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October 09, 2010

이번 가을에 추수의 맛을 철늦게 느껴 본다.

















요즘은 해가 짧아져서, 골프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Lunar는 저녁준비에, 나는 바로 샤워실로 들어갔다 나오면 컴컴 해질정도로 낯길이가 줄어 들었음을 실감한다.
며칠후면 여름내내 생활해왔던 카테지의 문을 잠그고, 짐을 다시 꾸려서 성냥갑 같은 토론토의 Condo로 돌아가야 한다. 골프장이 금년도 시즌을 곧 마감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밤 낯의 기온차가 심해,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샤워를 하고 나오는것을 기다리기라도 한것처럼, 부엌에서 저녁을 만들고 있던 Lunar가 " 내일 아침에는, 며칠전 사과를 따서 정리한것 처럼, 들깨도 거둬 드리고
고추도 따고, 그리고 줄기는 뽑아내서 잎파리를 따서 모아주세요. 들깨도 거두어 들이세요 까먹지 말고요"
"네 기억 하리다. 그런데 들깨는 참새떼가 먼저 수확을 많이 해 간것 같던데...."
"그래서 서둘자는 거야 알았어? 여보"

요며칠사이에 가을비가 계속 내리더니, 조석으로는 쌀쌀함을, 내팽개쳐 두었던 잠바를 꺼내 입으면서 많이 느낀다. 마음도 같이 급해 지는것 같다.
카테지의 넓은 뒷뜰은 온통 잘 가꾸지도 못한 잔듸밭인데, 그한곳에 매년 고추, 들깨 그리고 콩도 심어오곤 했었으나, 실패의 연속이었었다. 왜냐면은 정성드려 가꾸지도 못한 탓도 있지만, 땅이 온통 모래바닥이라서 물을 주어도 금방 말라 버려 작물이 살아남기에는 기적을 믿어야 할 정도로 척박한 땅이기 때문이다.
금년에도 카테지 생활을 시작하면서, Vegetable Garden에 가서 Top Soil을 서너백 사다가 매년 심었던 한구퉁이의 터에 Top Soil을 퍼붓고, 그다음에 고추모종과, 토론토에서 올때 친지로 부터 얻어온 들깨 모종을 조금씩 심었었다. 커다란 플라스틱 물통을 준비하여 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수물을 받아 두고, 그것도 모자랄때는 수도물을 연결하여, 거의 매일, 골프장으로 가지전에, 그리고 골프후에 집에 도착하면 만사 제치고 먼저 물을 주곤 했었다. 정성드린 효과가 있어서 였을까? 살아남을수 있을까? 라고 의심스러웠던 들깨 모종과 고추모종이 재모습을 보여 주면서 제법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것을 보는 재미가 전과는 다르게 애착이 더해 갔었다. 필요없는데도 극성스럽게 같이 어울려 자라는 잡풀들을 뽑아주는만큼, 들깨와 고추가 잘 자라는것을 보는 재미를 Lunar가 더 느끼는것 같았었다. 토론토에 볼일이 있어서 며칠씩 카테지를 비워둘때는 옆집의 barbara 부부에게 Watering을 부탁까지 하곤 했었다. 젊어서는 손을 흙에 묻히는것을 많이도 꺼려 했었는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그런 생각이 바뀌고, 이제는 흙을 손에 묻힐때마다, '네가 나를 먹여 살리는 원천임을 늦게 깨달아 미안하다' 라고 속으로 되뇌이면서 Spade를 들곤 했었다.

다섯그루에 열려 있는 고추가 빨갛게 주렁주렁 탐스럽게 매달려 있고, 크기도 모양이 달라서 그렇지 Tennis Ball 이상으로 크다. 약 40개는 족히 되는것 같다. 탐스럽게 잘 자란 고추를 하나씩 딸때는 마음이 부자가 되는 기분을 느꼈다. 보통때는 Super Market에서 아무렇치도 않게 빨갛게 잘익고, 잘생긴것을 골라서 사곤 했었는데, 지금은 잘생기고 못생기고를 골라 낼 겨를도 없이, 여름내내 물주고 가꾸어온 고추나무에서 열린 빨간고추를 내손으로 거두어 들인다는데 의미가 더 크다.
이제 들깨줄기를 부엌칼로 베어, 깨알이 떨어지지 않게 정성드려, 큰 투명 Garbage백에 하나씩 거꾸로 세워 집어 넣는다. 들깨 특유의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아까 고추를 딸때는 전연 냄새를 느끼지 못했었는데..... 꾸역꾸역 눌러서 집어 넣으니 꽉 찬다. 어떤줄기는 아직 여물지 않은것도 있었으나, 참새떼들에게 뺏았기지(?)않을려는 욕심에서 더 기다리지 못하고 일찍 추수하는 것이다. 갑자기 개구리 한마리가 벌쩍 뛰어 나오더니 모아놓은 들깨줄기뭉치위에 주저 앉는다. 그도 동면을 준비 할려다가 잘려 나가는 들깨줄기를 보고 놀랐었나 보다. 양손으로 붙잡아서 옆에 있는 긴 잡풀밭속으로 모셔다(?)주었다. 지금은 하잖은 미물이라도 그생명의 존엄성을 함부로 할수없어, 그들과 조우할때는 그들의 살길을 터주기위해 나름데로 머리를 쓰곤 한다. 전에는 그냥 지나쳐 버리거나 무시했었는데....모아놓은 들깻대를 통채로 햇볕에 말렸다가, 겨울동안 보관하여, 내년봄에 되돌아와서 백속에 있는 그대로 붙들고 흔들어서 깨를 수확하게 되는 것이다.
"고추는 몇개나 땄소? 와 크다 색갈도 참 곱네. 족히 30개는 넘겠는데.... 수고 많이 했어. 여보"
"당신의 명령을 지키느라 새벽(?)부터 힘써서 거두어 온 것이야. 한 40알은 되는것 같아. 그리고 들깨는 모두 잘라서 Garbage Bag에 넣어, 밖에 햇볕 잘드는곳에
두고 왔어. 잘 마를거야, OK?. 오늘은 골프가 잘 안될거야 아침부터 힘을 너무나 써버려서 말이야."
"엄살도 되게 떠시네. 어쨋던 수고 했어요. 손씻고 와요. 아침먹게."

Lunar는 고추를 마른 수건으로 먼지를 닦아 내더니 식칼을 사용하여 절반으로 가른다. 그리고 나서 안에 있는 살과 씨를 빼서 따로 구분한다. 한조각을 물에 씻어서 맛을 보더니 나에게도 먹어 보라고 건네준다. 매운맛이 거의 없이 단맛이 난다. 건강에 좋은것이니 많이 먹어 두라고 의미 있는말을 한마디 던진다. 나머지는 말려서 이다음에 김장 몇포기를 할때, 우리 고유의 매운 고추가루와 섞어서 사용할 계획이란다.
매년 무심코 쳐다 보지도 않고 그대로 버렸왔던 사과는, 금년에는 완전히 다르게 수확을 했었다. 옆집의 Barbara 부부가, 며칠전에 Apple Sauce를 만들어서 우리에게 맛을 보라면서 건네 주었었다. 맛이 시장에서 구입해서 먹는것 보다 더 고소했다. 그녀가 말하기를, 너의집 사과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를 주어다 만든 소스라고 설명해 준다. 어느날 저녁을 먹고, 그녀집에 마실을 갔었을때, ' Lunar, 너희집 사과는 McIntosh야 버리지 말고 소스 만드러 먹지 그래' 라고 한말이 기억난다. '그러면 우리가 없더라도 따다가 네가 사용해도 괜찮아, 그렇게 해보렴' 하고 응답했었다. 쉽게 Apple Sauce만드는법도 그날 저녁에 설명을 해주어 기억하고 있었다.
벌레먹은 사과는 그곳만 도려내고, 한알도 버리지 않고, 며칠간을, 골프가 끝나고 집에 오자마자 벗어 부치고 따서 모았었다. 금년에는 이상하리 만치 많이 열렸는데, 예쁜 모양의 사과는 거의 없이, 벌레먹고, 또 어떤사과는 까마귀(Crow)가 쪼아대서 구멍이 푹패이고.... Barbara가 알려준데로 하나도 버리지 않고, 상한곳은 도려내고, 다시 껍질을 벗겨, Chunk 로 만들어서 다시 Lemon Juice를 그위에 살짝 뿌리고, Ziplac Bag에 넣어 Freezer에 얼렸다. 캐나다에 오래 살았다고는 하나 Apple Sauce를 사용하는것은 우리가 김치먹듯 일상화 되지 못해 별 관심이 없이 지내 왔었는데, 이곳 서양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김치를 매일 대하듯, 그렇게 일상에서 애용하는 식품인 것이다. 필요시 사과 Chunk를 꺼내어 약간의 개피가루를 뿌린다음 마이크로 오븐에 넣고 몇분동안 끌이면 그것으로 소스가 된다. 샌드위치를 만들때, Oatmeal Cookies를 만들때, Bagel을 토스트해서 먹을때도, 그외에 사용처가 너무나 다양함을 터득한 것이다. 고추도 수확하고, 들깨도 털어서 맛을 볼수 있게되고, 사과도 한톨 버리지않고 소스로 만들 준비를 해두었고....
금년 겨울은 모든게 다 풍부함속에서 손수 심고 거둔 수확으로 여유를 갖고 지낼수 있게 될것 같다.

이제야 철늦게 농부들이 뜨거운 여름날, 시원한 나무그늘을 마다하고, 열심히 땅을 일구면서, 구슬땀을 흘리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 할것 같다.
원래가 시골출생이라, 어려서는 시골 동네에서, 당시의 나의 부모님을 포함한 동네 어르신네들이 하루좋일 논과 밭에 나가서 생활하다시피 하는것을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한채 어린 시절을 보냈었고, 특히나, 부모님의 명령에 할수 없이 논이나 밭에 끌려(?)나갈때는 속으로 원망도 많이 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난 하기도 했기에 고향인 농촌을 떠나지 않을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어린 마음에 흙을 만지는게 그렇게도 싫어서 더 고향을 등지고, 헤매면서 결국엔 여기까지 굴러 왔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듯 싶다.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이제서야 땀흘리고 흙만지지 않으면, 내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식품이 있을수 없다는것을, 후회스럽게 안타까워 하면서, 부모님께 죄송함을 고하고 싶다.

"야 Apple Sauce를 곁들인 Bagel 토스트가 일품이다야. 나 한쪽 더 먹어도 돼?"
"그래요 많이 드세요. 당신이 다 심고 가꾸고 거두어, 나는 그것들을 이용하여 소스를 만들은것 뿐인데...... "
"어찌 나혼자 농사지어 수확한 것이겠소. 당신과 함께 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니겠소. Lunar. 여보 우리 점심은 이것으로 하자. 골프장에서 먹는맛은 또 다를거야. 어때?. 내가 만들께. 당신은 내솜씨를 맛보고 얘기나 해주라"
"오늘 골프는 더 잘되겠네. 당신 덕택에....ㅎㅎㅎㅎ..."

고추대에서 따 모은 고추잎은 끓는물에 살짝 대처셔, 이민올때 짐속에 끼워 넣어 지금까지도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는 대바구니 뚜껑에 골고루 잘 펴서 햇볕에 말리게 되면, Lunar가 된장에 고추잎 짱아치를 만들것이다. 얼마후에는 나와 Lunar는 물말은 밥을 한술 떠서 그위에 고추잎 짱아치를 한잎놓아 짝벌린 입에 넣으면서, "손수 심고 가꾸어 만든 고추잎 짱아치의 값은 얼마나 될까?" 라고 파안대소 할수 있는 그날이 곧 올것이고, 우리의 인생도 추수할 날을 생각하게 되겠지.....

고추씨와 들깨씨를 내년에도 다시 파종하고, 모종하고, 가꾸고, 열매 맺게 해서 다시 수확하게 되는날, 우리의 삶은 한발짝 더 영글은 결실을 보게 되기를 간절함속에서 구상해 보는 오늘 이아침은 좀 가슴이 아린다. 아련히..... 아련히...

Sunday, October 03, 2010

Korean Flag raising ceremony in Queens Park에 참석














나의 손위 동서분께서도 참석하셨다. 그형님은 재향군인회의 원로 이시고, 책임감이 무척이나 강한 분이어서 오늘같이 가랑비 뿌리는 속에서도 노구를 이끌고, 참석하신것이다. 며칠전 재향군인회장으로 부터 이멜로 연락을 받고, 국기 계양식(Korean Flag Raising Ceremony)에 참석하겠다는 약속을 했기에, 시골 카테지에서 매일 즐기는 골프를 접고, Queens Park에 도착했는데, 예상치도 않게 많은 얼굴들을 만나니 반가웠다. 단군임금께서 조선을 건국한후 이번이 4342주년이 되는 해인데, 온타리오( Province of Ontario)정부가 각소수민족들에게 Heritage Day를 정해주어, 뒤로 두고온 고국을 잊지 말고 기념하라는 취지로 29년전 부터 우리 한인들은 본국의 개천절을 전후한 토요일에, 국기 계양식을 온주 국회의사당, 즉 Queens Park에서 매년 자축해 오고 있었다. 곁들여 전통 민속 사물 놀이도, 젊은 2세 여자분들이 주축이 되여 계양대 앞에서 쉬지않고 공연을 해주어 그흥을 한껏 더해 주는것 같았다. 축하의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씩 가랑비도 내렸다.

참석한 Guests는 주로 우리 한인들이었고, 하객으로는 온주정부를 대신하여, 내가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국회의원 Tony (자유당)와 또 North York의 한인 밀집지역의 국회의원 David(자유당)이 참석했다. 그리고 우리쪽에서는 Mr.Hong 총영사와 직원들, 한인회장 Mr Paik 그외 이제는 많이 늙어 버린 낯익은 얼굴들이 였었다. 매년 열리는 국기 계양식은 총영사관이 주관을 하고 온주정부에서 대표를 내보내곤 했었는데, 좀 아쉬운점은 Premier가 참석했었더라면 더 빛이 나고 우리 한인들의 긍지도 더 고취 시킬수 있었을텐데....였다. 참석한 Tony와 David은 여당 국회의원이지만, 의회에서는 Back Bencher일 뿐이다. 식순에 따르면 우리 한인회장이 먼저 축사를 해야 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Tony가 먼저 Podium에 나서 듣기에 아주 좋은 축사를 해주는게 아닌가. 그것도 식순에 의하면 같이 참석한 David이 해야 할것을....
축사의 요지는 주로 태극기가 품고 있는 그의미들을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우리민족을 추겨 주는내용이었다.
하늘과 땅, 불과 물, 화합 그리고 우주만물을 그안에 품고 있는 태극기에 대한 존경심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있다는 내용을 기억한다고 설명했다.

