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25, 2012

한반도 분단의 현장 판문점 관람































안내 뻐쓰를 타고 1번 국도를 달려 말로만 들어왔던, 민족 분단의 현장 "판문점" 주차장에서 새까만 군대 후배벌 되는 안내병으로 부터 설명을 들으면서 관람은 시작됐다.

우리 일행은 모두가 재향군인회 해외지부의 회장들로 이번 본국에서의 모임에 참석하고, 안보차원에서 이곳을 찾은 역전의 용사들이다.

원래 1번 국도는 목포에서 시작되여 북쪽의 신의주까지 연결된 도로라고 한다.  이 도로는 오래전 "정주영"현대구룹 창시자께서 소 1000마리를 직접 이끌고, 이곳을 통과하여 북쪽으로 넘어갔던 도로였었다라고 설명을 부연해 준다.

이에 앞서 판문점에 도착하기전 뻐스창으로 멀리 내려다본 두개의 국기 계양대가 커다란  Flag 를 펄럭이면서 서로 '기' 싸움을 하는것을 본기억이 떠오른다.
안내자의 설명에 따르면, 가까이 보이는 마을은 '대성동', 우리 조국쪽에서 관리하는 마을이고, 건너편쪽은 북쪽에서 관리하는 '기정동' 마을이라고 한다.  국기 계양대에 대한 설명에서 북쪽의 선전이 얼마나 허구에 차있는가를 금방 알수 있었다.  즉 기정동마을에 서 있는 국기계양대는 높이가 160미터, 거기에 매달린 flag는 무게가 230킬로그람, 조국 남쪽의 '대성동'마을에 있는 계양대는 높이가 100미터, Flag의 무게는 100킬로 그람 이라고 한다.  속빈 강정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세상사람들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북쪽의 참상인데, 이렇게 기를 쓰고, 남쪽보다 더 크고 높게 유지 하는 그목적이 어디에 있으며,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믿는다고 생각하는가?  계양대에 매달린 Flag는 비바람에 시달려 금방 망가지기 때문에  25일마다 바꾸어 달고 있으며, 그비용은 관할 구역인 파주군에서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평화의 집을 통해 말로만 들어왔던 38선이 지나는곳에 아담하게 서있는 6채의 가건물이 보이는곳에 안내 됐다.   지붕의 색갈이 3동은 Green이고, 다른 3동은 Silver였다.  3동은 조국대한민국의 재산이고 다른 3동은 북쪽의 재산이라고 했다.   Green색의 가건물에서 군장성급들의 고위회담이 열렸었다고 하는 곳에 안내되였다.  주의 사항이 참으로 많다.  북쪽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권총을 뽑아들고 사격을 하는것으로 오인 할수 있기 때문이란다.

건물중앙에 회담용 테이블이 있고, 그가운데로 마이크선이 놓여 있다. 그곳이 바로 38선이라고 했다.  전에는 선을 넘어, 같은 건물안이지만, 북쪽 관활에 갈수없었지만 지금은 이건물안에서는 마음데로 움직일수 있다고 했다.  대신에 북쪽이 관리하는 건물에는 남쪽에서 들어갈수 없는, 협약아닌 협약을 맺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건물안에는 우리측 헌병이 독수리의 눈으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신체도 건강하고 믿음직 스러워 보여, 마음이 놓이게 해준다.  전에는 미군이 경비를 섰으나, 업무이관으로 지금은 완전히 우리군이 경비를 맡고 있었다.  유엔군 장성과 북측의 장성이 이 테이블에 마주앉아 협상이 시작되면 서로간의 인사도 없이 각자 독설이 포함된 할말만 토해내고 헤여지곤 했었던, 그현장에 지금 내가 서있다. 

북측의 판문각은 조용하고, 두명의 경비병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한병사는 Binocular 를 통하여 남쪽을 경계하고, 한병사는 부동의 자세로 서 있다.  왜 저쪽은 조용한가?라고 묻자, 안내병의 설명은 의외로 간단했다. 우리측도 마찬가지이지만, 관람객이 있을시에만 북적거린다고 한다.

