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November 25, 2011

Occupy Toronto의 데모가 해결책이 될수 있나? 이것이 문제다. 11월25일, 2011






Occupy Toronto의 데모가 해결책이 될수 있나? 이것이 문제다. 11월25일, 2011

결론부터 얘기하면, 절대로 그들의 데모에서 해결책은 안나온다. 오히려 그들이 옹호한다고 하는 시민들, 즉 납세자들에게 부담만 줄뿐이다. 그들은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시간에 일을 하면 더 낳은 수입을 올릴수 있을텐데.....

수요일, 토론토 경찰은 St.James Park에 진입하여 시위꾼(Protesters)들을 해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시직원 100여명도 이에 동참하여 시위꾼들이 쳐놓은 텐트들을 철거하고, 그들의 물건들을 옮기기 시작했다고한다. 경찰의 해체 작전으로 지난 10월 15일 부터 시위꾼들이 점령하여 그들의 Base로 이용되였던 공원은 다시 제모습을 찾아, 시민들이 이용할수 있게 될것이라고 한다.

시위꾼들중의 한명인 Williams는 물러나면서 "Occupy Movement는 이곳에서 쫓겨난다고 해서 끝난게 아니다. 우리의 단결력은 매우 강하다. 지구촌의 경제적 편중현상을 개선하기위한 운동은 계속할것이다" 라고 수요일 언급했었다.

목요일에는 수백명의 시위꾼들(Protesters)은 토론토의 금융가를 행진하면서 그들의 다음행동작전을 토의 하기도 했다. 그들은 지역사회의 여러 구룹들을과 만나서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당국의 허가를 합법적으로 얻을 계획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토론토시장 Rob Ford는 경찰의 철거작업중에 시위꾼들과 경찰간에 마찰이 없이 평화적으로 진행된데 대해, 시위꾼들과 경찰에게 고마움을 표시 하면서, 앞으로 시는 절대로 시위꾼들이 시공유지를 불법점령하는것을 좌시하지 않고 즉각대응하겠다고 다짐 하기도 했다. 시위꾼들이 Queens Park에서 자리를 잡을려고하자 경찰이 즉각 투입되여 이를 저지하고 현장에서 퇴거 시켰다.

그들이 지난 40일간 불법으로 점거사용했던 St. James Park의 잔디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대신에 진흙만이 남아 있어 이를 보수하는데 시당국은 약 $25,000달러의 예산을 투입하여 잔듸를 덮게 될것이라고 한다. Occupy Toronto시위데가 이곳을 근거지로 하고 데모를 할때, 3개의 커다란 Yurt텐트를 제공해주었던, 온타리오 공무원 노조가 비용의 일부를 부담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결국 이들의 행동으로 발생한 Damage를 아까운 시민들의 세금으로 고치게 되는 셈인데, 이렇게 한다고 해서 전지구를 뒤덮고 있는 Occupy Movement가 토론토를 포함한 지구촌의 여러곳의 직업전선에서 발생하는 부의 편중현상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수 있는가?의 여부를 생각해 보아야 할것 같다.

이 Occupy Movement는 어쩌면 전세계적으로 퍼질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나 한국같은데로 옮겨지면 사회는 더욱더 혼란속에 빠지게 될것이다. 한국사람들의 성향으로 봤을때, 여기서 하는것 처럼 평화적으로 하기 보다는 적개심에 불타는듯한 원수를 향해 돌진하듯할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오타와, 몬트리얼, 그리고 뱅쿠버에서 진행중에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시민들의 호응을 얻지는 못하고있다. 그만큼 현실성이 없기 때문일것이다.

수백명의 시위꾼들은 토론토의 금융가를 목요일 행진 하면서 그들의 다음 행동 작전을 토의 하기도 했다. 그들은 지역사회의 여러구룹들과 만나서, 새로 사용하게될 장소모색을 하되 이번에는 당국의 허가를 얻을 계획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들이 40일간 불법점거사용해 왔던 St. James Park의 잔디는 흔적도 없다시피 뭉개졌으며 진흙만 남아 있어, 이를 보수하는데 시는 약 $25,000달러의 시민들이 납부한 세금을 투입해야 한다.

Occupy Toronto 데모대가 이곳을 근거지로 하고 데모를 할때, 3개의 커다란 Yurt 텐트를 이들에게 제공한적도 있던 온타리오 공무원노조가 복구비용일부를 부담하겠다고 나섰다.

Occupy Toronto의 시위는 지난10월 15일 시작됐지만, 그시초는 지난 9월 17일 미국의 뉴욕시에 있는 Wall Street에서 시작된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경제적 부의 편중, 대기업의 횡포로 약자에게 미치는 영향 그리고 거대 기업들이 Lobbysts들을 기용하여 그들의 기업정책이 정부 정책에 반영되도록 로비 할동하는것을 성토하는 것이었다.

