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September 21, 2008
어설펏던 시골생활이 친근 해 지려는 나만의 미소.
은퇴후 우리 부부의 삶의 근거지가 되고 있는 콘도의 창문을 통해 훤히 보이는 온타리오 호수는 그지 없이 조용하다. 불만이라면 이제 막 추분(낯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이 지난 하늘은 이른 아침이라고 그럴거라고 하기에는 뭔가 시원한 대답이 될수 없는, 파래야할 하늘이 회색빛으로 하늘높이 펼쳐져 있고, Marina가 접해 있는 Bay는 물론, 그너머로 보이는 바다같은 호수도 유리알 처럼 잔잔하고 조용하게만 보인다.
이번 여름 시즌에는 이렇게 아침 일찍 창가에 앉아 사색에 가까운, 이런 기회를 갖어본 기억이 거의 없이 지내왔다. 골프 시즌이 되면서, 운동을 한다는 이름하에 시골 카테지에서 일과로 삼다시피 하면서, 매일 골프채를 카트에 싣고, 끌고 다니면서 골프장 그린을 누볐기 때문이다.
어떤때는 2주 이상을 그렇게 보내는 사이, 토론토에 되돌아 올때는, 낯설고, 어설픈 느낌까지, 특히 고속도로를 달려 오면서, 오샤와를 지나면서 스카보로지역을 거쳐 돈벨리를 타고 내려 와서, 다시 가드너를 타고 콘도까지 오는 사이의 Flood of Traffic 속에 묻혀 운전 할때 간단한 느낌은 '아...복잡하구나! 이러한 속에서 내가 어떻게 그 긴세월을 살와왔었지?' 이다. 인간은 환경에 잘 적응하는 카멜레온 같다고 누가 애기 했던가?
같이 그린을 누비는 아내에게는 이러한 삶의 변화를 내놓고 얘기 해 본일은 없지만, 아마 그녀도 비슷하게 느끼면서, 골프채를 휘두르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복잡한 것을 피할수 있으면 피하고 싶고, 간단하게 살고 싶은 바램이 더 마음속에 쌓이는것 같다.
카테지 생활은 간단하다. 하루의 삶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것은 골프를 치는 일이다. 느지막한 아침에 눈을 뜨면, 골프를 가기위한 준비를 한다. 그녀는 넒은 부엌에서 아침준비를 하고, 나는 그옆에서 점심겸 스낵으로 먹을 것들을 준비한다. "여보, 오늘은 빵 3쪽을 만들어 가자. 그리고 물은 여유있게 한병 더 가지고 가자, 오늘 날씨가 어제보다 더 후덥지근 할것 같아서 말야." 라고 혼자말 처럼 그녀에게 흘려 보낸다. " 여보, 더운데 빵 많이 하지 말고, 대신에 어제 사온 Plum을 더 넣어요. 그게 좋을것 같아요." 라고 메아리 아닌, 반응이 되돌아 온다. "오케이.. 그렇게 합시다. 그런데 오늘은 2번씩 치기없기다. 알았어?" 라고 한마디 되돌려 보내면, 즉각 " 사둔 남말 하세요. 제발 지금 한말 솔선수범해서 먼저 지키시기나 하시지..." 이다. 시골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토론토에서 소유하고 즐기는 모든 문명의 이기는 다 있다. 다만, 간단하게 살고싶어, TV케이블도, 집전화도,인터넷도, 그리고 신문도 없이 지낸다. 그래서 밖의 세상과는 먹통이 된 기분이 들때도 있다. 처음에는 뭔가 남의 옷 빌려 입은것 처럼 어설펏으나, 몇년이 지난 지금은 그반대로 되여 가는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지가 꽤 오래 된것 같다. 이번주에도 2주만에 토론토에 되돌아 온 것이다. 그러나 주말을 보내고 다시 골프장으로 되돌아 갈것이다. 골프치는 분위기도 토론토지역에서와는 사뭇 다른다. 은퇴한 여유있는 분들이 마샬을 하는데, 하나같이 손자 손녀를 안고 그들의 재롱을 보면서, 만면에 미소를 띄우는 그런 인자한 모습들이다. 멤버들의 이름을 거의 기억하고 있으면서, 마주칠때는 반갑게 인사하면서 좋은 하루를 즐기라고 거든다. 이곳에서는 꼭 4명이 한팀이 되어야 티오프 시키는법은 거의 없다. 우리경우는 나와 아내 둘이서 항상 라운딩한다. 그만큼 여유있는 골프를 즐긴다는 뜻도 되겠다. 굳이 마샬들도 묻지않는다. 앞뒤 Pace를 보면서 지천으로 널려 있는 골프공도, 숲을 뒤져 줍기도 하고, 2nd샷으로 꼭 그린에 온 할려고 내려 쳤는데 옆으로 삐져 날아 갈때는, 아침에 아내가 되받아친 '두번치기 없기'라는 말을 순간적으로 기억해 내면서, 그래도 백에서 또 하나 꺼내 다시 쳐 보내기도 하고.... 그러나 성공보다는 내가 욕심을 괜히 냈구나 하는 결과가 더 많은것이다. 허리한번 더 돌리고 양팔을 휘둘렀으니, 한번 더 운동한것으로 위안을 삼지만...... 마음은 꼭 계획하고 생각했던데로 공을 날려 보낼것 같았는데....
