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December 25, 2008
핸델의 메시아공연, 장엄했다.
나는 음악의 기본인 콩나물 대가리도 잘 모른다. 그래도 하모니카는 남 못지 않게 불어댈수는 있다. 어려서 형들이 밤늦게 뒷산에 올라 그곳에서 구슬프게 불어대던 틈틈히 형들 몰래 불어본게 감으로 음을 잡아 하모니카를 다루어 본것이 아마도 기억속에 남아 오늘에도 활용되는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허지만 콩나물대가리로 표시하라고 한다면, 차라리 장님이 되는게 더 편한정도로 까막눈이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찬송가를 부르는것도, 요즘은 드물지만, 어린나이에 고국에서 생활할때도 가요를 몇번 들으면, 따라하곤 해서, 그기억이 남아있어, 모임에서나, 아니면 그런 기회가 만들어 지면 남못지않게 소리를 내곤 한다. 이러한 음악적 무식함을 굳이 밝히는 이유는, 그수준에서 이번에 크리스마스 축하 공연의 일환으로 교회 성가대가
'헨댈의 메시아'를, 여러달 동안 연습하여, 지난 토요일, 그결과를 교인들 앞에 선보인 공연을 보고 듣고, 감사한 마음이 가슴속깊이 새겨져 있음을 나타내 보고져 함이 있기 때문이다. 입장할때 받아 들고온 프로그람을 보면서, 연주할 곡목의 내용이 담고 있는 깊은 내용이 뜻하는바를 나는 잘 알수가 없었다. 그래도 매년 이맘때면, 각종 미디아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내노라하는 세계적인 합창단의 공연을 앞다투어 방영하는 장면을 많이 보았왔었다. 그런 합창단의 공연과 성가대가 하게될 공연이 비교나 될수 있을까?를 나름데로 비교하면서, 큰 기대보다는 조바심을 안고 이층 방청석의 한자리에 앉았었다. 그러나 공연이 시작됨과 동시에 나의 비교가 무식한 판단이었음을, 우리 성가대원들은 장엄한 화음으로 깨우쳐 주기시작했었다. 이번에 교회성가대가 불러준 여러곡들중에는 귀에 익은멜로디도 여러개 있어, 그럴때면 더 귀가 번쩍 뜨여, 기분좋게 그음율이 귀속에서 나와 같이 놀고 있는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내경우는 교회성가대원들을 우러러 보는 습관이 오래전부터,아니 청년시절부터 있었다. 이곳에 오래전에 이민와서 교회생활을 하면서, 주위의 권유에 밀려 교회 성가대원이 된일이 있었다. 테너를 하라고 했는데, 오선지의 음율을 보고 불러야 된다는데, 처음 해보는지라, 지휘자의 뜻을 잘 따르지 못하고, 보통 부르는 멜로디음을 내곤해서,결국 쫒겨(?)났던 그때로 부터 내가 보는 성가대원들은,고운 음을 내고 안내고를 떠나, 특별한 Talent를 갖춘 교인이라는 보통이상의 시선으로 우러러 보아왔다. 가느다랗게 그리고 은은하게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온몸에 생동감이 일어 나도 모르게 몸을 반사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장엄하고 우렁찬 화음으로 어우러져 내귀에 장엄하게 들려오는 음률은 나의 마음속에 감정과 열정을 불어넣어, 같이 몸이 움직이는것 같은 생동감을 충분히 느낄수 있도록, 그들은 수준놓게 잘해주었었다.
그위에 지휘자분의 손놀림과 몸의 율동은 과히 역동적이고도 남음이 있어, 그기운이 내몸으로 밀려오는 전율을 느끼곤 하게 했었는데, 평상시 그녀가 지휘할때는 못느꼈었던 다른 지휘를 보는것 같았었다. 과연 내나름데로 판단하고 높이 보아왔던 성가대의 고고한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해 주었음에 재미있었다는 그위에 '역시 성가대원들은 달라' 라는 평상시 나의 소신을 흔들림없게 해주었다. 공연을 관람하고 청취한 모든분들도 나와 같은 느낌이고, 성탄의 즐거움을 나누었으리라.
짧지않은 여러달동안을 연습해 왔다고 들었다. 생업에 종사하느라 무척이나 바쁜 생활인들인 성가대원들이었을텐데, 성탄의 참뜻을 음율로 전달하기위해 하루의 일과에서 피로를 풀어야할 그시간을 활애해서, 연습장에 모여 심혈을 기울여, 문외한인 나같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화음을 만들어낸, 지휘자를 비롯한 대원들의 노고를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같이 화음을 만들어낸 오케스트라도 훌륭한것 같았다. 어린 청년들 같았는데..... 조금만 더 연습을 한다면, 그들의 연주는, 마음깊은곳에서 부터 울려나온 박수를 받은 성가대원들의 장엄한 화음 이상으로, 환성을 이끌어 낼것으로 믿어진다.
사실 이러한 수준높은 공연의 평가는 전문성을 갖춘 다른분들이 했어야 하는건데...... 아마도 공연한 그날 날씨가 좋지 않아 참석을 못했기 때문인것으로 생각했기에 감히.....대신 한것....미안.
천사들로 표현해도 전연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어린이 합창단의 소리는 내가 그천사대원들처럼 꼬마였을때, 시골천막교회에서 성탄을 맞이 하면서 연극과 합창을 했었던, 때묻지않은 그기억을 뚜렷히 되살려 주고도 남는 곱고, 싱그러운 화음이었다.
그천사대원들이 꿈꾸고 바라는, 창조주 하나님만을 찬송하면서 살아갈수 있는 그런 세상이, 이번 공연의 선물로 우리모두에게 현실로 나타나기를 기원해 본다.
오늘이 12월 23일 그것도 저녁 8시45분을 가리키고 있다. 벌써 메시아 공연이 역사속으로 묻힌지도 4일이 지난 시점이다.