나를 포함한 26명의 재향군인회원은 캐나다 동부지회원 자격으로 참석했기에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그외분들은 총영사관에서 초청형식으로 참석한것 같다. 한인사회의 행사에서 전에는 자주 보이던 몇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지않은 것은, 세월의 흐름에 별수 없이 굴복할수 밖에 없다는것을 새삼 느끼게 해는 한면을 보여 주는것 같았다. 참석한 재향군인회원들은 두고온 고국에 대한 자부심과 젊어서는 온힘을 바쳐 조국수호에 일익을 담당 했었다는 자부심이 대단함을 그들의 복장에서도 느낄수 있는 분들이다. 이곳 캐나다쪽과 한인쪽에서 나온 재향군인회원들로 구성된 기수들은 기상이 넘쳐 흐르는것 같았다. 기수단을 앞에서 Lead 하는이는 우리쪽 재향군인회원이다. 그의 구령에 따라서 그들이 들고 있는 태극기를 포함한 각종 기들이 오르고 내리고..... 외부의 억압없이 자유스런 분위기속에서 이런행사를 치를수 있다는것의 그의미를 우리 모두가 깊이 알고 되새겼으면 하는 마음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온주,캐나다가 독재국가이거나 못사는 빈국이였다면, 정부의 배려하에 오늘같은 행사를 치를수 있었을까? 어림없는 소리다. 그래서 국가는 잘살아야 하고, 그것을 지키기위한 절대적인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부국강병임을 여기 모여서 즐기는 모든 사람들이 다시한번 그뜻을 새기면서 각오을 다졌으면 한다는 말이다.

공식 행사가 끝난후 리셉션장으로 가기전에 잠깐 Tony를 만났다. 그의 모습도 그동안 많이 변해 (약 10여년동안 교류가 없었다) 몸도 전보다 많이 낡아 있는것 같고, Skinny 해 보였다. 금방 알아보고 반가워 한다. 그의 어머니소식을 물으니, 6년전에 저 하늘나라로 먼저 가셨다고 한다. 국회의원인 그의 아들, Tony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이나 강했었던 어머니였는데.....그의 부모는 Portugal에서 이민와서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지금도 Dunn 에는 그의 어머니가 살았던 집이 그대로 있다고 한다. 내가 가게를 하면서 토론토 시청과 BLVD Parking 때문에 한참 어려움에 있을때 신경을 많이 써 주었던 그래서 친구가 된 기억이 그를 보면서 다시 생각난다. 그도 이제는 나이 70을 곧 바라보는 노인이 된 것이다.

리셉션장에는 음료와 식사가 깔끔하고 풍부하게 준비되여 있었다. 오랫만에 맥주한잔을 마셨다. 참석한 모두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그동안 못나누었던 얘기들을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인다. 한손에는 음료수를 다른 한손으로는 오르락 내리락, 나누는 대화에 장단을 맞추고...
아직 어린 한인학생(?)들로 구성된 3인조의 밴드가 은은하게 연주를 계속해주어, 리셉션장의 분위기가 한층 어우러진다. 나도 평소 알고 지냈던 어떤 지인과 머리를 맛대고 얘기를 했다. 마치 그대화에 사활이 걸린것 처럼..... 다 부질없는 욕심과 껍데기 치장일뿐인것을.... 다 내려놓고 고개를 더 숙이면서 남은 삶의 세월을 살아간다면 더 마음이 편하고 몸도 고달프지 않을 것을, 마치 잘 익은 벼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황금물결을 보여주듯이..... 한인사회의 행사라면, 그리고 단체의 장직을 손가락으로 셀수도 없이 많이 했던, 어느 교회의 S 목사가 어김없이 참석하여 이리저리 발길을 옮기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그가 목회자로서의 직분을 충실히 했었더라면, 단체의 장을 맡았을때 충실히 일을 했었더라면...... 언제 그는 철이 들것인가? 괜히 측은해 보인다. 오늘 행사에도 한인사회의 유지중의 한사람으로 참석했다는점에 자부심을 느낄것이 뻔하다. 그껍데기를 그가 더 늦기전에 벗어 던지고 진정한 그의 모습으로 돌아 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들리는 말로는 병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세간의 보는 눈은 다 똑같기에 다른 사람들이 보는면도 내가 보는면과 별로 다를게 없을 것이다. 그런 인사들이 우리 한인사회에서 이제는 좀 알아서 뒤로 물러 섰으면 좋을것 같다. 총영사를 포함한 공관의 직원들도 껍데기에 싸여 있는 그런 사람들은 기억하고 초청 대상에 포함 시키지만, 그렇치 않고, 있는 그대로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면서 살아가는 알맹이가 꽉찬 교민들의 모습은,발굴을 하지못해(?) 매우 드물게 보인다. 재향군인회장님의 의향에 따라서 회원자격으로 참석한 내자신도 혹시나 껍데기만 번드르한 사람들의 구룹에 끼어 있는 것으로 보여 지지는 않았을지? 조심 스럽다.

잘사는 나라, 조국의 덕택으로 이곳 우리가 살고 있는 캐나다에서 나를 포함한 우리 한인들의 위상이 전보다는 날마다 격상되여 지고 있음에 긍지를 느끼는것 이상으로 조국이 자랑스럽다.35년전 처음 이곳에 발을 내려 놓았을때의 낯설고, 가난했던 생각이 난다. 잘 살고 있는 이곳 사회를 보면서, 나의 조국은, 아직 그곳에 살고 있는 우리가족들은 언제나 이렇게 풍부함속에서 삶을 살아 갈수 있을까?라고 부러워 했었는데.... 특히나 여름철이면 그흔해 빠진 소갈비를 잔뜩 준비해, 공원에 가서 하루좋일 친지들과, 아직은 어렸던 새끼들과 어울려 구워먹을때마다, 우리 모두가 못살고 있었던 고국을 항상 생각하면서 같이 나누지 못함을 아쉬워 했었던, 그때가 엇그제 처럼 기억되는데....
이제는 이곳 캐나다와 어깨를 겨루면서, 국제무대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성장한 조국에 대한 긍지를 오늘 국기 계양식에서도 가슴 깊이 느꼈다, 우리 교민사회도 그만큼 내용이 알차게 영글어 가고 있다고 거침없이 말할수 있는 그날이 빨이 왔으면 하는 마음을 안고, 발길을 돌린다.


Friday, October 01, 2010

남,북 이산가족이 다시 상봉 한단다. 겉은 번드르 한데...


남,북 이산가족이 몇년만에 다시 상봉하게 된다는 뉴스다. 이뉴스를 접하면서 나는 흩어졌던 이산가족들이 다시 만나게 되니 얼마나 기쁠까?라고 생각하기전에 "아 또 끌려가는 회담아닌 회담이 시작되는구나"라는 분단민족의 한과 서러움이 가슴을 때리는, 억눌림이 마음을 답답하게 했을 뿐이다.
한국의 맹방이라고 하는 미국도, 이산가족의 가슴에 맺힌 한과 서러움을 깊이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다는것을 금방 알수 있었다. 임진각에서 9월 14일에 합동으로 추석 망향제를 지내는 사진을 실었는데, 그설명이 너무나도 어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으로 헤여진 가족이 북쪽땅 파주에 있는 임진각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처럼 같은 민족이었다면 그런 어이없는 실수를 했을까?
우선 급한데로 댓글란에 시정을 요구하는 글을 올렸다. 제발 CNN의 Editor들이 이를 읽어보고, 바로 수정해 주기를 바래면서 말이다.

왜 항상 이산가족 상봉은 북쪽의 주장데로 끌려 가면서 해야만 되는가? 북쪽의 금강산에서, 그것도 그들이 지정한 건물안에서, 6/25 동란후 처음 만나는 흩어졌던 가족들이 진정으로 그동안 살아왔던 얘기를 할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 상황에서 상봉의 기쁨을 나눌수 있다고 믿을수 있을까? 남쪽에서 올라간 가족들도 하고싶은 얘기가 많아도, 혹시나 그내용이 북쪽의 가족들에게 화근이 될까봐서 못할테고, 북쪽에서 온 가족들은 이미 지난 60년 동안 쇠뇌되여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김정일 장군의 영도하에 배불리 잘먹고, 편안한 삶을 살고 있다고 앵무새 처럼 지껄일것이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금강산이 아닌 남쪽의 어느 지방에서 이런 행사가 자연스런 분위기속에서 마음껏 시간의 구해를 받지 않고 이루어졌다면..... 헤여짐의 고통속에서 살아온 삶의 내용을 원없이 서로 나누면서 재회에서 느끼는 기쁨의 눈물을 서로 나누었을텐데....

지난 며칠전에는 북쪽에서는 3대째 정권세습 행사가 거창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26세의 풋내기가 하루아침에 정권을 세습하기위한 과정의 하나로, 다른 군인들은 평생을 헌신하여 복무해도 하기 어려운 '대장'계급장을 어깨에 달았다는 뉴스가 전세계를 향하여 날았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이산가족 상봉을 북쪽에서 먼저 제안하여, 이루어지게 된 것인데, 어쩐 일인지 당초 예정된 날자를 북쪽에서 변경하여 10월 말경에 상봉하기로 했단다. 남쪽에서도 이에 무조건 이유를 들어 반대 할수만은 없는 어려운 여건이 국민들 저변에 깔려 있어 고심끝에 결정을 내렸을 것으로 짐작은 간다. 북쪽에서 주장하는 만나는 장소를, 남쪽은 무조건 수용하지 않고, 남쪽은 아니지만, 당초 북쪽이 주장한 장소에서 멀지 않은곳에 있는 장소에서 하도록 설득 주장하여 이루어 지게 된 것으로 이해 된다. 만약에 북쪽의 이산가족 상봉에 대해서 'No'라고 했다면, 당사자인 이산가족들 보다, 좌파인 야당들이 먼저 들고 일어나, 현정부를 피도 눈물도 없는 보수 꼴통들이라고 몰아 세웠을 것이다.

제발 이번 상봉에서 80살이 다 넘은 이산가족들이 가슴과 가슴을 부딪치면서, 고통속에서 살아온, 지난 60여년의 삶의 내용들을 진솔하게 나누고, 할수만 있다면 남과 북을 오고 갈수 있는 그런 길이 열려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앞으로 길게봐서 10년 후면 당대의 이산가족들은 거의가 다 이세상 사람이 아닐것이다. 이러한 처참한 광경을 Kim과 그의 Regime들이 인간적인 양심으로 들여다 보고, 한번만이라도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큰 결단을 내여, 그들의 왕래를 허락했으면 한다. Kim도 그가 나이가 들어, 이제 살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에 아들에게 권력세습을 하지 않았는가? 권력 세습이나, 흩어진 가족들이 더 늙기전에 왕래해서 만나게 해주는 이치는 똑같다고 본다. Kim이여 개과천선 하여라. 단 한번만이라도 당신이 죽기전에 말이다.

오늘자 CNN 기사를 옮겨 싣는다.


http://www.cnn.com/2010/WORLD/asiapcf/10/01/nkorea.skorea.reunions/index.html

Monday, September 27, 2010

지지리도 가난하고 살기힘들었던 때의 삶자취가 지금은...세시봉이야기




몸둥이의 모형과 얼굴의 모습은 변했지만, 그들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온 리듬은, 그들이 60대 중반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그때나 거의 전연 변하지 않은 그음색 그대로 나의 귀를 즐겁게 해준, 기억통(Memory box)의 깊은 밑바닥에 쳐 박혀 있었던 기억을 되살아 나오게 하면서, 지나온 세월에 대한 삶의 회한과 안타까움과 TV와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Folk Song을 부르는 그들에 대한 동경과, 나자신에 대한 초라함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 주었었던 시절의 희비가 교차하는 그때를 다시한번 생각케 해준 의미있는 그들의 쇼가 무쇠같이 변해 버린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해주었고, 눈시울을 적시게 한 그런 마당이었었다.

Lunar와 나는 인터넷을 통해서, 요즘은 고국의 드라마를 비롯한 많은 프로그람들을 즐겨 보아 오고 있었는데, 오늘은 우연히 Lunar가 MC 유재석과 김원희가 사회를 보고 있는 "놀러와"를 연결시켰는데, 이게 바로 1970년대초 부터 당시의 고국에 막 밀려 들기 시작했던 Pop Song을 주로 불러 당시의 나처럼 젊었던 청춘들 사이에서 인기를 한몸에 받았었으면서도, 현재까지도 주옥같은 목소리와 새로운 노래로 국민들을 즐겁게도, 때로는 위로도 해주고 있는 같은 또래거나 한두살 아래인 4명의 가수들이 함께 출연하여, 당시의 사회상을 노래를 통해서 충분히 회상할수 있도록 해주는 값진 쇼를 두번에 걸쳐 펼쳐준 것이다. 특별히 며칠전에 지나간 '추석 한가위 특집' 프로로 방송된 것이었다.
그때는 장발단속도 심했었고, 국민들이 즐겨 부르는 대중가요들이 당국에 의해 금지곡으로 묶여 방송을 타지 못하고 그대로 묻혀 버리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김민기의 '아침이슬', 송창식의 '고래사냥'......들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고, 그시대에 트로트 가수로, 국민들의 애환을 그녀의 노래로 같이 느끼게 해 주었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도 한때 방송을 타지 못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때는 군인들이 세상을 주므르는 시절이라, 흔희들 '군바리'들이라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서로 쉬쉬 해가면서, 그들을 뒤에서 비난해 가면서, 숨소리를 죽여 가면서, 굶주린 배고픔을 헤쳐 나려고, 군대식에 따라서 불철 주야, 한손에는 총을 들고, 이북의 김일성 공산정권에 대항해서 싸워야 하고, 다른 한손에는 망치를 들고 국가재건 사업에 자의반, 타의반 몰입하던 때였었다. 이렇게 모두가 잘 살아 보겠다고 오직 하나의 목적을 향해 달리고 있는때, 당시로서는 퇴폐성이 짙은, 서양풍이 깊이 가미된 Folk Song을 부르는것은 시국정책에 역행하는것 쯤으로 보이기에 충분했었던 때였었다. 이러한 국내 사정에 비해 우리세대보다 조금 앞서 세계의 Folk Song계를 휩쓸고, 유럽은 물론, 특히 미국을 주무대로 활동했던 더벅머리 4중창단, 영국출신의 Beatles가 혜성처럼 나타나 젊은이들의 우상,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 Concert때마다 아우성으로 열광,아니 광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 휘청대던 뉴스가 짧막하게 비쳐지면서 유행을 했었고, 또한 당시 북미문화권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여,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들도 Folk Song 보급의 유행에 앞장 섰던것으로 기억하고 이해 했으며, Beatles의 영향이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에 그후에 상륙했는데, 그영향을 당대 무명의 4인방 가수들이 '새시봉'에 모여 대담하게 받아들여 자기들 나름데로의 장르를 만들어 시대를 주름잡았던 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다. 그때 열광하던 젊은이들의 모습을 오늘의 고국 젊은이들 한테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것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그때로 부터 벌써 거의 반세기가 흘러가 버렸음을 오늘 이프로를 보면서 회한과 아쉬움속에서 다시 느껴 봤다.

