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장군 영결식의 두장면, 미국은 끝까지 영결식 지켰고, 문재인과 김원웅은 끝까지없었다.
정기적으로 대한민국은 혈맹 미국과 국방장관, 외무장관 Meeting을 계속해오고 있고, 좀더 한국이 편하고 경제적으로 더 잘사는 나라가 돼도록 많은 노력을 해오고 있다. 이러한 정례회의는 지난 70년 이상 계속돼 왔었고, 이런 실무적 합의및 진행상황을 최종적으로 확인시키기위해, 정상회담도 많이 열리곤 했었다. 문재인 대통령을 제외하고,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가장 먼저 미국대통령을 만났던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악랄한 공산독재왕국, 북괴로 부터 대한민국을, 현재까지도 미군을 주둔시켜 보호해주는 미국이 요즘에는 심기가 너무도 많이 불편해 하고 있음에 마음이 조마조마 해진다.
문재인과 Regime이 청와대입성후 부터 잘나가던 한미간의 국방, 경제정책은 삐걱 거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마침내 건너오지 못할 루비콘강을 건너고 말았다. 이대로 가면 5천만 국민들은 방향을 잃고 말게된다.
혈맹 미국이 백선엽장군의 영면을 두고, 그렇게 애통해 하는 모습을, 일찌기 본적은 없었다. 이승만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을 포함한 그어떤 한국의 리더들이 타계했을때에도 본 기억은 없었다. 직책에 상관없이 리더로서의 참모습을 보여 주셨던 장군님을 그래서 미국의 조야에서는 애통해 하셨던 것이다.
문재인과 민주당 찌라시들의 반대로 동작동 현충원에 모시지 못하고, 먼길을 돌아 대전현충원에 모셔진것을 보면서 가장 애통해 하고, 현지까지 참석한 애이브람스 한미연합사령관, 주한미국대사 Harry Harris, 그러나 장례위원장직을 맡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곁에 있었어야할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대표 이해찬이는 처음부터 현장에는 없었다. 미국의 전쟁영웅을 마지막 보내는 장례식인지, 아니면 한국의 전쟁영웅을 마지막 보내는 장례식이었는지? 완전 상황이 뒤바뀐, 노병의 헌신에 감사해 할줄 모르는 쌍놈의 후손인것을 여실히 우방세계에 더러운 민족성의 추태를 문재인은 보여주고 말았다. 민주당대표 이해찬이는 잠시 병원영안실에 들렸을때, 질문을 던진 기자에게 시정잡배들도 사용치 않는 거칠은 말투로 쫌뺑이짖을 하면서 밀쳐버렸다. 문재인이는 "조화"한장 보내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었다.
백선엽장군은 6.25참전 16개국을 포함하여 전세계의 자유진영국가에서는 한국전뿐만 아니고 서방세계의 자유를 지키기위한 표본적인 장수로, 6.25전쟁 참전국에서 모두 영웅으로 대접하고 있다. 심지어 중국의 등소평도 평소 진정한 장수로, 비록 적국의 군인이었지만, 지략가로서의 백선엽장군을 높이 평가 했었다는 후문이다. 그분이 목숨바쳐 공산괴로로 부터 지켜낸 조국 대한민국에서는 일본부역을 했다는 억지 구실을 부쳐, 동작동 국립묘지에도 안장 못시키게하고, 마지막 가시는길을 돌고돌아 대전현충원으로 보내고 말았다. 누가? 문재인과 그Regime들이 한짖이다.
이후 한미 정상회담, 외무장관회담, 국방장관회담 등등의 회담을 통해 혈맹관계를 돈독히 하기위해 원탁 테이블에 앉았을때, 과연 어떤 모습으로 임할까?를 상상만 해도, 대한민국의 문재인 정부의 두얼굴을 보면서, 미국이 과연 혈맹관계를 지금까지 유지해왔던 진정성있는 태도로 한국을 대해줄까?라는 조바심이다. 벼룩도 낯짝이 있기에 하는 말이다.
그이유를 반증하는 자료를 보면 해답이 저절로 나온다.
