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anuary 17, 2011

나도 그렇게 북적대는 속에서 소년기를 보냈었는데....

살림밑천이라고하는 큰딸아이가 16세 막내가 2살 먹은 딸아이, 그리고 그사이에 5명의 아들들이 북적대는, 그러나 재미있게 살아가는 어느가족의 생활상이,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고국의 전남 담양군 시목 마을의 약 40대중반쯤되는 한 농가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보았다. 위로는 85세의 할아버지가 계셨고, 그다음에 7남매의 주인공 부부와 어린 아이들.... 아버지는 생업으로 소를 키우고, 어머니는 7남매 뒷치닥거리에 하루해가 지는줄을 모를 정도로 바쁘게 움직이는면서도, 아이들과 싸우거나 아우성치는 광경은 보이지 않고, 오손도손 살아가는 모습이 옛날, 그러니까 나의 소년기를 연상케 하고도 남는다. 그렇게 바삐 살아가면서도, 커가는 아이들을 위해서 별도로 당나귀 한마리를 구입하여 아이들과 같이 작난치면서 즐기도록 배려하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이, 어린 막내딸은 오빠들이 한방씩 쥐어 박는 시늉을 하면, 종종 걸음으로 부엌으로 쫓아가 엄마에게 칭얼대며 오빠들이 때렸다는 시늉을 하면, 옆에서 부엌일을 도와 주고 있던 큰딸이 하던일손을 멈추고, 막내의 재롱에 맞장구 치면서, 오빠들을 혼내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장면.... 눈이 펑펑내리면 두터운 옷으로 무장한 아이들은 집뒷쪽 언덕으로 올라가 썰매(Toboggan)를 타면서 끝없는 웃음을 자아내는 모습, 나귀등앞에 막내가 타고 그뒤에 붙어 오빠가 타고 집주위를 돌면서 친하게 아무걱정없이 어우러져 즐기는 모습....우선 살아가는데 여유가 있어 보여 좋았고, 요즘같이 아이낳기를 꺼려하는 세상살이로, 앞으로 20년 30년후의 인구감소 추세를 걱정하고 있는 전문가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국가 정책에 적극 호응하는 부부같아, 그다큐를 보는동안 나자신은 까맣게 잊고 있던 나의 소년기속으로 Time machine을 타고 달려가고 있었다. 그집의 어린 7남매 아이들이 그렇게 부모님의 보살핌속에서 재미있는 기억에 남을 소년 소녀시기를 잘 보내기를 기원해 주고 싶었다.

내기억으로는 당시에 80세가 넘으로신 할아버지가 같은집에 살으셨고, 어린 나는 할아버지의 방에 들어가는것을 무척이나 꺼렸었다. 우선 지금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샤워 시설이 없기에 몸을 닦을 기회가 적어,노인들에게서 나는 특유의 냄새와 또 긴 장죽에 넣어 피워대시는 담배 냄새가 지독히도 싫어서 였다. 할아버지가 어쩌다 마실물 한그릇을 떠오라고 하시면, 나는 그명령을 이행하는대신, 할아버지와 말대꾸를 하면서, 할아버지의 성질을 돋구어, 장죽으로 후려치려하시면 얼른 도망 다녔던, 철없는 작난을 쳤던 그때가 있었다. 바삐 집안일을 하시다가 이광경이라도 보는 날이면, 나는 어머님에게 혼줄이 나도록 빌어야 했었고... 어쩌다 미쳐 할아버지의 급작스런 공격(?)피하지못하고 한방 맞을때는 머리통에 조그만 혹이 생겨 고통의 눈물이 주르르 흐르곤 했었다.

