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의 현실을 나는 뉴스를 통해서 접한다. 내가 모든 혈육을 버리고, 고국을 떠나 이곳에 온지도 지금 내 나이 65세인데, 그절반의 훨씬 전이다. 그당시를 전후로 이민 비행기를 탄분들은 대부분 대동 소이한 목적을 마음에 품고, 이민 보따리를 꾸렸겠지만, 그중에서도 첫번째의 목적으로 꼽이는것이, 배고픔을 줄이고, 더 잘 살아 보겠다는, 그래서 내 새끼들에게는 그런 참혹한 삶을 살게 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내 머리는 꽉 차 있었다.
또 다른 이유를 굳이 붙인다고 한다면, 그어려운 속에서도 있는자들의 행태가, 너무나도 꼴사납게 사회를 어지럽게 하는 뉴스에 진절 머리가 났었던 기억이 있다. 실무를 담당하는 공무원 신분으로 어떻게 하면 더 잘사는 사회를, 국가를, 그리고 내가정을 꾸릴수 있을까를 늘 염려하면서, 젊음을 불태웠었지만, 꼴사나운 있는자들의 행패(?)가 국정에 영향을 미쳐 그러한 열정은 빛을 보지 못하기가 다반사 였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서정쇄신'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부정부패를 퇴치하고져 했던 박통의 고뇌를 머리에 스쳐지나곤 한다. 어떻게 하면 보릿고개를 없앨수 있을까?로 관,민이 한마음이 되여 박통의 영도력을 따라, 한손에는 북괴들과 대치하고 있는 휴전선을 지키기 위해 총칼을 들어야 했었고, 다른 한손에는 건설의 삽을 들고 불철 주야 젊음을 불태우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세대를, 먼훗날 후손들이,조국근대화를 위해 열심히 살았던 세대로 기억되게 살자'라는 구호를 외쳤던 기억도 생각난다. 꼴사나운 있는자들의 허세와 부정과 행패에 견디지 못하고,결국 이민의 보따리를 꾸렸기에, 끝까지 그대열에 서지를 못했던 아쉬움도 있다. 그러나 의지와 조국번영의 염원이 더 강했던 많은 선배 후배들이 끝까지 국가 지도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그자리를 지켰기에, 오늘의 조국이 번영을 누릴수 있는 기틀을 확고히 다졌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답답하고 허전한것은, 이러한 삶의 풍요가 어떠한 역경을 통해 이루어졌는가를 오늘의 사는 고국의 젊은 세대들과, 일부 좌파색갈의 기성세대들이 새까맣게 망각하거나, 역사교육의 부재로, 귀중했던 원동력의 의미가 희미해져 가고 있다는 점이다. 절약을 모르고 낭비의 풍조가 조국의 어느구석을 가나 흔히 눈에 띄고, 어른들의 훈계가 젊은 세대들에게는 잔소리고, 그것도 모자라 때로는 봉변을 당하는 수모가 벌어지는 뉴스거리가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이현실에, 우리 조국의 운명이 이것으로 다 된것인가?라는 안타까움에 발을 구를 뿐이다. 이시점에서 박통같은 조국관과 반공사상이 뚜렸한 지도자가 조국에 존재 하고 있다면... '정'이 매말라 버린 그런 사회가 되여버린 조국의 오늘을 보면서, 경제건설과 인간교육은 똑 같은 비율로, 조국의 역사가 이어지는한 병행 되여져야 할것이다 라고 안타까움을 피력해 본다. 여기에 오늘자 조국의 신문기사를 옮겨서, 그때 그현장에서 동참할수 있었던 기억을 되살려 봤다.
http://news.joins.com/article/955/4470955.html?ctg=1000&cloc=home|piclist|piclist1
http://news.joins.com/article/606/4470606.html?ctg=1000&cloc=home|showcase|main
http://news.donga.com/Society/3/03/20100906/30987900/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4/2010082400006.html?Dep1=news&Dep2=headline1&Dep3=h1_10
http://news.joins.com/article/030/4351030.html?ctg=1000&cloc=home|showcase|main
https://mail.google.com/mail/?hl=en&shva=1#inbox/12a8adca2850cd4a
Friday, July 30, 2010
Saturday, July 24, 2010
'천안함 사건' 기사를 보면서,시집간 딸이 친정을 생각하는 그애절함 뿐이다.
또다시 고국에서는 '천안함'사태에 휘말리는것 같다. 고국의 언론에서는 별로 언급이 없는 상황 같지만, 이곳 북미의 유수 언론중 LA Times는 이 사건을 머리 기사로 대서 특필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서 북미에서 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몇명의 교민도 이에 합세하여, 도코에서 기자회견까지 하는 난리법석을 피웠다고 한다.
유엔안보리에서 성명채택까지해서 '분명한 외부세력의 폭침'에서 비롯됐다고 발표했고, 이사건을 조사했던 많은 중립국 전문가들이 최종 검사 결과를 취합하여 전 세계에 발표한 것인데.....
