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November 22, 2008

80회 생일 축하연에 참석하면서.....나는 ?











인생이 모태에서 태어난 그순간 부터 숨을 멋을때까지, 요즘은 의학이 발달하고, 먹는 음식이 좋아지고, 생활환경이 무척 향상되여, 살아가는 기간이 자꾸 연장되여 진다고 한다. 성경에서도 인생 70에 강건하면 80 이라고 한 구절을 읽은 기억이 있다.
요즘의 61회 생신은 그 의미를 많이 두는것 같지 않고, 그져 또 한살을 더 살았구나 하는 정도로 보내는 경향이 많고, 또 주위에서, 또 내자신을 봐도 별 깊은 뜻을 두지 않고, 같은 또래의 아는 친지 Couples들과 같이 회식을 하면서 하루밤을 즐겼던 기억밖에 없다.
며칠전 손윗 동서분께서 80회 생일잔치를, 그것도 본인은 모르게 준비해서, Surprise Party로 그의 자손들이 준비하여, 가까운 제자 몇분과 그리고 파티를 주최한 자손의 친구들과 집안 식구들이 참석하여 축하했었다. 당사자인 형님은 80회 생일파티를 축하받는게, 뭐 그리 대단한거냐고, 오래살은것이 축하받을 일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자손들의 생일 파티 제안을 극구 사양 했었다고 한다. 그러면 식구들만 모여서 저녁 식사나 Eating out으로 하기로 일단 안심시켜 드리고 뒤에서 준비 했었다고 한다. 그준비 과정에서 이모(나의 아내)에게 테이블 장식용 꽃꽃이를, 파티를 주관하는 조카로 부터 부탁받아, 결론적으로 모의(?)에 가담한 공범자(?)가 되기도 했다. 나도 거기서 도와 준바 있다.
조촐했지만, 지금은 같이 늙어 가는 제자들과 같이 어울려 지난 얘기 하고, 또 살아온 그간의 인생 스토리를 직접 들어 보기도 하는 좋은 시간이었었다. 인생삶의 Span이 길어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주위에서는 나와 동년배들이거나 조금위, 아니면 조금 아래의 친지들이 숨을 거두는것을 보면은 결코 80회 인생축하연을 하는것은, 사양할 미덕만은 아닌것을 느낀다. 주위로 부터 자랑스럽게 축하를 받아도 좋은, 박수 받을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재음미 해본다. 간단히 몇마디로 요약된 그형님의 인생스토리는 조국분단의 아픔을 또 느끼게 하는, 그형님만이 아닌,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애처러움과 이데올로기로 인한 위정자들의 인위적인 정치이념때문에, 아니 그원치않은 선물때문에, 갈라져 살면서 시간이 다되면, 재회의 꿈을 현실화 시키지도 못한채 한많은 숨을 거두는 피해 당사자들속에 그 형님이 안타까이 삶을 지탱해 왔음을 재확인하게 하는 순간을 느끼게 하기도 했었다. 살아남아 언젠가는 꼭 다시 헤어졌던 가족 피붙이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남쪽으로 넘어와 살다가, 다시 또 짐을 꾸려 이곳 캐나다 까지 와서 살면서, 80회를 어느덧 맞이 했다. 그러나 헤여졌던 가족과 재회할수 있는 기회는 점점 줄어만 가고 있다는 애절한 표현은, 반대로 나만 이렇게 편하게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 공산치하의 가족들이,공포와 기아에 허덕이면서 초근목피로, 목숨을 연명해 가는 책임이 본인때문에 발생한것으로 회한을 토로하는 그형님의 80회 생신 축하는 그래서 본인이 극구 사양 했었음을 또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하는 시간이기도 했었다.
앞으로 18년 후에는 나도 그형님과 똑 같은 길이의 세월을 살아온 인생항로에 서게 될것이다. 꼭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모습으로 나는 내자신을 지키고 있을까? 골프도 형님처럼 즐길수 있는 신체적 건장함을 유지하고 있을까? 그것도 좋을때나 괴로울때나 평생를 같이 세월을 참아온 아내와 같이....
짧지않은 지난 시간을 눈을 감고, 필름을 뒤로 잠시 돌려 본다. 보리쌀 서너말을 머리에 이고 십리길이 넘는 산길, 들길을 걸어 읍내 장에 가셔서 팔은 그돈으로, 추석장을 보고, 설장을 보고, 그다음에 어쩌다 검정고무신을 사오셔서, 이다음에 커서 훌륭한 사람되라고 하시면서 오래오래 잘 신어야 한다라고 말씀 하시던 어머님의 기억,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다닐때, 책보자기에 책을 싸고, 허리에 들쳐메고, 동네 아이들과 들판의 논둑길을 달려 학교를 다던일, 겨울에는 추워서 마른 소똥을 주워 불을 부쳐 얼어붙은 손을 녹이던 기억, 군대에 가서 고참병들의 이유없는 기압에 녹아나, 추운 겨울밤에 보초설때는 어깨에 들쳐메고있는 소총을 이용하여 자살을 함으로써, 고난을 잊으려고 생각하기도 했었던 기억, 제대후 아직 가난했던 조국의 현실에서, 밥벌이가 막막해서 허공을 쳐다보면서, 왜 태어나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그러면서 어린 마음에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었던 기억, 시골촌놈이 공무로 처음 비행기를 타고 일본, 독일로 출장가면서,상공을 날을때 설렛던 그기억, 그곳에서 세상은 살만한 무대라고 처음 느꼈었던 젊은이로서의 기상을 느꼈던기억, 강원도 산골에서 군생활할때 휴가를 맡아 고향으로 가던길에 서울 복판을 거치면서, 화려한 옷차림의 아름다운 여성들(?)을 보면서 한없이 내자신이 적고 초라하게 느끼면서, 그녀들은 모두가 하늘에서 내려온 아름다운 천사로 보여서, 나는 평생을 통해서 그런 여성중의 한명과 결혼할수 있을 자격이 있을까? 라고 용기와 희망을 포기하다시피 했었던 기억, 직장에 다녀와 보니 월세들어 막 신혼생활을 시작했던 보금자리가 무허가 건물이라고 해서, 전쟁이 지난후의 아수라장같이 변해있던 그자리에서 망연자실하고 서 있으면서 서러움에 젖어 흐느끼던 아내와 붙들고 하늘을 쳐다보던기억,....... 그만 나열 해야 겠다. 이민자로서의 새삶의 터전을 이루기 위해 육체적 정신적 소용돌이속에서 살아온 그기억들은 여기에 적고 싶지도 않게 진절머리 나는 일들이다. 선물로 얻은 두 아이들은 다 장성하여 이제 짝을 찾아 새삶을 꾸려야 할 나이가 다 차고, 지나가고 있지만, 뭐가 그리도 바쁜지, 그런 나와 아내의 바램과는 상관 없다는듯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무겁다. 몇년전만 해도 주위에서 친지들, 또는 인생선배들이 자신들의 손자 손녀들의 재롱에 세상사는 맛을 다시 느끼게 된다 는 소리를 들으면, 속으로 그들을 비웃곤 했었는데, 지금은 그들의 뜻을 이해 할것 같다. 내가 세상살아가는 맛을 몰랐었음을, 지금은 깨달으면서, 아이들이 짝을 찾아 새 보금자리를 만들지 않고 있음에 마음이 다급(?)해짐을 우리아이들이 알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더 늦어지기전에......
그래서 동서 형님의 80회 생일은 나에게도 참 뜻있는 자리였었다고 본다. 형님 이겨울도 건강히 잘 지내시고, 내년도 시즌이 되면 다시 골프채카트를 밀고 푸른 초원을 친지분들과 어울려 걸어가는 그모습을 보여 주십시요. 지금까지 못해봤던 골프 라운딩도 내년시즌에는 형님과 같이 한번 하고도 싶고요. 우리 모두 건강하게 그리고 주위 가족들에게 부담없이 살다가 떠나는 때가 됐을때 홀련히 떠나는 그런 바램으로 남은 삶을 뜻있게 살고 싶다.