북괴의 동향을 살피고, 간첩을 잡는 일을 하는 국정원장에 "박지원"을 임명했다. 그자는 김대중의 햇볕정책이행을 한답시고, 국민들 몰래 세금을 수십억 달러씩 북괴에 퍼줘, 그돈이 핵무기로변해 청와대를 겨누고 있게한 장본인이고, 그죄로 감옥살이까지한 범죄인이었는데....그의 조부는 순사를 하면서 지역주민들의 목숨을 무수히 아사간 자의 후손인데...
당시 고곱관리로 있던자의 딸 임수경이를 북한으로 파견하여 김일성이를 만나 북괴Regime을 찬양케 했던 Conspiracy를 주관했었던 전대협(이번 백선엽장군님의 추모식을 광화문 광장에서 주관했던 젊은 청춘들로 새로 구성된 전대협과 구별해야함) 회장출신 임종석이를 청와대 국가안보정책실장으로 임명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관리생활을 할수 있었을까? 임종석의 할아버지는 일본인의 집에서 집사을 했었던, 부역자의 표본이었는데..
남북통일의 임무를 맡은 통일부장관에 오래전 초대 전대협 회장출신, 주사파의 원조, 이인영이를 통일부장관에 임명했다. 이인영이는 유학비가 가장 비싼 스위스에 아들을 보내 공부시켰다는게 이번 청문회 과정에서 세상에 밝혀졌었다. 한달 방세가 50만원이라고 새빨간 거짖말을 국회의원들 앞에서 조아리면서도 눈하나 깜빡하 않고.
이런자들을 누가 임명한다고? 바로 김정은의 제 2중대장 문재인씨가 말이다. 이들은 국회청문회에서 전부 낙제점받아 통과가 안될 쪼무라기들이지만, 문재인이는 이를 완전무시하고 밀어부치는 것이다.
이러한 공산화의 음모를 미국이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정말로 손으로 해를 가리는 바보짖이다.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나라 지키는 정책에 정면으로 맞서 반대하는 문재인일당의 죄목을 하나하나 자세히 치부책에 기록해 가고있다. 지난 3년동안에 저지른 문재인의 죄목은, 지난 70년동안에 역대 대통령들이 미국과 마찰을 빗었던 모든 불협화음보다 백배이상 많다고 많다고 SNS에서 떠돌고 있다. 과테말라의 "노리애가", "남미의 가이아나"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체제와 Freedom이 위협을 받을때에는 미국이 직접 행동에 나서는 선례를 문재인정부는 잊지 말아야 한다. 왜냐면 Freedom은 공짜로 누리는게 아니고 이를 지킬만한 힘이 있을때에만 가능하다는 힘의 논리와 철학을 믿고, 필요시에는 즉각 Freedom을 지키기위한 행동을 취하기 때문이다.
시류에 따라 색갈을 수십번씩 바꾸면서, 호화판 생활을 즐겼던, 김원웅이를 문재인이는 광복회장에 임명했다.
문재인이가 목조아 숨통을 끊을려고 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권력을 휘둘렀었던, 치한이 바로 김원웅이다.
다늙어 걷지도 못하는자가 문재인에 다시 아부하자, 이번에는 광복회장에 임명했는데, 그자가 문재인에게 충성하는 제스처로, 대한민국을 북괴의 남침으로 부터 구해낸 영웅으로 백선엽장군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송해 왔던 그자가 이번 백장군 장례식과 현충원에 안장하는데 앞장서서 반대하는 막말로 씹어대는 행동을 보면서, 문재인이는 희죽희죽 댔을것이다. "내가 광복회장을 잘 뽑았다"라고.
2년후에 김정은 일당이 남한을 접수하면, 맨앞에 서서, "김정은 동지만세"라고 부르거나, 문재인일당의 정적이 선거에서 이겨 청와대 점령하게되면 다시 마차를 바꿔타고 "청와대 입성을 환영합니다"라고 앞장서서 아첨할, 지조라고는 병아리 눈꼽만큼도 없는, 위대한(?) 위인이 되 있을 것이다. 광복회장의 의미나 알고 폼을 잡는건지?
어제는 인터넷으로, 요즘 국민들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주는 보약역활을 하는 "사랑의 콜센터" 프로그람을 정말로 재미있게 봤었다. 쇼가 진행중인데, MC의 멘트가 짧게 흘러나왔다. "정동원군이 퇴장했습니다"라고.
