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에 University of Guelph 여학생이, 남녀평등이 실질적으로는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면이 많이 있다고 하면서, 남성들은 더우면 윗옷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 하는데 대한, 남녀불평등의 시정과 사회적 통념을 깨기위해 Topless인채로 교정을 활보 하다가, 황급히 출동한 경찰에 의해 연행되고, 결국 재판정에 출두 하여, 캐나다를 포함한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재판을 받았는데, 판사의 판결은 남녀평등의 원칙을 앞세워 그여대생의 손을 들어 주어, 그후부터 여성들도 법적으로는 엄연히 남성들이 하는것 처럼, 더우면 윗옷을 벗어 던진채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 할수 있는 권리를 찾았었다는 뉴스를 접한적이 있었다.
그후 그여대생의 행보에 대한 뉴스가 더이상 미디어를 탄 일은 없었던것 같다.
그런데 오늘, 그때 뉴스를 제공했던, 같은 고장 Guelph에서 여성행동주의자들이 그 권리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차원에서, 특별한 행사를 했다고 한다. 생각보다 많은 구경꾼들은 없었지만, 그나마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여성보다는 남성들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상기온으로 영상 29도에 체감 온도는 35도를 넘었다고 오늘 방송에서는 뉴스로 내보내는것을 들었는데, 이기회를 놓칠세라 여성들이 알몸으로, 남녀평등(?)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준 것이라고 한다. 구경꾼들인 남성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낄낄 거리면서 눈요기를 하기에 정신이 나갔었을것은 안보아도 뻔하게 느껴진다. 처음이라고 그럴것이라고 생각하는것은 Nonsense라고 믿는다. 이러한 행사장에서 또는 거리에서 상반신을 벗어던진 여성들이 활보하는것을 보면, 처음도 끝도 없이 뭇 남성들의 시선이 집중될것은 확실할것이라고 믿는다.
얼마전 여성전공이 전봇대에 올라가서 Power Line을 수리하고, 남성전공은 지상에서 그녀를 위로 올려다 보고 있는 장면을 본 기억이 오늘 새삼 떠 오른다. 나의 생각으로는 남녀평등은 남자가 할일, 여자가 할일을 하는것이 남녀평등의 보편적인 개념이 아닐까?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인류창조이래 여성이 윗옷을 벗지 않은 것은 신체적 구조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됐었기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려야 할곳은 가려야 여성다운 아름다운면이 더 가치의 빛을 발하게 되는것이고, 또 여성은 Breast를 통해 손수낳은 새생명을 키우는 귀중한 몸의 일부인데, 그래서 외부와 원치않는 접촉을 방지하기위한 깊은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전세계인류의 약 70% 이상은 아직 성적으로 왕성한 세대들인데, 노출된 여성의 상반신을 보는 그들의 감정은 어디로 치달을까? 사회적 사고가 많아질것은 자연의 순리로 귀결될 것이다. 내가 아직 어렸을때 부모님들은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말씀들을 자주 하시는것을 들은 기억이 있다. 아예 처음부터 그러한 빌미를 주지도 받지도 않게 하려는 어른들의 사려깊은 경험에서 였음을 그후에 알았었다.
오늘 이번 행사를 주관한 그여성들은 앞으로도 심한 더위가 계속될때는 편의를, 남녀평등을 핑계로 윗옷을 벗어 던지고, 지정된 장소가 아닌, 거리나 공공장소에서 출렁거리는 Breasts를 자랑스럽게(?) 앞세우고 활보 할수 있을까? 우연히 길거리를 활보하는 윗옷을 벗어던진, 남성과 여성이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걷는 그림을 그려보자. 자연스러울까? 말없이 조용히 지켜보고있는 다수의 여성들이 그행동에 동조하고, 실제 행동에 동의하고, 참여 할수있다고 믿어도 될까? 나의 아내 Lunar에게도 고견을 물어 보아야 겠다. 그녀로 부터 터져 나올 결과를 나는 알고 있다. '배부르니 별 미친 소리를 다하고 있다' 라고. 아이고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과연 뭐가 헌법에 보장된 권리이고 남녀평등인지?
이곳의 언론과 고국의 언론에서 이광경을 다룬 신문기사를 옮겨본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30/2010083000257.html?Dep1=news&Dep2=headline2&Dep3=h2_01
http://www.thestar.com/news/gta/article/853959--topless-in-guelph-legal-and-loving-it?bn=1
Sunday, August 29, 2010
Friday, August 27, 2010
전통 숯가마속에서 찜질방을 즐긴다니.....마음은 그곳으로
옛날 조상님들이 즐겨 했던 전통 찜질방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문명의 발달로 그동안 자취를 감추다 시피했던 참나무숯을 굽는 숯가마를 이용하는것이 바로 이것이란다.
참나무숯을 굽는데, 참나무 기둥을 가마솥(Kiln)에 쌓아놓고 약 1주일을 계속 불을 지펴 땐다. 다된다음 가마 입구를 헐고, 갈구리로 잘 탄 숯을 끄집어 내어,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다. 가마속에서 하얗게 힘차게 타오르는 불꽃을 서영감님은 '내가 만들어낸 불꽃'이라고 설명한다. 그때의 온도는 섭씨 1400도쯤 된다고 하니, 옛날 어렸을때 시골 동네를 돌아 다니면서 구멍난 냄비를 납으로 때워주던 땜쟁이 아저씨가 사용했던 조그만 용광로의 온도보다 더 훨씬 높을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후에 약 200도 정도로 식으면, 동네 사람들이나 관광객들이 화학섬유가 아닌 무명옷이나 수건을 몸에 두르고 그숯가마속으로 들어가 열탕을 즐기는데, 그온도가 약 2일간 지속된다고 하는구나. 완전히 열이 식으면 숯굽는 서영감님은 다시 그안에 참나무기둥을 차곡차곡 쌓아 놓고 다시 약 일주일간 불을 땐단다. 즉 또다른 Cycle이 시작되는 것이다.
보통 그안에 들어가면 약 5시간 정도를 비지땀을 흘리면서 즐기는데, 구슬땀을 흘리다가, 다시 밖으로 나와 펼쳐져 있는 멍석위에 누워서 땀을 식히고, 갈증을 해소하기위해 연속 몇컵의 물을 마셔대고....
소문은 소문을 타고 널리 퍼지는법. 전국적으로 퍼져 이러한 전통 숯가마 찜질방이 대유행이라고 한다. 아무튼 못말리는 한국사람들의 특성을 여기서도 보는것 같다. 요즘은 아니지만 1970년대말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곳 토론토에서도 그러한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 교민들의 삶의 주업종인 Convenience Store가 성업중일때, 어느가게가 좀 잘된다는 소문이 나면, 얼마후에는 그옆에 새로운 가게를 Set-up하곤 해서 죽자 살자식으로 경쟁을 했었던, 결국 둘다 피해자가, 실패자가 되곤 했었던 기억이 떠오르게 한다.
강원도 횡성에서 처음 이사업을 우연히 시작했던 '서 석구'씨는 걱정이 많다고 한다. 이소문이 언론에 나자 전국에서 우후죽순격으로 비슷한 참숯찜질방이 문을 열어, 지금은 전국적으로 약 150개가 넘게 사업경쟁을 벌이고 있어, 이제는 돈벌이 되는 사업이 아니라고 한다. 지금까지는 곁가지로 발생했던 찜질방에서 수입의 주종을 이루었는데, 이제는 옛말이 되여가고, 다시 원래의 참숯구어 파는 수입으로 명맥을 이어가게 됐단다.
한참 사업이 전성기였던 2002-2004년경에는 전체 38개의 숯가마중에서 6개씩 관광객들에게 개방하여 하루에 약 450여명씩, 일인당 약 11,000원( 미화 약 9달러)씩 받고, 많은 수입을 올렸었단다.
숯가마 찜질방이 성공할수 있었던 것은 참숯과 질흙이 몸의 건강에 좋은 효과가 있다는 오랜전통의 민간 요법에서 유래 한다고 한다. 옛날에는 새색씨가 아기를 낳으면 출입문 입구에 참숯덩이를 매달은 금줄(탯줄?)을 매달어놓고 잡귀의 침입을 막아냈었다는 풍습이 있었다. 요즘에도 새로 집을 지을때는 거실한곳에 숯덩이를 보관하여 냄새를 없애고 또 공기정화를 시킨다고 한다.
서영감님의 숯가마 아궁이에서 안을 들여다 보면 하얗게 발열하는 불빛을 보면서, 관광객들은 자기네 마음까지도 깨끗해짐을 느낀다고 토로하고 있다. 40세의 임현오씨는 원래 쓰래기 소각장을 운영 했었는데, 그영향으로 온몸에 피부병이 생겨 의사의 치료를 계속 받았었으나 효과가 없어, 금년초에 우연히 이곳에 들려 찜질방을 이용해 본후 주기적으로 찾아 이용했는데 지금은 피부병이 거의 낳아, 아예 이곳에서 Part-time Job을 잡아 참숯가마에서 일하면서 돈을 벌어,참숯가마 찜질방을 이용하는 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면서 좋아 한다.
"관절염이나 암환자들이 몇개월씩 장기간 숯가마를 세내어 그곳에 기거 하면서 치료를 하고 있어요. 아마도 숯가마에서 나오는 열이 몸속에서 묻혀 있는 노폐물들을 땀으로 빠져 나오게 하는 역활을 하고 있다는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읍니다" 라는 설명이다.
서영감님의 옆에서 같은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경쟁자들은 많은 자금을 투자하여 샤워시설과 정원을 아름답게 꾸며 손님들을 유치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떤곳은 아예 참숯구이 불갈비 식당도 겸하고....
그러나 서영감님 영업장에는 그러한 현대식 시설이 거의 없다. "우리는 우리의 할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기에, 우리는 숯가마에 불을 때서 참숯을 만들뿐, 이곳은 스파가 아니다"라고 변형된 영업을 간접적으로 질타했다. 돈의 위력을 무시 하는것은 아니지만, 문명을 탈피하고, 못살았을때 서민들이 즐겨 찾았던 민간 요법을 그대로, 비록 이용하기에 불편하다해도, 체험 하도록 해 보는것도 큰 의미가 있을텐데.....
문득 높은 굴뚝을 상징으로 길게 만들어진 벽돌가마가 세워져 있었던, 고향동네가 생각난다.