같은 민족이면서, 같은 목표를 향해서 한 목소리를 내서 외쳐대로 반응이 거의 없다시피하는 이판에, 그들이 반대의사를 국제적으로 외쳐대는 그속내는 무엇일까?. 그렇게 유엔에서 성명채택하여 발표한 진실(?)규명이 엉터리라면, 한국을 포함한 서방세계를 향해 쏟아붓는 독설(?)을 왜 매년 수백만명씩 굶어 죽게하는, 이사건의 당사자로 지목받고 있는 김정일 체제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훈계(?)를 못하는가? 전문가의 정신에서, 학자의 정신에서 진실을 밝히는것 뿐이라고 그들의 말데로 라면, 그들은 분명히, 인간사회에서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천인 공노할 인간 말종짖을 서슴없이 해대고 있는 그들, Regime에 대해서, 왜 과학적으로, 또 학자의 정신으로 일갈을 못하고 있으면서,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개인의 인격과 자유를 보장해 주는 고국, 남한 정부의 비난에만 혈안이 되고 있는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그들의 이러한 언행에 수긍이 가질 않는다. 아니 할려고 무척 노력을 해도 이해를 못하겠다. 이렇게 의사표현을 하는것이, 개인의 Freedom을 보장해주는 민주사회의 기본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엄연히 이에 상응하는 책임(Responsibility)이 항상 공존하고 있음을 모를리 없을 터인데..... 가끔씩 사회적으로 용납이 안되는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 신문기사를 보는것은 요즘은 흔한 일이고, 때로는 영화같은데서도 같은 맥락의 살인사건이 전개되는 경우를 본다. 사건을 풀기위한 경찰을 비롯한 전문가들이 그속을 파집고들어가 원인을 찾아 발표하는 내용중, '청부살인'이라는 표현을 볼때가 있다. 어느개인이나, 집단의 목적을 달성하기위해, 직접 본인이나 집단이 실행하기 어려울경우, 돈몇푼을 먹이로 던져주고, 대신 엄청난 일을 시키는 것이다. 입에 거품을 품어가면서, 유엔에서 장시간 토론후 결론을 얻어 발표한 성명서가, 즉 46명의 꽃다운 젊은이들을 수장시킨, 천안함 폭침배후로 지목한 집단에 대한 규탄 성명서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배후가 심히 의심스럽기만 하면서, '청부살인'이라는 미단어의 뜻을 새삼 음미해 보지 않을수 없다. 여기에 오늘자 LA Times의 관련 기사와 김동길 교수의 칼럼을 옮겨 봤다. 그리고 중앙일보의 사설을 옮겨 놓는다.
http://www.latimes.com/news/nationworld/world/la-fg-korea-torpedo-20100724,0,4196801,full.story
◆2010/07/24(토) -정신병환자는 아닐 겁니다- (815)
신문에 보면 직업이 목사라고 되어 있는 자 하나가 국가의 여행 허가도 없이 멋대로 북에 가서, 멋대로 돌아다니면서, 대한민국 대통령을 개 패듯 하는 자가 있다고 하여 수많은 한국인이 그 자를 향해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고 있습니다. “저 놈이 어디 제정신인가. 미쳤지.” “저런 인간도 밥을 먹고 사나.” “저런 게 목사라면, 누가 교회에 가겠는가.” 등등
나는 평생에 단 한 번도 그 자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무슨 교회를 담당했는지, 무슨 신학교 출신인지, 어디서 굴러왔는지, 친구가 누군지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세 끼 밥은 누가 먹여 주는 지, 중국으로 하여 평양까지 가는 여비는 어디의 누가 대준 것인지, 정말 궁금한 일이 많지만 아는 바는 전혀 없습니다.
글쎄 이놈이 평양 가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이명박이야말로 천안함 살인 원흉”이라고 하였다니 분통이 터지고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옵니다. 만일 당국에서 나더러 “이놈을 좀 느슨하게 두들겨 패세요”라고 부탁하면, 나는 그 부탁에 응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 자가 왜 이런 짓을 하였을까요. 김정일의 적화통일을 돕기 위해서하는 짓임이 분명합니다. 그 놈은 다만 김정일의 앞잡이일 따름입니다.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김동길
www.kimdonggill.com
[사설] 미국에 가서 ‘천안함’을 부정하는 시민운동가들 [중앙일보]
2010.07.26 21:06 입력 / 2010.07.26 23:31 수정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는 종교계와 민화협·진보연대 같은 진보적 시민단체, 여야 정당 소속 정치인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통일운동단체다. 2005년 창립된 이래 6·15기념 남북공동행사 등을 진행해왔다. 김상근 상임대표와 정현백 공동대표(참여연대 공동대표·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등으로 구성된 이 단체의 대표단이 27일(현지시간)부터 미 의회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하고 국무부의 한국 관련 관리들을 면담하며 워싱턴·뉴욕 등에서 교포들을 상대로 강연회를 열 계획이다. 그런데 단체가 공개한 김 대표 인사말과 정 교수의 발표문 등이 천안함 폭침(爆沈)에 대한 북한의 책임은 거론하지 않고 국제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부정하며 미국의 대북 제재를 비판하고 있다.