덤으로 자주보고 느끼게 되는것은 흔히 볼수 없는 화초들과 그위에 버티고 앉아 있는 조그만 생명체들이다. 그들을 보면서, 젊어서는 못느꼈던 생명의 존엄하고 귀중함을 본다. 그래서 행여나 다치지 않을까? 조심하면서 한참보면서,순간적으로 골프는 뒷전으로 하고, 무언의 대화를 나누어 보기도 한다. 둘만이 주로 라운딩하기에 흔히들 옆에서 치는 다른팀들이 하는것 처럼 굳이 Score에 신경을 덜쓴다. 아니 안쓴다는 표현이 우리 부부에게는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둘이기에 긴장감이 덜해서인지, 실력 향상은 거의 없는것 같다. 향상된것이 있다면, 그렇게 매일 걸어도, 팔과,양다리, 어깨 그리고 허리를 휘둘러도 아프다거나 힘들다는 느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튼날 아침에 아무런 무거운 드낌이 없다는 말이다. 팔과 얼굴은 새까맣고, 아내는 다리통까지 새까맣다. 그녀는 나보다 짧은 바지를 주로 입었기에 생긴 현상이다.
시골 카테지의 리빙룸에는 골프공이 큰 상자로 그득히 쌓여 있다. 무슨 특별한 계획과 뜻이 있어서가 아니고, 라운딩 하면서, 볼이 주로 많이 빗나가 떨어지는 곳을 알기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손에 든 클럽으로 숲을 한번 뒤지면 하얗게 보이는 볼을 습관적(?)으로 줍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씩 하나씩 모았는데 어느새 상자로 가득히 쌓이고, 요즘은 달걀 카트에 좋은 공은 별도로 모아 두기도 했다. 나도 모른다. 이공들을 어떻게 앞으로 처리 할려는지? 괜히 나중에 짐이 되지 않을까? 라는 가상도 해본다. 그덕택(?)에 기념으로 받았던 새볼들을 꺼내 사용해본 기억이 거의 없다. 다음에 좋은곳에 갔을때 사용하자 라고 마음속에서는 항상 다짐을 하지만, 겨울철에 중남미로 골프 여행을 가서도, 새공을 사용해 본 기억은 거의 없다. 그렇게 골프를 해 왔기 때문에서 일까?
골프가 없었다면, 은퇴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자문자답해 보지만, 웃음을 짖게 하는 해답은 아직까지도 못 찾았다.
내일 다시 골프장으로 가서 클럽을 휘둘을때는, 그녀와 서로 굳게 약속한 '두번치기없기'를 꼭 이행해 볼것이다. 그래서 기다려 진다. 그리고
나만이 느끼는 미소의 이미가 이러한 삶속에서 스며 나오게 되나 보다.
Saturday, September 06, 2008
Sing along,오랫만에 캠프파이어속에서...김정식 가수와
참으로 오랫만에 캠프 파이어를 즐기면서, 같이 노래를 불러 보는 좋은 밤을 Presqui'le Provincial Park에서 이곳 브라이튼의 한인 천주교 친지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냈다. 마침 고국에서 성가를 부르는 가수 김정식씨가 북미 대륙을 순회 하면서, 각 천주교에 들려 아름다운 선율을 선물하는 스케쥴중에 이곳의 조그맣고, 중간 지점인 천주교에서 하루밤 같이 보내면서, 복음성가를 아름다운 음율에 실어 선사 해주는 뜻깊은 캠프파이어의 밤이었다. 젊은 이곳의 신부님의 역량이 한껏 돋보이게 하는 또다른 면을 볼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가수 김정식씨는 고국에서는 몸값이 높이 올라 있는, 귀한 가수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의 노래는 듣기에 가냘프면서도, 생기가 있고, 음율또한 귀에 많이 익어 금방 같이 어울려 불러 볼수있는, 그런 복음 성가들이었는데, 애처로운 뒷맛이 여운으로 남는 감미로움이 넘쳤다.
자리를 같이한 이곳의 친지들과는 그동안 얼굴을 스치면서 인사를 나누었지만, 오늘 저녁처럼 shoulder to shoulder로 가깝게 서로를 알게 하고 알려 주면서 지낼 기회는 없었다. 막연히 귀동냥으로만 들어서 알고 지내왔던, 그래서 판단하는데 편견이 많이 영향을 미칠수도 있는 우려가 많이 가시는 그런 기회가 되기도 했다.
