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anuary 26, 2012

80년후의 나는 어떻게 보여질까? Time Capsule의 발견을 보면서...


내가 살고 있는 Toronto의 다운타운 중심가에는 지금은 역사적 유물로 지정된 Maple Leaf Gardens 경기장이었던, 외부에서 볼때는 사각형으로 보이는, 별로 아름답지도 않은, 빌딩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경기장은 2009년도까지는 북미 Hockey League팀의 하나인 Maple Leaf팀이 Home 구장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하키는, 캐나다사람들에게는 한국사람들이 축구하면 만사를 제치고 눈길을 돌리는것과 같은 구기종목이다. 캐나다 연방수상들까지도 현직에 있으면서 Ice Rink에서 선수들과 게임을 하는것을 자랑으로 삼는, 3살먹은 어린 꼬마들도 차량의 통행이 뜸한 자동차길에서 추운줄도 모르고 즐기는 국민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에 구쏘련의 공군기가, 300 여명 이상을 태우고 캄차카 반도상공을 날아가고 있던 KAL 007기에게 미사일을 쏘아 떨어뜨렸을때, 당시 Maple Leaf구단주이면서 반공주의자였던 Harold씨는 경기장 한복판의 천장에 달아놓은 전광판에 "Soviet Fighter Jet shot down KAL 007"라는 구호를 새겨넣은것으로도 유명세를 탔던 역사깊은 Sports Arena였다.

1999년 Maple Leaf Hockey팀이 새둥지를 찾아 떠난이후 2009년까지 비어 있던것을 Lawblaws Grocery Co.와 Ryerson University가 공동으로 사들여 내부수리 공사를 해왔는데, 이번에 Arena정문 안쪽의 바닥에서 1931년도에 묻었던 Time Capsule Box를 발견하여, 건축당시의 사회상을 유추해볼수 있는 좋은 자료를 재공해 주었었다. 정확히 그 Box를 땅속에 묻은지 80년만에 세상빛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1931년 당시에는 미국이 경제공황으로 북미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살기가 어려워하던 때였었다고 한다. 그런때 당시 Maple Leaf Hockey팀의 구단주였던 Conn Smythe씨는 얼마나 부자였기에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큰 빌딩, 그것도 경기장을 지었었을까? 그러면서도 후세 사람들이 언젠가는 볼수 있을것이라는것을 염두에 두고, Time Capsule을 만들어 묻었을까?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수 없다.

크기는 겨우 가로 30센티미터, 세로20센티미터, 높이 20센티미터의 조그만 구리상자여서 많은것이 그안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몇개 안되는 품목중에서, 여자들 목걸이에 장식용으로 부착하는 크기의 상아로 만든 미니 코끼리가 그안에 들어 있는 이유와 목적이 뚜렷히 밝혀지지 않고 있어, 고고학자들과 전문가들 그리고 캐네디언들을 멍청하게 만들고 있음에, 그것도 불과 80년전에 일어났던 사건(?)이었는데....수만년전에 있었다던 공룡이나, 지구상의 대륙이 원래는 하나였는데 지각변동으로 벌어져 바다와 대륙으로 나뉘어 졌다고 그럴듯하게 씨나리오를 써낸, 고고학자(?)들의 주장을 더욱 믿을수 없게되버린 내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사건이기도 했다.

보통사람으로 태어나서 보통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나자신을 여기에 대입해 보았다. 80년이 지난후의 나에 대한 흔적을 잘은 몰라도, 세상사람들은 물론이고 나의 후손들도 기억못하고, 바람에 흩날리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먼지 한조각쯤으로 흘러가 버리는 존재일것이다. 거기에 비한다면 상아로 만든 코끼리는 수천만배나 더 큰 뚜렷한 형상인데도, 그래서 세상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형상인데도, 거기에 담긴 뜻을 모른다는 현실에 나를 비추어 볼때, 행여 후손들만이라도 기억해 줄것을 희망하고 싶다는 나의 바램은 너무나 큰 욕심일것만 같다. 어쩔수 없는 보통사람으로서의 순박한 꿈이라고 해두자.

지구상의 몇십억되는 인간들은, 몇명을 제외하고, 나처럼 그렇게 왔다 갔다는 흔적을 남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세월따라, 시류따라 살다가 때가 되면 먼지로 분해되여 영원속으로 사라져 버린다는것을 오늘 이 Time Capsule을 보면서 터득했지만, 뭘 얻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마음 조리면서 앞만보고 달려왔나를 곱씹어 보는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다 부질없는 욕심인것을 깨달은것 같지만, 이미 쏘아놓은 화살 아닌가.


CP24뉴스에 실린 관련 기사를 옮겨 여기에 싣는다.

Maple Leaf Gardens 보수공사중 Time Capsule상자발견.

Time Capsule 상자안에는 상아(Ivory)로 만든 미니 코끼리, 4개의 신문(Toronto Daily Star, The Globe, The mail and Empire 그리고 The Evening Telegram)으로 1931년 9월 21일자이다.

신문기사의 주요내용은 영국의 통화제도에 대한 염려와, 캐나다의 실업율에 대한 걱정 그리고 중국과 일본간의 긴장감이 커지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Time Capsule Box의 크기는 가로 30센티, 세로 20센티,높이20센티미터의 구리상자인데 겉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고 한다. 이상자는 당시 Hockey Team의 소유자 Conn Smythe씨가 1931년 Maple Leaf Gardens 빌딩이 건설되면서 건물앞 이북쪽에 묻었던 것이라고 한다.

Church와 Carlton St.코너에 위치한 역사적인 실내경기장 Maple Leaf Gardens는 Maple Leaf Hockey팀이 새집을 마련하여 이사가는 1999년까지 Home 구장으로 이용 했었다. 또한 보컬구룹 The Beatles와 가수 Elvis Presley 그리고 수많은 유명 배우 가수들이 이곳 무대에서 공연을 했으며, 각종 체육행사도 열렸었던 곳이기도 하다.

2009년에 이경기장은 Lawblaws슈퍼마켙과 Ryerson 대학의 부속건물로 사용키위해 보수공사를 해왔었다. 공사를 하면서 색이 많이 바랜 Time Capsule상자를 발견한 것이다. 그외 상자속에서 나온것들은 당시 Maple Leaf Gardens의 중역들이 손수만든 빌딩디자인과 건축에 대한 상세내용이 4페이지의 편지종이에 적혀 있는것도 발견됐고, 3권의 하키경기규정집과 토론토시의 조례규정이 적혀있는 책들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Maple Leaf Gardens는 수백만명의 Canadian들에게 많은 의미를 갖고 있읍니다. 또 1931년 당시의 삶에 대한 여러가지 놀라운 기록들도 갖고 있으며 1931년도에 이 Time Capsule을 땅속에 묻을때, 80년후 Lawblaws Super Market 스토어가 들어서고, 당시에는 존재치도 않았던 대학의 부속건물로 사용되리라고 상상을 할수 있었겠읍니까?"라고 Ryerson 대학교 총장 Sheldon Levy씨가 목요일 설명 했읍니다. 또 그는 설명하기를 1931년도에는 Maple Leaf Gardens가 문을 연 해이기도 했지만, 갱단두목으로 유명했던 Al Capone씨가 형 언도를 받기도 했던 해였읍니다. 개장한날 저녁에 진행된 경기에서 시카고 Blackhwaks가 Leaf팀을 2 - 1로 누르고 승리를 장식했었읍니다.

Lawblaws와 Ryerson 대학은, 시민들에게 호소하기를, 큰 코끼리의 형상을 축소하여 상아에 조각한 의미가 무엇일까?와 또 새로 만들게 된 Time Capsule안에 집어넣을 품목을 생각해 보라고 강력히 권하고 있다.

"새 Box에 넣을 품목을 선정하기위해 캐네디언들의 의견을 경청하기를 원한다"라고 Lawblaws의 재산과 사업분야담당 부사장 Jane Marshall씨가 호소하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1931년작 Time Capsule상자는 현재 Ryerson 대학교에 전시되여 시민들에게 관람 시키고 있다.

아래 URL을 참고 하시면 더 좋은 내용을 볼수 있을것으로 믿어 옮겨 놓았다.

http://www.cp24.com/servlet/an/local/CTVNews/20120126/012612_capsule_maple_leaf_gardens/20120126/?hub=CP24Home

Wednesday, January 25, 2012

미국 대통령의 Union Address, 내용보다는 그격식이 너무나 부럽다.


나는 매년 이맘때면 미국 대통령의 연두교서를 TV를 통해 청취하고, 상하양원의원들이 의회지붕안의 하원의원실에 미리와서 모여, 대통령이 방문하기를 기다렸다가, 시간이 되여 외처대는 의회안내자의 찌렁찌렁한 목소리가 미국의 힘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Mr. Speaker, the President of United States" 그Announcement가 끝남과 동시에 의회의 출입문이 열리고 대통령이 등장하여 가운데 Hall을 지나 단상까지 걸어가면서, 옆에 서 있는 의원들과 정답게 포옹도하고, 짧막한 담소도 하고....그리고는 단상에 오른다. 이모습을 나는 오랫동안 기억에 담곤 해왔다. 대통령이 서 있는 단상뒤에는 상원의장( 미국 부통령)과 하원의장이 나란히 앉아있다. 곧바로 하원의장이 좌석에서 일어나 대통령의 의회 방문을 알리는 멘트를 한다.

"Members of Congress, I have high privilage distinguished honor to presenting to you
the President of united states of America"

Floor에는 여당의원, 야당의원들이 앉아 곧 이어지는 대통령의 연설을 듣기 시작한다. 대통령의 연설내용은 때로는 장내가 떠들어 갈만큼 큰 기립박수를 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야당의원들의 박수는 고사하고 따가운 시선도 보인다. 그러나 소리를 내면서 야유를 던지는, 흔히 볼수있는 고국에서의 수준이하의 연출을 벌이는 의원들의, 대통령을 향한,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행동은 전연볼수없다.

국가정책을 발표하는 내용중, 그내용이 국익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대목에는 여,야를 떠나서, 박수를 때로는 기립까지하여 박수치면서,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의원들의 정중한 행동은 그순간 볼때마다, 불쌍한 고국의 정치판, 특히 대통령이 어쩌다 여의도 국회를 방문했을때, 의원들이 대통령을 맞이할때 보았던, 그순간을 비교해 보곤 한다. 어쩌면 그광경들이 상대적이기 때문에 더 돋보이는지도 모르긴 하겠지만 말이다.

한국의 정치꾼들, 특히 국회의원들은,민주주의를 들먹이면서 자기네들의 주장을 펼때는, 미국의 정치판에서 돌아가는 예를 곧잘 들곤 하지만, 여야 의원들이 정중하게 모시는 미의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예로 들어서 외쳐대는 소리는 아직까지는 한번도 들어본 일이없는것이다. 한번은 여의도 의사당에서 대통령이 의회로 들어서는데, 야당의원들의 상당수는 기립 하지도 않고 의자에 그대로 앉아 딴전을 피우는 꼬락서니를 보면서, 절망을 한기억도 떠오른다. 자기집에 찾아오는 잘아는 손님을 대개는 밝은 얼굴로, 문밖까지 나가서 맞이하는게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이고 정서이다. 때로는 마음속에서는 받아 들이기가 불편할수도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손님으로 온 그상대를 문전박대하는식으로 받아들이는 무례함을 범하는 경우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안의 정치꾼들에게서만 보았을 뿐이다.

어제밤 대통령의 연두교서 내용은 미국민들의 눈을 번쩍이게한만큼의 특히한 내용은 없는것으로 이해 했으나,
연설문 서두에서, 이락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한 부대가 Andrew Airport에 안착할때, 대통령이 직접 마중나가서 반갑게 맞이한 순간의 기억을 말하면서, 그기간동안에 의회에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헤메이고 있었음을 상기 시키면서, 분발 할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연설에서도 의원들은 열심히 경청하고 있는 광경도 나에게는 좋게만 보였었다.

미의회의 광경을 빗대어, 한국의 정치꾼들은 열을 토하곤 하는데, 연두교서를 발표할때 맞아 들이는 의원들의 모습을 어제밤에도 보았을 것이다. 조금만 넓고, 높게 눈을 뜨고, 귀를 열어서 듣고 본다면, 대통령의 체면을 챙겨주고, 의원들 자신의 체통도 지킬수 있는 방법이, 쇠톱으로 의회안의 방문고리를 자르는, 책상위에 뛰어올라 쑈를 하는, Acrobat들이나 하는 우스꽝스러운 그런 연출은 막을수 있을텐데....

양의 가면을 뒤집어쓴 300 여명의 늑대들은, 전세계가 초점을 마추어 와싱턴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그시간에도 돌아오는 4월에 치러지게될 총선에 공천을 얻기위해, 두더지들이 즐겨찾는 어둠의 길을 바삐 돌아다니면서 돈봉투를 만들거나 돌리기에 분주했을 것이다.
암튼 미국대통령의 연두교서는 감히 세계의 정치판에 귀감이 될만한 정치행동이라고 생각된다.





http://www.cnn.com/2012/01/24/politics/state-of-the-union/index.html

Monday, January 23, 2012

한국인들, 사랑하는이의 주검을 구슬로 만들어 곁에 보관 - 장례새풍조


오늘 LA Times의 한 기사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사랑하는 가족이 죽은후에도 여러번의 또 다른 과정을 거쳐서 영원한 안식처인, 즉 우리 인생이 태어났던 땅으로 되돌아가는게 아니고, 시신이 구슬로 변하여 살아있는 가족곁에 보관 되거나, 어떤 유족은 접시나 유리그릇에 넣어 집앞뜰에 매장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인천의 한장례업자가 지난 10여년 동안에 약 1000명이 넘은 유족들로 부터 주문을 받아, 화장된 유골을 다시 번쩍 번쩍 빛나는 구슬로 만들어, 유족들이 사랑하는이의 주검을 곁에 두고, 보고 싶을때 아무때고 보면서 고인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구슬은 흰고래에서 나오는 카비알 같이, 파란빛을 번쩍번쩍 발하고 있다고 하며, 검은 구슬도 있고, 대부분은 하얀 조약돌 크기의 구슬이라고 한다.

좁은땅에 인구는 늘고, 장지로 사용되는 묘지는 재력과 후손의 명예에 비례하여 넓게 또는 좁게, 양지바른 산자락에 모시곤 했던 오랜 전통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토지의 이용도를 떨어뜨린다는 비난을 받아 왔었는데, 이제는 바쁘게 살아가는 후손들의 손길이 미치질 못해, 묘지 관리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이유가 공감대를 얻어,대체장례문화라는 명목으로 국적도, 전통도 없는, 주검의 영혼이 구슬로 변해 영원의 세상으로 보내 주는것을 막고, 살아있는 유족들의 주위를 맴돌게 하고 있는 무례함을,천박함을, 모두가 알고 있는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한국의 현실임을 눈여겨 보지 않을수 없었다.

조상님들의 묘지를 관리하고 있는 한 집안의 장자는, 자기 아이들에게는 자기가 겪었던 무거운 짐을 지워주지않기 위해, 그가 모시고 있던 조상님들의 묘를 다 파헤쳐, 유골을 한데모아 이를 정제하여 구슬로 만들어 집안에 보관하고 있다고 하는것은 편리함만 부르짖는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얄팍한 인심을 보는것 같아 마음이 아려온다. 화장을 했으면 남은 재를 납골당에 모시던가 아니면 뜻이 있는곳에 뿌리는것으로 인연을 정리해야 하고, 장지를 사용하게될때는 이곳 서양의 장례문화를 본받아야 할것으로 생각된다.

언뜻 이기사를 보았을때는 기발한 아이디어 같지만, 전통에도 없는 것이고, 오직 편리함과 경제적 부담만을 염두에 둔, 천한 사람들이나 하는 못된 짖으로 보여지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더욱히나 조상님들을 극진히 모셔온 유교문화를 외국에 자랑스럽게 홍보하고, 또 외국의 관광객들에게 설명해왔던 지금까지의 자세가 모두 거짖으로 보여지던가 아니면 뿌리가 통째로 뽑혀 버리는것은 아닐까라는 깊은 생각을 떨쳐 버릴수가 없다.

또 구슬을 만드는 업자의 말에 의하면, 정제된 구슬사리는 죽은사람 각개인에 따라, 모양과 색갈들이 다르다고도 했다. 그렇치 않아도 옆집과, 옆사람과 또 관계되는 사람들끼리 서로 견주어 보고, 경쟁을 생활화 하다시피하고 있는 한국사람들의 정서로 보았을때, 한가지 분명한것은, 구슬사리의 광채나 모양을 놓고도, 사자의 살아있을때의 업적 또는 생활상과 연관 시키지 않을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쟁점이 될것 같다.

아래의 내용은 LA Times의 기사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사랑하는이의 주검후, 화장을 하여 남아 있는 유골재를 항아리에 담아 보관하던것을, 이제는 보석같은 구슬로 만들어 접시에 담아 곁에두고, 사랑하는이들의 주검을 기억하고 있는 풍조가 번지고 있다고 한다.

