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October 29, 2012

세월앞에 K형이 굴복하는것을 보면서…인생살이는 순리임을 맛본다.



"이형, 웬만하면 같이 공항에 나갈려고 했는데, 못할것 같습니다.  이해하여 주시고 무사히 잘 가시기를 빕니다"
"아픈것을 보면서,  별수 없이 떠나는 저희를 용서해 주시고, 몸조리 잘 하십시요. 나오지 마세요."

조국방문을 마치고 떠나오는날, 드디어 꼬장꼬장하고, 대한민국의 높은 산은 다 올라다니고, 이제는 중국에 까지 원정하여 자연을 벗삼아 산행을 즐기면서, 노후의 생활을 즐겨하던 K형과 작별을  고하면서 주고받은  안쓰러운 순간에 나눈 인사이다.

그의 집은 전형적인 한국의 서민주택으로, 서울중심의 남산바로 아래에 있는, 일명 해방촌의 요지에 넓은 대지에 정원을 가꾸어 앞마당구실을 하고 있는, 일찌기 열심히 노력하여 여유있게 노후를 보장할 정도의 경제적 여유를 이루고, 지금은 어찌보면 돈과는 무관한, 그러면서도 사리분별에는 꼬장꼬장하여, 한때는 동네의 통장도 해왔던, 정도를 걷는 의리파 남자 해방촌 토박이다.  오래된 집이라서 생활하기만을 따진다면 불편하기 이를데 없다. 그걸 못참는다면 편안한 호텔에서 보내는게 최상일것이다.  그것보다는 마음이 편해야 함이 우선이기에…. 생활에 좀 불편한것은 이미 어렸을때의 열악한 환경에 비하면 이곳은 천국과도 같은 곳임을 감사해 하기에  집주인의 의향을 묻기전에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찾아가 짐을 풀고, 소위 말해서 Base를 만들어온 그런 관행을 오래 해오고, 앞으로도 고국 방문시는 똑 같은 행동을 할것이다. 

서울에 도착하면, 형제 자매의 집에 묶는것 보다는, 의례히 내집인양 당연히 K형의 집에 짐을 풀고 편하게 우리 부부를 쉬게 해주는 이친구 부부는 사실은 내가 먼저 Fellowship을 쌓은게 아니고, Lunar와 K형의 부인이 중,고등학교 동기동창으로 50년 가까이 떨어져 살아가면서도, 보기 드물게 우정을 나누고 있는 4 Couple중의 하나인데, 부부는 일신동체라는 말처럼, 실가는데 바늘 간다는 말처럼, 지금은 어쩌면 남자들이 더 재미있게 만나면 만사 제치고 시간을 같이 즐기는 그런 사이가 된지가 4반세기가 넘었다. 4남자가 만나면, 체면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수가 없을 정도로, 아니 존재치 않는것 처럼 모든것 다 내려놓고, 겪의가 없이 삶의 애기를 나누면서 같이 행동하기에 밤새는줄 모르는 늙은 어린애가 된지 오래다.

며칠전 울릉도 관광여행을 4 Couple이 떠났었다. 그곳에서 본인은 부인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조금 편찮은 그의 모습에서 세월의 덧없음을 혼자서보았었다.  돌아와서는,우리 부부는 시골 형제 자매와 선영에 들리러 잠시 헤여진 사이 그는 대전으로,  강원도의 붉게 물들은 산천을 찾아 정신없이 돌아 다녔다는것을 알았다. 오래전에 조심스러운분과 약속한 강원도의 자동차 여행이었기에 손수 운전수가 되여 무리를 한것이 겹치고, 다시 홍천 친지집에 내려가 토종닭을 뜯으면서 떠들어 댔으니…기계가 고장난것은 어찌보면 당연한(?)순서였는지도 모를일이었었다.  드디어 오늘 아침 우리 부부가 캐나다행 비행기를 타는날, 못견디고 병원을 찾은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의례히 좁은(?)부엌에 K형의 부부와 우리 부부가 식탁에 앉아 커피가 곁들인 Breakfast를 먹으면서 싱거터진 소리들을 해야 할 그시간에 K형은 혼자서 산행할때 입곤하던 Green색의 잠바를 입고, 집밖으로 나서는게 아닌가.  "여보 나 차병원에 다녀올께" 그리고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서로간에 웬일이야?라고 물어볼 시간도 없이 말이다.  행여나 우리 부부에게 마음의 짐이 될까봐서 그러는것을 우린 금방 알수 있었다. 태연한척 남은 3명은 커피를 즐기면서.

병원에서 돌아온 그는 부엌에 오지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펴고 누운것이다. 
콜록콜록 계속하면서 괴로워하는 그를 우리 부부는 어떠한 말도 필요없이 겉으로는 태연한척 귀만 기울일뿐, 다른 특별히 도와 주거나 할일이 있지가 않았다.  자리를 준비해주고 나온 Lunar의 친구이자 그의 부인은 대수롭지 않게 한마디 가볍게 던진다.
"내말 안듣고 무리 하더니 끝내 저꼴이야.  위내시경 촬영을 했는데, 속이 많이 헐어 있다고 했대.  자세한 것은 내일 다시 Sample떠서 점검을 해보아야 확실히 알수 있다고 했단다.  괜히 너희한테 미안해 하는구나." 라고 설명해준다.