쇼에 참석한 4명이 당시의 가수들은, 그들의 옷차림이나 행동에서, 황혼기의 삶이 비교적 여유있게 살아가고 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그들이 불렀던 노래들은 공전의 힛트를 해서, 당시 젊은 새대들은 거의 모두가 그들의 노래를 즐겨 부르면서, 당시 정권에 풍자적으로 저항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이 시대를 빗대어 풍자했다고 하던 노래들, 머리가 길면 사회적 퇴폐라 해서 단속하는 경찰에 쫓고 쫓기다가 붙잡히면, 가위로 머리를 짤리고, 구류를 살고, 재수 없으면, 심한 경우에는 군대에 강제 징집당하기까지 했었던 그런것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은 도저히 이해를 할수 없다는것을 안다. 그랬던 노래들을 당시의 가수들이 직접 TV를 타고, 그때의 어려웠던 상황을 설명해 가면서 들려줄때는 나 자신도 가슴이 뭉클해 오고,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지기위해 온나라가 매진하고 있을때, 행여라도 기강이 해이해 질까봐, 고삐를 꽉 조일수 밖에 없는 조치였음을, 그후 많은 시간이 흘러간뒤에야 깨달을수 있었다. 그렇게 젊은이들이 젊음을 발산할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막아가면서 경제 발전을 위해 밤낯을 가리지 않고 뛰어왔는데도, 경제적으로 오늘날 처럼 부강해 지지 않은 상태가 계속 이어져 왔었다면, 억눌려 살면서 젊음을 보냈던 세월들이 아깝고, 그원망을 계속해서 당시의 정권에 화살을 돌리면서 비난 했을수도 있었을텐데, 그러한 희생(?)의 대가로 오늘날을 사는 젊은 세대들은 잘먹고, 자유분망하게 주위의 눈살에 개의치 않고 살아가고 있음에 흐믓한 마음이다.

당시 그들의 활동무대는 명동에 있었던 "새시봉"이라는 음악 감상실이었었다. 사회자의 소개에 따르면, "새시봉의 전설적인 보스이며 맏형인 조영남", "새시봉의 방랑자요 수도승 송창식", "새시봉의 최고의 귀공자 윤형주" 그리고 "새시봉의 귀여운 막내 김세환" 이라고 설명했다. 4명 모두가 "새시봉' 음악감상실을 통해서 가수로 데뷔 했었다고 잊혀졌던 과거를 일깨워 줬다. 그들이 쇼를 진행하면서, 당시의 노래들을 불러주는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동안만큼이라도 당시의 젊은세대로 돌아가서 과거라는 기차를 타고 달리면서, 웃기도하고, 설명이 안되는 서러움에 가슴이 막히기도 하고, 같이 불러 보기도하고, 세월이 덧없이 바삐 흘러갔음에 회한이 서리는것을 느꼈고, 잊혀질려고 했던 조국에 대한 향수 그리고 애국심.... 오직 가난을 물리치고 부강한 나라를 건설해야만 했었던 절대 절명의 시대적 요구와, 풍족한 경제적 유산을 물려주기위한 목적때문에, 욕구분출을 지금처럼 마음껏 할수 없이 생활터전에서 열심히 뛴 결과가, 오늘을 사는 젊은 세대들을 통해서 여유롭게 비쳐지고 있음에 인생선배로서의 보람을 한껏 느낀 프로 였었다고 자신하고 싶다.
조용남, 송창식, 윤형주 그리고 김세환 4명의 출연 가수들이 앞날에도 오늘 보여 주었던 패기와 자신감으로 살아가기를 기원해 본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2/09/2011120901381.html?news_Head2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0/26/2010102600413.html?Dep1=news&Dep2=headline1&Dep3=h1_12

http://news.joins.com/article/486/4490486.html?ctg=1200&cloc=home|showcase|special

http://news.joins.com/article/855/4488855.html?ctg=1200&cloc=home|list|list2

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9/24/4018107.html?cloc=nnc&ctg=1700

http://world.ahaidea.com/video/player.asp?idx=29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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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September 24, 2010

추석은 무척이나 기다려졌었던 명절이었었는데....







송편 한접시를 $10달러에 구입하여, 시골 카테지로 오던날 Lunar와 함께 차안에서 목에 넘기면서, 아 오늘이 추석이구나 라고 느꼈다.
고국에서 날아오는 뉴스에 보면, 대통령께서는 추석 하루전날 인기프로 '아침마당'에까지 바쁜 스케쥴을 쪼개어, 부부가 함께 출연하여 국민들에게 풍요로운 민족의 대명절을 뜻길게 보내시길 기원하면서, 청와대에서의 평상생활을 담담하게 들려주는 프로도 인터넷을 통해서 보았었지만,
이곳의 추석명절은, 여느때와 다름없는, 의미를 크게 부여하지 않는, 그저 추석절이구나 정도로 지내온 세월이 무척 길기만 하다.

아직 어렸을때,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에 다닐때의 추석명절을 기다리면서, 추석날 대식구가 조상님들의 묘소가 있는 선영으로 아버님을 선두로 당신의 자식들이 줄을 이어 뒤따라가서, 준비해간 간단한 음식을, 묘앞에있는 상석위에 자리를 깔고, 그위에 차려놓고 두번씩 절하면서, 조상님께 감사함을 드릴때, 우리 철부지들은 절을 하면서 서로 옆에 있는 또래의 형제들과 사촌들, 그리고 집안의 식구들과 의미도 모르는 절(Bow)을 따라 하면서 낄낄거리면서 웃고, 조상님에 대한 감사보다는 오랫만에 먹어 볼수 있는 별미에 더 신경을 썼던, 그런 때가 새삼 있었는데..... 시간상으로 따져 보면 반세기가 훨씬 지나갔음을 속절없이 느낀다.

6/25 사변후의 생활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모두가 초근 목피 하기에 여념이 없이, 모든 국민들이 그렇게 어렵게 살았었다. 조상님들에 대한 후손들의 정성은, 추석명절에 최상의 별식을 준비하여 조상님께 제사 드리고, 식구들끼리 오랫만에 흰쌀밥에 별식을 먹을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기에 나의 어린 기억속에는 산해진미를 쌓아 놓았던것 쯤으로 기억이 된것같다. 지금의 시각에서 쳐다 본다면, 기껏해야 떡과 좀 형편이 나은 집에서는 유과정도가 추가되고, 생선 조기, 그리고 나물종류들이었을 것이다.

지난번 고국을 방문하여 조상님 선영을 성묘 갔을때, 양지바른 산언덕에 위쪽으로 부터 모셔졌던 우리 형제의 직계로 4대조인 고조 할아버지를 시작으로 그아래로 부모님 묘까지 모셔지고 그바로 밑으로는 먼훗날 우리 형제들이 차지하게될 자리가 있는, 그리고 앞쪽으로는 아담한 시골 촌락이 보였고 좌우 뒷쪽으로는 인위적으로 만든 높지않은 언덕으로 둘러 싸여 있었던 기억속의 그모습이 완전히 달라진, 납골묘라는것으로 바뀌어져 있었고, 선조님들의 묘는 흔적도 없이, 넓은 공간 가운데에 대리석으로 만든 집이 있었다. 즉 납골묘라는 것이었다. 조상님들의 유골을 한데 모아 그안에 모셔 놓고, 돌아가신날을 기준으로 매년 모셔지던 제사도 이른봄철의 한식날에 모든 후손들이 한데모여 한번에 지낸다는것을 알았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의 바쁜 생활에 그렇게 밖에 할수 없었던 결정에 조상님들도 이해 하실거라고 이해 했었다. 나를 비롯한 아내와 두아이들은, 그곳에 계시는 후손들이 납골표로 모시기로 결정하고 통고해 주는것만으로도, 충분했다고 생각해야만 했다. 우리는 머나먼 이국나라에 사는 어찌보면 이방인(?)일수도 있기에.... 고급화강암으로 비석을 세우고, 거울처럼 매끈하게 깍아서 조합시킨 대리석돌들은 위엄있게 납골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고, 정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보니, 여러층의 선반이 설치되여 있었고, 위로부터 조상님들의 유골이 조그만 항아리에 모셔져 진열되여 있고, 이름이 새겨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가운데의 납골묘를 중심으로 넓은 공간의 바닥(Floor)에도 거울처럼 잘 다름어진 대리석으로 깔아놓아 후손으로서의 품위 유지를 위해 노력한 흔적이 잘 보였었다.

막내 동생이 좋지 않은 납골묘에 대한 얘기를 해 주는게 아닌가. 다름아닌 이장(Tombs must be removed to other Place)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새로 건설되는 호남 고속철도가 조상님들이 모셔져 있는곳을 관통하게 되여 있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이장비를 포함한 경비는 국가에서 보상해 준다고 했다. 현대 문명의 발달에, 후손들의 생활은 편리해 졌겠지만, 그핑계로 제사밥도 제때에 얻어먹지 못하시고, 궁여지책으로 일년에 한번 공동으로 얻어 자시는판에 이제 또 다시 자리를 옮겨야 한다니.....조상님들이 지하에서 뭐라고 생각하실까?
그리고는 까맣게 잊어 버리고 지내 왔는데, 다시 추석이 되니, 막내 동생이 이멜을 보내 왔다. 멀리 떨어져 사는 나와 딸린 식구는 별도로치고, 고국에 남아 있는 형제들마져도 다 모이지 못한 속에서 성묘를 다녀 왔다는 내용이다. 곁들여진 사진속의 납골묘는 여전히 번쩍번쩍 빛나고 있고 깨끗해 보였다. 관리하는분의 정성이 보통이 아니겠다 싶게 느껴졌다. 다시 동생에게 물었다. 조상님들 모신 납골묘는 아직 다른곳으로 옮겨지지 않은것같은데, 잘 준비되고 있느냐고 말이다. 이에 동생의 대답이 이미 그곳에서 멀지 않은곳으로 이장하여 전에 납골묘보다 규모가 조금 더 크게 건축하여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사진속에서는 지난번 성묘때 보았던 그모습이 그대로 보이는것 같아서 물었었는데.....
납골묘를 전문적으로 건축하는 업자를 통하여 모든것이 완료 됐었겠지만......수고를 했을 형제분들의 면면이 떠 오르면서도, 한편 이방인이 된 기분도 들었다. 이멜 한통으로, 전화 한통으로라도 사전에 납골묘 이전을 알려줄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까?라는.

추석 고유명절의 깊은 뜻을 잊고 살아온 세월이 너무도 길어, 두아이들은 고사하고 나자신도 평일처럼 살아왔기에, 이번 추석도 동생의 이멜이 없었더라면 평일처럼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어쩌면, 비록 한국식품점에서 구입한 것이기는 하지만, 송편한쪽도 먹어보지 못한채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제갈길을 가고 있는 두아이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며칠전 아이들에게 추석인데 같이 식사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전화를 했을때, 친구들과의 약속때문에, 일때문에....등의 핑계로 그기회마져도 얻지를 못했었다. 그뒤로는 우리부부도 새까맣게 잊은채 지냈었다. 두아이가 친구들이라도 만나서 시간을 갖게 된다면, 우리 부부보다 더 자상한 부모를 둔 친구들로 부터 추석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서 좋은 시간 갖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이다음에 다시 고국을 방문하게 된다면, 이번에는 좀더 진지하게 조상님께 늦은 인사라도 드리고 싶다. 어렸을적의 성묘는 대식구였었는데, 사진에서 보는 식구는 불과 몇명뿐이었다. 문명의 발달을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조상님들을 더 정성으로 모실수 있었던 옛날을 그리워 해야 할지? 조상님께 죄송할뿐이다.

Thursday, September 23, 2010

지도자의 말 한마디에 소속원은 몸전체를 움직이는........토론토시장 선거

오는 10월 25일에는 온타리오주내 지방자치단체장 선거(Mayor)가 실시된다. 온타리오주의 수도가 있는 'Toronto Mayor' 는 Premier of Ontario에 버금가는 Power의 핵심자리이면서도 그정책이 직접 시민들의 생활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 특이 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온타리오주의 정치꾼들의 관심은 온통 토론토 시장이 누가 될것인가?에 쏠려 있는것이다.

지금까지 언론에 발표된 40 여명이 넘는 후보들중에서, 가장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후보는 George Smitherman으로 그는 후보에 출마 하기전 현온타리오 자유당 정부내에서 장관과 부수상으로 봉직 하다가, 전부 반납하고 더 좋은 토론토시를 만들기 위한 변으로, 시장에 출마 했던 것이다. 다른 한분은 Rocci 라는 분이 있고, 마지막 다른 한분은 Rob Ford인데, 그는 시장에 출마 하기전에는 토론토 시의원으로 오래 봉직했던, 처음 출마를 선언했을때는, George의 명성에 가려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나머지 다른 후보군은 아직까지는 언론의 흐름을 타지 못하는 명목만의 후보로 선거를 마칠 공산이 현재로서는 그렇게 보이는 존재들인것 같다.
시장 후보등록은 불과 약 2주전에 마감 했으나, 비공식 선거운동 비슷한 각후보들의 정치적 행보나 모금 운동은 이미 금년초부터 뜨겁게 언론에 오르내리곤 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후보 등록마감이 끝난 2주전 부터 공식적인 여론조사결과가 언론에 나타나면서 부터 Rob Ford가 어느새 선두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면서 나자신도 그랬지만, 많은 유권자들이 놀랐을 것이다.

그는 정치적 성향으로 보아 Conservative Party 라고 한다. 시의원당시 그의 행적을 보면, 별로 큰 두각을 나타낸것 같지는 않았지만, 대다수의 시의원 성향이 Liberal 아니면 NDP였으나, 그는 각 시원들이 사용할수 있는 Allowance의 집행면에서 보면, 확연히 다른 의원들과 비교가 될수 있음을 본다. 법적으로 정해진 한도액을 많은 의원들이 수많은 명목으로 거의 다 사용 했지만, 그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다시 시금고에 반납하면서, 그래도 시의원직은 어느 시의원보다 더 충실히 이행 했노라고 하면서, 예산 낭비를 간접적으로 비난하기도 했었다.