구슬은 조금만 조약돌 크기로, 목걸이에 사용되는것이 아니고, 유족들은 접시나 유리 그릇에 보관하여 사랑하는이의 주검을 곁에 두는데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한미망인은 돌아간 남편의 화장한 유골재를, 전문업체를 통해, 야얀고래에서 나오는 카비알 처럼 보이는 푸른 구슬로 만들어 곁에 두고 보관하고 있는데, 이에 소용된 비용은 약 1백만원쯤(미화 $900달러) 된다고 했다.
"남편을 먼저 보낸게 너무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라고 집앞뜰에 남편의 재를 이용하여 만든 구슬을 매장한 미망인 전씨는 설명한다.

그러나 비난의 소리도 만만치 않는것 같다. 그들의 주장은 죽은자의 마지막 남을 것을 필요이상으로 가공하여 욕되게 하는 짖이라고 설명한다.

이사업을 하고 있는 배재열씨와 동업자인 그의 부인과 함께, 지난 10여년 동안에 1,000 여명 이상의 유족들에게 구슬을 만들어 가족들 곁에 두게 했다고 한다.

배재열씨는 고객한분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분은 조상님들의 묘지를 돌보는 일을 해왔는데, 이같은 무거운 짐을 자기 아이들에게는 지워주고 싶지않아, 조상님들의 묘지를 파내어 유골을 한데모아 구슬을 만들어 지금은 집에 모셔두고 있는데, 가족들이 모든 조상님들을 아무때고 만나볼수 있다고 한다.

지금 한국의 장례문화의 변화를 보면, 2010년도에는 약 70%정도가 화장을 하고 있는데 이는 10년전에 비해 약 두배 이상으로 묘지대신 화장을 했다는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화장된 유골재는 대부분 납골당에 모시고 있으나,일부 유족은 유골재를 다시 매장하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URL을 참조 하시면 됩니다. 감사.

http://www.latimes.com/news/nationworld/world/la-fg-south-korea-death-beads-20120122,0,2686922.story

Yeremko Ridley Park Area Walk in Mount Nemo(Jan.21st,Saturday)













살을 애이는듯한 살벌한 추위를 포함한 바람은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듯 잠잠하고, 눈쌓인 Trail을 따라 발걸음을 내디딜때는 마치 양탄자위를 걷는 사뿐함 마져 느껴질 정도로 온화하다. 전체 7명의 아담한 산행 식구들. 아침 새벽의 강추위를 털어내고, 산행을 위한 준비를 한다는것은 상당한 Power를 요구한다는것을 항상 느낀다. 조금전 길가에 준비된 Parking lot에 차를 주차하고 차에서 내릴때만 해도 몸이 움추러 들정도로 마음은 사실 추웠고, 쌓인 눈위를 밟으면서 걷는것은 보통때 걸을때의 두배 세배 이상의 에너지와 소모와 주의가 필요함이 마음을 가볍게 하지는 않았었다.

어젯밤에 내렸던눈이 온천지를 덮고 있음을 이른 아침 넓은 콘도의 창문을 통해 보이는 Lake Ontario 호수가의 Marina가 있는곳의 얕은물위에 얼어붙은 얼음위에 하얗게 쌓여 있음을 보면서, 오늘 산행의 시작점인 Yeramko Ridley Park(Derry Rd.와 Twiss Rd.의 남서쪽)까지 가는데 어려움은 없을까?를 걱정 하지 않을수없는 속에서 항상 모이는 Humberbay Park West로 핸들을 돌렸었다. 대원들은 출발한 시간이 되여 2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Hwy 427과 Hwy401West를 달렸었다. 새벽의 찬공기를 가르며, 주말의 한가한 고속도로를 막힘없이 달리는 상쾌한 기분은 산행에서 즐기는 그기분 이상으로 짜릿한 맛도 느낀다.

남쪽 부분의 Bruce trail 숲속의 나무들은 대개가 단풍나무로 구성되여 있어, 이곳도 예외는 아님을 알수 있다. 쭉 하늘로 뻗은 나무들의 맨윗쪽을 때리는 바람소리는 때로는 장단을 마추어 주는듯한 강약을 나의귀에 전달해주고 있다. 꾸불꾸불 뻗어있는 Trail을 중심한 좌우로는 나무숲이지만, 더 멀리 그좌우로는 끝도없이 펼쳐져 있는 농장들이 봄 여름 가을이면 색색으로 입었던 옷들을 다 벗어 버리고, 지금은 발가벗은 상태에서 다시 옷입을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것 처럼 춥게 보이곤 하는데, 오늘은 그나마 흰옷을 입혀 놓은것 같아 보는 눈과 마음이 온기를 느끼게 해주는것 같다.

농장들로 구성된 이넓은 들판의 중앙에 왜 이곳만이 숲으로 덮혀 있는가는 이제는 쉽게 그이유를 찾을수 있다. 그만큼 우리 대원들이 Trail Walk에 달인(?)이 되여 가고 있다는 증표일수도 있다 하겠다. 표면이 거의 돌짝밭으로 덮혀 있어 농장으로서의 가능성이 거의 없기에 개발을 할수없어, 오랜 세월을 두고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숲으로 형성된것이다.

우리보다 앞서 걸어간 Trail Walker들의 발자욱이 선명히 쌓인 눈위에 찍혀있다. 그속을 자세히 보면 동물의 발자국도 같이 있음을 본다.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개와 함께 생활을 하면서 산행을 즐기는 Westerner들임을 짐작할수 있었다. 눈위를 조심스럽게 밟으면서 전진 하지만, 가끔씩은 눈에 미끌려 온몸을 움찔하게 한다. Crampon들을 끼고 발걸음을 떼기에 미끌려 넘어질 가능성은 없다고 하나 조심스러움은 어쩌면 따라다닌다. 그것이 지혜이리라.

눈으로 뒤덮힌 조금만 Pond가 오른쪽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지나치는 우리를 반기는것 같이 보인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철에는 물색갈이 마치 가을철 하늘에 높이 떠 있는 코발트색같이 파랗곤 했었다. 이웅덩이는 자료를 더듬어 보면, Calcium이 풍부한 Pit로 형성되여 있다고 한다. 우리가, 특히나 나이가 들면, 칼시움을 많이 섭취 하라는 충고를 주치의들로 부터 많이 듣는데, 저웅덩이에 형성되여 있는 Calcium을 Spade로 퍼서 Back Pack에 넣어가서 필요한데로 먹을수 있다면....... 그런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몸속에서 에너지가 활발히 타고 있음을 느낄수 있다. 단단히 매였던 Jacket의 윗단추를 하나씩 풀어 제낀다. 에너지가 타서 열이 발생하면, 몸속에 있는 수숩이 끓어 피부를 뚫고 밖으로 나와 땀으로 변하는것 같다. 몸의 움직임은 가벼워지는것을 느끼고.... 나를 포함한 우리 대원들은 지금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잘 활용하고 있는것이다. 에너지를 태워서 발생한 동력을 몸전체에 공급하여, 추위를 이겨내고, 그위에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게 하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계속 이어지는 Trail을 따라 이어진곳은 벌써 Twiss Rd.를 가로 지르고 있다. 이곳은 이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생명선 같은 Local Road라고 한다. 이제부터 이어지는 숲속은 Crawford Forestry Tract지역이다. 이곳은 조금전에 지나쳐온 숲속보다 더 보호가 잘되고 있어, 여름철이면 가족들이 많이 찾는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는 잘모르겠으나, Trail이 다른곳 보다 훨씬 넓게 형성되여 있다. 그리고 평평해서 발걸음을 마음 편하게 뗄수 있어 좋다.

이번에는 교통량이 훨씬 많은 Guelph Line을 가로 건너야 했다. 이제 부터는 Crawford Lake/Rattlesanke point conservation Area를 걷는다. 대원들에게 쉴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위해, 조만 전진하면 따뜻하게 쉴수있는 쉼터가 있음을 알려 주었다. 모두가 믿어지지 않은 반응이다. 이지역에서는 다른 Trail Team들과도 조우했다. 한국분들로 보이는 팀도 보이고, 이곳 Westerner들도 보인다. 그들은 꼭 가족과 같은 개들이 동행하는게 특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마주칠때마다 Hi, 또는 눈인사를 나누면서 좁은 길은 서로 양보도하고....대자연속을 걸으면서 터득한 양보와 Share의 실천이라고 나는 보고싶다.

아담하게 모습을 들어내고 있는 쉼터가 눈앞에 들어온다. 바로 옆으로는 Crawford Lake가 보이고....
이곳 호수는 물이 circulation이 안돼, 호수의 밑바닥에 고여 있는 물속에는 산소가 없어 이물질이 썩지 않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가끔씩 지질학자들이 호수밑바닥에서 수집되는 옥수수 알갱이를 연구하여 발표한 내용에 의하면, 이지역은 오래전에 인디언집단촌이었음을 밝혀내고, 그들이 농사도 지었었고, 사냥도 했었음을 그들 연구하여, 재건축한 초기인디언들의 집단생활을 했던 가옥이 윗쪽 언덕에 세워져 있다.

쉼터안은 따뜻했다. 안내를 맡고 있는 여자직원에게 우리가 이곳에 들어온 이유를 밝히고 Lunch를 먹어도 괜찮냐고 물었더니 OK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먼저 물어보는 예의를 지켜주는것이 그녀의 존재이유를 우리대원들이 인정하고 감사해 하고 있다는 뜻을 전하고져 했기 때문이다. Back Pack속에 들어있는 점심을 꺼내 다시 에너지를 보충한다. 마호병에 담아온 따뜻한 보리차의 향이 머리를 맑게 해주는것같이 느껴진다. 한술뜨는 밥맛은 어찌 더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벽에붙어있는 Locker위에 박제되여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Crow 한마리가 마치 자리를 박차고 날아갈것 같은 자세가 힘있어 보인다.

이제는 다시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짐을 풀고, 차에 올라타고 McDonald's Restaurant에 갈일만 생각하면서 걸으면된다. Senior들에게만 특별히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해 주는 커피한잔의 의미는 많은것을 생각케 해주기 때문이다. 감사.

Friday, January 13, 2012

키큰것이 죄인가. 비행기탈때 요금 더 내는 설음. 팍팍한 세상살이



서구사회에서 살고있는 보통 시민들은 물론이고, 아직 경제적으로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도 대개 비행기 여행을 경험 해본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10키로 이상의 고공을 날으는 비행기안에서 창문을 통해 내려다 보는 지구의 표면은 뭐라 표현이 잘 안될정도의 환상적이고도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듯이 보여주고 있음을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요즘은 비행기에 소요되는 연료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Air Ticket을 구입할려면, 한푼이라도 절약해 보고져 이곳 저곳 쇼핑을 하는게 일상화 되다시피한것 까지는 이해하고 수긍할수 있겠다 하지만, 여행을 하게되면 필수적으로 같이 가게되는 Luggage의 허용무게가 절반이상으로 줄어, 심한경우에는 옛날에 구입했던 큰 가방은 쓸모가 없을 정도가 되여 버렸다. 과학은 날로 날로 발전 한다고 하는데, 발전한 만큼 인간의 생활도 편해지고, 경제적이어야 앞뒤가 맞는 얘기일텐데.... 상황은 반대로 가는것을 흔히 많이 본다.

비행기 이용승객이 지난 몇십년 사이에 몇곱절로 늘어난 만큼 비행기값도 싸져야 자유경제체제에 맞는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 나는 고개만 갸우뚱 할뿐, 굳이 그원인을 찾자면, 각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정치적 지도자들의 옹졸한 정치적 사상이 선량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을 어렵게 만들고 있음으로 초점이 모아진다.

정치적으로 이념이 다르다고 전쟁을 할것 처럼, 원유(Crude Oil)생산을 중단 한다거나, 원유수송로를 차단하겠다고 위협하면, 더힘센 나라는 군사적으로 이를 저지하겠다고 으름장을 하게되면, 금방이라도 전쟁이 일어날것 처럼 분위기를 만들고, 그와중에 연료값은 천정부지로 뛰면서, 그부담을 죄없는 이용객들에게 부담시키는 악순환을 ....즉 업자들은 연료값을 하루가 다르게 인상시키면, 속담에 "뛰는놈위에 날으는놈이 있다"는 식으로, 시민들 또는 국민들의 안녕질서와 평안한 삶을 책임지겠다고 입만 열면 떠들어 대던 정부는, 얼씨구나하고 연료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면, 업자는 정부에 지불한 이득을 다시 보상받기위해 또 값을 올리는 악순환속에서, 이제는 항공사들의 꼼수까지 등장하여 승객들을 또한번 울리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비행기내의 서비스는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는것도 모자라, 이제는 키큰 승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좌석 즉 탈출구가 있는곳의 좌석 또는 Bulkhead의 좌석은 최고 $50달러까지 더 받고 키큰 승객들에게 팔고 있다는 슬픈 뉴스가 미국의 CNN 인터넷에 떳다.

그항공사는 5시간이상을 달려가는 북미대륙에서의 비행에서, 식사도 제공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캐나다, 또는 반대로 캐나다에서 미국을 비행기 여행하는것은 분명히 국제선인데도 그들 마음데로 국내선으로 규정하고, 식사제공을 없애 버린것이다. 배고픈 승객을 위해 McDonald's에서 구입하는 싸구려 햄버거보다 더 형편없는 쌘드위치를 엄청나게 비싼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지만, 구입하여 먹는 승객은 거의 없는것으로 알고 있다. 연료비 상승으로, 수입을 올리기위한 궁여지책이라고 하지만, 쌘드위취를 팔아서 수입이 늘었다는 뉴스는 아직까지 들어 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오늘 키큰 승객이라고 해서 더 많은 요금을 징수하고 있는 항공사의 뉴스는 과히 충격적이다. 앞으로는 또 어떤 명목을 부쳐서 승객들의 주머니를 더 쥐어짤것인가? 비행기 제작사는 새로 제작한 비행기는 연료소비율이 20%나 줄였다고 자랑스럽게 선전하고 있지만, 비행기값이 내렸다는 소식은 없다. 답답하다.
여기에 CNN의 뉴스를 옮겨 놓았다.

"키큰것이 죄인가? 비행기값 더 내고 있다"고 불만제기

CNN - 키큰 승객이 알고 있어야 할 사항 : 즉 공간이 더 있는 탈출구쪽과 "Bulkhead"의 좌석에 앉으려면 더 많은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Edmonton, Alberta주에 살고 있는, 6피트 7인치의 키큰 Malcolm Johnson씨는, 그곳의 좌석을 이용 하는데, 별도의 돈을 더 지불함이 없이 이용 가능토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Johnson씨는 그러한 비행기값 지불을 막기위해, 그가 주로 이용하고 있는 Air Canada를 상대로 Mission을 벌이고 있다.

그는 작년에 CTA( Canadian Transportation Agency)에 불평사항을 제출했으나, 그는 신체 장애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제출한 불평사항을 인정할수 없다는 통보를 지난 12월달에 받고, 이결정에 불복하여 다시 Appeal할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이것은 키큰 사람에 대한 징벌일뿐입니다. 비행기안에 있는 그좌석들만이 오직 우리처럼 키큰 사람들이 이용하기에 적합한 좌석일뿐입니다."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나 Air Canada는 이러한 주장에 명확한 답을 해주지 않고 있다.

Johnson씨는 1년에 두번정도 Edmonton에서 France를 방문하지만, 왕복비행시에는 직항이 없기 때문에 더 많은 번거로움이 있읍니다(즉 4번의 더넓은 좌석공간 확보). 그는 Extra 값을 지불하지 않고 여행을 즐겼었으나 2년전부터 Air Canada측이 규정을 바꾸어 Extra Fee를 부과 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을 바뀌었다.

Air Canada는 매비행시마다 키큰 승객의 다리를 편하게 할수 있는 그러한 좌석에 최고 $50달러까지 Up Charge를 하고 있어, Johnson씨는 결국 $200 달러를 더 지불해야만 한 것이다. 그의 부인과 깉이 여행할때면 $400달러를 더내야 하는 셈이 된것이다.

Johnson씨의 설명에 의하면 뚱뚱한 승객은, 캐나다 법에 따르면, 옆좌석을 무료로 이용하면서도 좌석한개값만 지불하는데, 키큰 승객에 대한 배려는 전연 없는것이 불만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일등석을 이용하면 될것 아닌가?, 그렇치만 일등석은 10배이상 더 비싸지 않은가?.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조용히 입닥치고 있는게 좋을텐데... 그러면 나는 대답하기를 좋아, 그렇치만 당신들은 겨우 5피트 2인치이기 때무에 당신들에게는 문제가 될게 없을거야. 그렇치만 키큰 승객들에게는 또 다른 이야기일뿐이야" 라고 그는 설명한다.

