던 Board Walk이 낡아 전부 뜯어내고, 다시 건설하고 있는데, 입구에는 있는 2충높이의 전망대는 완성되여 그곳은 개방 되고 있어, 그나마 위에서 멀리 펼쳐져 바람에 출렁이는 갈대숲을 볼수 있어 다행이었다.
갈대들은, 마치 수확기를 앞두고 황금물결이 출렁이는 벼벌판처럼 황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내년쯤에는 다 완성되여 Swamp속에서 자라고 있는 갈대밭속을 걸어 볼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옆의 해수욕장으로 이용되는 모래밭에는 이동중에 잠깐 쉬고 있는 수백마리의 기러기떼들이 아름다운 전경을 만들고 있었다. 이곳의 기러기들은 우리 인간들과 친숙해서 일까? 웬만큼 가까이 접해도 도망갈 생각을 안한다. 한가로이 쉬고있던 기러기떼들이 갑자기 퍼득거리면서 공중으로 치솟는다. 저멀리 모래사장에서 한테의 산책객들이 걷고 있었는데, 그속에 개가 있어, 이를 본 기러기들이 놀라 그렇게 퍼득 거림을 알았다. 사람을 더 무서워 해야할 그들이 사람은 무시(?)해 버리고, 개한테 신경을 쏟고 있음은, 동물들만이 느낄수 있는 먹이 사슬이 엄연히 작용하고 있음을 보는것 같다. 운좋게 우리 일행이, 사람키보다 훨씬 큰 억새풀숲 사이로 이어진 Owen Point Trail을 걸으면서, 모래 사장에 인접해 있는 Look Out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때 여서 이러한 광경도 목격했었다.
우리 일행의 마스코트 였던 손녀딸 같은 영아가 신기한듯 응시하는 모습이 귀엽다. 걷기를 마치고 카테지에 되돌아 왔을때, 첫눈에 띄는것은 허기진 일행들의 배를 채워줄 먹거리가 넓직한 테이블위에 질서 정연하게 진열되여 있는 광경이었다. 경험많은 여성회원 몇분이 산행에 참석치 않고, 대신 이렇게 미리 준비를 해 놓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Team Work의 표시 아닐런지? 고마웠다.
어제밤 늦게까지 카테지 뒷뜰에서 Camp Fire을 하면서, 깊어지는 가을밤의 이슬을 맞으면서, 세상살아온 이야기들로 꽃을 피우면서, 밤공기의 차거움도 잊은채, 밤잠을 설치면서, 그렇게 추억을 만들었었는데, 한명의 낙오도 없이 새벽같이 일어나, Trail Walk을 하면서 피곤한 기색없이 기분좋은 표정들이다. 오랫동안 기억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져 있기를 기대해 본다. 연장자되시는 회원께서 무사히 일정을 마치게 인도해 주신 deity 에 대한 감사의 말씀과 기도로 끝을 맺었다. 이번 1박 2일의 Trail Walk을 뒤에서 소리 없이 계획하고 이끌어준 회원들에게 고맙다고 인사 한마디는 꼭 하고, Trail Walk소감을 마치고져 한다. 감사.

Sunday, October 05, 2008

평화 마라톤,걷기 그리고 그의미.













이번이 4회째 평화 마라톤,걷기 운동의 날이라고 한다. 조국 한반도만이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같은 민족이 두쪽으로 갈려 각기 다른길을, 그것도 북쪽은, 지금까지 지구상의 어느 정체나 정부도 일찌기 그잔혹함을 국민들에게 행한적이 없는, 살인마 깡패집단이, 한반도의 행방이후로, 집권하여 주민들을 굶어 죽게하고, 노력동원에 혹사 시키는 악당들의 정부요, 그 남쪽은 세계 여느 민주 정부와 같은 수준의 민주정부가 세워져,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경제적 부를 누리고 있으면서, 서로 수백만명의 군사력을 대치 시키고 오늘에 이르는 지구상의 유일한 곳이다.
