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8일,사십사일째, 낙안읍성 한옥촌, 그리고 벌교꼬막축제 구경(오후).
한옥촌을 빙둘러 쌓여 있는 성곽은 전부 돌로 축성되여 있다. 적어도 한옥촌의 외형은 지붕이 전부 볏짚으로 덮여 있어, 관청의 몇개되는 기와집 건물을 제외하고는, 옛모습 그대로 보여 지고 있었다. 마침 한채의 가옥지붕에서는 영( 이곳에서는 날개라고함)으로 지붕을 새로 덮고 있는 모습에 한참동안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내가 어렸을적에 살았던 우리집도 매년 추수가 끝난 가을철이 되면 동네 아저씨들이 품앗이를 해가면서 지붕을 덮곤 했었다. 몇집건너편 빈터에서는 한옥촌의 동네사람들이 볏짚으로 영과 용마루(지붕제일놓은곳 중앙에 씌우는 덮개)를 엮고 있었다. 그분들과 몇마디 인사와 이곳의 사정애기를 들어 보았다. 이분들은 이한옥촌에서 상주하는 주민들이었는데, 모두가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분들이었다. 젊은이들은 더좋은 삶과 꿈을 이루기위해 도시로 빠져 나갔기 때문이란다. 몇년전 포투갈을 방문했을때도 그곳의 나이 많은 분들이 똑같은 사정을 설명해 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젊은이들의 도시집중화 현상은 전세계적인 문제점이기도 한것 같다.
무한당을 구경하는데, 이곳을 관리하는분을 우연히 만나서, 설명을 부탁드렸더니 방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그러나 방으로 들어가기위해서는 마루를 통해야 하는데 그곳에는 '올라서지 마시요'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어 망서렸더니, 상관치 말고 들어오라고 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옛날 이조시대에는 지방도시에는 부,목,군, 현, 그리고 관찰사라는 직책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군수는 정 4품, 현감은 정6품, 현령은 정5품, 그리고 오늘날의 도지사는 관찰사라고 불렸었다고 한다. 무한당의 입구사랑채(?)정문앞에는 경비를 서는 군사두명의 조각이 세워져 있다. Lunar가 군사옆에서 뭔가를 물어보는 시늉을 하는 장면을 한컷했다. 안으로 들어서마자 첫눈에 보이는 장면은 군사가 죄인(?)꿀어 앉히고 현감이 마루위에서 심문하는 조각들이 세워져 있었다. 마당의 오른쪽에는 바지를 궁둥이 밑으로 내리고 곤장을 맞는 한서민의 모습이 재현되고 있었다. 그만큼 옛날의 서민들은 나라의 관리들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1908년 한일합방직전에 낙안군은 일본에 의해 인근의 순천군과 보성군에 나뉘어 흡수됐다고 한다. 낙안군은 지형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바다가 인근에 있고, 농토가 비옥하여, 당시 촌락의 형태가 한문으로 '고무래정'자 모양으로 이루어져, 서울장안의 도시 형태와 모습이 비슷했었다고 한다. 그대로 두면 낙안읍이 커지고 번성할것을 염려한 일본이 의도적으로 '낙안'의 이름을 지도상에서 삭제한 것이라고했다. 관청이 들어선곳의 위치는 한문글자의 머리부분에 해당하는곳에 있으며, 이는 서울의 청와대를 비롯한 각종 궁(Palace)들이 들어서 있는곳도 이런 이치에 해당된곳에 앉아 있다고 설명한다. 이때 이곳 지역의 인사들이, 낙안군을 행정구역에서 없애는것에 항의차, 서울로 상경하여 을사오적중의 하나인 '이완용'을 살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말았단다. 그후 일본은 벌교를 확장개발하여, 벌교항을 이용해 모든 농산물과 특산물을 일본으로 빼내 가는 통로로 이용했었단다. 낙안군 사람들은 성질이 온순한 유림쪽에 가까웠고, 벌교는 해안지역이라서 남자들의 성질이 거칠은 그특성을 일본사람들이 교묘히 이용했었다는 내용이기도 했다.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는 한일합방을 선언하고 처음내린 총독부령 1호가 각지방의 관청들을 없애는 내용이었고, 그자리에 갈립학교(보통학교같은)를 세웠다고 한다. 주민들의 모임을 막아 내려는 조치였던것 같았다. 현재의 무한당은 1983년도에 재건축된 건물이라고 한다.