의사의 처방을 소지했을때는 Extra Pay를 면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많은 키큰 승객들은 Johnson씨의 캠페인에 동조하기 시작했으며, 응원의 메세지를 보내고 있다.
"이메일은 매시간 저에게 전달되고 있지요"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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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anuary 12, 2012

'위안부 할머니' 의 문제는 일천왕으로 부터 그원인을 찾아야 한다.( January 11th, 2011)


'위안부 할머니' 의 문제는 일천왕으로 부터 그원인을 찾아야 한다.( January 11th, 2011)

거의 70년이 흘러갔다. 해방의 감격을 맞이한 그날로 부터 계산해 보면, 정확히 67년이 흘러간 셈이다.
세계 2차대전때, 일본의 인접국 침략으로 고통과 피해를 받았었다가, 후에 독립한 나라들은 잿더미만 남아있는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살아남기위한 호구지책이 우선하여 다른데 신경쓸 겨를없이 몇십년씩을 지내오던사이, 패전국 일본은 발빠르게 움직여, 한국전을 비롯한 인접국의 어려운 상황을 자국의 경제 발전을 이용하는데 잘 사용하여 삶의 풍요로움을 홀로 누려오면서, 선진국인양 행세를 하면서도 침략했던 한국, 중국을 포함한 동남 아시아의 여러나라에서 피해보상및 사과를 끊임없이 요구해 왔었지만, 딴전을 피우면서 무시해 버리고 21세기를 맞이했던게 지나온 과거의 실상이었었다.

같은 시기 같은 2차대전 패전국인 독일은, 침략했던 인접국에 사과를 하고 배상을 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 해 왔었다. 지금은 동,서독이 통일되여 서로 오손도손 살면서, EU의 핵심국가들중 하나로 성장했고, 유럽과 세계무대에서 지도자 역활을 잘 감당해 내고 있는것으로 알고 있다.

동물들은 배가 채워지면, 모든 근심 걱정과 억울함을 잊어버린채 다시 배가 고파질때까지 태평성대를 누리지만, 인간은 동물과 달라서, 배고픔이 해결되면, 더많은 욕구불만해결과, 적게는 이웃과, 사회 그리고 크게는 국가간에 관계를 맺으면서 벌어졌던 나쁜일들, 즉 피해와 고통 받았던것에 대한 요구를 찾아 생각과 도전을 하게 되는 존재인 것이다.

내기억으로는 1980년대 중반부터, 2차대전때 일본의 침략과 만행으로 목숨을 잃고 피해를 본 인접국가들이 우선 배고픔의 고통을 벗어나는 경제적 발전이 이루어 지기 시작하면서, 들고 일어나 일본을 향해 피해 보상과 사과를 끊임없이 요구해 왔지만, 이를 겸허히 받아들였다는 뉴스를 접했던 기억은 없다. 반대로 경제대국의 힘을 발휘하여 철저히 무시했었고, 매년 2차대전 전범들의 영혼위패가 소장되여있는 신사참배를 공식화하고, 총리가 공개적으로 방문하여, 한국을 포함한 피해국가들을 자극함과 동시에 비난을 받아오곤 했었다.

일본의 인접국 침략은, 독일과 비교해서, 치졸하기 이를데 없음이, 그들이 보여준 행동에서, 비인간적인 만행에서 두드러진다.
일본군은 점령국의 처녀들을 강제 징집하여, 군인들의 사기진작용으로, 병사들의 막사에 처넣어 욕구해소를 하는, 놀이개로 사용하고,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쳐 버리곤 했었다. 당시의 한국은 '남녀7세 부동석'이라는 사회적 가치기준이 준엄하여, 처녀는 결혼하기전까지는
울타리밖의 세상을 마음데로 나다니지도 못하게 하고, 온실속의 화초처럼 고이 자라게 해서 부모님들이 짝지어주는 신랑을 따라 새삶을 살아가게 하는, 그렇게 하는 길만이 다인것 처럼, 선량하게 살아가는 사회였었다. 이러한 삶의 터전이 어느날 갑자기 천지개벽을 당하여, 부모가 보는 앞에서 이제 막 꽃봉우리를 피울려고 하는 딸들이 군화를 신은 사내놈들에게 붙들려 가는것을 두눈으로 똑똑히 보면서 몸부림 쳐야만 했던 처절함을 당했던 부모님들과 당사자인 딸들의 삶과 심정은 더 설명이 필요 없는 지옥 그이상이었었다.

캐나다는, 일본국의 인접국 침략으로 발발한 2차 대전에 응징하는 차원에서, 벵쿠버지역에 많이 모여 살고 있던 일부 Japanese- Canadian들을 수용소에 강제수용했었고, 일부 재산도 몰수하는 조치를 취한것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고 1980년대 중반에 연방의회에서 토론을 벌인끝에, 그후손들에게 사죄하고 피해 보상을 해준것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매년 때가 되면 일본은 수상이 신사참배를 했다는 뉴스가 타전된다. 그행동은 한마디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집 딸들을 도적질 해다가 위안부로 몰아버렸던 일본국의 만행에 대한 부정을 뜻한다고 하겠다. 이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일본국민들과 정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영화로웠던 일본제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야망이 아직도 살아 존재하고 있음으로 보여지는 증거라고 생각된다. 이문제 때문에 한국의 역대 대통령과 일본의 수상들이 열손가락으로 꼽고도 남을 회담을 해온것으로 알고 있지만, 화해와 용서의 길을 찾았다기 보다는 마음속에 더 깊은 골만 만들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본다.

일본이 2차대전의 패배를 인정하고 최종적으로 항복(Capitulation)선언문을 낭독했던 대표자는 일본의 천왕이었다. 그때의 천왕제도와 왕궁은 지금도 도쿄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일본인들의 여왕벌 역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수뇌인 총리는 임기가 지나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정치적으로는 상징적이라고 하지만, 천왕의 말한마디는 총리의 수백마디보다 위력이, 효과가 크다고 생각될때, 2차대전시 침략의 최종승인을 한사람이 천왕이였고, 연합군의 반격에 항복을 선언한 사람도 천왕이었고, 여전히 왕궁에서 천왕의 자리를 현재도 지키고 있는 그가 직접 나서서, 피해를 준 인접국에 사과와 피해 보상을 선언하고, 특히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천번 만번이라도 고개숙여 마음속으로 부터 깉은 사죄의 발언을 해서, 인접국과 더 나아가서는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한 일본국 대사관 길건너에는 구리로 만든 실제여인의 크기와 같은, 강제로 끌려가 한많은 삶을 위안부로 살았던 상징을 나타내는 동상이 세워져 있고,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는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의미로, 참배하고 따듯한 옷을 입히고, 장갑(Mitten)까지도 끼워준다고 한다. 이에 신경이 쓰이는 대사관측은 이의 철거를 요구하고 있지만, 이러한 행동은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하기 때문에 정부도 어쩔수 없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일본국 천왕과 그가족들은, 이제 막 꽃봉우리처럼 곱고 예쁘게 피어나는 그들의 딸들이 강간범에게 치욕을 당했을때의 심정을 상상해 보기를 권해보고 싶다. 자위대의 최신형 폭격기를 이용하여 강간범을 찾아 그일대를 폭격을 하고도 남을 행동을 했을 것이다. 궁안의 권좌에서만 삶을 살기에 딸자식을 억울하게 공출해야만 했던 힘없는 서민들의 생활상을 어쩌면 영원히 느낄수 없이 세상을 살다 사라질 존재들이수도 있겠다 싶게 느껴지지만, 높게 둘러쳐진 울타리 밖으로 나와서 세상을 보는 용기를 보여 주시기를…강력히 권한다.

이러한 용기와 결단을 내려 진심어린 사죄와 보상을 선포하지 않는한, 일본이라는 나라는 섬나라로서의 쪼잘한 나라로 쇠락하는 길만이 그들앞에 있다는것을 머지 않아 느끼게 될것이라고 믿는다. 경제적으로는 지난해 까지만 해도 세계 제2의 강한 나라였었다. UN 분담금도 미국 다음으로 많이 내고 있지만, 그들의 위치는 어떤가? 제2의 경제대국이면서도 상임이사국 자리는 고사하고 15개국 비상임이사국에 낄수 있는 자리를 때로는 획득하지 못하는 왕따(Ostracism)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러한 좁디좁은 섬나라 일본으로 계속 남아 살지 않기를 바랜다. 꽃같은 나이에 위안부로 징집되여 삶을 포기하다시피 살아왔던 그분들은 긴세월이 흘러, 이제는 한을 품은채 세상을 하직 했거나, 생존해 계시는분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들로 변했다. 시간이 급하다. 천왕은 이 참담함을 더이상 외면 하지 말기를 부탁하고싶다.
LA Times의 기사는 시사하는바가 크다.



http://latimesblogs.latimes.com/world_now/2012/01/japanese-occupation-of-korea-comfort-women-protests-.html

Saturday, January 07, 2012

김정은, 초능력자로 미화시킨 한잡지의 기사를 읽으면서...



왜 중국과 미국을 포함한 전서방세계가 북한의 불법적인 권력승계와 북한인민들을 굶어죽게하고 있는 독재철권통치를 하고 있는 Evil들에 대한 제재와 응징은 엄두도 내지 못한채 뒷짐지고 바라만 보면서 "마치 제발 망난이 짖만 하지 말아라"라고 두손모아 허공에 대고 애원하는것 같은 인상만 전세계에 심어주고 있음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끼는것은 나만이 아닐것이다.

임기를 채우는 마지막해를 맞이하고 있는 남한정부는 한술더 떠서, 지금까지 일관되게 주장해 왔던 "천안함폭침과 연평도포격에 대한 사과를 북한측으로 먼저 받아내기 전에는 남북간의 대화는 있을수 없다"라는 정책을 손바닥 뒤집듯 엎어버리고, 무조건 돌진하는 돼지처럼 생긴 김정은에게 일방적인 화해 제스처로 남북간에 대화창구를 열도록 한후, 천안함폭침과, 연평도포격에 대한 사과를 받도록 하겠다라고 발표한 뉴스를 보면서, 도대체 어떠한 위협을 받았기에, 짝사랑하는식의 대북정책으로 추파를 보내면서, 메아리없는 되울림을 기다리고 있는가? 국민들이 허리띠 졸라가면서 국가에 바친 혈세를, 국민들의 합의도 없이 북한정부에 퍼주기만 하고, 화해는 커녕 얻어 터지기만 했던 좌파정부10년에 진절머리를 내여, 보수정부를 세워 국가방위와 국민안위를 잘 해달라고 부탁했건만, 이들역시 반격한번 못하고 얻어터지기만 하더니, 이제는 아예 좌파정권처럼 김정은정권에 빗장을 풀어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참담함을 보면서 어느누가 조국대한민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나서기를 바라겠는가?

이러한 겁쟁이 정부를 보면서 진보좌파인 서울시장 박원순마져 그의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게 두려워 있는빽 없는빽을 다 동원하여 방위병으로 편입시켜 동사무소에 근무하게 할 계획이라고 뉴스는 전하고 있음을 보면서, 이런식으로 간다면 나같은 생각을 갖인 교민들은 앞으로 자칮하면 조상님들을 찾아 조국을 방문할 기회마쳐 막혀 버릴지 몰라 두렵다. 60만 대군을, 국민들이 낸 혈세를 들여 양성하고, 훈련시키고 있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정부와 정치꾼들이 알고나 하는 짖일까? 항간에서는 사상적으로 남한은 이미 적화됐다는 소리를 수없이 들어왔다. 그래서 새로 지휘봉을 잡은 살찐 돼지 김정은이 명령 1호로, 남한에서 암약하고 있는 그의 심복들에게 "활동을 개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뉴스가 어찌 나만의 폐부를 찔렀겠는가. 어떻게 지금까지 그들의 도발을 지켜오면서 경제적 부를 축척하기위해 배고픔속에서 허리띠를 더 졸라매면서, 청춘을 바쳐 지켜온 조국 남한인데..... 답답하다.

오른쪽 다리에 3세때부터, 암세포가 아닌 종양이 기생하여, 90Kg까지 커져 다리를 절단해야했고, 몸을 움직일수도 없었고 또 종양때문에 잠도 잘수없었던 월남인이 한미국인 의사의 집도로 무사히, 그것도 무료로, 수술을 마치고 회복중에 있다는 BBC의 뉴스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만약에 이런사람이 북한에 있었다면, 공화국발전에 공헌은 고사하고 식량만 축내는 암적인 존재로 처리되여 벌써 생을 마감했거나, 아니면 인민들앞에 본보기로 세워,치료대신에 폐악질을 당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여기에 관련기사를 옮겨 봤다.


중국의 한 잡지에 실린 김정은에 대한 기사는 감히 그가 초능력의 소유자임을 알게하는 흑색선전(Propaganda)로 도배 되여 있음을 보았다. 그흑색선전 기사에 따르면 김정은 최고 사령관은 3세때에 자동차 운전을 배웠고, 8세때는 포장도 안된 울퉁불퉁한 길을 시속 120키로(약 75마일)의 속도로 안전하게 달렸다고 묘사했다.
십대때는 4개국어를 구사했고, 현재는 다시 또다른 3개국어를 거의 마스터하고 있다고 했다.

세상사람 모두가 꾸며낸 이야기일뿐으로 치부해 버리지만, 오직 북한에서만이 진실인양 받아들이도록 인민들을 못살게 종용하고 있는 새로운 지도자 김정은에 대한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모든걸 금새 깨우치는 능력의 소유자요, 시인이고, 사물을 정확히 꽤뚫어 보며, 경제학자에, 군사 전략가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신비에 싸여 있는것으로 묘사 시키는 이유는, 세계에서 오직 은둔국가로 묘사되고 있는 이북을 통솔하는 권력을 불과 3주전에 손에쥔 김정은이 초능력의 소유자임을 전세계에 알려야함이 절실하기 때문인것이라고 한다. 초능력의 힘을 갖출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가 때가 되여 권력을 잡은 그의 능력을 증명 시켜야만 될 절박함과, 또 한반도 전문가들은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탐구하고 있다.

그는 할아버지 김일성이가 즐겨 입었던, 검정색 Double-breasted 코트를 즐겨 입고 있으며, 그의 아버지가 즐겨 방문했던 군부대를 즐겨 찾고 있으며 그의 생일날에도 그러한 행보는 계속되고 있는것으로 묘사했다.
전문가들조차 실제 그의 나이가 28세, 29세 아니면 30세라고 점치는 정도로 흑막에 싸여 있고, 그의 생일날에, 지난 12월 17일에 사망한 그의 아버지 김정일에 대한 애도를 하면서, 북한은 젊은 김정은을 확실한 권력후계자로서의 승계여부를 보게될 단서를 보여줄것으로 추측만 하고 있는것 같다.

김정일의 생일은 전통적으로 북한에서는 온인민이 축하했으며, 북한정권의 창설자인 김일성의 생일날은 국가공휴일로 지정하여 축하했었다. 그러나 1월8일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축제의 날로 선포되지 않은채 맞이하고 있다고 한다. 대신에 김정은의 생일은, 북한군최고사령관으로서의 간략한 소개만을 한채 축하하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불과 몇주전만 해도 그는 화려한 직책을 수여받은채, 권력승계를 위한 훈련에 임하고 있었던 것으로 묘사됐었다. 그후 지금은 수직상승으로 승진하여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북한군을 지휘하고 있다.

미국정부관료들조차, 지금 김정은의 가족들과, 실세인 군부실력자들과, 북한에서의 조직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나를 깊숙히 파악하지못하고 겨우 어렴푸시 조금 알고 있을뿐임을 인정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그는 아버지 김정일이 통치해왔던 스타일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것으로 알려 졌으며,
지난 일요일에는, 그의 아버지 김정일이 거의 매년 방문하곤 했었던, 105탱크사단을 아들 김정은이 방문했었다. 방문현장에서 수도꼭지의 동파여부를 직접 확인했으며, 병사들의 음식과 식사, e-library를 점검하기도 했었다. "e-library에서 컴퓨터의 활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질문하면서,그의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그들을 바라보면서 매우 흐믓해 했을 것이다"라고 북한 중앙방송이 보도했었다.


http://www.washingtonpost.com/world/asia_pacific/for-kim-jong-eun-a-choreographed-rise/2012/01/07/gIQAizmPhP_story.html

Monday, January 02, 2012

Vinemount Conservation Area Trail Walk,2011년도 마지막 산행. 12월 31일.







Vinemount Conservation Area Trail Walk,2011년도 마지막 산행. 12월 31일.

Lunar가 2개의 보온병에 볶은밥을 정성스레 집어 넣는다. 그리고 간식으로 먹을 단감(Persimmon) 물에 씻어서 닥아낸 다음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두봉지를 만들어 플라스틱 봉지에 넣고 Seal을 했다. 아직 약속시간까지는 약 20여분이 남았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회원 N이 먼저와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마음이 급해졌다.

예측했던데로 다른때 보이곤 했던 회원들이 거의 보이지 않고, 우리 부부까지 모두 5명이 나의차를 타고, Nigagar쪽으로 QEW를 40여분 달려, 능선위에 있는 주차장을 향해 가파른 언덕을 깍아 만든 길을 기어 올라갈때는 자동차도 힘이 드는양 소리를 더 질러대는것 처럼 거북이 걸음으로 달려, 목적지 주차장에 도착 했을때는 하늘은 완전 회색으로 도배되여 있었으나, 겨울답지 않게 기온은 걷기에 최적이고, 바람마져도 한점 불지 않아 다행이었다.