이곳 캐나다에 이민와서 살고 있는 많은 교민들이 조국 한반도의 통일을 염원하는 뜻으로, 매년 Peace Run for Reunification of Korean Peninsula 라는 캐치 프레이스를 걸고, 5킬로의 걷기와 10킬로의 마라톤 행사를 금년으로 4회째 해 오고 있는 이번 행사에 우리부부는 아는 친지 몇분과 함께 처음으로 참석했었다. 웬지 한인 사회에서 행해지는 크고 작은 행사에 거의 참석을 자제해 오고 있었는데, 이민 초기부터 가깝게 알고 지내던 친지분이 은퇴후 한인회에 Volunteer로 봉사하면서, 이번 행사를 깊이 관여하고 있는분이 이번 행사에 참석해 보도록 권장하여, 생각을 바꾸어 참석했었다. 며칠전에는 Queen's Park과 Parliament Hill에서는, 캐나다 정부에서,매년10월3일 즉 개천절을 한인의 날로 정해줘, 국기계양대에 태극기가 휘날리게 하는 기념식도 정부관계자와 대사및 총영사 등의 인사들의 참석하에,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오랫만에 한인회관에 약속시간에 맞추어 도착했다. 벌써 많은 참가자들이, 어떤이는 마라톤을 하기위한 아주 간단한 복장으로, 어떤이는 색상에 맞추어 패션쇼하는것 같은 복장으로, 또 어떤이는 머리에 띠를 두르기도 했고..... 특히나 많은 젊은이들이 참석한 모습은 희망이 더 많이 있어 보여 든든한 마음이 깊었다. 조직운영 위원회의 활동도 눈에 띠게 조직적으로, 특히나 젊은 Volunteers들이 앞장서서, 움직이는 모습 또한 우리 한인사회의 이민연륜이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고도 남았다. 그동안 매년 한인회비는 납부했어도, 실제로 한인회에 들른적은, 굳이 기억에 떠 올린다면, 약2년전 한인회 주선으로 컴퓨터를 배우러 며칠간 들렸던 것이 전부 였었던것이다.
9시 정각이 되여, 먼저10킬로를 달릴 마라톤선수들이 출발선에 모였다. 임시로 설치된 전광판에 9시 정각이 되자, 신호와 함께 젊은 건각들이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가고, 간혹 나이드신 선수들도 그사이에 끼어 뛰는 모습이 자랑스럽게 보였다. 그들이 사라진다음 5킬로 걷기 선수들이 다시 출발선에 모였다. 가슴과 등에는 참가 번호표들을 큼지막하게 달고, 나도 아내와 같이 그대열에 서서, 출발 신호와 함께 힘찬 첫발을 내디뎠다. 우리 걷는이와 뛰는이들의 통일염원이 담긴 한걸음,한걸음을 옮길때마다, 한반도의 정치 지도자들 특히 북한의 Wooden Heart들에게 시원하게 전해 졌으면 하는 간절함을 빌면서 시작햇다. 한인회관을 출발하여 Leslie가를 북으로 달려, 마라톤 선수들은 York Mills까지, 다시 그곳에서 오른쪽으로 꺽어 Don Mills까지, 다시 그곳에서 남쪽으로 달려 Eglinton에 도착하면 다시 오른쪽으로 꺽어 처음 출발했던 Leslie까지 달려 회관에 이르는 코스이고, 걷기는 그절반인 Lawrence 까지만 걷고, 그곳에서 오른쪽으로 걸어 Don Mills에 이르게 되면 마라톤 코스와 같은 길을 걸어 회관에 도착하는, 정사각형 코스인것이었다. 경찰에서는 뛰고 걷는 큰길의 Lane 하나를 우리의 마라톤 행사를 위해 활해하고, 경비까지 서 주어 아주 불편없이 걷기에, 뛰기에 최선을 다할수 있었다. 걸으면서 경찰관들과는 인사를 나누었고, 지나는 행인들에게는 손도 흔들고.... 어떤이의 BackPack에 꽂인 조국의 얼굴인 태극기가 미풍에 휘날리는 광경은 흐믓하기도 했다. 캐나다의 제일큰 도시 토론토의 바쁜 거리를 차지하고 당당히 걷는, 뛰는 우리자신들의 위상이, 비중이 이곳 사회의 한곳을 차지하고 있다는 증표를 뚜렷히 보여주는 그모임속의 내자신을 다시한번 되돌려 보았다. 정확하게 32년전 여름에 이곳에 빈손으로 트랩을 내려 첫발을 땅에 부렸을때의 불안하고, 두렵기만 했던 순간들이 교차 하기도 했다. 그사이 세상은 얼마나 많이 변해왔던가? 그사이 우리 부부는 어덯게 살아 왔던가? 얼른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선물로 받은 두 자식들이 떠오른다. 지금은 사회의 한일원으로 제각기 맡은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음에 감사 하기도 한다.