여론 조사에서 나타난 결과를 보고, 쉽게 Mayor를 당선 시킬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정치적 친정인 온타리오 자유당 정부는 심한 충격에 빠져 헤매더니, 드디어 친딸이나 다름없는 George Smitheman을 당선 시키기위해 온주 정부로서 지원 할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선거운동을 도울 것이라는 내용의 신문기사가 며칠후 앞면에 대문짝 만하게 실려 있었던 기억이 난다. 시장 선거에 Ontario Political Party중에서 공식적으로 자기네당 성향이 짙은 후보를 밀고 지원해 준다는 언론의 발표를 아직까지는 못 보았는데, 온주 자유당 정부만이 그렇게 공식적인 입장을 나타낸것도 이해가 안되지만, 지금 까지의 관행으로 보면, 지방자치 단체장, 즉 시장선거에서는 법으로 소속정당을 못밝히게 되여 있는것으로 나는 알고 있기에, 온주 정부의 지나친 간섭이 아닐까?라고 혼자 생각해 보기도 했었다. 여기서 또 이해가 잘 안되는점은, 이러한 집권 자유당의 공식적인 입장 지지에도 다른 정당인 보수당이나, NDP에서 공식적인 반응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점이, 본국의 정치판과 다른점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토론토시의 행정을, 2 Term을 하고 물러나게 되는 현시장의 실적에서 스크린 해 본다면, 한마디로 깨진독에 물붓는 식의 행정이었던 같다. 현시장은 NDP 성향이 짙은, 전에 내가 개인사업을 하고 있을때 그지역을 대표하여 시의원을 여러번 했다가 시장을 해왔던 분인데, 경제적 발전을 위한 기초나 행정을 폈다기 보다는 행동은 없고, 목소리큰, 말만 많은 몇사람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행정을 했던것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는 그런 분이다. 예를 들면 차량이 폭주하는 좁은 시내 도로에 차선을 늘려도 모자랄 그런곳에, 오히려 차선을 없애고, 그곳에 Bike Path를 만들기 위해 시예산을 투입하고, 차량은 밀려 Bumper to Bumper로 거북이 걸음을 하면서 뿜어내는 매연까스로 대기를 오염 시키고 있는데, 바로 옆에 만들어진 자전거길은 사용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현실을 무시하는 정치꾼이라고 보이고 있다.

보수성향이 짙은 Rob Ford가 현시장의 시행정에 식상하여, 그반대 급부를 얻어,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것은 아닐까?
시민들은 높은 세금에 치를 떨고 있다. 현 온타리오 자유당 정부가 약 3년전에 특별법을 만들어, 토론토시를 특별시로 지정해 주면서, 필요할시는 시조례나 또는 특별법을 만들어 별도의 세금을 시자체적으로 징수 할수 있다는 길을 터준 것이다. 그법이 공포된 그해에 토론토시는 현 David Miller시장의 주도하에, 좌파성향이 짙은 시의원들의 지지로, 자동차등록세, 재산양도세를 신설하여 시민들의 주머니를 더 빈털털이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 했었던점을 유권자들이 가슴속 깊이 기억하고 있다가 이번 선거에 반영 시키는것으로 추측 된다. 허지만 선거는 선거를 마친후 뚜껑을 열어 보기 전까지는 속단은 금물이기에.....

그런데 오늘 아침 비교적 중립적이면서도 보수쪽을 대변하는 토론토의 주요 일간지 하나가 선두 주자인 Rob Ford에 그의 자질에 문제가 많이 있음을 조목 조목 따져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그내용을 요약해 보면, 그의 정치가로서의 정직성과, 리더쉽인것 같다. 실적에 대한 비판 보다는 있지도 않는, Rumor성의 내용을 검토없이 발표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렇타면 그가 시장이 된다해도 기대를 할수 없을것 같아 안타깝다.
며칠전에는 Toronto Star 가 사설에서 공개적으로 그의 시장되는것을 반대하는 기사를 실어 읽어본 기억이 생생한데.....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겼었다. 왜냐면은 Star지는 자유당 성향과 NDP의 정책을, 선거때마다 지지해 왔음을 알고 있었기에 말이다.
이렇게 언론의 질타를 받으면 그의 남은 선거운동 기간에 많은 변수가 있을것으로 예측된다. 그나저나 납세자의 한사람으로서, 세금을 덜 내고도 편안한 삶의 보살핌을 받을수 있게 하는 사람이 시장으로 선출 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바꾸어 얘기 한다면, 지도자인 '시장(Mayor)'의 말 한마디에, 갈대밭의 갈대가 폭풍이나 미풍에 대책없이 휩쓸리듯, 방향이 좌로도 되고, 우로도 된다는것을 깊이 명심하고, 제발 표를 얻기위한 사탕발림식의 지킬수 없는 공약남발은 지양하고, 지도자로서 내가 내뱉는 한마디가 어떻게 그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먼저 깊이 사고하고 행동에 옮길줄 아는 후보가 Mayor로 선출 되기를 바랄뿐이다.
여기에 오늘 아침 신문기사를 옮겨 본다.


http://www.theglobeandmail.com/news/national/toronto/marcus-gee/can-we-trust-rob-ford-a-guy-who-gets-his-numbers-wrong/article1719778/

Monday, September 20, 2010

북한의 사과(Apology)받아 내는것은 물건너 가는가?

시간이 흘러 가면서, 기억이 상실되여서 일까?. 아니면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조언을 하는 보좌관들의 계속되는 쇠뇌에 본래의 주장과 판단이 흐려져서 일까?. 그렇게도 단호하게 북괴의 사과를 꼭 먼저 받아 내고, 그다음에 북괴에 식량원조를 하든, 대화를 재개 하던가 하겠다고 언론에서 맹세 비슷하게 하던 MB의 모습을 지금도 뚜렷히 기억하고 있는데...... 바로 천안함이 북괴의 Torpedo에 의해 폭침됐을때의 MB를 비롯한
정부의 반응이 그랬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아직까지 한마디의 사과 비슷한 북괴의 반응을 들어본 기억은 전연 없는데, 남한 정부는, 민간인 차원에서의 원조는 할수 있다라는 식으로 운을 떼면서, 대한 적십자사를 통해서 어제 북한으로 원조되는 많은 쌀이 차량에 실려 휴전선을 넘어가는 기사와 사진을 보면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북괴의 도발은 끝이지 않겠구나라는 자조석인 한숨이 나도 모르게 가슴으로 부터 새어 나옴을 참을수가 없었다. 이원조에 대한 북괴의 반응은, 원조량이 적다는 핑계와 투정을 부리면서, 한편으로 북괴는 휴전선 부근에 대포를 증강 배치 하여 남한을 겨냥하고 있다는 뉴스가 전세계를 향해 쏟아져 나왔고, 지난 10년 동안을 지배했던 남한의 좌파 정권시, 국방백서에서 삭제됐었던 남한의 '주적'은 북한을, 곧 발행하게 될 국방백서에 뚜렷히 다시 북한이 '주적'임을 명시 할것으로 예측해 왔던 희망을 헌신짝 처럼 버리고, 명시하지 않을것이라는 내용의 인터넷 뉴스를 어제 보았었다. 그런데 9월 16일자 '와싱턴 포스트'의 기사 내용을 보면, 그렇게도 확고하게 천명했던 MB의 의지가 슬며시 Condolences로 바뀐것으로 파악된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미국도 그러한 태도 변화에 적잖게 실망(?)하고 있는것 같다. 기자의 분석으로는 주위에서 계속적으로 북괴와의 긴장상태가 오래 가서 좋을게 없다는 충언(?)에 쇠뇌 된것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본다고 했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이, 북괴의 6자회담 복귀 발언에 내심 기대를 걸면서 물밑접촉을 하고 있지만, 결과는, 지난 수년간 겪어온 경험으로 볼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채 두번 세번 모임 정도에서 다시 파국을 면치 못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기간 동안에 북괴는 챙길것을 이미 다 챙겨 갈것이기 때문이다. 다람쥐 체바퀴 도는식의, 아무런 성과도 없는, 회담을 빌미로 덕을 보는것은 김정일과 그 Regime일것이고, 죽어나는것은 고국 남한의 세금납부자들과, 이북의 죄없는 동포들일 뿐이다. 왜 야당을 포함한 정치꾼들은, 이러한 북괴의 계략을 다 알면서도, 계속 밀어 부칠려고 할까? '사과'는 고사하고 '조의'를 표한다는 북괴측 인사말조차도 받아내기는 물건너 간것 같다. 목숨을 바쳐 국가를 지킬것이라고 누가 감히, 이러한 용두사미식의 정치꾼들을 보면서, 용감히 나서겠는가? 46명의 젊은 해군장병들의 순국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인의 장막속에서 고군분투하는 MB에게 연민의 정이 일어난다.

아래의 글은 조국 남한의 정치적 지도자와 야당의 정치꾼들이 꼭 읽고 숙지 해야 될 절박한 내용의 글이다.



"북 고위간부의 편지"

북 고위간부의 편지
"김정일정권 아닌 北인민 도와야"

나는 현재 북조선의 중요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신변의 위험 때문에 저의 구체적인 인적 사항을 말씀드리지 못하는 점 량해(양해) 바랍니다.

제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렇게 조선일보 독자들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한국정부의 대북 정책과 친북세력들의 행동이 너무 한심스러워 민족의 장래를 위해 이젠 할 소리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북조선 인민들은 1995~1998년 소위 「고난의 행군」 시기에 300만이 굶어죽고 120만이 유랑 길에 나서면서 김정일에 대해 더 이상 미련도 애정도 없게 됐습니다.

오직 남은 것은 김정일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뿐입니다.

현재 북조선 내부에는 공개할 수 없지만 많은 반정부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때가 오면 민족반역자 김정일을 처단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엘리트들이 서서히 자라나고 있으며, 뜻이 있는 동지들이 이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가 닥쳤을 때 김정일을 무너뜨릴 정말 좋은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김정일이 혼란스러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죄 없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총살하고 관리소(정치범수용소)에 보내는 등 무자비하게 인민들을 탄압했기 때문입니다.

인민의 원성이 높은 곳에 반항의 기운 또한 높아지는 것은 역사의 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행군」시기에는 정치ㆍ경제ㆍ문화ㆍ국방 할 것 없이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와해됐으며 많은 인민들이 중국 땅으로 떠났습니다.

우리는 당시 더 많은 인민들이 탈북해 중국으로 떠나길 원했고 국제사회는 김정일의 목을 더 조여줄 것을 바랬습니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현실로 됐다면 아무리 잔인한 김정일정권이라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남조선 정부와 국제사회의 김정일정권 지원으로 북조선의 반정부세력에게는 가혹한 시련이 다시 찾아오게 됐습니다. 중국으로 떠났던 불쌍한 탈북자 수십 만이 북조선으로 끌려와 공개처형장에서, 보위부 감옥과 관리소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탈북자들이 북조선에 끌려와 처참하게 죽었는지 생각만 해도 분통이 터집니다. 게다가 남조선정부는 김정일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계속해서 김정일 살리기에 나섰습니다.

지금까지 북한으로 흘러간 딸라(달러)와 지원물자들이 어떻게 쓰였는지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지만 구차하게 그런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인민의 식생활에는 조금도 관심 없는 김정일정권이 외부의 지원을 인민에게 쓰지 않고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탕진했다는 사실은 분명하기 때문에 이것을 꼭 강조하고 싶을 뿐입니다.

남조선에서는 마치 김정일정권이 변화하기라도 한 것처럼 자꾸 김정일을 미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의 변화를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2002년 7월 「경제관리개선」조치는 시장의 물가를 현실화 시키고 사실상 유명무실화된 배급제와 공급제를 얼렁뚱땅 없애고 인민에 대한 국가의 책임으로부터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시킨 것 외에는 특별한 내용이 없습니다.

장사를 하게 하려면 자유를 주어야 하지만 현재 북조선에는 개인장사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관ㆍ기업소에 월 1만~3만원을 벌 수 있는 사람은 당국의 허락을 받고 장사를 하는 것이고, 그럴 능력이 안 되는 대다수 근로자는 통제속에서 배급도,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지만 직장생활을 해야 합니다.

최근 북조선에서는 「남조선 연속극」 열풍이 불어 집집마다 가택수색이 벌어지고 출퇴근 통제도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

개인농을 할 것이라는 약간의 기대도 있었지만 그것도 현재는 흐지부지 된 상태입니다. 올 7월 협동농장의 토지를 떼어 기관ㆍ기업소에 분할할 것이라는 말이 나돌았지만 아직 실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개인들이 산에 뚜져놓은(개간해 놓은) 소토지(뙈기밭)에 한에서 300평까지 농사를 허용했으며, 그 이상의 토지에 대해서는 국가가 관리하게 됐습니다.

물론 죽기 살기로 대항하는 주민들이 당국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수천 평씩 땅을 관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토지사용료로 세금을 물고 나면 남는 게 없어 인민들의 원성은 더 높아가고 있습니다. 땅을 뚜져 사는 사람들은 그나마 굶어죽지 않을 만큼 농사지어 스스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농민들은 가을만 되면 군량미로 쌀을 뜯기고, 간부에게 뜯기고 나면 남는게 없어 이제는 자기 살길은 스스로 찾고 있는 형편입니다. 모두 도적으로 변해 재간껏 훔쳐놔야 굶어죽지 않기 때문에 농민 스스로가 모두 도적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을만 되면 협동농장의 토지는 쭉정이만 남게 됩니다. 황해도의 올해 작황이 좀 좋아졌다고 하지만 인민군대 군량미를 작년보다 더 떼어간다는 소문 때문에 벌써부터 농민들의 원성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요즘 인민군대도 굶주릴 정도로 다시 식량난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인민들은 인민군대를 「망나니군대」ㆍ「깡패」ㆍ「도적군대」ㆍ「토벌군」(일제시대의 토벌대를 빗댄 말)으로 부르고 있으며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허덕인다 하여 「영실군」(영양실조군대)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매일과 같이 민가를 습격하고 사람을 때려 군대로 인한 민원이 끊이지 않습니다. 굶주림으로 인민군대의 기강은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북조선은 점점 구제불능의 부패국가로 멸망의 가속도가 붙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정일은 어떻게 하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처형과 고문 등 가혹한 형벌을 더 가하고 있으며, 탈북자에 대한 처벌도 최근엔 아주 강화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의 여론 때문에 공개처형은 잘 하지 못합니다.

외부 정보에 대한 인민들의 관심이 높아져 남조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고위층의 사람들은 손금 보듯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중간급의 간부들이나 젊은이들까지도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을 듣고 정보를 습득하고 있습니다. 누가 김정일을 돕고 있고 누가 북조선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싸우는지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더 많은 인민들이 중국으로 탈출해 김정일과 대항해야 하겠으나 현재 중국과 한국정부가 탈북자들을 홀대하고 이들을 구출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세 때문에 북조선 인민들은 도망칠 수도 없는 처참한 처지에 놓여, 앉아서 굶어죽거나 맞아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문에 현재 한국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북한의 뜻있는 간부들과 반정부세력들은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남한정부에 대한 증오의 골은 더 깊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김정일은 갈 데가 없습니다. 장담하건데 이제 김정일을 좋아하는 북조선 인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식한 인민군대를 내세워 인민을 총칼로 탄압하지만 이제 그의 운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인민군대도 자기 부모형제가 굶어죽고 있는데 인간의 머리를 가진 자라면 어찌 이러한 형국을 정상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민족이 가장 어려울 때, 우리가 형제라고 믿고 있는 남조선 인민들이 김정일정권을 무너뜨리고 북조선 인민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정도 이야기하면 다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개성공단은 김정일의 모자라는 외화를 벌기 위한 「창구」라고 보면 정확합니다. 금강산관광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정일은 남조선의 돈이 필요한 것이며, 남북교류는 김정일에게 얼마만큼의 돈이 들어오는가에 따라, 즉 「장군님」의 만족도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돈을 많이 주면 남북관계는 좋아지고 그렇지 않으면 그 반대일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북조선과의 관계가 아니라 김정일과의 관계라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때문에 이젠 김정일의 목을 조이지 않고서는 더 이상 북조선 인민의 불행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인민군대를 해체시키고 보위부를 약화시키자면 이젠 돈줄을 막아야 합니다.
미국과 일본ㆍ남조선이 힘을 합쳐 김정일을 압박한다면 망하든지 아니면 개혁ㆍ개방을 하든지 그도 선택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부탁하건대 현재 북조선 인민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노예처럼 살고 있는지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김정일을 돕는 자는 훗날 반드시 북조선 인민들이 정의의 심판대에 세울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이 편지는 중국으로 출장나온 한 북한관리가 재중동포들을 통해 조선일보에 자신의 심경을 담은 편지를 팩스로 보내온 것이다. 그는 신변안전 때문에 필적이나 인적사항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줄 것을 부탁했다.