매일 아침 저녁 학교를 오가면서 그곳을 지나쳤었다. 한번 벽돌을 굽게 되면, 며칠간을 긴가마 여러곳에 있는 아궁이에 장작불을 피워 벽돌을 굽던, 굴뚝에서는 새하얀 연기가 하늘 높을줄 모르고 피워 올랐었던, 특히나 초가을의 구름한점없던 파란 하늘위로 솟아 오르는 연기는 때로는 바람에 휩쓸려 끌려가듯 옆으로 날리기도 했었고, 바람이 없는 날에는 곧바로 위로 뻗어 올라가는 모습을 고개가 빠져라 올려다 보곤 했었다. 이제는 기억속에서만 볼뿐이다. 그기억속에 있는 고향으로 마음은 바삐 달려간다. 이미 다 변해 버렸겠지만..
서영감님이 운영하는 참숯찜질방과 같은 현대판 찜질방이 전국의 각도시에, 참숯대신 전기히터를 이용하여 성업을 하고 있음을 나도 알고 있다. 지난번 고국을 방문했을때, 처음으로 말로만 들어왔던 그찜질방을 두번, 친구분들과 함께 이용했었다. 겉모양은 참숯가마처럼 검댕이도 칠해져 있었고....그것마져도 나에게는 옛정취를 충분히 느낄수 있게 했었다. 이방인이어서 였을까? 아니면 시간의 흐름속에서 찾아 볼려고 했던 희미한 기억의 망상에서 였을까? 서영감님의 사업이 계속 잘되기를 바랄뿐이다.
http://www.nytimes.com/2010/08/27/world/asia/27iht-kiln.html?_r=1&ref=asia
Saturday, August 21, 2010
3대째 세습체제를, 전 세계에 통고 하고 있는데.....
오는 9월6에 인민 전당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그것도 북한 노동당 창건 44년의 역사상 최대의 규모로 진행 될것이라고 한다. 스트로크로 반신불수가 된것으로 세상에 알려진 김정일의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다. 그가 몸을 움직이고, 어눌한 말이라도 할수 있을때, 고분고분하게 잘 길들여진 강아지처럼 그의 아버지 말을 잘 들어온 3째 아들에게, 노동당 전당 대회에서, 세습체제를 이양 할것을 천명 할것으로 서방 세계는 주시하면서 그날을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지구상의 많은 종이 호랑이들이 안타깝게만 보인다. 이해가 안되고, 또 동의할수 없는, 분명한 점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가, 그들의 말을 잘 듣지않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압박도 가하고, 그래도 고분고분 따르지 않을때는, 무력을 동원하여 그정권을 쫓아 내는데 주저 하지 않다는 증거를 세계 도처에서 보고 있고, 현재도 진행형이 여러곳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유독히도 북괴의 김정일과 그 Regime에 대해서만은 무력은 고사하고, Warning도 못하고, 꺼꾸로 그 Regime의 공갈에 질질 끌려 다니기만 하는, 도저히 이해 할수가 없는 그내막을 나는 도저히, 그수수깨끼가 풀어 지지않고 있다. 그들은 보라는듯이 이번 전당 대회를 사상최대로 진행할것이라고 공공연히 전세상에 통고형식으로 알리고 있다. 한,미 양국의 군사훈련이 서해상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동해상에서는 이러한 훈련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라는 식으로 항의 하듯이, 남쪽의 어선을 납치하여 흥정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속수무책으로 남한정부나 미국은 마치 그들의 눈치만 보는듯한 자세로 일관하고 있는점이 더 궁금하게 만들고 있다. 더욱더 이해가 안되는점은, 북쪽과 대치하고 있는 남쪽 정부의 어정쩡한 자세다. 자기 마음데로 이북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입에 담지못할 욕짖거리를 남한 정부에 해댄 그자가 또 자기 마음데로 이번에는 휴전선을 넘어서 남쪽으로 넘어왔는데도, 겨우 한다는짖이, 그가 남한국민이기때문에 입국을 저지할수 없다는 궁색한 변명으로 일을 처리하고, 경찰 유치장에 가두어서 조사중이라고 하니.... 북괴정부는 이를 두고, 죄없는 시민을 가두어 인권을 유린하는 독재정권이라고 남한 정부를 연일 악의에 찬 비난을 퍼붓고 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굶주림과 공포가 두려워 탈북했다가 불행하게도 붙잡혀서, 북괴땅으로 되돌려 보내면, 죄의 유무를 묻기는 고사하고,당장에 공개총살형을 파리목숨죽이듯하는 그런 인간 이하의 집단들에게, 어째서 일까? 전세계가 벙어리가 되여 버린것 처럼 나에게는 보이니 말이다. 자유는 그냥 공짜로 누려지는것은 아닌데....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이상의 힘이 필요로 하고, 그러기위해서 우리는 대비책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라고 천명하면서, 공산주의의 종주국 쏘련방을 총한방 사용하지 않고, 무릎을 꿇게하고, 그나라를 포함한 위성국가들의 국민들에게 자유를 누리게 해주었던 Ronald Regan 대통령이 새삼 그립다. 허지만 그러한 대통령의 메세지가 북한 Regime에게는 먹혀 들어가지 못한것이, 시기적으로 남쪽의 좌파정부가 들어서는 시기와 맞물려, 김정일 정권은 이를 최대한 이용하여,핵무기까지 개발하는 허세를 부리면서 오늘에 이르렀는데, 그여세를 몰아 이제는 전세계를 상대로, 아들'정은'에게 왕위를 이양할려고 하니, 축하해달라는식의 통고를 거침없이 해대고 있다고 한다. 아 불쌍한 북한의 동포를, 무시무시한 김정일과 그 Regime의 공포정치와 굶주림으로 부터 해방시킬, 진정한 나라나 사람은 누구이며, 그시기는 언제가 될까? 6/25 사변이 끝나고, 아직 어수선한 속에서 국민학교에 입학했을때, '이제 평란됐으니 멀지않아 남북통일도 될것이다'라고 약 58년전에 하셨던 아버님의 그 말뜻이 새삼 두렵기만 해진다. 그때 그말씀을 하셨던 아버지의 삶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가고있는 내자신의 세대에, 마음놓고 고국한반도 제주에서 북한 두만강을 건너서 광할한 중국과 쏘련땅을 자동차로 달려볼수 있는 진정한 평화를 누려볼수있게 되기를, 마음속에 깊이 새겨볼 뿐이다.
http://www.theglobeandmail.com/news/world/asia-pacific/rise-of-kim-jong-ils-son-gives-birth-to-cult-legend/article1729489/
http://www.cnn.com/2010/WORLD/asiapcf/09/27/north.korea.promotion/index.html?hpt=T2
http://www.latimes.com/news/nationworld/world/la-fg-north-korea-successor-20100928,0,3334344.story
http://www.cnn.com/2010/OPINION/09/26/north.korea.future/index.html
http://www.nytimes.com/2010/09/28/world/asia/28korea.html?_r=1&ref=asia
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10/09/26/AR2010092603801.html?hpid=topnews
http://www.nytimes.com/2010/09/16/world/asia/16korea.html?_r=1&ref=asia
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10/09/13/AR2010091303245.html
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10/08/26/AR2010082601093.html
http://www.nytimes.com/2010/08/27/world/asia/27korea.html?_r=1&ref=asia
http://online.wsj.com/article/SB10001424052748703579804575441461274411060.html?mod=WSJ_hpp_sections_world
힘은 필요할때 꼭 사용하게 되면 평화를 다시 찾는것이고, 이를 함부로 휘두르면 많은 살상이 이루어짐을, 내삶속에서도 무수히 보아왔다. 전세계가 평범한, 진리라기보다는, 상식이 더 이상은 통하지 않는 지구로 전락했다. 9월6일 이후의 북한 Regime과 전세계의 종이호랑이들의 북괴눈치 보는 재미가 역설적으로 흥미로울것만 같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권력 세습체제가 김정일과 그일당이 계획하는데로 순조롭게 치러지게 될것이라는 낙관도 금물이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예기치 못하는 일들이 아무때고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부의 암투에서 김정일과 그일당이 쫓겨나서 새로운 얼굴이 바통을 이어받을수도 있다는 가설도 해 봄직하다. 그는 너무나 많은 죄를, 자기가 통치하고 있는 이북뿐만이 아니고 전세계를 향하여 뿌려 댔으니 말이다. 지금은 역사속으로 사라진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크'의 최후 순간이 언론을 장식했었던 당시의 모습이 떠오른다. 불쌍하여라.
사진은 김정일과 Regime이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해서, 권력세습을 위해 중국 권력층에 구걸을 끝낸다음 다시 특별열차로 귀국하고 있는 모습이다.
Tuesday, August 17, 2010
강제 합병된지 100년후의 조국을 본다....경제에 맞게 정신 연령이 성숙했으면...
금년이 조국이 일본에 강제 합병된지 100 주년이 된다고 한다. 지금으로 부터 50-60년전의 가난하고 못살았었던 기억이 나에게도 기억속에 생생하다. 지금의 발전된 조국과 당시의 나의 기억속에 저장되여 있는, 가난하고 희망도 없어 보였던 상황을 비교해 보면, 말로는 다 표현하지못할, 슬픔과 애환이 가슴과 머리속에서 메아리 쳐진다. 해방된 조국이였는데도 그렇게 어려웠던 기억만 떠오르는데, 하물려 강제로 합병된, 잃어버린 조국땅에서 주인 행세도 못하고, 노예같은, 기르는 말과 소처럼, 하라는데로 살아야 했던 조상님들과 선배님들의 당시의 삶의 질을 어렴푸시나마 그림을 그려볼수 있겠다. 얼마나 서럽고 원통했었을까? 지금의 김정일 치하의 이북동포들이 아직도 그때와 다름없는 굶주림과 고통과 노예의 생활을 하고 있음을 언론을 통해서 접하면서, 먼저간 조상님들 고달픔과 울분을 이해 할려고 한다. 조국 남한의 국민들은 이제는 정신적으로 더 성숙하여, 조국의 번영과 자유를 유지하기위한 마음의 다짐을 굳게 하시기를 바라고 싶다. 부모형제가 살고 있는 남한 조국의 정치판을 보노라면,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구별이 한되는 망나니짖들을 거리낌 없이 해대는 그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식민지 통치하에서의 그들의 부모, 친척들의 노예 생활상을, 역사를 통하여 공부하고, 현실을 직시하여, 번영된 조국의 앞날을 위해 헌신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픈 심정이다. 일제 강제 합병이나, 김정일과 그일당이 저지르는 만행이 하나도 다를게 없다는것을 정치꾼들이 마음으로 부터 이해하고 행동으로 옮겨, 정신적으로 성숙된 국민의 일원이 되여, 후세에 밀사 3인과 같은 인물들이 되기를 기대한다.