지난 10월15일 아침 10시경 시위꾼들은 맨처음 King St.와 Bay St.부근에서 집결하여 St. JamesPark으로 평화적 시위를 하면서 이동하여 그들의 주장이 전달 되기를 바랐었다. 처음에는 1,000 -1,500명이 참석했었고, 그중에는 NDP 출신 MP Peggy Nash, 온타리오 노동연합대표 Joel Duff, 온타리오 우편노조위원장 Fred Hahn도 동참했었다. 해가 저물자 데모꾼들의 규모는 불과 수백명으로 줄어 들었고, 물론 위에 언급한 인물들도 사라졌었다.

점심시간에 캐나다우편노조원들은 시가행진을 하면서 시위군중과 만나 Bay St.초입에 있는 TD Bank로 다섯명이 진입하려 했으나 경비원들에 의해 들어가지 못하고 밀려났었다.

11월2일 언론이 이들의 점거로인한 시당국의 반응을 보도한후 인근에서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던 Patrick McMurray씨는 "데모꾼들은 불법으로 시민공원을 점령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식당을 찾는 고객들이 데모꾼들 때문에 행여나 피해를 입게 되지는 않을까?라는 염려로 발길을 뚝 끊어 생계에 막대한 지장을 주고 있다"라고 성토했었다. 이에 대해 시장 Rob Ford는 "이들의 불법점거가 평화적이지 않다고 결정되면, 공원을 점거하고 있는 시위꾼 개개인을 몰아낼 구상을 하고 있읍니다."라고 이메일까지 보냈었다.

11월9일 이들이 점령했던 공원잔디를 보수하는데 $25,000달러, 그리고 겨울이 닥치기전에 Drain시켜야 하는데, 만약에 이시설이 작동이 안되면 $40,000달러를 들여 스프링쿨러용 장비와 파이프를 보수해야 한다고 한다.

11월11일 Toronto Star의 기자가, 시민들의 불만이 초고조에 달했고 대모꾼들을 Park에서 몰아낼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대답을 해 주시라고 물었을때 "시민들의 불만은 과장된 것이며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것이며 우리의 법률가들이 이건에 대해 지금 해법을 찾고 있다"라고 응수 했었다.

11월 12일에는 CBC뉴스가 시위대일부가 이번에는 Queens Park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라고 보도 했었다.
11월 15일에는 경찰과 시조례집행인부들이 St. James Park에서 camping하고 있는 시위대들에게 철수 명령이 적힌 전단지를 배부하기 시작했었다.

11월21일에는 온타리오 최고법원의 "불법점거농성은 위법이다"라는 판결이 있은후 경찰과 시조례집행직원들은 "불법점유" 전단지를 인근의 교회 부지를 점거하고 있는 camper들에게 나누어 주었었다. 그러나 전단지 내용은 시공원과 교회의 부지에 대한 정확한 구분이 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위대는 강제해산될것에 대비하여 그들 나름데로의 저항진지를 더 굳고 만들었다.

11월 23일 결국 큰 저항없이 커다란 Yurt 텐트를 포함하여 철거는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케네디언 은행협회는 회원들에게 "최악을 대비하고, 최선을 찾는 희망을 잃지 말자"라고 하면서도, 다운타운의 은행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경비팀들을 보강하는 조치를 취했다.

TD 은행장 Ed Clark은 시위꾼들에게 해줄말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내가해주고 싶은 말은, 끝까지 밀고 나가기를 바라지만, 사람들이 말하기를 당신네들은 해결책을 갖고 있지도 않고 우리 또한 그해결책이 없다" 만약에 해결방법이 있었다면 이렇게 데모꾼들이 데모를 할필요가 있겠는가? Wall St.나 Bay St.를 점거하고있는 사람들로 부터 충분한 대답을 기대하는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할일을 할 뿐이며 이방법이 해결책으로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어떻게 대다수 사람들의 시선을 끌수 있으며, 계속적으로 압력을 가할수 있는가를 찾아내야 할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이문제에 대하여 토론하고 해결책을 찾을수 있을까?를 찾아야 한다. TD은행장 Ed. Clark씨의 연봉은, 2011년도 11월 발행된 Toronto Life잡지에 따르면, 두번째로 높은 $11,426,795.00라고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정치체재로는,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사회주의든 완전한 해결책은 없는것 같다. 해결책에 접근하는 방법은 공공시설을 불법점거하고 농성하는 그시간에 일터로 나가 열심히 일하여 한푼이라도 벌어들이는길이 사회구성원 모두를 위한 최상의 방법임을 현실적으로 받아 들여야 할것이다.

