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11, 2021

문재인과 패거리들 느끼는게 좀 있어라. “집-돈 잃고 떠밀려와 50년… 고향 같은 곳 차마 못떠나”

  문재인 집권 4년동안에, 25번 부동산 부양책을 뜯었다 부셨다 한결과는, 그들 패거리들끼리, 심지어 LH말단 직원들까지 동원해서, 부동산 갑부를 양산한것뿐, 어렵게 살아가는 많은 서민들을 다시는 기어나오지 못하도록,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시궁창으로 쳐박은것뿐이다.  부동산 투기실책으로 온나라가 난리인데, 문재인은 딴소리만 질러대고 있다.  

문정인같은 또라이는 한국이 앞으로 제목소리를 내면서 잘 살아 가려면,  혈맹인 미국을 버리고, 중국과 함께 가야 한다는 견소리를 읊어대고 있는 꼬락서니다.  이런자가 간첩 문재인에게는 꼭 맞는 정책보좌관으로 활약해온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렀다.

서울은 50-60년전, 내가 사회생활 시작할때도 집없는 서민들에게는, 평범한 집한채, 아파트 한채, 열심히 돈벌어서, 구입하고 가족들과 함께 오손도손 살아가는 꿈을 꾸면서, 그꿈을 이루기위해 열심히 일했었던 기억을 떠올릴때면, 지금도 괜히 가슴을 때리는 서러움과 흐느낌에 누가 볼새라 고개를 옆으로 돌리기를 여러번 했었던 기억이다.  

그래도 그때는 지금의 문재인 정부처럼 엉터리 부동산 정책을 만들어 자기네들은 배를 채우면서, 내집장만의 꿈을 안고 살아가는 서민들을 지금처럼 사기 또는 공갈로 괴롭히지는 않았었다.  비록 한달월급이 사회초년생들은 9천원 정도 했었고, 신사복 한벌 Tailor Made해서 구입하는 가격이 보통 1만 2천원에서 1만 5천원 했었다. 그때는 Ready Made는 없을 때였었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 키우는 선배님들의 월급은 조금 많긴 했었지만....그래도 내계산으로는 도저히 그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의 수수께끼기 풀어지지 않았었다.

지난 50여년을 같이 살아온 Lunar와 연애할때, 정말로 정말로 모처럼 기회를 내서, 남산 팔각정에 올랐었던 기억이 있다.  그곳에서 360도 회전하면서 둘러본 서울시내는,  빈공간이 없이 크고 작은 집들이 개딱지 처럼 엉겨붙어 있었다.  그렇게 많은 집이나 아파트중에서 우리가 결혼하여 새살림을 꾸릴 공간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월급쟁이로서는 희망을 갖는다는게. 그림속에서만 가능한것으로 현실세계는 젊은청춘들을 괴롭혔다. 

사진에서 보는 '백사마을'은 지금도 그렇치만 당시에도 어느지역에 있는 달동네인지는 알수도 없었지만, 굳이 알려고 할 필요도 없었다.  백사마을과 비슷한 달동네가 서울의 변두리지역은 숫자를 셀수 없을 정도로 많았었다.  길거리에서 의젖한 양장 차림의 젊은 직장처녀들을 보면, 당시의 젊은 청년들은 그녀를 다시 한번 쳐다 보면서, 돈많은집의 결혼을 앞둔 귀여운 따님으로 상상을 하곤했었는데,  한 짖꿎은 친구가 그호기심을 그냥 넘기지 않고,  지금으로 치면 스토킹을 하면서 그녀가 들어가는 동네까지 갔었는데,  개딱지 같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금호동 그어디쯤의 판자촌집으로 들어가는것까지 확인하고 와서, 씁쓰름한 표정으로 상황설명 해주면서, 그나마 그여성은 발뻗고 잠잘수있는 판자집이라도 있다는게 부러워 했었던 기억이다.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피해보고져, 시골의 많은 청춘남녀들이 서울로 무작전 상경했었고, 영등포지역의 방직공장에는 시골에서 상경한 처녀들이,모여 구로동을 만들었었고,  집짖는 공사장에는 젊은 시골청년들이, 지금은 레미콘이 하고 있는 일을, 어깨에 무거운 시멘트벽돌을 지고 아슬아슬하게 높이올라가는 빌딩의 뼈대속으로 무거운 발길을 질질 끌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우리도 잘살수있다. 다시는 후손들에게 가난은 물려주지 말자"라는 슬로건속에서 당시의 젊은 세대들은 그렇게 열심히 일하면서, 도심지의 슬램가들이 건설의 붐에 밀려 없어지거나 도시의 외곽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만 했었다. 백사마을도 그렇게 해서 생성된 달동네 였었던것 같다. 일종의 "이주정착지"였다. 노원구 중계본동 산 104번지에 내몰렸었다고 뉴스는 표현했지만, 그나마라도 그렇게 정착할 땅을 주었던것은 같이 더불어 살아가자는 도시계획에서 파생된 집단이주였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절대로 그러한 삶의 환경을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만큼 삶의 질이 좋아졌다는 증거다.  