아래의 글은 고국의 조선일보에서 발췌하여 옮겨 실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7/2010082701672.html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8/2010082800039.html?Dep1=news&Dep2=top&Dep3=top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5/2010082501539.html?Dep1=news&Dep2=top&Dep3=top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18/2010081800038.html?Dep1=news&Dep2=top&Dep3=top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0/2010082000094.html?Dep1=news&Dep2=top&Dep3=top
[韓·日 강제병합 100년… 조선의 운명 가른 '다섯 조약' 현장을 찾아] '나라로서의 한국은 이번 주 사라진다'
이한수 기자 hslee@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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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8.18 03:06
뉴욕타임스 1910년 8월 22일자 제목
미국과 영국 등 서구 언론들은 한·일 강제병합 조약 체결 전부터 일제의 한국병합 사실을 타전하고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1910년 8월 18일자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다(JAPAN IS ABOUT TO ANNEX KOREA)'라는 제목의 도쿄발(發) 기사에서 "오래전부터 예견되던 일본의 한국 병합이 곧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의 독립은 이미 1905년 11월 17일 일본과 맺은 조약(을사늑약) 때 실질적으로 종식됐다"고 보도했다.
▲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을 보도한 뉴욕타임스 1910년 8월 22일자. ‘나라로서의 한국은 이번 주 사라진다’는 큰 제목과 ‘어떤 소요도 예상되지 않는다’ ‘철저한 경찰 통제 때문에 한국인들은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전혀 모른다’는 소제목들이 달렸다.
뉴욕타임스는 이어 8월 20일자에 "한국 전역은 일본의 강력한 군사적 감시하에 있으며, 수많은 일본 군함이 한국 해안을 순찰하고 있다"면서 "일본은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여러 정황들을 볼 때 병합은 임박했다"고 썼다. 8월 22일자에는 '나라로서의 한국은 이번 주에 사라진다(KOREA AS A NATION TO END THIS WEEK)'라는 제목 아래 "일주일 내에 '은둔의 왕국' 대한제국(Empire of Korea)은 역사적 용어가 되고, 1200만 인구는 일본에 더해지며, 잉글랜드만 한 크기의 영토는 일본제국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후 '한국은 이제 일본'(23일), '일본, 한국병합 공포한다'(25일) 등 연일 한·일 강제병합 소식을 전했다.
영국 유력지 더타임스도 8월 25일 "일본의 한국병합이 언제든 실현되리라는 것은 이미 예견되어 왔으며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면서 "대영제국은 영·일동맹에 따라 일본이 한국에서 우월한(paramount) 정치·군사·경제적 이익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했었다"고 보도했다. 더타임스의 관심은 한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영국의 경제적 이익에 관한 것이었다. 8월 27일자 더타임스의 '편집자에게' 코너에 '일본과 한국'이란 글을 실은 독자는 "일본은 상업 및 산업에서 모든 나라에 동등한 기회 원칙을 약속했는데 이것이 제대로 실행되어야 한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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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8.11 02:43 / 수정 : 2010.08.11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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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형사재판소 소장 등 지금은 한국인들 맹활약
和 "G20 초청해달라" 로비도…
네덜란드 의회와 정부 사무실이 모여 있는 헤이그 도심 비넨호프(Binnenhof) 광장 한가운데 자리 잡은 '기사의 집(The Hall of Knights)' 탑의 시계가 오후 3시를 가리켰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자동차가 한가롭게 손님을 맞았다. 관광객과 행인들이 벤치에서 잠시 지친 다리를 쉬었다. 1907년 6월 26일 지구 반대편 대한제국에서 온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밀사 3명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이보다 훨씬 분주했을 것이다.
1907년 6월 15일 오후 3시, 45개국 대표 239명이 참석한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가 '기사의 집'에서 막을 올렸다. 헤이그시(市) 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사진은 이날 비넨호프 광장에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각국 대표단이 마차를 타고 잇달아 회의장에 입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개막 열흘 뒤인 6월 25일 헤이그역(Hague HS)에 도착한 이상설 등은 회의장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다. 1905년 9월 이범진 주러시아 대한제국 공사가 만국평화회의 주최국인 러시아로부터 초청을 받았으나, 정작 회의 직전에는 일본의 보호국이란 이유로 공식 초청장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1905년 을사늑약은 무효다." "일본은 우리를 식민 상태로 몰아넣고 독립을 존중한다고 한다." 프랑스어와 영어에 능통했던 스무살 청년 이위종은 닫힌 회의장 앞에서 연설한 뒤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입장료 6유로(약 9300원)를 내고, 안내원이 딸린 '기사의 집' 투어에 참가했다. '기사의 집'은 높이 26m의 천장 아래 쇠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를 끼워 맞췄다. 13세기 중반에 처음 세워졌고, 1900년쯤 대대적 수리를 마친 이곳은 제2차 만국평화회의 당시엔 더 당당하게 보였을 것이다.
좁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자 당시 밀사들이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했던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오른쪽 왕좌(王座) 위에 알파벳 'B'가 새겨져 있다. 베아트릭스(Beatrix) 현 네덜란드 여왕 이름의 첫 글자다. 여왕은 매년 9월 셋째 화요일에 황금마차를 타고, '기사의 집'에 와서 왕좌에 앉아 다음 해 시정 방향을 알리는 연설을 한다. 네덜란드 상·하원, 정부 각료는 물론 왕족과 외교관들까지 참석하고, 언론이 열띤 취재경쟁을 벌이는 성대한 행사다. 1904년 빌헬미나 여왕이 시작한 이래 100년 넘게 이어지는 전통이다.
열강들이 각축하던 시기에 세계 평화를 도모한 만국평화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안으로 제1차 회의가 1899년 헤이그에서 2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헤이그가 회의 장소로 선택된 것은 네덜란드가 당시 대표적 중립국이었고, 여러 차례 평화회의를 개최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07년 6월 제2차 회의가 속개됐고, 그해 10월 18일 폐막한 만국평화회의는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관한 협약' 등 협약 13개와 선언 2개, 권고 5개 등 국제 사회의 새 규칙을 만들어냈으며, '국제중재재판소' 설치(1909년)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남겼다.
▲ 네덜란드 정치 1번지로 꼽히는 헤이그 비넨호프 광장의‘기사의 집’. 1907년 한국의 밀사들이 입장을 거부당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곳이다. /헤이그〓김기철 기자
45개 참가국 대표들이 20세기 국제 사회의 새 판을 짜는 회의에 한창일 때, 회의장 밖으로 밀려난 밀사들은 일본의 침략과 한국의 독립을 알리는 외교 활동에 착수했다. 숙소인 드 용 호텔(Hotel De Jong·현 이준 기념관)에 태극기를 내건 이들은 6월 27일 각국 대표들에게 탄원서를 보내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렸다. 7월 8일, 이위종은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를 발표했다. "일본이 기마병, 보병, 그리고 포병부대를 동원해 서울을 둘러싸고 왕궁을 포위한 가운데 1905년 11월 15일 이토는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소위 을사조약을 강요했다… 우의와 형제애를 말하면서 주머니를 훔치는 위선자인 일본은 백주의 강도보다도 더 비열하고 야수적인 것이다."
헤이그 중앙역에서 서쪽으로 운하를 건너면 프린세스가(街) 6·7번지에 닿는다. 붉은 벽돌색 낡은 3층 건물 앞에는 내부수리 때문인지 출입금지선이 드리워져 있었다.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당시 각국 대표단과 사회운동가, 기자들이 모이는 '국제서클(Circle International)'이 이 자리에 있었고, 그곳에서 이위종이 '한국의 호소'를 발표했다.
고종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기대 일본의 주권침해를 고발하려 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오히려 밀사 파견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일본의 위협에 밀려 강제로 퇴위당했다. 하지만 쿤 드 퀘스터(Koen De Ceuster) 네덜란드 레이덴대 교수는 "헤이그 특사단이 한국의 식민지화를 막지 못했지만, 한국을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과 국가의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국제법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 이위종이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는 연설을 한‘국제 서클’이 있던 건물. /헤이그〓김기철 기자
고종의 밀사들이 '길거리 외교'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흔히 일본의 방해공작을 거론한다. 그러나 최근 학계는 일본뿐 아니라 영국·미국·러시아 등 서구 열강들도 한국의 만국평화회의 참가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당초 한국을 초청했던 러시아는 1906년 이즈볼스키 외상 취임과 함께 영·일과의 타협을 추진하면서 입장을 바꿨다. 제2차 영일동맹(1905년 8월 12일)으로 한국의 보호국화를 승인했던 영국은 을사늑약 이후 주한 공사관을 철수했을 뿐 아니라 러시아와 프랑스 등 다른 열강들의 공사관 철수도 종용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7월 27일)으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승인한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약한 국가' 때문에 '문명국가' 간의 전쟁이 벌어지는 사태를 막자는 것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지금 헤이그에는 송상현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과 권오곤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 부소장 등이 국제기구 간부로 활약하고 있다. 화학무기금지기구(OPCW)에도 사찰관 3명이 진출해 있다. 김영원 주네덜란드 대사는 "네덜란드로부터 오는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에 초청해달라는 로비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100년 전 회의 참석조차 거절당했던 세 밀사들이 하늘과 땅처럼 달라진 한국의 위상을 보면 자신들의 활동이 헛되지 않았다고 기뻐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일보·동북아역사재단 공동기획
http://news.joins.com/article/065/4392065.html?ctg=1005&cloc=home|list|list1
아래의 글은 고국의 조선일보에서 발췌하여 옮겨 실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7/2010082701672.html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8/2010082800039.html?Dep1=news&Dep2=top&Dep3=top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5/2010082501539.html?Dep1=news&Dep2=top&Dep3=top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18/2010081800038.html?Dep1=news&Dep2=top&Dep3=top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0/2010082000094.html?Dep1=news&Dep2=top&Dep3=top
[韓·日 강제병합 100년… 조선의 운명 가른 '다섯 조약' 현장을 찾아] '나라로서의 한국은 이번 주 사라진다'
이한수 기자 hslee@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기사100자평(10)
입력 : 2010.08.18 03:06
뉴욕타임스 1910년 8월 22일자 제목
미국과 영국 등 서구 언론들은 한·일 강제병합 조약 체결 전부터 일제의 한국병합 사실을 타전하고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1910년 8월 18일자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다(JAPAN IS ABOUT TO ANNEX KOREA)'라는 제목의 도쿄발(發) 기사에서 "오래전부터 예견되던 일본의 한국 병합이 곧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의 독립은 이미 1905년 11월 17일 일본과 맺은 조약(을사늑약) 때 실질적으로 종식됐다"고 보도했다.