http://en.wikipedia.org/wiki/Occupy_Toronto

Monday, November 21, 2011

낙엽을 밟으면서 Stoney Creek Trail Walk. Nov.19,2011






















낙엽을 밟으면서 Stoney Creek Trail Walk. Nov.19,2011

한낯인데도 햇볕은, 시간적으로는 정오인데도, 서산에 기울어지는 햇볕처럼 비스듬히 누워 있는것 처럼 나목사이를 뚫고 들어와 나와 우리 일행의 발걸음에 맞추어 같이 Walking 한다. 수북히 쌓이 단풍나무낙엽을 밟는것도 운치가 있다라는것을 느끼기 보다는 이제 겨울을 채촉하는구나라는 신호로 가슴속에 와 닿는다. 마음을 더 무겁게 하는것은 캐다다의 긴겨울을, 완전히 발가벗은채, 똑바로 하늘을 향해 뻗은 단풍나무들이 추위에 떨고 그리고 북풍한설에 휘둘리면서 울어대는 소리를 몇십번, 아니 몇백번이나 반복해서 들어야, 새봄의 전령이 오는 소리를 듣게 될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는, 오늘의 산행길이 조금은 버거워지는 심정이다.

한달에 한번씩 걸었던 Trail Walk을, 겨울철동안에는 매주 걷기로하고 시작한 이후 오늘이 두번째이다. 생각보다는 많은 동호회원들이 참석하여 움추려 들려고 하는 마음을 떨쳐내고, 신체단련을 위한 Trail Walk을 매주 하게된데 모두가 만족해 하는 표정들임을 보면서 결단을 잘 내렸다는 생각을 했다. 연장자 되시는 회원님의 오늘의 무사한 산행일정을 염원하는 간구의 Pray를 감사해 하면서 일행은 첫발을 옮기기 시작했었다. 어깨에는 각자의 준비물과 점심이 들어있는 Back Pack들이 지워져 있고, Grey 색갈의 나목들만 뾰쪽하게 들어서 있는 Trail과 Color match라도 한듯 회원들의 옷에서 풍겨져 나오는 자연의 색갈이 잘 어울리는것 같다.

평상시보다 조금 늦게 항상 모이는 Humber bay Park West를 떠나 QEW를 약 50분을 달려 이곳 Battlefield Garden 주차장에 도착했었다. Trail Walk도 좋지만, 토요일 아침의 한가한 QEW를 달리면서 왼쪽으로 Lake Ontario의 바다같이 넓은 푸른 물결을 보는것도, 오른쪽으로는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산등성이의 숲과 그밑에 어우러져 있는 건축물들을 보는것도 운치를 더해주었었다. 멀리 호수위에는 큰 화물선이 마치 조그만 종이배처럼 아스라히 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배가 지나갈 5대호수의 Route를 생각해 보기도했었다.

계절에 걸맞지 않게 넓은 공원의 잔듸는 약간의 갈색을 포함한 초록색의 싱싱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공원끝자락에는 나이아가라쪽에서 부터 오기 시작하여 북쪽의 Sarnia를 거쳐 다시 더 북서쪽을 통해 Vancouver로 연결된 Canadian Pacific 철도가 우리를 반기는것 처럼 쭉 뻗어있는 철길을 넘어 발길을 다시 오늘 걷게될 Trail을 따라 숲속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우리는 나이아가라쪽을 향해 나있는 Trail을 걷기 시작했다. 산등성이의 중간쯤에 나 있는 Trail을 걷는 신발 밑으로는 수북히 쌓인 단풍낙엽들이 괴로운듯 한발짝 뗄때마다 바스락 소리를 끝없이 질러댄다. 시간이 흐르고 겨울이 깊어지면서 이러한 바스락 거리는 신음 소리도 하얗게 싸인 눈속으로 파묻히고, 대신에 그위에 발걸음을 내디딜때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힐 것이다.