Monday, November 10, 2008

자금성 (Forbidden City)안의 명황제의 거처가 공개된다니.....


LA times에, 중국 베이징에 있는 Forbidden City 안의 마지막 명나라 황제가 기거하던 2층빌딩이 일반 관람객에게 곧 공개될 계획이라는 기사를 읽고, 몇년전 그곳에 갔었을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그기사를 여기에 옮겨 보았다. 엄청나게 큰 규모의 궁전으로 기억되는데, 그안에 다시 황제가 거처했던 건물이 공개 된다니..... 옛날 황제의 생활은 그곳에서 어떻게 이루어 졌었을까? 궁금해 진다.

사진은 중국 베이징에 있는 Forbidden city안에 있는 2층빌딩으로, 마지막 황제가 기거한곳이엇다. 방금 보수를 마친뒤 2명의 기자가 취재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건물은 명조시대의가장 화려한 건물중의 하나라고 한다. 건물이 너무나 셈세하여, 중국자체 기술만으로 어려워
국제적 합동작업을 필요로 했다고 한다.

그동안 중국 베이징에 있는 Forbidden City가 일반에 공개는 됐어도, 마지막 황제가 기거하던
빌딩은 1924년이후 꽉 문을 걸어 잠그고 세상과 등지고 있었다.
이번에 미국과 중국의 팀들이 힘을 모아 3백만달러를 들여 보수를 마치고 곧 일반에게도
공개 된다고 전한다. 또한 이번 보수작업은 미국과 중국팀들이 앞으로도 호흡을 잘 맞추어
비슷한 역사적 건물에 대한 보수작업을 잘 할수 있을지의 시험대 이기도 된다고 한다.
오랫동안 외부와 차단되여 있었던 관계로, 바닥과 벽에는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으며, 벽에는 쌓인 먼지자국위에 붓글씨를 쓴것처럼 붓을 휘둘러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고 한다. 가구위에도 먼지가 수북히 쌓여, 이곳에서만은 마치 시간의 흐름이 정지 되여 있었던 것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한다.


앞으로 베이징 중국을 방문하게 되면 볼수 있게 된다는 기대감도 또한 커진다.
이궁전 관리자들은 보수를 위해 외국팀과 합동으로 보수를 해야하는데 무척 긴장했다고 한다. 이해가 갈만 하다.


Forbidden City restoration an experiment in U.S.-China teamwork

China Photos / Getty Images
Two reporters visit the studio after its renovation in the Forbidden City in Beijing, China. The tiny, two-story lodge is one of the most luxurious buildings built for Qing Emperor Qianlong.
The $3-million refurbishment of a Beijing studio belonging to one of China's most artistic emperors demanded an extraordinary international partnership.
By John M. Glionna
7:19 AM PST, November 10, 2008
Reporting from Beijing -- For Bonnie Burnham, it was like entering a Chinese version of an Egyptian tomb, a small lavishly appointed studio in Beijing's Forbidden City that had remained untouched for centuries.

On a cool autumn day in 1999, the president of the World Monuments Fund followed her local guides into an area where few had set foot since 1924, when China's last emperor vacated the palace and locked the doors to the studio behind him.


What she remembers most is the musty air and thick coat of dust that covered the floor, the delicate pieces of furniture, even the lushly paneled walls etched with their courtly lines of calligraphy.

"There was a sense that time had stopped there," she recalled.

Burnham's heart raced. Because underneath the grit lay one of the five most historically important interiors to survive China's imperial past -- a window into the private world of one of the Middle Kingdom's most artistic emperors.

Today, Burnham stood among dignitaries from the Forbidden City's Palace Museum to unveil the refurbishment of the tiny two-story lodge known as Juanqinzhai, which will soon be open to the public.

The $3-million restoration, which took nearly a decade to complete, marks an extraordinary international partnership of Chinese artisans and Western expertise.

It also represents a rare instance, officials say, in which the Chinese government has sought foreign assistance and know-how to restore one of its precious historical relics.

The results have been so successful that the fund, a private, nonprofit New York-based preservation group, is extending its alliance with Chinese cultural officials to restore the Qianlong Garden's 26 other pavilions and four courtyards.

The face-lift's first phase involved numerous detailed excavations of the studio's interior, trips to the U.S. by Palace Museum staff for strategy sessions and a nationwide search in China for artisans capable of the delicate renovations.

"None of us had any kind of road map. Neither the Chinese nor the American side had any experience with this specific type of restoration," said Nancy Berliner, the curator of Chinese art at the Peabody Essex Museum in Salem, Mass.

The Juanqinzhai studio was built in the 1770s by the Qianlong emperor for his personal use after his retirement -- a two-acre private retreat nestled in the northeastern corner of the Forbidden City.

He called it the "Studio of Exhaustion From Diligent Service."

Its construction came during the Qing dynasty when China, one of the world's most prosperous nations, was engaged with the West in terms of trade, aesthetics and ideas.

"No resource was spared. Every inch of design and creation was overseen by the emperor himself, who issued an edict that nothing could be altered by future generations," said Henry Tzu Ng, the fund's executive vice president.

The result is widely considered a masterpiece of design and materials: a jewel box replete with large murals, elaborate ceiling paintings and ornate flourishes of bamboo, white jade and satin.

Never open to public view, the studio fell into disrepair after China's last emperor, Puyi, was ordered from the Forbidden City in 1924. For decades, including the Communist takeover and Cultural Revolution, the emperor's refuge became a decrepit storage space.

For the World Monuments Fund, the forlorn studio was an opportunity. Seeking projects within China, the group approached Palace Museum officials about a restoration partnership.

To their surprise, the Chinese accepted, with officials acknowledging that they were open to outside guidance and funding.

"The Forbidden City is huge and . . . there was too much work to do; therefore, our country didn't have the energy, time as well as enough money to manage this part of the palace," said Wang Shiwei, senior engineer of the Palace Museum's historical architecture department.

"It is the first time the Palace Museum is cooperating with a foreign organization to repair its facilities comprehensively."

Palace officials visited the Peabody Museum and other venues to witness firsthand U.S. techniques of cultural restoration.

The pressure was palpable: They were undertaking the renovation of a sacred icon unchanged from the times of Imperial China. "It was like restoring something on the level of Notre Dame, something that's been there for centuries," said Berliner

Back in Beijing, teams of Chinese artisans began work in 2002 that Ng describes as "above-ground archaeology."

Preservationists scoured the studio for every scrap of loose paper and bits wallpaper and disintegrating mural that had fallen to the floor. Each was sealed in a plastic bag and labeled. Soon, they had amassed 35,000 plastic bags, officials say.

"The last emperor closed the door nearly a century ago," Ng said. "What we found was peeling wallpaper, incredible artifacts, furniture, objects behind objects, all as if he had just left it. There was this incredible sense of discovery."

One day, Burnham recalled, she opened a box she found sitting on a table. "Inside was this exquisite jade Buddha," she said. "There was no sense of how much time had passed. Had that piece been sitting there for 200 years, or had it been more recently stored there?"

The studio's murals presented a particular challenge. Fashioned under the guidance of Giuseppe Castiglione, a Jesuit missionary and painter who settled in China in the 1700s, the ceiling murals were painted on silk wallpaper, a combination of European aesthetics and Chinese decorative arts seen nowhere else in the entire 180-acre Forbidden City.

Neither the Chinese nor the Americans were sure how to remove them for restoration. The Chinese first tried to wet the seams to remove the wallpaper remnants. When that didn't work, the Americans introduced a dry method of scraping the fragile wallpaper from behind.

That worked, Ng said. But it didn't solve the challenge of getting the wallpaper back up.

"There were no records of how they had originally stuck the wallpaper, so the Chinese conservation team tried one method and the Western consultants tried a different way," Ng recalled.

"We worked out a compromise between the two: We put mattresses on the floor, on top of which we placed poles with tension springs to hold the wallpaper in place until it dried."

In the end, both sides are satisfied with the result.

Said Wang: "I think the emperor would be pleased."