시민운동가들이 국내외에서 북한, 통일, 한·미 동맹 등에 관한 의견을 발표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민주사회의 자유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가치를 신장(伸張)하고 대체적인 공동체 구성원의 이익에 봉사하는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 특히 국가안보 문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국가가 존재해야 시민단체도, 비판의 자유도 있는 것이다. 지난달 참여연대라는 시민단체가 유엔 안보리 이사국들에 천안함 조사 결과를 부정하는 내용의 서한을 보낸 적이 있다. 이 행동이 문제가 된 것도 안보라는 공동체 가치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이 이런 언행들을 거론하며 훼방했고 의장성명은 미흡한 것이 되고 말았다.
6·15 남측위가 합리적이 되려면 북한 소행은 분명하게 인정하고 사태를 해결하는 방법론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해야 한다. 한·미의 대북 제재와 6자회담 유보는 모두 천안함에 대한 북한의 테러행위 때문이다. 6·15 남측위 같은 시민운동가들은 공동체 구성원 46인을 살해한 외부 집단은 왜 문책하지 않는가. 그리고 천안함 조사 결과에 대해 비과학적인 문제 제기를 함으로써 국제사회의 대북 조치에 균열을 초래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들이 기왕 미국에 갔다니 미국의 야당이나 시민단체가 9·11 테러 때 공동체와 어떻게 보조를 맞췄는지 제발 배우기 바란다.
내조국을 생각할때마다, 시집간 딸이 친정을 생각하는 가슴앓이의 심정이다.
유엔안보리에서 성명채택까지해서 '분명한 외부세력의 폭침'에서 비롯됐다고 발표했고, 이사건을 조사했던 많은 중립국 전문가들이 최종 검사 결과를 취합하여 전 세계에 발표한 것인데.....
같은 민족이면서, 같은 목표를 향해서 한 목소리를 내서 외쳐대로 반응이 거의 없다시피하는 이판에, 그들이 반대의사를 국제적으로 외쳐대는 그속내는 무엇일까?. 그렇게 유엔에서 성명채택하여 발표한 진실(?)규명이 엉터리라면, 한국을 포함한 서방세계를 향해 쏟아붓는 독설(?)을 왜 매년 수백만명씩 굶어 죽게하는, 이사건의 당사자로 지목받고 있는 김정일 체제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훈계(?)를 못하는가? 전문가의 정신에서, 학자의 정신에서 진실을 밝히는것 뿐이라고 그들의 말데로 라면, 그들은 분명히, 인간사회에서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천인 공노할 인간 말종짖을 서슴없이 해대고 있는 그들, Regime에 대해서, 왜 과학적으로, 또 학자의 정신으로 일갈을 못하고 있으면서,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개인의 인격과 자유를 보장해 주는 고국, 남한 정부의 비난에만 혈안이 되고 있는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그들의 이러한 언행에 수긍이 가질 않는다. 아니 할려고 무척 노력을 해도 이해를 못하겠다. 이렇게 의사표현을 하는것이, 개인의 Freedom을 보장해주는 민주사회의 기본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엄연히 이에 상응하는 책임(Responsibility)이 항상 공존하고 있음을 모를리 없을 터인데..... 가끔씩 사회적으로 용납이 안되는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 신문기사를 보는것은 요즘은 흔한 일이고, 때로는 영화같은데서도 같은 맥락의 살인사건이 전개되는 경우를 본다. 사건을 풀기위한 경찰을 비롯한 전문가들이 그속을 파집고들어가 원인을 찾아 발표하는 내용중, '청부살인'이라는 표현을 볼때가 있다. 어느개인이나, 집단의 목적을 달성하기위해, 직접 본인이나 집단이 실행하기 어려울경우, 돈몇푼을 먹이로 던져주고, 대신 엄청난 일을 시키는 것이다. 입에 거품을 품어가면서, 유엔에서 장시간 토론후 결론을 얻어 발표한 성명서가, 즉 46명의 꽃다운 젊은이들을 수장시킨, 천안함 폭침배후로 지목한 집단에 대한 규탄 성명서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배후가 심히 의심스럽기만 하면서, '청부살인'이라는 미단어의 뜻을 새삼 음미해 보지 않을수 없다. 여기에 오늘자 LA Times의 관련 기사와 김동길 교수의 칼럼을 옮겨 봤다. 그리고 중앙일보의 사설을 옮겨 놓는다.
http://www.latimes.com/news/nationworld/world/la-fg-korea-torpedo-20100724,0,4196801,full.story
◆2010/07/24(토) -정신병환자는 아닐 겁니다- (815)
신문에 보면 직업이 목사라고 되어 있는 자 하나가 국가의 여행 허가도 없이 멋대로 북에 가서, 멋대로 돌아다니면서, 대한민국 대통령을 개 패듯 하는 자가 있다고 하여 수많은 한국인이 그 자를 향해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고 있습니다. “저 놈이 어디 제정신인가. 미쳤지.” “저런 인간도 밥을 먹고 사나.” “저런 게 목사라면, 누가 교회에 가겠는가.” 등등
나는 평생에 단 한 번도 그 자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무슨 교회를 담당했는지, 무슨 신학교 출신인지, 어디서 굴러왔는지, 친구가 누군지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세 끼 밥은 누가 먹여 주는 지, 중국으로 하여 평양까지 가는 여비는 어디의 누가 대준 것인지, 정말 궁금한 일이 많지만 아는 바는 전혀 없습니다.
