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y 09, 2009
조상님들과 혈육들과의 오랫만의 재회가 주는 의미
조상님이란 무엇인가? 나와는 어떤 인연이 있기에, 보이지 않는 그분들에 대한 자손들의 정성과 마음이 시공을 초월하여 두려운 대상이고, 공경의 대상이고, 삶의 지표 역활을 해 주시는걸까? 어려서는 추석성묘를, 지금은 조상님들 대열에 서 계시는 아버지를 따라 선산에 모셔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산소를 찾아, 하곤 했었다. 고향 시골의 조그만 야산에 모셔진, 윗대 부터의 할아버지에 절을 하고..... 그리고는 마냥 좋아 했었다. 그분들에 대한 생각은, 아버지나 훨씬 연장자이신 형님들께서 하시는것과는 어쩌면 정반대의, 배고프고 어려웠던 그시절에, 조상님들로 인해, 배(Stomach)가 오랫만에 화려한 음식물로 가득 채워져, 축복(?)받는, 그이상의 의미는 많치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번 방문에서는 서열에 의한 조상님들을 찾아 뵙는것은 없었고, '납골표'묘라는 곳에 모셔서 제사도, 성묘도 일년에 한두번 정도 방문하여 예를 드리는, 조상님들을 모시는 풍습이 완전히 다른 문화를 접했다. 대리석을 곱게 깍아 석축을 쌓아 집을 만들고, 각 봉분을 파헤져 탈골하고 남은 부분을 화장하여 남은 재(Ash)를 모아, 조그만 항아리에 모셔, 그집속의 만들어 놓은 선반에 서열대로 모셔 놓고, 한식이나, 추석때 온 후손들이 모여 합동 제사를 지내는 풍습으로 변한것이다. 이번 한식때의 합동 제사때는 시간이 맞지 않아 같이 모여 제사지낸 후손들과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막내 동생의 안내로 조촐한 방문을 하고, 조상님들께 두번의 절을 하는 예를 갖추었었다. 납골표옆에는 다른 비석들이 있었다. 조상님들이 생전에 활동하셨던 내역을 비석에 새겨, 후손들이 읽게 하기위함인것으로 이해 되였다. 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우리 가족들은 한번도 합동제사에 참석해 보지 못했지만, 앞으로도 그런 기회는 없을것으로 생각되였다. 예를 갖추면서, 세상살이를 하는 조건이 다른 후손들과 함께 할수없음을 용서해 주십시요라고 마음속에서 빌기도 했었다. 현대를 바삐 살아가는 각 씨족들의 자손들의 생활상을 눈여겨 본 어느 사업가의 아이디어(?)로 나라 전체에 수천년 동안 내려오던 조상모시기 풍습이, 불과 몇십년 사이에 바뀌어 버린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지금도 맴돌고 있다. 납골묘를 만드는데 수천만의 비용이 들어 간다고 들었다. 돈을 더많이 들이면 더좋은 납골묘가 돼고, 적게 들이면 덜좋게 보이는 납골묘가 돼고, 그것도 할수 없는 후손들이라면 아예 엄두도 못내고, 옛날 봉분그대로 존치돼고 있다고 들었다. 유교적 사상이 아직도 내면에 깊이 흐르고 있는 한국사람들의 정서로 봐서는, 빛을 내서라도, 남들이 하는 납골묘를 만들어 그속에 조상님들을 모시는 대열에 끼고져 온갖 노력을 다하는, 그렇게 해서, 현재를 살아가는 후손들의 '세'과시를 나타내는 지름길이 되기도 하는것으로 내눈에는 비쳐졌었다.