가파르지 않게 이어지는 숲속의 Trail Walk을 나는 너무나 좋아한다. 약 3주전 고국방문시 광주광역시에 있는 무등산 등반을 Lunar와 함께 했었다. 고국에서의 등반은 시작점부터 산정상까지 가파른 계곡속의 길을 끊임없이 발걸음을 언덕을 향해 내밀어야 했다. 무릎의 관절이 무척 힘들어 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등반은 계곡사이를 때로는 약간씩 오르락 내리락할때도 있으나 대부분 평평한 숲속을 걷기에 무릎의 관절에 큰 부담없이 오랫동안 걸을수 있어, 나와는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으로 걷기를 좋아하고 사랑하기에 몇십년을 계속해왔고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다. 여름에는 강한 햇볕을 울창한 숲이 가려주어 땀을 식혀주고, 겨울철에는 발가벗은 나목들은 자기들도 추울텐데, 이를 개의치않고 앞장서서 세찬 북풍을 막아주어 우리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그맛에 Trail Walk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앞과 끝이 보이지도 않는 긴 철도화물열차가 우리일행이 걷는 방향과 반대로 북쪽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우리가 걷고 있는 Trail에 있는 나목 사이로 지나친다. 가축도 실려 있을테고, 곡물도 실려 있고, 또 광석을 비롯한 온갖 필요한 것들이 실려가고 있을 것이다. 덜커덩 덜커덩 마치 국악장단이라도 맞추듯한 소리가 끝없이 이어진다. 회원들의 눈길이 쏠린다. 잠시 멈추어서서 이마의 땀도 닥아 내면서, 어느 회원은 손가락을 짚어 가면서 숫자를 세는것 같은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대충 나도 헤아려 보았는데 150량 이상은 되는것 같다. 땅이 넓은 대륙이라서 기차도 이렇게 길게 연결시켜 다니는가 보다. 그래서 우리 회원들의 마음도 호수와 같이 넓은가 보다. 서로 이해하고 도와주고, 밀어주고 하는 행동들이 말이다.

소비한 에너지를 보충하는 점심은 꿀맛이다. 같이 둘러앉아 각자 준비해온 음식을 나누어먹는 이맛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이해못할, 우리회원들만이 느끼고 자랑스러워하는 이시간 때문에 Trail Walk에 참석한다고 하는 어느 회원의 말은 그의미가 매우 깊은것 같았다. 사랑과 Fellowship을 생각이 아닌 행동으로 체험하는 이시간같은 기회를 어디서 찾을수 있을까? 나는 Trail Walk이 아니고는 별로 없을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회원들을 더 깊이 알게되고, 나를 포함한 회원들 또한 나와 회원들간에 더 깊이 알고.....살아가는 얘기들을 서로 나누면서, 장점은 더 빛나게 북돋아주고, 약한점은 서로가 이해하므로써 우의와 신뢰는 더 깊이 쌓여 가고 있음을 오랫동안 보아왔기에 앞으로도 나는 아니 단촐한 우리회원들은 계속 Trail Walk을 걸으면서 사랑할것이다. 오늘 산행은 또다른 삶의 의미를 담뿍 심어주었다.

집으로 향하는 차량들을 잠깐 세우고, 맥도날드에 들려 구수한 커피향을 뿜어내는 커피한모금을 목에 넘기면서, 못다한 얘기들을 나누는 운치는 피곤함을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게하는 마력(?)을 갖고 있는것 같다. 감사.

http://www.youtube.com/watch?v=MozVf-P2a2A

http://www.youtube.com/watch?v=amSTrD5AdQM

Friday, November 18, 2011

Picton, Ontario에 있는 Mr. Tyler Lester씨의 농장 방문-Nov.4/2011.





















Picton, Ontario에 있는 Mr. Tyler Lester씨의 농장 방문.

Tyler씨가 운전하는 Combine기의 운전석에 올라가기위해 기계에 부착되여 있는 ladder를 타고 한발짝 한발짝씩 떼어 한참동안을 헤맨후에 그의 운전석 옆자리에 올랐다. Nepal 여행시 코끼리등을 타고 정글 Tour를 할때느꼈던 굉장히 높다라는 느낌을 지금 또 운전석에 앉아 느끼고 있다. 우리 부부가 농장에 들어서는 광경을 보면서, 그는 Combine을 멈춰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4개월만의 재회를 반가히 맞아 주면서 다시 커다란 Combine 기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끝도 보이지 않게 넓은 옥수수밭을 휘젖고 다니면서 완전히 다 dry된 옥수수대에 아직도 그대로 매달려 있는 옥수수를 탈곡하고 있는 중이었다. 운전석에서 내려다 보이는 옥수수들 사이로, Combine의 앞에 바닥에 매달린 일곱줄이 넘는 Rake역활을 하는 뾰쪽한 Fork모양의 기구들이 지나가면서 옥수수 알맹이만 별도로 흡입되여 옆에서 속도를 마추어 따라오는 큰 탱크추럭에 저장시키고, 나머지 옥수수대와 옥수수를 털고난 cone들은 분쇄되여 다시 그대로 땅바닥에 버려져 다음해 비료로 사용되고 있었다. 모든 수확과정이 기계안에서 단번에 처리되는, 내가 보기에는 신기하기도 했지만 웬만한 Tractor trailer이상으로 큰 괴물같이 보이는 그자체였다. 얼른 보아도 농장안에 있는 장비값만 따져도 one million Dollar는 넘을것 같았다.

