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고나 모찌이이이이...... 당고나 모찌이이이......"
나의 경우는, 이단어가 우리의 순수한 말인지? 아니면 일본식민지하에서 우리 선조들이 사용했던 말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http://newsplu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9/29/2014092901537.html?inside
6/25 동란직후, 그때 나의 부모님은 고향에서 멀지 않은 도시인 "김제"로 삶의 터전을 옮겨, 피난살이를 하면서, 기차역에서 조금 떨어진곳의 큰대로변(당시)에 있는 주택및 상가 건물인, 일본식 주택에서 대식구가 옹기종기 엉켜 살면서, 생업으로, 당시에 흔히 말하던, 구멍가게를 부모님께서 운영하셨던 기억이 어렴푸시 남아 있다. 지금계산으로 한다면, 자동차로 불과 30분 거리도 안됐을 지척간 이지만, 당시 나의 어린 생각으로는 구만리 이상을 떠나 객지에서 사는것으로 이해 됐었던것이다.
추운 겨울이되면 바람도 모질게 불어대서 가게밖 대로변을 걸을때는 정말로 살을 찢어내는듯이 엄습해 오는 추위와 싸우면서 살아남기위해, 너무나 커서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다시한번 움켜쥐고 떨어야만 했었다. 더춥게 느꼈던 이유중의 하나는 살고 있던집이 적산가옥이라서 밤에 잠을 잘때는 식구들 모두가 온돌방이 아닌 다다미(침대에 사용되는 매트레스 같은)위에서 구호물자로 받은 담요 아니면 피난 나올때 머리에 이고 간직해 오던 솜이불 조각을 덮었기에 더 한기를 느꼈었던것 같다. 그때 나는 여섯살 정도 였을 것이다.
피난집에서 약 1킬로 떨어진 기차 정거장에서 새벽에 화물열차겸 여객열차가 추위에 떨면서 기적을 울리는 소리에 일찍 눈이 떠지면, 옆에서 같이 자고 있던 형들이, 조그만 유리창문에 하얗게 서려있는 성애를 가르키면서, ' 내일이 크리스마스날' 이라고 말해주던 생각도 난다.
그말의 뜻이 무엇인지,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형들도 그말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옆에서 어른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그대로 옮겼을것으로, 지금의 나는 기억을 더듬는다.
"당고나 모찌이이이..... 당고나 모찌이이....." 크리스마스 이브의 늦은 밤에도 어김없이 그소리는 우리집앞을 지나치고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후에 모찌는 찹쌀떡속에 팥을 으깨어 넣고 동그랗게 골프공 크기로 만들어 밤에 출출할때 식구들이 모여 앉아 배고픔을 달랬던 일종의 스낵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당고'는 이름뿐이지 어떤 스낵이었는지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안타깝다.
우연히 조선일보의 그옛날 신문기사를 보았을때, 야간 행상에 대한 추억담을 되살아나게 한점 고맙게 생각하면서, 당시에 사용했던 단어들도 서울과 지방간에 서로 달랐었지만, 내용물은 거의 대동소이 했었다는것도 뒤늦게 알았다.
사진에서 보는 야식행상들은 내가 보고 겪었던 당시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사진에서 처럼 구룹으로 다닌것은 아니었고, 내가 살던 피난처에서는 야식장수 혼자서 외롭게, 그리고 처량하게 구호를 외치면서 지나쳤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직 젊어서 사회생활 할때는 가난하고 찌들고 궁상맞은 그런 광경을 가끔씩 볼때는 지금처럼 연민의 정을 느끼지는 못했었다. 대신에 왜 선조들은 지금의 젊은 우리들 처럼 열심히 일하지 않고 그런 궁상맞은 삶을 살아갈까?라는, 제법 통큰 인생살이를 할것 처럼 속으로 비웃기도 했었다.
