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y 18, 2009
전봉준,동학농민혁명 발상지 방문.
지금은 은퇴한 조카 부부가 부안누나댁에 가는길에, 들릴곳이 있다고 하면서 바삐 차를 몰았다. 도착한곳은 정읍시 덕천면에 있는 '전봉준' 동학혁명 기념관이었다. 우선 밖에서 본 기념관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되고, 증축되여, 기념관으로서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것 같았다. 48년전쯤으로 기억된다. 5/16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군인들이 아직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할때, 당시 혁명군 총사령관이었던 박정희 소장이, 민족의 혼을 계승시켜야 한다는, 그래서 보리고개에 매년 이른 봄철이면 배고파 허덕이면서, 어렵게 살아가던 그때, 우리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은 '녹두장군'으로 불리던 전봉준에 대한 민족사랑과, 관의 횡포에 견디다 못해,갑오년 동학 농민 봉기를 일으킨 당시의 선구자 전봉준을 기념하기위해 농민봉기를 최초로 시작한 그곳 '황토재'고개에 전봉준 전적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하기위해, 조그마한 체구에 군복을 입고 머리에는 별2개를 단 모자를 쓰고, 조그만 지휘봉을 오른손에 잡고,검정 Sun Glasses를 끼고, 헬기에서 내리던, 돌아가신 박통을,코흘리개였던 나를 비롯한 동네 친구들과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당시 어린 우리에게는 먼길이었던 현장에 일찍 도착하여 어른들 틈에 끼여 구경했던 장면을 연상케 했다. 조카의 말에 의하면,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각지방별로 유적지가 될만한 곳은 많이 개발되고 있는데, 이곳 전봉준 혁명 기념관도 그런 차원에서 불과 몇년전에 국고를 들여 오늘날의 규모로 확장,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과 이웃 주민들에게 공개 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전시관안으로 들어서자, 첫눈에 들어오는게, 여러개의 기둥으로 된 유리관안에 수만개의 전구가 그속에 빼곡히 담겨져 있는 모습이었다. 당시 동학혁명군에 가담했던, 수십만의 선한 농민들을 상징하는 뜻이 그곳에 있단다. 다른방에는, 눈에 익은 '장태'가 보였다. 어렷을때, 냄새가 진동하는 변소간 겸, 불때고 남은 재를 함께 보관한던 별채의 조그만 토담집안의 천정에 매달아 놓고, 밤이 되면 놓아 먹이던 닭들이 그곳에 되돌아와 밤을 지내곤 했던, 대나무로 만든 길고 둥그런 모양의 닭집으로, 그장태를 보면서 항상 배고파서 힘들어 했던 어린시절을 되돌아 보게 해준다. 동학농민군들은 이장태를 방패물로 이용하여 관군과 싸워 승리하곤 했다한다. 설명문을 읽어 보니, 대나무로 만들었기에 화살이나 총알이 장태에 맞으면, 꽤뚫지를 못하고 빗나가곤 했다는 것이다. 당시 농민들의 지혜를 엿볼수 있는 한장면을 충분히 보여 주는 부분이었다.
황토현은 당시,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견디다 못한 인근의 농민들이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봉기(오늘날에는 혁명으로 부름)를 일으켜, 관군의 학정에 대항하여 싸워 크게 전승을 올렸던 전적지로서, 돌아가신 박통이, 당시 허허벌판이던 그곳에 전적비를 세워 후세에 전봉준 녹두 장군의 나라와 농민사랑 사상을 되새기게 한 것이다. 또다른방에는 당시 전봉준 장군이 한반도를 점령하기 시작한 일본군에 붙잡혀 심문에 응하는 모습이 생동감있게 재현되고 있었다. 전시관안의 어디에도 전적비를 맨처음 세운, 장본인 박통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실수해서 빠뜨리고 못본것인지는 몰라도...입구 오른쪽의 앞벽면에는 커다란 사진이 있었는데, 이고장 출신으로 국회의장을 했던 김모씨가 전시관개관때 참석하여 찍은 모습이었다. 역사는 그내용이 애국적이던, 역적이던 사실을 그대로 객관적으로 묘사하여 후세에 전해 주어야 할 의무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는데, 역사적 의미를 강조한다면, 당연히 박통에 대한 기록과 전적비 개막식때의 박통 모습이 전시 됐어야 했다. 지난번 고국방문때에, 중앙청건물을 헐고, 그곳에 경복궁을 복원하여, 같이 갔던 두아이들과, 관람했던 기억이 떠 올랐다. 복원된 각 궁과 그에 대한 연혁을 인물명과 연대를 들어 자세히 설명해논것을 본기억중에, 출구쪽에 있던 광화문에 대한 연혁을 본 기억이 있다. 광화문 복원도 박통이 혁명후 현재의 자리에 복원하였는데, 옆에 세워진 설명판에는 정확히 연대 까지도 기록되여 있었지만, 누가 재건 했다는 인명은 빠져 있었다. 그때가 아마도 김영삼, 아니면 김대중정권때 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아무리 박통이 그들의 정적이었었다 해도, 역사적 사실은 있는 그대로 기록하여 후세에 남겨야 하는 의미를 상실한것을 보고 '이래서는 역사 공부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라고 아쉬워 했던 기억이 있었었다. 그때 중학생이었던 아이가 영어로된 설명문을 보고, '왜 이건물에는 복원한자의 이름이 빠졌느냐?'라고 물었을때, 그배경을 사실데로 설명해줄수 없었던 기억이 오버랩된다.
관계당국이나 관련자들의 검토가 있어야 할것으로 느꼈다. 정권의 시류에 따라 역사묘사가 바뀐다면, 편리한데로 기록해 놓는다면..... 그결과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다행히도 나는 같은 세대에 사람이었고, 현장에서 보았기에 이러한 오류(?)를 지적 할수 있지만.....
어렸을때, 구전으로 전해 오던 '녹두장군'에 대한 기록을 이렇게 훌륭하게 전시관을 만들어 국민계몽과 역사적 기록을 실어 전시하고, 가꾸는 당국과 애향시민들의 노고를 치하해 주고 싶다. 이다음에, 지금은 장성하여 각자 제갈길을 걷고 있는 두아이들과 다시한번 이곳을 방문하여같이 전봉준 장군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는 기회가 주어질수 있기를 바래면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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