성곽의 전체길이는 1,410미터이고, 태조때는 토성이었는데, 세종때 돌로 다시 축성하고 문종원년에 완성됐다고 한다. 성곽안의 한옥은 전체 108동이고, 상주인구는 279명이며, 성곽안의 모든 재산은 개인소유라고 했다. 마음데로 사고 살고할수는 있지만, 외형은 변경시킬수 없다고 했다. 정부에서는 이곳 주민들에게 민속의 냄새가 풍기는 토산품을 팔수 있게 해주고, 민박도 허락하고 있고, 또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 설명해주는 '송'씨라고 밝힌분은 '무한당'의 소유자인것 같아 보였다. 낙안읍성은 옛고을문화, 옛서민문화, 세시풍속문화가 그대로 남아 있어 금년도 3월12일자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유엔에 등재 됐다고 한다.
성읍안에는 씨족들이 모여 사는것 보다는 피가 섞이지않은 서민들이 모여 살았었다고 하는데, 주로 장사를 하는 중인들, 막일해서 먹고사는 서민들이 살았었고, 지방의 유지들이나 관원들은 성곽밖의 저택기와집에서 거주했었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그분의 대답이 의외였다. 오늘날의 서울시내에 살고 있는주민들을 생각해 보라고 했다. 서울본토박이는 거의 없고, 거의가 다 지방에서 올라와 터를 잡은 사람들인것으로 알고 있다 했더니, 정답이라고 한다. 옛날에도 성곽안에서는 이방인들이 궁둥이 부치고 살아갈수 있는 조건이 좋았기에 중인들이나 서민들이 자연적으로 모여들어 살게 됐었단다.
낙안성읍은 피마골로 이어져 있단다. 피마골? 옛날에는 정부관리들이 말을 타고 거리를 활보하면 길을 걷던 서민들은 무릎꿇고 고개숙이고 꼼짝없이 그행열이 지날때까지 고개를 숙인채 대기하고 있어야 했는데, 이러한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성곽벽쪽에 가까운곳에 골목길을 만들어, 바쁜 서민들은 이길을 택해, 관리들의 눈을 피해 볼일을 지체없이 보러 다녔다고 해서 피마골(관리가 탄 말을 피해 이용했던 골목)이라는 이름이 부쳐졌으며, 이길목은 전부 성곽의 남쪽문으로 이어져 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피막골로 잘못알고 있음을 지적해준것이다. 피막골은 서울의 종로 1가에서 5가 사이에 있는 골목길처럼,막다른 골목길을 가르키는 이름이라고 했다. 또 그분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잘알고 있는 '임경업'장군이 낙안의 군수로 재직했었고, 재직시에 주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목민관의 자세를 잘 지켰었다고 한다.
옛부터 이곳 낙안읍은 어 염 시 초가 풍부 했었단다. 서민들이 먹고 입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것들이 풍부했었다는 뜻이란다.
가야금의 명창 이태섭씨의 고향이고, 지금도 각분야별로 주민들이 옛삶을 재현시키고 있는 현장을 많이 보고 가라고 한다. 한옥촌을 둘러 보면서, 옛도자기를 굽는곳, 민요를 부르는 소리꾼들이 사는집,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민가들....주민들 거의가 다 노인들이고 젊은이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한곳에 들렸더니, 할머니가 혼자서 마당에 펼쳐놓은 멍석위에서 콩을 고르고 있고, 사립문이 있는 옆에는 여름철이면 임시로 불때는곳을 만들어 그위에 솥을 걸어놓곤했던 Furnace에서 장작불이 타고 있었고 솥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나고 있었다. 할아버지 약을 대리고 있다고 했다. 솥뚜껑을 열어 보여줬다. 소발굽2개를 사다가 뿌옇게 끓이고 있었다. 앞으로도 두번은 더 대려야 한다고 했는데, 이국물과 소주를 곁들여 마시게한다고 했다. 보약이란다. 할아버지는 다른집의 지붕을 덮고 계신다고 했다. 조금전에 지붕을 덮던 집이 생각났다. 할머니는 7남매를 두었는데 전부 서울로 올라가 살고, 지금 돌을 골라내고 있는 콩으로 매주을 만들어 간장 된장을 만들어 자식들에게 보내줄 것이라고 하신다. 할머니는 82세 할아버지는 85세라고 했다.