▲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을 보도한 뉴욕타임스 1910년 8월 22일자. ‘나라로서의 한국은 이번 주 사라진다’는 큰 제목과 ‘어떤 소요도 예상되지 않는다’ ‘철저한 경찰 통제 때문에 한국인들은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전혀 모른다’는 소제목들이 달렸다.
뉴욕타임스는 이어 8월 20일자에 "한국 전역은 일본의 강력한 군사적 감시하에 있으며, 수많은 일본 군함이 한국 해안을 순찰하고 있다"면서 "일본은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여러 정황들을 볼 때 병합은 임박했다"고 썼다. 8월 22일자에는 '나라로서의 한국은 이번 주에 사라진다(KOREA AS A NATION TO END THIS WEEK)'라는 제목 아래 "일주일 내에 '은둔의 왕국' 대한제국(Empire of Korea)은 역사적 용어가 되고, 1200만 인구는 일본에 더해지며, 잉글랜드만 한 크기의 영토는 일본제국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후 '한국은 이제 일본'(23일), '일본, 한국병합 공포한다'(25일) 등 연일 한·일 강제병합 소식을 전했다.
영국 유력지 더타임스도 8월 25일 "일본의 한국병합이 언제든 실현되리라는 것은 이미 예견되어 왔으며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면서 "대영제국은 영·일동맹에 따라 일본이 한국에서 우월한(paramount) 정치·군사·경제적 이익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했었다"고 보도했다. 더타임스의 관심은 한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영국의 경제적 이익에 관한 것이었다. 8월 27일자 더타임스의 '편집자에게' 코너에 '일본과 한국'이란 글을 실은 독자는 "일본은 상업 및 산업에서 모든 나라에 동등한 기회 원칙을 약속했는데 이것이 제대로 실행되어야 한다"고 썼다.
100년 전 회의참석 거절당한 한국, 이제는…
1904년 전시 국외중립 선언했지만 스스로…
이토, 영국 외무장관 시골 저택까지 찾아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100년전 한국은 비슷한 처지"
조선 식민지화 겨냥한 첫 작품, 그때 그 회담장은 아직도…
창덕궁 해설팀장 "일본 관광객에겐 설명 하지 않는 것 있다"
종교ㆍ학술
[韓·日 강제병합 100년… 조선의 운명 가른 '다섯 조약' 현장을 찾아] [4]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입력 : 2010.08.11 02:43 / 수정 : 2010.08.11 07:12
고종 밀사 3명(이상설·이준·이위종) 쫓아냈던
'기사의 집(당시 회의장·The Hall of Knights)'…
이제 6유로 (약 9300원)내면 맘껏 관광
믿었던 러시아 초청 거부…
"을사늑약은 효력 없다" 회의장 앞 울분의 연설
국제형사재판소 소장 등 지금은 한국인들 맹활약
和 "G20 초청해달라" 로비도…
네덜란드 의회와 정부 사무실이 모여 있는 헤이그 도심 비넨호프(Binnenhof) 광장 한가운데 자리 잡은 '기사의 집(The Hall of Knights)' 탑의 시계가 오후 3시를 가리켰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자동차가 한가롭게 손님을 맞았다. 관광객과 행인들이 벤치에서 잠시 지친 다리를 쉬었다. 1907년 6월 26일 지구 반대편 대한제국에서 온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밀사 3명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이보다 훨씬 분주했을 것이다.
1907년 6월 15일 오후 3시, 45개국 대표 239명이 참석한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가 '기사의 집'에서 막을 올렸다. 헤이그시(市) 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사진은 이날 비넨호프 광장에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각국 대표단이 마차를 타고 잇달아 회의장에 입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개막 열흘 뒤인 6월 25일 헤이그역(Hague HS)에 도착한 이상설 등은 회의장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다. 1905년 9월 이범진 주러시아 대한제국 공사가 만국평화회의 주최국인 러시아로부터 초청을 받았으나, 정작 회의 직전에는 일본의 보호국이란 이유로 공식 초청장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1905년 을사늑약은 무효다." "일본은 우리를 식민 상태로 몰아넣고 독립을 존중한다고 한다." 프랑스어와 영어에 능통했던 스무살 청년 이위종은 닫힌 회의장 앞에서 연설한 뒤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입장료 6유로(약 9300원)를 내고, 안내원이 딸린 '기사의 집' 투어에 참가했다. '기사의 집'은 높이 26m의 천장 아래 쇠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를 끼워 맞췄다. 13세기 중반에 처음 세워졌고, 1900년쯤 대대적 수리를 마친 이곳은 제2차 만국평화회의 당시엔 더 당당하게 보였을 것이다.
좁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자 당시 밀사들이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했던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오른쪽 왕좌(王座) 위에 알파벳 'B'가 새겨져 있다. 베아트릭스(Beatrix) 현 네덜란드 여왕 이름의 첫 글자다. 여왕은 매년 9월 셋째 화요일에 황금마차를 타고, '기사의 집'에 와서 왕좌에 앉아 다음 해 시정 방향을 알리는 연설을 한다. 네덜란드 상·하원, 정부 각료는 물론 왕족과 외교관들까지 참석하고, 언론이 열띤 취재경쟁을 벌이는 성대한 행사다. 1904년 빌헬미나 여왕이 시작한 이래 100년 넘게 이어지는 전통이다.
열강들이 각축하던 시기에 세계 평화를 도모한 만국평화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안으로 제1차 회의가 1899년 헤이그에서 2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헤이그가 회의 장소로 선택된 것은 네덜란드가 당시 대표적 중립국이었고, 여러 차례 평화회의를 개최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07년 6월 제2차 회의가 속개됐고, 그해 10월 18일 폐막한 만국평화회의는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관한 협약' 등 협약 13개와 선언 2개, 권고 5개 등 국제 사회의 새 규칙을 만들어냈으며, '국제중재재판소' 설치(1909년)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남겼다.
▲ 네덜란드 정치 1번지로 꼽히는 헤이그 비넨호프 광장의‘기사의 집’. 1907년 한국의 밀사들이 입장을 거부당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곳이다. /헤이그〓김기철 기자
45개 참가국 대표들이 20세기 국제 사회의 새 판을 짜는 회의에 한창일 때, 회의장 밖으로 밀려난 밀사들은 일본의 침략과 한국의 독립을 알리는 외교 활동에 착수했다. 숙소인 드 용 호텔(Hotel De Jong·현 이준 기념관)에 태극기를 내건 이들은 6월 27일 각국 대표들에게 탄원서를 보내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렸다. 7월 8일, 이위종은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를 발표했다. "일본이 기마병, 보병, 그리고 포병부대를 동원해 서울을 둘러싸고 왕궁을 포위한 가운데 1905년 11월 15일 이토는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소위 을사조약을 강요했다… 우의와 형제애를 말하면서 주머니를 훔치는 위선자인 일본은 백주의 강도보다도 더 비열하고 야수적인 것이다."
헤이그 중앙역에서 서쪽으로 운하를 건너면 프린세스가(街) 6·7번지에 닿는다. 붉은 벽돌색 낡은 3층 건물 앞에는 내부수리 때문인지 출입금지선이 드리워져 있었다.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당시 각국 대표단과 사회운동가, 기자들이 모이는 '국제서클(Circle International)'이 이 자리에 있었고, 그곳에서 이위종이 '한국의 호소'를 발표했다.
고종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기대 일본의 주권침해를 고발하려 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오히려 밀사 파견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일본의 위협에 밀려 강제로 퇴위당했다. 하지만 쿤 드 퀘스터(Koen De Ceuster) 네덜란드 레이덴대 교수는 "헤이그 특사단이 한국의 식민지화를 막지 못했지만, 한국을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과 국가의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국제법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 이위종이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는 연설을 한‘국제 서클’이 있던 건물. /헤이그〓김기철 기자
고종의 밀사들이 '길거리 외교'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흔히 일본의 방해공작을 거론한다. 그러나 최근 학계는 일본뿐 아니라 영국·미국·러시아 등 서구 열강들도 한국의 만국평화회의 참가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당초 한국을 초청했던 러시아는 1906년 이즈볼스키 외상 취임과 함께 영·일과의 타협을 추진하면서 입장을 바꿨다. 제2차 영일동맹(1905년 8월 12일)으로 한국의 보호국화를 승인했던 영국은 을사늑약 이후 주한 공사관을 철수했을 뿐 아니라 러시아와 프랑스 등 다른 열강들의 공사관 철수도 종용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7월 27일)으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승인한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약한 국가' 때문에 '문명국가' 간의 전쟁이 벌어지는 사태를 막자는 것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지금 헤이그에는 송상현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과 권오곤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 부소장 등이 국제기구 간부로 활약하고 있다. 화학무기금지기구(OPCW)에도 사찰관 3명이 진출해 있다. 김영원 주네덜란드 대사는 "네덜란드로부터 오는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에 초청해달라는 로비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100년 전 회의 참석조차 거절당했던 세 밀사들이 하늘과 땅처럼 달라진 한국의 위상을 보면 자신들의 활동이 헛되지 않았다고 기뻐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일보·동북아역사재단 공동기획
http://news.joins.com/article/065/4392065.html?ctg=1005&cloc=home|list|list1
Sunday, August 15, 2010
Trail Walk, Presqu'ile Park에서....젊음을 되찾은 효과도
벌써 시간은 자정을 넘어 토요일 새벽 1시반을 넘기고 있지만, 외등을 켜놓은 발코니에서 모여앉아 달려드는 모기떼들과 싸우면서도, 내일의 Trail Walk은 아랑곳 없다는듯이, 이야기의 꽃이 시들지를 않고 이어진다. 사회적 이슈로 부터, 건강문제, 자녀문제, 믿음에 관한 문제 그리고 Trail Walk 등등....그시간까지는 나도 약 10년 내지 15년은 더 젊어졌던 기분으로 대원들과 합류 했었으나, 더이상은 버티기가 어려워 잠을 청하기위해 슬며시 자리를 떠나면서, 세월의 살아온 길이에는 거짖이 통하지 않는구나...를 통감 하기도 한 그시간었었다.
Lunar도 벌써 잠자리에 들어 있었고, 우리 부부를 제외한 Trail Walk에 참석한, 어린 대원들을 포함한 모두는 아직 초저녁인것 처럼, 도심을 떠나 한적한 시골 Cottage에서의 밤을 보내는 모습들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것 같다.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하고....진수성찬을 만난듯 모여드는 모기떼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이다가, 어쩌다 뒷걸음질 치는 코끼리 뒷다리에 쥐가 밟히듯, 내려치는 손바닥에 동료모기들이 황천길을 가도,그들은 개의치 않은것 같아만 보여, 공격을 막아내느라 대화도 끊기기도 했었다. 편안한 안식처를 놓아두고, 잠자리가 편치않고 익숙하지 않은 시골 카테지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하룻밤을 지샌다는것이 어찌 편할수 있겠는가마는, 오랫만에 모여 못다한 사연의 얘기를 나누는 그재미에 불편한 모든것은 다 가리워지고 있는것이 눈에 보이는것 같다.