Sunday, November 09, 2008

노란 카펫위를 걷는 기분으로 Trail Walk

















아직 아침 이슬에 젖어 카펫처럼 널려있는 노란 단풍나무 낙엽위를 밟으며 걷는, 늦가을의 산행은, 그위를 걸어보는자만이 느낄수 있는 색다른 감각을 제각기 발끝에 충분히 주고도 남는것 같다. 산행을 시작하기전, 며칠전 골프장에서 드라이브로 힘차게 때린 볼이 수북히 쌓여 있는 낙엽속으로 날아가 숨어 버리자 눈의 초점을 그곳을 향하고 걸어가서 낙엽위를 밝으며 공을 찾을때 느꼈던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오늘은 들리지 않는다. 이슬에 젖어 푹신한 감각은 풍부한데, 낙엽하면 그위를 밟고 걸을때 바스락 거리는 특유의 소리가 없는게 조금은 아쉬웠지만, 노란색갈의 끝없이 이어진 단풍나무낙엽위를 밟고 한발짝 한발짝 옮길때마다의 기분은 질좋고, 푹신하게 깔려있는 리빙룸의 카펫을 걷는 감촉좋은 기분이었다. 산행때마다 보는 정겨운 얼굴들, 오늘도 형형색색의 옷을 걸치고, 바람결이 조금은 차겁게 느껴지는 초겨울의 산행시작은, 조금은 움추러드는 그런 기분이 지배적이었다. 출발할때 화사했던 햇볕도 어느새 구름속으로 숨어 버리고, 하늘은 잿빛으로, 잎이 다 떨어져 이제는 앙상하게 가지만 회색으로 변해버린 단풍나무숲과 어쩌면 감각을 같이 하는것 같은 무거운 기분이다.
많지않은 12명의 정예회원들이 오늘의 산행에 동참했는데, 그중에는 리더의 중책을 새로 맡은 부부도 참석하여 그의미는 더 깊은것 같았다.
2대의 미니밴에 분승하여 약 50분을, 나이아가라쪽으로 QEW을 달려, Exit 64번으로 빠져, 다시 골목길같은 샛길을 구비구비 핸들을 돌려 산행 출발 지점에 도착했을때는 정확히 11시 정각이었었다. 산행때마다 꼭 참석해오신 7학년되는 고참회원으로 부터 각양각색의 회원들이, 오늘도 산행에 참석한 것이다.
오늘 걷는 Cave Springs 지역은 전구간이 이끼가 파랗게 끼여 있는 바위바닥위를 걷는 구간이다. 트레일은 구릉지 윗쪽으로 나있어, 그왼쪽으로는 멀리 Lake Ontario가 시꺼멓게 보이고, 트레일과 호수 사이에는 눈아래로 넓은 포도과수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아주 평화롭게 시야에 들어온다. 이끼로 덮혀있는 트레일에서 한발짝 옮길때마다 신경이 쓰인다. 미끄러워 자칫하면 밀리거나 넘어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구간에서는 미끄러졌던 발자국흔적이 이끼위로 뚜렷히 나타나기도 했다. 아마도 어느 회원이 삐끄덕 하여, 순간적으로 고생을 한 흔적으로 보인다. 놀라는 아우성 소리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계속 전진했던것 같다. 바로 산행의 경험을 말해 주는것으로 느꼈다. 대신에 가끔씩은 아름다운 여성회원들의 웃음 소리가, 높이 떠가는 비행기의 소음처럼 들리는, 휘몰아치는 바람과 회색빛으로 하늘을 향하여 뻗쳐있는 나무가지들과 부딪히는, 윙윙거리는 바람소리와 어울려 앙상블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여성회원들의 그런 웃음소리가 없었다면 발자국 옮기는 분위기는 어쩌면 조금은 더 무거웠을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어린 영지버섯 몇송이가 단풍나무 고목에 기생하여 생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여름이면 푸른위용을 자랑하던 잡초들도, 떨어져 덮혀있는 낙엽색갈과 같이 갈색으로 변해, 볼품이 없어 보인다. 어쩌면 삶의 Cycle을 보여 주면서, 우리 우둔한 인간들에게 삶의 순환을 겸허히 받아 들이라는 신호를 보내는것처럼 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나의 삶은 Cycle 곡선으로 봤을때, 어느매쯤에 매달려 있다고 보아야 할까? 알것 같으면서도, 나는 예외겠지?하는 어리석음이 마음 한구석을 자리하고 있음을 느낀다. 어리석기는.... 옛날에 천하를 호령하던 진시황제도 싸이클이 다하니까 모든것 다 놓고 갈곳으로 가버린 역사를 훤히 머리로는 기억하면서도.....
우리가 걷고 있는 구릉지 꼭대기에 갑자기 커다란 바위 덩위가 그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엇듯 보기에는 큰 직사각형 같기도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오랜세월을 두고 비방울에 패여 생겨난 수많은 구멍들이 새겨져 있고, 또한 노트에 줄이 그어져 있는것 처럼 그런 자취들이 뚜렷히 나타난다. 옛날 빙하기시대가 한창일때 빙하에 밀려 내려가다가 현재의 위치에서 안착하고 말았다는 설명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진다. 그곳을 지나자 이번에는 급경사로 이어진다. 아직 젖어있는 바닥에 낙엽까지 덮혀있어 미끄러지기 안성맞춤이다. 조심스럽게 발길들을 내딛는다. 이런경우에는 이렇게 발자국을 옮겨야 한다는 조언도 들리고, 서로 손을 잡고 의지 하면서 내려가는 모습도 보기 좋다.
트레일을 걸을때 흔히 보이는 트레일 방향표시(White Blade)가 눈에 들어 온다. 그냥 지나칠수도 있었는데, 그옆에 설명판이 붙어있어, 잠시 쉴겸해서 무심코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이표시판은 아주 뜻깊은 설명을 내뿜고 있었다. 아직 우리가 걷고 있는 Bruce Trail이 공식적으로 오늘처럼 구성되여 있지않고, 구간 구간 트레일 동호인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을때, 이곳에 맨처음으로 트레일 표시판인 White Blade를 표시했던 곳이라고 쓰여있었다. 즉 1962년 3월 25일에 처음 이곳에 세워지다 라고...... 아주 역사깊은 곳을 우리는 오늘 밟은 것이다.
움추러 들려고 했던 몸에서는 어느새 땀이 옷에 젖어들고 있다. 을씨년 스러웠던 처음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이제는 모두가 단추를 풀고 바람(?)을 안으로 끌어 들여 시원함을 갈구하는 모습들이다. 활동하는 생명체들의 자연에 대한 신체의 반응으로 보여 진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잠시 멀리 초점없이 쳐다봤다. 멀리 고속도로위를 달리는 수많은 차량들이 마치 개미의 행렬처럼 보인다. 다만 다르게 보이는게 있다면 개미들처럼 검정색갈말고도 여러 다른 색갈들이었다. 우리도 지금 이곳에서 산행을 하기위해, 저 끝없이 이어지는 자동차 행렬속에 끼어서 한참을 달려 왔었다. 누군가가 우리가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왔던 차를 보면서, 나와 같은 상상을 했을것 같기도 하다.
산행하면서 먹는 점심은 항상 꿀맛이다. 오늘도 똑 같이 꿀맛이다. 어느회원은 이렇게 이마에 땀을 한참 흘리고 나서 먹는 점심맛을 만끽하기위해서 산행에 동참한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그말에 동감이다. 갈증을 해소해 주는 한모금의 물맛도 여느때와는 다르다. 달다.
3시간을 걸었다. 지도상의 표시에서 거리를 재어보니 대략 12키로쯤 걸었다. 평평하지 않고, 이끼로 뒤덮힌 바윗길을 우리 회원들은 침착하게 꾸준히 걸었기에 사고없이 계획된 구간을 완주 한것이다. 7학년 회원님의 무사완주를 한 모두에게 감사 말씀을 끝으로 산행을 접었다. 총무를 맡고 있는 마음착한 회원의 배려로, 따끈한 Tim Horton커피 한잔씩을 마시는 기분은 산행의 노곤한 피로감을 말끔히 가시게하고, 끝맺음을 더 좋게 하고도 남았다. 다음 산행때 까지 모두 강건 하시기를.....