고국방문시마다, 그는 그의 차에, 우리 부부를 싣고, 강원도 산꼴짜기의 이곳 저곳을,어떤때는 군사 작전도로까지도, 보초서는 병사들을 설득하여 산악 드라이빙을 해주곤 했었다.  한번은 내가 군대생활했던 1358부대의 정문앞을 지나갔었다.  약 45년전에는 부대앞에는 아무것도, 다만 산골짜기의 차거운 물소리만이 요란했던 그곳이  마치 어느 조그만 도시처럼 변하여, 옛날 그때의 기억을 되찾는데 무척 어려움을 느끼기도 했었다.  민간인 승용차가 위병소를 지나가는데, 보초서는 병사가 경례를 부치는게 아닌가?  궁금하여 차에서 내려가 물었다. 그의 대답은 지금은 퇴근후에는 영외거주하는 모든 군인들이 자가용을 타고 다니기 때문이고, 조금전에 지나간 차는 중대 행정관이라고 귀뜸해준일도 있었다.

K형이 정상데로의 스케쥴에 따라 움직였다면, 그의 부부와 우리 부부가 인천공항에 일찍 도착하여 Check-in을 마치고, 이층의 식당에 들려 멋있는 점심을 먹을려고 했었다. 식사비는 내가 낸다, 네가 낸다 한바탕 소란(?)을 피우면서 말이다.  그는 우리 부부는 방문자니까 당연히 대접해야 한다고 주장할것이고, 우리 부부는 그동안 신세많이 졌으니 오늘 만큼은 우리에게 기회를 달라고 주장 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자리를 펴고 누워있을까?  괜히 K형 부부를 너무나 혹사 시키지나 않았나 하는 미안함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우리가 인천에 도착하는날은 8시간이상을 공항에서 우리를 기다려 줬던 고마운 친지이다.  뱅쿠버에서 비행기가 고장나서, 대체 비행기를 토론토에서 다시 날려 보는데 거의 5시간을 소비하고, 그러기 전에 Repair해 볼려고 보낸 시간이 3시간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기다리기에 얼마나 지루함을 느꼈을까?  그래도 대답은 오히려 태평 했었다. "야 너희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쉽게 발걸음이 닿지 않는 비행장 주변의 재미있는곳을 많이 보았어야. 이것 다 너희 덕택으로 고마워" 라고.

공항에 도착 해서도 마음이 안놓여 공중전화 Box에서 통화를 시도 했으나 연결에 실패 하고, 비행기에 올랐었다.  뱅쿠버 공항에서 비행기를 바꾸어타는 시간을 이용하여 휴대하고간 Laptop을 꺼내어 e-mail을 보냈다. 별스런 상상을 다하면서 말이다. 

K형이 오래 오래 건강해야한다.  이번기회에 몸조리를 잘해서 옛모습으로 되찿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다음에 다시 고국을 방문했을때, 우리 부부가 편하게 지내기위함이(?)앞서기 때문이다.  그가 편치 않으면, 고국 방문할 목적(?)이 사라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K형, 캐나다대륙을 우리 만나는 친지부부들과 함께 내년 여름에 신나게 달려 보기로 한 약속 꼭 지켜야 하오. 그약속 안지키면, 우리 부부  어쩌면 K형 부부 안보게 될지도 몰라. K형을 위해서 건강 하라고 부탁 하는게 아니고, 먼저는 우리 부부의 편안함을 위해서, 둘째는 Lunar친구를 위해서 그런답니다. ㅎㅎㅎ"

고맙습니다. K형 부부 그리고 다른 친지분들….건강 꼭 지키시기를 









캐나다 친구부부가 두손모아 기원합니다. 감사.

Sunday, October 28, 2012

우정에는 계산안되는 희생이 동행하기 때문이다.

마음과 행동으로 우정을 보여준 친구를 옆에서 보면서….

밤늦게 서울을 떠나 친구부부와 우리 부부는 기아에서 자신있게 만들어 출시한
Mohave SUV를 타고, 지금은 결혼한 딸아이 부부가 살고 있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해 거쳐하고 있는 수유리의 큰 집을 떠나,  강원도 홍천의 카테지에 도착 했을때는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차의 성능도 무척 좋아서, 토론토에서는 이런 차가 거리를 활보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라고, 토론토에 있는 Dealer에서 이종류의 차를 판매하게 된다면 제일 먼저 한대를 사고 싶은 그런 충동까지 느끼면서, 친지 부부가 노후를 보내기 위해 손수 흙을 고르고 망치질 해서 건축한 넓직한 그의 집 마당에 도착 했을때는 빨간 벽돌의 아담한 집이 우리를 웃으면서 맞이 하는것 같았다.  고국을 방문할때마다 이곳 홍천에 들렸지만 오늘밤은 그느낌이 가슴을 찡하게 하기도하고, 흘러간 세월에 대한 아쉬움이 마음을 아련하게 하기도 한다.