글쎄 이놈이 평양 가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이명박이야말로 천안함 살인 원흉”이라고 하였다니 분통이 터지고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옵니다. 만일 당국에서 나더러 “이놈을 좀 느슨하게 두들겨 패세요”라고 부탁하면, 나는 그 부탁에 응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 자가 왜 이런 짓을 하였을까요. 김정일의 적화통일을 돕기 위해서하는 짓임이 분명합니다. 그 놈은 다만 김정일의 앞잡이일 따름입니다.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김동길
www.kimdonggill.com
[사설] 미국에 가서 ‘천안함’을 부정하는 시민운동가들 [중앙일보]
2010.07.26 21:06 입력 / 2010.07.26 23:31 수정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는 종교계와 민화협·진보연대 같은 진보적 시민단체, 여야 정당 소속 정치인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통일운동단체다. 2005년 창립된 이래 6·15기념 남북공동행사 등을 진행해왔다. 김상근 상임대표와 정현백 공동대표(참여연대 공동대표·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등으로 구성된 이 단체의 대표단이 27일(현지시간)부터 미 의회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하고 국무부의 한국 관련 관리들을 면담하며 워싱턴·뉴욕 등에서 교포들을 상대로 강연회를 열 계획이다. 그런데 단체가 공개한 김 대표 인사말과 정 교수의 발표문 등이 천안함 폭침(爆沈)에 대한 북한의 책임은 거론하지 않고 국제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부정하며 미국의 대북 제재를 비판하고 있다.
시민운동가들이 국내외에서 북한, 통일, 한·미 동맹 등에 관한 의견을 발표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민주사회의 자유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가치를 신장(伸張)하고 대체적인 공동체 구성원의 이익에 봉사하는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 특히 국가안보 문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국가가 존재해야 시민단체도, 비판의 자유도 있는 것이다. 지난달 참여연대라는 시민단체가 유엔 안보리 이사국들에 천안함 조사 결과를 부정하는 내용의 서한을 보낸 적이 있다. 이 행동이 문제가 된 것도 안보라는 공동체 가치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이 이런 언행들을 거론하며 훼방했고 의장성명은 미흡한 것이 되고 말았다.
6·15 남측위가 합리적이 되려면 북한 소행은 분명하게 인정하고 사태를 해결하는 방법론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해야 한다. 한·미의 대북 제재와 6자회담 유보는 모두 천안함에 대한 북한의 테러행위 때문이다. 6·15 남측위 같은 시민운동가들은 공동체 구성원 46인을 살해한 외부 집단은 왜 문책하지 않는가. 그리고 천안함 조사 결과에 대해 비과학적인 문제 제기를 함으로써 국제사회의 대북 조치에 균열을 초래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들이 기왕 미국에 갔다니 미국의 야당이나 시민단체가 9·11 테러 때 공동체와 어떻게 보조를 맞췄는지 제발 배우기 바란다.
내조국을 생각할때마다, 시집간 딸이 친정을 생각하는 가슴앓이의 심정이다.
Sunday, July 18, 2010
목사님 김신조....한반도의 그때와 지금은?...
김신조, 그이름을 떠 올리면, 하마트면 나의 군대생활을 6개월 이상 연장 시킬뻔 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으로 항상 뇌리에 떠오른다. 그가 생포된후 첫일성은 '청와대를 까 부수러 왔다'라고 나는 기억한다. 그날이 1월21일,1968년. 나는 그전해 10월달에 만기 제대를 하고, 시골 집에서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하고 있을때였었다.