Thursday, November 06, 2008

인디언 섬머, 다시 골프클럽 꺼내 달려 가게 만들었다.







약 10일 전쯤에 짐을 싸서, 여름철 살림집이었던 카테지 생활을 정리하고, 토론토 본가로 돌아 왔었다. 더 있고 싶었지만, 추워진 날씨에 골프 말고는 별로 할일이 없어서 였다. 아쉽지만, 내년 시즌을 기약하면서, 그동안 고맙게 잘쳤던 골프채를 백에 넣어, 토론토로 같이 가지고 왔었다.
카테지에 두고 와도 되지만, 한겨울 추울때, 중남미로 친지들과 캐나다의 눈많고, 긴 겨울의 지루함을 잠시 잊기위해, 골프여행을 떠나기 때문이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낯시간도 눈에 띄게 짧아지고, 조석으로는 늦가을의 서늘함에 잠바를 꺼내 입고...... 가끔씩은 동네 친지분들과 어울려 맥도날드와 Tim Horton에서 조석으로 커피를 마시며,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이바구를 하곤 했었다. 요즘은 미국의 대통령과 국회의원들 선거에 관심이 쏠려, 나름데로의 예측과 세계정세도 화제거리의 중심에 있곤 했었다. 바로 미국 선거가 있기 이틀전에 일기 예보는 우리 부부를 포함한 골퍼들에게 낭보를 알려 주고 있었다. 이름하여 Indian Summer가 며칠간, 즉 미국대통령 선거 하루전부터(월요일) 거의 주말까지 19도 이상 기온이 올라가고, 햇볕이 쨍쨍한 날씨가 계속될거라는 예보였다. 미국이 대선을 치를때마다, 나는 항상 밤을 새워 그결과를 즐겨 보곤 했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하는것은 당연지사로 알고 있었는데, 인디언 썸머는, 우리 부부를 그냥 있게 하지를 못했다. 아내는 정치에 관심이 나보다는 적어서 별개지만, 나는 저울질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곳 토론토에 남아서 대선 결과를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다시 골프백을 차에 싣고 카테지로 가야 하느냐?로. 왜냐면은 카테지에는 신문도, TV도 없기 때문에, 세상과는 단절되는 며칠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아내는 카테지에 가서 골프치기를 원하고 있고, 나또한 그녀보다 더 하지만, 두개를 다 취하고 싶은 욕심으로 저울질을 하다가, 대선의 향방은 이미 알고 있는터라, 황금같은 인디언썸머를 즐기기로 작정하고 화요일 일찍, 차를 카테지로 몰려고 서둘르는데, 아내가 퉁명 스럽게 한마디 한다.
"차키만 꽂으면 다는줄 아느냐? 먹을것은? 입을것은? 다 저절로 차키만 꽂으면 되는냐?" 뭐 이런 내용이다. 머리가 머쓱 해진다. 말없이 이렇게 뒤에서 뒷받침 해주었기에 그녀의 손길이 가지 않고서는 안된다는것을 미쳐 피부로 못느끼고 살아왔음을 들키고 만 셈이다.
손빠르게 그녀의 준비로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고, 이번에는 정말로 카키를 꽂고 카테지를 향해 고속도로를 달렸다. 하늘은 구름한점없고, 기온은 골프치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하는 19도 였다. 카테지에 도착했을때, 지금은 은퇴하여 그곳 카테지촌에서 살고 있는 Barb과 Gene 부부가 우리를 보고 웃으면서 반긴다. 내년봄을 기약하면서, 작별인사를 하고 헤여진지가 불과 10여일 밖에 안됬는데 갑자기 또 만나게 되니, 반가운면서도, 한마디 던진다. "그러면 그렇지, 이날씨에 너희가 골프를 치고 싶어서 그냥 토론토에 있을것으로는 생각지 안았었다. 정말로 너희가 왔구나" 라고. 예약을 하지 않았기에, 행여나 북킹이 넘쳐 못치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 짐을 카테지에 던져놓고, 바로 골프장으로 달렸다. 토론토에서는 골프인구가 많아 북킹이 안되면 챈스 잡기가 쉽지않기 때문에, 그런 걱정이 머리에 꽉찬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라 다를까 골프클럽 파킹장에는 많은 차량이 보였다. 아내는 차에서 골프클럽과 카트를 내리게 하고, 나는 곧바로 프로샾으로 뛰어가, 북킹없이 왔다고 했다. 뜻밖에도 지금 나갈수 있다고 Linda(골프장 주인부인)가 Tee off 티켓을 끈어준다. 별도의 골프피를 우리는 내지 않는다. 골프장의 맴버이기 때문이다. 기분이 너무나 좋다. 골프를 즐기라고 린다가 인사까지 곁들인다. 나도 고맙다고 인사하고, 차로 갔다. 골프백과 카트를 차에서 내리고 있는 아내를 돕기 위해서 였다. 필드에는 우리처럼 은퇴한 많은 케네디언들이 부부동반으로 우리처럼 인디언 썸머에 골프를 치면서, 따뜻한 햇살을 즐기려는듯, 골프클럽을 휘둘르면서, 오랫만에 친지들과 담소를 하면서 파안대소 하는 모습들이 쉽게 볼수 있었다. 따뜻한 햇살이 너무나 좋다. 그저께만 해도 상상할수 없는, 보너스 햇살에 따뜻한 기온이다.
티막스에 올라 티를 꽂고, 힘껏 휘둘렀다. 마음과는 딴판으로 공이 날라갔다. 이게 아닌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아내를 보며, Mulligan줄거야? 물었더니... 또 시작이란다. 그러면서, 며칠동안 안치다가 다시, 인디언 썸머 덤으로 기분좋게 골프를 시작하는데.... 그래 인심쓴다 하면서 자기가 볼 때린 다음에 하란다. 그녀는 반드시 볼을 날려 보냈다. 두번째 친 볼은 비교적 페어웨이 센터로, 보기 좋게 날아갔다.
주위의 나무에는 잎사귀가 거의 없이 나목이다. 나무들은 이미 겨울준비에 들어간지 상당기간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왜 인디언 썸머라고 이름이 붙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이곳 북미에서는 그렇게 부르고 있다. 떨어지 낙엽이 바람에 날려 군데 군데 모여 있어, 친볼이 그곳을 향해 질주 할때는 볼찾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가끔씩 어이없게 볼을 잊어 버리곤 한다. 그래도 기분은 좋기만 한다. 그까짖 볼이 문제가 될수가 없다. 겨울동민에 들어가야하는 이시간에 골프를 친다는것, 그자체로 만족이다. 그리고 감사 한다.
썸머타임 해제이후 낯길이가 더 짧아져 12시에 시작해도, 끝날때쯤인 오후 4시경에는 아직 햇살은 서산쪽에 걸려 있어도 볼이 날아가는 길이 잘 안보이기도 한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하는 증거이리라. 기후의 변화는 일기예보를 무색하게 내일(금요일) 부터는 흐린날씨에 기온도 내려가고 또 오후에는 비가 내릴거라고 수정된 예보를 해준다. 아쉽지만, 다시 짐을 꾸려 오늘(목요일) 골프를 마친후, 토론토로 되돌아 와야만 했다. 다시 인디언 썸머가 오기를 바래면서.... 누가 알랴 또 운좋게, 아니면 도우시는 분이 도움을 베푸시면.... 그동안 며칠 사이에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날아갔음을 피부로 느끼면서, 따뜻한 Tim Horton커피한잔을 마시면서, 달리는 차속에서 나누어 마시며, Classic Pop Song이 핸들을 가볍게 한다. 감사.

Friday, October 31, 2008

부강한 조국건설을 위한 박통의 고뇌와 멀리서 본 그분의 광채나는 눈빛.


