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December 30, 2011
세시봉친구들이 회한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 12월 28일, 2011
세시봉친구들이 회한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 12월 28일, 2011
아주 오래오래전에 들었던 멜로디가 귓속으로 들어왔다. 소리의 진원지인 TV의 화면속으로 눈길을 돌리고.... 같이 입을 벌려 흥얼거렸다. 그때가, 그시대상이, 주마등처럼 가슴깊은곳으로 부터 멜로디와 함께 다시 세상밖으로 나오게 하는 마력을 그들에 입에서 토해내고 있었다. 토해낸 그배설물은 더러움으로 기피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도 빠짐없이 나의 머리속으로 들어와 기억을,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뇌의 중심부를 강타했다.
"넓은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개우른 울음을 우는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으랴..우...우...
질화로 재가 싫어지면 빈밭에 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게 자란 내마음 파란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러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달리는 어린누나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지고 이삭줍던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우....우....
하늘에는 성근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돌아, 도란도란 거리는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지난해였던가? 아니면 금년도 여름철이였던가? 40여년전에 세시봉에서 처음만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서, 평생을 가수의 길로 들어서 당시의 시대상으로 봐서는 파격적인 Pop Song을 불렀던, 같은 연배의 노래쟁이들이 TV에서 다시만나 그때 불렀던 노래들을 그음성 그대로, 몸은 많이 변했지만, 사랑방에서 얘기하듯, 불러대는 노래쑈를, 인터넷을 통해 이곳 태평양 건너 안방에서 본기억이 있었다.
그때 그들의 쑈를 본 당대의 같은 사람들의 요청으로, 다시 팀을 꾸려 전국순회 공연을 25회 이상하고, 오늘 내가 본 그들의 쑈는 지난 7월말에 태평양을 건너 LA까지 찾아와, 한많고 고달픈 이민자의 삶을 살아가는 동시대 많은 교민들이 회한의 눈물을 짜내게 하는, 이를 본 내 마음도 그속으로 빨려 들어가 헤여 나오지를 못하고 쑈가 끝난후에야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게하는, Time Machine을 타고, 그때의 참담하고 배고프고, 아직 6/25동족 상잔의 흔적이 도시나 시골농촌의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었던, 그래서 앞으로의 희망도 크게 열광적이지 않았던 서울시내의 풍경속으로, 그리고 고향땅의 그때로 달려갔었다.
그때 나는 시골에서 겨우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는 갈엄두를 못내고, 대신 자원하여 군대를 가서, 강원도 중부전선의 최전방 부대에서 근무를 마치고 시골고향으로 돌아와 보이지 않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속에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지금은 돌아가신 장형님의 비좁은 전세단간방에서, 끼워 잠을 자곤 하면서, 국가에서 국비로 가르치는 학교에 다니면서, 서울이라는 눈감으면 코를 베어간다는, 한시도 방심할수 없는 사회환경속에서 사회생활과 학교생활을 했었다. 어쩌다 래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서, 그들에 대한 상상은 그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지곤 했었다. 외국의 노래를 원어로 불러대는 그들을 나는 그들이 영어를 우리말 하듯이 잘 하는것으로 상상하면서 부러워 했었고, 나를 그속에 대입해 보면서 초라하고, 조그맣다는것을 가슴아파 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밤이 되면 잠자리가 비좁아 장형님과 조카들이 고생하고 있는 그속에 나까지 끼어 들어야 했으니.....
'이미자'를 비롯한, 요즘은 국민가수로 불리는 당대의 유명한 토로트가수들이 부르는 노래와는 Theme자체가 다르게, 그래서 당대의 젊은이들중에서도, 소위 말해서 앞서가는 족들이 즐겨 부르는, 그래서 그들속에 끼어 들어 볼려는 욕심에, 귀로 듣기에는 아름다워도 실제로 따라 부르기에는 쉽지만은 않았던 멜로디가 어쩌다 담배연기 자욱한 지하다방에 앉아 있을때 디스크 쟈기가 걸어놓은 LP판에서 흘러 나올때는 괜히 아는척 흥얼거려 보기도 했었다. 그때의 다방 커피는 담배 꽁초를 끓여 만들었다는 풍설이 많이 떠돌던 때이기도 했었다. 커피한장 주문하면서 달걀노른자위를 커피속에 첨가할때는 뽀루뚱했던 다방레지의 얼굴빛이 달라지던 때였었다.