6/25사변이 막 끝나고 아직 어수선한 때여서, 빈손이다 시피한 형편에서 아직 부모님의 우산속에서 보호를 받아야 하는 우리 어린 8남매 (전체 10남매 였으나 윗 두형님은 벌써 결혼하여 따로 살고 계셨다)는 우선 허기진 배를 채워야 하는 고통이 제일 컸었다. 어느날 어머님이 큰 누나와 하는 소리를 들었다. 한달에 최소한 쌀 3가마는 있어야 겨우 목에 풀칠을 할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요즘의 생각으로는 대식구인것이었다. 그와중에 큰 누나가 시집을 간다고 잔치 준비를 한 생각이 난다. 집뒤의 큰장광에 있는 7-8개의 큰독에 막걸리를 만드느라 Fermenting되고 있는 흰막걸리가 꽉 있는 그속에 조그만 바가지를 부엌에서 몰래 들고 나와 독속에서 꺼내 먹고, 취해서 사랑방 부엌안의 나무더미위에서 쓰러져 잠들다가 저녁이 되어도 나타나지않자 식구들이 찾아 나서면서 크게 이름을 불러대는 소리에 깨어 났던 기억.... 행동 하나 하나가 위의 형들이나 부모님으로 부터 칭찬대신 욕먹을 먹을 짖만 했었던것 같다. 더 부모님의 마음을 조리게 했던점은, 막걸리를 집에서 만드는것은 밀주를 만드는 행위 였기에, 밀주단속군에게 들키면 벌금은 물론이고, 결혼식은 엉망이 되기에 항상 어린 나를 포함한 형제들에게, 암행어사 처럼 이동네 저동네를 비밀리에 뒤지고 다녔던 밀주단속직원들에게, 행여나 그들이 던진 미끼에 걸려 다 불어버릴것을 걱정하여 입단속을 시키곤 했던 기억도 떠 오른다. 어머니에게는 귀여운 새끼들이 아니라 말썽 꾸러기들이었을 것이다. 속상할때면 욕설을 자식들에게 퍼부으면서 "무슨죄가 이렇게 많아서 새끼들이 많이 생겨나 속이 편한날이 없게 사는지 모르겠다"라고 탄식하시면서 다헤어진 새끼들의 바지의 무릎을 손으로 꿰매고, 그러한 바지가 여러개 항상 쌓여 있어,하루종일 바늘이 손에서 떠나지 않았던것 같다.

추석때는 할아버지는 집에 계시고, 아버지가 새끼들을 인솔하여 선영으로 성묘를 갈때면, 언제 준비해 두셨었는지, 낡아서기운 옷이었지만, 깨끗하게 갈이 입히고 위로 여러명의 형들과 아래로 이제 겨우 부축없이 걸을수 있는 막내를 앞세워 동네길을 걸을때면, 동네의 공동우물에서 물긷던 동네 친구들의 어머니들께서 잠시 일손을 멈추고 쳐다보면, 더 의기 양양해 하면서 손을 흔들면서 일렬로 걸었던 기억도 난다. 조상님들 묘앞에서는 아버지가 먼저 성묘하시고, 그다음에 우리 형제들이, 나는 끝에서 막내 다음으로 두번째로 서서 두번씩 절을 하면서, 좌우의 막내와 형들과 작난을 치다가 아버지로 부터 꾸지람 들었던 기억도 있다.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다닐때는 5살쯤 된 막내가 따라붙겠다고 떼를 쓰는, 귀찮은 막내를 떼어놓고 갈려치면, 칭얼대는것을 보고, 어머니가 아우성을 치면서 데리고 놀아라고 엄포를 놓기에 별수 없이 데리고 다니면서 같이 놀곤 했었는데, 그렇게 하는것이 어머님에게는 집안일을 하는데 짐을 덜어주는 것이었음을 후에 알았었다. 집에 돌아올때는, 막내에게 오늘 일어났던 일들을 절대로 집에 가서 고자질 하지 말라고 욱박지르면서 겁을 주면, 우선 그협박이 무서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철석같이 받아내곤 했는데, 집에 돌아오자마자, 큰 응원군인 어머니 아버지앞에서 막내는 무조건 놀면서 일어났던,어른들이 볼때는 나쁜 일들을 고해바치면, 나는 Smack을 당하기도 했었다. 철없는 이제 겨우 10살 넘은 어린 아이가 어떻게 좋을일 나쁜일을 구별하여 절도 있는 행동을 할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개구장이로, 배고픔속에서 소년기를 보냈던 기억이 아스라히 떠오른다.