김성길 가명 (현재 북한 거주)



http://news.donga.com/Society/3/03/20100925/31384478/1

http://monthly.chosun.com/

http://news.donga.com/Politics/3/00/20100925/31385516/1

http://news.joins.com/article/300/4469300.html?ctg=1003&cloc=home|list|list1

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10/09/16/AR2010091606933.html

Friday, September 17, 2010

제빵왕 김탁구를 보면서, 나를 많이 돌아봤다. 그런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공동 생활한다면, 문단속이, 상대방을 쓰러 뜨리려는 야합이, 더 넓게는 전쟁이 우리를 피해 달아날것 같았다.
내가 권력과 가진자들틈에 끼어서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살아와서 였을까? 마약중동이라는 말을 많이 들으면서 살아왔고, 또 그런 병자를 여러번 보면서 오늘에 이르른 나의 삶의 경험에서 본다면, 어느 쪽이던 간에 한번 발을 들여 놓으면, 차차 본인 자신도 모르게 그속에 젖어 들어, 정상적인 시각으로 후각으로 판단하기가 무척 어려워 진다는것이다. 불의인지 알렴서도, 공평하지 않은 행동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합리화 시킬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것을 많이 보아왔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그런 분위기속에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일것이다.

김탁구는 불의에 맞서기 위해서는 그것을 물리치기위한 자기 수양과 실력이 무기임을 일찌기 깨우쳤기에, 감당키 어려운 시련을 극복했다.
레이건 대통령의 " 우리가 즐기는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것이 아니다. 이를 지키기위해서는 그이상가는 힘이 필요하다"라고 언급했던 기억이 난다. 그길이 공정한 사회, 공평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사는 항상 상대적이기에, 그말에 나는 오래전부터 동감하면서, 삶에서도 그길을 걸어 가려고 했고, 지금도 그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누가 물어 본다면,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항상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것은 '그래도 다시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라고. 그러나 지나온 삶의 발자취를 되돌아 보면, 항상 남는것은 후회뿐인것을 어찌 하랴.

조국의 복잡한 사회에 이번 드라마가 청량제 역활을 충분히 했다고 본다. 일회성으로 끝나지 말고, 그정신이 생활화 돼서, 지금보다 훨씬더 누구나가 긍정할수 있는 공정한 사회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 간절하다. 특히나 고국의 정치꾼들, 그들도 집에서는 가족들과 함께 이 드라마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느꼈을 것이다. 이북에 구호품으로 보내준 쌀이, 군대의 군량미로 전용됐었다는 뉴스가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는데도, 그래서 그양식을 먹은 김정일 군대가 천안함을 격침 시켰는데도, 한마디 항의나 응징에 대한 언급은 없이, 그영향권에 깊이 빠져 있는 야당의 정치꾼들과, 그래도 퍼주어야 된다라고 떠들어 대는 그사람들에게 꼭 필요했었던 드라마였다고 믿는다.

오늘 고국의 일간지중에서 눈에 띄는 사설이 계재 됐다. 여기에 그전문을 옮겨 본다.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세 가지 빵을 기억하라 [중앙일보]

2010.09.17 19:08 입력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빵’은 남을 생각하는 빵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빵’은 새로 도전하는 빵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빵’은 나다움을 담아낸 빵
# 그제 종영된 KBS-2TV 수목드라마 ‘제빵왕 김탁구’는 그냥 스쳐 보낼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특히 ‘세 가지 빵의 화두’가 그것이다. 팔봉선생(장항선 분)이 극중인물 김탁구(윤시윤 분)와 구마준(주원 분)에게 경합 과제로 던진 첫 번째 화두는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빵’이었다. 탁구는 자신의 배고팠던 시절을 떠올리며 시장통의 한 아이를 위해 빵을 만든다. 비록 넉넉하고 질 좋은 재료도 아니었지만 탁구가 만든 보리밥빵은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빵’이었다. 거기엔 남을 위하는 마음이 담겼기 때문이다. 단지 내 배만 부른 빵은 진짜 배부른 빵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그 빵을 먹일 때 차오르는 마음의 포만감이 있어야 진짜 배부른 빵인 것이다.

# 팔봉선생이 던진 두 번째 화두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빵’이었다. 먼저 팔봉선생은 빵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탁구와 마준은 빵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이스트’라고 했다. 그러자 팔봉선생은 그 ‘이스트’ 없이 빵을 만들어 보라고 주문했다. 그들에게 그것은 새로운 도전이요 모험이었다. 결국 탁구는 이스트 없이 청국장 등 온갖 발효식품들을 동원해 빵을 만드는 힘겹지만 독특한 경험을 한다. 비록 힘들고 곡절 많은 과정이었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빵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빵’이었다. 거기엔 새로움에 대한 도전과 모험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 마지막으로 팔봉선생이 던진 화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빵’이었다. 하지만 이 화두는 스승 팔봉선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유언이 되고 말았다. 과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빵’은 어떤 것일까? 그 화두는 삶의 숙제로 남았다. 스승인 팔봉선생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탁구는 말했다. “스승님, 저는 명장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자 팔봉선생은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답했다. “애써 명장이 되려 하지 말아라. 세상은 겪어내는 거다. 겪어낸 삶의 희로애락을 모두 담아 너만의 빵을 만들어라. 그러면 된다. 그것으로 족하다.”

# 그렇다. 명장은 기술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나다움, 자기다움을 담아낼 때 비로소 명장이 되는 것이다. 탁구가 드라마의 끝 대목에서 아버지가 물려준 회사를 누나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팔봉빵집으로 돌아와 바닥에서부터 다시 자기 자신을 걸고 그만의 빵을 만들어 가는 모습은 그래서 더욱 감동적이다. 자신이 겪은 모든 것을 담아 가장 자기다운 빵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빵’을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나답고 자기다울 때 가장 행복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결국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빵’은 바로 그 나다움, 자기다움을 담아낸 빵이었다.

# ‘공정’이 화두가 된 요즘,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 극중에서 탁구와 마준의 경합과 경쟁은 전혀 공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탁구는 그 모든 불공정을 뚫고 자신에게 칼을 겨눴던 이들마저 끝내 품어냈다. 어쩌면 그래서 드라마일지 모른다. 진짜 현실이라면 탁구는 마준에게 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열광한 이유도 어쩌면 그 어쩔 수 없는 거대한 불공정의 사회라는 골리앗을 김탁구라는 다윗 같은 한 작은 인간이 부숴줬기 때문일지 모른다.

# 공정한 사회를 위한 제도적 장치의 확립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다. 하지만 공정한 사회로 가는 제도와 수단만이 아니라 그 목적과 목표 또한 잊어선 안 된다. 공정사회를 지향하는 목표는 한마디로 저마다의 행복한 빵을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정사회로 가는 길은 결코 획일적 평등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저마다의 개성과 삶의 역정에 바탕해서 자기만의 빵을 만들어내는 그런 과정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가치를 담아냈던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가 끝났다.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 참 아쉬울 따름이다.


http://news.donga.com/Inter/3/02/20100917/31273239/1

Saturday, September 11, 2010

Hockley Valley Bottom Side Trail Walk


기분이 생소 했다. 이번 여름내내 카테지에서 골프로 세월을 보내느라, Trail Walk은 거의 까맣게 잊혀진 존재로, 나와는 상관 없는것으로 망각속에서 지냈었는데, 내몸의 컨디션을 한번 시험 해 보고픈 생각에, 만사 제치고, 짐을 싸서 어제 저녁 즉 금요일 저녁에 토론토를 향해 차를 달려서, 이튼날, 즉 오늘 아침에 모이는 장소인 Saldalwood Pkway 선상에 있는 McDonal's에서,그동안 적적했던 얼굴들과 해후를 했다. Trail Walk을 목적으로 만났지만, 우선 오랫만에 만나, 커피한잔을 테이블에 걸쳐놓고, 그동안 지내온 얘기들을 나누기에 바빠, Trail Walk은 마치 뒷전인것 처럼 비쳐질 정도였었다. 평상시에는 별로 연락도 없다가,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면 그렇게도 할얘기들이 쏟아져 나오는것 같다. 오늘은 우리 Trail Walk의 Future인 영아가 참석했고, 이제는 커버린 상현이도 누이와 함께, 또 윤지도 서산 넘어로 해가 지듯, 기울어져 가는 여름날의 아쉬움을 숲속에서 느껴 보려는듯, 부모들을 따라 나와 건강한 모습으로 합류했다.

Hockley Valley 맨 끝자락에서 북쪽을 향해 걸을려고, 목적지인 Airport Rd.와 5th Side Rd.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그동안 많이 변해 있는게 우선 낯설어 보였다. 그지역의 도로 포장공사와 Main Drain을 매설 하느라 주차장을 다 파헤져 놓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주차는 할수 있도록 Ground을 조성해 놓아, 그곳에는 우리 일행보다 먼저 도착한 Trail Group이 주차한 것으로 보이는 두대의 미니밴이 버티고 있었다.
우리팀도 그옆에 주차를 하고, 인원 점검을 하고, 가벼운 운동과 창조주께 산행 보고를 겸한 감사의 뜻을 올리고, 첫발길을 옮기기시작했다.
오늘은 Map의 약도에 따르면 약 15킬로쯤 걸을것 같다. 다 커버린 상현이가 앞장서서 가이드를 잘도 한다. 숲속의 오솔길은 여전히 변함없이 우리 일행을 무언으로 반기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한여름의 뜨거운 날씨는 아니지만, 그래도 언덕을 오를때는 Back Pack과 Shoulder 맞닿는 곳에는 땀이 흐르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숲사이로 불어오는 산들 바람은 땀을 식혀 주고, 기분을 상쾌하게 해 준다. 어려서 국민학교 음악시간에 배웠던 '산-들바람이 산-들 부운다-...' 길섶의 풀줄기는 어느새 빨간 열매를 맺어 먹음직 스럽게 탐스럼 모습을 뽐내주고 있었다. 오랫만의 산행이라 대원들이 잘 걸을수 있을까? 걱정 했었는데, 그것은 나의 기우일 뿐이었음을 계속해서 발길을 옮기면서 느낄수 있었다.

이곳은 원래는 Side Trail 구간이었었으나, 지난해 5월에 Re-route가 되여 Main Trail로 바뀌어 그가치를 더 빛나게 하고 있는 구간이다.
어느구간은 소나무로 덮혀 있고, 또 어느구간은 잡목으로 덮혀있고, 가끔씩 큰 단풍나무들이 그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큰 계곡이 별로 없이 약간의 Hilly일 뿐으로, senior나 초심자들에게는 걷기에 안성맛춤이다. 대원들 모두가 낙오없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그 걷는 모습들이 천연색으로 보이는 복장과도 잘 어울린다. 여러 다른 Trail Walk팀들과 조우도 가끔씩 하면서, 산을 걷는 사람들만이 느낄수 있는 인사를 나누고,
오늘은 Senior들로 구성된 다른 한인팀과 조우를 하기도 했다. 그분들은 우리보다 먼저 시작하여, 벌써 계획된 구간을 다 걷고 되돌아 오고 있었다. 그중에 한분이 눈에 익어 인사를 정답게 나누었는데, Veteran's Association에서 행사때 마다 만났던 역전의 용사분이다. 매주 산행을 해서 노익장을 과시 하는것을 오늘 산행에서 조우 하면서 그비결을 알수 있었다. 헤여지면서 그분이 계속 건강을 유지하시기를 빌었다.

뭐니뭐니 해도 준비해온 점심을 낙옆이 싸인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땀을 식혀 가면서 먹는 그맛을 어떻게 표현 할수있단 말인가.
"이반찬좀 먹어 보세요", " 와 참 맛있다. 꿀맛이네", " 집에서는 맛이 별로 였는데, 와 진짜 맛있다." "김치가 이렇게 꿀맛인것은 오늘이 처음인것 같네", "이 초밥은 또 별맛이네" " 이것은 앤초비에 고추를 Chopping해서 버무른것 같은데 별미네".... 등등. 원래는 약 15분쯤으로 점심을 마칠려고 했으나, 어느새 30분이 훌쩍 흘렀다. 기분은 이제야 겨우 한숫갈 목에 넘긴것 같은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여기에 맞는 말이 아닐까?라고 음미해 본다. 어느 대원은 다음달 산행은 어디로 가지요? 라고 성미 급하게 물어 보기도 한다. 그대원은 아마도 오늘 점심이 별맛임을 잊지못해 다음 산행에서 또 느껴 보고픈 생각에서 였으리라. 어찌 그대원만의 생각이겠는가. 모두의 생각을 대변한것일수도 있겠다라고 느낄수 있었다. 지금 이순간 같은 넉넉하고 포근한 삶이 대원들의 일상에서도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이제 며칠 남지 않은 Summer 거주지인 카테지에서 본가로 돌아와, 다시 매주 하게 되는 Trail Walk을 나와 Lunar가 계속 할수 있을지의 여부를 확인한, 오늘의 산행에서 신체적으로 아직은 건재함을 보아 기분이 좋았다. 무사히 대원 모두가 산행을 마침은 전적으로 창조주께서 보살려 주셨음을 감사해 하면서, 아침에 들렸던 McDonal's Restaurant에 들려, 커피한잔의 향으로 목을 추기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이바구를 하는 사이에 이제는 정말로 집으로 향해야 할 시간에 어쩔수 없이 자리를 떴다.
감사.

Friday, September 10, 2010

Hole in One은 Golfer들의 꿈과 행운이요 축복인데...그걸 못느끼는 바보도 봤다.

Golfer들에게는 Hole in One한번 해 보는것이 꿈이다. 그리고 축복으로 생각하고, 같이 라운딩 한 사람들은 영광의 상징 트로피를 정성들여 만들어 주고, 답례로 친지들을 불러 후한 저녁을 대접하면서 서로 즐기고 축복해 주는, 또 아직까지 해 보지 못한 Golfer들은 '나는 언제 한번 해 보게 되는 거지?'라는 등등의 부러움이 깃들인 푸념(?)을 늘어 놓게 되면서 결의(?)를 다짐 하기도 한다.