그들이 불어대는 Pop Song들은 보통 트로트 노래와는 완전히 다르게 당시의 시대를 저항하는 그래서 서슬퍼런 군사정권 당국의 감시의 대상이 되는 늬앙스를 항상 달고 다녔었다. '아침이슬' 같은 노래는 금지를 당해 지하속으로 숨어 들어서만이 들어야 하는 그때가, 긴머리를 주장하고 있었던 젊은이들이 단속 경찰들과 거리에서 쫓고 쫓기는 실랑이를 벌이는, 젊은이들만이 발산할수 있는 욕구충족과 불만에서 오는 비틀림 현상이 사회저변에 흐르고 있을 때였었다. 지금은 그때 당시의 우리나라 형편과 처해진 모든 여건상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늘날 조국이, 특히 젊은이들이 누리는 풍요로움을 이룰수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이 확실하게 마음속에 정착되여 있기에, 철부지 젊었을때의 객기였었던점도 많이 작용했었다는것을 이해가 되고, 워커발 문화속에서 갇혀 살아가는 환경에서 오는 반발심리가 맞물렸기에 더 애창되고 가슴깊이 자리매김을 했었던것같다.
짧았던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왜 우리는 이렇게 워카발 군바리들의 시달림속에서 살아가야 하는가의 깊은 뜻을 이해 할려고 했다기 보다는, 사회적 시류가 그런쪽으로 흘러가니까 휩쓸려 무조건 반대하고 저항하고 데모도 했었던것이다. 70년도 초반에 공무로 일본과 독일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국가공무원신분인데도, 외국에 나갈때는 국무총리의 승락이 떨어져야만 가능했던 그시대에, 이들이 부른 노래들은 확실히 시대와 정권에 반항하는 노래들로 비쳐지기에 충분했었다. 그만큼 국가는 살기가 어려웠고, 한푼의 외화라도 절약해 국가 기간 산업건설에 보태볼려고 하던때였었다. 일본과 독일에서 국가 기간 산업에 필요한 기술을 배우고 돌아온 그시점부터는, 절대로 군바리 정권을 비난하거나 하는 대신에 스스로 깨달음이 있었기에, 당국의 장발단속과 여러가지로 국민들이 살아가는데 일부 제약이 뒤따르는 정책을 충분히 이해하고, 이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보릿고개를 없애기란 영원한 숙제로 남을 것이다라는 깨달음을 마음속에 간직했었다.
바깥세상을 경험한 나는 그때 통기타 가수들이 부르는 소리를 당국에서 해석하는 방향에서가 아니고, 젊은이들만이 발산할수 있는, 이해할수 있는 무궁한 가능성을 내포한 그런 건전한 노래로 나는 따라 부르고, 그속에서 어울렸었다. 속담에 '자라보고 놀란 사람,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라는 비유를 당시의 사회상과 많이 비유 했었다. 그런속에서 살면서, 밖의 세상을 보고온 나는 더이상 좁은 한반도에서 안주 하면서 살기에는 조국이 좁아 보였고, 뭔가 불편하여 이민짐을 싸서 김포공항 검색대를 거쳐 이곳 토론토까지 굴러와 살아 왔는데 어느새 나는 은퇴한 노인이 되여 그들이 부르는 그때에 불렀던 똑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오늘은 회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직 이십대를 지나 삽십대를 넘길무렵, 이민짐을 풀은 이후로 지난간 세월을 지금 잠시 되돌아 본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공무원 신분으로 외국에 나갔을때와, 이민자로서의 외국에 와서 짐을 풀었을때의 신분은 완전히 달랐다. 언어와 문화가 전연 통하지 않았고, 머리당 $200.00만이 허용된 당시에 우리가 들고온 돈은 합계 $600.00이 전부요, 공항에서 일부 친지들이 주머니에 넣어준 몇푼이 전부인 나의 가족 신세는, 괜히 이민짐을 싼것은 아닐까?라는 후회를 갖게 하기에 충분한 형편으로 전락하고 말았었다. 직업을 찾을려고 resume를 들고 헤매였으나, 그때마다 "You don't have any Canadian experiences, so it's not for you" 라는 대답뿐으로 고민하고 헤매이면서도 우선 먹고 살아야 하니, 임시로 Landscaping을 하는곳에서 처음 대하는 Lawn mower로 궁전처럼 큰 저택의 가파른 언덕에서 풀깍다가 넘어졌던일, 배로 부쳤던 이민짐이 오지 않아, 한푼도 새로운판에 임시로 구입한 조금만 냄비 하나를 이용하여 밥도하고 반찬도 만들어 나의 도시락을 만들어 주느라 고생했던, 그때는 젊었던 아내의 모습, 몇년 먼저와 Down pay조금하고 처음 집을 구입한 친지가 그집을 담보해서 은행으로부터 대출받아, 당시로서는 거금인 돈을 빌려주어 생판 처음 사업이라는것을 했는데, 뜻데로 안되여 전부 털어먹고, 우리 때문에 친지의 집이 날아가 버리면? 