제대 특명을 받았었던 군후배들로 부터 들은 소식은, 그들 공비들이 서울 심장부를 휘젖은뒤, 곧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을 송두리째 뺏어버린, 당시로서는 군대생활하는데 하루가 지긋지긋하게 느끼면서 생활하고 있는 그들에게 6개월 군대생활 연장이라는 비보(?)였었다. 그와 함께 남파된 공비들은, 반격에 나선 군인들과 경찰들에 의해 모두 현장에서 사살됐었지만, 그만이 오직 생포되였었다. 그가 소속됐던 124 군부대도 뚜렷히 기억된다. 굶주리고 있는 남반부 조국민들을 해방시키기위해,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는 선택된 엘리트중의 엘리트들이라고 교육받고, 남파된후 생포되여 남한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지금까지 세뇌교육받은것이 거짖이었음을 하나씩 하나씩 체험하면서 느낀것이다. 그후 들리는 소식은 그가 반공강연을 하러 전국을 순회 하면서, 북한 인민 공화국의 허구성과 내막을 폭로하곤 했었다고 한다. 언젠가는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이곳 토론토까지 다녀 갔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후 결혼하여 가정을 꾸미고, 새식구가 늘어나고.... 요즘은 목사님으로 변신하여 하나님 말씀을 증언하러 다닌다고 한다. 그후로 40여년이 지난 오늘, 남과 북을 미디어가 보여주는 자료를 통해 들여다 보면, 북은 더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가고, 인민들은 토탄에 빠지고, 굶어죽는 숫자가 해마다 백만명이 넘는다고 하고, 주민들에 대한 감시와 노역장 동원은 더심해지고.....이와는 반대로 박통의 선경지명적인 리더쉽으로 경제적 부를 이룬 남한은 이제는 선진국 수준에 거의 맞먹는 풍부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한다. 북괴의 갑작스런 남침으로 시작된 6/25의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나는 고통스러웠던 전쟁과 김신조 일당의 공비가 서울 심장부를 치러 내려왔던 1/21 사태를 새까맣게 잊어버린 젊은 세대들은, 지난 10년 동안에 남한을 통치했었던 좌파 정권들이, 북괴 정권과 한통속이 되여, 6/25는 미국이 사주한 북침전쟁이었다라는 거짖선동에 뇌화부동하여, 현정부의 정책에 사사건건 반대하면서도 북한 정권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비난을 퍼붓지 못하는, 배부른 철부지들로 전락해 버린, 의식없는 사회로 변한 것이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을 보면서, 목사 김신조씨는 어떤 생각을 할까?
40년전이나 지금이나 남,북 사이에는 변한게 아무것도 없는것을 보면서, 느끼면서 그의 머리는 나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움직일것이다. 그도 이제 69세의 할아버지가 됐다고 한다. 40년전 그때로 부터 북한은 3대째 세습체제를 준비중에있고, 남한은 국민들의 선택에 따라 6번째 정권이, 김신조 일당이 까 부수러 왔었던 청와대의 주인역활을 하고 있다. 복잡한 정치적 논리를 떠나, 북한의 계획데로 남북한이 하나로 된다면, 여전히 국민들은 배고픔에 허덕일것은 뻔한 이치이고, 반대로 남한이 주도한 정권이 들어선다면, 우선 경제적으로 국민들은 배고픔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것이다. 이조건들을 놓고 국민들의 의사를 묻는다면 결과는 배부르게 삶을 즐길수 있는 쪽으로 나타난다는것은 삼척동자도 쉽게 유추할수 있을 것이다. 현실은 이러한 나의 상상을 풀어주는쪽이 아니고, 더 꽁꽁얼어붙게하는 쪽으로 달려 가고 있음이, 이제는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는 김신조 목사를 포함한 많은 동시대의 국민들의 마음만 바쁘게 해주고 있는것 같다.
여기에 오늘자 LA Times의 기사를 옮겨 본다. 서러운 우리조국, 나의 조국....
http://www.latimes.com/news/nationworld/world/la-fg-korea-spy-20100718,0,5046450,full.story
아프칸에서 수고하는 캐나다군들에게 위문편지를 썼다.
군대생활할때, 후방에 있는 중고등학생들로 부터 위문편지, 특히나 크리스마스때를 맞이하여, 받아보는 설레임은, 당시에 군대생활 여건의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피로 회복제였었고, 기다림이었었다. 며칠전 나의 여름철을 보내고 있는 Cottage에서 지역 신문인 "Independent' 를 스크린 하다가, 아들을 캐나다 군대에 보낸 한 어머니의 간절한 아들의 무사 귀환과, 후방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 캐나다 국민들의 무관심(?)을 일깨워 주기에 충분한 인터뷰 기사를 읽고, 그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늦게나마 몇자를 적어 칸다하, 아프칸에서 수고 하고 있는 캐나다 병사들에게 나름데로의 위문 편지를 써 보냈다. 군대생활을 할때는, 나의 부모님을 원망도 여러번 했었던 기억이 지금도 뚜렷히 뇌리속에 박혀 있다. '당시에는 흔히들 볼수 있었던, 있는자들의 아들들은 군면제를 잘도 받기도하는것을 보면서, 왜 나의 부모님은 돈도없고, 빽도 없어 군면제는 고사하고 그것도 모자라, 결국에는 최전방 대성산에서 외출한번 해 본일 없이, 남들 다 3번씩 연가를 가는데도, 그대열에 끼지도 못하고 2번밖에 가지를 못하게 하는, 늙어가시는 부모님이 무능해 보였었던 기억 말이다'. 다 시대의 흐름에 영악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곧이 곧대로 삶을 살아가셨던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삶의 자세를, 후에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캐나다에 이민와서 살아가면서, 철늦게 부모님의 삶의 자세와,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먼저 완수해야 이다음 삶이 떳떳함을 항상 주지시켜 주셨던 부모님의 고귀한 뜻을 가슴으로 부터 느낄수 있었고, 오늘의 나자신이있게 해 주셨던 점에 대한 보답을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고, 이다음 세상을 약속하고 말았던 애절함이다.