같이 행동하기로한 다른 2친지 부부들은 내일 아침에 서울로 부터 이곳에 오게 돼있다.
우리 부부는 하룻밤 이곳 홍천의 한적한 시골친지 집에서 같이 보내면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다른 친지부부의 양해를 구하고, 연락 했더니, 손수 서울까지 올라와 이친지부부의 Mohave차를 타고 막 도착 한 것이다.  도착한지 얼마 안돼 이집 바깥주인은 시야에서 조용히 사라져 보이지 않은지 오래다.

원래의 생각데로 같이 리빙룸에 2 부부가 같이 모여 그동안 못다한 얘기들을 나누면서 시간을 보낼려고 했던 나의 생각은 빗나가고 있음을 알았다.  이집의 주인 Mr.Seong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부인(Lunar의 중고등학교동창)과 우리 부부만이 TV를 켜놓고 보는둥 마는둥 하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삶의 얘기들이 오가는중에, 이집주인장이 안보인다고 했더니, 우리부부와 내일 만나게될 친지들을 위해서 토종닭을 잡고 있다는 이집 안주인의 설명이다. 아까 이곳에 도착했을때 엉성하게 울타리를 쳐놓은 안에서 갈색의 토종닭들이 꼬꼬… 하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난다.

"나도 토종닭 잡는데 일손을 보태야 하는데…..몇십년만에 처음으로..."
"안돼요,  피흘리고 생을 마감한 광경을 보면 비위가 거슬려 닭고기를 먹을수 없게 될것을
우려하여, 지금 조용히 혼자서 처리하고 있으니 우리는 계속해서 얘기나 해요.  미옥아 아까 하던 그얘기 계속해줘… 빨리, 다른 생각은 아예 접고..."
내가 시골출신인것은 이집주인 부부가 알고 있지만,  오랫동안 닭잡는것을 경험해 본적이 없어, 행여나 닭잡는 순간을 보았을때 비위가 뒤틀려 막상 닭고기를 먹을때 맛을 버릴까봐서 보여준 그의 배려가 고맙다.

며칠전 지금도 우리 부부가 고국을 방문할때 마다 행동을 같이 해왔던 4부부가 울릉도 Tour를 할때, 홍천에서 마지막 밤을 같이 보내고, 곁들여 토종닭의 감칠나는 맛을 느껴 보자라고 이집의 주인장  Mr.Seong이 제안을 했었다.  모두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벽을 손이 부서져라 치면서 좋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웬수같은 친정 동생들, 오랫만에 친정 나들이 하니, 오빠가 토종씨암탉으로 몸보신을 좀 시켜  시집에 보내서 일 잘하게 돕는것 밖에 또 다른 방법이 있겠나?, 하늘같은 서방님들 잘 돌봐 주는것 잊지 말고....."

라고 좌중을 웃겼던 생각이 난다.   그약속을 말없이 조용히 집뒷뜰로 나가, 닭장에서 3마리의 통통하게 살찐 암탉을 손수잡아 털을 떨어내고, 내일 모두가 모였을때 맛있게 먹을수 있도록 수고하고 있는 그를 생각하면서, 도울려고 하는 나를 그의 부인은 꼼짝도 못하게 막고 그광경을 목격하지 못하게 하는 그배려에 마음이 찡한다.

요리를 바로 할수 있도록 잘 준비된 3마리의 닭을 시장에서 구입해서 친지들을 대접하면 편하고 또 맛이 더 있을수도 있을텐데….. 친구는 싸늘한 밤공기에 옷을 적셔 가면서 지금, 그것도 혼자서 조용히 정성을 쏟으면서 우정의 share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분들은 50년 넘게 지켜온 우정이지만, 나자신을 포함한 남편들은 40여년 동안 아내들 덕택에 같이 어울려 우정을 지켜오고 있는 4부부들인 것이다.  평상시에는 삶에 바빠 수시로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는 드물다고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 부부가 고국을 방문할때는 이친구 부부들이 하던일을 뒤로 밀어제치고 같이 어울려 여러날들을 해외여행과 국내 여행 또는 친지부부의 집에 머물면서 우정을 나우어 오고 있는 사이이기에, 그러한 우정을 지금 이집 주인장은 행동으로 조용히 나타내고 있음을 나는 보면서 느끼고 있다.  마음이 괜히 찡해온다.  나이를 먹어서만은 아닌, 피를 나눈 형제,자매들 사이에서는 못느끼는, 그러면서도 행동에서는 서로가 격을 두고 예의를 저버리지 않는, 독특한 우정이 이렇게 오랜세월동안 지켜져 오고 있다는데 나 스스로도 대견하게 느껴지고, 계산안되는 희생?)이 동반하고 있기에 가능해진다는 삶의 철학을 본다.