나의 경우는 금년초 추운 캐나다의 겨울을 피해 '큐바'로 골프 여행가서, 그곳에서 고향 선배 부인과 Lunar가 한조가 되여 라운딩 했는데, 그때 평상시에는 별로 잘친다고 생각안되였던 선배 부인께서 Hole in One을 한것을 목격한게 전부 였었다. TV에서는 가끔씩 보아 왔었지만, 실제로 그광경을 목격하니..... 본인은 벙벙 뛰고, 같이 라운딩한 팀들은 High Five하기에 정신이 없었고, 축하와 격려로 다음 홀로 Proceeding 하는것도 잊어 버리지 않았나? 할 정도로 흥분의 순간이었음을 기억한다. Pro Shop에서는 자기네 Recording Book에 기록하고 특별히 샴페인을 한병 선물 해 주기도 하면서 그들 또한 축하해 주는것을 잊지 않았었다. 그것으로 끝난게 아니다. 선배 부부는 우리 일행에게 '토론토에 돌아가면 정식으로 축하 파티를 열겠다'라고 약속까지 하셨다. 귀국후 North York의 한국식당에서 저녁을 겸한 샴페인 터뜨리는 모임을 갖게 된다고 연락이 와서 만사 제치고 참석했었다. 테이블위에 놓여 있는 샴페인병이 눈에 익은듯하여 물었더니, 큐바 골프장의 프로삽에서 선물로 받은것을 고히 간직 했다가 같이 다시한번 축하 하면서 마실려고 고히 보관 했다가 오늘 갖고 나온 것이라고 선배님이 설명해 주셨다.
골프점수를 따지자면, 불과 버디에서 한점 더 줄인것 밖에는 없다. 그러나 그스릴은, 골퍼이기에만 느낄수 있는 특권(?)일수도 있다 하겠다.
돈으로 따지면, 그날 선배님 부부는 많은 지출을 한 셈이다. 그러나 평생에 잊혀지지 않을, 또 어떤 골퍼들은 평생을 통해서 한번도 해 볼수 없이 다만 꿈을 그리면서 오늘도 Green을 밟고 있을, 친지들이 정성으로 만들어준 펜난트를 평생 지워지지 않을 기억속에서, 골프에서 얻은 훈장으로 가슴속에 간직할 것이다.

지난 7월 22일, 나는 이와는 전연 다른 또 하나의 Hole in One을 내눈으로 목격했었다. 은퇴후 여름동안 내가 Lunar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카테지에서, 일상으로 하다시피한 골프를 인근의 가까운 Barcovan Golf and Country Club에서 골핑하면서다. 우리 부부와 이곳에서 사업하면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와 동년배의 한인과 같이 라운딩을 하면서, 4번째홀의 Tee박스에서 샷을 준비 하고 있는데, 갑자기 Mashall이 다른 한인 'Mr C'를 태우고 나타나서, 같이 라운딩 할수 있겠느냐고 하기에 모두가 반가히 맞이 하면서, 같이 라운딩을 계속 했었다.
파3인 7번홀에서 Mr.C가 먼저 샷을 했다 170 야드 거리인데 7번아이언으로 날렸는데, 잘 날아가는것이 선명히 보였다. 이친구의 구질은 높이 뛰우기 보다는 약간 낮게 쳐서 멀리 보내는 스타일인데, 그린에 On 하는것을 본후, 나머지 우리 3명이 샷을 날렸는데, 3명 모두 볼을 그린에 안착 시키지 못한채, 그린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Mr. C는 평소에도 안정된 샷으로 싱글을 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그린에 다가서 볼을 찾았는데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속으로 볼이 굴러서 그린 뒷쪽으로 흘러서 벗어난 것으로 추측 했었다. 왜냐면 그친구의 볼은 잘 굴러가게 하는 구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볼을 찾기에 여념이 없는데, Pin Hole속에 볼이 있는것을 그친구가 발견하면서 알려주자, 순간적으로 모두가 놀라서(?) 누가 먼저라고 할것 없이 'Hole in One' 이다 라고 외쳐 댔다. High Five를 나누고, 축하의 악수를 하고.....모두가 즐겼다.
그친구는 골프경력 20년이 넘는데, 오늘 처음으로 Hole in One의 기쁨을 맞본다라고 말해 그 의미을 더해 주었다. 그친구는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지만, 무척 기분 좋아 보였다. 오히려 객인 우리가 더 흥분(?)한것 같은 분위기가 잠시 있기도 했었다.

라운딩이 끝나고 Pro Shop에서 더위도 식힐겸 음료수를 주문 하면서 일행 모두는 Mr.C가 먼저 '내가 한턱 쏘겠읍니다'라는 말을 할것으로 기대 했었는데, 뒷전에서 머뭇거리고 있는게 아닌가? 내가 그를 향해 'Mr C. 가 오늘은 내시요' 라고 내 뱉었다. 마지못해 음료수 한병씩을 얻어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게 됐다. 뭔가 그친구 하는짖을 보면서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같이 라운딩한 팀멤버로서 그냥 지나칠수는 없어, 내가 먼저 제의를 했다. 페난트를 해 드려야 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토론토에 오늘저녁에 집에 가서 전화해서 조속히 만들어 다시한번 그기쁨을 같이 나누고 싶다 라고. 모두가 찬성이다. Pro Shop의 주인 Greg과 Linda에게 알려 줬더니 그들도 기뻐해 하면서, 당장에 Pro shop 밖의 Bulletin Board에 계시하고, 또 이곳 지역 방소에도 알리겠단다. 그렇게 되면 아마도 내일 아침부터 하루종일 여러번 반복해서 Mr.C.의 Hole in One이 뉴스를 타게 될것이다 라고 하면서 축하해 주기도 했었다. 내가 더 급하게 느껴져 당장에 토론토에 장거리 전화를 해서 알아본즉은 값도 생각보다 비싸고, 또 시간도 걸린다고, 이러한 분야에 잘 아시는분의 대답이었다. 그말을 옆에서 들은 Mr.C.가 '한국에서는 당장에 현장에서도 만들어 준다'라고 하면서 왜 이곳은 이렇게 오래 걸리나?라고 오래 걸리는것을 이해 못하는 눈치같이 하면서 한마디 거들었다. 결정을 나혼자 할수 없기에 최종 확인 전화를 내일 다시 토론토에 해 주기로 하고, Lunar가 아닌, 다른 한분을 이튼날 아침 그의 가게로 찾아가 상의 했더니, 이곳 트랜튼이나 벨빌에도 있으니 자기가 한번 알아 보겠다고 하면서 당장에 전화를 했다. 펜난트의 질이 좋고 낮음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값이 토론토에서 보다 훨씬 저렴 했다. 가게를 헬파에게 맡겨놓고, 당장에 우리둘은 그곳으로 달려 갔다. 트랜튼에서는 제품이 기대 이하로 조잡하여, 다시 벨빌로 차를 몰았다. 주소만 들고 찾아 갔기에 여러번 주변을 헤메기도 했다. 제품은 마음에 들었다. Pennant에 새길 정보를 제공하고 며칠후에 찾기로 약속하고 왔다. 기왕이면 더 좋은 펜난트를 만들어 주고 싶어서, 오래전에 Hole in One을 했던 적이 있는 다른 한분, 즉 가게 하시는분은 그이튼날 다시 자기 펜난트를 제작사에 보여 주면서 좀더 모양이 좋은 것으로 만들어 달라는 뜻으로, 만사 제쳐놓고 벨빌로 차를 몰아 달려 갔었다. 전부 그분이 두번 내가 두번 합해서 4번을 펜난트 제작사에 들린 것이다. 약 2주후에 완성이 되여 Mr.C.에게 가게 하는분이 연락하였는데, 이런 바보가 세상에 또 있을까?
보통 골퍼들의 상식으로는 " 아 그러세요 고맙습니다. 저녁을 같이 한번 해야지요. 식당을 정해서 다시 연락 드리겠읍니다" 정도가 순서일텐데..... 뭐가 잘못된 것인지? 그의 대답은 "예 그래요"가 전부 였단다. 혹시나 다시 연락이 올까 며칠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고, 그후 골프장에서 다시 만났는데도, 페난트는 고사하고 인사 하는것도 마지못해 고개만 끄덕이는 정도로 지나쳤단다. 세상에 이럴수가 있을까? 라고 그분이 전화로 나에게 하소연아닌 괘씸함을 설명하는게 아닌가. 우리 모든것 다 접고, 기왕에 제작된 것이니, Pro Shop에 갖다주고, 그곳에서 찾아 가던가 말던가 하도록 합시다 로 결론은 냈었다. 그뒤에 그자는 Pro Shop에서 찾아 갔다고 들었다. 그뒤에도 라운딩 하면서 여러번 마주쳤으나 간단한 목례정도로 끝났었다. 나도 그자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하게 됐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Lunar가 그냥 지나치지 않고, "Mr. C. 그냥 입 딱 씹을거예요?" 라고 쏘아 부치자, 그친구 맞이 못해 '예 그렇게 하겠읍니다' 그것이 전부다. 골프를 아무리 잘 치면 뭘하나? 사람노릇을 곁들여 해야 서로 정감이 오가고, 같이 라운딩 하고픈 마음도 생기는 것인데.... Barcovan Golf장에서 골프하는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소문이 다 퍼져, 사람들이 그를 다시 한번 쳐다 볼정도가 된것 같다. 한번은 그자와 신앙생활을 같이 하는 여자분이 " 언제 저녁 할것예요? 그때 저도 불러 주세요. 같이 축하해 드릴려고요" 그러나 아무런 대꾸도 없이 지나 치더란다. 오히려 당혹감을 느꼈었단다. 그자와 라운딩 하는 사람은 매번 바뀐다. 모두가 한번으로 족한 것 같다. 이런 분위기를 알면서도 골프장에 거의 매일 출근 하는 그를 보면서, 나자신과 Lunar는 다시한번, 최소한 남에게 도움은 주지 못할지언정, 남으로 부터손가락질은 받으면 안되겠다라는 다짐을 하곤 또 하곤 한다.

골프는 신사,숙녀들의 놀이라고 한다. Hole in One 얼마나 듣기좋고, 또 내자신이 만들어 보고 싶은 바램인가. 나에게는 아직 그런 행운은 따르지 않고, Lunar역시 마찬가지이다.
가게 하시는 그분은 나와 거의 동년배 이신데, 그가 Hole in One했을때의 기분 좋았던 그때를 얘기 해줬다. 그때 같이 라운딩 한 팀들은 전부 이곳 서양사람들이라서 간단한 음료수로, 끝내고, 그후에 아는 한인 친지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하게 됐는데, 거의 40여명이 모였었단다. 그리고 모두가 같이 좋아하고.... 그분은 일생일대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하는 경사인데, 이정도 경비는 아까운 기분이 안들었단다. 이런때를 위해서 평상시 열심히 일해왔던것 아닌가?라고 피력한다. 맞는 말이다. 나도 그런 기회가 어서 빨이 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골프란 참으로 이상한 게임이다. 잘해 보겠다고 마음속에 다짐 하면서 볼을 맞힐려고 하면, 볼이 먼저 알고 다른곳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또한번 마음 아파하면서, 파안대소도 해 보는것 아니겠는가. Mr. C.가 세상 살아가는 방법이 특이 하다고 해야 할지? 요즘은 만나게 되면 그의 인생을 괜히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상대방의 성의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줄줄도 모르는, 자신에게 찾아온 어려운 행운의 표시를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 챙기는것은 잘 하면서, 같이 나눌줄 모르는 마포의 황부자 같은, 골프치는 기계에 불과한 존재로만 인식할것이다. 이것이 20년이 넘는 내 골프 경력에서 두번 목격한 Hole in One의 목격담이다.

Wednesday, September 08, 2010

종교는 무엇인가? '사랑, 구제, 영생 그리고...'라고 외쳐대는데.

종교란 무엇인가? 9/11의 엄청난 참화도 이제는 기억속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다.
각 종파간의 지도자들의 설교는 어느 웅변가 못지 않게 그앞에 앉아서 경청하고 있는 신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녹이고, 세상 살아가는데 유익한 지혜를 역설하는것으로 꽉 차 있다. 순진한 다수의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설교의 내용데로 세상살이를 할려고 무진 발버둥 치면서 고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많이 보고, 또 그길이 삶의 목적으로 여기고도 있다. 그래서 종교적 지도자들의 말 한마디는 심한 경우에는 한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게도 한다. 오늘 아침 미디어를 통해서 경악할 기사를 보았다. 미국 남쪽의 플로리다주에 있는 한 Church에서,이슬람 극력분자들에 의해 자행된 9/11사태를 기하여, 교회 앞마당에서 '코란경'을 불태우는 국제적인 운동을, 3일 후인 9월 11일에, 벌인다는 내용의 기사이다. 9/11의 후유증이 지금 미군이 아프칸에서 탈리반과 싸우게 만들고 있고, 그양상은 더 깊어만 갈뿐 좋아질 조짐은 전연 보이지 않아, 이를 지켜보는 전세계가 전전 긍긍하고 있는데.... 성경이나 코란이나 같은 믿음의 조상 Abraham을 시작으로, 사랑, 구제, 영생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본다. 이 운동을 주관 하고 있는 목사님은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 운동을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옛날과 달라서 불과 몇분 사이에 전세계로 펴져 나간다. 그여파는 일파 만파로 전세계를 뒤흔들고 있는것 같다. 미국민들의 대다수는 이운동을 반대 하고 있고, 아프칸과 이락에서 군사 작전을 하고 있는 미군들을 포함한 연합군의 위치를 어렵게 하고 있음이 걱정된다. 그목사님은 나름데로 뚜렷한 주관이 서 있기에, 교회 앞마당에 세워논 빌 보드에 ' International Qu'ran burning Day' 선전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주일날 교회에 나가 말씀 듣고, 이슬람인들은 Mosque에 나가는것은 물론이고, 하루에도 다섯번씩 시간에 맞추어, 하던 일도 중단하고 메카를 향해 이마가 땅에 쿵하고 닿을 정도로 큰 절을 하고 기도를 한다. 궁극적인 그들의 기도 목적은 사랑과 평화를 염원하고 있는것일 것이다. 목사님은 그러한 결정을 혼자서 했다고 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점이 있는것 같다. 교회에는 당회도 있고, 재직회도 있을 것이며, 또 주일날 설교도 했을 것이다. 코란을 불태워서 전세계가 사랑을 나누고 평화를 구가 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면 어느 누가 반대 하겠는가?