걷는 중간에는 젊은 봉사자들이 갈증을 해소시키는 물병을 건네주고, 또 전 코스위를 달리고 걷고 있다는 증표도 팔목에 달아주는 수고를 하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역사의 흐름이 힘차게 출렁이고 있음을 뚜렷히 보는것 같았다.
처음에 같이 출발했던 친지들과는 중간에 떨어져, 처음 페이스를 그대로 지켜 출발지인 회관에 도착했을때는 정확히 한시간이 흐른뒤였다.
젊은 Volunteers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도착한 모든 선수들에게 스낵백을 하나씩 건넸다. 물한병 바나나 두개, 그리고 미니 chips백이었다.
준비위의 세심한 배려에, 많이 성숙했음을 보며, 고맙게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고, 참석의 의미를 더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다. 모두가 물병을 열고 풀밭에 앉아 갈증을 해소, 스낵을 뜯고....

시상식에서 보여준 참가자들의 질서 정연한 모습과, 특히 고운 한복에 고깔까지 머리에 쓰고 사회를 보는 귀여운 아가씨의 모습은 특히 눈에 띄었다. 목소리도 카랑카랑하게, 그것도 영어와 한국어를 거침없이 자유 자재로 상황에 따라 토해해는 아가씨의 모습이 입고 있는 고운 한복과 잘 어울렸다. 이번 행사에는 이지역의 연방 보수당의원과 총영사분들이 참석하여 축사도 해주고, 한인사회의 성숙함과 이사회에 기여하는 감사함을 표시 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임과 행사가 바로 Multiculturalism을 제창하고 있는 캐나다라는 나라의 참모습이구나 실감하게 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격식없이 시작된 시상식의 모든 순서를 보면서, 이사회에서 오래 살아온 나의 생각과 바램이 꽃으로 피어남을 보고 있는것 같았다. 보기가 너무나 좋다. 아내도 그렇게 느끼는것 같았다. 모든 행사가 끝난후, 단상에 올라, 귀여운 사회자 아가씨에게 사진한장 찍고 싶은데 허락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아저씨 그럼요 라고 오히려 반가워 하는것 같아, 몇장을 스냅했다. 우리 한인사회의 앞날이 그들손에 앞으론 매달려 있다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번 행사를 보면서, 앞날을 생각하는 나의 마음은 밝고 가볍기만 했다.
고국왕복 비행기표 여러장을 포함한 많은 상품 수여가 있었지만, 어쩐일인지 우리 부부에게는 그런 행운이 닿지 않아 빈손이었다. 특히 나의 경우는 거의 항상 그래 왔으니까 이상한 일도 아니었지만, 아마도 우리보다 더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렇게 된것 아니였겠나 라고 생각했다. 오늘이 또 나의 62번째 생일날이어서 였을까? 모든게 좋게만 보였다. 아니면 아침에 아내가 준비해준 미역국을 맛있게 잘먹어서 였을까? 우리 한인회의 무궁한 발전을 위한 염원을 가슴에 담고 새기면서, 집으로 돌리는 발길은 가벼웠다. 기대도 더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