오랫만의 Trail Walk이었었다. 더많고 좋은 Trail Walk이 많이 있지만, 리더 되시는 분이 굳이 이곳 시골구석인 Presqu'ile Park에서 해내겠다는 의지를 밀어부쳐, 이루어지게 된것으로 알고 있다.
금요일 낯에 골프를 마치고, 이른 저녁녘에, 요즘은 매일 해 오던데로 카테지 앞에서 Camper들을 상대로 나무(Fire Wood)를 팔고 있는데, 눈에 익은 차량들이 밀려 들이 닥쳤다. 그시간에 Lunar는 윗층에서 대원들을 맞이할 나름데로의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였었다. Trial Walk에 참석한 부모들을 따라온 Hi-C들도 눈에 많이 띈다. 그들에게는 많은 추억을 만들수 있는 기억되는 시간들이 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어떤 대원은 밤사이에 한잠도 못자고 새벽녘에 일어나 주변의 공원과 Up-town쪽으로 한바퀴 돌아 오기도 하면서, 자기는 벌써 오늘하게될 Trail Walk을 다 마쳤다고 자랑(?)도 한다.
오랫동안 아빠 엄마를 따라 Trail Walk을 즐겼던 코흘리개 '상현'이는 벌써 사춘기의 중반으로 접어든 십대의 청년이 되여, 과거에 보여주었던 개구장이의 모습은 전연 찾아볼수가 없고, 말수도 적고, 의젓하게 처신하는것이 눈에 띈다. 반대로 같은 또래의 공주들은 더 명랑해 보이고, 재잘거리고, 그들 특유의 청순하고 자유분방함을 꾸밈없이 발산하는 처녀들로 성장하여, 옆에서 보기에도 마음이 꽉 찬다. 그들의 부모들은 더 하겠지? 이다음에 더 성장하여 사회생활을 할때는 각양 각색으로 변하여 능력을 발휘할것이다.
어떤 대원은 뒷뜰에서 자라고 있는 들깨(Perrilla)잎을 아침 이슬을 헤져가면서 따면서, 오랜 지난날들을 생각하는것으로 보여지기도 했다.
오랫만에 이곳에 온 대원들에게는 모든게 새롭고 시골스러워 감상에 젖을만도 할것으로 이해된다. 바쁜 도시생활속에서 복잡한 생각을 잠시 접고.... 얼마나 낭만적인가, 더욱히 감성이 한창 발달하고 사고의 능력이 하늘을 찌를듯 높은, 부모와 같이온 사춘기의 아이들에게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시간들이 될것으로, 여기에서 Trail Walk을 하는동안 완벽한 그림을 그렸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던 귀엽기만 하다. 그아이들만 했을때의 '나'를 대입해 본다. 학비걱정에, 먹을 양식이 다 떨어져 가는 '자취방'에서 살아가던 고민을 했었는데....
"열 셀동안에 안오면 아침은 굶습니다'라는 여자대원들의 호통(?)이 깻잎을 따고 있는 대원들과 옹기종기 모여 얘기를 하고 있는 대원들의 귓전을 때리자마자, 누구라고 할것없이 달려간다. 아침이 진수성찬이다. 된장을 풀어 끓인 배추국이 시골스럽고 맛이 일품이다. 배추국밥을 만들어 한그릇을 뚝딱 해 치우는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가슴으로 느껴졌다.
3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목적지인 Presqu'ile Park으로 달린다. 우리차량은 정문을 무사 통과 한다. 다른 차량들은 멈춰서서 차량당 입장료 15달러씩을 내야 했는데.... 그이유는 대원들이 잘 알고 있다. Trail Walk을 하는 대원들의 특권(?)이 바로 이런데서 나타나는것인것 같다.
약 10분쯤 달려 공원의 중간 지점에 있는 Parking lot에 주차 시키고, 그곳에서 2등분 되여 있는 코스중 왼쪽편에 있는 Yellow Mark로 표시되여 있는 곳을 걷기로 하고, 리더 되시는 분의,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분에 대한 감사와 간단한 설명을 시작으로 트레일을 시작하는데, 카테지에서 떠날때의 대원상당수가 보이질 않는다. 차량 1대가 중간에서 Beach2로 빠져, 사내인 상현이만 빼고, 아이들 전부와 일부 대원들이 수영장으로 방향을 바꾼것을 알았다. 어쩌면 더운데 땀흘리면서 숲속길을 걷는것 보다는 시원한 물속에서 물장구 치면서, 모래사장에서 딩구는편이 더 좋을것도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현이에게 트레일 지도한장을 주면서, 걷고져 하는 구간을 설명해 주면서 Guide하면 좋겠다고 했더니 앞장을 서서 걷는다. 바로 트레일 오른쪽으로는 Group Camping Lot이 넓게 보인다. 자연을 즐기는 젊은 Camper들의 게임을 즐기는 모습이 끊임없이 보이고, 한편에서는 한가로히 모여서 토론하는 모습도 보이고, Bicycle즐기는 젊은이들도 있고....우리팀은 목적이 다른 Trail을 걷고 있고.... 흔히 보이는 사슴이라도 볼수 있게 되기를 기대를 하면서 걸었지만, 그러한 스릴은 만들지 못하고 말았다.
사슴을 만났더라면 대원들이 더 재미 있어 했을텐데.... 삼삼오오 짝을 지어 대원들의 앞에서 열심히 걸어가고 있는데, 상현이가 숨차게 뒤에서 뛰어오더니 우리가 걸어야할 Trail에서 off해서 걷고 있으니 '뒤로 돌아서서 다시 왔던길로 가서 표시를 보고 Right Turn해서 가야 합니다"라고 설명해준다. 얘기에 열중하다보니, 방향표시판을 Missing했었나 보다. 상현이가 대견해 보였다. 책임을 주었더니, 그렇게 잘 해내는, 커버린 상현이를 다시한번 보았다. 칭얼대기만 했었던 개구쟁이였었는데....
돌아오는길에 반도(Peninsula)로 구성된 공원의 맨끝에 있는, 온타리오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Lighthouse)와 Schooner 'Speedy'호에 대한 역사적 유적지를 둘러 보았다. 1800년대 중반에 세워진 등대는 사암(Sandstone)으로 만들어졌는데, 풍파에 망가지는것을 막기위해 지금은 그위에 나무조각들을 덧대여 보호하고 있었고, 최초의 등대지기는 밤에는 등을 켜기위해 기름통을 들고, 등대안에 세워진 높고높은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렸었다고 한다.
안개가낀 날에는 옆에 있었던 보일러를 돌려 수증기를 이용한 발브(Valve)를 당겨 경적(Whistle)을 울려서, 당시에는 바빳던 뱃길을 안내 했었단다. 범선 Speedy호도 같은 시기에 York(지금의 Toronto)에서 출발하여 이곳 Presqu'ile까지 거의 다 왔었는데, 뜻하지 않은 풍랑을 만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던 큰 사고가 있었단다. 그배에는 당시로서는 사회적 지도자인 검찰총장, 재판관, 고급경찰 그리고 재판을 받게될 범인과 그외 관련된 사람들이, 이근처에서 재판을 하기위해 오고 있는 중이었었다. 선뜻 이해가 안되는 이야기인데, 그내용을 요약해 보면, 지금의 오샤와 북쪽에 있는 '스크곡 호수'에서 털장사를 하고 있는 Mr Sharp을 살인한 죄목으로 그곳에 살고 있던 인디언 주민을 구속하였는데, York에서 재판받는것은 사리에 맞지 않으니, 사고가 난 지점에 가까운 New Castle에서 재판을 진행해야 옮다는 주장을 편 변호사의 주장을 수용하여, 이사건 해결에 관련된 인사들을 태우고 Presqu'ile로 오던 길에 이런 참사를 당했던 것이라고 한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호수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나도 모르게 발길을 물가로 옮기게 한다. 파도가 상당히 세게 밀려서 물가에 반질반질하게 다름어진 조약돌(Pebble)위를 덮으면서 마감한다. 대원들 모두가 탄성이다. 어느새 신발과 양말을 벗어던지고 물속으로 뛰어 들기에 바쁘다.
수영복을 준비해 오지 않은것을 후회하는 대원도 있었다. 바지가랭이가 젖어도 상관 없다는듯이 물속으로 깊이 들어가 물장구를 즐기고....
우리처럼 대자연을 즐기러온 다른팀들은 물속에서 파도를 타면서 수영을 즐기고 있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조약돌위를 맨발로 걷는 기분도 독특한 맛을 준다. 발에 밟혀서 흩어지는 조약돌의 '싸그락'소리도 큐바 바라데로의 휴양지 백사장모래 밟는것 보다 더 맛이 있게 느껴진다. 많은 대원들이 이순간간을 카메라에 담기에 여념이 없이 움직인다.
새로 만들어진 Marsh Boardwalk도 걷기에 운치가 충분했었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Swamp속의 갈대밭속을 가로질러 설치된 Boardwalk를 걸으면서 대원들이 대자연을 만끽한다. 다른때는 Lunar와 둘이서만 걷다가 젊은 대원들과 어울려 걸으니..... 나도 그들속에 동화되여 청춘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내가 아직은 노털이다라는 그들의 시선을 받지 않고 있다는것을 자부해 본다. 욕심만은 아니였기를....
Cottage에 도착했을때는, 수영을 즐기러 갔던 일행들은 벌써 도착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작을 팔고 있는 나의 모습이 대원들, 특히 남자들에게는 보기좋게 느껴졌었나 보다. 낭만적으로 보였었나 보다. 그들과 어울려 얘기를 나누다 보니, Camper들에게 내가 장작을 팔고 있는것인지, 대원들이 장작을 팔고 있는 것인지..... 장작을 사러온 Camper들과 대원들이 더 재미있게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이러한 정취를 이곳 아니고 또 어디서 보면서 느껴 보겠는가? 기회는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
이번 Trail Walk행사를 준비하여 차질없이 마치게한 리더분과 대원들에게서 지난번 보다는 더 성숙함을 볼수 있어 마음이 든든했다. 하면 된다는 믿음을 그들에게서 분명히 보았다. 대원들의 손발이 잘 맞기도 했지만, 많은 식구들을 먹일 음식을 더운 부엌에서 말없이 만들어준 여자 대원들의 수고를 잊을수 없다. 달걀을 구워낼것 같은 뜨거운 햇볕이 내려 쪼이는 발코니의 마루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막 구워낸 삼겹살에 상추와 쌈장, 고추등과 함께싸서 씹는 맛은, 오히려 시원한감을 주고도 남았었다. 잠깐 곁들인 곡주도 시원함을 보태주었었고.....