이제는 가난했었던 당시의 괴로움을 상상하기 보다는, 그렇게 살아오면서, 자손들을 잘 키워서, 그들이 사회의 허리역활을 하도록 헌신해온  부모로서의 자부심과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에 흐믓해 하면서, 과거의 어렵고 괴로웠던 추억이 Nostalgic Mood에 젖게 해준다. 특히 나이드신 할머님들은 당시를 생가하면, 감개 무량 하실 것이다.  오래 오래 생존하시기를....

역사깊은 백사마을이 도심개발 계획에 따라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됐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더 좋은 삶의 터전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하니, 어찌 기쁘지 않을소냐만, 여기에 마지막까지 남아서 역사를 지켰던 분들에게도 개발의 혜택이 그냥 비켜 지나가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인생은 90년 100년을 산다해도, 종착역에 가까워오면, 대부분 다 "세월은 참 빠르다. 어느새...."라고.  

문재인의 엉터리 부동산개발 정책의 희생자가 이번에는 나오지 말아야 할텐데.....  

7일 오전 서울 노원구 백사마을의 한 골목 어귀. 이 마을에서 53년을 살아온 주민 윤석분 씨(오른쪽)와 이웃 주민 강길자 씨가 담벼락에 걸터앉아 맞은편 에 있는 빈집을 가리키며 “여기 살던 사람들도 마을 을 떠났다”고 말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위클리 리포트]서울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의 마지막 봄

어느새 여기도 봄이 내려앉고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봄이.

쨍한 햇빛에 눈이 부신 날. 하지만 그곳은 화사한 날씨는 도통 어울리지 않았다. 누군가 마주 걸어오면 피해가기도 힘든 좁은 골목. 서로를 버텨주듯 다닥다닥 벽을 맞댄 집들이 왠지 세월에 지쳐 보였다.

군데군데 박힌 붉은 페인트의 동그라미들과 ‘위험’ ‘접근금지’란 큼직한 글씨들. 얼핏 대문 틈으로 보이는 찢어진 우산살마저 한참 등이 굽었다. 사람들이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 부르는 이곳. 노원구 중계본동 불암산 자락에 있는 ‘백사마을’은 그렇게 봄 아지랑이조차 먼지에 흩날려 지워졌다.

백사마을은 곧 사라질 운명이다. 서울시는 지난달 2일 2025년까지 이 일대에 대규모 주거단지를 조성하겠다는 재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약 18만7000m²의 땅에 공동주택 1953가구와 임대주택 484가구를 짓는다고 한다. 2009년 주택재개발 정비사업구역으로 지정된 지 12년 만에 들려온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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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동안 백사마을의 삶이 멈춰 있었던 건 아니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골목 한구석에 쌓인 회색빛 연탄재. 어젯밤 누군가는 그 온기에 기대 또 하룻밤을 지냈으리라. 한때 1713가구 가까이 살았다던 이 마을엔 여전히 203가구가 남아 있다.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떠밀리듯 왔지만 이젠 고향이 되어 버린’ 백사마을 주민들을 만나봤다.

○ 시절에 밀려 만들어진 달동네


드론을 띄워 하늘에서 내려다본 백사마을은 곳곳에 벚꽃이 만개해 분홍빛을 머금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꽃은 어디서 피어도 꽃이다. 철커덩 문이 열리자 마주한 수선화들. “좀 너절너절해도 사는 건 괜찮다”는 최선진 씨(88) 집 마당은 수줍은 미소만큼 꽃들이 만발했다.

할머니가 이곳에 정착한 건 서른 즈음이었던 1960년대. 50여 년 동안 겪은 풍파를 다 얘기하려면 몇 밤은 새워야 할 터. “하나하나 손수 심은 꽃들”이라며 바라보는 눈빛엔 자긍심과 쓸쓸함이 함께 묻어났다. “재개발이 된다, 된다 하더니만 이젠 진짜 나가려나 봐.” 샛노란 수선화 꽃잎이 살짝 바람에 떨리는 듯했다.