사회적활동이나, 신혼때부터의 부부 생활 시작도 조건이 거의 모두가 풍부하지 않은 여건속에서 별을 보고 집을 나섰다가 별을 보고 귀가하는 충실한 삶을 살아왔기에 노후의 생활도, 경제적인 면에서 큰 부자는 아니어도, 궁색함 없이 여유를 즐길수 있는 수준의 삶을 즐기고 있는 우리들 부부이기에 더 우정이 끈끈하게 엮어져 온것임을 오늘 다시 확인 하는 셈이다.

이러한 우정 관계를 있게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내들의 헌신적인 공로가 그속에 깊이 배여 있음을 외면할수 없다.  처음 신혼때 만났을때는 우리 남편들은 서로가 마치 적을 탐색하는것 처럼 서먹서먹함을 떨쳐 버릴수가 없었다.  당시의 사회적 현실이 모두가 가난하게 살수 밖에 없었던 속에서 우리들,남편들은 쉽게 껍질을 벗어 던지고, 나신의 모습 그자체를 보이기를 꺼려하는면도 많이 있었다. 이럴때마다 같이 몸을 섞으면서 새로운 신혼의 삶을 시작한 아내들이 자기의 남편들을 이해시키고, 칭찬도 해주고, 모임의 자리를 만들고…. 그렇게 이어온 우정이기에, 지금 밖에서 열심히 내일 친지부부들의 만남을 위한 요리를 준비하기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을 그친구의 젊었을때의 모습을 기억속에서 되찾는다.

같이 모임을 갖었을때 별로 농담도 잘 못하는 좌중을, 이친구는 구수한 입담으로 배꼽을 잡고 웃게하는 특유의 재간(?)이 있다.  그럴때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주책없는 남편이라고 눈을 돌리면서 쏘아 부치는 부인의 변함없는 한마디도 지금은 특허품정도로 모두가 이해하고 듣기를 즐거워하면서 또한바탕 웃어 제낀다.  이번 울릉도 여행시에도 그녀는 어김없이 남편의 주책같은 좌중웃기는 행동에 어김없이 눈을 돌려 훌기는 모습이 재현되곤 했었다.  아마도 내일 모두가 모여서 닭고기를 뜯으면서 바삐 손을 놀릴때, 그는 좌중을 박장대소 시키는 재치를 발휘할것이다.  그친구의 이러한 재치가 더빛나는것은, 다른 친구분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입으로 내뱉은 말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지켜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년을 살아가는데에 가장 큰 재산으로 작용하고 있다는것을 모두가 고맙게 생각하고, 값있게 간직하고, 생활화 하고 있는 점이다.
















시골에서 여름내내 농사지어 수확한 산채나물들을 주원료로 만들어 상위에 올려진 반찬들은 모두가 향이 특히했다.  고국방문을 참 잘 했다는 생각을 또 한번 한다.  명이나물, 더덕나물, 마늘짱아치, 참나물 무침, 아침에 큰통의 배추 한포기를 뒷뜰 텃밭에서 뽑아 만든 것저리 등등….종류를 다 기억은 못한다.  닭고기는, 도회지의 시장에서 구입하여 먹었던것과는 다르게 조금 육질이 단단하다. 어금니에서오래 씹힌다.  도시의 양계장에서 자란 고기는 부드럽고 푸석푸석함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입안으로 집어 넣는 토종닭고기는 질기다. 씹을수록 맛이 더해지는 느낌이다.  노후의 생활에서는 부부가 먹는 일상의 음식준비도 버겁다는것을 가끔씩 느끼는데…. 이친구 부부는 대식구의 입을 즐겁게 하고 50여년 지켜온 우리들만의 우정을 위해  어제밤에 이어 오늘 새벽에도 심혈을 쏟아 친구들을 위한 정성이 듬뿍 담긴 정성을 만들고 있다. 고맙다.  더욱더 기억에 오래 남을것은 이집 주인장이 특별히 준비해준 사슴고기육회(Deer Meat)의 맛이다.  그는 매년 늦가을부터 초겨울사이에 전국을 헤매며 사냥을 즐기는 멋쟁이다.  지난해에 사냥했던 사슴고기를 냉동시켜 놓았다가 먹골배를 채썰어서 같이 버무려 사슴고기육회를 만들어 친지들의 입을 즐겁게  한것이다.  입에 씹히는 맛이 닭고기와는 또 다르다.  맛이 고소하다.  이집 주인장의 정성이 없었다면 어디서 이런 생사슴고기맛을 느낄수 있을까?  이러한 분위기가 오래오래 이어지기를 그져 바라고 싶은 생각 뿐이다.    내일 오후에는 이런 우정들을 뒤로하고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 집으로 되돌아가기위해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감사.

http://youtu.be/PbydWs-bZSU

Tuesday, October 02, 2012

한국을 먹여살릴 세계최고의 신기술, 그사연 눈물겹다.


한국을 먹여살릴 세계최고의 신기술, 그사연 눈물겹다.