이럴때는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날아가는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토론토로 핸들을 돌리기전, 대원 모두가, 믿고 의지하는 분의 보살펴 주심으로 무사히 마치게 됨을 감사하면서, 다시 생활터전이 있는 토론토로 핸들을 잡고 떠나는 대원들의 무사귀가를 우리부부는 시집간 딸이 시집을 향해 헤어짐의 아쉬움에서 흘러 나오는 눈물을 감추듯 하는 심정으로 바라보면서 헤여짐의 아쉬움을 달랬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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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August 12, 2010
왜 이제야 터트리나? 국정원의 행랑이 북괴의 군자금 창고라는것을..
김대중씨가 대통령으로 재직중에 국정원의 행랑이 북괴의 군자금창고였었다는 폭로를 이제야 터트리는 그 이유를 어떻게 이해 할것인가?
그돈으로 김정일을 비롯한 Regime은 핵무기를 만들고, 미그기를 도입하고....
그대가로 남쪽의 김대중씨가 대통령 재직중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니....
내가 만약에 김대중씨가 저지른 반역행위를 했었다면, 나자신은 물론이고, 나의 부모 형제는 물론이고 일가친척은 목숨을 잃었거나 감옥에 수감되여 결국 생을 마감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돈이 Torpedo 가 되여 천안함을 폭침 시킨것이라고 유추 해석하는것은 삼척동자도 이상해 하지 않을 것이다. 지하에서 김선생은 지금 이폭로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의 부인을 탓할까? 아니면 그의 똘만이들이 사전에 입막음을 제대로 못한 무능함을 한탄할것인가? 아니면 동작동 국립묘지에 매장된 그의 무덤이 파혜처져 다른곳으로 내던져질까? 걱정하고 있을까?
어찌하여 이러한 불의를 보고도 조국은 침묵하고 있기만 하는 것인가? 대신에 그가 생전에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모습의 동상이 이곳 저곳에 세워지고 있다는 뉴스만 들린다. 뭐가 옮고 그른것이며 행동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조차 망각속으로 사라져 버린 조국의 현실을 보면서, 조국을 공산도당으로 부터 지키겠다고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오늘도 국방의 의무를 묵묵히 해내고 있는 젊은 건각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휴전선에서 총구를 겨누면서, 경계를 일초의 방심도 없이 수행하고 있는 병사들이 이기사를 보면서 얼마나 허탈해 할까? 그돈으로 만든 총알이 혹시나 나를 겨냥하여 날아 오고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도 많이 하면서 보초를 서고 있을것으로 짐작이 간다.
며칠전에는 평화롭게 고기를 잡고 있는 어선을, 북괴는 동해의 공해상에서 납치하여, 가족은 물론 전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국정원의 행랑으로 북괴에 전달된 군자금의 일부가 북괴의 해군함정으로 변하여, 한다는 짖이 생계의 수단으로 고기를 잡고 있는 어부와 어선을 납치해서, 흥정을 할려고 하다니..... 김선상은 이를 지하에서 보면서 웃고 있을까? 아니면 김정일을 칭찬하고 있을까? 반역의 뜻은 무엇인가? 답답하다. 이내용을 폭로한 분은 당시에 국정원에서 근무했었다가, 반역행위를 하는 김선상을 비롯한 그주구 세력들을 더이상은 참고, 보고 견딜수가 없어 사직하고 바로 미국으로 갔었다고 하는데, 김선상이 살아 있을때 이러한 반역 행위를 폭로 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사자는 말이 없는 법인데.....
http://www.newdaily.co.kr/html/article/2010/08/12/ART54038.html
그돈으로 김정일을 비롯한 Regime은 핵무기를 만들고, 미그기를 도입하고....
그대가로 남쪽의 김대중씨가 대통령 재직중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니....
내가 만약에 김대중씨가 저지른 반역행위를 했었다면, 나자신은 물론이고, 나의 부모 형제는 물론이고 일가친척은 목숨을 잃었거나 감옥에 수감되여 결국 생을 마감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돈이 Torpedo 가 되여 천안함을 폭침 시킨것이라고 유추 해석하는것은 삼척동자도 이상해 하지 않을 것이다. 지하에서 김선생은 지금 이폭로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의 부인을 탓할까? 아니면 그의 똘만이들이 사전에 입막음을 제대로 못한 무능함을 한탄할것인가? 아니면 동작동 국립묘지에 매장된 그의 무덤이 파혜처져 다른곳으로 내던져질까? 걱정하고 있을까?
어찌하여 이러한 불의를 보고도 조국은 침묵하고 있기만 하는 것인가? 대신에 그가 생전에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모습의 동상이 이곳 저곳에 세워지고 있다는 뉴스만 들린다. 뭐가 옮고 그른것이며 행동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조차 망각속으로 사라져 버린 조국의 현실을 보면서, 조국을 공산도당으로 부터 지키겠다고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오늘도 국방의 의무를 묵묵히 해내고 있는 젊은 건각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휴전선에서 총구를 겨누면서, 경계를 일초의 방심도 없이 수행하고 있는 병사들이 이기사를 보면서 얼마나 허탈해 할까? 그돈으로 만든 총알이 혹시나 나를 겨냥하여 날아 오고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도 많이 하면서 보초를 서고 있을것으로 짐작이 간다.
며칠전에는 평화롭게 고기를 잡고 있는 어선을, 북괴는 동해의 공해상에서 납치하여, 가족은 물론 전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국정원의 행랑으로 북괴에 전달된 군자금의 일부가 북괴의 해군함정으로 변하여, 한다는 짖이 생계의 수단으로 고기를 잡고 있는 어부와 어선을 납치해서, 흥정을 할려고 하다니..... 김선상은 이를 지하에서 보면서 웃고 있을까? 아니면 김정일을 칭찬하고 있을까? 반역의 뜻은 무엇인가? 답답하다. 이내용을 폭로한 분은 당시에 국정원에서 근무했었다가, 반역행위를 하는 김선상을 비롯한 그주구 세력들을 더이상은 참고, 보고 견딜수가 없어 사직하고 바로 미국으로 갔었다고 하는데, 김선상이 살아 있을때 이러한 반역 행위를 폭로 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사자는 말이 없는 법인데.....
http://www.newdaily.co.kr/html/article/2010/08/12/ART54038.html
Wednesday, August 11, 2010
일본 총리의 '사과'(Apology)로 한단계 전진 한것으로 보고싶다.
대를 물려 가면서, 가슴속에 응어리 져 있는 원한과 적개심으로 꽉 차 있는 나의 조국민들에게, 일본 총리의 '사과' 한마디로, 원한 관계가 풀릴것이라고 계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큰 오산일것이다. 이곳 언론이나 고국의 언론에는 '일본 총리, 한국민들에게 정중한 사과'라는 제하의 기사를 앞면에 실었었다. 광복 60년이 넘는 그날을 며칠 앞두고 아마도 새로 취임한 일본총리가 세계의 여론이, 그리고 피해국인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격상됨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광복이래로 지금까지 역대 일본 총리들이 사과발언한 그어떤 내용보다는 성의 있고, 진실되게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팽창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한반도를 강제 점령했었던 과오를 만천하에 사과하고 그죄상을 뉘우친다고 발표했다. 한일 관계는 그어떤 극단적인 처방이 나온다 해도, 단 한번에 치료될수 없는 만성질환과도 같은 상황으로 봐야 할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치료해 가면서, 시간을 약으로 삼는 방법외에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감정과 흥분으로, 해서는 안될말을 막 뱉어내는 막말은 이제는 삼가야 한다. 오래전 남한 조국이 지금처럼 부자나라로 살지 못하고 어려웠을때는, 일본은 남한을 의식하지 않고 북쪽과 자기네 마음데로 외교하면서 무시해 왔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러나 이제 조국 남한은 국제적으로 조국의 위상이 한층 격상되여 있는, 성숙한 나라로 발전된 만큼, 일본 스스로가 동급이상의 상대로 외교적 상대로 대우 하고 있음을 보여 줬기에 굳이 옛날처럼 '일본은 과거의 잘못에 대해 이래서는 저래서는 된다 안된다'등의 구차한 사과요구를 언급하지 않아도 먼저 알아서 처신하는, 격세지감을 느낀다. 언행에도 신중을 기해서 따질것은 따지고, 받아낼것은 받아내는 역량을 발휘해내는, 이북 김정일과 그집단이 남한에 계속해서 저질러 대는 만행에 대해서 서뿔리 보복(Retaliation)을 하지 않고 인내해온것 처럼, 지켜 보면서 착실하게 필요한 자료를 체계있게 준비해서, 지금 세대에 안되면 다음 세대에서 해결할수 있도록 준비해 두는 지혜가 절실한 때다. 현실적으로 볼때, 과거와 같이 철천지 원쑤관계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도 얽히고 설킨게 많아, 양쪽 당사국 모두가 피해자신세가 될 확률이 높아져 있기에, 과거에 집착하기 보다는, 번영된 앞날을 건설하여 후손들에게 물려 주기위해서는, 감정을 먼저 앞세우지 않는 진정한 화해의 무드로 한발짝씩 옮겨야 한다. 후손들에게 물려줄 유산으로 광화문도 다시 건축하여 거의 완성단계에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모든게 Harmony를 이루어 찬란한 유산 그자체로 후손에게서도 빛나기를 바랄 뿐이다.
여기에 오늘자 LA Times와 NY Times 아시아판 머리기사로 나온 관련 기사와 고국의 언론 내용을 옮겨봤다.
Japan apologizes to South Korea for decades of colonial rule
More than 60 years after Japan ended its occupation at the close of World War II, many wounds are unhealed. Some South Koreans call for action, not just words.
Japanese Prime Minister Naoto Kan bows during a news conference at his official residence in Tokyo, where he apologized for the suffering caused South Korea during Japan's occupation of the Korean peninsua in the decades before World War II. (YURIKO NAKAO, REUTERS / August 9, 2010)
By Ethan Kim, Los Angeles Times
August 11, 2010
Reporting from Seoul —
On the 100th anniversary this month of Japan's annex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office worker Hwang Jung-won listened Tuesday as the Japanese prime minister apologized for his nation's role in decades of harsh colonial rule. But like many others here, she wasn't convinced of the sincerity of this latest mea culpa.