원인은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참가하게 되면 법에 저촉되기 때문이었다는 해석이었다.
꼴에 법을 지켜야 한다고, "콜센터"쑈에까지 권력의 칼날을 휘둘러 대는 쫌생이들의 작태를 보면서....
법집행에서, 자기네들 맘에 안맞으면 처내고, 맞으면 법에 명시된것과는 상관없이 권력을 휘둘러대기도하고, 법을 고쳐까지 욕심을 채우는, 문재인일당의 이률배반적인 행동에 할말을 잊었다. 불과 많아야 한시간 더 연장시켜서 끝까지 노래로 춤으로 재주를 보여줘서 정신적으로 골병들어 우울해하는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예외적 법적용은 왜 안하는지? 그래서 나는 문쟁인을 방안퉁수, 그찌라시들은 시류에 춤추는 쓸개도 없는 인간들이라고 주저없이 말한다.
6.25후에 아수라장된 피란민들의 고통스럽고 혈육의 생사여부를 모르던 시절을 문재인과 그찌라시들은 절대로 잊지 말기를 바라는 뜻에서 당시에 유해했던 트롯노래 하나를 여기에 옮겨놨다.
1.비둘기가 울던 그밤에 눈보라가 치던 그밤에
어린 몸 갈 곳 없어 낯선 거리 헤매이네
꽃집마다 찾아봐도 목메이게 불러봐도
차거운 별빛만이 홀로 새우네 울면서 새우네.
2.하늘마저 울던 그밤에 어머님을 이별을 하고
원한의 십년 세월 눈물 속에 흘러갔네
나무에게 물어봐도 돌뿌리에 물어봐도
어머님 계신 곳은 알 수 없어라 찾을 길 없어라.
3.그리워라 어머님이여 꿈에 젖은 그 사랑이여
옥이야 내 딸이여 다시 한번 안겨다오
목이 맺쳐 불러보는 한이 많은 옛노래여
어두운 눈물이여 멀리 가거라 내일을 위하여.
15일 국립 대전현충원에서 엄수된 고(故) 백선엽 장군 안장식에는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 등 미 정부·군 고위 관계자들도 참석했다. 지난 10일 별세한
백 장군의 빈소를 조문한 데 이어 백 장군이 영면하는 마지막 순간도 함께한 것이다.
에이브럼스 사령관은 이날
서울아산병원에서 열린 영결식과 대전현충원 안장식을 모두 챙겼다. 그는 영결식에선 추도사를 통해 "(고인은) 철통 같은 동맹의
창시자 중 한 분"이라면서 "한국전쟁 지상 전투의 가장 절망적이고 가장 암울한 순간에서 유엔군 전력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국군을
이끌었고, 한국군의 기초를 다진 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전우여, 안녕히 가시라(Farewell, friend)"고 했다.
그는 6·25 참전용사인 크레이턴 에이브럼스 전 미 육군참모총장의 아들이다.
역시 6·25 참전용사의 아들인 해리스
대사는 이날 에이브럼스 사령관과 미 정부·군 관계자들을 대동하고 대전현충원 안장식에서 백 장군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검은 정장
차림에 검은 마스크를 착용한 해리스 대사는 이날 미 정부를 대표해 백 장군 영정에 헌화했다.
해리스 대사는 당초 안장식에서 마이크 펜스〈사진〉
미 부통령이 백 장군 유족에게 보내는 조전(弔電)을 대독할 예정이었지만, 조전 도착이 늦어져 헌화만 했다고 한다. 조전엔 백
장군에 대한 존경의 표현과 한미동맹의 초석이 된 그의 삶을 높이 평가하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펜스 부통령도 6·25
참전용사 에드워드 펜스 육군 소위의 아들이다.
코로나
상황으로 현장에 오지 못한 역대 한미 연합 사령관들은 추모 영상을 통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존 틸럴리 전 사령관은
"(고인이) 한미동맹을 지원하고 장병들을 사랑하는 군인 중의 군인이었다"며 "백선엽 장군의 전설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월터 샤프, 제임스 서먼, 빈센트 브룩스 등 다른 전임 사령관들도 잇따라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로버트 에이브럼스 한미연합사령관이 지난 10일
별세한 고(故) 백선엽 장군을 다음날 애도했다가 뜻밖의 봉변(逢變)을 당했다. 에이브럼스 사령관이 11일 성명을 내고 "백
장군은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워할 영웅이자 국가의 보물"이라고 말했는데, 이를 두고 김원웅 광복회장이 “내정간섭적 행태”라고 공개
비판한 것이다.