이슬람들에 대한 서방 세계의 선입관은 확연히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극렬분자들에 의한 9/11 사태는 전세계를 경악케 했었다. 그여파로 전 이슬람세계에 대한 이미지는, 그들은 극안 무도한자들이다 라고 치부됐었고, 나자신도 그러한 사람들중의 하나였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이 완전히 편견이었음을, 얼마전 이집트, 요르단, 두바이, 그리고 터키등 여러 중동지역의 이슬람 국가를 구경하면서 느꼈었다. 보통 시민들은 친절하기가 더할나위 없었고, 어떤집에서는 생면 부지의 우리 부부를 Home Stay까지 할수 있는 편의를 제공해 주었고, 내가 겪은 그분들을 보면서, 전쟁은 절대로 없을것, 특히 종교에 근거를 둔 분쟁은 발생할것 같지 않다는 확신으로 가득 찼었다. 그들은 순진했었고, 뭔가 도움을 줄려고, 언어가 통하지 않는데도 노력하는것을 많이 겪었었다. 오히려 서방 세계 특히 미국이나 유럽여러나라에서 수도 없이 발생하는 사회적 범죄들을 생각하면서, 진정한 사랑과 자애 그리고 모든 베풀음이 내가본 이슬람 국가에서는 모든 시민들이 함께 할려고 하는것을 그들의 일상에서 느꼈었다. 내가 살고 있는 Community에서는 Campaign이나 특별한 행사를 통해서나 볼수 있는 정도인데.....

이러한 망나니짖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보고 계신다면 분명히 노발 대발? 아니면 미소를 지으실까? '사랑, 평화 그리고 구제'를 행동으로 보여 주라고 했더니, 입으로만 사랑, 사랑 외쳐대는 위선으로 완전히 뒤덮힌 오늘날의 종교지도자들을 좌시 하지 않겠노라고 기회를 찾고 계실것으로 생각된다. 무섭다. 이슬람 창시자 마호멧이 이광경을 본다면, 예수님이 이광경를 본다면..... 많은 종교적 지도자들은 마호멧이나 예수나 다 살아서 역사 하신다고 강조 해 왔다. 그분들의 말씀데로 이렇게 긴박할때 간섭하시여, 인류의 사랑과 평화를 위해 말릴것은 말리고, 취할것은 취하게 하는 그런 능력을 보여 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끝까지 참는 하나님이시기에 지금도 참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또 기다릴수 밖에 없지만, 답답증은 더해 간다. 보편적인 생각에서 벌어져서는 안될 일들이 가끔씩 종교적 지도자들에 의해 행해지는것을 본다. 젊은 세대들은 어느종교이고간에, 이러한 상식을 벗어난 말씀이나 행동을 보면서 자기네 조상과 부모님들이 믿고 의지해온 종교에 대해 Cynical 해져 있음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현상은 서양교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으며, 우리 이민 교회에도 차차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늘 플로리다에 있는 교회의 한 목사님에 의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운동은 젊은 세대들에게 아무런 교훈을 주지 못할것으로 나는 확신 한다. 만약에 나의 아이들이 이점에 대해 질문을 해 온다면 나는 뭐라고 답변 해야 할지? 머리가 멍청해 진다. 말로만 외쳐 대는 '사랑, 평화, 영생, 구제'가 아닌 실질적인 삶의 본보기를 보고 싶은데.... 세상에 내가 목사, Terry Jones라고 알리고 싶어서 였을까? 뭔가 모자란 사람같아 보일 뿐이다.

http://www.nytimes.com/2010/09/10/us/10obama.html?_r=1&hp

http://www.thestar.com/news/world/article/857888--americans-rallying-against-qur-an-burning

http://www.latimes.com/news/politics/la-pn-boehner-koran-20100909,0,1743117.story

종교란 무엇인가? 사랑과 베푸는것이라고 외쳐대는데....

우선 내용이야 어찌됐든, 경악을 금치 못할 섬뜩한 일을 저지르는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이 볼때는 아무 다툼 거리도 안되는것을 놓고, 치고 박고 싸우는 유치한 작태들이 이제는 어른들 사회에서 그것도 공개적으로, 매스 미디어를 타고 전세계를 상대로 벌어지고 있다. 그싸움 내용이 종교적 종파간에 벌어진고 있다면? ...... 아직 요즘처럼 뉴스 전달방식이 발전하지 않았을때는, 입과 입을 통해서 옆으로 전해지던 시대에는, '낭설이겠지. 누가 음해 하려고 하는 모략이겠지...' 라고 하면서 시선을 집중하지 않았을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좀 과장 한다면, 어느 유명인이 공개 석상에서 말한마디 실수를 해도 전세계로 불과 몇초만에

Friday, September 03, 2010

China-Korea 관계, 아래 Article을 깊이 새겼으면...

당리 당략에 쏠려서 국가 장래를 망치는 작태는 이제는 그만 했으면 한다.
대통령은 현장을 살피면서 서민들의 실상을 피부로 느낄려고 노심초사하는데, 그를 보좌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은 이를 뒷받침 해주지 못하고 있는것 같아서, 안타깝기 그지없이 느껴진다. 입법부를 이끌어 가는
정치꾼들은 대통령의 이러한 정서를 전연 개의치 않고, 날이 새기가 무섭게 해대고 있다가도, 자기네들 밥그릇 챙길때는 아군과 적군이 없이 한통속이 되여 같이 배불리 나누어 먹은뒤에는 또다시 입에 거품을 품고 전진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릴려고 작당하는 일이...
김정일과 그 세력들은 6자회담을 다시 하겠다는 Trap을 쳐 놓고, 조국남한을 비롯한 관련국들이 덫에 쳐놓은 먹이를 넬름 받아먹기를 이리 저리 연구(?)하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 현재 쳐해있는 궁색하고, 코너에 몰려 있는 틈바구니를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치고 있는이때, 과연 남한의 정치꾼들의 행태는 개탄스럽지 않을수 없기만 하다. 외교장관이라는분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될수 없는, 김정일이 저지르고 있는 권력 세습을 전인류가 비난하고 있는것을 최전선에서 보면서, 정작 본인은 김정일이의 세습방법을 그대로 딸에게 이어 주려다 쫓겨 나지를 않나?....그래서 전세계의 또다른 뉴스거리를 만들어 주지를 않나. 꼴볼견이다. 양심의 부재가 한반도를 휩쓸고 있는것 같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뙤놈이 챙긴다'라는 옛말이 생각난다. 돈만 챙기려는 '뙤놈'들이 한반도에는 너무나 많다.
대통령이 아무리 강조해 본들, 그를 돕고 있는 보좌관들의 정신이 개혁을 하지 않는한 공염불이 될 공산만 크게 파장을 일으키고 있을 뿐이다. 이틈새를 놓치지않은 두 구룹이 머리에 선명히 그려진다.
첫째는 김정일과 Regime이요. 둘째는 남한의 좌파 정치꾼들이다. 그들에게는 얼마나 좋은 기회일것인가.

아래의 내용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할것이다.
지난 금요일 중국정부는, 북한의 김정일과 그일행이 중국을 공식 방문해서, 후진타오주석과 회담을 갖고, 무사히 본국으로 되돌아 갔다고 발표 했다. 김정일과 정상회담에서 후진타오는 '중국은 북한의 경제적 안정을 원하며, 북한 주민들의 생활향상을 원한다'라고 언급했다.
같은날, 미국은 북한이 핵개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금줄을 차단하기위한 경제봉쇄조치를 발표 하면서, 4명의 북한인재산, 3개회사, 5개의 정부 Agency를 마약밀매, 돈세탁, 위조지폐 활용등의 혐의로, 전격 동결 한다고 발표 했다.
중국은 성명문에서 북한주민들의 생활향상을 위한 조치를 강조 했지만, 실질적으로 북한 내부에서는 기근으로 실상은 참담하기만 하다. 경제개발과 원조를 위해 남한과의 협상에서 최고 책임자였던 자를, 남한의 새로운 정부가 좌파정권이었던 노정권과는 다른 방법으로, 즉 Give and Take의 원칙을 주장하면서 부터, 협상에서 의도대로 진행되지 못하게되자, 그실책을 물어, 무자비하게 공개 총살 시켰었다.
이러한 북한의 김정일과 Regime의 국가 운영에 식상한 중국인민들은 모래밭에 물퍼붓는식의 원조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정권으로 인식하고 있는것 같다. 중국당국은 북한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여 북한주민들의 생활이 향상된 상태에서, 중국과 북한이 원하는 방향에서 한반도 통일을 바라고 있으며, 이러한 통일은 중국에 지대한 이익을 가져올것으로 기대하고는 있으나..... 이러한 바램에 역행하는 북한 정권의 현실에 중국인들은 희망을 내던지고 있는 처지인것 같다. 이러한 구상대로 된다면, 장래에 한국, 자유중국 그리고 일본에 대한 미국의 역활에 대해서 어떻게 변할지 의문점이 생기지 않을수 없으나, 어쨋던 극동아시아지역에는 많은 이익이 있을것이다.

이렇게 중국은 먼날을 예측해 가면서, 한반도의 통일을 위한 토대를 이북을 이용해 쌓아가고 있는데, 남한의 좌파 정권은 지난 10년동안에 중국과 북한의 계획을 앞장서서 지지해준 정책으로 일관 했었고......남한의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 벌써 2년 반이 흘렀으나, 야당인 좌파 잔재들은 눈만 뜨면, 입만열면, 정부정책을 질기게도 물어뜯고 늘어지니.........이러한 비난을 앞장서서 반론하고, 왜 현정권은 전임 좌파 정권과 다른가를
앞장서서 홍보하여야 할, 대통령을 보좌 하는 장관들과 고급공무원들의 하는 작태를 보면서, 대통령에게 안타까움이 더 느껴진다. 참다운 정책이나 진실을, 인정하지 않고 반론제기를 여러번 반복해서 듣게되면, 본인도 모르게 그말에 생각이 바뀔수 있게된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의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서 그러한 변화를 자주 접하게 된다. 조국의 앞날이 정말로 걱정된다. 이제는 정말로 한번 잘 살아볼 때가, 기회가 포착된것 같은데, 놓치면 .....정치꾼들만 정신을 차려도 희망을 걸어볼만한데......

제삼자의 입장에서 읽어본 아래의 글들은 새겨볼만한 내용이다.


http://news.joins.com/article/059/4467059.html?ctg=2002&cloc=home|showcase|main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9/18/2010091800087.html?Dep1=news&Dep2=headline1&Dep3=h1_1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9/07/2010090700102.html?Dep1=news&Dep2=top&Dep3=top

http://www.nytimes.com/2010/09/05/world/asia/05korea.html?_r=1&ref=asia

http://www.theglobeandmail.com/news/opinions/the-china-korea-puzzle/article1694254/

Wednesday, September 01, 2010

좌파10년 집권과 그를 추종하는 정치꾼들의 흔적이요 결과이다....




오늘 읽은 본국의 동아일보 기사는 과히 충격적이었다. 젊은 세대들이 거의 기억도 못하고 있는 6/25 동족 상잔때는, 꼭 필요한 전차 한대가 없어 맨몸으로 적의 탱크를 막다가 산화한 순국 영령들에 대한 군선배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난의 설음과 없는 설음을 아파 했었는데.

군현대화 계획에 따라 한대에 30억이 넘는 전차를 운전할 기간 사병들이 부족하여 이제 갖군에 입대한 초병들에게 조종을 맡겨 사고가 잦거나, 작동방법이 서툴러 고철화 시키고 있다는 기사 말이다. 원래는 그러한 현대화된 장비는 준사관 이상이 조종하도록 되여 있다고 명시되여 있단다. 그러나 준사관의 인력화보가 어려워 할수 없이 초병들을 활용하고 있다는 부대 지휘관의 기사화된 얘기를 읽으면서... 군복무기간을 현재 24개월에서 18개월로 줄이겠다는 좌파정권과 그에 동조하는 정치꾼들의 사탕발림계산의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는구나 하면서 통탄해 하지 않을수 없다. 이기사를 고국의 정치꾼들이 읽어 보기나 했을까? 부대 지휘관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할것 같으며, 아직 분위기 파악도 덜됐을 초병이 조종석에 앉아서 머리속에 무엇을 그릴까? 심히 걱정 스럽다. 돼지목에 진주목거리를 걸어주는꼴로 밖에는 안보인다. 군대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 보낼수 밖에 없는 조국의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이렇게 아파하고 안타까워 하는 부모들의 정곡을 얄팍한 군복무기간 단축이라는 사탕발림으로 표를 얻어 집권하려는 정치꾼들, 당신들이야 말로 진정, 조국의 주적 김정일과 그일당들을 도와주는 역적들이라는것을 명심하기를 바란다. 약 45년전에 군대생활 할때도, 지금 생각하면 쇠붙이에 불과한 간단한 통신기기의 정비훈련을 위해 별도로 통신학교로 보내져 약 4개월이 넘게 교육을 받고 했었던 기억이 되살아 난다. 그렇게 학생신분이 되여 하루종일 공부를 해도 소화해 내기가 쉽지 않았던 기억이다. 교육이 끝난 초겨울에 전방 대성산이 있는 부대에 배치 됐는데....금방이라도 숲속에서 북괴군이 나타나 총을 쏘거나 목을 잘라 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2-3개월 이상을 나를 포함한 동료전우들의 머리속에서 떨어지지 않았었던 기억이 되살아 난다. 걱정이다. 좌파 정치꾼들의 술수에 놀아나는 국민들, 유권자분들의 올바른 판단이 절실히 요구된다. 기가 막힐 뿐이다. 동아일보의 기사를 옮겨 본다.


http://news.joins.com/article/123/4470123.html?ctg=1100&cloc=home|list|list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9/05/2010090500852.html?Dep1=news&Dep2=top&Dep3=top

http://news.donga.com/Politics/3/00/20100901/30893918/1

▲8월 17일 늦은 밤 경기도 연천군 다락대훈련장에서 육군 제26기계화보병사단 불무리부대 K-1전차가 야간사격을 하자 105mm 포탄이 날라가고 있다. (연천=연합뉴스) - 위의 사진설명.

Sunday, August 29, 2010

'남녀 평등'의 참뜻은 무엇이며 Honor될수 있을까?

몇년전에 University of Guelph 여학생이, 남녀평등이 실질적으로는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면이 많이 있다고 하면서, 남성들은 더우면 윗옷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 하는데 대한, 남녀불평등의 시정과 사회적 통념을 깨기위해 Topless인채로 교정을 활보 하다가, 황급히 출동한 경찰에 의해 연행되고, 결국 재판정에 출두 하여, 캐나다를 포함한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재판을 받았는데, 판사의 판결은 남녀평등의 원칙을 앞세워 그여대생의 손을 들어 주어, 그후부터 여성들도 법적으로는 엄연히 남성들이 하는것 처럼, 더우면 윗옷을 벗어 던진채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 할수 있는 권리를 찾았었다는 뉴스를 접한적이 있었다.
그후 그여대생의 행보에 대한 뉴스가 더이상 미디어를 탄 일은 없었던것 같다.
그런데 오늘, 그때 뉴스를 제공했던, 같은 고장 Guelph에서 여성행동주의자들이 그 권리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차원에서, 특별한 행사를 했다고 한다. 생각보다 많은 구경꾼들은 없었지만, 그나마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여성보다는 남성들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상기온으로 영상 29도에 체감 온도는 35도를 넘었다고 오늘 방송에서는 뉴스로 내보내는것을 들었는데, 이기회를 놓칠세라 여성들이 알몸으로, 남녀평등(?)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준 것이라고 한다. 구경꾼들인 남성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낄낄 거리면서 눈요기를 하기에 정신이 나갔었을것은 안보아도 뻔하게 느껴진다. 처음이라고 그럴것이라고 생각하는것은 Nonsense라고 믿는다. 이러한 행사장에서 또는 거리에서 상반신을 벗어던진 여성들이 활보하는것을 보면, 처음도 끝도 없이 뭇 남성들의 시선이 집중될것은 확실할것이라고 믿는다.