우리 키보다 훨씬 크게 치솟는 불길과 불빛속에 비치는 얼굴들은 하얀이가 돋보이기도 했다. 은박지에 싸서 구워낸 고구마의 맛도, 어렸을적의 옛 기억을 되살리기에 충분 했었고, 구수했다.
가수 김정식씨는 그의 노래 하는 모습과 말씀 전달에서, 매우 구수하고 서민적인 냄새를 풍겨, 가까이 대하기가 부담이 없어 좋았다. 웃는 얼굴에 캠프파이어에 모인 누구하고나 농담과 얘기를 주고 받으며, 중간 중간에 노래를 부르며, 기타 반주도 일품이었다.
처음 참석할때는 잠깐만 들려 금방 떠나리라 생각했었는데, 분위기에 같이 젖어 들다 보니...... 끝날때즘에는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외롭게 생활해 가고 있는 우리 이민일세로서의 피로함과 일에 쫒겨 나날을 보내는 그런 버거움을 오늘이밤의 캠프파이어에 모두 내려놓고, 어울려 흥얼거리고, 즐기는 모습들, 본연의 순수함이 많이 돋보이는 좋은 시간으로 기억될것이다.
Friday, September 05, 2008
내가 의지하는 하나님께,다인종이 모여서,찬양.
다인종이 모여서, 각자 자기가 믿고 의지하는 절대자를 향한 찬양 모임에서, 평상시의 교회 출석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참의미를 갖는 기회가 여름철에는 자주 접하게 된다. 색갈에서 흑인, 백인, 황인..... 언어면에서, 공통적으로는 영어를 사용하지만, 그들의 mother tongue은 각양 각색임을 서로 접하면서 느끼고 실감한다. 그감촉이 무척 기분 좋다. 이번주에도 우리 부부는 Presqu'ile Provincial Park에서 여름 휴가철 동안에 공원을 찾는 여행객, 캠핑객, 그리고 휴가자들에게 제공하는 야외 공연장에서, 엄숙하지만 않았지만, 오직 자신과 절대자간의 대화의 순간을 갖을수 있는 예배 의식에 참석해서 찬양과 말씀도 들었다. 어린 아이로 부터 나이많은 Senior들까지 각자의 색갈을 보여 주면서, 진지한 대화의 순간을 갖는 예배 의식이었다. 오늘의 말씀을 전하는 Pastor는 브라이튼 지역의 구세군 사관이었다. 물론 설교는 성경말씀이었지만, 중간에 우스개 소리로 자기는 브라이튼 구세군에 어제 부임해서,아직 분위기 파악도 안된 상태에서, 첫예배의 말씀 전달자로 이곳 야외 교회로 말씀증거시간이 활당되여,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라고 덧붙혔다. 그의 온식구가, 부인은 예배의 사회자로, 아름다운 두딸은 합창단원으로 열심히 찬양과 예배를 도와 주는 모습도 좋았다.
날씨는 무척 밝았다. 남쪽에서는 태풍이 계속해서 몰아쳐 플로리다주와 옆의 미시시피주에서는 주민들이 어려움에 처해, 피난도 가고, 현지에서 태풍과 싸우느라 분주하고, 사망자도 발생하는 뉴스가 계속 들려 오는데, 이곳은, 축복을 받아서 인지, 그런 느낌이 전혀 없다. 이곳만이 축복의 찬란한 햇볕과 그분께서 지정해 주신것 같은 안도(?)의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오만일수도 있다. 그러나 감사하고 싶은 깊은 느낌이 솟아 나왔다. 예배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줄기의 꽃나무의 봉우리에는 이름모를 조그맣고 예쁜 새가 열심히 뭔가를 쪼고 있는 한가로운 모습이 운치를 더해 주었고, 그곳에서 조금더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는, 1796년, 미국의 정치제도를 피하여, 이곳 Brighton에 처음 정착한 Mr. Simpson 씨의 기념비가 아담하게 모셔져 있는 광경도 정겹다. 그는 당시에 영국의 왕정 정치제도를 옹호하는 편이었는데, 당시 동행했던 12살먹은 아들을 이곳에 남겨두고, 다시 남쪽 미국으로 내려가 모든것을 정리하고 다시 돌아오는데 6개월이 걸렸었다는, 어찌보면 흔하게 그냥 흘려 보낼 초기 정착자의 발걸음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 놓고, 기억하고 있는 이사람들의 삶의 밑부분에는 오늘 같이 예배보는 진지한 개척자적 정신이 배여 있음을 연결 시켜 본다. 이곳에는 현재도 그의 자손들이 조용히 살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비문은 끝을 맺는다.