2011년도를 역사속으로 띄워 보내는 마지막 Trail Walk이다. 참으로 다행이다 싶은것은 금년도의 마지막 날인 31일날이 토요일이라는데, 그의미가 깊을것 같았다. R회원이 모두를 위해 윗분에게 감사와 기원을 드린후, 준비를 마치고 산행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하늘을 찌를듯 쭉쭉 뻣어 있는 나무숲은 여전하다. 지난주에 보았던 같은 그나무종류들이지만, 오늘은 웬지 그들과도 2011년도를 역사속으로 같이 마주 하면서 보낸다는 또 다른 느낌을 나무들도 알고있는양, 발걸음을 떼면서 전진 할때마다 우리를 응시하는것 처럼 보인다. 그들은 우리를 응시 하면서 어떤 주문을, 아니면 여기에 온 목적이 뭔가를 물어보는 느낌이다. 왜 힘드는 산길을 매주 토요일마다 걷느냐고?

겨울답지 않게 어제까지 엎지락 뒤지락 하면서 내렸던 가랑비에, 포근한 겨울날씨에 쌓여 있던 낙엽마져도 촉촉히 젖어 자칫 실수하면 스키를 타는것 처럼 떠날려 보낼것 처럼 8부 능선을 따라 이어진 산길을 걷는 발걸음을 미끄러지게 한다. 가볍게 보지 말고, 하잖케 보이는 그들의 존재를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대해야 화가 없을 것이라는 깊은 암시를 보내는 것으로 느끼면서, 오늘 2011년도를 역사속으로 떠나 보내는 뜻깊은 응시를 나무숲으로 부터 받게 되는것으로 느껴졌다.

칼바람과 눈사태 속에서도 본래의 모습을 잃지않고 초록색의 의연한 싱싱함을 보여주는, 바위들위에 붙어 생을 유지하는 이끼(Moss)들은 여전하다. 오늘도 푸른초록색으로 보는 눈을 시원하게 해주면서, 2011년도를 뒤로하는 이시점에서 "신년도에도, 삶에 어려움이 피곤함이 닥칠텐데 그때마다 항상 그모습 그색갈 그대로 살아가는 나를 보면서 굳굳하게 삶을 살아가라"는,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이 내옆을 스치면서 발걸음을 떼는 모습을 항상 응시하고 있다는것 처럼 내눈과 마주친다. 나무숲과 Moss들을 보면서, 깨달으면서 삶의 이치를 알게 하시는 그분의 끝없이 넓고 높은 능력과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깊은 느낌을 감사한 마음속에서 질퍽거리는 산행길의 발걸음은 이어진다.

이지역은 Niagara Peninsula 지역의 안쪽으로 포도생산지이자 맛좋은 Wine 생산지로 온타리오주에서 가장 적합한 곳이기도 하다. 이제 겨울의 중간지점인 1월중순경이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값또한 비싼 Ice Wine을 생산하게 될것이다. 멀리 보이는 넓은 농장들은 전부 Grape Orchard 이다. 이지역이 포도생산지로 Wine생산지로 유명하게된 이유가 있다고 한다. 초기 포도농원 소유자들은 거의가 다 유럽의 네델란드에서 이민와서 이곳에 정착하여 포도를,그리고 Winery를 운영하여 부를 축적 했고, 지금은 그후손들이 열심히 가업을 이어받아 유명한 포도주를 만들어 내고 있는 역사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지난해에는 여기에 인접한 다른 구간을 Trail Walk하면서, Winery에 들려 시음도 하고 포도주를 한병씩 구입 했던기억이 있다. 오늘도 그런 생각을 해 본다. 걷는 구간에 Winery가 있으면 말이다. 시음장에서 젊고 예쁜 금발의 여인들이 포도주잔에 조금씩 종류별로 따라 주면서 마시는 방법부터 다양한 종류의 포도주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할때는 이를 경청하는 회원들의 두눈이 그녀를 응시 하면서, 한모금 입안에 넣고 빙빙 돌려서 향을 음미한다음 목에 넘기면서 포도주향에 취했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생각을 하면서 다시 멀리 능선아래 펼쳐져 있는 농장을 또한번 쳐다보기도 하면서 발길을 옮긴다. 이지역의 여러 Winery가 아니면 어디서 포도주를 시음, 그것도 무료로 할수 있을까? 아마도 온타리오 주에서는 없을 것 같다. Trail Walk이 이곳을 지나고 있다는것이 오늘따라 큰 의미가 있다는것을 깨닫게 한다.

지금은 이구간에 있는 고목단풍나무에 기생하여 서식하고 있는 '영지버섯'을 보기가 무척 어렵다. 몇년전만 해도 두손을 모아놓은것 보다 더 큰 버섯들을 많이 보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보기가 힘들다. 이곳 사람들은 'Artist's mushroom' 부른다. 물론 먹지도 않는다. 버섯의 배면이 하얗기 때문에 화가들이 그곳에 그림을 그린다는데서 그렇게 이름이 부쳐진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많은 한국분들이 Trail Walk을 즐기고 있다. 어쨋던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음이 안타까운면도 있다. 죽어 쓰러져있는 고목에 붙어있는 영지버섯에서 Spore가 왕성한 늦가을에는 소털같은 색갈로 따뜻한 감각을, 겨울에는 그위에 힌눈이 높이 싸여 있는 모습은 마치 파고다를 보는 느낌이기도 했었었다.

스낵으로 준비해온, 먹기 알맞게 짤라서 플라스틱 봉지에 넣어온 감(Persimmon)을,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으로 훔치면서 나누어먹는 Break time은 어쩌면 모두가 기다렸던 시간이기도 하다. 입안에 한조각 넣고 아삭아삭 씹는 맛은 꿀맛이다. 멀리 눈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Lake Ontario의 호수와 인접해 뻗어 있는 QEW 고속도로에는 변함없이 바삐 움직이는 차량들이 점으로 이어지고 있는 모습도 좋다.

벌써 길게만 느껴졌던 한해가 다지나가는 시점에서, 모든것을 뒤로 접고, 시선과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면서 산행을 하는 여유를 갖고 있다는것 자체가 고맙게 느껴진다. 적지않은 계곡을 타고 졸졸 흘러가는 가느다란 물줄기 소리도 가는해를 아쉬워 하는것 처럼 느껴진다. 영원속으로 파묻히는 이순간의 발걸음…… 등에 땀이 젖어있다. 행여나 미끄러질까봐 한걸음 옮길때마다 더 많은 신경을 쓴 결과일것이다.
조금은 모든게 아쉽게만 느껴지는 오늘의 산행이다. 집으로 향하는 도중에 커피숖에 들려 갈증도 해소하고 기분전환도 시켜주는 한잔의
커피가 그리워진다.

우리 인간은 자연속에서 왔다가 자연속으로 되돌아 가는 준엄하고, 피할수 없는 길을 반복해서 걸어왔고, 걸어갈 존재임을 오늘의 산행에서 절감했고, 그자연속에서 2011년도의 마지막 Taril Walk을 할수 있었다는 지혜와 고마움을 모두가 깊이 느낀것 같이 느끼고 있음을 그들의 눈과 대화에서 읽을수 있어, 역사속으로 떠나 보내는 2011년에 가볍게 손을 흔들수 있었다.

Friday, December 30, 2011

세시봉친구들이 회한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 12월 28일, 2011






세시봉친구들이 회한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 12월 28일, 2011

아주 오래오래전에 들었던 멜로디가 귓속으로 들어왔다. 소리의 진원지인 TV의 화면속으로 눈길을 돌리고.... 같이 입을 벌려 흥얼거렸다. 그때가, 그시대상이, 주마등처럼 가슴깊은곳으로 부터 멜로디와 함께 다시 세상밖으로 나오게 하는 마력을 그들에 입에서 토해내고 있었다. 토해낸 그배설물은 더러움으로 기피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도 빠짐없이 나의 머리속으로 들어와 기억을,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뇌의 중심부를 강타했다.

"넓은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개우른 울음을 우는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으랴..우...우...
질화로 재가 싫어지면 빈밭에 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게 자란 내마음 파란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러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달리는 어린누나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지고 이삭줍던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우....우....
하늘에는 성근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돌아, 도란도란 거리는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지난해였던가? 아니면 금년도 여름철이였던가? 40여년전에 세시봉에서 처음만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서, 평생을 가수의 길로 들어서 당시의 시대상으로 봐서는 파격적인 Pop Song을 불렀던, 같은 연배의 노래쟁이들이 TV에서 다시만나 그때 불렀던 노래들을 그음성 그대로, 몸은 많이 변했지만, 사랑방에서 얘기하듯, 불러대는 노래쑈를, 인터넷을 통해 이곳 태평양 건너 안방에서 본기억이 있었다.

그때 그들의 쑈를 본 당대의 같은 사람들의 요청으로, 다시 팀을 꾸려 전국순회 공연을 25회 이상하고, 오늘 내가 본 그들의 쑈는 지난 7월말에 태평양을 건너 LA까지 찾아와, 한많고 고달픈 이민자의 삶을 살아가는 동시대 많은 교민들이 회한의 눈물을 짜내게 하는, 이를 본 내 마음도 그속으로 빨려 들어가 헤여 나오지를 못하고 쑈가 끝난후에야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게하는, Time Machine을 타고, 그때의 참담하고 배고프고, 아직 6/25동족 상잔의 흔적이 도시나 시골농촌의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었던, 그래서 앞으로의 희망도 크게 열광적이지 않았던 서울시내의 풍경속으로, 그리고 고향땅의 그때로 달려갔었다.

그때 나는 시골에서 겨우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는 갈엄두를 못내고, 대신 자원하여 군대를 가서, 강원도 중부전선의 최전방 부대에서 근무를 마치고 시골고향으로 돌아와 보이지 않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속에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지금은 돌아가신 장형님의 비좁은 전세단간방에서, 끼워 잠을 자곤 하면서, 국가에서 국비로 가르치는 학교에 다니면서, 서울이라는 눈감으면 코를 베어간다는, 한시도 방심할수 없는 사회환경속에서 사회생활과 학교생활을 했었다. 어쩌다 래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서, 그들에 대한 상상은 그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지곤 했었다. 외국의 노래를 원어로 불러대는 그들을 나는 그들이 영어를 우리말 하듯이 잘 하는것으로 상상하면서 부러워 했었고, 나를 그속에 대입해 보면서 초라하고, 조그맣다는것을 가슴아파 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밤이 되면 잠자리가 비좁아 장형님과 조카들이 고생하고 있는 그속에 나까지 끼어 들어야 했으니.....

'이미자'를 비롯한, 요즘은 국민가수로 불리는 당대의 유명한 토로트가수들이 부르는 노래와는 Theme자체가 다르게, 그래서 당대의 젊은이들중에서도, 소위 말해서 앞서가는 족들이 즐겨 부르는, 그래서 그들속에 끼어 들어 볼려는 욕심에, 귀로 듣기에는 아름다워도 실제로 따라 부르기에는 쉽지만은 않았던 멜로디가 어쩌다 담배연기 자욱한 지하다방에 앉아 있을때 디스크 쟈기가 걸어놓은 LP판에서 흘러 나올때는 괜히 아는척 흥얼거려 보기도 했었다. 그때의 다방 커피는 담배 꽁초를 끓여 만들었다는 풍설이 많이 떠돌던 때이기도 했었다. 커피한장 주문하면서 달걀노른자위를 커피속에 첨가할때는 뽀루뚱했던 다방레지의 얼굴빛이 달라지던 때였었다.

그들이 불어대는 Pop Song들은 보통 트로트 노래와는 완전히 다르게 당시의 시대를 저항하는 그래서 서슬퍼런 군사정권 당국의 감시의 대상이 되는 늬앙스를 항상 달고 다녔었다. '아침이슬' 같은 노래는 금지를 당해 지하속으로 숨어 들어서만이 들어야 하는 그때가, 긴머리를 주장하고 있었던 젊은이들이 단속 경찰들과 거리에서 쫓고 쫓기는 실랑이를 벌이는, 젊은이들만이 발산할수 있는 욕구충족과 불만에서 오는 비틀림 현상이 사회저변에 흐르고 있을 때였었다. 지금은 그때 당시의 우리나라 형편과 처해진 모든 여건상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늘날 조국이, 특히 젊은이들이 누리는 풍요로움을 이룰수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이 확실하게 마음속에 정착되여 있기에, 철부지 젊었을때의 객기였었던점도 많이 작용했었다는것을 이해가 되고, 워커발 문화속에서 갇혀 살아가는 환경에서 오는 반발심리가 맞물렸기에 더 애창되고 가슴깊이 자리매김을 했었던것같다.

짧았던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왜 우리는 이렇게 워카발 군바리들의 시달림속에서 살아가야 하는가의 깊은 뜻을 이해 할려고 했다기 보다는, 사회적 시류가 그런쪽으로 흘러가니까 휩쓸려 무조건 반대하고 저항하고 데모도 했었던것이다. 70년도 초반에 공무로 일본과 독일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국가공무원신분인데도, 외국에 나갈때는 국무총리의 승락이 떨어져야만 가능했던 그시대에, 이들이 부른 노래들은 확실히 시대와 정권에 반항하는 노래들로 비쳐지기에 충분했었다. 그만큼 국가는 살기가 어려웠고, 한푼의 외화라도 절약해 국가 기간 산업건설에 보태볼려고 하던때였었다. 일본과 독일에서 국가 기간 산업에 필요한 기술을 배우고 돌아온 그시점부터는, 절대로 군바리 정권을 비난하거나 하는 대신에 스스로 깨달음이 있었기에, 당국의 장발단속과 여러가지로 국민들이 살아가는데 일부 제약이 뒤따르는 정책을 충분히 이해하고, 이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보릿고개를 없애기란 영원한 숙제로 남을 것이다라는 깨달음을 마음속에 간직했었다.

바깥세상을 경험한 나는 그때 통기타 가수들이 부르는 소리를 당국에서 해석하는 방향에서가 아니고, 젊은이들만이 발산할수 있는, 이해할수 있는 무궁한 가능성을 내포한 그런 건전한 노래로 나는 따라 부르고, 그속에서 어울렸었다. 속담에 '자라보고 놀란 사람,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라는 비유를 당시의 사회상과 많이 비유 했었다. 그런속에서 살면서, 밖의 세상을 보고온 나는 더이상 좁은 한반도에서 안주 하면서 살기에는 조국이 좁아 보였고, 뭔가 불편하여 이민짐을 싸서 김포공항 검색대를 거쳐 이곳 토론토까지 굴러와 살아 왔는데 어느새 나는 은퇴한 노인이 되여 그들이 부르는 그때에 불렀던 똑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오늘은 회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직 이십대를 지나 삽십대를 넘길무렵, 이민짐을 풀은 이후로 지난간 세월을 지금 잠시 되돌아 본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공무원 신분으로 외국에 나갔을때와, 이민자로서의 외국에 와서 짐을 풀었을때의 신분은 완전히 달랐다. 언어와 문화가 전연 통하지 않았고, 머리당 $200.00만이 허용된 당시에 우리가 들고온 돈은 합계 $600.00이 전부요, 공항에서 일부 친지들이 주머니에 넣어준 몇푼이 전부인 나의 가족 신세는, 괜히 이민짐을 싼것은 아닐까?라는 후회를 갖게 하기에 충분한 형편으로 전락하고 말았었다. 직업을 찾을려고 resume를 들고 헤매였으나, 그때마다 "You don't have any Canadian experiences, so it's not for you" 라는 대답뿐으로 고민하고 헤매이면서도 우선 먹고 살아야 하니, 임시로 Landscaping을 하는곳에서 처음 대하는 Lawn mower로 궁전처럼 큰 저택의 가파른 언덕에서 풀깍다가 넘어졌던일, 배로 부쳤던 이민짐이 오지 않아, 한푼도 새로운판에 임시로 구입한 조금만 냄비 하나를 이용하여 밥도하고 반찬도 만들어 나의 도시락을 만들어 주느라 고생했던, 그때는 젊었던 아내의 모습, 몇년 먼저와 Down pay조금하고 처음 집을 구입한 친지가 그집을 담보해서 은행으로부터 대출받아, 당시로서는 거금인 돈을 빌려주어 생판 처음 사업이라는것을 했는데, 뜻데로 안되여 전부 털어먹고, 우리 때문에 친지의 집이 날아가 버리면? 하는 생각으로 세상을 원망했었던 기억, 학교때 잠시 과외활동에서 배웠던 화초에 대한것 외에는 Plant라고는 전연 생소했던 아내가 소매를 걷어 부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꽃가게를 시작하면서, 언어소통의 어려움에서 겪었던 일, 팔았던 꽃나무가 금방 죽었다고 들고와 Refund해달라고 하던 Jewish와, 우리의 정당함을 주장하기위해 재판소에 까지 갔었던 기억... 여름방학이면 으례히 부모들과 넓은 북미 대륙 이곳저곳에 여행가서 즐겼던 얘기들을 나눌때, 우리집 아이는 그대열에 끼지 못해 가슴아파 했던일, 그외 손으로 다 꼽을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괴롭혔던 신체적 정신적으로 어려웠던 기억들.... 경제적 기반을 세워야, 그리고 아이들 잘 가르쳐야 이민의 목적이 이루어진다는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이 현장에서 일년 365일을 하루같이 뛰어온 그긴세월앞에, 우리는 벌써 머리가 빠지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변해, 지금 이들이 부르는 그때의 노래소리에 뭐가 서럽고 그리워서인지 잘 살아오지 못한, 한번밖에 기회가 없는 젊은날들의 삶을 뒤돌아 보면서 회한의 눈물을 감추고 있다.