성곽의 맨윗쪽에 올라보았다. 한눈에 들어오는 한옥촌의 모습이 나의 발걸음을 꽉 붙잡는다. 평화스러워 보이고, 그속에서 이루어지는 옛서민들의 애환을 그려볼수 있을것 같았다. 바로 성곽밑의 집터에는 대나무숲이 자라고 있었고, 대나무숲을 통해 민요창을 부르는 소리와 북소리가 어우러져 나의 귀를 때린다. 마당에 들어서자 소리가 더 커진다. 문을 열어놓은 방안에서 한남자가 북으로 장단을 마추고 그의 앞에서 중년이 넘어보이는 여성분이 삼국지에서 나오는 조조에 대한 부분을 창으로 뽑아 토하고 있었다. 아마도 연습을 하는것 같았다. 두툼한 한권의 노트에서 그녀의 눈길은 떨어지지 않는것으로 보아 대사를 머리에 익히고 있는것 같았다. 모든게 옛날 어렸을때 보고 들었던 기억들과 연결되여진다. 어른들이 뜨거운 여름철 짧은 밤을 동네 모정에 앉아 그중의 한분이 먼저 창을 불러 분위기를 띄우면 다른분이 받아서 소리를 하곤 했던, 코흘리개 우리들은 속으로'저꼰대들 또 시작이다'라고 하면서 그소리를 그렇게도 싫어 했었다. 아마도 그때 그어른들은 '너희들, 이소리가 듣고싶어 마음이 시리도록 그리워질때가 있을것이다'라고 무언의 훈계를 하시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지금 해본다.
어렸을적 추억을 되새길수 있는 이곳을 더 보고 싶어, 벌교에서 하룻밤 지낼려던 계획을 바꾸어 성안의 민박에서 하룻밤 묶기로 Lunar와 합의 했다. 주말이 아닌 주중이라 방은 어렵지 않게 구할수 있어 다행이었다. 우리가 묵는 민박집은 50대가 넘은 아들과 어머니 둘이서 20년째 살아가고 있는 집이었다. 외형은 초가집이지만, 내부는 온수를 돌려 구둘장을 뜨겁게 하고 있고, 수세식 변소에 샤워장등 모든게 현대식으로 되여 있어, 침대가 없는것을 제외하고는 불편한게 없었다.
저녁을 먹기위해 다시 뻐스를 타고 벌교로 나왔다. 축제장은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꼬막정식을, 민박집 주인이 가르쳐준집을 찾아가 먹었다. 반찬이 상에 올려놓을곳이 없을 정도로 많다. 꼬막을 이용하여 만든 Side dish가 다섯개나 된다. 그외 갓김치 배추겉절이, Lunar가 좋아하는 계장, 굴무침 등등.... 같이 여행왔었던 친구들이 문득 생각나고 같이 앉아 먹었으면 식당안이 시끄러울정도로 떠들면서 즐겼을텐데.....라는 아쉬움과 괜히 그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중앙무대에서는 가요 결승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옆에 시장판에서는 물건사고 파는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끝이지 않고, 우리도 그들속에서 어울려 축제의 무드에 푹빠져들었다. 낯에 보았던 약장사(?)팀들은 여전히 여자로 분장하고 떠들어 대고 있고, 그옆집텐트에서는 먹거리 시식을 벌이고 있고..... 텐트안에는 대낯처럼 불이 밝았다. 소음이 거의 나지 않은 소형 발전기들을 자체적으로 운용하여 불을 밝히고 있음을 알았다. 저녁은 잘 먹었지만, 내일 아침이 걱정되여 떡집에서 한접시의 쑥떡을 샀다.이곳의 민박집에서는 식사제공이 없기 때문이다. 벌교의 꼬막축제는 완전히 생각지도 않았던 일종의 보너스 구경인 셈이다. 이번 우리의 여행길에서는 예상치도 않았던 지방의 축제를 여러번 만나 여행의 맛을 한층 돋구어주는 행운이 있었던것 같다. 친구, 특히 K형 내외분의 자세한 여행길 안내가 돋보이게한다. 감사.