조국을 사랑하는 진정한 애국자는 바로 이들이 아닐까?
이들이 노력하고 헌신하는것 처럼 정치꾼들이 행보를 같이 한다면
캐나다의GNP도 불과 몇년안에 추월할수 있으련만.....

조국의 앞날에 국민들의 삶의 터전을 더 기름지게하고 질을 높이게할, 신기술을 개발한
젊은이들의 앞날에 개인적인 영광과, 더불어서 조국동포들이 모두다 그대열에 동참해서 알찬 삶을 같이 살아가는 그날을 위해, 정치꾼들의 소아적발상에서 나온 당리당략과 표를 얻기위한 사탕발림 선심은 이제는 가슴속에 깊이 묻어 버리기를 염원해 본다.  시집간 딸이 친정이 좀더 잘 살기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조국하늘쪽을 바라보면서.....


http://news.donga.com/Economy/3/01/20120925/49676501/1

Who's the real owner on 센카쿠 또는 위오다이오




요즘 세간의 뉴스의 중심에는, 일본어로 '센카쿠', 중국어로는 '위오다이오'로 불리는 남지나해쪽의 조그만 바위섬8개가 우뚝 서있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관심밖이었던 이섬이 갑자기 뜨거운 감자가 된것은, 하나도 신기해 하거나 또영토로서의 이용가치가 높아서도 아니다.

인구는 늘어나고, 자원은 고갈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사람들의 욕구는 커지고 하는등의 요구를 정부가 찾다보니 이제는 버려진 바위섬까지 눈독을 들이고, 혹시라도 그주위의 바다에 부존자원이 있지 않을까하는 바램에서 한발 앞서 자기네 영토라고 선언을 하는 그과정에서 중국과 일본이, 이섬들에 대한 영유권을 이유로 무력충돌의 일보직전까지 와 있는 상태다.

이섬의 역사를 보면 13세기경에는 중국이 이섬의 주인이었음을 확실하게하는 기록이, 그것도 일본인 탐구학자의 연구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후 청나라를 거치면서, 중국의 국운이 쇠태해 지면서, 이섬에 대한 영유권 선포를 할 여유가 없는틈을 타서, 19세기 말경에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던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일본의 한기업가에게 이섬의 사용권을 허용하기에 까지 이른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은, 미국이 중심이 된 연합군에 항복하여, 일본본토및 부속도서들을 접수 하고 관리 하다가,  민주주의 국가로 새 출발한 일본정부에 전권을 인계하고 점령지에서 철수한다.  이때 센카쿠 열도를 일본에 넘겨준다.   이때만 해도 동서 냉전시대라서, 중국본토를 점령하고 공산정권을 세운 모택동의 중국과는 아직 대화도 열리지 않은 때였기에, 다른 Choice 가 없이 이섬들을 일본에 귀속되는것이 당연시 되는것에 다른 이의가 있을수 없었다.

전쟁이 끝난지 70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세계의 정치적 지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바뀌어 어제의 적이  아군이 되고, 어제의 왕조가 공화국이 되고.....경제적 성장도 눈부시여, 모든 나라들이 이제는 제목소리를 국제무대에서 외쳐대고 있다.   '위오다이오'섬이 중국과 일본의 영토주장의 한가운데 우뚝 서있어,   이를 그냥 앉아서 보고만 있는 미국의 입장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고래싸움에 새우등터진다라는 옛말이 생각난다.   아시아의 큰 두나라가 무력충돌이라도 하게 된다면, 주위의 작은 나라들에게 절대로 득이 올리는 없을 것이다.  고국 대한민국은 무역을 해서 먹고사는 나라여서, 눈치 보느라 혹시라도 눈알이 돌아가지는 않을까 걱정도 하게된다.
절대로 그런일은 없어야 겠지만,  오늘 뉴스에도 중국의 감시선들이 인근 해역에 접근 했었다고 한다.  일본의 수상은 강한 톤으로 물러서지 않겠다라고 국민들에게 알리고....
미국은 겉으로는 조용하기만 하다.   서뿔리 Refree역활을 하기에는 얽히고 설킨게 너무나 깊은 관계가 두나라와 연결되여 있기 때문이다.

LA times의 기사를 여기에 옮겨 싣는다.


일본과 중국이 "조그만 섬"소유권 다툼으로 무력충돌직전.

일본말로는 Senkaku, 중국말로는 Diaoy로 불려지는 이 조그만 섬들은 겨우 야생염소 생존할수 있는 곳으로 한일본인 기업가가1800년대말에 이곳에 크게 투자할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현되지는 않았었다.

섬들중웨서 가장큰 이섬이 한창 활기를 띌때는, 어부들 또는 유럽에서 여성용 장식구로 인기있는 '알바트로스'새들의 깃털을 수집하여 생활하는 수백명이 넘는 노동자들의 생활 터전이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1978년에 이척박한 섬에 생명체가 살아있는곳으로 만들어, 일본영토임을 확실히 하기위해 번식력이 강한 야생염소가 겨우 서식하고 있는 섬이다.  지형적으로도 세상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들이지 못했던 곳이기도 하다.