똑 같은 당시의 사회풍경의 한장면을 다시 보는 느낌은 저런 어려운 삶을 선조들은 자식들을 위해서 살으셨구나 라고 질곡하고, 배고픈 삶을 살으신 부모님 세대들에게 미안하고 감사하고 그런 마음이다. 세월이 흘러 온갖 삶의 경험을 몸으로 터득한 어느덧 노인 세대에 나자신이 살고 있기에 보는 방향이 달라서인것만은 아니다. 그런 어려운 고난의 삶을 살았기에, 당시의 사회상의 한장면을 다시보는순간 가슴이 아리고 죄스러워짐을 느끼기 때문이다.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있을때, 아버님, 어머님께서 당신네들이 살아온 삶의 경험이 곁들인 Discepline을 하실때는, 직접 대고 말대꾸는 못했어도 속으로는 잔소리하시는것으로 간단히 치부하곤 했었다. 지금은 왜 그때 그랬을까?라고 후회와 이세상에 안계시는 부모님에 대한 죄스러움에 가슴이 메여지곤 한다. 그때문인지 지금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나의 아이들에게는 할수만 있다면 말을 아끼고, 간섭을 안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대신에 행동으로 아빠 엄마가 살아온 삶의 경험을 보여 줄려고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사람사는 냄새가, 그때와 비교해서, 매말라가는 요즘의 이웃간에 인정미를 배푸는 자세로 살아가기를 항상 Emphasizing 하면서.
'온고지신' 이라는 idiom을 연상해 본다. 이문구표현이 제대로 됐는지도 나는 잘모른다. 한자로 표현 했으면 더 뜻이 확실할텐데, 이상하게도 한자와는 인연이 없었던지, 집에서나 학교다닐때 절차를 밟아 배운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시골집에서 중학교 다닐때 아버님께서 보시는 신문을 어깨 넘어로 흩어본것중에서 몇자 정도 기억할 뿐이다.
이말의 뜻이 품고 있는 내용들을, 오늘의 풍부한 세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몸에 비유한다면, 허리부분정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잘 이해하고 평상시 생활에서 교훈으로 삼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90세의 아버지는 70세의 아들을 바라볼때, 어린아이를 물가에 둔것처럼 불안해 하시는것 처럼, 요즘의 젊은 세대들을 바라볼때는 spirit of conservation이 조금은 결여되여 있는것은 아닐까?라는 조바심이 있다. 오늘의 젊은 세대들은 전쟁후 페허로 잿더미만 남았을때 창자가 베베 꼬이는듯한 배고픔을 느껴본 그런 경험이 없기에, 더 냉소적으로 치부하고 지나칠 확률이 더 많을것 같다. 해방둥이로 어려서 전쟁을 겪었던 내자신도 젊어서 그랬던것 처럼........그것이 큰 실수였음을 나처럼 늦게 깨닫는 우를 되밟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나의 경우는, 이단어가 우리의 순수한 말인지? 아니면 일본식민지하에서 우리 선조들이 사용했던 말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http://newsplu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9/29/2014092901537.html?inside
6/25 동란직후, 그때 나의 부모님은 고향에서 멀지 않은 도시인 "김제"로 삶의 터전을 옮겨, 피난살이를 하면서, 기차역에서 조금 떨어진곳의 큰대로변(당시)에 있는 주택및 상가 건물인, 일본식 주택에서 대식구가 옹기종기 엉켜 살면서, 생업으로, 당시에 흔히 말하던, 구멍가게를 부모님께서 운영하셨던 기억이 어렴푸시 남아 있다. 지금계산으로 한다면, 자동차로 불과 30분 거리도 안됐을 지척간 이지만, 당시 나의 어린 생각으로는 구만리 이상을 떠나 객지에서 사는것으로 이해 됐었던것이다.
추운 겨울이되면 바람도 모질게 불어대서 가게밖 대로변을 걸을때는 정말로 살을 찢어내는듯이 엄습해 오는 추위와 싸우면서 살아남기위해, 너무나 커서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다시한번 움켜쥐고 떨어야만 했었다. 더춥게 느꼈던 이유중의 하나는 살고 있던집이 적산가옥이라서 밤에 잠을 잘때는 식구들 모두가 온돌방이 아닌 다다미(침대에 사용되는 매트레스 같은)위에서 구호물자로 받은 담요 아니면 피난 나올때 머리에 이고 간직해 오던 솜이불 조각을 덮었기에 더 한기를 느꼈었던것 같다. 그때 나는 여섯살 정도 였을 것이다.
피난집에서 약 1킬로 떨어진 기차 정거장에서 새벽에 화물열차겸 여객열차가 추위에 떨면서 기적을 울리는 소리에 일찍 눈이 떠지면, 옆에서 같이 자고 있던 형들이, 조그만 유리창문에 하얗게 서려있는 성애를 가르키면서, ' 내일이 크리스마스날' 이라고 말해주던 생각도 난다.
그말의 뜻이 무엇인지,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형들도 그말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옆에서 어른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그대로 옮겼을것으로, 지금의 나는 기억을 더듬는다.