LA공연은 Shrine Auditorium에서 열렸었다고 한다. 이공연을 보기위해 멀리 Ohio주에서, Texas주에서, Arizona주에서 비행기 타고 날아온 같은 연배의 여인들이 모처럼만의 나들이를 하는 장면과 인터뷰도 보였다. 입장하기위해 길게 늘어선, 나와 같은 처지의 어렵고 서러운 삶을 살아가는 교포들의 마음을 나는 금방 읽을수 있었다. 겪어본자만이 이해할수 있는 교포들의 삶의 정신적 공허함을 나는 공유하고 있다. 아침새벽부터 저녁 별이 보일때까지 삶의 터전에서 일만 하면서 지내온 세월의 기억을, 오늘 당대를 같이 살아온 통기타 가수들의 멜로디속에서 되찾고, 그들 또한 회한의 세월에 젖은 눈물을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쏟아낼 것이다. 고국에서 살았다고 한들 어찌 살아온 세월에 대한 회한이 없을까마는, 우리들 인간들은 항상 울타리밖의 세상을 더 그리워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그냥 고국에서 살았더라면..... 하는 미련이 가슴에 있는것이다.

옆에서 같이 TV를 보면서 돋보기를 끼고 옷손질을 하고 있는 아내에게 흐르는 눈물이 얼굴로 흘러 내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기위해 딴청을 부리는 내자신이 외소하게 느껴진다. 늙어서는 여자가 더 강하다는 말이 맞는것 같다. 마음고생을 나보다 훨씬 더 많이 했을 그녀는 태연한척 한뜸한뜸 바늘을 단추와 천속으로 옮겨가면서 그들이 부르는 멜로디에 귀를 대고 있는것으로만 보인다. '하얀 손수건' 멜로디가 지금 흘러 나온다. 통기타 소리와 함께.....

http://www.joovideo.com/ViewMedia.aspx?Num=736&ep=2

Friday, December 23, 2011

공산주의 종주국 쏘련이 붕괴되면서 들떴던 그기쁨과 기대는 어디에......2011,12월 23일.






공산주의 종주국 쏘련이 붕괴되면서 들떴던 그기쁨과 기대는 어디에......2011,12월 23일.

지금도 1985년 당시, 미국 ABC방송의 Barbara Walters가 크레물린 궁전데 들어가 당시 공산주의 종주국의 최고수장이었던
Mikhail Gorbachev당서기장과 담판 짖는 모습으로 단독 기자회견을 하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크레물린궁의 내부가 비밀에 쌓여 있었던것을 처음으로 서방세계에 알려 주었던 역사적인 순간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때 들었던 쏘련말의 두단어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쏘련의 경제정책실패로 인민들의 생활상이 어려워지고 있음을, 비밀에 쌓여 있어왔던 공산주의 정책으로 국민들의 자유를 다 빼앗아 공포에 떨게 했던 정치로선으로서는 서방 세계와의 경쟁에서 앞설수 없음을 깨달은 Gorbchev가 미국 ABC 방송의 앵커를 크레물린궁안으로 끌어 들여, Perestroika,즉 자유경제체제, 그리고 Glasnost(정치적 개방, Political Openness)을 선언했었다. 미국사회에서 유명 앵커로 인기가 절정에있었던 그녀는 이인터뷰로 또 한번 전세계에 '역시 그녀답다'라는 꼬리표가 또하나 붙었던 기억을 하고 있다. 체르넹코로 부터 쏘련방의 수장을 그가 물려 받았을때만 해도, 권력의 암투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미,쏘간의 냉전의 기류는 계속 흐를것으로, 즉 특별한 의미를 부여 하지 않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인터뷰를 통해서 그가 개방정책과 경제개발 정책을 발표 했을때도, 그의 말을 100%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공산주의의 상투적인 흑색선전쯤으로 치부하면서 그추이를 주시하고 있을뿐이었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변화선언은 시간이 흘러 가면서, 서방세게로 부터 믿음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었다. 1988년 발틱 3국인, Lithuania,Latvia, 그리고 Estonia가 독립을 외치면서 쏘련방체제의 기틀을 흔들기 시작했었다. 과거 정권 같았으면 당장에 탱크를 앞세워 밀어 부쳐 꼼짝 못하게 했을만도 한데, 그는 때가 온것을 알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즉 억압으로 누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어서, Gorbachev가 개혁한 정치적 제도위에서 1989년 실시된 러시아의 선거에서 Boris Yaltsin이 국회에 진출하면서, 쏘비에트 공화국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베를린 장벽도 무너지고 만다. 벨린 장벽이 무너질때의 역사적 순간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에 앞서 당시 미국대통령 Ronald Regan은, Gorbachev에게 베를린 장벽을 허물고, 인민들에게 자유로히 동,서독을 왕래할수 있도록 하라고, 그렇치 않으면 중대한 결과를 피치 못할것이라고 위협아닌 현실의 절박함을 강조했던, 그역사적 순간의 TV연설이 눈에 선하다.

1990년 1991년 사이에 Gorbachev는 정당정치제도를 해야 한다고 크레물린 내부를 움직이는 집단에게 요구했었는데, 이때 위성국가인 Azerbaijan과 Lithuania에서는 인민들이 독립을 부르짖으며 거리로 뛰쳐 나오자, 경찰과 군대는 이를 제압하려고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둘러, 많은 사상자들을 내고 말았었다. 쏘련의 집단지도체제의 핵심간부들은 Gorbachev의 Openness를 환영하지만은 않았었고, 내부 갈등과 암투가 크레물린궁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1991년에는 Boris Yaltsin이 새로 기초한 정치개혁에 따라 치러진 선거에서 러시아연방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이변을 맞는다. 그해 8월19일에, 크레물린궁내 강경파들은 쿠테타를 일으켜, 더 많은 자유를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위성국들과의 협약 조인식을 막기위해 당시 Crimea 휴양지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던 Govbachev공산당 서기장을 붙잡아 그를 권좌에서 몰아내는 참극이 벌어졌었다. 그러나 이틀뒤인 8월 21일 Boris Yaltsin이 주도하는 대규모의 군중집회에서 요구한 Gorbachev의 석방요구에 쿠테타는 불발로 그치고 그는 가택 연금에서 풀려나는 기사회생의 기회를 맞는다.

다음날 8월22일, 이날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Gorbachev는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오지만, 이번에는, 쏘연방 공산당의 정치적 활동을 러시아 땅에서는 앞으로는 절대로 인정할수 없고, 이를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Boris Yaltsin이 주도하는 러시아의회로 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고 위기를 맞는다. Gorbachev는 다음날인 8월 23일, 쏘연방 공산당 서기장직에서 완전히 물러난다고 발표한다.

9월6일, 마침내 발틱 3국인, Lithuania, Estonia 그리고 Latvia가 쏘연방 위성국중 맨처음으로 독립을 인정받게 된다.

12월8일, 러시아, 백러시아(Belarus)그리고 우크라아나의 정상들이 모여 쏘연방의 해체를 논의하고, 대신에 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CIS)을 형성하기위한 대책을 논의 한다.

12월25일, Gorbachev 대통령은 쏘연방의 대통령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며, USSR(쏘연방 공화국)은 완전해체된다고 발표한다.

참고로 1991년도에 구쏘연방내의 위성국들이 독립을 선언한 날자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2월과 4월에는 Lithuania,Georgia, 8월 20-22일에는 Estonia, Latvia, 8dnjf 24-31에는 우크라이나, 백러시아(Belarus),Moldava,Azerbaijan,Kyrgyzstan 이었고, 9월에는 Uzbekistan, Tajikstan, Armenia 였었다. 그리고 다시 10월에는 Turkmenistan, 다시 12월에는 Kazakhstan 등이었다. 이로써 쏘연방은 완전해체되고, 새로운 독립국가들이 형성되여 이세상에는 이제 자유와 평화만이 있을 것으로 우리 모두가 거의 확신 했었고, 삶의 질이 좋아지고, 전쟁은 없을 것으로 기대를 했었다.

그후 4반세기가 흘러갔는데, 과연 이지구상에는 전쟁이 없었고, 평화와 자유와 삶의 질이 좋아졌다고 느낄수 있었던 날이 언제였던가?
최근 2-3년 동안에는 세계 경제가 곤두박질을 쳐서, 전세계가 휘청거러 거의 그로기 상태가 되다시피 했었다. 철옹성으로만 보였던 미국의 Big Three 자동차 Maker들이 정부의 긴급 수혈을 받고 이제 겨우 숨을 자생적으로 쉬고 있는 평편이 됐고, 러시아국민들은 삶에 지쳐 다시 옛날 쏘연방 시대로 되돌아 가자고 아우성을 치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지금 러시아는 낯에는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이 국민을 다스리고 밤에는 러시아마피아들이 통치를 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고 개탄하고, 국민들은 시름에 앓고 있다라는 인식이 전세계인들에게 팽배해 있다고 한다.

우리가 발처럼 사용하고 있는 자동차는, 지금 개스값이 너무나 비싸서, 여름휴가철에는 기름값때문에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이 무척 들어 휴양지나 관광지의 업자들이 울상이라고 한다. 냉전이 끝났으면 기름값은 더 싸져야하고 그혜택은 국민들이 가져가야할 몫이 될것으로 여겼으나, 이란과 파키스탄,아프카니탄등에서 터진 개릴라 전쟁과 중동에서 일어난 왕권정치와 독재정치에 맞서 싸우는 서민들간의 투쟁으로 기름값은 하루가 다르게 뛰어올라, 배럴당 100달러를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다고 한다. 냉전시대에는 지금의 1/3값도 안되는 저렴한 가격으로 질좋은 삶의 맛을 만끽하면서도, 미 쏘 양국의 냉전을 조소 하면서, 냉전 종식을 외쳐 댔었다. 더좋은 삶의 질이 우리를 기다릴것으로 상상하면서 말이다.

우리의 삶의 질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것 같다. 세계속의 위계질서는 무너지고 있는것을 본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을 앞장서서 이끌고, 때로는 힘을 앞세워 중재자 역활을 해줄 나라들이 서서히 그빛을 바래가고 있는것을 보면서, 더큰 재앙이 우리를 향해 달려 오고 있음을 똑똑히 보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책이 서지 않고 있는것 또한 걱정일 뿐이다.

이북의 김정일 정권이 바뀌어 그의 풋내기 아들이 정권을 불법으로 세습받아, 그의 아버지 김정일이 휘둘렀던 철권통치를, 힘없고 배고파하는 북한 인민들을 향해 휘두르기 시작하고 있지만, 세계 어느나라도 이를 직접 말리겠다고, 중재자 역활을 하겠다고 나서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김정일이만 없어지면 북한에도 희망이 보이는 나라가 될것으로 생각하고 믿었던 많은 사람들이, 김정일이가 없어진 지금 희망은 커녕,더 무섭고 공포에 떠는 앞날을 내다 보면서, 마지못해 삶을 이어가게 됐지만, 모두가 자기나라의 어려워진 살림살이를 챙기느라 옆을 돌아볼 여력이 없이, 강건너 등불로 생각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많은 나라들의 질나쁜 지도자들은 더 심하게 자국민들을 억누르고, 착취하여 그들과는 다른 천상에서의 삶을 즐길것이다. 이럴려고 냉전의 종식을 그렇게도 외쳐 댔었던가?.

우리 다음세대의 아이들의 삶은 어떻게 이어질것인가? 삶의 질에 불만이 많은 서구사회에서는 지금 인명경시풍조가 전성시대를 이루고 있다. 전쟁으로 죽은 숫자 이상으로 폭력사건과 총기난사사건, 강도 강간사건들로 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어간다. 그러나 속수무책이다. 위선으로 옷입혀진 정치지도자들이, 이러한 악에 맞서 강력히 다스려야 할 입법을 해야하나, 대신에 선한 양 인척보이기위해, 갖은 악법을 만들어 국민들을 현혹시키기위해, 존재했던 법마져도 없애 버려, 지금 온갖 서구사회가 악의 길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잘 살고 있다고 하는 서구사회의 어느곳에서도, 지금은 밤에 거리를 마음놓고 활보 할수가 없을 정도가 됐다. 누가 목숨을 금새 채갈지 불안하기 때문이다. 냉전과 공산주의사회를 꺽어놓은 서구사회의 현실이 이것이라면, 차라리 동서냉전의 시대에, 더 값싸게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더 안전하게 밤거리를 거닐수 있었던 그때가 그리워 옛날 체제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러시안들의 고함소리를 심도있게 받아들여야 맞다고 생각을 하게된다. 두렵고 무서운 세상이 오고 있다는것을 느끼기에.......

Friday, December 16, 2011

친지의 손자와 친구가 되여 3킬로미터를 걸었던 의미. Dec. 15일, 2011




친지의 손자와 친구가 되여 3킬로미터를 걸었던 의미. Dec. 15일, 2011

"Timmy, you said your Mom has forced you to be a medical doctor when you've grown up that you don't like it but
you want to be a animal scientist, Any particular reason on that?"
"Yes. I love animals,especially on birds. So I want to research those guys one day as a scientist, Grand pa"

어제 오후에는 우연히 Timmy와 그의 친할머니와 Lunar 그리고 나, 모두 4명이 같이 Lakeshore 호수물가를 따라 약 3킬로를 전진 했다가 다시 되돌아 오는 Board walk위를 걸었었다. 그녀석은 이제 불과 7살짜리로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는, 내가 살고 있는 옆동의 콘도에 살고 있는 친지의 친손자이다. 가끔씩 Timmy는 나의 친지인,그의 Grand parents를 방문하곤 한다. 어제는 감기로 몸이 불편하여 일찍 학교를 조퇴하고 Grand parents집으로 와서 쉬면서, 같이 걷게되는 기회를 맞았던 것이다. 내 친지의 막내 아들이기도한 Timmy의 부모들은 모두가 일을 하기에 Nanny가 그들을 돌보고 있었으나, 계약이 만료되여 또 다른 Nanny를 찾고 있는 며칠 사이 할머니가 그들을 Baby sitting을 X-mas휴가철까지 하기로 하고 돌보고 있기에 같이 걸을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Timmy의 여자 동생은 할아버지가 집에서 care하고 있었기에 같이 동참하지 못했지만, 하고 싶었어도 너무 어려서 안됐었을 것이다.

그의 할머니와 오랜 친구인 Lunar는 앞서 걸어가고, 나와 Timmy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그녀석과 얘기를 하는 재미가 나를 그들의 세계로 몰입하게 하는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그는 종종 걸음으로 나와 걸어가는 보조를 맞추느라 뛰어 걷기도 하고....때로는 나는 나란히 그의 고사리 손을 잡고 발자국을 떼기도 했었다. 둘이 손잡고 걷는 그림은 무척 한가롭고 평화로워 보였을 것이다. 나도 그런 기분이었었다.

"Grand Pa, I'm now getting tired a bit. I'm thirsty now"
"Me too, pain on my knuckle of right knee is killing me, but because of fun of talking with you on your future plan make me forget of that pain. I think you would be same feeling of not thinking of tired or thirsty just concentrating on walking,don't you?"
"Ya. you are right, I feel that way too". " We are now almost around the corner of finishing point where your Grandparents' condo is, so lets keep walking a little bit more,Timmy"

다 걷고나서 헤여질때, 내가 먼저 Timmy에게 offer해 보았다. " Timmy how did you like walking today? want to walking again tomorrow if you have a chance?"
Timmy의 대답 " I'll think about that because my feeling is still bad, so I probably skip school tomorrow and sleep over tonight at Grandparents. Than I can do probably with you".
내가 대답했다."OK, maybe see you tomorrow. bye Timmy".
Timmy가 다시 말을 이었다. " I had a really good time with you today, learning and talking some issues and my future plan that I haven't told and discussed hardly with my grandpa".