김 회장의 광복회는 15일 백 장군 안장식이 진행된 대전현충원 정문 앞에서 안장 반대 집회도
벌였다. 백 장군 운구 차량이 진입하자 도로로 뛰어들기도 했다. 일각에선 “국내외 수많은 사람이 백 장군을 ‘영웅’이라고 했는데,
왜 김 회장이 이에 극성이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국내 일부 진영이 달가워하지 않은 애도 표현을 한 정도로 ‘내정간섭’이라는
논리가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원웅, 그는 누구일까?
올해 76세, 3선 국회의원 출신인 그는 시류에 따라 이당 저당을 왔다갔다해 ‘철새 정치인’이라는 말을 들어온 인물이다. 광복회장은 지난해 3월부터 맡고 있다.
출생지부터
남다르다. 1944년 당시 중화민국 쓰촨성 충칭시에서 태어났다. 광복 후 부모인 조선의열단 김근부 지사와 전월순 여사와 대전으로
터전을 옮겼다. 대전고를 나와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재학 중 박정희 대통령의 한일기본조약 체결에 반대하다 투옥되는 등
열성적으로 운동했다.
하지만 그는 졸업 후 그가 반기를 들었던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의 사무처 직원 공채 시험에 응시, 합격해 당료(黨僚)로 근무했다. 정치적 스탠스가 180도 달라진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암살됐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고 이듬해 민주정의당이 창당됐다. 그러자 그는 민주정의당으로 옮겨 이곳 사무처 직원으로 일했다.
1987년 민주화 운동으로 전두환 정권이 무너지며 정치 지형에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선거에서 김대중과 김영상의 분열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됐지만 국회는 여소야대(與小野大)가 됐다. 결국 1990년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3당 합당’하며 민주자유당이 탄생했다. 김원웅도 민주자유당 당원이 됐다.
하지만 그가 이 거대 여당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긴 쉽지 않았다.
그는 결국 탈당, 3당 합당을 반대한 인사들이
만든 이른바 ‘꼬마 민주당’에 들어갔다. 성공이었다. 그는 마흔여덟이던 1992년 이 당의 제14대 국회의원 후보(대전)로 출마해
여당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그는 1996년 재선에 도전했지만 패했다. 이후에도 노무현 등과 같이 민주당계 정치인으로
활동했지만, 1997년 돌연 한나라당 창당에 뛰어들었다. 민주당계에서 그를 손가락질 했다.
하지만 김원웅은 금배지를 달았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그는
이번엔 한나라당에서 “철새”라는 눈총을 받았다. 한나라당 소속 의원이 된지 2년 만인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탈당,
개혁국민정당을 창당했다. 노무현의 인기가 급상승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해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를 측면 지원,
노무현 대통령 탄생에 숟가락을 얹었다. 이듬해 김원웅은 개혁국민정당을 탈당, 새천년민주당의 후신인 열린우리당에 들어갔다.
그 덕에 3선 했다. 이듬해인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대전 대덕구에 출마해 당선된 것이다. 국회 윤리특별위원장,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패했다. 2010년 제5회 지방선거에서도 대전 시장에 도전했다가 크게 패했다. 그를 받아줄
곳이 더는 없었다. 정계 은퇴를 선언해야 했다. 재야를 돌던 그는 2015년 남북 민족 운동 모임인 ‘민주통일정치포럼’을 창립해
전대협 출신 등 이른바 통일 운동을 하던 사람들과 활동하다, 문재인 정부 들어 일흔 다섯의 나이에 광복회장이 됐다.
김원웅의 광복회가 백선엽 장군의 안장을 극렬 반대한 것이 “놀랍지
않다”는 반응도 있다. 그가 이미 지난해 광복회장이 됐을 때부터 정치적 중립을 어기는 발언 등으로 각종 잡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는 취임하고도 북한 찬양 등 내란선동죄로 유죄 확정 판결을 받고 수감 중인 이석기를 옹호해 내부 상벌위원회에 제소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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