이렇게 공연과 음악에는 전연 문외한인 내가 두서없이 느꼈던 감정을 두서없이 적어 보았다. 이러한 나의 느낌과 감사함이 대원들에게 전달되였기를 바라며, 그들의 봉사에 끝없는 축복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Saturday, December 13, 2008
Mountainview Conservation & Thirty Mile Area Trail Walk
겨울다운 날씨이다. 추운 겨울의 상징인 흰눈도 산천 초목을 덮었다. 그런데 겨울에는 항상 회색빛이던 하늘도 오늘따라 햇볕이 화사하고 하늘도 파랗다. 기대하지도 않았었는데, 오늘은 지난번 산행때보다 더 많은 회원들이 참석하여 눈비탈길을 걸어가는 발자국소리가 더 요란스러움을 본다. 언덕진 비탈길은 하얀 눈으로 덮혀 있어 그위를 한걸음씩 밟아 간후에는 흔적에 남는다. 지도를 보고 오늘 산행할 구간을 정했는데, 계속해서 비탈진 언덕길일것이라는데까지는 예측했었는데, 지표가 거의 암반으로 덮혀있어 그위를 걷는데 신경이 많이 쓰일것이라는것은 예측 안했었다. 그위에 이끼까지 덮혀있는것 까지는 좋았는데, 살짝덮인 눈은 때로는 미끄럼틀처럼 어렵게 만들기도해서 마음이 여느때 산행때 처럼 편치는 못했다. 모처럼 참석한 회원에게는 좀 부담되는 Trail Walk 구간이기도 하다. 갑자기 꽈당하는 엉덩방아 소리가 대열뒤에서 들린다. 가장 재빠르게 걷고, 때로는 대열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안내도 해오곤했던 어린 학생회원이 실족하여 넘어진것이다. 그래도 아무렇치않게 엉덩이 털고 일어나 계속한다.
목적지에 약 1시간을 QEW를 달려 오늘 산행이 시작될 옆의 주차장에는 바닥이 빙판이라서 오늘 산행은 쉽지 않을거라는 신호라고 생각했었지만, 리더되시는분의 오늘 무사한 산행을 기원하는 기도를 마치고 첫발을 옮겼다. 바로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했다. 눈덮힌 비탈길은 한발짝 옮기는데 더 에너지를 써야 하는 주의력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간혹 눈속에 빙판이 숨어있어 그곳을 밟을때는 원치않은 춤을 춰야하는 스릴을 만들게 하곤 했었는데.....그연기를 어린 회원학생이 실연한것이다. 7부 내지 8부 능선을 따라 뻗쳐있는 Trail Route는 다른 계절에 걸을때와는 많이 달랐다. 찬겨울의 북서풍은 앙상하게 가지만 붙어있는 나무숲을 심하게 때리고, 발가벗은 나무들은 아파서(?)인지 계속해서 고통을 참아내면서 내뱉는 휘바람소리처럼 계속해서 큰소리를 내지른다. 그바람이 가끔씩은 계곡까지 강타해서 그위를 걷고있는 우리산행회원들의 귓전도 때린다. 금새 빨갛게 귀끝이 그표시를 내는것을 쉽게 본다. 회원들은 귀의 아픔(?)과는 아랑곳없이 계속 대열을 이루어 발길을 옮긴다. 한발짝 떼어놓을때마다, 그발걸음이 신체단련의 원동력이 되는것을 잘 알고 있기에, 찬바람이 귓전 때리는것은 관심밖이 될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길을 멀리 북쪽으로 돌려 본다. 쭉뻗은 QEW가 보이고 그위를 셀수도 없는 자동차들이 마치 개미때의 이동처럼 조그맣게 보인다. 그너머로는 Lake Ontario의 파랗다 못해 검게 보이는 호수물이 수평선을 이루고 있다. 대자연의 구색이 이렇게도 완전히 잘 갖추어져 있음을 오늘 처음 뜻깊게 느낀다. 언덕아래 가까이로는 포도과수원이 지평선을 이루어 펼쳐져 있다. 우리가 가끔식 마시는 포도주가 바로 이곳의 포도밭에서 만들어져 나온다는것을 까맣게 잊고 살아왔음도 새삼스레 느껴본다.
전진해서 걸은 거리가 5키로 됐음을 지도에서 확인하고 나서,이제는 방향을 반대로 돌려 왔던길을 되돌아 가야할때가 됐음을 알고 발길을 되돌려 계속 걷는다. 배가 촐촐해 옴을 같이 느낀다. 마침 멀지 않은 계곡밑에 햇볕도 들고, 바람결도 거의 없는것으로 보이는 넓직한 곳이 보인다. 모두가 등에진 배낭을 내려, 그속에서 정성스럽게 준비해온 점심으로 먹을 거리를 꺼내 놓는다. 어떤 회원은 유부초밥, 김밥, 샌드위치, 잡곡밥그리고 라면 등등, 모두가 영양식들이다. 마호병에 담아온 뜨거운 물을, 뚜껑을 열어논 컵라면에 붙고, 양념팩을 넣고.... 입맛이 입에서 빙빙도는것 같다. 뜨거운 국물은 이렇게 겨울 산행의 차거운 분위기에서는 일품이다. 라면 한입을 입에 넣고, 김치 한가닥도 걸치고...
그리고 다른 회원이 준비해온 유부초밥도 얻어 먹고....... 계절에 관계없이 땀을 흘리면서 걸은후, 배속에서 뭘먹고 싶다는 강력한 신호가 이어질때, 점심먹는 재미가 어쩌면 산행의 초점이 된다고 해도 수긍안할 회원은 없을것 같은 기분이다.
앞서가던 한회원이 Trunk만 서있는 단풍나무고목에 붙어있는 어린 영지버섯을 보고 모두에게 Attention한다. 이렇게 추울때 다른 버섯들은 이미 그자취를 감추었거나, 얼어서 생명을 잃어 버리곤 하는데, 유독 영지버섯만은 그위용을 더 뽐내는것 같다. 겨울에도 성장을 거듭해서 내년 이때쯤이면 더 커서 그 본래의 위용을 보일것이다. 그리고 내년에 다시 이곳을 찾아 산행을 하게 된다면, 채취해서 집으로 가져가, 영지차를 끓여 마실수 있을것이다. 꿈을 키우고 기대도 해 본다. 나이 많이 드신회원분이 내년에 오게되면 내가 채취해서, 따끈한 차를 끓여 산행회원들에게 대접하고 싶다고 말씀 하신다. 꿈이 더 커진다. 발걸음은 계속 된다. 언덕길을 내려 그끝에는 개울물이 졸졸 흐르고 있다. 계곡물이 흐르는 양쪽가에는 얼음이 얼어 붙어있다. 추위를 이겨내고 이물은 계속흘러 온타리오 호수로 흘러갈것이다. 그리고 호수의 물색갈을 더 검게 보이게 하는데 일조를 하게 될것이다. 여기서는 아주 맑게 보이는 저물이..... 호수로 갔을때는..... 멀리서 보게될때 검게 그위용을 보여준다. 계획했던 10킬로를 완주 했을때는 3시간을 꼬박 걸은후였다. 모두가 환호다. 비탈길에 눈길.... 낙오나 또는 일점의 사고도 없었다는, 그리고 완주 했다는 승리, 도취의 신호이리라. 마음후한 총무님께서 남은 회비로 가는길에 Tim Horton에 들려서 따끈한 커피한잔씩을 선물 하겠다고 선언한다.