어쩌다 닭한마리를 잡거나,어머니가 읍내 시장에 나갔다가 돼기고기 한뭉치(약 2근쯤)사와서 밥상에 올릴때는 그야말로 잔치날이기도 했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차례대로 하다보면, 꼴찌나 마찬가지인 나에게는 별로 오는게 없었다. 그렇타고 위의 형들에게는 많았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어쩌면 더 적었을지도 모른다. 닭한마리로 온식구가 배불리 먹기는 아예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말이다. 보리밥 아니면 무우밥을 기름이 떠 있는 국물에 말아서 먹는 것 만으로도 행복(?)해 했었다. 어쩌다 닭다리라도 한조각 내 그릇에 주어지면 그것은 아마도 어머니 아니면 누나가 챙겨 주어서 나에게 그런 행운(?)온 것으로 생각하곤 했었고, 먹는 전쟁이 끝나고 나면, 밥상은 빈상이었었다. 배가 허기져 어머니나 누나의 눈치를 보다가 맞닥치면, 자기도 배고프면서, 한숫갈 떠서 더 먹으라고 건네 주었던 어머니, 누나였었다. 그런날은 내가 특별히 이쁘고 착한 아들, 동생이라고 그런것으로 착각하기도 했었다. 사실은 Take Turn하면서 새끼들의 배고픔을 나누어주었던것을 모르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누나들은 시집가고 위의 형들은 학교로, 또는 먹는 입를 하나라도 덜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일찍히 집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하게되는 형도 있었고, 나 또한 당시로서는 유학이나 마찬가지인 도회지로 고등학교를 다니기위해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시골집을 떠나야 했다. 바로 밑의 여동생은, 남자형제들 틈에 끼어 교육을 받지 못했었다. 살림이 어려운 이유도 있었지만, 여자는 학교다니는것 보다 집에 있으면서 시집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당시의 사회풍조에 어쩔수 없이 그렇게 희생양(?)이 된것이다. 지금도 그녀에게는 괜히 미안한 마음이다. 그렇게 항상 북새통이던 꽤큰 집에 하나 둘씩, 위에 두 누나는 시집가고, 나를 포함한 형들은 학교가기위해,사회생활을위해 집을 떠나면서 큰 집은 조용해 지기 시작했고, 부모님의 얼굴에는 어느새 주름살이 늘기 시작함을 보았었다. 그후로는 형제 자매가 한번도 모두모여 어릴때의 삶에 대한 얘기를 해 볼수 있는 재상봉의 기회는 없어졌던 기억이 이 아침에 떠오른다. 인생살이라는것이, 그것도 형제자매들간에도, 성장하게 되면, 마음은 있지만, 현실이 허락치 않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러한 기회가 오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내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똑 같은 유산(?)을 물려 주면서, 내자신 이제 환갑을 한참이나 뛰어넘어, '내가 너처럼 젊었을때는....'라고 말씀 하시면서 기억을 더듬던 아버지의 모습을 오늘 내가 그뒤를 따라가고 있음을 본다. 그렇게 코흘리개였던 막내가 벌써 금년에 환갑을 맞고 있다.

시목 마을의 어린 7남매들 무럭무럭 잘 자라서, 나 같이 후회하는 자식이 아니고, 몫을 훌륭히 해내는 형제자매들로 성장 하기를 빌어 주고 싶다.

1 comment:

Oldman said...

저도 같은 마음으로 그 아이들이 잘 자라서 훌륭한 사회의 일원이 되길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