중간 중간에 같이 합창하는 찬송가는 영어의 가사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우리말로 찬양하는 그런 깊은 맛은 좀 덜한것을 느꼈다. 그래도 같이 어울려 불러 보는, 흔치않는, 기회가 기억에 오래 기억될것 같다. 오늘의 예배를 참석하기 참 잘했다고 나를 안심시키면서, 본교회의 예배 참석못함을 위안 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고 믿고 싶었다. 야외공연장의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에는 가을철의 수확기를 연상시키기위한 제스처로 보여지는 옥수수가 매달린 옥수수대를 묶어 놓아 그또한 보기에 좋았다. 운치를 느낄수 있게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은 주최측의 노력의 일면을 볼수 있었다. 새로 부임한 임지에서 첫 예배처가 이곳임을 구세군 사관은 큰 의미를 두는것 같았다.
Refreshment도 준비해온 손길에 고마움을, 참여해서 즐기고 푸근함을 느끼는 모든 Worshiper들의 잔잔한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감사.
역전의 용사들의 야유회(향군)는 추억을 더듬게 하는......
금년에도 8월의 마지막 토요일에, 역전의 용사들이 모여, 동심으로 돌아가, 하루를 푸른 초원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다시 만나 좋은 시간을 갖는,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면서, 기억속으로 들어가는 야유회가 있었다. 매년 행해왔던 G.Ross Park에서 있었다.
마음은 아직도 그때 당시의 젊음이지만, 몸은 이제는 아스라한 기억만을 더듬으면서,움직여 지는게 한없이 거북이 걸음같음을 본다.
나는 그래도 젊은측에 들어 움직임이 훨씬(?)빠름을 느꼈다. 좋아해야 할까? 아니면.....? 삶을 소유한 생명체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앞서간 선배들이 거쳐가는 그길은 그대로 뒤쫒아 가는것을 현명히 생활에서 적용한다면.... 차분히, 좋아하기전에 겸허히 준비 해야 됨이 삶을 살아가는 역전의 용사로서의 늠름한 자세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 보면서, 아내와 같이 다리묶고 뛰어서 한바퀴 돌아오는 게임에도 참석해도 한바탕 웃음 바다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손벽도 치고, 자기편 응원 하느라 공원이 떠나갈듯한 아우성(?)인것 같은 행동들도 해 보지만, 역시 몸의 움직임은 이제는 그옛날 역전의 용사의 모습은 찾아 보기가 쉽지 않다. 세월의 덧없음이 선명히 보인다.
나자신은 역전의 용사 다음 세대에 속하지만, 내가 군에 입대 할때는, 다음 세대에는, 젊은이들이 국가의 의무를 이행하기위해 징집당해야 하는, 그러한 고통(?)이 없는 평화의 우리 조국이 되기만을 기대 했었지만, 현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게 없는 현실속에, 여전히 젊은이들이 조국의 국토방위라는 이름으로 아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안타깝게 보지 않을수 없다.
태권도의 묘기를 한구룹의 젊은이들이 우리앞에 보여줬다. 움직임이 날엽했다. 그들을 보면서, 나도 저런때가 있었는가?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꿈속에서 그려보듯, 마치 나의 생애에서는 없었던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실제로는 그보다 더한 혹독한 훈련과 시련을 최전방에서 입김으로 손을 녹여 가면서 훈련과 보초를 섰었는데...... 아련히 기억속에서는 희미하다. 사선을 해메는 역전의 용사들은, 내가 겪은것 보다, 실제로 죽느냐? 사느냐?의 숨바꼭질속에서 용케도 살아남아 오늘 이자리에 참석하여, 후배들의 재롱(?)을, 마음은 어린이로 돌아간 그상태에서, 웃음으로 소화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옆을 바짝 붙어서 지키는 보호자들의 보살핌이 아름다워 보인다. 젊었을때는, 반대였을텐데....
보호자분들이여, 오래 오래 곁에 있어 그들을, 아니 당신네들의 님을 지금까지 그래왔던것 처럼, 계속해서 보살펴 주시고, 지켜 주십시요. 옆에서 보기에도 아주 정다워 보이고 좋읍니다. 자손들의 재롱도, 후손들을 위해서 하셔야 할일도, 오래 오래 즐기도 계속 하십시요.
역전의 용사였음을, 향군회원임을, 전우애로 맺어진, 짙은 우정을 우리 후배들이, 후손들이 두고두고, 음미하고, 기억속에서 간직할수 있도록, 몸은 옛날이 아니지만, 남은 생애에서 그기상을 유지 하면서, 정을 나누는 그런 기회가 내년에도 그다음해에도..... 이루어 지기를 바랜다.
Subscribe to:
Posts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