하는 생각으로 세상을 원망했었던 기억, 학교때 잠시 과외활동에서 배웠던 화초에 대한것 외에는 Plant라고는 전연 생소했던 아내가 소매를 걷어 부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꽃가게를 시작하면서, 언어소통의 어려움에서 겪었던 일, 팔았던 꽃나무가 금방 죽었다고 들고와 Refund해달라고 하던 Jewish와, 우리의 정당함을 주장하기위해 재판소에 까지 갔었던 기억... 여름방학이면 으례히 부모들과 넓은 북미 대륙 이곳저곳에 여행가서 즐겼던 얘기들을 나눌때, 우리집 아이는 그대열에 끼지 못해 가슴아파 했던일, 그외 손으로 다 꼽을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괴롭혔던 신체적 정신적으로 어려웠던 기억들.... 경제적 기반을 세워야, 그리고 아이들 잘 가르쳐야 이민의 목적이 이루어진다는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이 현장에서 일년 365일을 하루같이 뛰어온 그긴세월앞에, 우리는 벌써 머리가 빠지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변해, 지금 이들이 부르는 그때의 노래소리에 뭐가 서럽고 그리워서인지 잘 살아오지 못한, 한번밖에 기회가 없는 젊은날들의 삶을 뒤돌아 보면서 회한의 눈물을 감추고 있다.
LA공연은 Shrine Auditorium에서 열렸었다고 한다. 이공연을 보기위해 멀리 Ohio주에서, Texas주에서, Arizona주에서 비행기 타고 날아온 같은 연배의 여인들이 모처럼만의 나들이를 하는 장면과 인터뷰도 보였다. 입장하기위해 길게 늘어선, 나와 같은 처지의 어렵고 서러운 삶을 살아가는 교포들의 마음을 나는 금방 읽을수 있었다. 겪어본자만이 이해할수 있는 교포들의 삶의 정신적 공허함을 나는 공유하고 있다. 아침새벽부터 저녁 별이 보일때까지 삶의 터전에서 일만 하면서 지내온 세월의 기억을, 오늘 당대를 같이 살아온 통기타 가수들의 멜로디속에서 되찾고, 그들 또한 회한의 세월에 젖은 눈물을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쏟아낼 것이다. 고국에서 살았다고 한들 어찌 살아온 세월에 대한 회한이 없을까마는, 우리들 인간들은 항상 울타리밖의 세상을 더 그리워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그냥 고국에서 살았더라면..... 하는 미련이 가슴에 있는것이다.
옆에서 같이 TV를 보면서 돋보기를 끼고 옷손질을 하고 있는 아내에게 흐르는 눈물이 얼굴로 흘러 내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기위해 딴청을 부리는 내자신이 외소하게 느껴진다. 늙어서는 여자가 더 강하다는 말이 맞는것 같다. 마음고생을 나보다 훨씬 더 많이 했을 그녀는 태연한척 한뜸한뜸 바늘을 단추와 천속으로 옮겨가면서 그들이 부르는 멜로디에 귀를 대고 있는것으로만 보인다. '하얀 손수건' 멜로디가 지금 흘러 나온다. 통기타 소리와 함께.....
http://www.joovideo.com/ViewMedia.aspx?Num=736&ep=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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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omments:
정말 멋진 노래들이죠?
랩도 그렇고... 아이돌인지 똘아이 인지... 그들의 노래는 한곡도 끝까지 들어본 적이 없답니다.
추억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깊이 마음속에 새겨지는 것 같습니다.
참 먼길을 오셨습니다...
더욱 건강하시고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시는 새해가 되시길 빕니다!
Dreamer님,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 보면....
그들의 노래소리를 들어보면서, 고국의, 고향땅을 더듬어 보는, 어쩔수 없는 속인의 인생살이를 빗대어 보았나 봅니다. 건강 하십시요. 감사.
Oldman님, 오랫만입니다. 떠돌아 다니다 보니, 또 남은 삶동안 될수만 있으면 많이 보고 체험 할려고 발버둥치다 보니, 격조했던것 같네요. 원주민 이민자의 공허한 마음은 채워지지가 않네요. 가내 두루 평안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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