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November 11, 2011
10월30일,사십륙일째, 제부도방문과 노래방 그리고 시화(시흥과 화성)방조제 Drive.
10월30일,사십륙일째, 제부도방문과 노래방 그리고 시화(시흥과 화성)방조제 Drive.
고마운 친지부부들이 다시 모였다. 오늘이 지나면 언제 다시 보게된다는 보장이 없기에, 용인 민속촌앞의 "콩백반음식점"에서 늦은 점심을 한것이다. 친지들 모두가 남쪽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다시 모이기로 의견을 모으고, K형부부가 이곳에서 회동하자고 한것이다. 음식도 푸짐하게 잘먹게해주었고, 맛도 일품이었다. 도토리묵, 파전, 청국장, 총각김치, 고향의맛을 한층 깊이느끼게 해주는 음식들이었었다. 점심후 구경할려고 했던 민속촌은 '낙안읍성'의 한옥촌을 보았기 때문에 skip하고, 시간을 절약하기위해서, 바로 인천지구 옆에 있는 '제부도'의 모세의 기적나타난다는섬으로 차를 몰았다. 낯의짧은 해를 Saving하기위해 마음이 급했었던지, 민속촌마을에서 고속도로를 타기위해 빠져 나오는 길에서 헤매느라 오랜 시간을 허비하는 Happening도 일어났었지만, 이러한 것도 추억을 만들어주기위한 것이라는 식으로 해학적으로 생각하면서 '제부도'섬입구에 도착했었다.
섬으로 들어가는 길은, 돌로 축대를 쌓고, 그위를 시멘트로 Pavement한 좁은 길은 두대의 차가 겨우 비껴갈 정도였었는데, 많은 차량들은 우리일행이 들어가는데 Bumper to Bumper로 섬을 나오고 있었지만, 우린 섬으로 들어갈수 있다는데만 의미를 두고 섬과 육지를 이어주는 이좁은 길을 한참을 달려 도착했다. 섬입구에서 부터 끝까지 길옆에는 횟집과 모텔 그리고 유락시설들로 꽉들어 있었다. 넓은 주차장에는 생각보다 차량들이 한적해 보였다. 우리는 인공으로 만들어놓은, 관광객들을 위한 바닷가 물속에 세워진 Board Walk을 걸으면서 주위경관을 탐방했다. 멀리 보이는 높고 낯은 산봉우리들은 물결치든 높았다 낯았다 하는 파노라마처럼 위대해 보였고, 그속에 묻혀 있은 인간의 존재가 티끌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가 없도록 나 자신은 조그만 해지고 있었다.
낙조를 몇분남긴 그앞으로 조그만한 고깃배들이 바삐 움직이고....여자 친지분들은 매년 한국에 나와서 이같이 시간 보내자고 아우성치듯, 어린 아이들 처럼, 가을철 약간 차거운 바닷바람도 개의치 않고 웃어 제친다. 주차장앞의 횟집에서는 '좋은 회감있어요','섬에 들어온맛을 여기서 느끼고 가요', '지금막 배에서 받아온 싱싱한 낙지회감있어요' 등등 귓전이 시끄럽다. 살아있다는 그냄새를 맡을수 있고, 일반서민들의 살아가는 꾸밈없는 그모습에 고향은 이래서 또 생각하게 됨을 깊이 느끼면서, 이러한 기회를 만들어 여기까지 우리부부를 데리고온 친지부부들이 그리고 또 한친구의 배려와 우정에 마음속 깊은곳으로 부터 '고마워' 그생각뿐이었다.
낙지회는 토막내여 초간장에, 와사비에 찍어 먹도록 접시에 푸짐이 올려놓았는데도, 여전히 살아 꿈틀 거렸고, 한점을 겨우 접시에서 떼어 입안에 옮겼더니 여기서도 입안에 짝 달러 붙는다. 이맛에 낙지회를 먹는다지만, 얼마전 Amazing Race를 하는 코스중 참가자들이 부산의 자갈치 시장에 들려 지금 먹고 있는 낙지회를 먹는 코스를 보면서, 서양 참가자들이 이러한 낙지회를 먹는데 익숙치 않아 쩔쩔매었던 와중에 한여성은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눈물을 찔끔짜는 모습을 보면서 Lunar와 같이 배꼽을 잡고 웃은 기억이 되살아나게 했다. 곁들인 소주한잔이 정취를 더 깊게 해준다. 마실줄도 모르면서 기분이 좋아 두어잔 마셨지만 정신은 말짱했었고, 남자친지들은 운전을 해야하기에, 옆에 있는 짝들이 아우성치듯이 말리지만 마의동풍이다.
'제부도'이섬이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썰물때는 육지와 제부도가 뭍으로 변하여 사람들이 왕래할수 있는 통로가 자연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란다. 지금은 그위에 차량이 다니기 안전하게 길을 만들어 아까 우리일행도 그길을 따라 들어왔는데, 밀물때가 되면 이길이 바닷속에 잠기어 다시 섬으로 되고, 사람과 차량의 이동은 언제 그러한 움직임이 있었냐는듯이, 해수만이 넘실대고 있다고 했다. 아까 우리가 들어올때가 밀물이 들어오고 있는때라서 차량들이 줄지어 섬을 탈출한것이었는데, 우리 일행은 순진하게도 내일이 월요일, 출근준비를 하느라 일찍 섬을 빠져 나가는 차량들로 이해를 했었다. 밤9시30분 이후에 다시 썰물이 되면 그때에 뭍으로 나갈수 있다고 횟집아주머니가 설명해주었다. 내일 새벽에 짐을 챙겨 비행기를 타야할 일이 선뜻 머리에 떠올랐다. 그렇타고 발버둥친다고 해서 해결되는것도 아닌데... 조급해 할것 하나도 없이, 그시간에 나갈수 있다는데에 고맙게만 느끼면서 바닷물속 저넘어로 사라져가는 낙조의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아 보기도 했다.