또한번 회원들의 얼굴에 웃음을 돌게하는 그발표에 모두가 커피샾을 향해 떠날 준비를 위해 차속으로 치닫는다. 차를 달리기전에 잠깐만 시간을 내서, 감사의 표시를 나이 많으신 회원분이 창조주께 고하신다.
커피는 기대했던데로 그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그리고 산행에서 일어났던, 느꼈던 기억들을 커피잔속에 쏟아 놓는다.
다음산행을 또 기대하면서, 이제는 커피샾을 떠났다. 모두 안녕....
오늘 걸은 Trail은 다음과 같이 찾아 가실수 있읍니다.
먼저 QEW를 타고 나이아가라쪽으로 달리다, Exit 64로 빠져 Ontario St.을 만나면 오른쪽으로 꺽어서 계속달려 Local Road 81을 만나면, 다시 우회전해서 약 2킬로쯤 달리면 왼쪽으로 Lincoln Ave가 나오면 그곳을 따라 달리면 다시 McLeod St으로 이어지고 그곳에서 조금 달리면 다시 Mountain Rd.를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좌회전해서 조금 더 전진하면 오른쪽으로 조그만 Parking Spot이 보이다. 그곳에 주차하고 산행을, 산행 표시를 따라 할수 있다.
Friday, December 05, 2008
겨울이 피부에 차겁게 부딪친다. 아침마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호수가에는 때아닌 갈메기떼들이 이른 아침부터 군무를 치고 있다. 하늘은 회색으로 보이는것은 어쩌면 당연한 자연색이기도 하다. 겨울의 상징이니까. 손에 장갑도 끼고, 또 두툼한 잠바도 입고, 아내가 사용할려고 얼마전 구입한 겨울용 모자도, 아내가 사용해도 좋다고 양해를 해줘 그걸 뒤집어 쓰고, 겨울이 시작되여 다른 Activity가 없을때는 거의 매일 아침에 창문너머로 보이는 Humber bay West 공원을 걷기위해, 이미 준비를 마친 아내와 같이 신발을 신는다. 여름이면 그렇게도 시간에 관계없이 많이 지나치던 그많던 산책객들은 요즘은 보기가 힘들어 진다. 코에서 내 뿜는 코김과 입김은 하얗게 변해 연기처럼 흩어진다. 장갑을 끼었지만, 손끝이 약간은 시렵다. 어깨가 여름처럼 확 펴지지는 않는것은 차거운 겨울을 상징하는 것일까? 어깨를 확 펴고 걸기를 계속한다. 하얀연기는 계속해서 쏟아져 나온다.
마침 떠오르는 태양은 따스한 느낌을 주기보다는 차겁게 느껴질 정도로 멀리 떨어져, 호수가의 수평선위를 박차고 솟아 오르지만, 주위는 아직도 어스름한 분위기여서, 더욱 긴 캐나다 겨울이라는 긴 터널을 언제쯤 다 통과하게될까?를 다급하게 계산해 보면서 발걸음을 옮긴다. 뒤떨어지는 아내를 좀더 속도를 내서 걸어야 효과가 좋다고 나혼자 생각해낸 말을 그녀에게 던지면서 보조를 맞추도록 부추긴다. 그녀도 차겁고 무거운 겨울을 걷는 속도에서 느끼고 있는것 같다. 세계를 지금 강타하고 있는 경제공황의 여파가, 초겨울의 체감온도를 더 내려앉게 하고도 남게하고 있는 증거일까? 오늘따라 스치는 산책객이 아무도 안보인다. 언론과 미디어는 시간을 다투어 어려워지는 경제형편을 보도 하고, 실직자의 숫자가 지난달에는 예상을 휠씬 상회하여, 몇년만에 최악의 기록을 세웠다고 떠들어 대고 있고, 미국의 Big 3의 총수는 벌써 며칠째, 미국회에 나와서 파산되지 않게 금융구제를 해 달라고 애걸하고(자그만치 320억 달러)있고, 캐나다 또한, Big 3의 새끼회사들이 똑 같은 식으로 캐나다 정부에 구걸을 하고 있고, 들리는 뉴스는 또 어느큰 회사가 감원을 나타내는 핑크스립을 나누어 주었다는, 그래서 캐나다에서는, 경제실책이 현정부의 무능력 때문이라고, 야3당이 정치적 쿠테타를 시도 하려다 실패한,그런류의 소식이, 이렇게 초겨울의 체감온도를 더 꽁꽁 얼어붙게해서, 이 아침에 산책객이 얼어붙은 손발을 집에서 녹이고 있느라 산책을 포기한것같이도 느껴진다.
지금 같이 걷고 있는 아내는 뭘 생각하면서 발길을 옮기고 있을까? 머리속은 복잡하다. 며칠전 콘도에 세들어 사는 세입자가 전화를 걸어와 받아 보았더니, 남편이 실직이 되였는데, 다행히도 바로 다른 회사에 취직은 되였는데, 통장에 돈이 없으니, 수표를 입금시키는것을 5일간 느추어 달라는 사정을 얘기하기에, 안된다고 할수가 없어 그렇게 하겠노라고 한 날이 오늘이다. 그런데도 오늘 은행에 그수표를 입금시켜야 할지 아니면 늦추어야 할지 나도 갈팡질팡이다. 불경기의 여파가 이렇게 나에게도 불어 닦침을 낸들 어떻게 거부할수 있겠는가. 참 한세상 사는 인생, 쉽지가 않음을 여러고비를 넘기면서 곱씹어 본다. 아내가 두꺼운 바지를 입으라고 해서 입고 걷기는 하지만, 그래도 찬기운이 아랫도리를 감싼다. 그래서 이번 겨울은 확실히 더 길어질것으로 느껴진다. 카테지에 세들어 사는 세입자들은 괜찮을까? 그들중 한명은 우리가 카테지 생활을 접고 토론토로 내려올때, 실직하여 다른 일을 찾아 헤메면서 닦치는 데로 일을 찾아 뛰고 있는것을 보고 왔었는데.....