미류나무사건을 설명해 준다.  내가 이민오던 그해에 있었던 도끼만행의 참옥함을 떠오르게 한다.  당시에는 판문점 공동구역안에서는 북측경비병과 유엔군 경비병들이 뒤엉켜 경비를 서고 있어  남측구역에 북측의 초소가 여러개 있었고, 남측또한 유엔군 초소가 북측에도 있었다고 한다.  북측지역에 있던 유엔군 초소와 바로 남쪽에 있는 유엔군 초소 사이에 큰 미류나무가 자라고 있어 두초소간에 시야가 가려 경비에 어려움을 겪자, 유엔군측에서 사전에 북측에 통고를 하고, 유엔군측의 경비중대장 '보나파스' 대위의 지휘하에 유엔측 경비병들이 나무를 자르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북측 경비병들이 나타나 항의를 하면서 중대장 보나파스와 Barret 중위를 도끼로 찍어 죽인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고 도망간 사건으로 당시에 한반도에 긴장을 초고조로 조성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후에 초소를 비워두고, 지금은 경비 카메리로 대체하여 경비를 서고 있다고 했다.   지금 계산해보니 벌써 37년이 흘렀다. 무상한 세월.....

지금은 공동구역 경비를 유엔군측에서 한국군에 2004년도 부터 이관하여 JSA구역은 한국군이 경비를 맡고 있었다.  어느면에서는 더 든든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전에는 양측 경비병들이 같이 경비를 했었다고 한다.  북측과 남측의 최가까운 경비초소는 약 25미터로 뻐스 두대의 길이만큼 간격을 두고 서로 응시하고 있다고 했다.

북측의 '기정동'마을은 2004년에 개성공단이 가동하기전까지는 선전용으로만 이용되여 주민들의 거주가 없었으나, 지금은 주민들이 살고 있는것으로 파악되고 있다한다.  아마도 남측의 '대성동'마을이 항상 주민들이 평화롭게 살면서 농사를 짖는 모습을 보고 태도를 바꾸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멀리서 보아도 겉모습 부터가 경직되여 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남측의 '대성동' 마을은 겉으로 보아도 모든게 풍부해 보였다.  주민들은 우선 정부에 세금을 면제받고 있다한다.  마을 주민들은 6/25 이전부터 살았던 주민들이 그대로 대를 이어 살고 있으며, 이곳에서 새로이 입주하여 살수 있는 자격은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결혼하게되는 경우에만 배우자가 외부에서 들어와 거주할수 있으며, 이곳 주민이라 해도 8개월 동안 대성동마을을 떠나 살게되면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고 했다.  단 외부에 나가 공부하는 학생들의 경우는 예외라고 한다.
주로 농사를 짖고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모두가 부자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각가정은 논 3만 평방미터, 밭 3천평이상을 소유하고 있어 년간 수익이 가정당 약 7천 내지 1억 5천만원 정도되며, 생산품은 모두 관할농협을 통해 팔린다고 했다.

판문점 휴계소 바로 오른쪽에는 북한이 파놓은 지하땅굴을 관람객들에게 관람시키고 있었다.
지하 깊숙히 북측에서 땅굴을 남쪽을 향해 파놓은 비밀 통로가 별견 됐을때 남한 전체가 떠들썩 했었지만, 지금은 관람객들에게 안보교육 훈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것 같아 든든했다.  북한 병사들이 고난에 시달리면서 굴착작업을 하는 Mockery가 보는 마음을 아프게 했다.  설명에 의하면 북측은 유사시 이통로를 이용하여 삼십분만에 일개 사단병력을 남파할수 있다는 것이다.  땅굴이 발견되면서 그들의 꿈이 얼마나 허망한짖인가를 전세계가 비웃고 있는가를 그들은 알고 있을까?
지하 땅굴이 한개가 아니고 발견된것만 여러개라고 하니.....

북쪽의 판문각은 오히려 남측의 통일의 집보다 더 반듯하게 지어놓았다.  여기서도 기싸움이 이어지고 있음을 본다.  그렇게 해서 뭘 얻을것인가?  바로 그뒤에는 굶어 죽어가는 주민들이 목에 넘길 풀뿌리를 찾아 민둥산을 헤메고 있는데.... 언제 이러한 비극이 끝날까? 