“그때 동대문 막살이집촌에 살다가 불이 나는 바람에 집을 잃었지. 판자촌이니 순식간에 재가 됐어. 다른 이웃들과 80여 명이 여기로 흘러들었어. 나랑 남편도 4남매를 데리고 왔는데 천막 하나 내준 게 고작이었어.”

최 씨는 여기서 악착같이 4남매를 키워냈다. 마을 뒤쪽 불암산 자락에 있는 밭에서 배를 사서는 동대문시장까지 가서 과일 보따리 장사를 했다. 함께 이 집에 창호지를 발랐던 남편은 40여 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래도 함께 지은 집만큼은 그대로 남은 거지. 지금도 셋째 딸이랑 여기서 잘 살고 있네”라고 했다.

김상윤 씨(83)가 백사마을에 들어온 것도 최 씨와 엇비슷한 그즈음이었다. 셈 빠른 할아버지는 “1967년 11월 3일”이라며 허리를 쫙 폈다. 용산에서 철거민으로 살던 그는 그해 집을 잃었고 살 곳을 찾아 여기로 왔다.

“집 잃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다 여기로 밀어 넣었어. 살고 싶어서 온 데가 아니란 말이지. 시절에 떠밀려서 온 거야. 그렇게 이 마을에서 맨 처음 터를 닦았는데 결국 가장 마지막에 나가는 사람이 됐네.”

할아버지의 기억은 정확했다. 백사마을은 일명 ‘이주정착지’였다. 1967년 서울에 불어닥친 도심 개발. 용산과 영등포, 청계천 등지에 몰려 살던 빈민들은 갑작스레 거처를 빼앗긴 뒤 노원구 중계본동 산104번지에 내몰렸다. 백사마을은 그 번지수에서 딴 이름이었다. 엉성한 작명만큼이나 당시 그곳 사정은 열악했다. 개발보상금은 꿈도 못 꿨다. 한 가구당 8평 남짓 땅과 시멘트블록 200장, 텐트 1동이 지원받은 전부였다. 전기는커녕 연탄을 땔 아궁이도 없었다.

○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


그렇게 하나둘씩 이뤄진 마을. 뒤늦게 들어온 이들도 저마다 사정은 애달팠다. 1983년 이곳에 터를 잡은 나춘환 씨(84)는 ‘자개장롱’ 하나만 이고지고 백사마을에 왔다. 번듯한 제지회사를 운영하다 ‘8·3 사채동결조치’에 부도를 맞고 모든 걸 잃은 그도 이곳만이 살길이었다.

“어떻게든 그놈의 농 하나는 건지고 싶었어. 없는 살림에 그 큰 장롱 들어갈 집을 찾으니 구할 수가 있나. 마을 언덕을 얼마나 올라 다녔는지 몰라. 꼭대기까지 와서야 그나마 장롱 들어갈 집을 찾았지.”

그의 집 안방엔 여전히 그 자개장롱이 버티고 섰다. 40년이 넘게 흘렀는데 휜 곳 하나 없다. 나 씨 역시 그렇게 꼿꼿하게 이곳에서 처자식을 건사했다. “애들한테 당당하게 말했어. ‘결혼할 상대 있으면 언제든 여기 데려와 집을 보여주라’고.” 할아버지는 지난한 삶의 무게를 숨기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내 손때가 안 묻은 구석이 없지. 어찌 애착이 가지 않겠어.”

나 씨와 동갑내기인 탁윤균 씨(84)에겐 백사마을이 또 다른 기회의 땅이었다. 경북 성주에서 온 탁 씨는 1971년 당시 거금 14만 원을 주고 땅 32평을 샀다. 그는 자기 손으로 땅을 파고 합판을 잘라 작은 부엌 하나 딸린 단칸방을 넓혀나갔다. 이후 직접 굴착기를 몰고 만든 지하공간에 양말 공장을 차렸다.

함께 내려가 본 공장 지하실. 이젠 퀴퀴한 냄새만이 가득한 그곳엔 “한때 미싱이 20대도 넘게 돌아갔다”고 한다. 저쪽 구석에 놓인 망가진 미싱 한 대가 탁 씨의 과거를 뒷받침했다.