내가 군대생활을 마친지 금년으로 41년이 지났다. 긴세월 같은데 하루만에 흘러간 시간같이만 느껴지는 이유는 군대제대후부터, 한치의 앞도 안보이는 어수선하고 당시 가난했던 조국의 상황이 나를 조금이라도 마음놓고 편히 쉬게 했던 기억이 없이, 조마조마한 상황에서 삶을 위한 발길을, 확실한 보장도 없는, 나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하는, 쫒기는 듯한 시간들을 보내왔기 때문인것 같다.

당시의 조국상황은 자주국방의 슬로건아래, 한손에는 이북의 공산주의자들로 부터 남한을 지키기위해 총칼을 들고, 한손에는 조국재건을 위해 농기구를 들고, 그렇게 바삐 뛰자는 위정자를 비롯한 모든 국민들의 참여속에 주야로 건설의 망치소리가 끝이지 않고 움직이던 때였다.

국비로 교육시켜주는 철도 학교에 겨우 턱걸이 입학하여, 과정을 마치고, 국가시험을 거쳐 공무원이 된후, 현장에서의 짧은 근무를 거쳐, 지금은 대우 빌딩인, 당시의 교통센터에 둥지를 툰 본청에서 근무를 하기도 했는데, 그무렵부터 민방위 훈련(물론 1/21사태로 시작된것이지만)과 CPX(도상군사훈련)를 주기적으로 실시하면서, 조국방위를 군대만이 아니고 후방의 국민들도 직장에서 분담하던 때였다.

정확한 시기는 잘 기억 나지 않지만, 야간근무로,신혼의 꿀맛을 내는 신부를 단칸삭월세방에 혼자남겨두고, 지하벙커에서 CPX훈련을 하고 있을때, 현장을 방문하여 훈련 독려와 위로, 그리고 훈련 점검을 손수 하고 다니시던 박통이 몇명의 경호원만 대동하고 나타났을때, 그분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뚜렷히 남아 있다. 까므잡잡한 얼굴에 미소는 전연없고, 검은 안경을 끼고, 조그만 지휘봉을 오른손에 쥐고, 군대용 그린잠바 차림의 모습. 도상훈련을 하고 있는 우리 모두는 자동적으로 의자에서 용수철이 튀듯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그분이 나갈때까지 취했던 기억도 남아 있다. 어떤 언급이나 지시도 없이 이곳 저곳 훈련장을 둘러 보고 나가셨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지근거리에서 내눈으로 직접 보았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오늘 아침 조국의 중앙일보기사에서, 월남전에 파견된 자식같은 군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영양 보충에 없어서는 안될 김치의 공급을 위해 미국측에 특별히 김치 보급을 허용해 달라는 내용의 친서를 전달 했다는, 역사속의 기록을 읽으면서, 지도자로서 그분의 자상함과 고뇌를 느껴 볼수 있었다. 다시한번 그때의 시절을 머리속에 그려 봤다. 참 세월은 빠르게 날아감을 또 한번 실감하는 이아침이다.

여기에 그기사의 일부를 옮겨 놓았다. 기회가 있을때 마다, 또 읽고 읽고 해 볼려고 그랬다.


월남전 당시 한 전투진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일, 매식, 빼놓을 수 없는 특이하고 고유한 전통부식이 있다. 그것이 ‘김치’인데 김치만이라도 하루바삐 월남에 있는 한국 장병들이 먹을 수 있게 한다면 사기는 훨씬 앙양될 것으로 믿는다.”

1967년 3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는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직접 존슨 미 대통령에게 전달하라며 보낸 친서 내용의 일부다. 박 대통령은 여기서 끝내지 않고 더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다.

“한국 정부로서는 한국 장병들이 한국 음식을 먹고 싶은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이미 9개월 전부터 통조림으로 된 야전식량(C-ration)을 연구했고 생산까지 완료해 성과는 매우 만족스러운 상태다. 만일 야전식량을 공급하게만 된다면 사기와 전투력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증가할 것으로 확신한다.”

누가 봐도 친서는 파월 한국군을 위해 대통령이 부식까지도 신경을 쓸 만큼 장병들에게 깊은 애정을 보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물론 박 대통령의 애정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김치까지도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자원이 된다는 것을 대통령이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미국도 기꺼이 환대했다. 정 총리가 러스크 국무장관, 맥나라마 국방장관, 험프리 부통령과 함께 김치 C-레이션 공급 문제를 거론하자 즉석에서 ‘우리도 좀 먹어보자’고 했을 만큼 거부감이 없었다는 것이 당시 언론이 전하는 보도였다. 이처럼 한편에서는 파병으로 우리의 반공이념과 우방에 대한 신의를 보여주면서, 한편에서는 경제개발 자금을 벌어들이는 시장으로서 월남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점을 정부가 분명히 했기 때문에 기업들도 외화를 벌 수 있는 길을 찾아 날개를 퍼덕이는 분위기가 확실히 살아나고 있었다.

말하자면 정부나 기업이나 월남은 희망의 땅으로 떠오른 셈인데, 그럴 때 한진이 달러 금광을 캐겠다고 나섰으니까 비록 미국 펜타곤 친구들을 등에 업고 떠난다고는 하지만 우리 정부로서도 적지 않은 기대를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조중훈 회장도 정부의 기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고 있었다고 했다. 다만 정부로서는 국가 차원의 경제개발을 생각했겠지만 조 회장은 그것과 함께 월남이 한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곳으로 확신했다는 것이다.

“11월 1일이 우리 한진그룹 창립기념일인데, 매년 그날이 되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고, 만감이 교차되기도 해요. 그동안 여러 역경이 있었지만 월남에 진출할 때나 빚더미에 앉아 있던 대한항공을 인수할 때 생각을 해보면 참 심각한 결단을 했구나 싶지요. 특히 월남은 전쟁터로 가는 것 아니었습니까. 눈에 금광이 보이기는 했지만 금광이 무슨 소용 있어요. 캐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는 게 전쟁터인데. 그러나 기업의 기회는 변화에서 오는 거니까 숱한 어려움과 고난을 각오하고 진출을 했던 겁니다. 물론 그 당시만 해도 개인이든 기업이든 1달러라도 벌어오는 사람이 애국자니까 수송을 전문으로 하는 우리가 나가서 외화 가득을 하면 국가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는 생각도 했고, 사실 정부도 그런 기대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확고한 신념 없이 그게 돼요? 우리가 무에서 유를 창조해냈는데 그게 기적이 아니에요. 그만치 노력했고 그 위험한 포화 속에서도 신용을 지켜 일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고 오늘의 한진을 만들 수 있었던 겁니다.”


월남이라는 무대에서 누가 더 주연급으로 활약했느냐에 따라 결과적으로 한진 같은 그룹이 솟아오를 수 있었다는 얘기로 들리기도 했다. 물론 한진 성장의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는 조중건 고문(전 부회장)도 한국의 경제사적 관점에서 보면 월남 시장은 분명 우리에게 약속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내가 보건대, 이런 얘기를 하면 듣는 사람들이 동감할는지 모르지만 한국 경제가 돌기 시작한 것은 월남 파병으로 받은 군인들 봉급, 또 한진 같은 유수한 기업들이 많은 외화 가득을 한 것이 원동력이 됐지 않았느냐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가 월남 파병을 안 했던들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기는 힘들었겠다, 그걸 하면서 미국에도 큰소리쳤고 경제원조도 더 받았고, 안보문제를 제기해 군사원조까지 더 받으면서 일어설 수 있지 않았겠느냐. 그런 데다가 월남으로 갔던 기업들뿐 아니라 개인들까지 이것저것 외화 가득을 많이 해서 형편이 좋아지고 그게 다 밑거름이 된 거 아니냐, 그 돈을 다 송금하고 산업에 투자해서 이만큼 발전을 가져온 거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분명히 월남은 지금 생각해도 은혜의 땅이었다구요.”

아무튼, 누구도 엄두를 못 내고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길바닥이 우리 자산이다’는 아이디어 하나로 국내 운송업계를 석권하다시피 했던 한진이 이제 월남 시장을 한진의 시장으로 평정하겠다고 나설 때 선봉대장을 자임한 인물은 조중건 상무였다. 물론 조중훈 회장이 쌓았던 경험과 닦아놓은 대로(大路)가 있었기에 가능했겠지만 조 상무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특유한 친화력과 미군 통역장교 시절 맺은 끈끈한 인맥을 최대한 발휘해 미군의 물동량을 단숨에 확보하는 수완을 보였다.