집세가 제때에 안들어 오면, 나 또한 여러모로 영향을 받는다. 동물의 세계를 들여다 보면 먹이사슬(Food Chain)이 존재하고 있어, 그사슬이 끊어지면 동물의 세계에 혼동이 일어나는것 처럼 말이다. 바로 옆에서 출렁이는 온타리오 호수에는 한떼의 기러기들이 거북선 처럼 물위에 떠서 먹이를 찾고 있다. 그들은 경제공황을 전연 못느끼고, 그래서 추위도 없어 보이는것 같이 보이고, 오히려 여유롭게 보이기까지 한다. 나도 그들처럼 추위를 느끼지 않는 겨울이었으면 좋을텐데.... 세들어 사는 세입자에 비하면 그래도 나는 형편이 낳은 편이니까, 기러기들을 너무나 부러워 하지는 말자. 되돌아 오는길에 한산책객이 스친다. 그녀는 조그만 개를 데리고 걷는다. 개는 맨발이다. 졸랑졸랑 뛰듯하면서, 목에 걸려 있는 줄이 목을 조여오는것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종종종 뒤를 바쁘게 따르는것 같다. 그산책객은 개를 분명히 사랑하기에 같이 한식구처럼 지내고 있을텐데..... 좀은 이해가 안될려고 한다. 주인과 개의 관계를 처음보는것도 아닌데....
아내가 백사장 물가에 떠 있는 기러기떼 옆으로 다가가, 뭔가를 주섬주섬 찾아 손을 놀린다. 굳이 묻지는 않았지만, 물결에 긴세월을 부대낀후 곱게 다듬어진 조약돌을 줍는것 아닐까? 그렇게 내 편하게 생각하면서..... 빨리 걷기를 계속하자고 손짖을 해 본다. 어느새 몸이 달구어져 추운기운은 사라지고, 조금은 잠바의 윗단추를 풀어보는 여유가 생긴다. 추운, 그래서 몸까지 움추러 드는 그런속에서 계속 걸으니까 몸에 열이 올라, 추위를 이겨내는 여유를 느끼는것 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순리에 따라 잘 풀려가는, 염원을 하늘에 쏘아본다. 손수 끓인 커피를, 아내에게 한컵, 그리고 나도 한컵 나누어서 우선 코끝에서 그향을 음미해 본다. 따근한 커피 한잔의 향과 맛이, 어깨를 펴고 산책을 강행한 대가를,선물로 입을 감싸준다. 산책을 끝내고 안락한 소파에 앉아 한모금 넘기는 순간의 그맛, 산책의 진한 의미가 그속에 깊이 묻혀 있음을 느낀다.
Tuesday, December 02, 2008
수잔 솔티, 북한 인권 운동가의 기고문을 읽고....
오늘 본국판 조선일보에서, 북한 인권 운동가 수잔 솔티 여사의, 애절한 뜻이 담긴 기고문을 보았다. 남한의 민간단체들이 북한의 동포들에게 김정일 집단의 진실을 알리기위해 풍선에 삐라를 달아 날려 보내는 운동을, 북한의 정권은 남한 정부를 위협하면서, 막아달라고 안달인데, 이에 남한 정부가, 남한은 민주 국가라서 국가에서 김정일 독재집단처럼 마음데로 인민의 자유를 막을수 없기에, 들어줄수 없다고 한다. 그결과 개성공단의 상주인구 축소, 개성관광열차 운행 취소, 금강산관광취소, 그리고도 모자라 다시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으름장이 끝이질 않는다고 한다. 외국의 한 민권운동가가, 삐라날리기 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배고픔과 공포정치에 시달리는 북한 동포의 아픔을 더이상은 참을수 없어, 계속해서 풍선에 우리 자유국가에 살고 있는 남한동포들이 그들의 적이 아니고 진실한 친구이자 동포라고 역설하는반면, 그들의 적은 바로 그들이 하늘처럼 우러러 받드는 김정일과 그일당들임을 확실히 역설하고 있어,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그내용을 옮겨서, 두고 두고 읽어 보고져 함이다. 어제 밤에도 이곳 토론토에서는 김대중 정권때 통일부 장관을 했던 정세현씨가 한인회관에서 이곳 동포들을 상대로 강연을 했었다. 나는 참석안했다. 통박이 훤히 보이는 그강연에 참석한다는것은, 김정일정권을 옹호하는 결과와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 생각은 적중했다. 이곳 동포신문 중앙일보에는 내가 생각했던데로, 강연의 결과가 기사화 된것을 인터넷 신문에서 보았다. 기가 막힌다. 국민의 혈세를 사용하면서 해외 동포를 상대로, 김정일 선전(?)을 언제까지 하고 다닐것인가?
Why Balloon Launches to North Korea Must Continue
There has been much controversy swirling about the recent pronouncements against the non-governmental organizations launching balloons over North Korea. The South Korea government is under enormous pressure from the North Korean regime to intervene and stop these launches. There has been a steady stream of angry declarations and threats from North Korea starting with a threat to shut down Kaesung, cut off all ties with South Korea, and turn South Korea into debris. These declarations are just more evidence of how critically important these messages from the free world are in reaching out to the North Korean people. Today, it is perhaps more important than ever that these launches continue because of the declining health of Kim Jong-il and the uncertainty clouding succession in North Korea. Now, more than ever before, the North Korean people need to know the truth: that South Koreans and Americans are their friends who have been trying for decades to save them from starvation and to pressure their dictator to reform his regime. The North Korean people need to know, now more than ever before, that despite decades of propaganda that South Koreans and Americans are NOT their greatest enemies, but their true enemy is Kim Jong-il, and the greatest threat the North Korean people face is not from those of us living in the free world, but their Dear Leader who is universally loathed and considered one of the worst dictators in modern history. The South Korean government must resist the pressure and the threats from the North Korean regime and stand in solidarity with those who are sending in balloons. With the election of President Lee Myung Bak, South Korea finally has a leader who cares about the suffering North Korean people, who have had no one to represent them at the 6 Party Talks, the North-South summits as all agreements have been focused on Kim Jong-il’s nuclear threats. It is long overdue for someone in a position of authority in South Korea to act in the best interest of the North Korean people for a change, and not act in the best interest of Kim Jong-il, which was clearly the policy of Lee’s predecessors Kim Dae-Jung and Roh Moo-hyun. Remember that these balloon launches were once something that the South Korean government sponsored before D.J. Kim ushered in the “Sunshine Policy” that brought no sunshine to North Korea, just prolonged agony, suffering, darkness and death. Furthermore, these balloon launches are important because we know that due to a lack of electricity there are whole sections of North Korea that can only be reached with these messages. While I continue to be a huge supporter and advocate of Free North Korea Radio and all those who are broadcasting into North Korea, we also need to reach out to those who have no access to this medium. Just last month I interviewed several North Korean women who had never had the opportunity to tune into outside radio or television programs, but knew and had seen the pamphlets. One woman who lived just north of the DMZ told me she hoped the South Korean people would continue to send them, but she told me, “Please include in the messages that the food that they are sending with the leaflets is not poisoned, because the North Korean regime has told us if we eat the food our skin will fall off and we will die.” The most important thing to remember is what these pamphlets being sent into North Korea are all about. Park Sang Hak and the Fighters for a Free North Korea are sending in messages of true history and true facts about Kim Jong-il along with money to help North Koreans survive. There is nothing more powerful than North Koreans living in freedom reaching out with the truth to their brothers and sisters living in enslavement. Other NGOs are sending in pamphlets with messages of hope to their loved ones, specifically abductees taken from South Korea against their will to North Korea, while Christian NGOs are sending in messages of love and forgiveness about Jesus Christ and a loving God, while pointing out that Kim Jong-il is no god. Why has North Korea reacted so vehemently against these launches? Because Kim Jong il ironically seems to understand something that we in the free world are sadly forgetting, this simple fact: the truth shall set you free. His regime relies on propaganda and isolation to keep the North Korean people literally “in the dark” about the prosperity in South Korea, brought about through capitalism, and freedom and respect for human rights, all concepts that are a deadly threat to Kim’s dictatorship. He furthermore cannot have NGOs pointing out that there is a God who loves, redeems, forgives, and frees because Kim is no god, but a dictator who hates, condemns, enslaves and kills. At this time of great uncertainty, we must ask ourselves on whose side do we want to stand: those who reach out with concern to the North Korean people with messages of truth, hope, and love OR do we want to stand on the side of Kim Jong-il, the man responsible for genocide against the people of North Korea. Now is the time to choose your side and take a stand.