"An apology is better than nothing. But if they are truly sorry, they should make compensations for all the victims during the colonization, including comfort women," the 33-year-old s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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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than 60 years after Japan ended its 35-year occupation of the peninsula at the close of World War II, many wounds remain unhealed. Many older South Koreans remember such indignities as being forced to adopt Japanese surnames, fight as soldiers and even work as prostitutes for the military — the so-called comfort women.
Prime Minister Naoto Kan apologized to South Koreans for Japan's transgressions all those years ago. "For the enormous damage and suffering caused by this colonization, I would like to express once again our deep regret and sincere apology," he said in a statement endorsed by his Cabinet.
Still, South Koreans like Kim Hyung-il wanted gestures over mere words. Kan's statement, many noted, did not mention those forced into manual labor and sexual slavery.
"The Japanese government needs to show action, not just some words on a piece of paper," said Kim, a 73-year-old retiree who was a young boy during the occupation.
On Tuesday, in a brief telephone conversation with Kan, South Korean President Lee Myung-bak noted the gesture but called on Japan to put the statement into action.
Presidential spokeswoman Kim Hee-jung said that Lee asked Kan to cooperate on pending issues in a "wise and sincere manner."
The occupation came to a close in 1945 with Japan's surrender at the end of World War II. Though Tokyo has previously apologized for its aggression against its Asian neighbors, Kan's statement Tuesday specified South Korea. No mention was made of North Korea, with which Tokyo has clashed over allegations that the communist regime there kidnapped Japanese citizens.
Kan also said Japan would return Korean cultural artifacts, including historical documents, it acquired during its rule.
But an editorial in the Korean-language Munhwa Ilbo newspaper called for Japan to do more.
"The statement is only half complete as it apologizes for the annexation against the will of the Korean people," the newspaper said, "but fails to mention the illegality of the action."
Kim is a researcher in The Times' Seoul Bureau.
고국 '조선일보 사설'
[사설] 日 총리 담화, 한·일 새로운 100년 출발점 될 수 있나
입력 : 2010.08.10 23:35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는 10일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식민지 지배가 가져온 다대한 손해와 고통에 대해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간 총리는 "이러한 인식에서 조선총독부를 통해 반출돼 일본 정부가 보관하는 조선왕실의궤 등 한반도에서 유래한 도서를 가까운 시일에 반환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간 총리는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反)하여 이뤄진 식민지 지배에 의해 국가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며 "역사의 사실을 직시하는 용기와 이를 인정하는 겸허함을 갖고 스스로의 과오를 되돌아보는 것에 솔직하게 임하고자 생각한다"고 밝혔다.
간 총리의 담화는 역대 일본 총리들의 사과와 반성에 비해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다. 간 총리 담화는 기본적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언급한 1995년 무라야마 담화의 연장이지만, 한국 식민지배가 "한국인들의 뜻에 반한 것이었다"고 명시했다. 비록 간접적이긴 하지만 일본 총리 담화로서는 처음으로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의 강제성을 인정했다.
일본 궁내청 소장 조선왕실의궤 등 한국에서 불법 반출된 책들을 반환하기로 한 것은 사과와 반성을 행동에 옮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 때 강탈해간 문화재를 돌려준 것은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조약 체결 당시 1400여점의 문화재를 돌려준 이후 45년 만이다. 간 총리와 민주당 각료 전원은 이날 총리 담화를 승인하는 각의(閣議)를 끝낸 후 오는 15일 2차대전 전범을 제사하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침략 100년이 되는 해를 맞아 한일 과거사의 앙금을 청산해보려는 일본의 노력은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일본의 사과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이제 됐다"고 넘어가기엔 간 총리의 담화는 여전히 부족하다.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 1000여명은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한 1910년의 합병조약이 불법적으로 이뤄진 것이었고, 따라서 합병과 식민통치가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주장하며 이를 총리 담화에 넣을 것을 요구했으나 반영되지 않았다. 이는 사과·반성의 진정성, 일본정부가 식민통치를 합법으로 보느냐 불법으로 보느냐와 관련되는 문제다. 20년 가까이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본의 법적인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언급도 한 줄 없다.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보상 문제도 빠져 있다.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반성, 문화재 반환은 이제 시작이다. 일본의 자라나는 세대가 과거의 멍에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의 떳떳한 일원으로 아시아와 국제 평화·우호를 위해 나설 수 있도록 해주려면 일본 정부와 일본인들 스스로가 그늘진 역사를 정리해야 한다. 이번 담화가 지난 100년의 한·일관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100년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느냐는 앞으로 일본이 짊어지고 가야 할 과제다.
Japan Apologizes to South Korea on Colonization( NY Times)
By MARTIN FACKLER
Published: August 10, 2010
TOKYO — Prime Minister Naoto Kan of Japan offered a renewed apology to South Korea on Tuesday for Japan’s brutal colonial rule, as part of a statement marking the 100th anniversary of his nation’s annex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in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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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me Minister Naoto Kan of Japan gave a policy speech in Tokyo after releasing a statement apologizing to South Korea for the damage caused by Japan’s colonial rule.
“For the enormous damage and suffering caused during this colonial rule, I would like to express once again our deep remorse and heartfelt apology,” Mr. Kan said in a statement, issued ahead of the Aug. 29 centenary of Japan’s annexation of Korea. The text largely repeated language Japan has used since the early 1990s in apologies to South Korea and other Asian victims of its military expansion in the early 20th century.
While the South Korean Foreign Ministry said Tuesday that it accepted Mr. Kan’s apology, anger at Japan still runs deep across the region.
The abuses by Japan during its colonial rule of the Korean Peninsula pale in comparison to its documented atrocities during World War II — including mass killings of civilians and human experimentation. Many Asians and Westerners urge Tokyo to come to terms with the past, and Japan continues to grapple with that legacy.
In a sign of the difficulties this nation still faces in holding a healthy debate about the repugnant periods of its history, the prime minister’s statement on the colonial era drew sharp criticism from conservatives. Tabloid newspapers blasted the apology as “treasonous diplomacy,” while right-wing groups loudly protested in front of the prime minister’s residence in central Tokyo.
In Tuesday’s statement, Mr. Kan offered to return historical documents and other cultural artifacts taken from the Korean Peninsula during Japan’s 1910-45 rule. He said he wanted to address the past to build a more forward-looking relationship with South Korea, a country with which Japan enjoys extensive trade, cultural and political ties and whose music and television programs it avidly consumes.
The statement did not mention North Korea, which was also under Japan’s colonial rule before the division of the peninsula. Tokyo has refused to establish diplomatic ties in part because of the North’s abduction of Japanese citizens three decades ago. Nor did it touch on the delicate issue of individual compensation for South Koreans who were forced to work as manual laborers or sex slaves for the Japanese.
“The Japanese government once again came out with more lip service,” said a statement from a group that supports the so-called comfort women, who were forced to have sex with Japanese soldiers during World War II. The group, the Korean Council for the Women Drafted for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said that Tokyo must honor international calls to offer clear-cut apologies and reparations for the women. Japan maintains that all compensation issues were settled under the 1965 treaty that normalized relations between South Korea and Japan.
http://news.joins.com/article/430/4380430.html?ctg=1701&cloc=home|list|list3
Sunday, August 01, 2010
있는자들은 더 빼았으려하고, 없는자들은 밀리고....선교사님의 설교
"벤치에 앉아 있는 어린이들은 전부 앞으로 나오세요." 엄마아빠와 같이 앉아있는 아이들이 선뜻 나서지를 않아 보이자 다시 목사님이 "맨 먼저 앞으로 나온 어린이에게 선물을 줄겁니다" 그때에야 아이들이 모두 우루루 목사님에 서계시는, 잔디밭위의 Podium으로 몰려 나가 옆으로 나란히 서서, 목사님의 지시에 따라 비어있는 앞좌석에 모두 착석시킨다. 예배가 들여지고 있는 이곳 야외 공연장( Open Air theatre)에는, 집을 떠나 Camping온 사람들, 여행객들 또는 이곳의 주민들, 심지어 같이 온 개(Dogs)까지 그풍경이 요란하고 어찌보면, 진정과 신령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교회로 보기에는 분위기가 산만하기까지 하다.
"어린이 여러분, Haiti라는 나라를 아는 어린이는 손들어 보세요." 손을 번쩍드는 아이들 몇명의 손이 위로 번쩍 솟는것이 보인다.
"그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 지난번 지진이 났었던 나라 입니다."
"맞아요"
"또 다른 어린이 있어요?"
"예 게으르고, 가난한 나라입니다"
"예 맞아요"
지난 5월달에 지진이 나서 페허가 되다시피한 Haiti에 목사님께서 선교겸 구제를 하러 갔었다고 설교를 운을 뗐다. 너무나 비참하고, 폐허가 되다시피한 그곳에서 목사인 자신은 너무나 많은것을 체험으로 배우고 왔었노라고, 그러면서, 있는자들은 더 채울려고하고, 없는자들은 더 이상은 곤경에 빠지지 않을려고 발버둥치고..... Haiti의 현실을 그렇게 한마디로 요약하면서, 이러한 현상은 지구상 어디에서나 대동소이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씀을 하신다. 선교겸 구제를 위해 그곳에 같이간 다른 목사님과 함께, 매일 해왔던 것 처럼 그날도 줄을 서서 구호품이나, 약품을 타가기위해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중에 어린 아이가 그사이에 끼어 있었다고 한다. 눈망울이 총총한 그아이가 차례가 되였는데, 마침 Food가 다 떨어져, 할수 없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주면서, "몇살이나?" "저는 나이는 열살이고요. 지난번 지진때 저의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식구를 잃어 버리고 혼자 남았읍니다. 그런데 저는 돈은 필요 없어요." 라고 실망스런 얼굴로 돌아 서려고 하는 순간, 같이 옆에서 돕고 있던 다른 선교사가 주머니에서 '초코렛'를 꺼내 주면서, "이것이라도 먹겠느냐?" 했더니 얼른 받아 챙기더니, 바로 자기 옆에 서 있는 다른 또래의 아이에게 절반을 딱 잘라서 건네 주더란다. 귀한 초코렛을 자기 같았으면 혼자 먹어 치웠을텐데... 금방 두아이의 얼굴이 환해지는것을 목격하면서 없는자가 더 배푸는것을 목격하면서, 선교를 한다고, 구호를 한다고 그들앞에 서 있는 자신이 마음속으로너무나 부끄러웠었다고 설교에서 고백을 하신다. "지금 절반을 딱 잘라 나누어준 저 아이가 네의 친구냐?" 라고 물었더니, "아니요. 오늘 지금 이자리에서 처음 보는 낯선 아이입니다."