그러나 막상 떠날 때는 조 상무도 불안을 숨기기 어려웠던 것 같다. 전쟁 중인 나라에 기업의 장래가 걸린 신작로를 닦으러 출정하는 입장에서는 사실 심적 부담이 여간 무겁지 않았을 것이다.

“날짜는 1월 23일로 정해졌어요. 이미 비행기도 편도 티켓까지 끊어놓은 상태였단 말이죠. 근데 솔직히 막막해요. 관광이나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심정이다 보니까 집사람한테도 얘기를 못했어요. 가방도 내가 챙겼어. 더우니까 반소매 작업복 한 벌 쑤셔 넣고 타이프라이터 하나 챙기고 돈 3000달러 준비하고. 비행기 표는 왜 편도만 가지고 가느냐, 돌아올 땐 월남에서 번 돈으로 사면 될 거 아니냐, 그러니 죽기 아니면 살기로 가는 거지요. 집사람한테도 딱 떠날 때쯤 알리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불안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배짱도 생겨요. 내가 한국군에서 소금국도 먹어봤고, 일선에도 가 있었고, 미국 군대도 가 있었고, 미국에서 공부할 때 접시도 하루 2시간씩 닦아봤고, 신문배달도 해봤고, 내 나름대로는 인생의 밑바닥을 다 걸었는데 전쟁이야 한국전쟁도 경험했잖느냐, 그런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좀 놓이는 거지요. 1월 22일이 구정입니다. 잔뜩 차려 먹고 내일 떠나는데 이젠 말을 안 할 수 없잖아요. ‘여보, 나 내일 월남 간다.’ 깜짝 놀라는 거죠. 더구나 전쟁을 하는 곳인데.”

Saturday, October 25, 2008

향군창설 56주년 기념 및 캐나다 동부지회 연말 파티





조금 늦게 연말 파티에 아내와 같이 참석했었다. 벌써 많은 회원들이 동부인하여 참석해서, 벌써 순서에 따라
O Canada 국가를 합창하고 있었다.
해마다 하는 행사지만, 웬지 향군 선배들 파티에 참석하는 모습이 줄어지는것을 피부로 느끼는 안타까움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그런데 오늘은 또 내가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군 선배로 모셔왔던 설재련 장군께서 며칠전 돌아가셔서, 이시간 현재 가족친지들이 모인 가운데, 장례식장에서 가시는길에 마지막 Opening을 해서 조문객을 받고 있다는 지회장의 광고가 가슴을 쿵 내려안게 한다. 몇개월전 여름 하계 파티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뵙고 하루를 즐겁게 보냈었는데..... 세월의 무상함을 더느끼게 하는 슬픈 소식이다. 부디 좋은 세상에 가셔서, 앞으로는 근심 걱정없는 그곳에서 좋은 시간만 갖으시기를 기원합니다 라고,마음속으로 기원했다. 다른 선배의 그분에 대한 얘기에 의하면, 6/25전쟁을 치렀고, 5/16혁명의 주동자였던 박정희 전대통령과 육사 동기동창으로 같이 일하다가 일찍히 이곳에 이민을 오셨다고 들었다. 소년처럼 해맑게 웃으시던, 마치 미소년같은 그분을 이제는 만나볼수 없게 된것이다. 모두가 숙연한 분위기이다.
오늘의 파티는 참석한 회원들에게 기쁜 소식도 주었다. 한인상위원회에서 매년 한인사회내 각단체들이나, 개인에게 한인사회를 위해서 헌신한 공을 인정하여 주는 한인상에 향군동부지회가 수상하게 되여, 오는 11월 7일 한인회관에서 그시상식이 열린다고, 많은 회원들의 참석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현 향군지회장(이 진수)의 헌신적인 봉사와 노력으로 이러한 결실을 얻은것으로 나는 믿고 싶었다. 그의 leadership은 과히 칭찬 들을만 하다.
지회를 대표하여 수상하게되는 그를 encourage시키기위해서라도 참석하기로 하고, 15달러 티켓을 구입했다.
평상시 별로 연락이 없던 회원들을 이만남의 공간을 통해서 오랫만에 만나, 인사를 하고 살아온 애기를 나누고,옛날 군대얘기를 하는 시간은 그의미가 갈수록 더 해감을 느낀다. 반가운 얼굴들이다. 캐네디언 참전용사들도 향군의 크고 작은 행사에 상당수 나오곤 했으나, 그들도 이제 많이 늙어 매년 그참석수가 줄어 들곤 했는데, 오늘 저녁에는 아무도 안보였다. 지회장의 설명광고에서, 몇안되는 그들이 오늘저녁 같은 시간에 오타와 총독의 관저에서 초청을 받아 그곳으로 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년 6/25 참전 기념식이 있는 오타와에서나 다시 볼수 있게 될것이다. 몇분이나 참석하게 될지는 미지수이지만....
금년이 향군 창설 56주년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도에 창설된 것이다. 캐나다 지부는 22주년이 됐다고 한다. 56주년이면, 내가 7살때의 코흘리개 개구장이때이다. 그런 내가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중년의 노인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계산해 보면서, 오래전 5/16 혁명후, 당시 대학생이었던 형이 학보병으로 논산 훈련소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고 있을때, 어머님께서 면회가시면서, 초강 기차역까지 같이 따라가던 당신의 어린아들인 나에게 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네가 군에 갈 나이가 되기전에 통일이 되여 다시는 이렇게 면회가는일이 없었으면 원이 없겠다" 라고 머리에 떡을 비롯한 먹을것을 이고, 기차에 타시던 그 모습이 눈에 아스라히 초강역전경과 함께 스친다. 아직도 통일은 커녕, 총칼을 비롯한 새로운 전쟁무기를 앞세우고 날을 세워 총칼을 서로 겨누고 있는 조국의 현실을 생각해 보면, 답답기만 하다. 이지구상에 같은 민족이 둘로 나뉘어 서로 총뿌리를 겨누는 나라는 이제는 없다. 월남도, 독일도 다 통일이 되여 잘 살고 있다. 유독 김정일 치하의 북한만이 아직도 기아선상을 헤매고 있어 안타깝다. 역전의 용사들의 노력이 부족해서 일까? 아니면 우리 조국의 운명이 그런길을 가야만 하기 때문일까? 창조주만이 아실것이다. 제발 바라기는 우리 오늘 이자리에 모인 향군회원들이 생존해 있을때, 하나로 통일된 나라가 되는것을 보는 것이다.
회원들의 얼굴과 뒷모습을 다시한번 처다보게 된다. 머리는 하얗고, 대머리이고.... 어느새...
그래도 국기에 대한 경례는 용수철이 튀겨 흔들리듯 절도있게, 군인답게 보인다. 그것이 바로 군인 정신일것을.... 비록 몸은 세월의 소용돌이 속에서, 빛이 많이 바랬지만말이다. 부디 오래 건강 하소서...
오늘저녁 년말 파티에 참석하기위해, 카테지를 정리하고 골프채를 포함한 짐을 꾸려 어제오후 단풍이 한창인 보기좋은 고속도로를 달려 토론토의 보금자리로 달려 오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내년 연말파티에서도 오늘 참석한 모든 회원들이 그대로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면서 파티장을 나섰다.

Monday, October 20, 2008

Cuba could be a Korea's Beachhead to Caribbean



이 컬럼도 VANK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여기에 옮겨, 오래 보관 하고져 합니다.

Cuba could be a Korea's Beachhead to Caribbean
2005-02-01

Hi, it's Paul Lee. As you may know Cuba is one of two communist countries secluded from the global organization, the other one is, of course, North Korea. I just got home there, Varodera, Cuba, taking 10 days winter vacation fleeing the severe Canadian winter with snow. The Cuban government has never allowed their people to travel out of Cuba since Fidel Castro's regime in power that was late 1950. Until that revolution happened, Cuba was a kind of free country under western hemisphere, especially U.S. All the resorts opened to foreigners nowadays were built at that time. The living standard of people there were so poor which seems like never got better since revolution.