일제강점기에 어렵게 독학으로 공부하여 높은 공직에서 젊음을 보내셨던 아버님이, 해방후의 혼탁(?)한 사회속에서 몸을 던져 살아가면서 부와 명예를 염두에 두셨더라면, 그꿈을 못이룰것도 없으셨겠지만, 조용히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시면서, 자식들을 키우셨던 것이다.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 받을때에도, 면회를 오시지 못했었다. 당시에는 어린 마음으로, 면회를 와서 오손도손 얘기를 나누는 다른 병사들의 부모님을 부러워 하면서, 무능한(?) 나의 부모님을 비교도 많이 했었다. 훈련이 끝나고, 빽있고, 돈 있고, 연줄있던 상당수의 병사들은, 내가 가기로 되여 있는 춘천의 3 보충대가 아닌 다른 후방 지역으로 가는것을 보면서..... 결국 남들 다 가는 3번의 휴가를 얻어 먹지도 못하는, 바보같은 군대생활을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병(Private Guards?)들이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는 휴전선에서 하면서, 겨울이면 동상이 걸리기도 했었고...
지금은 부모님께 너무나 죄스럽다. 만약에 부모님께서 당시에 명예와 돈과 빽이 있어서 철없이 막난이 짖만 해대는 나를 최전방이 아닌 군부대로 빼 돌리셨더라면 그래서 고생을 면하게 해 주셨더라면..... 오늘의 나는 이렇게 회상의 글을 쓸수도 없었을 것이다. 부모님께서 귀가 아프게 해 주셨던 말이 있었다. "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고 하셨던. 우선 나의 능력이 모자라 젊어서 크게 출세는 못했었지만, 부모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헤쳐나오게 했던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 부모님은 당시의 아들의 어려움을 느끼시면서 많이 마음 아파 하셨겠지만, 먼 훗날의 아들의 좀더 낳은 삶을 위해 고생을 허락(?)하셨었던 것이라고 늦게나마 깨달음에, 나의 우둔함을 통탄할 뿐이다. 그러한 마음이 캐네디언 병사의 어머니의 자식사랑과 임무완수, 그리고 자랑스러움을 기사를 통해 보면서, 지금은 안계신 부모님을 다시 생각해 봤다.
Dear soldiers, I am very proud of you guys who's served for not only Canada but world peace. I am a Korean-Canadian citizen and I am now retired who served conscription of 3 yrs when I was young like you. Can you guess where I came from? S. Korea. Many veterans from both Canada and Korea have held commemoration in Ottawa on last Sunday of June every year to remember Korean war. At the statue of fallen soldiers, we thank them. Without their sacrifice, I believe, we Canadians can't stay and live in peace. Today I am writing to you guys to express my thanks to you that we are all the time thinking of you who have risk their life to keep the peace we are enjoying now. I really appreciate for that. Also I am trying to remember the days I served as a soldier with conscription to protect S.Korea from sudden attack by N.korea where still starvation exist among it's people. There were sunny days and rainy days during the conscription. At that time I used to regret that I shouldn't waste time of conscription, seeing some youngsters of my age didn't. After long time passed I realized to proud of my self of serving conscription, protecting my first home country from attackers. I believe maybe some of you regret participation of peace keeping role in Afghanistan but I am sure you will be proud of what you have done for the peace not only for Afghan but world later. I can't write longer since space is limited. I will visit here time to time to write to you guys. Many thanks. Paul.
일제강점기에 어렵게 독학으로 공부하여 높은 공직에서 젊음을 보내셨던 아버님이, 해방후의 혼탁(?)한 사회속에서 몸을 던져 살아가면서 부와 명예를 염두에 두셨더라면, 그꿈을 못이룰것도 없으셨겠지만, 조용히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시면서, 자식들을 키우셨던 것이다.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 받을때에도, 면회를 오시지 못했었다. 당시에는 어린 마음으로, 면회를 와서 오손도손 얘기를 나누는 다른 병사들의 부모님을 부러워 하면서, 무능한(?) 나의 부모님을 비교도 많이 했었다. 훈련이 끝나고, 빽있고, 돈 있고, 연줄있던 상당수의 병사들은, 내가 가기로 되여 있는 춘천의 3 보충대가 아닌 다른 후방 지역으로 가는것을 보면서..... 결국 남들 다 가는 3번의 휴가를 얻어 먹지도 못하는, 바보같은 군대생활을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병(Private Guards?)들이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는 휴전선에서 하면서, 겨울이면 동상이 걸리기도 했었고...
지금은 부모님께 너무나 죄스럽다. 만약에 부모님께서 당시에 명예와 돈과 빽이 있어서 철없이 막난이 짖만 해대는 나를 최전방이 아닌 군부대로 빼 돌리셨더라면 그래서 고생을 면하게 해 주셨더라면..... 오늘의 나는 이렇게 회상의 글을 쓸수도 없었을 것이다. 부모님께서 귀가 아프게 해 주셨던 말이 있었다. "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고 하셨던. 우선 나의 능력이 모자라 젊어서 크게 출세는 못했었지만, 부모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헤쳐나오게 했던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 부모님은 당시의 아들의 어려움을 느끼시면서 많이 마음 아파 하셨겠지만, 먼 훗날의 아들의 좀더 낳은 삶을 위해 고생을 허락(?)하셨었던 것이라고 늦게나마 깨달음에, 나의 우둔함을 통탄할 뿐이다. 그러한 마음이 캐네디언 병사의 어머니의 자식사랑과 임무완수, 그리고 자랑스러움을 기사를 통해 보면서, 지금은 안계신 부모님을 다시 생각해 봤다.