입력 : 2008.12.02 22:54
Saturday, November 22, 2008
80회 생일 축하연에 참석하면서.....나는 ?
인생이 모태에서 태어난 그순간 부터 숨을 멋을때까지, 요즘은 의학이 발달하고, 먹는 음식이 좋아지고, 생활환경이 무척 향상되여, 살아가는 기간이 자꾸 연장되여 진다고 한다. 성경에서도 인생 70에 강건하면 80 이라고 한 구절을 읽은 기억이 있다.
요즘의 61회 생신은 그 의미를 많이 두는것 같지 않고, 그져 또 한살을 더 살았구나 하는 정도로 보내는 경향이 많고, 또 주위에서, 또 내자신을 봐도 별 깊은 뜻을 두지 않고, 같은 또래의 아는 친지 Couples들과 같이 회식을 하면서 하루밤을 즐겼던 기억밖에 없다.
며칠전 손윗 동서분께서 80회 생일잔치를, 그것도 본인은 모르게 준비해서, Surprise Party로 그의 자손들이 준비하여, 가까운 제자 몇분과 그리고 파티를 주최한 자손의 친구들과 집안 식구들이 참석하여 축하했었다. 당사자인 형님은 80회 생일파티를 축하받는게, 뭐 그리 대단한거냐고, 오래살은것이 축하받을 일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자손들의 생일 파티 제안을 극구 사양 했었다고 한다. 그러면 식구들만 모여서 저녁 식사나 Eating out으로 하기로 일단 안심시켜 드리고 뒤에서 준비 했었다고 한다. 그준비 과정에서 이모(나의 아내)에게 테이블 장식용 꽃꽃이를, 파티를 주관하는 조카로 부터 부탁받아, 결론적으로 모의(?)에 가담한 공범자(?)가 되기도 했다. 나도 거기서 도와 준바 있다.
조촐했지만, 지금은 같이 늙어 가는 제자들과 같이 어울려 지난 얘기 하고, 또 살아온 그간의 인생 스토리를 직접 들어 보기도 하는 좋은 시간이었었다. 인생삶의 Span이 길어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주위에서는 나와 동년배들이거나 조금위, 아니면 조금 아래의 친지들이 숨을 거두는것을 보면은 결코 80회 인생축하연을 하는것은, 사양할 미덕만은 아닌것을 느낀다. 주위로 부터 자랑스럽게 축하를 받아도 좋은, 박수 받을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재음미 해본다. 간단히 몇마디로 요약된 그형님의 인생스토리는 조국분단의 아픔을 또 느끼게 하는, 그형님만이 아닌,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애처러움과 이데올로기로 인한 위정자들의 인위적인 정치이념때문에, 아니 그원치않은 선물때문에, 갈라져 살면서 시간이 다되면, 재회의 꿈을 현실화 시키지도 못한채 한많은 숨을 거두는 피해 당사자들속에 그 형님이 안타까이 삶을 지탱해 왔음을 재확인하게 하는 순간을 느끼게 하기도 했었다. 살아남아 언젠가는 꼭 다시 헤어졌던 가족 피붙이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남쪽으로 넘어와 살다가, 다시 또 짐을 꾸려 이곳 캐나다 까지 와서 살면서, 80회를 어느덧 맞이 했다. 그러나 헤여졌던 가족과 재회할수 있는 기회는 점점 줄어만 가고 있다는 애절한 표현은, 반대로 나만 이렇게 편하게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 공산치하의 가족들이,공포와 기아에 허덕이면서 초근목피로, 목숨을 연명해 가는 책임이 본인때문에 발생한것으로 회한을 토로하는 그형님의 80회 생신 축하는 그래서 본인이 극구 사양 했었음을 또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하는 시간이기도 했었다.
앞으로 18년 후에는 나도 그형님과 똑 같은 길이의 세월을 살아온 인생항로에 서게 될것이다. 꼭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모습으로 나는 내자신을 지키고 있을까? 골프도 형님처럼 즐길수 있는 신체적 건장함을 유지하고 있을까? 그것도 좋을때나 괴로울때나 평생를 같이 세월을 참아온 아내와 같이....