But the most of people I met kept friendly with smiling that I believed because of hot tropical weather through whole year round. Cutting the relationship with western countries meant Cuban economy heading backward since that forced Castro's regime open the resorts area to foreign tourists later to feed their people, I believe. Still horse driven bogies are a major transportation at the most of cities in Cuba including Havana, capital city. Taxis, trucks, buses are very old that spews black smoke like chimney nobody seems like concerning of.

Sometimes I saw new cars, mini vans from Hyundai, Kia Co. of Korea, my homeland. Also I met a few descendants of Koreans who have lived there more than 3 generations who were hardly speaking Koreans. I have told them about myself in exchange information with them. But people there, from my view, didn't make any complaint of regime hardly which I believe that during the last 50 yrs they haven't seen out of Cuba that impossible for them to compare. Instead they have been brain washed with regime's propagandas only. And regime's power in control seems all most over since the top leader is weakened with old age. Then I believe whoever in power has to open their door to the world that may make Cuban people open their eyes widely to see and feel.

Seeing these kind of tendency in Cuba, Koreans can use Cuba as a vanguard to expand relationship with Caribbean countries, especially on economy, I mean, international trade. Cars I saw there made me feel competency a lot. Telecommunication industry with cell phones will be a major item for Korean manufacturers to be thought. Of course I believe big companies of Korea would have been in ready for their business. Still I want to inform these kinds of phenomenon in Cuba to Koreans who may have intention there. I really enjoyed my vacation playing golf, sunbathing, touring cities etc. The birds sat on bed made by room-maid who used bath towels were so impressive. Many thanks.

Paul Hankyun Lee
Canada (Retired businessman)

But I love my motherland,Korea.(그래도 나는 내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할수밖에 없다.)






















































오늘 갑자기 거의 16년전에 기고했던 글을 다시 여기에 옮겨논 이유는 간단하다. 어제 일요일 아침에 삼성의 이건희 회장님께서 긴기간동안 와병중에 계시다가, 하늘 나라, 영원의 나라로 여행을 떠나셨는데, 고국의 언론을 비롯한 많은 국민들이 애도의 조의를 표하는것을 언론을 통해 봤었다.

오늘 아침뉴스에는 이회장님이 떠나시면서, 후손인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비롯한 자손들에게 많은 재산을 상속해 주셨는데,  당장에 내야할 상속세가 적게는 10조원, 많게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걱정섞인 보도였던것이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당장에 그렇게 많은 상속세를 내기위해 소유하고 있는 주식을 팔아야 하는데, 그럴경우, 팔게되는 주식을 구입하는 사람이 외국인, 특히 중국기업이 구입하게 될 확율이 높아, 이경우, 앞으로 삼성의 운영권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것이라는 염려 기사를 봤었다.

내가 알기로는 미국이나 캐나다를 비롯한 많은 서구나라에서는 상속세가 거의 없는것으로 알고있다. 그만큼 기업의 역활이 나라의 경제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데 대한 답례가 아닐까?라는 이해를 하게 됐다.  왜 우리 한국의 세법은 기업에 대한 배격을 분명히 하는 내용의 악법을 계속 고집하고 있는지?가 너무도 궁금해서다.  전문가들의 설명에 의하면 중소기업도 똑같은 처지에 고민이 많아, 어떤 기업인들은 다 팔아서 처분하고 이민을 떠난다는 슬픈 얘기도 전해줬었다.

이렇게 비합리적인 상속세는 제발 하루속히 바꾸어, 기업들이 조국에서 맘놓고 맘껏 기업활동을 할수 있도록 좋은 나라를 만들도록 도와 주기를 바란다. 기업이 잘돼야 Job creation이 많이 발생하는 간단한 원리를 생활화 할수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해서다.



몇년전 고국을 방문 했을때, 느꼈던 점을, 고국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웹싸인트 VANK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보도에 의하면 VANK웹이 국가에서 삭감한 예산 문제로 곤란에 처하고 있다기에, 여기에 옮겨 보관 하고져 함입니다.


2005-01-05

But I love my motherland, Korea
Happy New Year! My name is Paul Hankyun Lee, though my original is Hankyun Lee, but living here in Canada adapting an English name is easier for being remembered by people and another reason I took Paul is that through my life I have wished to live like the Paul, one of desciples of Jesus in the bible. As you guess, I am a Korean-Canadian who's been living here in Toronto almost 30 years as of Jan. 2005, holding Canadian citizenship. And I have retired since 2 years ago from my own business in retail industry. Currently I have 2 regular e-mail friends. And I got home just 3 weeks ago from motherland Korea staying 45 days. Of course during that staying I also traveled Hong Kong, Vietnam, Cambodia and China on top of every corner of Korean peninsula travelled with 3 couples of my friends.

The paying system at tour areas should be changed not to give a bad impression.

Here are some points I experienced with good feeling and bad feelings too. The good points were so many High ways have been constructed in the short period of time which can be cheered by tourists and Koreans abreast. The bad point was that too many times of entrance fees being collected at any tour areas. For example, I was Seorak mountain (Seoraksan) with my friends mentioned above. We paid 4 times of it to tour, first at the parking lot, then National Park entrance fee, then temple entrance fee, then again lifting fee of cable car to a peak. Also each of fees was so expensive that could give the tourists a bad impression on visiting Korea.

Nobody can understand that 4 times of fees to see a resort of a mountain. I paid only one time entrance fee at the Ocean park in Hong Kong which has two parks in it with huge facilities to see and free ridings including cable cars that runs over 15 minutes that was so long compared with two minutes ride on Seorak mountain (Seoraksan). The most of resorts I have been in Korea were same on collecting fees. This should be changed to one time collecting right away, otherwise foreign travelers won't suggest any Korean tours to their friends after tour in Korea. I am sorry I couldn't say good feeling a lot. But I love my home country. Since I saw those as a outsider without any prejudice on it, it would be helpful for you to judge it.

Many thanks.


Paul Hankyun Lee
Canada (Retired businessman)

Wednesday, October 15, 2008

눈에 선한 단풍절경속에 Trail Walk-추수감사절 휴일에.



































눈에 선한 단풍절경에서 Trail Walk.