정치전문가들은 이섬이 중국과 일본간의 외교분쟁과 무력충돌 가능성을, 1982년에 있었던 영국과 아르젠티나간의 영토분쟁과 비교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양상으로 갈 조짐은 없는것 같다.

센카쿠(일본명), 또는 다이오이유(중국명)로 불리는 이섬은 전부 8개의 섬으로 형성되여 있고, 가장 큰 섬은 길이가 약 2마일정도이고, 작은섬은 중국본토와 가까운 중국해에 위취한 바위덩위로 형성된 섬들로 섬전체의 면적을 합쳐도 3평방 마일이 채 안된다.

2차대전이후 미국은 이섬들을 일본에 반환해 준 죄밖에 없는데, 요즘은  이소용돌이 속에서 속앓이를 하고 있다.

19세기까지 중국은 이섬의 영유권을 행사해 왔으며, 중국명"다이아오유"섬은 13세기경에 중국의 문학에도 인용되는 곳이었다고 한다.  명나라때는 당시 Ryukyu왕조에 속했던 섬으로 중국과 오키나와를 잇는 뱃길의 등대 역활을 했었다고 한다.  중국어선들은 이섬에 들러 물과 땜감들의 보급품을 배에 싣곤 했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의 기록에 보면 16세기경부터 이섬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의 일본해적들은 중국쪽 해안을 습격하기위해 이섬을 전진기지로 삼았었다고 한다.

일본의 학자 Unryu Suganuma씨가 2000년도에 발표한 연구논문에 의하면 중국명 '다이오유'섬은  중국의  영토였었다는데 뚜렷한 증거가 있어, 8개의 섬은 중세기때 중국왕조에 속해 있었다 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19세기경부터  이주장은 바뀌게 된다.  급속히 현대화되기 시작한 일본은 청나라가 붕괴되면서 영유권을 주장한다.

1880년대에 후쿠오카 출신의 한기업가, Koga씨가 일본정부에 섬전체를 사용할수 있는 허가권을 신청했고, 처음에는 이섬의 주인은 중국이기 때문에 정부가 반대했으나 Sugamura씨의 연구논문에 의하면, 1895년에 일본이 Sino-일본간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같은해 대만을 일본의 영토로 편입하면서 일본정부는 이정책을 변경하여 일본령으로 선포한 것이다.

센카구의 뜻은 '섬중에서 최고'라고 한다.   영국해양선원들이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섬들의 아름다움때문에 이별명을 부치게 된것이다라는 내력이 있다.

30년간의 사용허가를 받은 Koga집안은 많은 투자를 한다.  가장큰 섬에 그들은 집을 짖고,대피소, 수출을 위한 알바트로스새의 털가공공장을 설치하고, 생선 소스를 만드는 공장도 건설했다.  한때는 248명의 공장인부들이 거주 했었지만, 대부분 어린 아이들이었다고 하는데, 성인들은 이곳에 이주해 살기를 꺼렷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섬에서 살기란 무척어려웠고, 선박들도 이섬에 들리는것을 꺼려 음식등 보급품들은 전량 수입에 의존 했었다고 한다.  Koga씨 가족은 7세에서 12세 사이의 아이들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여 끌어 들이고, 교육시설에도 투자 했었다고 한다" 라고 Koga가문의 기록을 연구한 Shaw Sugamura씨는 밝히고 있다.  Koga씨의 아들 Jenj씨는 리스가 끝난 1932년에, 4개의 섬을 일본정부로 부터 사들였다.

그러나 2차대전에서 힘겹게 싸우고 있는 상황이라 연료비 상승과  경제봉쇄등의 조치로 곤경에 처하게 된다.  결국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하고 미군이 점령하여 관할하다가 1972년에 오키나와섬을 일본에 반환 하면서 이섬들도 일본에 귀속된다.  "미국은 이섬의 점유권 분쟁에 끼어 들기를 원치 않고 있다.  동서냉전시대에 미국은 이섬을 비밀에 싸여 있던 공산국가인 중국에 넘겨주고싶은 생각이 없었다"라고 Sugamura씨는 설명한다.






http://www.latimes.com/news/nationworld/world/la-fg-china-japan-islands-20120925,0,216163.story

한인전용 향군묘지조성의 필요성은 인정 하면서도…..



한인향군전용묘지 조성의 필요성을 논하는것은 오히려 너무나 늦은감이 있다는 생각이다.

캐 나다 동부지역의 향군은 토론토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공식적인 행사는 Brampton에 있는 Meadowvale Cemetery에서 7/27 휴전일 행사를 포함해서 일년에 2번 또는 3번씩 참석하여 캐나다측 한국전참전향군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친목도 도모하고 우정을 나누어오는 역사가 20여년이 넘게 해왔고, 앞으로도 이러한 공식적인 향군행사는 계속 진행될것이다.