안내 경비병은 육군 신참내기 였지만, 아주 질서정연하게 설명을 해주어 이해도 쉬었지만,  자신있게 경비에 임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들 때문에 후방에서 국민들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감사해 하고 있을까?

도라산역사에는 몇년전 미국 대통령 Junior Bush께서 판문점을 방문하고 이곳을 방문하여 기념으로 짧막한 Rail조각에 서명한것을 진열해 놓은것을 보았다.  또 며칠전에는 서울에서 핵안보에 관한 세계정상들이 모여 회담을 한후, 오바마 대통령이 이곳 판문점을 방문했다는 설명도 있었다.  세계최강의 국가 원수들이 이곳을 가끔씩 방문했다는것은 그만큼 이곳이 지구상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그래서 신경이 쓰이는 곳이라는점을 알수 있었다.  도라산 역사안에는International Airport에서 custom clearance를하기위해 검색대를 지나는것 처럼 설비를 해놓고, 남과북이 합의 하여 남북간에 선로를 연결하여 처음 몇년 동안은  이곳으로 부터 개성공단까지 열차가 상징적으로 하루에 한두번 운행될때, 이곳 검색대를 이용했었다는 설명도 있었다.

지난해 중국, 홍콩, 마카오 그리고 타이완을 여행하면서 느끼고 부러워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들 4개 국가는 정치적으로는 다른 체제를 유지하고 있어 껄끄러운 관계에 있기도 하지만, 일반 국민들이 이들 나라를 여행하는데는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마음데로 드나들고 있는 현장을 보았을때의 기분을, 지금 이곳에서 되뇌이면서, 특히나 타이완과 중국은 서로 적대관계이면서 정치적으로 서로 비난하고 있었지만, 국민들은 합당한 여권을 소지 하면 마음데로 왕래를 하고 있음이 무척 부럽게 또 기억에서 떠 오른다. 감사.

Tuesday, April 17, 2012

친지부부들과 함께 남해안 일대 벗꽃 여행





































홍천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친지부부는 새벽같이 짐을 꾸려 서울에서 준비하고 있는 우리 부부, 숙자부부 그리고 또 다른 두친지들한테 달려왔다. 지난해에도 그랬드시 이번에도 친지분들은 우리를 위하여 남해안 섬진강과 지리산 그리고 하동일대를 둘러 보러,일행 모두가 홍천친구의 차에 몸을 싣고 복잡한 서울거리를 빠져 나가기위해 한남 대교를 거쳐 경부고속도로위를 달렸다. 이른 아침의 상쾌한 공기맛을 느낄것 같다.

지리산은 여전히 우리를 반긴다. 뱀사골, 피아골, 노고단, 그리고 천혜사입구를 거쳐 지리산횡단을 하면서 펼쳐지는 파노라마는 우리일행을 유혹하고도 남는다.

피아골을 지나 조그만 이름모를 마을에서 '고로쇠'물을 사용하여 간장을 담그는 광경도 목격했다. 고로쇠물은 지난 2월초부터 추출하기 시작하여 아직도 채취하고 있었다. 고로쇠물은 캐나다에서 Maple Syrup을 만들기위해 채취하는 Sap(수액)과 같은 것 같으나, 열심히 간장독에 고로쇠물을 퍼붓는 주민의 말로는 단풍나무와는 다른 나무에서 채취하는것이라고 설명도 해준다. 고로쇠물의 맛은 Sap과 비슷했다. 감칠맛나는 간장맛을 볼수 없음이 아쉽기만 하다.


쌍매화 마을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북적인다. 길가에서는 갓 만들어온 쑥떡을 콩고물에 묻혀서 구경하고 있는 관광객들에게 Packing 하여 팔기도 한다. 그옆에는 길가에 좌판을 벌려놓고 산에서 채취해온 봄나물들을 팔고있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면서, 옛날 고향생각을 하게 했다. 쌍매화 농원의 주인은 한국에서는 유명한 인사가 되여 TV에 많이 출연하여 이곳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것 같았다.