어린 아이들은 절대로 꾸밈이 없다는것을 Timmy를 통해서 또한번 터득하고 배웠다. 그가 나이먹은 사내 였었다면, 할아버지와의 대화나 할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 피곤하다거나 목마르다는 투정(?)을 참아냈을 것이다. 그모습이 내눈에는 천사가 따로 있을소냐?로 보였고, 그래서 부모가 되여 자식을 낳고, 다시 그자손들이 또 자식을 낳고..... 자식에게 못다한 사랑을 Grandchildren에게 쏟아 붓게 되는 그심정을 오늘 Timmy와 같이 걸으면서 깊이 느낀 것이다. Timmy는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을때 본이후로 몇년만에 오늘 처음 만났었다. 그때도 그의 Grandparents와 우리 부부가 같이 만났었다. 그후 오늘 처음 만났을때는, 그때 가르쳐 주었던 인사하는법을 까먹고 인사를 하지 않고 멀뚱멀뚱 쳐다만 보다가, Lunar가 '인사 해야지,Timmy?' Lunar가 시범을 보이자 그때야 생각이 난듯, 마지 못해 허리를 굽혀 고개를 꾸벅 했었을 정도로 약 2년 동안만에 처음 본것이다. 처음 걷기 시작할때는 할머니 손잡고 걷기도 하다가 뒤쳐지는 그의 손을 내가 잡고 같이 천천히 걸으면서 부터 앞서 가는 두 할머니들은 잊어 버리고 둘이 친구가 되여 서로 얘기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부터 친구(?)됐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는 그속에서 나도 어쩔수 없이, 먼저 손자 손녀를 본 친지들이 자랑스럽게 얘기를 할때는, 속으로 할짖이 없어 그런소리를 하는가?라고 조소를 했었던때가 바로 엇그제 같았는데, 어느새 나도 그들과 같이, 자손들에 대한 생각이,바뀌어져 있음을 오늘 Timmy를 통해 느끼면서, 나의 딸 아들은 언제 결혼하여 그들이 생산한 귀여운 아이들을 통하여 이러한 삶의 기쁨을 느끼게 될수 있을까?라는, 어쩌면 잡히지 않을것 같은 바램(?)을 가슴속에 담아 보기도 했다. 연령적으로는 이미 결혼 적령기를 훨씬 지나고도 남는 나이들인데.....두아이가 일찍 독립해서 살아가고 있기에 오히려 빨리 결혼할까봐 전전긍긍 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만셈이다. 지지고 볶으고 하면서 같이 살았던라면.....지금쯤 손자 손녀가 생겨 그들의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또 같이 걸으면서 오늘 Timmy를 통하여 느꼈던, 삶을 살아야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체험하는 맛을 볼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도 해본다.

어제 Timmy가 애기한데로, 할머니댁에서 하룻밤을 자고난 아침에 McDonald's에서 다시 만났다. 어제 친구했었다고 스스럼 없이 재롱도 부리고, 뭐라고 쉴새없이 조잘 거렸다. 옆방에 있는 Play ground에서 놀기도하고....부지런히 왔다갔다 한다. 그의 동생과 그의 할아버지는 Timmy의 5살된 여자동생을 데리고 차로 먼저 집으로 떠나고 우리 일행은 걸어서 집에가기로 하고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Timmy는 나와 같이 걷기 시작했고, 두할머니들은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어제 같이 걷는것을 보았기에 할머니들이 마음 편하게 앞장서서 가는것 같았다.

"Timmy, this house looks like very small and not maintained well".
" Ya. look next house is huge and beautiful,isn't it?".
"I think so, Timmy, look next one. Still under construction but looks like huge,don't you think so?"
"Ya huge".
"Timmy,this is the consulate of Poland, you should know what the consulate is, Timmy"
"Ya,(FranCois) Chopin was born in Poland" 엉뚱한 대답을 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깜짝 놀랐다. 이어린 나이에 피아노의 천재 쇼팽을 알고 있다니? 내가 Timmy 나이였을때는 아직 초등학교 입학하기 1년전쯤된 시기이다. 그런데 그어린아이가 알고 있다는것에 일종의 쇼킹이기도 했다. 살아가는 환경이 많이 좋아졌고, 따라서 아이들의 조기 교육이 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고 있는것보다 많이, 더 넓게 아이들이 지식을 익혀 가고 있다는것을 Timmy를 통해 또 느낀 점이다. 내 친손자 손녀 였다면 더 깊은 애정이 갔을것 같은 느낌이 솔직히 들기도 했지만, 어쨌떤, Timmy를 통해서 미래의 친할아버지 공부를 내가 하고 있고, 즐기고 있다는것에, 오히려 친지 부부에게 고마움을 표시해야 될게 아닌가?라고 생각을 곰곰히 하기도했다.
"Chopin? What is that?"
"He is the famous pianist"
"How did you know him,Timmy?"
"From my piano lesson's"
"I see. who send you to piano lessons, probably Mommy, right?"
"Ya"

두할머니는 우리들 시야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굿이 할머니들과의 속도를 맞출필요없이 우리는 그렇게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끝이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때로는 Timmy가 어떤뜻을 갖고 질문을 하는지 잘 파악도 안되는 소리에, 되묻기도 하면서, 또 설명을 하면서, 발걸음은 계속됐다.
"I'm tired and thirsty. I wish I had a drink"
"Thirsty, do you?"
"I have one dollar in my pocket. I can buy a drink with this money"
"Can't you be patient? not far to get home. But I know there is a store under way home. If you really want it then..."
"Ya. Wow I see the store over there. let's go in"
가게로 들어가 Pop Cooler앞에 서서 7-up 한병을 손에 쥔다. 아마도 Timmy가 즐겨먹는 음료수중에 하나 같았다. 얼굴에 미소가 피어난다.
counter로 가서 올려놓고 계산을 하게 했다. 어떻게 하나 보면서. Cash를 보는 나이든 아주머니는 생김새로 보아 벌써 한국인임을 나는 느낄수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 둘이서 영어를 하는것을 들었기에 영어로 말을 했다.
"one dollar ninety nine cents please"
"Timmy one dollar's not enough to pay for, so I'll pay it for you, is it OK?. keep it yours"
가게를 나오면서, 한국말로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인사를 건넸더니, 조금은 놀라는 눈치로 '저는 다정하게 영어로 얘기 하시기에 할아버지와 손자가 나들이 나온모양이다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한국사람일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는데...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셨다.

Timmy는 병뚜껑을 못열어 낑낑 댈 정도로 아직은 어린 아이다. 그가 계속해서 열려고 노력하는것을 보면서 걸었다.
"Maybe too hard for you to open it. give me. I'll open it for you" 뚜껑을 열은 다음 그에게 건네 주었다. 우선 한모금 마시더니 금새 Thirsty가 없어졌나 보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I'll give you my one dollar. I have to pay back"
"It's Ok. I bought it for you because I love you Timmy. Save your money for your future use. OK?'
"But I think it's not right make you pay for me"
"Timmy don't worry it. You are my grandson like since your grandpa's one of my best friends. If you want to
get other things, I would do that again, Timmy"
"Thanks so much"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친 할아버지가 아니기에 Grandpa 단어는 항상 부치지 않는것이 조금은 나를 아쉽게 하기도 했다.

우리가 안보이자 앞서가던 두할머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게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Timmy가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여성들의 본능이었을 것이다. 가끔씩은 운동삼아 집에서 부터 McDonald's에 Lunar와 같이 걸을때는 멀어보이기도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Timmy와 같이 걸은 지금은 너무나 짧은 거리를 걸은것 같은 기분이다. 피곤하다고 조금 칭얼댔던 Timmy도 다음에 또 걷겠다고 먼저 약속을 하는것을 보면, 자기 친 할아버지와 또 다른 뭐를 나에게서 느꼈던 것 때문일거라고 생각을 했다. 친할머니도 우리 둘이서 같이 다정하게 쉴새 없이 얘기 하면서 걷는게 너무도 신기 하다고 했다. 할머니와 다른때 같이 걸을때는 조금 걷다가 칭얼대고, 투정부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고 채근했었다고 한다. 또한 친 할아버지와는 별로 얘기를 하는것을 보지 못했었는데....라고 설명하면서.
이다음에 친손자 손녀가 생기면, 웅지아빠는 잘 할것 같아요 라고 한마디 더 부친다. Lunar도 의외라는듯이, 이렇게 같이 손잡고 걸으면서 칭얼대곤했던 아이와 먼길을 걷다니....웅지아빠도 늙긴 늙었다 보다라고 칭찬인지 아니면 철부지 어린꼬마와 친구가 된것이 안타까워 보여서 였는지? 그렇게 한마디 했다.

보통사람으로 태어나서 보통사람들이 평상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길을 나도 가야 하는데.....그러나 내속으로 난 자식들이지만, 이제는 장성하여 각자 자기들 갈길을 가고 있는데, 결혼 안했다고 Push할수는 없고, 또 절대로 밀어부칠 생각도 없다. 다만 곁에서 빨리 결혼해서 새끼도 낳고 안정된 생활을 하는 그모습을 보고 싶은 것뿐이다. 그런 손자 손녀들과 같이 딩굴고, 어울리고, 장난감 가게에서 쇼핑도 해보고 싶고....또 한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금년에도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말이다. 아들 녀석은 오늘밤에 Business때문에 자동차로 미국 Boston으로 간다고 한다. 내생각으로는 결혼에 더 신경을 썼으면 좋으련만..... 아비의 이심정을 아들녀석은 절대로 이해 못할것이다. 그가 나의 위치에 서서 살아보기 전에는. 내가 그랬드시 말이다. Timmy가 어제 오늘 나의 삶의 참맛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 주어서 오히려 고마웠다.

Saturday, December 10, 2011

Stoney Creek Trail Walk - North Side Dec.10,2011.








Stoney Creek Trail Walk - North Side Dec.10,2011

어제밤 일기예보에서는 아침 기온이 영하 1도쯤 될거라고 해서, Trail Walk 하기에는 최적의 날씨겠구나라고 생각했었다. TV를 켜보면서 내눈과 귀를 의심 하지 않을수 없었다. 영하 7도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아침 6시경. 마음이 조금은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지난달 아시아쪽 여행을 마치고 온후에 매주 Trail Walk하기로 결정했기에, 그렇치 않아도 홍보가 제대로 잘 안돼 참석인원이 Up and Down하기를 Yoyo처럼 하고 있는 판인데, 오늘 아침은 꽁꽁 얼어붙는 급강하의 기온이 회원들의 발길을 집안에 꼭 묶어둘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혼자 BackPack 을 메고 항상 모이는 Humberbay Park West의 주차장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주차장에 거의 다왔는데도, 차량은 거의 보이지 않는게 아닌가. 역시 내 예상데로 보여야할 회원들마져도 보이지 않는다. Lunar는 같이 준비를 하고 막 출발 하려고 하는데 언니로 부터 호출이 있어, 그곳으로 내가 타고갈 차를 끌고 가야만 했기에, 짧은 거리지만 나혼자 터벅터벅 주차장까지 걸어왔던 것이다. 회원중에 제일 연장자이신 R분께서 먼저와 계시다가 차안에서 나를 보고 문밖으로 나오시면서,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시간이 다되였는데, 아무도 안보이니 어찌된 일인지요?" 하신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지요.", " 추우니까 차안으로 들어와서 기다리는게 좋겠네요." "예 그렇게 하겠읍니다."

L형 부부, 회원 C, R회원님 그리고 나를 포함한 5명이 오늘의 산행식구이다. 차한데로 5명이 타고 Stoney Creek 주차장에 당도 했을때는 정확히 10시였다. 윗분에게 간절한 마음을 담아 오늘의 산행을 무사히 마치게 해달라는 보고 겸 바램을 마친후 발길을 띄기 시작했다.
오늘은 지난번에 남쪽을 향해 걸었던 반대 방향, 즉 북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Main Trail까지 이어주는 Side Trail인 공원의 잔디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려 앉아 있었고, 잔듸위를 밟는 발자국소리는 살얼음위를 걸을때 나는 소리같이 바스락 거린다. 차거운 겨울 날씨가 모자를 쓰고 귀까지 막고, 손에는 장갑을 끼고 걷게 만들어버려 지난주와는 아주 다른 복장들이다.

언덕을 계속향하여 걸을때는 숨이차서 뿜어내는 입김이 마치 굴뚝의 연기처럼 하얗게 꼬리를 문다. 물기가 젖었던 길바닥의 한곳에는 칼날처럼 뾰쪽한 얼음날들이 지그재그로 이어져 있어 그위에 발자국을 남길때는 바스락 소리가 더 요란하다. 코끝이 조금은 벌거지고, 원치 않는 맑은 콧물도 나온다. 능선을 다올라 평지위를 걸을때는 여유가 있어, 오른쪽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걸었다. 민가들이 줄지어 늘어선 모습이 평화롭게 보인다. 가끔씩은 굴뚝으로부터 나오는 흰연기도 춤을 추면서 사라져가고....
이번에는 아직도 색갈은 파랗게 보이는 잔듸로 덮힌 골프장이 추위에 떠는 모습으로 눈에 들어온다. 여름철에는 군데군데 짝을 지어 클럽을 휘두르는 골퍼들이 바삐 움직였었는데.....오직 잔디만 아직 그대로 버티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것 같이 느껴졌다. Putting Green에는 흰색의 Vinyl이 덮혀져 있어 보는 눈을 더 춥고 을씨년 스럽게 만드는것 같다.

계곡의 깊은곳에는 지금도 개울물소리가 들리고, 폭포는 여전히 떨어지는 물을 흘려보내기도하고 일부는 안개로 변화시켜 흩날리고 있었다.
깊은 벼랑을 끼고 있는 Conservation Area를 걸으면서, 벼랑으로 이어지는 평지의 끝에는 보호용 울타리를 만들기위한 Foundation Post를 박아놓은 것을 볼수 있었다. 아마도 Trail Walk을 하는 사람들이 적은 계절을 이용하여 지금 작업을 하고 있는것으로 이해를 하고 싶었다. 며칠후면 의젓한 Chain link가 부착된 단단한 울타리가 제모습을 드리울것이다. 그때는 오늘보다는 덜 신경을 쓰면서 걸어도 바로 밑의 낭떠러지로 굴러 넘어질 염려는 없을 것이다. 겨울 바람에 휘몰리는 나목의 소리는 윙윙 마치 벌떼들이 날아갈때 들리는 소리같이 내귀에는 들린다. 주위 환경과는 상관없다는듯이 검정 Squirrel들만이 유유자적하면서 바삐 이나무 저나무로 오르 내리면서 뭔가를 찾아 헤매는 광경이, 도심지안에서 뭔가를 향해 바삐 움직이는 군중들을 연상케 한다. 그들이 찾고 있는 상수리와 도토리들이 내눈에는 보이지 않아 괜히 걱정도 된다. 과연 이시간에 내가 그들을 위해 걱정해야할 여유가 있는가? 숨을 헉헉 거리면서 걷는 주제에 말이다.

뭔가를 계속적으로 지속해서 행동에 옮긴다는것은 여간한 결단이 아니면 쉽지가 않다는것을 살아온 세월속에서 많이 터득하고 있다.
매주토요일 산행 하기로 몇몇회원들과 상의한후 결정을 하고 시행해온지 몇주가 지난 이시점에서 다시한번 이결정을 잘한것인지 아니면 해서는 안될 섣부른 결정을 한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많은 가정주부들은 흔히 말하기를 손님을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했는데, 맛있게 많이 먹어주지 않으면 괜히 섭섭하고, 혹시 음식을 잘못만들었기 때문은 아닐까?라고 마음을 쓰게 된다라는 얘기를 자주 듣고 했었다. 꼭 그런 기분이다. 모처럼 참가하셨던분들의 의견은 항상 즐거운 표정이고, 또 어떤분들은 이다음에 꼭 이코스를 다시 걷고 싶다는 의견을 말할때는 이분들이 산행의 의미를 터득하고 가는것 같아 기분이 좋았었다. Keep continuing 하기를 마음속에서 바래지만, 이어지는 비율은 극히 적다. TKPC의 특성상 독려를 하거나 왜 동참을 못하셨읍니까라고 채근할수는 더욱없다. 각자의 사정과 형편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경우는 갑자기 추워진 날씨가 원인이 된 경우가 많았으리라 믿어진다.

그러나 분명히 주장할수 있는 것은, Trail Walk을 하는것이 어느 Medicine을 먹으면서 몸을 보호 하려는 방법보다는 훨씬 효과적이라는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오래전 다른 산행팀들과 어울려 산행을 할때 70 후반의 회원님이 해준말이 떠오른다. 그분은 어깨와 무릎에 관절이 와서 잘 걷지를 못하고 몸도 무거워 집안에서만 주로 시간을 보냈었는데, 어느 친지의 권유로 산행을 시작한지 6년차라고 하면서, 지금은 매주 토요일이 기다려 진다라고, 그래서 관절통의 고통을 거의 잊고 생활하고 있다라고 했었다. 산행을 할때는 항상 선두구룹에 속해서 걸었고, 또 많은 회원들이 끝까지 완주하지 않고 돌아서 오는데도 그분은 완주하곤 하는것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나자신도 토요일 산행을 하고난후는 몸이 가벼워지는것을 확실히 느낀다. 그리고 굳었던 몸이 유연해지는 것을 동시에 같이 느낀다. 이러한 기분을 이핑게 저핑계를 대고 참석못하는 회원분들이 매주 걸으면서 피부로 느끼서 건강한 생활을 이어가는 모습들을 보고싶은 간절함이 항상 마음속에 있다.
건강한 생활속에서 건강한 생각이 떠오르고 남의 입장이 되여서 생각해 볼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되는것 아닐까?

정확히 3시간반을 걸었다. 약 15-16킬로쯤 걸은것으로 계산된다. 피곤해야할 몸의 컨디션은 가볍게만 느껴진다.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글로 표현안되는 이기분을 알거나 느낄리가 절대로 없다. 아니 불가능하다. 오늘 참석한 회원들은 이런면에서 행운아들임에 틀림없을것 같다.