"당고나 모찌이이이..... 당고나 모찌이이....." 크리스마스 이브의 늦은 밤에도 어김없이 그소리는 우리집앞을 지나치고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후에 모찌는 찹쌀떡속에 팥을 으깨어 넣고 동그랗게 골프공 크기로 만들어 밤에 출출할때 식구들이 모여 앉아 배고픔을 달랬던 일종의 스낵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당고'는 이름뿐이지 어떤 스낵이었는지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안타깝다.
우연히 조선일보의 그옛날 신문기사를 보았을때, 야간 행상에 대한 추억담을 되살아나게 한점 고맙게 생각하면서, 당시에 사용했던 단어들도 서울과 지방간에 서로 달랐었지만, 내용물은 거의 대동소이 했었다는것도 뒤늦게 알았다.
사진에서 보는 야식행상들은 내가 보고 겪었던 당시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사진에서 처럼 구룹으로 다닌것은 아니었고, 내가 살던 피난처에서는 야식장수 혼자서 외롭게, 그리고 처량하게 구호를 외치면서 지나쳤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직 젊어서 사회생활 할때는 가난하고 찌들고 궁상맞은 그런 광경을 가끔씩 볼때는 지금처럼 연민의 정을 느끼지는 못했었다. 대신에 왜 선조들은 지금의 젊은 우리들 처럼 열심히 일하지 않고 그런 궁상맞은 삶을 살아갈까?라는, 제법 통큰 인생살이를 할것 처럼 속으로 비웃기도 했었다.
똑 같은 당시의 사회풍경의 한장면을 다시 보는 느낌은 저런 어려운 삶을 선조들은 자식들을 위해서 살으셨구나 라고 질곡하고, 배고픈 삶을 살으신 부모님 세대들에게 미안하고 감사하고 그런 마음이다. 세월이 흘러 온갖 삶의 경험을 몸으로 터득한 어느덧 노인 세대에 나자신이 살고 있기에 보는 방향이 달라서인것만은 아니다. 그런 어려운 고난의 삶을 살았기에, 당시의 사회상의 한장면을 다시보는순간 가슴이 아리고 죄스러워짐을 느끼기 때문이다.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있을때, 아버님, 어머님께서 당신네들이 살아온 삶의 경험이 곁들인 Discepline을 하실때는, 직접 대고 말대꾸는 못했어도 속으로는 잔소리하시는것으로 간단히 치부하곤 했었다. 지금은 왜 그때 그랬을까?라고 후회와 이세상에 안계시는 부모님에 대한 죄스러움에 가슴이 메여지곤 한다. 그때문인지 지금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나의 아이들에게는 할수만 있다면 말을 아끼고, 간섭을 안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대신에 행동으로 아빠 엄마가 살아온 삶의 경험을 보여 줄려고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사람사는 냄새가, 그때와 비교해서, 매말라가는 요즘의 이웃간에 인정미를 배푸는 자세로 살아가기를 항상 Emphasizing 하면서.
'온고지신' 이라는 idiom을 연상해 본다. 이문구표현이 제대로 됐는지도 나는 잘모른다. 한자로 표현 했으면 더 뜻이 확실할텐데, 이상하게도 한자와는 인연이 없었던지, 집에서나 학교다닐때 절차를 밟아 배운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시골집에서 중학교 다닐때 아버님께서 보시는 신문을 어깨 넘어로 흩어본것중에서 몇자 정도 기억할 뿐이다.
이말의 뜻이 품고 있는 내용들을, 오늘의 풍부한 세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몸에 비유한다면, 허리부분정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잘 이해하고 평상시 생활에서 교훈으로 삼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90세의 아버지는 70세의 아들을 바라볼때, 어린아이를 물가에 둔것처럼 불안해 하시는것 처럼, 요즘의 젊은 세대들을 바라볼때는 spirit of conservation이 조금은 결여되여 있는것은 아닐까?라는 조바심이 있다. 오늘의 젊은 세대들은 전쟁후 페허로 잿더미만 남았을때 창자가 베베 꼬이는듯한 배고픔을 느껴본 그런 경험이 없기에, 더 냉소적으로 치부하고 지나칠 확률이 더 많을것 같다. 해방둥이로 어려서 전쟁을 겪었던 내자신도 젊어서 그랬던것 처럼........그것이 큰 실수였음을 나처럼 늦게 깨닫는 우를 되밟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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