향군행사가 진행되는 묘지광장앞에는 한국전에서 산화한 참전캐나다군 516분의 위패가 돌에 새겨져 모셔오고 있다. Remembrance Wall이라 호칭하고, 우리측에서는 '위령의 벽'으로 부르면서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해 오고있다. 우리향군 참전용사분들 포함하여 향군회원분들중에서는 서로 정보를 교환하여 개인적으로 이곳에 묘지를 이미 구입했거나 계획을 갖고 계시는 분들도 상당수 계신다. 좋은 현상이다. 이분들이 구입한 묘지는 캐나다 향군들과 함께 어우러져 있기에, 좀더 자세히 얘기한다면, 캐나다측 향군들이 주로 안장되여있는 묘지안에 개인별로 구입해서 Eteral life의 여정을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단체가 아닌 개인별로 구입했기에, 우리향군회원들이 구입한 묘지에 대한 정확한 Data가 없다. 묘지측에 문의 했으나, privacy이기 때문에 자료를 알려줄수 없다는 대답뿐이다.

고국에서 대통령님이, 향군회장님이 또는 Dignitaries들이 캐나다를 방문하시는 길에 토론토에 들리면, 꼭 이곳 Cemetery에 들려서 헌화하고 그분들의 희생을 추모하는 순서가 있다. 또 총리나 고위직에 계시는분들이 토론토방문시에도 Cemetery에 들려 비슷한 행사를 한다. 여기서 분명한것은 고국에서 대통령이나 고위관리들이 토론토 방문시 Meadowvale Cemetery에 들려서 헌화하고 그들의 희생을 추모하는것은, 캐나다가 유엔 참전 16개국중의 하나로, 한국을 지키기위해 함께 싸워준 그고마움에 대한 답례차원에서, 또 외교적 관계를 고려해서 하는것으로 알고 있고, 확신하고 있다. 우리 일부향군회원님들이 그곳에 묘지를 구입하고 영생을 그곳에서 하시기 때문에 방문한다고 생각하신다면 이것은 큰 오산이라는것을 우리 회원님들은 알고 계셨으면 한다.

이 곳 Meadowvale 묘지는 캐나다 동부지회내 상당수의 회원님들이 주장하는것 처럼, 한인 향군전용묘지가 아니고 따라서 우리한인 향군을 상징하는 상징물이나 조형물은 존재하지않고, 또 이러한 상징물을 세우는것을 묘지측에서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많은 우리 향군회원님들이 먼 훗날에 이곳에 묻히신다해도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추념하기위한 행사를 개최하는 공식 묘지안에 개인적으로 모셔져 있는것으로만 인식될뿐이다.

지난3월에 이곳 GTA에 있는 캐네디언 장의사(Funeral Home)3곳을 차례로 방문하여, 앞으로 한인 재향군인회와의 관계를 협의하고, 또 협조를 받기위한 계획을 세우고, 약속일정을 잡고 그첫번째로 Ogden Funeral Home을 방문 했었다. General Manager, Martin씨와 만나 서로 돕고 협조할수 있는 방법을 찾는 meeting에 그곳에서 근무하고 계시는 한인 장의지도사분이 동참하게 되였는데 그분의 이름은 Mr.Na라고 했다.

"한인 향군전용묘지"를 조성하여, 우리 향군회원들의 전용공간을 갖었으면 하고 나의 생각을 잠깐 언급했었는데, 그분이 '저도 그생각을 오래전부터 하면서 구체적으로 향군회원들만이 사용될수있는 구체적자료와 조형물이 표시된 도표까지 보여주면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어 무척 고무됐었다. 그러나 간단히 성사될 일이 아님을 알기에 좀더 구체적으로 모든 상황을 알아보기로 하고 일단은 끝났었다.

그후 회원님들과 개인적으로 의견개진을 해봤으나, 의견은 반반으로 갈렸었다. 이유는 'Meadowvale 묘지가 있는데…왜 한인전용향군묘지가 필요한가?' 또 다른의견은 '한인향군전용묘지임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세울수있는 묘지라야 한다'라는 두가지 반응이었었다. 오히려 현재 일반 향군회원으로 가입한분들과 향군자격은 있으나 회원가입을 안하신분들이, 한인향군전용묘지조성에 관심을 나타내고 또 찬성하는분들이 예상외로 많음을 보았고, 일이 잘 진행될경우 향군회원에도 가입하고, 묘지조성시에는 묘지 구입을 하겠다는분들의 적극적인 성원도 있었다. 이러한 구상을 다른행사를 준비하기위해 회장단이 만났을때, 잠깐 언급을 했었지만, 그것으로 시간은 상당기간 계속 흘러 갔었다.