아직도 2시간30분 이상이 남았는데, 횟집에 그냥 주져 않아 시간을 죽일수는 없었다. 누군가가 옆의 높은 모텔빌딩위에 걸쳐있는 '노래방'간판을 보고 앞장서 나간다. 모텔빌딩의 지하실에는 많은 노래방이 있었다. 주인장이 비교적 넓은방으로 안내해준다. 얼마만에 이런시간을 갖어 보는가? 오랜시간이 지난것 같았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큰매형과함께 집안식구들이 모여 정읍시내의 노래방에 들렸었던 그때 이후로 처음 지금은 친지들과 어울리는 것이다. 노랫가사는 물론이고 노래 제목을 기억못해 노래방기계에 입력하는것 조차 익숙치 않아 처음에는 헤매야 했다. 그래도 우리 부부보다는 익숙한 친지들이 열심히 찾아 노래가락이 이어진다. 음정과 박자가 잘 맞을리 없고, 잘 맞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분위기를 어숙하게 할것같은, 악동들의 세계로 되돌아가 천방지축으로 목소리를 내면서 웃어 제낀다. 젊어서는 목소리와 흘러나오는 가락들이 가수 못지 않았을 친지들이었지만, 세월의 앞에서는 별 도리가 없음이 마음 한편으로는 서글픔으로 저려오는 느낌도 있었다. 내가 아는노래는 옛날 구닥다리였고, 친지들 또한 크게 나와 다르지 않았다. 내가 부르고, 네가 부르고, 합창하고, 할수 있을것 같아서 입력해 놓았는데, 막상 멜로디가 나오니 모두가 벙어리가 되는 Happening도 있었고, '친구여'를 모두가 합창할때는 약간 목이 메이기도 한다. 이제 여기서 헤여지면 언제 다시 만남의 기회를 갖게 될것인가의 기약이 없다는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만남은 헤여짐을 전제로 한다는데.....그말이 밉다. 마음같아서는 밤새도록 목청이 터져라 불러보고픔이겠지만, 먼길을 떠나는 길손이자 친구를 붙들어 둘수만은 없는,그아쉬움을 알기에 헤여짐의 안타까움은 마음에접고, 모두가 다시 차를 몰았다. 어떤 친지부부는 이밤중에 홍천까지 가야하고.... 어떤 친지는 중간에 내려서 또 30여분 뻐스를 타고 가야하고.....일분의 시간도 허비하지않고 유용하게 이용토록 Plan을 짜고 진행 맡아온 K형부부, L형은 갑자기 하고 있던 사업에 차질이 생겨, 남쪽 여행시 마나님만 보내면서도 모두가 모이는 장소까지 나와서 Encourage해주었고, S형은 홍천에서 부터 올라와 일행의 운전수 노릇하면서 우리를 편안케 해주었었다. 모두가 건강하시기를.....
우리부부를 그의 차에 태운 K형은 늦은시간인데도 시화방조제위로 길게 뻗어있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이곳을 지날기회가 있을것이라는 확신이 없기에.... 머리속에서 상상하고 있었던것 보다 훨씬 더긴 방조제임을 알수 있었다. 시화의 뜻을 몰라 그에게 물었더니, 시흥과 화성의 합성어라고 했다. 두지방을 이어주는 방조제인것 같았다. K형의 그마음을 읽을수 있었다. 고맙기만 하다. 오늘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오래전에 뉴스에서 본 "시화호가 썩었다"라는 나쁜 기억만 머리속에 간직하고 있을번 했다.
Luggage를 대충 꾸리고 난 시간은 자정이 넘어서였다. 내일아침 새벽6시경에는 다시 일어나 인천으로, K형 부부가 운전해주는 차량으로 달려가야 한다. 이친구들 때문에 몇년이 지나면 또 고향을 찾을 것이다. 그정이 그리워서.....
이번 여행길에 형제 친척들을 일절 찾아보지 않았다는점이 마음을 쓰리게 하는 부분이었다. 얼마전 바로 아랫동생이, 호남선 고속철도건설때문에 이전한 조상님들의 납골묘를 새로 조성하고, 동영상으로 내게 보내온 내용을 보면서, 형제 친척들을 찾아뵙는것을 아예 눈감아 버리기로 결정했었고, 이행한것 뿐이다. 납골묘 비석에 새겨진 문귀 하나가 나와 Lunar를 그렇게도 마음아프게 한것이다. "여기에 이름이 적혀있는 본인과 그자손들만이 납골묘에 들어올수 있다" 그런데 그이름들속에 우리부부 이름만이 빠져 버린것이다. 그이유를 나는 잘 알고 있지만, 여기서 내용은 말할수가 없음이 또한 마음 아프게 한다. 성균관의 학사로 근무하면서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고 있는 친구와 하룻밤 그의 집에서 같이 지내면서 그런 사유를 얘기 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 네가 고국에 왔는데도 형제 친척을 찾아 보지 않고 돌아가는 너희 부부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너의 결정에 나도 동감이다. 다른 형제와 똑같이 자격이 주어져도, 주어진 여건상 마음만 고맙게 받았을 것인데....."라고 친구가 더 안타까워 했었다. 조상님들에게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제사를 맡아 주관하는 친구의 그말에 무거운 마음의 번뇌를 내려놓고, 결정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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