짧지않은 지난 시간을 눈을 감고, 필름을 뒤로 잠시 돌려 본다. 보리쌀 서너말을 머리에 이고 십리길이 넘는 산길, 들길을 걸어 읍내 장에 가셔서 팔은 그돈으로, 추석장을 보고, 설장을 보고, 그다음에 어쩌다 검정고무신을 사오셔서, 이다음에 커서 훌륭한 사람되라고 하시면서 오래오래 잘 신어야 한다라고 말씀 하시던 어머님의 기억,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다닐때, 책보자기에 책을 싸고, 허리에 들쳐메고, 동네 아이들과 들판의 논둑길을 달려 학교를 다던일, 겨울에는 추워서 마른 소똥을 주워 불을 부쳐 얼어붙은 손을 녹이던 기억, 군대에 가서 고참병들의 이유없는 기압에 녹아나, 추운 겨울밤에 보초설때는 어깨에 들쳐메고있는 소총을 이용하여 자살을 함으로써, 고난을 잊으려고 생각하기도 했었던 기억, 제대후 아직 가난했던 조국의 현실에서, 밥벌이가 막막해서 허공을 쳐다보면서, 왜 태어나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그러면서 어린 마음에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었던 기억, 시골촌놈이 공무로 처음 비행기를 타고 일본, 독일로 출장가면서,상공을 날을때 설렛던 그기억, 그곳에서 세상은 살만한 무대라고 처음 느꼈었던 젊은이로서의 기상을 느꼈던기억, 강원도 산골에서 군생활할때 휴가를 맡아 고향으로 가던길에 서울 복판을 거치면서, 화려한 옷차림의 아름다운 여성들(?)을 보면서 한없이 내자신이 적고 초라하게 느끼면서, 그녀들은 모두가 하늘에서 내려온 아름다운 천사로 보여서, 나는 평생을 통해서 그런 여성중의 한명과 결혼할수 있을 자격이 있을까? 라고 용기와 희망을 포기하다시피 했었던 기억, 직장에 다녀와 보니 월세들어 막 신혼생활을 시작했던 보금자리가 무허가 건물이라고 해서, 전쟁이 지난후의 아수라장같이 변해있던 그자리에서 망연자실하고 서 있으면서 서러움에 젖어 흐느끼던 아내와 붙들고 하늘을 쳐다보던기억,....... 그만 나열 해야 겠다. 이민자로서의 새삶의 터전을 이루기 위해 육체적 정신적 소용돌이속에서 살아온 그기억들은 여기에 적고 싶지도 않게 진절머리 나는 일들이다. 선물로 얻은 두 아이들은 다 장성하여 이제 짝을 찾아 새삶을 꾸려야 할 나이가 다 차고, 지나가고 있지만, 뭐가 그리도 바쁜지, 그런 나와 아내의 바램과는 상관 없다는듯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무겁다. 몇년전만 해도 주위에서 친지들, 또는 인생선배들이 자신들의 손자 손녀들의 재롱에 세상사는 맛을 다시 느끼게 된다 는 소리를 들으면, 속으로 그들을 비웃곤 했었는데, 지금은 그들의 뜻을 이해 할것 같다. 내가 세상살아가는 맛을 몰랐었음을, 지금은 깨달으면서, 아이들이 짝을 찾아 새 보금자리를 만들지 않고 있음에 마음이 다급(?)해짐을 우리아이들이 알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더 늦어지기전에......
그래서 동서 형님의 80회 생일은 나에게도 참 뜻있는 자리였었다고 본다. 형님 이겨울도 건강히 잘 지내시고, 내년도 시즌이 되면 다시 골프채카트를 밀고 푸른 초원을 친지분들과 어울려 걸어가는 그모습을 보여 주십시요. 지금까지 못해봤던 골프 라운딩도 내년시즌에는 형님과 같이 한번 하고도 싶고요. 우리 모두 건강하게 그리고 주위 가족들에게 부담없이 살다가 떠나는 때가 됐을때 홀련히 떠나는 그런 바램으로 남은 삶을 뜻있게 살고 싶다.
Monday, November 10, 2008
자금성 (Forbidden City)안의 명황제의 거처가 공개된다니.....
LA times에, 중국 베이징에 있는 Forbidden City 안의 마지막 명나라 황제가 기거하던 2층빌딩이 일반 관람객에게 곧 공개될 계획이라는 기사를 읽고, 몇년전 그곳에 갔었을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그기사를 여기에 옮겨 보았다. 엄청나게 큰 규모의 궁전으로 기억되는데, 그안에 다시 황제가 거처했던 건물이 공개 된다니..... 옛날 황제의 생활은 그곳에서 어떻게 이루어 졌었을까? 궁금해 진다.
사진은 중국 베이징에 있는 Forbidden city안에 있는 2층빌딩으로, 마지막 황제가 기거한곳이엇다. 방금 보수를 마친뒤 2명의 기자가 취재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건물은 명조시대의가장 화려한 건물중의 하나라고 한다. 건물이 너무나 셈세하여, 중국자체 기술만으로 어려워
국제적 합동작업을 필요로 했다고 한다.
그동안 중국 베이징에 있는 Forbidden City가 일반에 공개는 됐어도, 마지막 황제가 기거하던
빌딩은 1924년이후 꽉 문을 걸어 잠그고 세상과 등지고 있었다.
이번에 미국과 중국의 팀들이 힘을 모아 3백만달러를 들여 보수를 마치고 곧 일반에게도
공개 된다고 전한다. 또한 이번 보수작업은 미국과 중국팀들이 앞으로도 호흡을 잘 맞추어
비슷한 역사적 건물에 대한 보수작업을 잘 할수 있을지의 시험대 이기도 된다고 한다.
오랫동안 외부와 차단되여 있었던 관계로, 바닥과 벽에는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으며, 벽에는 쌓인 먼지자국위에 붓글씨를 쓴것처럼 붓을 휘둘러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고 한다. 가구위에도 먼지가 수북히 쌓여, 이곳에서만은 마치 시간의 흐름이 정지 되여 있었던 것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한다.
앞으로 베이징 중국을 방문하게 되면 볼수 있게 된다는 기대감도 또한 커진다.
이궁전 관리자들은 보수를 위해 외국팀과 합동으로 보수를 해야하는데 무척 긴장했다고 한다. 이해가 갈만 하다.
Forbidden City restoration an experiment in U.S.-China teamwork
China Photos / Getty Images
Two reporters visit the studio after its renovation in the Forbidden City in Beijing, China. The tiny, two-story lodge is one of the most luxurious buildings built for Qing Emperor Qianlong.
The $3-million refurbishment of a Beijing studio belonging to one of China's most artistic emperors demanded an extraordinary international partnership.
By John M. Glionna
7:19 AM PST, November 10, 2008
Reporting from Beijing -- For Bonnie Burnham, it was like entering a Chinese version of an Egyptian tomb, a small lavishly appointed studio in Beijing's Forbidden City that had remained untouched for centuries.
On a cool autumn day in 1999, the president of the World Monuments Fund followed her local guides into an area where few had set foot since 1924, when China's last emperor vacated the palace and locked the doors to the studio behind him.