장 의 지도사 Mr.Na께서 향군전용묘지조성 가능한 후보지를 물색해오다가, 모든 조건을 들어주는 Cemetery를 발견하였다는 연락을 해오셨다. '한인향군전용묘지'를 조성하고 한인향군을 상징하는 표지와 조형물을 세울수 있는 묘지후보지가 있는데, 문제는 묘지판매기간을 꼭 1달만 허용하겠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급했다. 절차를 밟아 일을 진행시킬려면 최소한 3주가 걸리는데, 나머지 1주로 해결될 일이 아님을 알면서 답답하기만 했다. 사후필요한 절차를 밟으면 될것으로 생각하고 광고를, 그것도 묘지측과 Funeral Home에서 절반씩 부담하기로 하고, 시작한것이다. 반응이 무척 좋았다. 1달만 판매기간을 주었던 묘지측의 내용을 알게된 한독지가가 같은 cemetery안에 이미 구입한 수십기의 묘지를 향군전용묘지조성구간으로 Transfer를 해셔서, 판매기간에 대한 어려움을 일단 해결되여 계속해서 판매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이다. 반응이나 구입실적이 예상보다 훨씬 상회하고 있다는 연락도 받았었다.

순조롭게 진행되여 한인향군전용묘지가 조성되면, 이제는 한인들만의 전용묘지라는 조형물과 상징물을 세우고, 그곳에서 회원분들이 편안히 쉬게 된다면 그이상의 흐믓함과 바램이 어디에 또있겠는가? 한인향군전용묘지를 조성하기를 잘했다라는 후진들의 평가가 긍정적으로 나타났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일부 회원님들의 생각은 Meadowvale 묘지가 한인향군전용묘지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Concept에서 튀어나오지 못하는 요지부동이어서, 공식적으로 성사될 가망성은 없어져 버렸다.

오래전 캐나다측 향군회장의 자문을 구해봤었다. 그분의 대답은 아주 명쾌 했다. Meadowvale묘지는 캐나다군의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공식적으로 매년 7/27 한국전 휴전 기념일날 추모하기위해, 캐나다 향군정관에까지 확실히 명시해 놓았다는 설명까지 해 주셨지만, 캐나다 향군전용묘지라는 공식 명칭은 없다는 것이다. 단지 위령의 벽을 중심으로 향군들에게 묘지 자리를 제공하고 있을뿐이다라는 설명이었다. 따라서 캐나다 각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향군회원들의 묘지사용을 쉽게하기위해, 여러곳에 캐나다향군 전용 묘지를 조성하여 편리하게 이용할수 있게 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분 자신도 Meadowvale묘지에 본인의 묘지를 구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분의 설명에서 hint를 얻어 우리한인향군도 전용묘지조성을 하면 좋겠다는 발상을 하게 되여 추진 했었던 것이었다.

이씨조선 말기에 쇄국정책으로 외부와의 교류를 단절했던, 그래서 앞서가던 한반도의 이씨조선을 일본에 한참 밀리리게 했던 "대원군"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 본다. 외부에 나타난 그의 존재는 한갖 왕자들이 갖게되는 '군'에 그치지 않지만, 장막뒤에서 모든전권을 잡고, 국교를 맺고져 찾아온 외국사절들을 쫒아내고, 타고온 상선들을 불질러 버리는 등등, 아들인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국정을 쥐락펴락했던, 그래서 이씨조선의 종말을 고하게 했던, 원인제공을 한 인물이다. 그런 분위기를 너무나 많이 느낀다. 좋은 취지로 일을 추진 했어도, 사전에 그들의 Nod를 받지않고 행동에 옮기면 괘씸죄(?)로 몰아 여론몰이를 하여 손발을 묶는다. 그다음에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기억에서 지워 버린다. 돈을 벌기위해 봉사하는 일도 아닌데...... 별생각이 다들게 만든다. 그렇타고 향군에서 묘지를 구입해서 회원들에게 나누어 주는것도 아니고 향군묘지구역으로 조성된 곳에 묘지를 희망하는 회원들이 각자 부담하여 구입하는것인데도 이렇게 난리 법석을 피우니..... 또 어떤 회원은 앞으로 향군행사를 두군데서 치르게 된다는 걱정을 하셨다. 그것은 억지 주장이다. 앞에서도 언급했고, 또 캐나다측의 향군정관에 명시해 놓았듯이, 공식적인 향군행사는 영원히 현위치인 Meadowvale 묘지에서 하게되여 있기 때문이다.

한인향군전용묘지 조성의 좋은 기회를 놓치게되는것이 몹시 안타깝다. 이제는 모든것이 백지화된 상태여서 오히려 마음은 편한면도 있다. 한인향군회장이 독단적으로 묘지조성을 하려 했다고 죄인 취급을 당하는 궁지에 까지 몰렸었고, 지금도 그후유증이 심각하다. 같이 팀을 이루어 향군일을 보던 한임원은 이내용을 언론사에 퍼뜨려 마치 향군이 큰 위기를 맞이 한것처럼 엉터리 내용을 부풀려, 망신사리를 들게 하지를 않나, 별의별 Rumor가 한인사회내에 판을 치고 Circulation되고 있다. 우리 한인향군의 앞날을 보았을때, 한인향군전용묘지 조성의 필요성에 대한 아쉬운 마음은 떨쳐 버리기가 쉽지 않다. 눈을 크게 뜨고 좀더 구체적으로 내용을 조사해 보고, 판단을 해보는 그런때가 속히 왔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