McDonald's restaurant 커피의 향과 맛에 푹빠져 이제는 Trail Walk을 마치고 귀가하는길에는 꼭 들려가는 코스되다시피한다. 오늘도 예외가 아니다. 값도 Tim Horton보다 훨씬 저렴하다. 커피잔을 테이블에 놓고, 살아온 얘기들, 걸으면서 못다한 얘기들, 여행얘기들, 고국방문했을때 일어났던 얘기들...... 끝이 없이 이어지는 그 담소에서 못느꼈던 정을 더 느끼고, Fellowship은 더 진해짐을 오늘도 느꼈다. 이맛에 별수 없이 또 토요일을 기다리게 되는가 보다. 열성적으로 걷고 계시는 연로하신 그분의 하신 말씀이 다시 머리에 떠올려진다. 감사.

Tuesday, December 06, 2011

왜 미국과의 FTA는 안된다고 개거품을 품어대는가?

왜 미국과의 FTA는 안된다고 개거품을 품어대는가?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렇게 못믿을 적대국인가? 한심한 사람들....

며칠전 인터넷을 통해 "백 지연"의 끝장 토론을 100 분동안 지켜 본일이 있다. 내용은 한미 FTA 비준조약 국회 통과와 MB의 최종 결재로 실행단계에 들어간것에 대한 찬반하는 쪽의 인사들이 나와서 대담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FTA를 적극 찬성하는 쪽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조국 대한민국은 수출해서 먹고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협상내용에서 49%을 잃고 51%를 유리하게 챙길수 있다면 무조건 조약 체결해야 하고, 최악의 경우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득실이 Even 이라해도 해야 한다는 Concept을 믿는 사람이다. 그래야 일자리를 창출해서 국민들이 삶을 유지할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반대측의 의견 개진을 보면, 극히 지협적이어서, 이는 마치 넓은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한그루를 보면서 넓은 숲을 논하는 소아적 좀더 실질적으로 표현 한다면, 요즘 한창 조국 대한민국의 정치판이나, 종북주의자들의 대명사가 되여 버린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기위해 억지를 정당화 시킬려는 철부지 답답함만을 토론내내 느꼈었다.
한분은 'FTA를 시행함으로써, 자료에 의하면 35만명의 일자리를 창출하게 된다"라는 내용은 새빨간 거짖말이라고 하면서, 자기계산으로는 그숫자의 일자리를 창출 하기위해서는 약 300년이 걸린다라는 얘기를 서슴없이 토해 내는 모습을 보면서..... 지성을 갗춘 대학교수라는 분의 생각이 왜 저렇게 삐툴어져 버렸을까?를 기억속에 담아 두었고,
또 이에 반론하는, 즉 찬성하는측의 교수분은 '그숫자는 꼭 일자리 창출만을 의미하는게 아니고, 그만큼의 실질적 소득의 가치를 얻게되는것을 의미하는 내용'이라고 설명을 해 주었다.

또 반대측의 ISD 불합리성에 대한 캐나다와 미국이 마찰을 빗엇던 사례가 설명돼기도 했다.
내용은 자동차에 들어가는 부품을 값에 상관없이 미국산 부품의 반입을 불허했기 때문에 캐나다측에서 엄청난 액수의 배상을 미국에 지불했다는점을 들어, 약자가 강자의 제소에 당해낼 힘이 없다는식으로 몰아 부치면서, ISD가 독소조항임을 강조 해댔다. 처음 그설명을 들었을때는, 강자가 약자를 협약에 관계없이 힘으로 몰아 부치는것으로 이해를 하면서도 그이유가 궁금해졌다. 이어서 배상의 이유를 찬성하는쪽에서 설명해주었다. 내용은, 캐나다측에서 제작 생산하는 캐나다 업체를 보호하기위해 동종의 미국산 부품의 캐나다 진입을 막은것은 엄연한 Agreement에 나타나 있는 평등의 경쟁원칙을 위반하는것이어서 배상을 하게된것이라는 설명을 듣고서, 배상의 이유를 알게 됨과 동시에, 반대측이 그이유를 모를리 없었을텐데, 시청자들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리는식으로 앞뒤설명은 다 빼버리고 결과만 애기해준 그저의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들에게 우롱당하는 심한 불쾌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요즘은 고국 한국이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위치가 격상되여 세계에 좋은 선례를 남기고 있다.
만약에 한국의 원조를 받고 잘살게된 나라가, 한국을 고마워 하기보다는 나쁜점만 들추면서 한국을 비난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온다면, 그 반응은 어떨까?를 상상해 보았다. 아마도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배은망덕한 놈들이다' 라는 등등의 비난과 욕설로 그나라를 성토할것이다. 수혜국으로 부터 고마움의 찬사는 못들어도 최소한 비난하는 소리는 안들었으면 하는 마음일 것이다.

미국에 대한 과민 반응은 한국이 민주화를 부르짖으면서 비례적으로 증폭되여 나타나는것으로 이해된다. 미국에 관한 이슈에 대해서는 neutral position에서 생각지 못하고, 일단은 반대를 하고 보는식으로 인식이 되여 있는것같다. 반대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개인적으로 미국과 깊은 연관을, 일종의 안전장치로, 맺고 있는 이중적인 사람들임을 나는 잘알고있다. 그러면서도 입만 열만 거품을 품어 대면서 반미하는 유명한 정치꾼들, 연예인들, 먹물많이 먹은 사람들 등등...미국과의 관계가 앞으로도 협조적으로, 상생하기를 바라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를 지켜보면서 생업에 열중하고 있는데, 소수의 좌파와 종북세력들이, 교묘하게 시끄럽게 북치고 장구치면서 아직 세상의 살아가는 이치를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선동하여 마치 전체국민의 의견인양 떠들어대는 위험한 짖을 계속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과 혈맹의 관계를, 광복이후 맺어, 공산침략자들로 부터 방패막이를 해왔고, 앞으로도 해갈것이다. 소요된 경비는 천문학적 숫자이며, 수만병의 미군들이 한국의 최전선에서 젊음을 바쳐, 오늘과 같이 잘사는, 민주화된 한국을 건설하는데 도와왔다고 믿는다. 희생된 미군의 숫자또한 엄청나다. 그들이 한국에 주재하면서, 한국의 국토방위뿐만이 아니고, 직 간접으로 한국경제의 초석을 닦는데 기여한 공로는, 특히나 유교사상이 삶의 밑바닥에 깊이 깔려있는 한국사람들의 정서를 감안한다면,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고 서로 공존하도록 노력하고 감사해야 마땅하다.

좌파나 공산주의자들의 본성은, 필요할때는 서로협조하고 같은 행동을 하나, 그가치가 다 하면 냉혈한이 되여 제거해 버린다. 그러한 사례는 역사를 통해서, 광복이후 북쪽에서 자행된 자료를 보면 확연히 알수 있고, 또 현재도 진행형에 있다. 좌파나 종북자들은 그내용을 잘 알기에, 마지막에 가서는 제거대상에서 빠져 볼려고, 복잡한 서울도심의 거리를 점령하여 파괴를 일삼는 데모를 하면서, 그것도 모자라 이를 막으려한, 공권력의 최후보루인 경찰간부를 기습하여 때려눕히는 패악을 저지르고 있는것같다. 아마도 그러한 그들의 영웅적(?)행동이 그쪽에 영상으로 잘보여져, 최고의 충성을 하고 있다는것으로 보여 지기를 깊이 염원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단언컨데 절대로 그들생각데로는 안될것이다. 왜냐면, 좌파나 종북세력들은 대부분이 이남출신들이기에, 출신성분에서 제외대상이 되기 때문임을 직시해야 할것이다.

잘살아 보겠다고 주야로 쉬지도 않고 열심히 건설의 횃불을 켜서 일한 덕분에 오늘의 조국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우뚝서서 행진하고 있는 모습을 멀리 태평양 건너에서 바라보고 있을때는 더불어 만족감을 깊이 느낀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우리의 선배나 동료들이 활발하게 세계시장을 누비고 다니면서 수출과 수입을 했기에 가능한것이었다. 그러나 갈수록 경쟁이 심하고 Trading Barrier가높게 드리워져, 이를 헤쳐나가기위한 수단의 하나로 수출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과의 FTA를 체결해서 서로의 살길을 찾아 헤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본다. 남미의 여러나라와 그리고 EU연합과 FTA를 체결했고, 이번에 미국과도 같은 내용의 협정을 맺은 것이다. EU FTA와 미국 FTA의 내용을 나름데로 읽어보기도 했다. 골격은 다 같은 내용인데, 왜 유독 미국은 안된다고 야단인가?

서구유럽이나 다른 대륙에서는, 북쪽에서 저지른 연평도포격사건, 천안함격침 사건, KAL기 폭파사건같은 패륜적인 행위를 저질러도, 미국만큼 민감하게 대처하거나 비난하는 경우는 없거나 심하지도 않다고 볼수있다. 따라서 그곳에 진출해 있는 고국의 무역업자나, 학자들, 민간인들의 접속이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질수 있는 여건이 자연적으로 형성되여 있기에 FTA를 그들나라들과 체결해도 상관치 않으나, 반공을 하고 있는 미국과 자유무역 협정을 맺으면, 그만큼 좌파세력이나 종북자들의 활동반경이 좁아질 우려가 많아질것이기에 매일같이 선동으로 서울의 도심지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생각된다.

북쪽의 그들에게는 '배은망덕'이라는 사자성어를 수식어로 부쳐주는것 자체가 아깝다고 생각된다. 미국과 혈맹의 관계를 오랫동안 맺어오면서, 어찌 티격태격 마찰이 없었을수 없었겠는가마는, 이는 이성을 갖인 인간들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과정이리고 믿는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더 깊이 알고 이해하고 서로 돕고, 신의를 쌓아왔기에 더불어 잘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 오늘에 이르렀다고 믿는다. 북쪽은 그반대였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단물이 다 빠지면 뱉어내듯, 이용가치가 다하면, 그들은 형제고, 친척이고 심복이고간에 가차없이 처단해 버렸음을, 그래서 Secluded hemisphere라고 별명이 부쳐진, 이해못할 존재가 되버린 그들에게 쇠뇌된 남쪽의 일부 종북, 좌파세력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측은한 마음이 앞선다. 그들 자신은 물론이고, 거슬러 올라가 그들의 부모와 친척들이 전란후 어려운때에 미국의 혜택을 참으로 많이 입었음을 부인할수는 없을 것이다. 은혜를 입었으면 최소한 그은혜를 되갚지는 못할지언정, 헐뜯고 훼방하지는 말아야 최소한 인간적 도리를 하는것이 아닐까?

FTA는 어려워져만 가는 세계시장에서 서로 수출입하여, 결과적으로는 양질의 좋은 물건들을 당사국민들에게 더 저렴하게 공급하여 삶의 질을 높이고져 함에 있는것이 목적임을 알고 있는이상, 다른 나라와 FTA Agreement를 맺을때에 환영했던것 처럼, 모두가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여 win-win 작전에 동참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국의 직업별 인구분포도를 보면, 오직 전체국민의 6%미만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FTA하게 된다면 밀려드는 값싼 미국산 쌀 때문에 농민들이 망하게 된다고 좌파, 종북주의자들은 떠들어 대면서 FTA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간절한, Simple한 말이 있다. " 나무를 보지말고, 전체를 이루고 있는 숲을 보라"라고. 농민들이 수확한 밀과 쌀로 한국전체국민을 먹일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절대 아니다.

모든 가치를, 물량을 재는데는 저울이나 잣대를 사용한다. 미국과 FTA를 하는데도, 지금까지 사용해온 그잣대를, 여기에도 대입하여 정확히 측정해야 한다. Double standard measurement는 절대로 안된다.
DJ와 노무현정권은 북쪽과 남북 평화해결을 한답시고 그들식의 FTA를 체결하고, 국민들 알게 모르게 북쪽의 Regime에게 수십억 달러의 현금과 곡물을 바쳤다. 그때에도 다수의 국민들은 조용히 지켜 보았고, 좌파와 종북세력들은 마치 금방 남북평화 통일이라도 될것처럼 찬양일색으로 환영 했었다. 그결과는 어떤 것이었었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거처럼, 그들은 국민들의 바라는 염원을 져 버리고 대신에 천안함폭침사건, 연평도포격사건, 금강산 관광객 총살행위, 연평해전등의 악마적인 살인행위로 그은혜를 갚았고, 앞으로도 계속 만행을 저지를것으로 예상된다. MB정부는 이것을 막기위한 조치를 취해왔는데, 종북세력및 좌파들에게는 망국적 행위로 보여졌던것 같다. 그들은 이런식으로 국제간의 거래에서 Double standard 를 거침없이 사용하면서 국민을 위협속으로 몰아가는데 혈안이 되여있다. 이것이 소위 그들이 말하는 이북과의 FTA였던가? 미국이라는 나라가 외교관계수립이후로 한번이라도 한국을, 이북의 Regime처럼 종속국가로 만들려고 흉계를 꾸몄던 적이 있었던가? 한미 FTA에 대한 이의를 더이상은 입밖에 내지 못하도록 당국은 철저히 사전조치하여, 국민들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수 있도록 최선의 방법을 택하고 실행해야 한다.

태평양 건너 멀리 북미대륙 북쪽에서 오랫동안 평범하게 생업에 종사해오면서 살아가는, 한초로의 교민이 한미 FTA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느끼고, 바라는 마음을 표현해 본것이다. 감사.

http://www.ahaidea.com/video/player.asp?idx=56511

http://www.brookings.edu/opinions/2010/10_korea_eu_lee.aspx

http://www.eubusiness.com/news-eu/1247476625.92

http://www.ustr.gov/trade-agreements/free-trade-agreements/korus-fta

Thursday, December 01, 2011

고국 한국의 종편 TV 방송 개국을 축하한다.

좌편향으로 많이 기울고 있는듯한 고국의 TV방송에 맞서, 좀더 신선하고, 실질적인 현장보고와
좌경및 진보성향에 맞서 보수와 진실만을 국민들에게 보도하겠다는 캐치 프레이즈를 걸고, 드디어 4개의 신문사들이 일제히 같은날 같은 시각에 첫전파를 띄운것이다.

동아일보는 군정이 들어서면서 강제 문을 닫게된 동아방송의 옛모습을 새로 개국한 TV방송을 통해 그맛과 정취 그리고 국민들이 알아야할 모든것을, 중앙일보 또한 같은 이치로 옛 TBC TV 방송국의 문을 닫아야만 했던 그아픔을 씻고, 5/18당시 광주사건의 진상을 카메라에 담고서도 방송을 하지 못한채 방송국 문을 닫은지 30여년이 지난 오늘, 창고속에 처박아 두었던, 참옥상을 담은 카메라의 필름을 이제는 개국의 첫작품으로 국민들에게 보여준다고 했다. 조선일보 또한 좌파와 진보에 맞서 왜 보수와 정치적 방향이 필요한것인가를 국민들에게 보여주기위해, 첫번째 대담자로 박근혜 한나라당의원을 선정, 대담 내용을 국민들에게 전파를 보냈다. 매일경제신문도 기대가 많이 된다.

정부에서 종편방송의 개국을 허가한 그진짜 내막은 무엇일까? 이들의 방송국 개국을 같은 배를 타고 간다고 할수 있는 다른 언론사들사들은 고운 시선으로 보는것 같지만은 아닌것을 보기도 했다. 내용은 차치하고, 첫개국의 전파를 내보내면서 방송화면이 끊어지고, Distortion 된것 부터가 준비가 없이 개국을 한 저의가 뭔가를 따지듯 하는듯한 기사를 쏟아냈었다. 조선일보사의 TV개국에 얼굴을 보였던 김연아도 뒷맛이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불만의 뜻을 나타냈다고 한다. 원래 대담을 섭외 할때의 근본뜻과 달리 자기를 이용한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래전 KBS,MBC나 SBS방송들이 개국할때는 오늘처럼 비난의 글이나 방송은 전연 없었고, 모든 국민들이 덩달아 기분이 들떠 있어, 축하해주고 시선을 TV화면에 고정 시키다 시피 했었던것으로 기억하고 있는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때는 지금처럼 보수니 진보니 그런 파당도 없었고, 오직 순수한 시청자로서의 맑은 눈동자들만 있었다.

개국한 4곳의 TV방송국의 선전을 기대해 본다. 불과 4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당시의 시대상을 거울에 비쳐 보면,지금은 조국 대한민국은 용이 된것이나 마찬가지다. 용이 되기까지의 밑바탕을, foundation을 든든하게 만들어준 당시의 위정자에게 많은 빛을 진자들은 누구일까? 배은망덕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대상자들이 누구인던간에 말이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오늘의 시대상에 나타난 잣대를 맞추어 측량할려고 한다면, 그자들은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쓴 이시대의 악마들이라고 나는 정의 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한글 창제를 하신 세종대왕을 우리는 민족의 영웅, 성군으로 추앙한다. 세종대왕을 오늘의 시대와 비교한다면, 그는 성군은 커녕 국민을 마치 자기의 물건인양, 마음데로 취급했던 독재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는 그렇게 하는게 보편타당성이 있고, 현명했었던 것이다. 배고픈 허리띠를 졸라매고, 잘사는 나라를 건설하기위해 때로는 자유를 유보했었고, 때로는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정치꾼들을 억압했던것은 당시의 시대상으로 봤을때, 잘사는 국가를 건설하기위해 다른 방법이 있을수 없었다는것을 지금 50대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 잘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속다르고 겉다르게 행동하는 위선자들... 이들의 행동을 새로 개국한 방송국들이 깊이 파헤쳐 진실을 국민들에게 알려 줄것을 기대 하기에 축복하지 않을수 없다.