한옥촌을 빙둘러 쌓여 있는 성곽은 전부 돌로 축성되여 있다. 적어도 한옥촌의 외형은 지붕이 전부 볏짚으로 덮여 있어, 관청의 몇개되는 기와집 건물을 제외하고는, 옛모습 그대로 보여 지고 있었다. 마침 한채의 가옥지붕에서는 영( 이곳에서는 날개라고함)으로 지붕을 새로 덮고 있는 모습에 한참동안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내가 어렸을적에 살았던 우리집도 매년 추수가 끝난 가을철이 되면 동네 아저씨들이 품앗이를 해가면서 지붕을 덮곤 했었다. 몇집건너편 빈터에서는 한옥촌의 동네사람들이 볏짚으로 영과 용마루(지붕제일놓은곳 중앙에 씌우는 덮개)를 엮고 있었다. 그분들과 몇마디 인사와 이곳의 사정애기를 들어 보았다. 이분들은 이한옥촌에서 상주하는 주민들이었는데, 모두가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분들이었다. 젊은이들은 더좋은 삶과 꿈을 이루기위해 도시로 빠져 나갔기 때문이란다. 몇년전 포투갈을 방문했을때도 그곳의 나이 많은 분들이 똑같은 사정을 설명해 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젊은이들의 도시집중화 현상은 전세계적인 문제점이기도 한것 같다.
무한당을 구경하는데, 이곳을 관리하는분을 우연히 만나서, 설명을 부탁드렸더니 방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그러나 방으로 들어가기위해서는 마루를 통해야 하는데 그곳에는 '올라서지 마시요'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어 망서렸더니, 상관치 말고 들어오라고 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옛날 이조시대에는 지방도시에는 부,목,군, 현, 그리고 관찰사라는 직책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군수는 정 4품, 현감은 정6품, 현령은 정5품, 그리고 오늘날의 도지사는 관찰사라고 불렸었다고 한다. 무한당의 입구사랑채(?)정문앞에는 경비를 서는 군사두명의 조각이 세워져 있다. Lunar가 군사옆에서 뭔가를 물어보는 시늉을 하는 장면을 한컷했다. 안으로 들어서마자 첫눈에 보이는 장면은 군사가 죄인(?)꿀어 앉히고 현감이 마루위에서 심문하는 조각들이 세워져 있었다. 마당의 오른쪽에는 바지를 궁둥이 밑으로 내리고 곤장을 맞는 한서민의 모습이 재현되고 있었다. 그만큼 옛날의 서민들은 나라의 관리들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1908년 한일합방직전에 낙안군은 일본에 의해 인근의 순천군과 보성군에 나뉘어 흡수됐다고 한다. 낙안군은 지형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바다가 인근에 있고, 농토가 비옥하여, 당시 촌락의 형태가 한문으로 '고무래정'자 모양으로 이루어져, 서울장안의 도시 형태와 모습이 비슷했었다고 한다. 그대로 두면 낙안읍이 커지고 번성할것을 염려한 일본이 의도적으로 '낙안'의 이름을 지도상에서 삭제한 것이라고했다. 관청이 들어선곳의 위치는 한문글자의 머리부분에 해당하는곳에 있으며, 이는 서울의 청와대를 비롯한 각종 궁(Palace)들이 들어서 있는곳도 이런 이치에 해당된곳에 앉아 있다고 설명한다. 이때 이곳 지역의 인사들이, 낙안군을 행정구역에서 없애는것에 항의차, 서울로 상경하여 을사오적중의 하나인 '이완용'을 살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말았단다. 그후 일본은 벌교를 확장개발하여, 벌교항을 이용해 모든 농산물과 특산물을 일본으로 빼내 가는 통로로 이용했었단다. 낙안군 사람들은 성질이 온순한 유림쪽에 가까웠고, 벌교는 해안지역이라서 남자들의 성질이 거칠은 그특성을 일본사람들이 교묘히 이용했었다는 내용이기도 했다.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는 한일합방을 선언하고 처음내린 총독부령 1호가 각지방의 관청들을 없애는 내용이었고, 그자리에 갈립학교(보통학교같은)를 세웠다고 한다. 주민들의 모임을 막아 내려는 조치였던것 같았다. 현재의 무한당은 1983년도에 재건축된 건물이라고 한다.