이렇게 수확된 옥수수는 동물의 사료용으로, 또는 Corn Oil로 변해 식탁에 오르기도하고, 메타놀 알코홀로 변해 우리가 발처럼 이용하고 있는 자동차에 들어가는 Gas에 첨가제로 사용되고 있다고 했다. 단순히 입안에 집어넣는 양식의 일부로만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사용처가 다양함을 오늘 처음 알게됐다. 40톤 추럭에 옮겨실은 옥수수는 곧바로 한시간 이상을 달려 Trenton에 있는 공판장에 납품된다고 했다. 오늘은 하루종일 옥수수 타작을 하게 된다고 설명해 준다.

그의 농장은 약 800 에이커로 옥수수, 콩, 감자, Pea, Wheat, Barley, 가축의 먹이로 쓰이는 건초들을 재배하고 또 한편으로는 내가 여름철이면 Cottage에서 캠핑객들을 상대로 팔고 있는 Fire Wood를 생산하고 있다고 설명해 줬다. 앞으로도 농장은 계속 확보할 생각이라고 했다. '농부'하면 힘들게 육체적 노동이나 하는 Obsession을 했었던 나의 무지함을 오늘에야 깨달았다. 모든걸 다 기계조작으로 하기 때문에 손이 거칠어질 염려도 흔치 않았고, 농사일을 할 노동력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할 필요도 없었다. Tyler와 그의 Uncle은 계속해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와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농장을 나왔다.

Tyler의 아버지 Doug씨를 이번 여름에, 그는 Fire Wood Supplier로 나는 그의 고객으로, 시골 카테지에서 처음 만나 인연을 맺게 됐었다. 처음에는 그가 Wood supplier인줄 알았었는데, 배달을 해 가면서, 차츰 그의 아들 Tyler가 운영하는 농장에서 시간이 날때 마다 도와주고 있고, 그자신은 커다란 빌딩 constructing Firm을 운영하고, 그의 고객은 주로 연방,주정부임을 알게됐었다. 그가 부리고 있는 현장 노동자는 약 150명정도라고 하는데, Fire Wood를 팔기위해 직접 추럭을 몰고 와서, 손수 unloading을 하다니....처음에는 얘기를 안해주니 모르고 지내다가 시즌이 끝날 무렵에야 자신에 대한 얘기와 아들 Tyler에 대한 얘기를 해주어 알게됐고, 이제는 친구가 되다시피한 것이다. 농장을 방문하게된 동기도 우연이 이루어 진 것이다. Supplier와 고객의 관계로 처음 Cottage에 그들이 추럭에 Fire wood을 싣고 왔을때,아버지와 아들인 Tyler그리고 십대소년 셋이서 와서 Unloading할때 그들을 보면서 느낀점은, 지난번 Supplier를 연상하면서, 이들도 나무를 팔아 힘들게 살아가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그런 나의 생각은 이번 농장방문으로 깨끗히 지워졌고, 이들이 대농장주이며, Fire wood 판매는 일종의 Side job정도로 하고 있음을 알게됐었다.

시즌이 끝나갈 무렵, Lunar가 메주콩에 대한 얘기를 했더니, 자기 농장에서 많이 생산되고 있다고 했다. 수확이 끝나면 콩 서너백을 사고 싶다고 했더니 농장방문을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오히려 주문했다. 즉석에서 수확이 끝날 즈음인 11월초쯤에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했었고, 그약속을 우리 부부는 이행한것이다. 토론토에서 약 3시간을 달려, Picton 그의아들 농장에 가까운곳에 있는, 만나기로 했던 Mac's Milk에 약속시간에 마추어 도착했더니 그는 벌써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운 재회의 인사와 Hug를 하고 우리는 그의 차를 뒤따라 한참을 달려 집에 도착했었다. 아담한 시골 전형적인 집이었는데, 농장의 개념은 전연 없었다. 차에서 내린 그는 '여기가 내가 사는 집이다. 여기에 네 차를 주차 시키고 내차로 농장으로 같이 가는게 좋겠는데..' 그렇게 해서 그의 Pickup 추럭을 타고 달려간곳이 그의 아들 Tyler가 일하고 있는 농장이었었다.