What she remembers most is the musty air and thick coat of dust that covered the floor, the delicate pieces of furniture, even the lushly paneled walls etched with their courtly lines of calligraphy.
"There was a sense that time had stopped there," she recalled.
Burnham's heart raced. Because underneath the grit lay one of the five most historically important interiors to survive China's imperial past -- a window into the private world of one of the Middle Kingdom's most artistic emperors.
Today, Burnham stood among dignitaries from the Forbidden City's Palace Museum to unveil the refurbishment of the tiny two-story lodge known as Juanqinzhai, which will soon be open to the public.
The $3-million restoration, which took nearly a decade to complete, marks an extraordinary international partnership of Chinese artisans and Western expertise.
It also represents a rare instance, officials say, in which the Chinese government has sought foreign assistance and know-how to restore one of its precious historical relics.
The results have been so successful that the fund, a private, nonprofit New York-based preservation group, is extending its alliance with Chinese cultural officials to restore the Qianlong Garden's 26 other pavilions and four courtyards.
The face-lift's first phase involved numerous detailed excavations of the studio's interior, trips to the U.S. by Palace Museum staff for strategy sessions and a nationwide search in China for artisans capable of the delicate renovations.
"None of us had any kind of road map. Neither the Chinese nor the American side had any experience with this specific type of restoration," said Nancy Berliner, the curator of Chinese art at the Peabody Essex Museum in Salem, Mass.
The Juanqinzhai studio was built in the 1770s by the Qianlong emperor for his personal use after his retirement -- a two-acre private retreat nestled in the northeastern corner of the Forbidden City.
He called it the "Studio of Exhaustion From Diligent Service."
Its construction came during the Qing dynasty when China, one of the world's most prosperous nations, was engaged with the West in terms of trade, aesthetics and ideas.
"No resource was spared. Every inch of design and creation was overseen by the emperor himself, who issued an edict that nothing could be altered by future generations," said Henry Tzu Ng, the fund's executive vice president.
The result is widely considered a masterpiece of design and materials: a jewel box replete with large murals, elaborate ceiling paintings and ornate flourishes of bamboo, white jade and satin.
Never open to public view, the studio fell into disrepair after China's last emperor, Puyi, was ordered from the Forbidden City in 1924. For decades, including the Communist takeover and Cultural Revolution, the emperor's refuge became a decrepit storage space.
For the World Monuments Fund, the forlorn studio was an opportunity. Seeking projects within China, the group approached Palace Museum officials about a restoration partnership.
To their surprise, the Chinese accepted, with officials acknowledging that they were open to outside guidance and funding.
"The Forbidden City is huge and . . . there was too much work to do; therefore, our country didn't have the energy, time as well as enough money to manage this part of the palace," said Wang Shiwei, senior engineer of the Palace Museum's historical architecture department.
"It is the first time the Palace Museum is cooperating with a foreign organization to repair its facilities comprehensively."
Palace officials visited the Peabody Museum and other venues to witness firsthand U.S. techniques of cultural restoration.
The pressure was palpable: They were undertaking the renovation of a sacred icon unchanged from the times of Imperial China. "It was like restoring something on the level of Notre Dame, something that's been there for centuries," said Berliner
Back in Beijing, teams of Chinese artisans began work in 2002 that Ng describes as "above-ground archaeology."
Preservationists scoured the studio for every scrap of loose paper and bits wallpaper and disintegrating mural that had fallen to the floor. Each was sealed in a plastic bag and labeled. Soon, they had amassed 35,000 plastic bags, officials say.
"The last emperor closed the door nearly a century ago," Ng said. "What we found was peeling wallpaper, incredible artifacts, furniture, objects behind objects, all as if he had just left it. There was this incredible sense of discovery."
One day, Burnham recalled, she opened a box she found sitting on a table. "Inside was this exquisite jade Buddha," she said. "There was no sense of how much time had passed. Had that piece been sitting there for 200 years, or had it been more recently stored there?"
The studio's murals presented a particular challenge. Fashioned under the guidance of Giuseppe Castiglione, a Jesuit missionary and painter who settled in China in the 1700s, the ceiling murals were painted on silk wallpaper, a combination of European aesthetics and Chinese decorative arts seen nowhere else in the entire 180-acre Forbidden City.
Neither the Chinese nor the Americans were sure how to remove them for restoration. The Chinese first tried to wet the seams to remove the wallpaper remnants. When that didn't work, the Americans introduced a dry method of scraping the fragile wallpaper from behind.
That worked, Ng said. But it didn't solve the challenge of getting the wallpaper back up.
"There were no records of how they had originally stuck the wallpaper, so the Chinese conservation team tried one method and the Western consultants tried a different way," Ng recalled.
"We worked out a compromise between the two: We put mattresses on the floor, on top of which we placed poles with tension springs to hold the wallpaper in place until it dried."
In the end, both sides are satisfied with the result.
Said Wang: "I think the emperor would be pleased."
Sunday, November 09, 2008
노란 카펫위를 걷는 기분으로 Trail Walk
아직 아침 이슬에 젖어 카펫처럼 널려있는 노란 단풍나무 낙엽위를 밟으며 걷는, 늦가을의 산행은, 그위를 걸어보는자만이 느낄수 있는 색다른 감각을 제각기 발끝에 충분히 주고도 남는것 같다. 산행을 시작하기전, 며칠전 골프장에서 드라이브로 힘차게 때린 볼이 수북히 쌓여 있는 낙엽속으로 날아가 숨어 버리자 눈의 초점을 그곳을 향하고 걸어가서 낙엽위를 밝으며 공을 찾을때 느꼈던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오늘은 들리지 않는다. 이슬에 젖어 푹신한 감각은 풍부한데, 낙엽하면 그위를 밟고 걸을때 바스락 거리는 특유의 소리가 없는게 조금은 아쉬웠지만, 노란색갈의 끝없이 이어진 단풍나무낙엽위를 밟고 한발짝 한발짝 옮길때마다의 기분은 질좋고, 푹신하게 깔려있는 리빙룸의 카펫을 걷는 감촉좋은 기분이었다. 산행때마다 보는 정겨운 얼굴들, 오늘도 형형색색의 옷을 걸치고, 바람결이 조금은 차겁게 느껴지는 초겨울의 산행시작은, 조금은 움추러드는 그런 기분이 지배적이었다. 출발할때 화사했던 햇볕도 어느새 구름속으로 숨어 버리고, 하늘은 잿빛으로, 잎이 다 떨어져 이제는 앙상하게 가지만 회색으로 변해버린 단풍나무숲과 어쩌면 감각을 같이 하는것 같은 무거운 기분이다.