Dear soldiers, I am very proud of you guys who's served for not only Canada but world peace. I am a Korean-Canadian citizen and I am now retired who served conscription of 3 yrs when I was young like you. Can you guess where I came from? S. Korea. Many veterans from both Canada and Korea have held commemoration in Ottawa on last Sunday of June every year to remember Korean war. At the statue of fallen soldiers, we thank them. Without their sacrifice, I believe, we Canadians can't stay and live in peace. Today I am writing to you guys to express my thanks to you that we are all the time thinking of you who have risk their life to keep the peace we are enjoying now. I really appreciate for that. Also I am trying to remember the days I served as a soldier with conscription to protect S.Korea from sudden attack by N.korea where still starvation exist among it's people. There were sunny days and rainy days during the conscription. At that time I used to regret that I shouldn't waste time of conscription, seeing some youngsters of my age didn't. After long time passed I realized to proud of my self of serving conscription, protecting my first home country from attackers. I believe maybe some of you regret participation of peace keeping role in Afghanistan but I am sure you will be proud of what you have done for the peace not only for Afghan but world later. I can't write longer since space is limited. I will visit here time to time to write to you guys. Many thanks. Paul.
Wednesday, July 07, 2010
Summer Cottage에서 Fire Wood 장사는 Fun Game.
'예 한백에 6불입니다.' '참 아이스도 팝니까?' '그럼요' '두백 주세요.' '5불되겠읍니다. 감사 합니다.'
'아이스 크림은 안파세요?' '저희는 나무와 아이스만 임시로 몇개월 팔고 있어요' '아 그러세요'
'재미있게 캠프파이어 하세요' '장사 잘하기 바랍니다' 등등의 인사람로 사람들과 친교를 시작하면서, 시간도 보내고, 용돈도 벌고.....
여름철에 Cottage생활 하면서, 일상생활은 단조롭다. 그렇타고 토론토에 있으면? 하고 생각을 해보지만, 이역시 별로 다를것 같지는 않다.
토론토에서는 친지들과 아침에 McDonald's에서 커피 한잔씩하면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가끔씩 골프를 치러 외곽으로 나가고
아니면 집에서 잘 할줄도 모르는 컴퓨터와 씨름을 하고, 가끔씩은 Regular Check up을 하기위해 Family Dr.를 찾는것도 일과에 포함된다고 할수 있겠다.
일요일에 교회출석하여, 하나님말씀도 듣고, 친교실에서 평소 교우를 하는 친지분들과 담소를 하고, 토요일에는 Trail Walk을 거의 하지만,
여름철에는 덮기 때문에 매주 가지는 못하고..... 때때로 남에게 알리지 않고 나름데로의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있곤한다.
이곳 시골에서의 생활은 어찌 보면 더 단조롭다고 하겠다.
아침에 기상하여, 그날의 날씨를 조그만 라디오를 통해서 대충 듣는다. 여름 3-4개월 정도만 거주 하기 때문에 TV Cable이나 인터넷을 연결 하기도 뭐하고 해서 그냥 지내기 때문에 다 찌그러진, Cassette Tape를 넣는 Magazine의 뚜껑도 떨어져 나간, 대접을 못받는 구식 래디오인데, 소리는 그런데로다. 왜냐면은 하루 일과의 거의 대부분이라 할수 있는 골프 때문이다. 골프를 하기위해 카테지에서 지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습기가 찬 아주 더운날이나,또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골프를 하기 어렵기에 단조로운 Cottage에 있기 십상이지만, 골프장에 Member로 등록되여 있기 때문에 골프를 즐기고 싶은때는 마음데로 즐길수 있다.
다른 어떤 운동보다 골프를 하는 방법이 Senior들로서는 제일 좋은 선택이라고 감히 얘기 할수 있겠다. 그리고 나면, 긴 여름낯을 그냥
보내기에는 뭔가 허전하여, Lunar와 둘이서 Driving으로 이곳 저곳 시골 구석을 다니면서 도시에서 미쳐 보지 못했었던 다른면을 구경하고
주민들과 만나 담소 하기도 하고....주말이 되면 Garage Sale을 구경하고....또 가끔씩은 뒷집의 Gene.과 Barbara부부와 같이 Eating out도 하곤 하지만.... 더욱 남은 시간들이 단조롭기에,
Fire Wood를 한번 팔아 보기로 Lunar와 상의한 끝에 실행에 옮겨 본것이다.
Cottage바로 앞에 Camping Site가 약 500개 이상 있는 Provincial Park이 있기 때문에 많은 캠핑객들이 밤이면 Camp fire를 즐긴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Wood Supplier를 contact하고, 값을 흥정하고....