그는 자랑스럽게 그리고 친절하게 가족관계를 얘기해 주기도 했다.
그는 두아들이 있는데, Tyler는 큰 아들이고, 둘째 아들은 지금 Ottawa대학에서 환경관련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고 했다. Tyler는 정식으로 학교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려서 부터 그가 자진하여 집에서 학교과정을 그의 엄마로 부터 배워 일찍이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고, 남은 시간에는 친척들의 농장에서 일하면서 벌은 돈을 모았다가 조금씩 농장을 사들이기 시작하여 현재 그가 소유주가 됐다고 했다. 그이 나이 올해 33세로 이른 봄에 첫아이를, 그에게는 손자를 보게된 것이다. 원래 그의 가족은 토론토시의 서쪽에 있는 Finch와 Weston지역에서 살았었는데, 그가 아직 Teenager일때 그의 부모를 따라 가족 전체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아왔다고 한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농부로 살아온 집안의 딸과 결혼했고, 처가쪽과 아버지 형제들이 그후에 이곳으로 이주하여 부락 전체가 이제는 그의 집안 사람들로 꽉 차있다시피 살고 있는 농촌이라고 했다. 가족관계가 매우 강하여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했다.

이번에 들린곳은 그의 장인 장모가 살고 있는집이었다. 곱게 늙은 노부부가 우리를 반겨준다. 집안은 단촐하면서도 깨끗했다. 그분들은 지금은 은퇴하여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Doug이 그의 장인장모에 대한 설명을 하는 대목중에서 'Pumpkin 대상'을 받았다는 얘기에 귀가 번쩍 뜨였다. 해마다 토론토에서 열리는 "Royal Winter Fair"에서, 1990년대 중반에 출품한 그분들의 호박이 특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말이 떨어지기기 무섭게 장모는 부엌의 옆방으로 가서 커다랗게 만들어 놓은 확대된 신문기사를 들고나와 보여주는게 아닌가. 특상을 받은 호박과 같이 찍은 사진 그리고 당시의 기사 내용이었다.

장인양반의 설명이 시작됐다. 이렇게 큰 호박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호박넝쿨이 자라면서 꽃을 피우면, 암컷,수컷의 꽃봉우리를 나비나 꿀벌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봉해놓고, 활짝핀다음 인공수정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비와 꿀벌들은 이곳 저곳을 헤매고 다녔기 때문에 여러잡종의 꽃가루들이 묻어있어 순수혈통의 결실을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교배가 된다음 부터는 다른 꽃봉우리들이 자라서 또다른 호박이 매달리지 못하도록 전지하고, 하루에도 열번이상씩 물을 계속주고, 호박이 자라고 있는 주변에서 반경 약250야드에는 아무런 다른 식물이나 잡풀이 자라지 못하도록 관리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공을 들여 키운 호박이 탄생하여 일등상을 받게 된것이라고 했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큰 호박속에는 씨(Seed)가 겨우 10개정도밖에 없었다고 한다. 일등상을 받은후 멀리 유럽에서 이씨를 구하겠다고 해서 한알에 약 $100.00씩을 받고 팔았었다고 한다.

Tyler의 집에도 들렸다. 그곳에는 Doug의 부인이자 Tyler의 엄마가 집을 지키면서 아이를 보살리고 있었다. 젊은 부부가 열심히 일하고 있기에, 여기서도 엄마는 손자 돌보기에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토론토에서 상당수의 친지들이 손자손녀들 돌보는데 하루 일과를 다 보내는 모습을 연상히게 해주었다. 여느 아이들과 다르게 일찍부터 Tyler는 농장쪽에 눈을 떠서 지금은 젊은 나이에 대 농장주가 된 아들을 엄마는 대견해 하는 모습이었다.

이번에는 약 40여마리의 젖소들이 자라고 있는 농장을 보여 주었다. 주로 가족들이 마시는 우유를 이곳에서 공급받고 있다고 했다. 그옆의 단풍나무숲에서는 Maple Syrup 수액을 채취하는 가느다란 Pipe들이 각나무마다 연결되여 있었다. 가느다란 파이프들은 진공상태에 있는 중앙의 큰 Pipe에 연결되여 수액이 그곳을 통해 큰 저장통에 모여지고, 고온의 가마솥같은곳에서 오랫동안 끓여지면, 식탁에 오르는 Maple Syrup이 된다고 했다. 이러한 제조공정은 주로 3월 초순에서 중순사이에 이루어지는데, 그때 다시 방문하면 전과정을 잘 보여 주겠다고 약속까지 한다. 같이 Trail Walk을 하는 친지들과 협의하여 기회를 만들어 볼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옆의 농장에는 아직 타작이 미쳐 안되고 있는 콩밭이었다. 그옆에는 40톤규모의 추럭이 주차되여 있었고, Doug가 그위로 올라가서 container안을 들여다 보더니 empty라고 하면서 허전해한다. 그안에 콩이 있었으면 꺼내서 우리에게 더 줄려고 했었다고 했다. 아까 처음 그의 집에 도착했을때 3개의 조그만 Bag에 들어있는 콩을 주어, 좀더 필요하다고 했었던 말을 기억했었기 때문이었다. 몇시간만 기다리면 Extra콩이 가능하다고 설명해준다. 토론토에 가면 알고 지내는 친지들과 조금씩이나마 나누고 싶어서 였었는데, 적으면 적은데로 나누어 맛을 보는 그의미가 중요한것 아니겠는가.