"그런데 너 혼자 먹어도 모자랄 초코렛 절반을 딱 잘라 그아이한테 주느냐?"
"그아이도 저와 똑 같이 배고플텐데요"
그아이를 붙들고, 전후 사정 얘기를 들어 보았단다. 지난번 지진으로 부모형제 모두를 잃고 갑자기 고아가 된 그는 어느 구호단체의 주선으로 어느 있는 집에서 같이 살수 있도록 입양이 되였었다고 한다. 그집 주인부부가 그아이를 제대로 입양자식으로 인식하지 않고, 아침 이른 새벽부터 빨래하고, 청소하고, 집안의 굳은일을 매일 아침 9시까지 끝내고, 기다렸다가 주인부부가 남긴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그런다음 밖으로 내쫓겨져 저녁 5시경에야 다시 집에 들어와 집안일을 하고, 저녁상에서 남은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곤 했다고 한다. 그전에는 집에 들어가고 싶어도 집주인이 정문을 열쇠로 잠가 버리기 때문에 들어 갈수가 없었다고 한다. 오후5시경이면 집주인이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는 시간에 맞추어서 들어오게 한 것이다. 혹시나 집에 놔두면 도둑질을 할까봐서, 또 음식에 손댈까봐서..... 조금만 이상하면 마구잡이로 두들겨 패기기 일쑤여서, 낯시간에는 오늘 처럼 이곳 저곳 거리를 헤매여 왔었단다.
"그런데 왜 돈을 거절한거지?"
"제가 그돈으로 Food를 사서 먹거나 들고 들어가면, 저는 무조건 집에서 훔져간것으로 간주되여,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두들겨 맞기 때문에 돈을 거절한것입니다" '아 그래서 돈보다 초코렛을 택했었구나'라고 깨닫고, 탄식을 했었다고 고백하신다. 그아이를 통해서, 목사님은 더 큰것을 보고 깨달았다고 한다. 있는자들은 더 채울려고 온 힘을 쏟고, 가난하고 없는자들은 더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지 않기위해 있는 지혜를 다 짜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있는나라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여기 오늘 예배에 모이신 Camper들, 여행객들 그리고 이곳에 살고 계시는 주민여러분들은, 그 어린 아이를 통해서, 없는 환경속에서 나누는 조그만 배품이 세계를 움직이고, 평화를 가져올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기억하고 실천 했으면 좋겠읍니다" 라고 말씀을 마치시면서, 그어린아이가 바로 살아 있는 예수가 아니겠는가?라는 믿음을 갖게됐고, 또 하나님의 축복은 특별한게 아니고, 이렇게 평범함 속에서 느끼면서 보게 되는구나,라고 평하셨다. 지금은 그아이와 아무런 연락도 없지만, 그아이가 무사히 잘자라 사회에서 귀중하게 쓰임받는 인물로 되기를 기도 하고 있다고 하신다.
오늘 8월1일, 주일날, Presqu'ile Provincial Park안의 야외공연장에서, 여름 Season동안 여행객들과 Camper들을 위해서, 이지역에 있는 천주교를 포함한 개신교의 목사님들이 돌아가면서, 아침 예배를 집전하고 있는데, 그예배에 Lunar와 함께 참석하여 들은 설교의 내용이다.
어려서 중학교 지리시간에 배웠던 "약육강식"이라는 말이 새삼 머리에 떠 올랐다. 그때 배울때는 이러한 먹이 사슬이 동물의 세계에서 존재하고 있다고 했었다. 우리 인간 사회에는 더 지독한 "약육강식'의 등식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항상 느끼면서 살아왔었지만, 오늘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더 확신이 섰다. 그목사님은 이곳에서 가까운 Belleville에 있는 어느 개신교의 목사님으로 이름은 Rev. Darrel 리고 했다.
오늘 헌금은 모아져서 구호기관을 통해서 도움이 필요한 곳에 보내지게 된다고 설명해 주신다.
본교회 예배에 참석을 못했기에, 교회 웹에 새로 싣기 시작한 "교회 주보"를 보는것으로 마음의 양식을 채워야만 했다. 감사.
"어린이 여러분, Haiti라는 나라를 아는 어린이는 손들어 보세요." 손을 번쩍드는 아이들 몇명의 손이 위로 번쩍 솟는것이 보인다.
"그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 지난번 지진이 났었던 나라 입니다."
"맞아요"
"또 다른 어린이 있어요?"
"예 게으르고, 가난한 나라입니다"
"예 맞아요"
지난 5월달에 지진이 나서 페허가 되다시피한 Haiti에 목사님께서 선교겸 구제를 하러 갔었다고 설교를 운을 뗐다. 너무나 비참하고, 폐허가 되다시피한 그곳에서 목사인 자신은 너무나 많은것을 체험으로 배우고 왔었노라고, 그러면서, 있는자들은 더 채울려고하고, 없는자들은 더 이상은 곤경에 빠지지 않을려고 발버둥치고..... Haiti의 현실을 그렇게 한마디로 요약하면서, 이러한 현상은 지구상 어디에서나 대동소이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씀을 하신다. 선교겸 구제를 위해 그곳에 같이간 다른 목사님과 함께, 매일 해왔던 것 처럼 그날도 줄을 서서 구호품이나, 약품을 타가기위해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중에 어린 아이가 그사이에 끼어 있었다고 한다. 눈망울이 총총한 그아이가 차례가 되였는데, 마침 Food가 다 떨어져, 할수 없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주면서, "몇살이나?" "저는 나이는 열살이고요. 지난번 지진때 저의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식구를 잃어 버리고 혼자 남았읍니다. 그런데 저는 돈은 필요 없어요." 라고 실망스런 얼굴로 돌아 서려고 하는 순간, 같이 옆에서 돕고 있던 다른 선교사가 주머니에서 '초코렛'를 꺼내 주면서, "이것이라도 먹겠느냐?" 했더니 얼른 받아 챙기더니, 바로 자기 옆에 서 있는 다른 또래의 아이에게 절반을 딱 잘라서 건네 주더란다. 귀한 초코렛을 자기 같았으면 혼자 먹어 치웠을텐데... 금방 두아이의 얼굴이 환해지는것을 목격하면서 없는자가 더 배푸는것을 목격하면서, 선교를 한다고, 구호를 한다고 그들앞에 서 있는 자신이 마음속으로너무나 부끄러웠었다고 설교에서 고백을 하신다. "지금 절반을 딱 잘라 나누어준 저 아이가 네의 친구냐?" 라고 물었더니, "아니요. 오늘 지금 이자리에서 처음 보는 낯선 아이입니다."
"그런데 너 혼자 먹어도 모자랄 초코렛 절반을 딱 잘라 그아이한테 주느냐?"
"그아이도 저와 똑 같이 배고플텐데요"
그아이를 붙들고, 전후 사정 얘기를 들어 보았단다. 지난번 지진으로 부모형제 모두를 잃고 갑자기 고아가 된 그는 어느 구호단체의 주선으로 어느 있는 집에서 같이 살수 있도록 입양이 되였었다고 한다. 그집 주인부부가 그아이를 제대로 입양자식으로 인식하지 않고, 아침 이른 새벽부터 빨래하고, 청소하고, 집안의 굳은일을 매일 아침 9시까지 끝내고, 기다렸다가 주인부부가 남긴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그런다음 밖으로 내쫓겨져 저녁 5시경에야 다시 집에 들어와 집안일을 하고, 저녁상에서 남은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곤 했다고 한다. 그전에는 집에 들어가고 싶어도 집주인이 정문을 열쇠로 잠가 버리기 때문에 들어 갈수가 없었다고 한다. 오후5시경이면 집주인이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는 시간에 맞추어서 들어오게 한 것이다. 혹시나 집에 놔두면 도둑질을 할까봐서, 또 음식에 손댈까봐서..... 조금만 이상하면 마구잡이로 두들겨 패기기 일쑤여서, 낯시간에는 오늘 처럼 이곳 저곳 거리를 헤매여 왔었단다.
"그런데 왜 돈을 거절한거지?"
"제가 그돈으로 Food를 사서 먹거나 들고 들어가면, 저는 무조건 집에서 훔져간것으로 간주되여,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두들겨 맞기 때문에 돈을 거절한것입니다" '아 그래서 돈보다 초코렛을 택했었구나'라고 깨닫고, 탄식을 했었다고 고백하신다. 그아이를 통해서, 목사님은 더 큰것을 보고 깨달았다고 한다. 있는자들은 더 채울려고 온 힘을 쏟고, 가난하고 없는자들은 더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지 않기위해 있는 지혜를 다 짜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있는나라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여기 오늘 예배에 모이신 Camper들, 여행객들 그리고 이곳에 살고 계시는 주민여러분들은, 그 어린 아이를 통해서, 없는 환경속에서 나누는 조그만 배품이 세계를 움직이고, 평화를 가져올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모두가 기억하고 실천 했으면 좋겠읍니다" 라고 말씀을 마치시면서, 그어린아이가 바로 살아 있는 예수가 아니겠는가?라는 믿음을 갖게됐고, 또 하나님의 축복은 특별한게 아니고, 이렇게 평범함 속에서 느끼면서 보게 되는구나,라고 평하셨다. 지금은 그아이와 아무런 연락도 없지만, 그아이가 무사히 잘자라 사회에서 귀중하게 쓰임받는 인물로 되기를 기도 하고 있다고 하신다.
오늘 8월1일, 주일날, Presqu'ile Provincial Park안의 야외공연장에서, 여름 Season동안 여행객들과 Camper들을 위해서, 이지역에 있는 천주교를 포함한 개신교의 목사님들이 돌아가면서, 아침 예배를 집전하고 있는데, 그예배에 Lunar와 함께 참석하여 들은 설교의 내용이다.
어려서 중학교 지리시간에 배웠던 "약육강식"이라는 말이 새삼 머리에 떠 올랐다. 그때 배울때는 이러한 먹이 사슬이 동물의 세계에서 존재하고 있다고 했었다. 우리 인간 사회에는 더 지독한 "약육강식'의 등식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항상 느끼면서 살아왔었지만, 오늘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더 확신이 섰다. 그목사님은 이곳에서 가까운 Belleville에 있는 어느 개신교의 목사님으로 이름은 Rev. Darrel 리고 했다.
오늘 헌금은 모아져서 구호기관을 통해서 도움이 필요한 곳에 보내지게 된다고 설명해 주신다.
본교회 예배에 참석을 못했기에, 교회 웹에 새로 싣기 시작한 "교회 주보"를 보는것으로 마음의 양식을 채워야만 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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