물론 Park안에 있는 store에서 캠핑객들을 위한 Fire Wood를 비롯한 위한 기본 물품들을 다 팔고 있지만, 그들은 항상 비싸게 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캠핑객들이 공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 Cottage앞을 지나는 도로를 거쳐야 하는, 즉 몫이 좋은 점이 있기도 한점이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점을 이용하여 질좋고 저렴한 Fire Wood를 팔기로 한것이다. 처음에는 Wood만 팔려고 했는데, 바늘에 실 가듯이, 아이스가 캠핑객들에게는
필수 품목이기에, 다시 전화 번호부를 찾아 인근에 있는 아이스 factory와 Contact하고, 그들이 제공해준 Ice Freezer를 갖다놓고.....
막상 시작을 하니, 신경이 그곳으로 쏠리기 시작한다. 밤에는 Tarp로 Wood Bag들을 덮고 다시 Rope로, 밤새 도둑맞지 않게 하기위해 둘러서
꽁꽁 매놓고, 아이스 박스에는 열쇠를 채우고....
골프를 끝내고 난 남은 시간에 한다고 하지만, 고객인 캠핑객들은 꼭 늦은 오후에만 Wood와 Ice가 필요한게 아니고 어느때고 필요시에는 찾아
오기에 그냥 지나칠수도 없는 어려움(?)이 발생 하기 시작한다. 그렇타고 Cottage에 와 있는 주 목적인 골프를 안칠수는 더욱 없고해서, Cottage에
세들어 살고 있는 Randy에게 우리가 없는 시간에 우리대신 장사를 해볼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Welcome이다. 그친구는 몸이 너무나 비대하여
다른 Job을 갖지 못하고, 그동안 Saving 해놓은것과 요즘은 정부 보조를 받아 살아가고 있는 착실한 50대 중반의 혼자사는 Irish계통의 남자이다.
그친구는 지루한 시간을 나무나 아이스를 사러온 손님들과 대화를 하면서 보낼수 있기에, 평소에 대화를 나눌 사람이 옆에 없어서 거미줄이 처 있을법한 입을 사용하기에 더 신나 하는것 같다. 손님이 없는 한가한 시간에는 향나무 그늘밑의 의자에 앉아 담소를 하게되여 이웃들과 덤으로 친교를 하게 되는 셈이고.....
Lunar와 나는 그친구가 있기에 골프를 하러가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기에, 우리도 좋고, 그친구도 좋고, 남은 시간들을 서로 잘 활용 할수 있어,
이런 경우를 들어 일거 이득이라고 했던가? 물론 이득으로 용돈도 만들고, 그친구에게도 용돈을 줄수 있어 좋고....
아마도 금년 여름은 이렇게 Labor's Day까지 바쁘게 하루 일과를 해결할수 있을것 같다. 이민와서 부터 오랜세월을 매일같이 손님들과 어깨를
부딪치면 장사를 했다가 은퇴후 약 7년만에 다시 손님을 상대로 돈 계산을 해보니, 그사이에 습관(?)이 굳어져 손놀림이 매우 느린것을 느낀다.
Cash Register를 이용하는게 아니고 조금만 가방을 어깨에 매고 그속에서 잔돈을 꺼내고, 밀어넣고.....
Cottage의 앞마당에 수북히 쌓인 Wood Bag 을 보면서, '와 이렇게 많은 나무들이 다 팔려가고, 다시 order를 하고....' 믿어지지가 않는다.
주말이 되면 더욱 많은 Wood Bag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 처음 시작한 지난 주중에는 물량 준비를 잘 하지 못해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나무가 없어
찾아온 Camping객들을 되돌려 보내야 했었다. 이번 주말에는 그러한 실수(?)를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 단단히 준비를 해야지.
Wood사면서 거의 대부분의 Camping객들은 Ice Cube을 찾는다. Ice Box에 있는 음식물을 신선하게 보관 하기 위해서다. 손님이 한가할때는
Lunar와 나는 서로 교대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또 아들녀석이 사준 Nintendo Game기로 Suddock를 하기도 하고....
많은 Camping객들이 Quebec주에서 이곳을 찾는다는다는것을 신기해 하지 않을수 없다. 아마도 온타리오주민과 퀘백주민들이 약 반반씩 이곳 공원을
찾는 Camping객들인것 같다. 오늘도 골프를 하러 가기전까지는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다가, 시간이 되면 Randy에게 맡기고,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골프운동을 하러, 준비해놓은 간식과 음료수를 가방에 챙겨, Lunar와 함께 골프장으로 달려가 Green Field를 헤매면서, Club을 휘둘러 댈것이다. 그리고 다시 오후 늦게 나무장사를, 얼음장사를 해 보는 것이다. 그러다가 힘들고, 꾀가 나면 걷어 치우면 되니까. 며칠 안됐지만, 아직까지는 재미가 더 있다.
손익계산은 계절이 다 끝난 다음에 해 보면 될것이다. 이렇게 금년 여름 Cottage 생활은 한가지 일이 더 추가된 셈이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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