Fire wood를 만드는곳에 들렸다. 단풍나무숲에서 수액을 빼고, 또 잘 자라지 못하는 나무들을 베어서 Fire wood를 만들어, 이웃농가들집에 겨울철 난로에 땔감으로, 추럭단위로 공급하고 있다고 했다. 벌목된 나무는 야적장에 일년이상을 방치해서 말린다음 공급하기 때문에 화력도 좋고 연기가 없이 잘 탄다고 했다. 우리가 공급 받았던 나무들은 wrapping Machine을 이용하여 포장해서 우리에게만 공급해준 것이라는것을 알았다. 그래서 사용해본 Camper들이 좋은 Fire wood였다고 애기를 해준 이유를 알것 같았다. 전에는 인근에 있는 Sand Bank Provincial Park에도 공급 했었는데, 온주에 있는 전체 Provincial Park이 한 공급업자로 부터만 받기에, 거래가 끊어졌단다.

바쁜 시간을 내주어,3시간 동안 농장을 구경시켜준 Doug에게 감사했다. 내년의 Camping Season에 그는 공급업자로 나는 그의 고객으로 다시 만날때까지 안녕을 고하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감사.

Thursday, November 17, 2011

Lake Ontario와 Erie를 연결해주는 Welland Canal탐방

































산같이 큰 Cargo Ship들이 Atlantic Ocean으로 부터 St. Lawrence River를 항해후 Lake Ontario를 지나 약 100미터의 낙차가 있는 Lake Erie로 올라가기위해서는 8개의 갑문(Lock)이 있는 Welland Canal을 거쳐야 한다. 8개의 Locks중 St.Catherine에 있는 3번째 Lock에서 산같이 큰 Freight Cargo ship이 갑문을 통과하는 장면은 웅장했다. Lake Ontario에서 갑문안으로 들어온 산같은 화물선은 수면으로 부터 15 미터가 넘은 갑문벽에 파묻혀 배의 갑판은 눈아래 밑으로 아스라히 내려가 있다. 배의 갑판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조그마하게 보인다. 이제 온타이오호수쪽의 갑문이 닫혀지기 시작한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갑문안에는 반대편 윗쪽 문쪽에서 파이프를 타고 흘러 들어온 물이 갑문에 채워짐과 동시에 배는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산더미 하나가 새로 탄생하는것을 보는것 같았다. 약 13미터높이의 물이 채워진 것이라고 한다. 갑문의 물은 Gravity에 의해 높은곳에 있는 물이 자연적으로 흘러들어와 채워진 것이라고 했다. 윗쪽의 갑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여 완전히 열리자 안에 갇혀있던 산더미같은 배가 서서히 움직이면서 갑문을 빠져 나가 Canal 오른쪽으로 항해하자 반대편 윗쪽에서 대기하고있던 화물선이 Lock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배는 조금전의 배와는 반대방향으로 Lake Ontario를 거쳐 대서양으로 항해할것이다. Lock한개를 빠져 나갈때마다 약 13미터의 낙차가 생긴다고 했다. 8개의 Lock를 거치면 약 100미터의 낙차가 발생하는 셈이다. 즉 Lake Ontario와 Lake Erie사이에는 약 100미터의 낙차가 있다는 얘기가 된다.

Lake Erie에서 Lake Huron으로 다시 Lake Michigan을 거쳐 Lake Superior로 이어지는 낙차를 합계하면 엄청나는것 같다. 어떻게 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가? 궁금해지기만 했다. 피라밋을 건축할때 동원된 인원이 얼마나 됐을까?라는 의문을 몇년전 현지 방문때 Guide에게 질문을 던졌던 기억이 되살아 나면서, 똑 같은 의문이 이곳에서 또 생긴다. 엄청난 인원이 동원됐었다는 사실외에는 정확한 숫자는 없는것 같았다.

Lunar와 함께 아침 일찍 서둘러 차에 골프클럽을 싣고 금년도 시즌 마지막(?)골프를 할려고 집을 나섰다. 막상 골프장에 도착했을때는 싸늘한 바람이 불고 을씨년 스러워 마음을 바꾸어 Niagara Peninsula에 인접해 있는 Outlet Mall에 쇼핑을 하러 QEW의 한구간인 Skyway Bridge를 달리면서 오른쪽 Welland Canal로 화물선이 지나는것이 보여 그곳으로 핸들을 돌려, 갑문을 통과하는 화물선이 올려지고 내려지는 광경을 목격한것이다.