성곽의 전체길이는 1,410미터이고, 태조때는 토성이었는데, 세종때 돌로 다시 축성하고 문종원년에 완성됐다고 한다. 성곽안의 한옥은 전체 108동이고, 상주인구는 279명이며, 성곽안의 모든 재산은 개인소유라고 했다. 마음데로 사고 살고할수는 있지만, 외형은 변경시킬수 없다고 했다. 정부에서는 이곳 주민들에게 민속의 냄새가 풍기는 토산품을 팔수 있게 해주고, 민박도 허락하고 있고, 또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 설명해주는 '송'씨라고 밝힌분은 '무한당'의 소유자인것 같아 보였다. 낙안읍성은 옛고을문화, 옛서민문화, 세시풍속문화가 그대로 남아 있어 금년도 3월12일자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유엔에 등재 됐다고 한다.
성읍안에는 씨족들이 모여 사는것 보다는 피가 섞이지않은 서민들이 모여 살았었다고 하는데, 주로 장사를 하는 중인들, 막일해서 먹고사는 서민들이 살았었고, 지방의 유지들이나 관원들은 성곽밖의 저택기와집에서 거주했었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그분의 대답이 의외였다. 오늘날의 서울시내에 살고 있는주민들을 생각해 보라고 했다. 서울본토박이는 거의 없고, 거의가 다 지방에서 올라와 터를 잡은 사람들인것으로 알고 있다 했더니, 정답이라고 한다. 옛날에도 성곽안에서는 이방인들이 궁둥이 부치고 살아갈수 있는 조건이 좋았기에 중인들이나 서민들이 자연적으로 모여들어 살게 됐었단다.
낙안성읍은 피마골로 이어져 있단다. 피마골? 옛날에는 정부관리들이 말을 타고 거리를 활보하면 길을 걷던 서민들은 무릎꿇고 고개숙이고 꼼짝없이 그행열이 지날때까지 고개를 숙인채 대기하고 있어야 했는데, 이러한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성곽벽쪽에 가까운곳에 골목길을 만들어, 바쁜 서민들은 이길을 택해, 관리들의 눈을 피해 볼일을 지체없이 보러 다녔다고 해서 피마골(관리가 탄 말을 피해 이용했던 골목)이라는 이름이 부쳐졌으며, 이길목은 전부 성곽의 남쪽문으로 이어져 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피막골로 잘못알고 있음을 지적해준것이다. 피막골은 서울의 종로 1가에서 5가 사이에 있는 골목길처럼,막다른 골목길을 가르키는 이름이라고 했다. 또 그분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잘알고 있는 '임경업'장군이 낙안의 군수로 재직했었고, 재직시에 주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목민관의 자세를 잘 지켰었다고 한다.
옛부터 이곳 낙안읍은 어 염 시 초가 풍부 했었단다. 서민들이 먹고 입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것들이 풍부했었다는 뜻이란다.
가야금의 명창 이태섭씨의 고향이고, 지금도 각분야별로 주민들이 옛삶을 재현시키고 있는 현장을 많이 보고 가라고 한다. 한옥촌을 둘러 보면서, 옛도자기를 굽는곳, 민요를 부르는 소리꾼들이 사는집,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민가들....주민들 거의가 다 노인들이고 젊은이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한곳에 들렸더니, 할머니가 혼자서 마당에 펼쳐놓은 멍석위에서 콩을 고르고 있고, 사립문이 있는 옆에는 여름철이면 임시로 불때는곳을 만들어 그위에 솥을 걸어놓곤했던 Furnace에서 장작불이 타고 있었고 솥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나고 있었다. 할아버지 약을 대리고 있다고 했다. 솥뚜껑을 열어 보여줬다. 소발굽2개를 사다가 뿌옇게 끓이고 있었다. 앞으로도 두번은 더 대려야 한다고 했는데, 이국물과 소주를 곁들여 마시게한다고 했다. 보약이란다. 할아버지는 다른집의 지붕을 덮고 계신다고 했다. 조금전에 지붕을 덮던 집이 생각났다. 할머니는 7남매를 두었는데 전부 서울로 올라가 살고, 지금 돌을 골라내고 있는 콩으로 매주을 만들어 간장 된장을 만들어 자식들에게 보내줄 것이라고 하신다. 할머니는 82세 할아버지는 85세라고 했다.