할아버지에게 공장은 꿈이자 자랑거리였다. 공장을 세울 때만 해도 무허가였지만 구청은 그에게 ‘무허가 건물 확인서’를 발급해줬다. 토지 소유주가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살아온 주민들에게 권리를 인정해주는 문서라고 한다. 탁 씨에게 확인서는 자신의 인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증서이기도 하다.

저마다의 사정을 안고 모여든 백사마을이었지만 이웃은 서로를 보듬으며 삶을 이어갔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시끌벅적 사람 냄새가 가득했다. 백사마을 6통 통장을 지냈던 김상윤 씨는 “우리 통에만 80가구가 모여 살았어. 비슷한 시기에 들어와 나이대도 엇비슷해 잘 어울렸지”라고 떠올렸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1년에 몇 번씩 동네 사람끼리 관광버스 빌려 여기저기 놀러 다녔어. 힘들어도 함께 즐겁게 재밌게 살았어. 아직도 남은 사람들끼린 그때 얘기를 해. 이젠 많이들 마을을 떠났거나 세상을 등졌지만.”

짹짹. 청량한 울음소리. 이웃이 떠난 김 씨네 집 처마엔 올해 제비가 둥지를 틀었다. 할아버지는 커다란 대못 2개를 구해 둥지 아래에 나무판자를 고정시켜 뒀다. “지들도 살아야지. 무너지지 말라고 받쳐뒀어.”

○ 내년 봄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재개발을 앞둔 이 마을에서 1977년부터 양말 공장을 했던 탁윤균 씨가 이날 자신이 운영하던 옛 공장 지하 실을 찾아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밀려들어 닦았던 마지막 터전. 그곳마저 잃는 게 두렵진 않을까. 다행스럽게도 아직 남은 백사마을 사람들은 재개발 뒤에도 계속 이곳에 머물 수 있다.

서울시와 노원구, 서울주택도시공사(SH)는 2017년 10월부터 33번의 회의를 거쳐 ‘보존 재개발 원칙’을 세웠다. 낡은 저층 주거지를 개발하되 백사마을의 특성과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는 방식으로 개발하겠다고 한다. 원주민들이 재개발에 떠밀려 가지 않도록 주거권도 보장하기로 했다. 시 관계자는 “1960년대부터 자생적으로 형성된 마을의 역사를 보전하고 원주민들에게 경제적으로 부담이 가능한 임대주택을 공급하는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왠지 할아버지 할머니는 마음 한쪽이 쓸쓸하다. 내쫓길 걱정은 안 하지만 그들이 세우고 닦은 ‘백사마을’은 이게 마지막인 게 아닐까. 왠지 자꾸만 작별의 시간이 다가오는 기분이다.

“요즘 매일 이 텅 빈 공장을 찾아와. 동네 한 바퀴 돌아본 뒤에 사무실에 들어와서 커피 마시고 TV도 보고…. 하루도 빠짐없이 와. 괜히 아쉬워서 그런가. 재개발 끝나면, 그래 끝나면 다시 돌아와야지.”(탁윤균 씨)

“나랑 마누라랑 둘 다 여든다섯이야. 재개발이 한 사오 년은 걸리겠지? 그럼 아흔 살이 되는 거네. 우리가 그때까지 살아있을까. 올해 떠나면 이젠 마지막인 거지. 그간 자식들이 모시겠다고 해도 한사코 뿌리쳤는데, 이젠 거기 가서 살아야지. 지금이라도 털고 일어날 수 있지만…. 하루가 아쉬워서, 이렇게 남아 있네.”(나춘환 씨)

취재가 끝나고 백사마을을 떠날 무렵. 이 마을에서 53년 동안 살아온 윤석분 씨(83)는 작은 부탁을 해왔다. 이제 곧 떠날 마을. 사진 좀 찍어 줄 수 있느냐고.

“4통에 살던 주민들 다 떠났어. 나랑 요기 앞집, 동생네만 남아있지. 나중에라도 여기 모습 좀 간직하고 싶은데, 여기저기 다 담아줄 수 있을까.”

찰칵찰칵. 어딘가로 흩어져 보이지 않던 봄 아지랑이 냄새가 코끝을 스쳐간다. 할머니의 수줍은 옅은 미소를 따라. 내년 봄, 제비들은 어느 처마 밑에서 둥지를 틀까.


김수현 newsoo@donga.com·이소연 기자

#50년#고향#마지막 달동네#백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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