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November 10, 2011
10월27일 오후 청해진 장보고 유적지 탐방 그리고 Hitching Hiking.
10월27일 오후 청해진 장보고 유적지 탐방 그리고 Hitching Hiking.
장보고의 기념관은 관람객들이 일목요연하게 볼수 있도록 Display가 잘되여 있었다. 그의 생애에 대한 설명이 발길을 옮겨놓지 못하게 한다. 설명에 따르면, 장보고는 서기 780년대 후반에 이곳 완도에서 출생했단다. 기골이 장대하고 활과 창을 쓰는 무예가 출중했다고 한다. 어린시절 신라의 혼란과 모순을 보았으며 골품제도하에서의 신분 상승한계를 느껴 20대 초반에 기회의 땅 당나라에 진출한다. 당나라에서 그는 '서주'의 무령군이라는 군대에 들어가 여러전투에서 공을 세워 30세(819년)에 병사 천여명을 거느리는 군중소장의 직위에 오른다. 그후 그는 산둥반도 적산포에'적산법화원'을 설립한다. 무역하는법을 신라에서 건너온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법화원은 신라사람들에게 오늘날의 사랑방역활을 해 주었다고 한다.
9세기초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서해 바다는 해적들의 천국이었다고 했는데, "신라노'는 당시 해적들에게 잡혀 노비로 팔리는 신라인들을 뜻한다고 했다. 당시 무령군 소장이었던 그는 신라노의 참상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 신라로 되돌아가 이들을 소탕하고 바닷길을 개척할것을 결심한다. 귀국후 당시 신라 흥덕왕을 알현하고 군사1만을 거느릴수 있는 청해진을 설치토록 허가받고, 대사로 임명된다. 즉 청해진지역의 자치권을 행사하는 우두머리로써 그는 신라와 당나라사이에 있었던 해적들을 완전소탕하여 신라밖에 있는 재당신라인들을 연결하고 해상무역권 확보등의 조직적인 세력을 확보하게 된다.
청해진은 오늘날의 완도를 일컫는다. "조그만 어촌에 불과 했지만, 도처에 창궐하는 해적들을 없애는 전초기지가 될것이며 또한 해상무역의 중심지가 될것이다" 이후 "바다를 지배하는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라는 신념으로 청해진 본영을 중심으로 한민족의 기상을 떨치며 해양을 개척하였다. 장보고는 한국과 중국, 일본을 연결하는 장대한 해상로를 개척했으며, 청해진을 본거지로 중국과 일본을 이어주는 중계무역을 했고, 이슬람세계와도 교역한 아시아최초의 민간인이자 세계적 무역왕이 된다.
청해진 설치후 해상세계를 석권한 장보고는 신라왕실의 왕위계승 분쟁에 휘말리게 되며 서기 839년 그는 경주로 군사5천을 보내 김우징의 정적들을 격파하고, 김우징이 '신무왕'으로 오르는데 일등공신이 된다. 신무왕은 장보고를 "감의군사"로 삼고 식읍 2천호를 내렸다고한다. 신무왕의 아들 문성왕은 장보고를 '진해장군'으로 삼고 진골귀족의 관복(장복)_을 하사하고 그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김양'을 비롯한 경주귀족들이 들고 일어나 섬출신 지방인의 딸을 왕비로 모실수 없다는 명분을 세워 그를 제거하려한다. 마침내 '김양'은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을 보내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되돌아온 옛부하 염장을 장보고는 반갑게 맞아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칼을 빼어 장보고를 살해한다. 이때가 서기 814년이다. 그후 청해진은 '염장'에 의해 10여년간 다스려졌고, 장보고의 세력들은 분활되여 쇠퇴의 길을 걷고, 851년 2월에 청해진은 그막을 내리게 됐다고 한다.
기념관에서 한참걸어 바닷물위에 세워진 다리를 건서 청해진 유적지에 갔다. 멀리서보았을때 3개의 기와집망루가 보인다. 이곳이 병사들이 머물렀던 병영이었다. 첫번째 문이 '외성문( Outer wall gate)을 통과하기전 왼쪽에 ㄷ자형 우물이 있어 옛날 병사들이 식수로 사용했었다고 하는데 지붕으로 덮혀져 있고 우리를 맞이했다. 첫번째 문을 통과하고 계속해서 언덕을 향해 올랐더니 두번째 문인 내성문(Inner Wall Gate)이 우리를 맞이한다. 제일높은곳에는 세번째 문이 우리를 반긴다. 각망루에서 병사들은 화살을 겨누면서 해상로를 지켰을 것이다.
청해진성의 고대(Watch tower)는 동쪽 북쪽 남쪽 3곳에 있었던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이곳은 일본과 중국등 외국에서 내륙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연안의 상선과 해적을 감시하기위해서 가장 유리한 곳이었다고 한다. 고대 뒷편의 둔덕에 위취한 동남치(Fortification on South East Part)는 지리적으로 사통팔방을 감시할수있는 요새지였다고 한다. 나같은 문외한이 보아도 감시하기좋은 위치에 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이곳에서 감시하는데 슬쩍 지나갈 해적은 절대로 통과할수 없었을것으로 이해 되였다.
서북치는 민가를 감시하는곳에 위치하여 인근에 있는 강진, 해남쪽에서 들어오는 배들을 감시하고 조망하는 기능을 했다고 한다.
청해진 유적지를 둘러 보는데, 성곽은 외곽에 둔덕을 쌓아 병사들이 보초를 서는데 아주 적합하게 해놓은점이 감탄을 연발케 했다.
오늘날 정부는 국책사업으로 제주에 해군기지를 만들고 있는데 정치꾼들을 비롯한 주민들이 심하게 반대를 하고 있어 계획에 차질을 빗고 있다는 소식을 여러번 들어왔었다. 이사업은 전임대통령이었던 노무현때 시작됐다고 하는데, 그때 이계획에 참석했던 정치꾼들이 오히려 반대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시류에 적당히 야합하기에만 혈안이 되여 있는 정치야바위꾼들을 지하에있는 장보고대사가 보고 있다면, 얼마나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한탄을 하고 있을까. 그옛날에도 해상을 지키는 일은 국가의 가장 큰 임무이자 신하들의 책무였는데..... 주위나라 중국과 일본의 세력이 팽창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새삼 혜안이 있는 장보고 같은 지도자의 출현이 간절히 기다려지고 있음을 시집간 딸이 친정을 걱정하는 심정으로 느끼면서 민박집으로 돌아오기위해 큰길로 나와 택시나 버스를 기다리는데 나타나지를 않아, 무한정 기다릴수만은 없고, 또 이곳의 지리를 잘 모르기에 묵고자 하는 팬션이 어디매쯤에 있는지도 몰라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주위의 논은 Combine을 이용하여 타작이 다 끝나고, 차량이 다니지 않는 좁은 도로위에 그대에 널어놓고 햇볕에 말리는 광경도 목격했다. 인력감소와 젊은이들의 도시진출로 인한 궁여지책으로 현대식 추수기계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는것을 간파할수 있었다. 지나는 차량들을 보면서 손을들어 태워달라는 신호를 보내볼까라는 생각도 여러번 하면서 스쳤다. 그래도 택시나 뻐스는 보이지 않아, 결국 우리곁을 막지나치려는 흰색의 승용차에 신호를 보냈더니 멈춰섰다. 사유를 얘기했더니, 젊은 운전수는 우리가 갈려고하는 팬션위취까지 알고 있다고 하면서 타에 오르라고 호의를 베풀어 주어 편하게 오는, 평생 처음 조국땅에서 Hitching Hiking을 하는 기록도 세웠다. 그분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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