인터넷을 통하여 '오늘만 같아라'연속극에서 거만하고 깍쟁이 엄마로 출연하고 있는 Talent 견미리씨가 이곳에서 촬영을 마치고 언덕을 내려오면서 우리 일행과 마주쳤다. 뜻밖에 배우를 보다니.... 화면에서는 몸집도 큰 여인으로 보였었는데, 실제로 옆에서 보니 자그만한 체구에 중년의 여인으로 빈틈이 없어 보이는 암팡진 여인으로 보였다. 같이 사진 한컷하자고 제안 했더니, 웃으면서 같이 사진촬영을 해준다. 캐나다에서 온 교포인데 '오늘만 같아라'연속극을 잘 보고 있었다라고 얘기 했더니 화사하게웃는다. 역시 배우는 아무나 못하게 되는가 보다. 그렇게 깍쟁이 엄마가 '복희 누나'에서는 아주 시골스런, 시어머니를 정성으로 모시고 사는 착한,아낙네 역활을 하는것을 보면서.....

섬진강변을 따라, 활짝 만개한 Cherry blossom은 포근한 겨울 날씨에 사뿐히 내리는 함박눈이 하늘에서 내리는것 같은 착각이 들정도로 나무에서 떨어지면서 흩날린다. 분명 봄이 오고 있다는 신호인것 같다. 이상하게도 남쪽지방 어디에서나 길가에는 벗꽃나무들로 꽉 들어서 있다. 그옛날 내가 고국에서 살때는 벗꽃나무는 일본사람들의 꽃이라 해서 진해 군항제에서나 겨우보게 되는 정도로 희귀 했었는데.....

변산반도를 거쳐 새만금 방파제위로 뚤린 군산까지의 30킬로가 넘는 방파제위를 달리면서, 인간의 힘은 그능력이 무한정임을 느끼게 하고도 남는것을 깊이 느꼈다. 몇년전 이곳을 방문했을때는 아직 일부구간이 완성되지 못하여 중간쯤 달리다 다시 부안쪽으로 되돌아왔던 기억도 난다. 자연환경 훼손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매일 데모해대는 환경론자(?)들 때문에, 국책사업이 중단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그때는 난무 했었다.
방파제위를 달리지만 그끝이 나오지 않는것 같은 착각이 든다. 옛날에는 부안에서 군산을 갈려면 자동차를 타고도 하루가 걸렸었지만, 이제는 불과 20여분안에 해결된다.

논개의 사당도 구경했다. 강가의 누각에서 술향연이 벌어지고 있을때, 기생 논개는 일본적장을 껴안고 수천길 낭떨어지 강물속으로 떨어져 최후를 마치고 적장을 죽인 애국자였던것은 알고는 있었지만, 새로운 사실은 그의 성(Family name)이'주'씨였고, 그는 원래 기생이 아니었었다고 한다. 나라를 일본야만인들에게 빼앗긴것을 안타까이 여겨, 당시 진주군수였던 남편의 양해를 얻어 기생으로 변장하여 적장과 술좌석을 벌이다가 장열하하게 최후를 마쳤다는 역사속의 얘기는 나로서는 처음듣는 애국자의 모습을 보는것 같았다.

일행 모두는 흘러가는 시간들을 아쉬워 하는것 같았다. 이제 헤여지면 언제 다시 또 재회를 할수 있을것인가(?)에 대한 애틋한 아련함으로, 즐거워하는 한편으로는 어두움이 되살아나는것을 본다. 몇시간 후면 우리는 짐을 꾸려 다시 수만리 멀리 떨어져 있는 토론토로 되돌아 가야만 한다. 왜 떨어져 살아야 하는가?

차창밖으로 멀리 보이는 전주 근교의 마이산이 여러 형태의 모습으로 시야에 들어온다. 다시 또찾게 될것이라는 기약이없는 우리 일행의 이번 여행길을 저 마이산은 마치 훤히 꿰뚫고 있는것 같이 보인다. 두귀를 쭝끗하게 세우고 이상한 소리를 들을려고 하는 한마리의 말이 움직일려고 하는것 같은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