야….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 색의 조화가 잘 이루어질수 있는 또 다른 경치를 어디서 보고, 맛을 느낄수 있단 말인가? 어려운 계획과 실행이었지만, 만추의 단풍절경을 보면서, 오랫만의 Trail Walk을, 항상 친지요, 동생 또는 형님 그리고 조카, 손자 손녀처럼 생각해 왔던 회원들과 어루려, 1 박 2일간을 한창 무르익은 가을 단풍의 절경속에서, 잠시 세상살이의 시름과 기쁨, 그리고 모든 짐들을 벗어 던지고, 곱디곱고, 아직 때묻지 않은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노랗고 빨갛게 색칠된 숲속을, 그것도 가장 채색(?)이 잘된 Trail Course를 골라, 쏜살같이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잠시 붙잡아 둔것같은 세계속에서 보낸 아주 보람된, 기억에 남을 순간들을,그것도 추수감사절 휴일에, 잊을수 없을것 같다. 중국 장가계의 여행때 감탄했던 절경이 기억에 오래 남아 있어 지금도 가끔씩 떠 올리곤 했지만, 오늘 산행중에 Mazinaw Lake건너편에 있는 기암 절벽의 풍경은 절경이었지만, 색갈의 조화는 장가계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표현의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할 정도로 감탄 연발의 절경중의 절경이었다.
매년 이맘때면, 이곳 저곳을 찾아 트레일 웍도 해 보고, 이곳 캐나다의 상징인 단풍나무숲을 수없이 걸어 보았지만, 오늘 걸은 Bon Echo Provincial Park속의 불타는듯한 단풍절경은, 그많은 시간과 계절을 보내면서, 왜 일찍이 이곳을 찾지 않았었던가 하는 후회같은 아쉬음을 느끼지 않을수 없게한 곳이었다. 남부 온타리오의 고속도로를, 10월달 단풍계절에, 달려 보면 운전자 모두가 느끼는것처럼, 단풍의 절경이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음은 모두가 알고, 그것에 대한 일가견들이 즐비한것으로 인식되여 있지만, 이곳의 절경이 유난히도 돋보이는것은, 호수건너편에 떠 있는 병풍처럼 펼쳐지는 섬의 앞부분을 이루고 있는 기암절벽과 구색을 맞추어 어우러진 색채가 특이함 때문인것이다. 한창 더울때 무더위를 피해 이곳에 몇년전에 들렸던 기억이 아직도 새로운데, 그때는 푸르다 못해 검은 색을 띨 정도로 우거진 숲의 웅장함을 느꼈었다. 회원들 모두가 감탄의 연발이다. 더 늦기전에 불타는듯한 가을의 마지막 단풍을 보기위해, 우리 회원뿐만이 아니고, 여러곳에서 우리처럼 달려온 수많은 구경꾼, 산책객들이 같이 어울려 카메라에 아름다움을 옮기느라 여기저기서 셔터 누르는 소리가 끝이지 않는것 같다. 나도 계속 눌러 댓지만, 그래도 다 못담는것 같아 아쉬움이 끝이지 않는다.
어떤 회원은 내년에 다시 와서 camping 을 해야 겠다면서, 되돌아 가는길에 Park Office에 들려 아예 Reservation을 하겠다고 벼르기도 한다. 바다처럼 넓고 멀리 펼쳐져 있는 호수의 그끝을 봐도, 그리고 반대편 북쪽의 호수 건너편의 숲을 봐도 온통 빨갛게, 불타는듯한 절경이다. Timing이 아주 잘 맞은 점도, 한몫 거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하늘은 티하나 없이 순수 그대로의 코발트 색이다.
우리 모두를 아쉽게 한것은 호수를 건너 절경의 섬까지 운항하던 Ferry Service가 중단되여 우뚝 솟은 섬위의 Trail을 걸으면서 더 가깝게, 그리고 더 멀리 볼수 있는 비경을 놓친점이다. Ferry Service Season이 끝났다는 Park Ranger의 설명이 야속하기만 했다.
이곳에 오기전에는 Presqui’le Provincial Park에서 생태계를 자세히 관찰 할수 있는 Jobes Wood Trail을 아침 일찍 걸었었다. 태초 이래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을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우거진 숲속에 쓰러져 딩굴다 썩은 나무위에는 무수한 종류의 버섯들이 때를 만난듯 버섯특유의 냄새를 내품으면서 촉촉함을 한껏 자랑하는것 같은 모습들이 신기했다. Trail 시작점에 세워진 설명판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200년전쯤에 초기 Settler가 이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었던 곳이라고 밝히고 있었다. 그래서 Trail 이름도 초기 정착민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이러한 숲속에서 농사를 짖고, 가축을 기르면서 살았다니… 쉽게 믿어 지지가 않았다. 피부에 그감각이 와 닿지는 않지만, 다만 역사 공부를 한다 셈치면 편할것 같은 기분이다.
긴 섬처럼 온타리오 호수를 따라 펼쳐진 Presqui’le Park은 대략 서쪽에서 동쪽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반도(Peninsula)인데, 남쪽은 호수에 접해 있고, 반대편인 북쪽으로는 Marsh벌판이 끝도 보이지 않게 펼쳐저 Main Land와 접하고 있다. 공원 Ranger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자라고 있는 갈대들이 물을 정화 시키는 일등 공신이라고 한다. 온타리오 호수를 거쳐 St. Lawrence강을 따라 대서양으로 흘러 가는 물이 맑은 이유는 바로 이 갈대들의 숨은 정화 노력이라고 보면 지나친 과장이 될까? 이넓은 갈대밭에는 각종 생명체들의 서식처가 되고 있었다. 봄에는 종족 보존을 위한 각종 동물들의 생산지가 되고, 가을철과 겨울철에는 이곳을 지나가는 철새들의 쉼터가 되고, 학생들의 방학철에는 야간 실습장이 되여, 고사리같은 손에 Flash light를 쥐고, 조심 조심 발길을 옮기면서, 곤충들의 삶을 살펴 보기도 하는 현장 경험을 겪게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현장 체험을 돕기위한 차원에서 갈대들이 자라고 있는 Swamp속을 가로 질러 건설된 Board Walk이 약 1.5 킬로 정도 된다. 운이 좋을때는 Board Walk을 걸으면서, 사슴들이 그속을 헤메는 장면도 볼수 있고, 요즘은 휘귀종인 Crane과 Heron들도 여름철에는 가끔씩 보기도 한다. 긴다리로 엉금엉금 한발짝씩 떼어 놓을때마다, 긴목도 같이 춤을 추는것 처럼 움직이는 모습도 볼수 있곤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한 Board Walk Trail 을 할수 없었다. 오랫동안 사용되왔던 Board Walk이 낡아 전부 뜯어내고, 다시 건설하고 있는데, 입구에는 있는 2충높이의 전망대는 완성되여 그곳은 개방 되고 있어, 그나마 위에서 멀리 펼쳐져 바람에 출렁이는 갈대숲을 볼수 있어 다행이었다.
갈대들은, 마치 수확기를 앞두고 황금물결이 출렁이는 벼벌판처럼 황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내년쯤에는 다 완성되여 Swamp속에서 자라고 있는 갈대밭속을 걸어 볼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옆의 해수욕장으로 이용되는 모래밭에는 이동중에 잠깐 쉬고 있는 수백마리의 기러기떼들이 아름다운 전경을 만들고 있었다. 이곳의 기러기들은 우리 인간들과 친숙해서 일까? 웬만큼 가까이 접해도 도망갈 생각을 안한다. 한가로이 쉬고있던 기러기떼들이 갑자기 퍼득거리면서 공중으로 치솟는다. 저멀리 모래사장에서 한테의 산책객들이 걷고 있었는데, 그속에 개가 있어, 이를 본 기러기들이 놀라 그렇게 퍼득 거림을 알았다. 사람을 더 무서워 해야할 그들이 사람은 무시(?)해 버리고, 개한테 신경을 쏟고 있음은, 동물들만이 느낄수 있는 먹이 사슬이 엄연히 작용하고 있음을 보는것 같다. 운좋게 우리 일행이, 사람키보다 훨씬 큰 억새풀숲 사이로 이어진 Owen Point Trail을 걸으면서, 모래 사장에 인접해 있는 Look Out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때 여서 이러한 광경도 목격했었다.
우리 일행의 마스코트 였던 손녀딸 같은 영아가 신기한듯 응시하는 모습이 귀엽다. 걷기를 마치고 카테지에 되돌아 왔을때, 첫눈에 띄는것은 허기진 일행들의 배를 채워줄 먹거리가 넓직한 테이블위에 질서 정연하게 진열되여 있는 광경이었다. 경험많은 여성회원 몇분이 산행에 참석치 않고, 대신 이렇게 미리 준비를 해 놓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Team Work의 표시 아닐런지? 고마웠다.
어제밤 늦게까지 카테지 뒷뜰에서 Camp Fire을 하면서, 깊어지는 가을밤의 이슬을 맞으면서, 세상살아온 이야기들로 꽃을 피우면서, 밤공기의 차거움도 잊은채, 밤잠을 설치면서, 그렇게 추억을 만들었었는데, 한명의 낙오도 없이 새벽같이 일어나, Trail Walk을 하면서 피곤한 기색없이 기분좋은 표정들이다. 오랫동안 기억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져 있기를 기대해 본다. 연장자되시는 회원께서 무사히 일정을 마치게 인도해 주신 deity 에 대한 감사의 말씀과 기도로 끝을 맺었다. 이번 1박 2일의 Trail Walk을 뒤에서 소리 없이 계획하고 이끌어준 회원들에게 고맙다고 인사 한마디는 꼭 하고, Trail Walk소감을 마치고져 한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