지금은 이광경을 보러 세계 각처에서 관광객들이 모여들어, 아예 관광안내소가 이곳안에 구성되여 있고, 박물관과 Guide까지 상주하고 있었다. 여름에는 많은 관람객들이 모여들지만, 오늘은 초겨울의 날씨탓으로 관망대에는 우리부부와 Chicago에서 관광온 한부부와 그리고 Local사람이 전부였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Welland Canal은 이집트의 피마밋에 버금가는 인류가 만든 걸작품중의 하나라고 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에게는 피라밋만큼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Lock은 1932년도에 완성됐으며, 그전에는 규모가 훨씬적은 Canal을 사용했었다고 한다. 그후로 화물선이 커짐에 따라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규모가 큰 Lock를 건설한것이라고 한다. Lock의 길이는856피트, 넓이는 80피트로, 배의 길이가 최장 740피트,넓이가 78피트 규모의 배가 통과 할수 있다고 했다.

오늘 우리가 본 배는 길이가 142미터였다. 통과 스케쥴에 의하면 저녁 6-7사이에 통과하는 화물선의 길이는 222.5미터라고 했다. 지금 보고있는 배보다 약 80미터가 더 긴배가 통과 할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Lock안에 꽉차서 물이 채우져 떠올랐을때는 애베리스트산이 눈앞에 보이는것 같이 높게 보일것 같았다.

QEW의 skyway bridge는 수면에서 높이 떠 있는 다리이다. 오늘본 화물선들이 통과하기 때문이다. 멀리 보이는 Bridge위로는 차량들이 바쁘게 지나가는 모습이 아스라히 보인다. 토론토에서 나이아가라 지역을 통과하여 미국쪽으로, 또는 그반대 운행되는 차량들이다. 그옆에 나란히 별도로 건설되여 있는 Local road에 설치되여 있는 Bridge는, 차량을 통제하는데 쓰이는 Gate의 Bar가 올려지고 내려지는것 처럼 배가 통과시 올려졌다 내려지곤 하는 시스템으로 되여 있었다. Lock을 지나 윗쪽으로 올라가는 Canal에 있는 Bridge는 양쪽 교각에서 기중기로 다리 전체를 높이 들어 올려 배가 통과 하도록 작동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모습이 장관이다.

지금처럼 육로와 항공이 발달되지 않았을때는 북미대륙에서 생산되는 철광석과 농산물의 대부분이 5대호수를 통해 세계 각처로 수출 또는 수입되였다고 한다. 지금도 많이 이용하고 있지만 전과 같지는 않다고 한다.
Chicago에서 온 부부는 Senior로 Lock을 이용해서 배가 윗쪽으로 올라가고 또 반대로 내려오는 광경은 오늘 처음 보는것이라고 하면서, 어린아이들 처럼 호들갑이다. 물이 갑문에 가득차면 산더미같은 큰 배가 부력에 의해 물위에 떠있는 모습도 이론상으로는 이해가 일면 가지만, 경이롭기만 했다. Lunar는 Bridge처럼 높이 세워진 관망대의 이곳 저곳으로 옮겨 가면서 더 가까이 보기위해 발길이 바삐 움직인다.

Museum 창가에서 잠깐 쉬고 있는데 창문밖에는 한마리의 Seagull이 창유리에 바짝 붙어 앉아서 안을 유심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쫓으려는 시늉을 해도 눈하나 껌벅이지 않고 유유자적이다. 이새는 분명히 Lunar와 친해지고 싶은 표정 같았다. 바꾸어 애기하면 많은 사람들을 경험 했다는 뜻이기도 한것같다. Museum의 여자직원이 샌드위치빵 여러조각을 들고와서 문을 열고 앉아있던 Seagull을 향해 던져주자 사뿐이 날아와 쪼자마자 어디서인지 금새 동료새들이 날아와 그들의 점심(?)을 즐긴다. Seagull은 물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이제는 tame되여 빵조각도 잘 먹는것 같다. 그만큼 인간과 사이가 좁혀졌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까?

http://www.youtube.com/watch?v=Vrr3FBW460g

http://www.youtube.com/watch?v=wRjlpuxDlA4

http://www.youtube.com/watch?v=EasGNui43n0

http://www.youtube.com/watch?v=7HUtdzYWhAI

http://www.youtube.com/watch?v=Sj-UPiwlvk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