많지않은 12명의 정예회원들이 오늘의 산행에 동참했는데, 그중에는 리더의 중책을 새로 맡은 부부도 참석하여 그의미는 더 깊은것 같았다.
2대의 미니밴에 분승하여 약 50분을, 나이아가라쪽으로 QEW을 달려, Exit 64번으로 빠져, 다시 골목길같은 샛길을 구비구비 핸들을 돌려 산행 출발 지점에 도착했을때는 정확히 11시 정각이었었다. 산행때마다 꼭 참석해오신 7학년되는 고참회원으로 부터 각양각색의 회원들이, 오늘도 산행에 참석한 것이다.
오늘 걷는 Cave Springs 지역은 전구간이 이끼가 파랗게 끼여 있는 바위바닥위를 걷는 구간이다. 트레일은 구릉지 윗쪽으로 나있어, 그왼쪽으로는 멀리 Lake Ontario가 시꺼멓게 보이고, 트레일과 호수 사이에는 눈아래로 넓은 포도과수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아주 평화롭게 시야에 들어온다. 이끼로 덮혀있는 트레일에서 한발짝 옮길때마다 신경이 쓰인다. 미끄러워 자칫하면 밀리거나 넘어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구간에서는 미끄러졌던 발자국흔적이 이끼위로 뚜렷히 나타나기도 했다. 아마도 어느 회원이 삐끄덕 하여, 순간적으로 고생을 한 흔적으로 보인다. 놀라는 아우성 소리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계속 전진했던것 같다. 바로 산행의 경험을 말해 주는것으로 느꼈다. 대신에 가끔씩은 아름다운 여성회원들의 웃음 소리가, 높이 떠가는 비행기의 소음처럼 들리는, 휘몰아치는 바람과 회색빛으로 하늘을 향하여 뻗쳐있는 나무가지들과 부딪히는, 윙윙거리는 바람소리와 어울려 앙상블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여성회원들의 그런 웃음소리가 없었다면 발자국 옮기는 분위기는 어쩌면 조금은 더 무거웠을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어린 영지버섯 몇송이가 단풍나무 고목에 기생하여 생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여름이면 푸른위용을 자랑하던 잡초들도, 떨어져 덮혀있는 낙엽색갈과 같이 갈색으로 변해, 볼품이 없어 보인다. 어쩌면 삶의 Cycle을 보여 주면서, 우리 우둔한 인간들에게 삶의 순환을 겸허히 받아 들이라는 신호를 보내는것처럼 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나의 삶은 Cycle 곡선으로 봤을때, 어느매쯤에 매달려 있다고 보아야 할까? 알것 같으면서도, 나는 예외겠지?하는 어리석음이 마음 한구석을 자리하고 있음을 느낀다. 어리석기는.... 옛날에 천하를 호령하던 진시황제도 싸이클이 다하니까 모든것 다 놓고 갈곳으로 가버린 역사를 훤히 머리로는 기억하면서도.....
우리가 걷고 있는 구릉지 꼭대기에 갑자기 커다란 바위 덩위가 그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엇듯 보기에는 큰 직사각형 같기도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오랜세월을 두고 비방울에 패여 생겨난 수많은 구멍들이 새겨져 있고, 또한 노트에 줄이 그어져 있는것 처럼 그런 자취들이 뚜렷히 나타난다. 옛날 빙하기시대가 한창일때 빙하에 밀려 내려가다가 현재의 위치에서 안착하고 말았다는 설명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진다. 그곳을 지나자 이번에는 급경사로 이어진다. 아직 젖어있는 바닥에 낙엽까지 덮혀있어 미끄러지기 안성맞춤이다. 조심스럽게 발길들을 내딛는다. 이런경우에는 이렇게 발자국을 옮겨야 한다는 조언도 들리고, 서로 손을 잡고 의지 하면서 내려가는 모습도 보기 좋다.
트레일을 걸을때 흔히 보이는 트레일 방향표시(White Blade)가 눈에 들어 온다. 그냥 지나칠수도 있었는데, 그옆에 설명판이 붙어있어, 잠시 쉴겸해서 무심코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이표시판은 아주 뜻깊은 설명을 내뿜고 있었다. 아직 우리가 걷고 있는 Bruce Trail이 공식적으로 오늘처럼 구성되여 있지않고, 구간 구간 트레일 동호인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을때, 이곳에 맨처음으로 트레일 표시판인 White Blade를 표시했던 곳이라고 쓰여있었다. 즉 1962년 3월 25일에 처음 이곳에 세워지다 라고...... 아주 역사깊은 곳을 우리는 오늘 밟은 것이다.
움추러 들려고 했던 몸에서는 어느새 땀이 옷에 젖어들고 있다. 을씨년 스러웠던 처음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이제는 모두가 단추를 풀고 바람(?)을 안으로 끌어 들여 시원함을 갈구하는 모습들이다. 활동하는 생명체들의 자연에 대한 신체의 반응으로 보여 진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잠시 멀리 초점없이 쳐다봤다. 멀리 고속도로위를 달리는 수많은 차량들이 마치 개미의 행렬처럼 보인다. 다만 다르게 보이는게 있다면 개미들처럼 검정색갈말고도 여러 다른 색갈들이었다. 우리도 지금 이곳에서 산행을 하기위해, 저 끝없이 이어지는 자동차 행렬속에 끼어서 한참을 달려 왔었다. 누군가가 우리가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왔던 차를 보면서, 나와 같은 상상을 했을것 같기도 하다.
산행하면서 먹는 점심은 항상 꿀맛이다. 오늘도 똑 같이 꿀맛이다. 어느회원은 이렇게 이마에 땀을 한참 흘리고 나서 먹는 점심맛을 만끽하기위해서 산행에 동참한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그말에 동감이다. 갈증을 해소해 주는 한모금의 물맛도 여느때와는 다르다. 달다.
3시간을 걸었다. 지도상의 표시에서 거리를 재어보니 대략 12키로쯤 걸었다. 평평하지 않고, 이끼로 뒤덮힌 바윗길을 우리 회원들은 침착하게 꾸준히 걸었기에 사고없이 계획된 구간을 완주 한것이다. 7학년 회원님의 무사완주를 한 모두에게 감사 말씀을 끝으로 산행을 접었다. 총무를 맡고 있는 마음착한 회원의 배려로, 따끈한 Tim Horton커피 한잔씩을 마시는 기분은 산행의 노곤한 피로감을 말끔히 가시게하고, 끝맺음을 더 좋게 하고도 남았다. 다음 산행때 까지 모두 강건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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