성곽의 맨윗쪽에 올라보았다. 한눈에 들어오는 한옥촌의 모습이 나의 발걸음을 꽉 붙잡는다. 평화스러워 보이고, 그속에서 이루어지는 옛서민들의 애환을 그려볼수 있을것 같았다. 바로 성곽밑의 집터에는 대나무숲이 자라고 있었고, 대나무숲을 통해 민요창을 부르는 소리와 북소리가 어우러져 나의 귀를 때린다. 마당에 들어서자 소리가 더 커진다. 문을 열어놓은 방안에서 한남자가 북으로 장단을 마추고 그의 앞에서 중년이 넘어보이는 여성분이 삼국지에서 나오는 조조에 대한 부분을 창으로 뽑아 토하고 있었다. 아마도 연습을 하는것 같았다. 두툼한 한권의 노트에서 그녀의 눈길은 떨어지지 않는것으로 보아 대사를 머리에 익히고 있는것 같았다. 모든게 옛날 어렸을때 보고 들었던 기억들과 연결되여진다. 어른들이 뜨거운 여름철 짧은 밤을 동네 모정에 앉아 그중의 한분이 먼저 창을 불러 분위기를 띄우면 다른분이 받아서 소리를 하곤 했던, 코흘리개 우리들은 속으로'저꼰대들 또 시작이다'라고 하면서 그소리를 그렇게도 싫어 했었다. 아마도 그때 그어른들은 '너희들, 이소리가 듣고싶어 마음이 시리도록 그리워질때가 있을것이다'라고 무언의 훈계를 하시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지금 해본다.
어렸을적 추억을 되새길수 있는 이곳을 더 보고 싶어, 벌교에서 하룻밤 지낼려던 계획을 바꾸어 성안의 민박에서 하룻밤 묶기로 Lunar와 합의 했다. 주말이 아닌 주중이라 방은 어렵지 않게 구할수 있어 다행이었다. 우리가 묵는 민박집은 50대가 넘은 아들과 어머니 둘이서 20년째 살아가고 있는 집이었다. 외형은 초가집이지만, 내부는 온수를 돌려 구둘장을 뜨겁게 하고 있고, 수세식 변소에 샤워장등 모든게 현대식으로 되여 있어, 침대가 없는것을 제외하고는 불편한게 없었다.
저녁을 먹기위해 다시 뻐스를 타고 벌교로 나왔다. 축제장은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꼬막정식을, 민박집 주인이 가르쳐준집을 찾아가 먹었다. 반찬이 상에 올려놓을곳이 없을 정도로 많다. 꼬막을 이용하여 만든 Side dish가 다섯개나 된다. 그외 갓김치 배추겉절이, Lunar가 좋아하는 계장, 굴무침 등등.... 같이 여행왔었던 친구들이 문득 생각나고 같이 앉아 먹었으면 식당안이 시끄러울정도로 떠들면서 즐겼을텐데.....라는 아쉬움과 괜히 그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중앙무대에서는 가요 결승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옆에 시장판에서는 물건사고 파는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끝이지 않고, 우리도 그들속에서 어울려 축제의 무드에 푹빠져들었다. 낯에 보았던 약장사(?)팀들은 여전히 여자로 분장하고 떠들어 대고 있고, 그옆집텐트에서는 먹거리 시식을 벌이고 있고..... 텐트안에는 대낯처럼 불이 밝았다. 소음이 거의 나지 않은 소형 발전기들을 자체적으로 운용하여 불을 밝히고 있음을 알았다. 저녁은 잘 먹었지만, 내일 아침이 걱정되여 떡집에서 한접시의 쑥떡을 샀다.이곳의 민박집에서는 식사제공이 없기 때문이다. 벌교의 꼬막축제는 완전히 생각지도 않았던 일종의 보너스 구경인 셈이다. 이번 우리의 여행길에서는 예상치도 않았던 지방의 축제를 여러번 만나 여행의 맛을 한층 돋구어주는 행운이 있었던것 같다. 친구, 특히 K형 내외분의 자세한 여행길 안내가 돋보이게한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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