나의 조상님을 모시는 납골표는 규모가 상당히 크게 보였다. 위로는 선대의 조상님부터 아래로는 부모님, 그리고 장형님도 그곳에 모셔져 있었다. 불과 몇년전에 만들었다고 들었다. 마치 조금만 공원안의 석탑같은 분위기였다. 그옆으로 아래로 눈을 돌려보니, 같은 한조상피를 이어받았지만, 계파가 다른 혈족들의 후손들이 우리계파와 같은 심정으로 만들어 모시는 납골표들이 여러개 보였다. 이번 방문에서 친지들과 고속도로를 타고 전국을 다녀보면서, 많은 납골묘들을 보았다. 조상님들을 모시는 풍습이 이렇게 천편일률적으로 불과 몇년만에 바뀐것은 우리 한국사람들의, 옆집을 깊이 의식하는 풍토때문이기도 할것이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마음 아프게 이번 방문에서 많이 느꼈다. 위로 작은 어머님과 사촌 형제분들, 누님들과 형님들이 계시고, 아래로는 동생들이 있지만, 항상 어리고 철부지로만 보여졌던 동생들 마져도 이미 생활전선에서 은퇴하여, 살아온 시간보다 더 짧게 남은 생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면서.....우리 형제 자매들의 시대도 서서히 무대뒤로 물러서고 있음을 보면서 마음이 안쓰럽기만 했다. 94세의 작은 어머님은 아직도 기억력과 활동은 여전하시나, 몸은 너무나 다르게 작아 지셨음을 보았다. 일찍 작은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어렵게 자식들을 키워 오면서 살아온 삶이기에 작아지신 몸을 보면서, 자기 자신의 존재는 아예 생각지도 못하면서 살아온 옛날 여인네들의 한많은 생을 보는것 같았다. 큰 매부도 몇개월전에 하직하셔서, 편찮은 큰누나 혼자서 아파트를 지키고 계시는게 마음 아팠고, 둘째매형 또한 몇년전에 먼저 가셔서, 둘째 누이가 큰 집에서 다행히도, 자영업을 하고있는 누나의 맏아들 부부와 같이 생활 하고 계셔서 보기 좋았지만, 노인의 모습은 숨길수 없어 보였고, 둘째 형수님도 팔순을 훨씬 넘겨, 형님과 함께 살으셨던 아담한 아파트에서 혼자 생활하고 계셨고, 그밑으로 전주형님 내외분도 오래전부터 은퇴 생활을 하시면서, 큰 아파트에 두분만 조용히 황혼의 생활을 즐기시는것 같았다. 수색형님은 아직도, 어려운 황혼의 삶을 혼자서 버티고 계셨다. 아래 여동생 부부도 은퇴생활을 강변에 있는 아파트에서, 회갑을 눈앞에 둔 막내부부도 은퇴하고, 지금은 낯시간을 소화해 내기위해, 어느 조그만 토종비료생산업체에서 판매사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것마져도 당장 아니면 몇년후에는 손을 떼야 할것이다. 우리 형제 자매들의 후손들도 무척 많았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 못하는 조카와 손자들이 많았다. 내자신이 그렇게 변했다니..... 항상 책보를 허리에 차고, 추운 겨울이면, 마른 소똥에 불을 부쳐 얼은 손가락을 녹이면서 들길, 산길을 거쳐 국민 학교에 다녔던 기억들이 엊그제 같은데.....세상이 변하여 이제는 손자 손녀들이 그또래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생활 방법은 완전히 다른 전자 게임기 시대를 바쁘게 헤쳐가고 있는 모습들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서, 어린그들에게서는, 우리어렸을때의 인간 냄새가 덜 풍기는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만의 착각일까? 귀마개를 하고, 소똥에 불을 부쳐 고사리 손을 녹이면서 학교길을 재촉하는 대신에, 따뜻한 자동차안에서 게임기를 돌리고, 신발이 닿는다고 뛰지 말라는 아버님의 소리치는 모습이 눈에 선한데, 학교가 끝난후 손자 손녀들은 체력단련은 뒷전이고 과외 하러 다니기에 바쁜 시간을 보내는 후손들.....이것이 문명의 발달에서 온 수확이라고 하기에는 마음 한구석에서 용납을 못한다고 신호를 보내는것 같다. 게임기에 매달리고, 과외공부에 짖눌려 있는, 커가는 후손들의 눈으로 나를 볼때는, 늙은 할아버지의 시대착오적인, 현대인의 삶을 이해 못하는것쯤으로 치부 되겠지? 그래도 할말은 없다. 왜냐면, 내 자신은 이미 무대에서 내려선 아무런 영향력 없는 왕년의 거창한(?) 사나이 일뿐이나까. 그래서 역사는 오늘도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는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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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
very good blog, congratulations
regard from Reus Catalonia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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