앞으로의 전망을 점쳐 본다면, 색갈이 더 확연히 다르게 국민들에게, 시청자들에게 보여질것 같다.


http://news.donga.com/Culture/New/3/07/20111201/42274557/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2/01/2011120102109.html?news_top

http://live.joinsmsn.com/issue/issue.asp?is_idx=2077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112/h2011120121251786330.htm

http://news.mk.co.kr/newsRead.php?sc=30100049&cm=%BC%BC%C4%C1%20%C5%E9&year=2011&no=776099&selFlag=&relatedcode=000100105&wonNo=&sID=300

Friday, November 25, 2011

Occupy Toronto의 데모가 해결책이 될수 있나? 이것이 문제다. 11월25일, 2011






Occupy Toronto의 데모가 해결책이 될수 있나? 이것이 문제다. 11월25일, 2011

결론부터 얘기하면, 절대로 그들의 데모에서 해결책은 안나온다. 오히려 그들이 옹호한다고 하는 시민들, 즉 납세자들에게 부담만 줄뿐이다. 그들은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시간에 일을 하면 더 낳은 수입을 올릴수 있을텐데.....

수요일, 토론토 경찰은 St.James Park에 진입하여 시위꾼(Protesters)들을 해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시직원 100여명도 이에 동참하여 시위꾼들이 쳐놓은 텐트들을 철거하고, 그들의 물건들을 옮기기 시작했다고한다. 경찰의 해체 작전으로 지난 10월 15일 부터 시위꾼들이 점령하여 그들의 Base로 이용되였던 공원은 다시 제모습을 찾아, 시민들이 이용할수 있게 될것이라고 한다.

시위꾼들중의 한명인 Williams는 물러나면서 "Occupy Movement는 이곳에서 쫓겨난다고 해서 끝난게 아니다. 우리의 단결력은 매우 강하다. 지구촌의 경제적 편중현상을 개선하기위한 운동은 계속할것이다" 라고 수요일 언급했었다.

목요일에는 수백명의 시위꾼들(Protesters)은 토론토의 금융가를 행진하면서 그들의 다음행동작전을 토의 하기도 했다. 그들은 지역사회의 여러 구룹들을과 만나서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당국의 허가를 합법적으로 얻을 계획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토론토시장 Rob Ford는 경찰의 철거작업중에 시위꾼들과 경찰간에 마찰이 없이 평화적으로 진행된데 대해, 시위꾼들과 경찰에게 고마움을 표시 하면서, 앞으로 시는 절대로 시위꾼들이 시공유지를 불법점령하는것을 좌시하지 않고 즉각대응하겠다고 다짐 하기도 했다. 시위꾼들이 Queens Park에서 자리를 잡을려고하자 경찰이 즉각 투입되여 이를 저지하고 현장에서 퇴거 시켰다.

그들이 지난 40일간 불법으로 점거사용했던 St. James Park의 잔디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대신에 진흙만이 남아 있어 이를 보수하는데 시당국은 약 $25,000달러의 예산을 투입하여 잔듸를 덮게 될것이라고 한다. Occupy Toronto시위데가 이곳을 근거지로 하고 데모를 할때, 3개의 커다란 Yurt텐트를 제공해주었던, 온타리오 공무원 노조가 비용의 일부를 부담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결국 이들의 행동으로 발생한 Damage를 아까운 시민들의 세금으로 고치게 되는 셈인데, 이렇게 한다고 해서 전지구를 뒤덮고 있는 Occupy Movement가 토론토를 포함한 지구촌의 여러곳의 직업전선에서 발생하는 부의 편중현상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수 있는가?의 여부를 생각해 보아야 할것 같다.

이 Occupy Movement는 어쩌면 전세계적으로 퍼질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나 한국같은데로 옮겨지면 사회는 더욱더 혼란속에 빠지게 될것이다. 한국사람들의 성향으로 봤을때, 여기서 하는것 처럼 평화적으로 하기 보다는 적개심에 불타는듯한 원수를 향해 돌진하듯할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오타와, 몬트리얼, 그리고 뱅쿠버에서 진행중에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시민들의 호응을 얻지는 못하고있다. 그만큼 현실성이 없기 때문일것이다.

수백명의 시위꾼들은 토론토의 금융가를 목요일 행진 하면서 그들의 다음 행동 작전을 토의 하기도 했다. 그들은 지역사회의 여러구룹들과 만나서, 새로 사용하게될 장소모색을 하되 이번에는 당국의 허가를 얻을 계획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들이 40일간 불법점거사용해 왔던 St. James Park의 잔디는 흔적도 없다시피 뭉개졌으며 진흙만 남아 있어, 이를 보수하는데 시는 약 $25,000달러의 시민들이 납부한 세금을 투입해야 한다.

Occupy Toronto 데모대가 이곳을 근거지로 하고 데모를 할때, 3개의 커다란 Yurt 텐트를 이들에게 제공한적도 있던 온타리오 공무원노조가 복구비용일부를 부담하겠다고 나섰다.

Occupy Toronto의 시위는 지난10월 15일 시작됐지만, 그시초는 지난 9월 17일 미국의 뉴욕시에 있는 Wall Street에서 시작된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경제적 부의 편중, 대기업의 횡포로 약자에게 미치는 영향 그리고 거대 기업들이 Lobbysts들을 기용하여 그들의 기업정책이 정부 정책에 반영되도록 로비 할동하는것을 성토하는 것이었다.

지난 10월15일 아침 10시경 시위꾼들은 맨처음 King St.와 Bay St.부근에서 집결하여 St. JamesPark으로 평화적 시위를 하면서 이동하여 그들의 주장이 전달 되기를 바랐었다. 처음에는 1,000 -1,500명이 참석했었고, 그중에는 NDP 출신 MP Peggy Nash, 온타리오 노동연합대표 Joel Duff, 온타리오 우편노조위원장 Fred Hahn도 동참했었다. 해가 저물자 데모꾼들의 규모는 불과 수백명으로 줄어 들었고, 물론 위에 언급한 인물들도 사라졌었다.

점심시간에 캐나다우편노조원들은 시가행진을 하면서 시위군중과 만나 Bay St.초입에 있는 TD Bank로 다섯명이 진입하려 했으나 경비원들에 의해 들어가지 못하고 밀려났었다.

11월2일 언론이 이들의 점거로인한 시당국의 반응을 보도한후 인근에서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던 Patrick McMurray씨는 "데모꾼들은 불법으로 시민공원을 점령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식당을 찾는 고객들이 데모꾼들 때문에 행여나 피해를 입게 되지는 않을까?라는 염려로 발길을 뚝 끊어 생계에 막대한 지장을 주고 있다"라고 성토했었다. 이에 대해 시장 Rob Ford는 "이들의 불법점거가 평화적이지 않다고 결정되면, 공원을 점거하고 있는 시위꾼 개개인을 몰아낼 구상을 하고 있읍니다."라고 이메일까지 보냈었다.

11월9일 이들이 점령했던 공원잔디를 보수하는데 $25,000달러, 그리고 겨울이 닥치기전에 Drain시켜야 하는데, 만약에 이시설이 작동이 안되면 $40,000달러를 들여 스프링쿨러용 장비와 파이프를 보수해야 한다고 한다.

11월11일 Toronto Star의 기자가, 시민들의 불만이 초고조에 달했고 대모꾼들을 Park에서 몰아낼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대답을 해 주시라고 물었을때 "시민들의 불만은 과장된 것이며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것이며 우리의 법률가들이 이건에 대해 지금 해법을 찾고 있다"라고 응수 했었다.

11월 12일에는 CBC뉴스가 시위대일부가 이번에는 Queens Park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라고 보도 했었다.
11월 15일에는 경찰과 시조례집행인부들이 St. James Park에서 camping하고 있는 시위대들에게 철수 명령이 적힌 전단지를 배부하기 시작했었다.

11월21일에는 온타리오 최고법원의 "불법점거농성은 위법이다"라는 판결이 있은후 경찰과 시조례집행직원들은 "불법점유" 전단지를 인근의 교회 부지를 점거하고 있는 camper들에게 나누어 주었었다. 그러나 전단지 내용은 시공원과 교회의 부지에 대한 정확한 구분이 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위대는 강제해산될것에 대비하여 그들 나름데로의 저항진지를 더 굳고 만들었다.

11월 23일 결국 큰 저항없이 커다란 Yurt 텐트를 포함하여 철거는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케네디언 은행협회는 회원들에게 "최악을 대비하고, 최선을 찾는 희망을 잃지 말자"라고 하면서도, 다운타운의 은행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경비팀들을 보강하는 조치를 취했다.

TD 은행장 Ed Clark은 시위꾼들에게 해줄말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내가해주고 싶은 말은, 끝까지 밀고 나가기를 바라지만, 사람들이 말하기를 당신네들은 해결책을 갖고 있지도 않고 우리 또한 그해결책이 없다" 만약에 해결방법이 있었다면 이렇게 데모꾼들이 데모를 할필요가 있겠는가? Wall St.나 Bay St.를 점거하고있는 사람들로 부터 충분한 대답을 기대하는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할일을 할 뿐이며 이방법이 해결책으로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어떻게 대다수 사람들의 시선을 끌수 있으며, 계속적으로 압력을 가할수 있는가를 찾아내야 할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이문제에 대하여 토론하고 해결책을 찾을수 있을까?를 찾아야 한다. TD은행장 Ed. Clark씨의 연봉은, 2011년도 11월 발행된 Toronto Life잡지에 따르면, 두번째로 높은 $11,426,795.00라고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정치체재로는,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사회주의든 완전한 해결책은 없는것 같다. 해결책에 접근하는 방법은 공공시설을 불법점거하고 농성하는 그시간에 일터로 나가 열심히 일하여 한푼이라도 벌어들이는길이 사회구성원 모두를 위한 최상의 방법임을 현실적으로 받아 들여야 할것이다.

http://en.wikipedia.org/wiki/Occupy_Toronto

Monday, November 21, 2011

낙엽을 밟으면서 Stoney Creek Trail Walk. Nov.19,2011






















낙엽을 밟으면서 Stoney Creek Trail Walk. Nov.19,2011

한낯인데도 햇볕은, 시간적으로는 정오인데도, 서산에 기울어지는 햇볕처럼 비스듬히 누워 있는것 처럼 나목사이를 뚫고 들어와 나와 우리 일행의 발걸음에 맞추어 같이 Walking 한다. 수북히 쌓이 단풍나무낙엽을 밟는것도 운치가 있다라는것을 느끼기 보다는 이제 겨울을 채촉하는구나라는 신호로 가슴속에 와 닿는다. 마음을 더 무겁게 하는것은 캐다다의 긴겨울을, 완전히 발가벗은채, 똑바로 하늘을 향해 뻗은 단풍나무들이 추위에 떨고 그리고 북풍한설에 휘둘리면서 울어대는 소리를 몇십번, 아니 몇백번이나 반복해서 들어야, 새봄의 전령이 오는 소리를 듣게 될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는, 오늘의 산행길이 조금은 버거워지는 심정이다.

한달에 한번씩 걸었던 Trail Walk을, 겨울철동안에는 매주 걷기로하고 시작한 이후 오늘이 두번째이다. 생각보다는 많은 동호회원들이 참석하여 움추려 들려고 하는 마음을 떨쳐내고, 신체단련을 위한 Trail Walk을 매주 하게된데 모두가 만족해 하는 표정들임을 보면서 결단을 잘 내렸다는 생각을 했다. 연장자 되시는 회원님의 오늘의 무사한 산행일정을 염원하는 간구의 Pray를 감사해 하면서 일행은 첫발을 옮기기 시작했었다. 어깨에는 각자의 준비물과 점심이 들어있는 Back Pack들이 지워져 있고, Grey 색갈의 나목들만 뾰쪽하게 들어서 있는 Trail과 Color match라도 한듯 회원들의 옷에서 풍겨져 나오는 자연의 색갈이 잘 어울리는것 같다.

평상시보다 조금 늦게 항상 모이는 Humber bay Park West를 떠나 QEW를 약 50분을 달려 이곳 Battlefield Garden 주차장에 도착했었다. Trail Walk도 좋지만, 토요일 아침의 한가한 QEW를 달리면서 왼쪽으로 Lake Ontario의 바다같이 넓은 푸른 물결을 보는것도, 오른쪽으로는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산등성이의 숲과 그밑에 어우러져 있는 건축물들을 보는것도 운치를 더해주었었다. 멀리 호수위에는 큰 화물선이 마치 조그만 종이배처럼 아스라히 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배가 지나갈 5대호수의 Route를 생각해 보기도했었다.

계절에 걸맞지 않게 넓은 공원의 잔듸는 약간의 갈색을 포함한 초록색의 싱싱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공원끝자락에는 나이아가라쪽에서 부터 오기 시작하여 북쪽의 Sarnia를 거쳐 다시 더 북서쪽을 통해 Vancouver로 연결된 Canadian Pacific 철도가 우리를 반기는것 처럼 쭉 뻗어있는 철길을 넘어 발길을 다시 오늘 걷게될 Trail을 따라 숲속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우리는 나이아가라쪽을 향해 나있는 Trail을 걷기 시작했다. 산등성이의 중간쯤에 나 있는 Trail을 걷는 신발 밑으로는 수북히 쌓인 단풍낙엽들이 괴로운듯 한발짝 뗄때마다 바스락 소리를 끝없이 질러댄다. 시간이 흐르고 겨울이 깊어지면서 이러한 바스락 거리는 신음 소리도 하얗게 싸인 눈속으로 파묻히고, 대신에 그위에 발걸음을 내디딜때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힐 것이다.

가파르지 않게 이어지는 숲속의 Trail Walk을 나는 너무나 좋아한다. 약 3주전 고국방문시 광주광역시에 있는 무등산 등반을 Lunar와 함께 했었다. 고국에서의 등반은 시작점부터 산정상까지 가파른 계곡속의 길을 끊임없이 발걸음을 언덕을 향해 내밀어야 했다. 무릎의 관절이 무척 힘들어 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등반은 계곡사이를 때로는 약간씩 오르락 내리락할때도 있으나 대부분 평평한 숲속을 걷기에 무릎의 관절에 큰 부담없이 오랫동안 걸을수 있어, 나와는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으로 걷기를 좋아하고 사랑하기에 몇십년을 계속해왔고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다. 여름에는 강한 햇볕을 울창한 숲이 가려주어 땀을 식혀주고, 겨울철에는 발가벗은 나목들은 자기들도 추울텐데, 이를 개의치않고 앞장서서 세찬 북풍을 막아주어 우리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그맛에 Trail Walk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앞과 끝이 보이지도 않는 긴 철도화물열차가 우리일행이 걷는 방향과 반대로 북쪽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우리가 걷고 있는 Trail에 있는 나목 사이로 지나친다. 가축도 실려 있을테고, 곡물도 실려 있고, 또 광석을 비롯한 온갖 필요한 것들이 실려가고 있을 것이다. 덜커덩 덜커덩 마치 국악장단이라도 맞추듯한 소리가 끝없이 이어진다. 회원들의 눈길이 쏠린다. 잠시 멈추어서서 이마의 땀도 닥아 내면서, 어느 회원은 손가락을 짚어 가면서 숫자를 세는것 같은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대충 나도 헤아려 보았는데 150량 이상은 되는것 같다. 땅이 넓은 대륙이라서 기차도 이렇게 길게 연결시켜 다니는가 보다. 그래서 우리 회원들의 마음도 호수와 같이 넓은가 보다. 서로 이해하고 도와주고, 밀어주고 하는 행동들이 말이다.

소비한 에너지를 보충하는 점심은 꿀맛이다. 같이 둘러앉아 각자 준비해온 음식을 나누어먹는 이맛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이해못할, 우리회원들만이 느끼고 자랑스러워하는 이시간 때문에 Trail Walk에 참석한다고 하는 어느 회원의 말은 그의미가 매우 깊은것 같았다. 사랑과 Fellowship을 생각이 아닌 행동으로 체험하는 이시간같은 기회를 어디서 찾을수 있을까? 나는 Trail Walk이 아니고는 별로 없을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회원들을 더 깊이 알게되고, 나를 포함한 회원들 또한 나와 회원들간에 더 깊이 알고.....살아가는 얘기들을 서로 나누면서, 장점은 더 빛나게 북돋아주고, 약한점은 서로가 이해하므로써 우의와 신뢰는 더 깊이 쌓여 가고 있음을 오랫동안 보아왔기에 앞으로도 나는 아니 단촐한 우리회원들은 계속 Trail Walk을 걸으면서 사랑할것이다. 오늘 산행은 또다른 삶의 의미를 담뿍 심어주었다.

집으로 향하는 차량들을 잠깐 세우고, 맥도날드에 들려 구수한 커피향을 뿜어내는 커피한모금을 목에 넘기면서, 못다한 얘기들을 나누는 운치는 피곤함을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게하는 마력(?)을 갖고 있는것 같다. 감사.

http://www.youtube.com/watch?v=MozVf-P2a2A

http://www.youtube.com/watch?v=amSTrD5AdQ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