얼마전 여성전공이 전봇대에 올라가서 Power Line을 수리하고, 남성전공은 지상에서 그녀를 위로 올려다 보고 있는 장면을 본 기억이 오늘 새삼 떠 오른다. 나의 생각으로는 남녀평등은 남자가 할일, 여자가 할일을 하는것이 남녀평등의 보편적인 개념이 아닐까?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인류창조이래 여성이 윗옷을 벗지 않은 것은 신체적 구조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됐었기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려야 할곳은 가려야 여성다운 아름다운면이 더 가치의 빛을 발하게 되는것이고, 또 여성은 Breast를 통해 손수낳은 새생명을 키우는 귀중한 몸의 일부인데, 그래서 외부와 원치않는 접촉을 방지하기위한 깊은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전세계인류의 약 70% 이상은 아직 성적으로 왕성한 세대들인데, 노출된 여성의 상반신을 보는 그들의 감정은 어디로 치달을까? 사회적 사고가 많아질것은 자연의 순리로 귀결될 것이다. 내가 아직 어렸을때 부모님들은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말씀들을 자주 하시는것을 들은 기억이 있다. 아예 처음부터 그러한 빌미를 주지도 받지도 않게 하려는 어른들의 사려깊은 경험에서 였음을 그후에 알았었다.

오늘 이번 행사를 주관한 그여성들은 앞으로도 심한 더위가 계속될때는 편의를, 남녀평등을 핑계로 윗옷을 벗어 던지고, 지정된 장소가 아닌, 거리나 공공장소에서 출렁거리는 Breasts를 자랑스럽게(?) 앞세우고 활보 할수 있을까? 우연히 길거리를 활보하는 윗옷을 벗어던진, 남성과 여성이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걷는 그림을 그려보자. 자연스러울까? 말없이 조용히 지켜보고있는 다수의 여성들이 그행동에 동조하고, 실제 행동에 동의하고, 참여 할수있다고 믿어도 될까? 나의 아내 Lunar에게도 고견을 물어 보아야 겠다. 그녀로 부터 터져 나올 결과를 나는 알고 있다. '배부르니 별 미친 소리를 다하고 있다' 라고. 아이고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과연 뭐가 헌법에 보장된 권리이고 남녀평등인지?

이곳의 언론과 고국의 언론에서 이광경을 다룬 신문기사를 옮겨본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30/2010083000257.html?Dep1=news&Dep2=headline2&Dep3=h2_01

http://www.thestar.com/news/gta/article/853959--topless-in-guelph-legal-and-loving-it?bn=1

Friday, August 27, 2010

전통 숯가마속에서 찜질방을 즐긴다니.....마음은 그곳으로


옛날 조상님들이 즐겨 했던 전통 찜질방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문명의 발달로 그동안 자취를 감추다 시피했던 참나무숯을 굽는 숯가마를 이용하는것이 바로 이것이란다.
참나무숯을 굽는데, 참나무 기둥을 가마솥(Kiln)에 쌓아놓고 약 1주일을 계속 불을 지펴 땐다. 다된다음 가마 입구를 헐고, 갈구리로 잘 탄 숯을 끄집어 내어,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다. 가마속에서 하얗게 힘차게 타오르는 불꽃을 서영감님은 '내가 만들어낸 불꽃'이라고 설명한다. 그때의 온도는 섭씨 1400도쯤 된다고 하니, 옛날 어렸을때 시골 동네를 돌아 다니면서 구멍난 냄비를 납으로 때워주던 땜쟁이 아저씨가 사용했던 조그만 용광로의 온도보다 더 훨씬 높을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후에 약 200도 정도로 식으면, 동네 사람들이나 관광객들이 화학섬유가 아닌 무명옷이나 수건을 몸에 두르고 그숯가마속으로 들어가 열탕을 즐기는데, 그온도가 약 2일간 지속된다고 하는구나. 완전히 열이 식으면 숯굽는 서영감님은 다시 그안에 참나무기둥을 차곡차곡 쌓아 놓고 다시 약 일주일간 불을 땐단다. 즉 또다른 Cycle이 시작되는 것이다.
보통 그안에 들어가면 약 5시간 정도를 비지땀을 흘리면서 즐기는데, 구슬땀을 흘리다가, 다시 밖으로 나와 펼쳐져 있는 멍석위에 누워서 땀을 식히고, 갈증을 해소하기위해 연속 몇컵의 물을 마셔대고....
소문은 소문을 타고 널리 퍼지는법. 전국적으로 퍼져 이러한 전통 숯가마 찜질방이 대유행이라고 한다. 아무튼 못말리는 한국사람들의 특성을 여기서도 보는것 같다. 요즘은 아니지만 1970년대말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곳 토론토에서도 그러한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 교민들의 삶의 주업종인 Convenience Store가 성업중일때, 어느가게가 좀 잘된다는 소문이 나면, 얼마후에는 그옆에 새로운 가게를 Set-up하곤 해서 죽자 살자식으로 경쟁을 했었던, 결국 둘다 피해자가, 실패자가 되곤 했었던 기억이 떠오르게 한다.
강원도 횡성에서 처음 이사업을 우연히 시작했던 '서 석구'씨는 걱정이 많다고 한다. 이소문이 언론에 나자 전국에서 우후죽순격으로 비슷한 참숯찜질방이 문을 열어, 지금은 전국적으로 약 150개가 넘게 사업경쟁을 벌이고 있어, 이제는 돈벌이 되는 사업이 아니라고 한다. 지금까지는 곁가지로 발생했던 찜질방에서 수입의 주종을 이루었는데, 이제는 옛말이 되여가고, 다시 원래의 참숯구어 파는 수입으로 명맥을 이어가게 됐단다.
한참 사업이 전성기였던 2002-2004년경에는 전체 38개의 숯가마중에서 6개씩 관광객들에게 개방하여 하루에 약 450여명씩, 일인당 약 11,000원( 미화 약 9달러)씩 받고, 많은 수입을 올렸었단다.
숯가마 찜질방이 성공할수 있었던 것은 참숯과 질흙이 몸의 건강에 좋은 효과가 있다는 오랜전통의 민간 요법에서 유래 한다고 한다. 옛날에는 새색씨가 아기를 낳으면 출입문 입구에 참숯덩이를 매달은 금줄(탯줄?)을 매달어놓고 잡귀의 침입을 막아냈었다는 풍습이 있었다. 요즘에도 새로 집을 지을때는 거실한곳에 숯덩이를 보관하여 냄새를 없애고 또 공기정화를 시킨다고 한다.

서영감님의 숯가마 아궁이에서 안을 들여다 보면 하얗게 발열하는 불빛을 보면서, 관광객들은 자기네 마음까지도 깨끗해짐을 느낀다고 토로하고 있다. 40세의 임현오씨는 원래 쓰래기 소각장을 운영 했었는데, 그영향으로 온몸에 피부병이 생겨 의사의 치료를 계속 받았었으나 효과가 없어, 금년초에 우연히 이곳에 들려 찜질방을 이용해 본후 주기적으로 찾아 이용했는데 지금은 피부병이 거의 낳아, 아예 이곳에서 Part-time Job을 잡아 참숯가마에서 일하면서 돈을 벌어,참숯가마 찜질방을 이용하는 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면서 좋아 한다.
"관절염이나 암환자들이 몇개월씩 장기간 숯가마를 세내어 그곳에 기거 하면서 치료를 하고 있어요. 아마도 숯가마에서 나오는 열이 몸속에서 묻혀 있는 노폐물들을 땀으로 빠져 나오게 하는 역활을 하고 있다는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읍니다" 라는 설명이다.

서영감님의 옆에서 같은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경쟁자들은 많은 자금을 투자하여 샤워시설과 정원을 아름답게 꾸며 손님들을 유치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떤곳은 아예 참숯구이 불갈비 식당도 겸하고....
그러나 서영감님 영업장에는 그러한 현대식 시설이 거의 없다. "우리는 우리의 할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기에, 우리는 숯가마에 불을 때서 참숯을 만들뿐, 이곳은 스파가 아니다"라고 변형된 영업을 간접적으로 질타했다. 돈의 위력을 무시 하는것은 아니지만, 문명을 탈피하고, 못살았을때 서민들이 즐겨 찾았던 민간 요법을 그대로, 비록 이용하기에 불편하다해도, 체험 하도록 해 보는것도 큰 의미가 있을텐데.....

문득 높은 굴뚝을 상징으로 길게 만들어진 벽돌가마가 세워져 있었던, 고향동네가 생각난다.
매일 아침 저녁 학교를 오가면서 그곳을 지나쳤었다. 한번 벽돌을 굽게 되면, 며칠간을 긴가마 여러곳에 있는 아궁이에 장작불을 피워 벽돌을 굽던, 굴뚝에서는 새하얀 연기가 하늘 높을줄 모르고 피워 올랐었던, 특히나 초가을의 구름한점없던 파란 하늘위로 솟아 오르는 연기는 때로는 바람에 휩쓸려 끌려가듯 옆으로 날리기도 했었고, 바람이 없는 날에는 곧바로 위로 뻗어 올라가는 모습을 고개가 빠져라 올려다 보곤 했었다. 이제는 기억속에서만 볼뿐이다. 그기억속에 있는 고향으로 마음은 바삐 달려간다. 이미 다 변해 버렸겠지만..

서영감님이 운영하는 참숯찜질방과 같은 현대판 찜질방이 전국의 각도시에, 참숯대신 전기히터를 이용하여 성업을 하고 있음을 나도 알고 있다. 지난번 고국을 방문했을때, 처음으로 말로만 들어왔던 그찜질방을 두번, 친구분들과 함께 이용했었다. 겉모양은 참숯가마처럼 검댕이도 칠해져 있었고....그것마져도 나에게는 옛정취를 충분히 느낄수 있게 했었다. 이방인이어서 였을까? 아니면 시간의 흐름속에서 찾아 볼려고 했던 희미한 기억의 망상에서 였을까? 서영감님의 사업이 계속 잘되기를 바랄뿐이다.


http://www.nytimes.com/2010/08/27/world/asia/27iht-kiln.html?_r=1&ref=asia

Saturday, August 21, 2010

3대째 세습체제를, 전 세계에 통고 하고 있는데.....


오는 9월6에 인민 전당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그것도 북한 노동당 창건 44년의 역사상 최대의 규모로 진행 될것이라고 한다. 스트로크로 반신불수가 된것으로 세상에 알려진 김정일의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다. 그가 몸을 움직이고, 어눌한 말이라도 할수 있을때, 고분고분하게 잘 길들여진 강아지처럼 그의 아버지 말을 잘 들어온 3째 아들에게, 노동당 전당 대회에서, 세습체제를 이양 할것을 천명 할것으로 서방 세계는 주시하면서 그날을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지구상의 많은 종이 호랑이들이 안타깝게만 보인다. 이해가 안되고, 또 동의할수 없는, 분명한 점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가, 그들의 말을 잘 듣지않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압박도 가하고, 그래도 고분고분 따르지 않을때는, 무력을 동원하여 그정권을 쫓아 내는데 주저 하지 않다는 증거를 세계 도처에서 보고 있고, 현재도 진행형이 여러곳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유독히도 북괴의 김정일과 그 Regime에 대해서만은 무력은 고사하고, Warning도 못하고, 꺼꾸로 그 Regime의 공갈에 질질 끌려 다니기만 하는, 도저히 이해 할수가 없는 그내막을 나는 도저히, 그수수깨끼가 풀어 지지않고 있다. 그들은 보라는듯이 이번 전당 대회를 사상최대로 진행할것이라고 공공연히 전세상에 통고형식으로 알리고 있다. 한,미 양국의 군사훈련이 서해상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동해상에서는 이러한 훈련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라는 식으로 항의 하듯이, 남쪽의 어선을 납치하여 흥정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속수무책으로 남한정부나 미국은 마치 그들의 눈치만 보는듯한 자세로 일관하고 있는점이 더 궁금하게 만들고 있다. 더욱더 이해가 안되는점은, 북쪽과 대치하고 있는 남쪽 정부의 어정쩡한 자세다. 자기 마음데로 이북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입에 담지못할 욕짖거리를 남한 정부에 해댄 그자가 또 자기 마음데로 이번에는 휴전선을 넘어서 남쪽으로 넘어왔는데도, 겨우 한다는짖이, 그가 남한국민이기때문에 입국을 저지할수 없다는 궁색한 변명으로 일을 처리하고, 경찰 유치장에 가두어서 조사중이라고 하니.... 북괴정부는 이를 두고, 죄없는 시민을 가두어 인권을 유린하는 독재정권이라고 남한 정부를 연일 악의에 찬 비난을 퍼붓고 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굶주림과 공포가 두려워 탈북했다가 불행하게도 붙잡혀서, 북괴땅으로 되돌려 보내면, 죄의 유무를 묻기는 고사하고,당장에 공개총살형을 파리목숨죽이듯하는 그런 인간 이하의 집단들에게, 어째서 일까? 전세계가 벙어리가 되여 버린것 처럼 나에게는 보이니 말이다. 자유는 그냥 공짜로 누려지는것은 아닌데....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이상의 힘이 필요로 하고, 그러기위해서 우리는 대비책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라고 천명하면서, 공산주의의 종주국 쏘련방을 총한방 사용하지 않고, 무릎을 꿇게하고, 그나라를 포함한 위성국가들의 국민들에게 자유를 누리게 해주었던 Ronald Regan 대통령이 새삼 그립다. 허지만 그러한 대통령의 메세지가 북한 Regime에게는 먹혀 들어가지 못한것이, 시기적으로 남쪽의 좌파정부가 들어서는 시기와 맞물려, 김정일 정권은 이를 최대한 이용하여,핵무기까지 개발하는 허세를 부리면서 오늘에 이르렀는데, 그여세를 몰아 이제는 전세계를 상대로, 아들'정은'에게 왕위를 이양할려고 하니, 축하해달라는식의 통고를 거침없이 해대고 있다고 한다. 아 불쌍한 북한의 동포를, 무시무시한 김정일과 그 Regime의 공포정치와 굶주림으로 부터 해방시킬, 진정한 나라나 사람은 누구이며, 그시기는 언제가 될까? 6/25 사변이 끝나고, 아직 어수선한 속에서 국민학교에 입학했을때, '이제 평란됐으니 멀지않아 남북통일도 될것이다'라고 약 58년전에 하셨던 아버님의 그 말뜻이 새삼 두렵기만 해진다. 그때 그말씀을 하셨던 아버지의 삶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가고있는 내자신의 세대에, 마음놓고 고국한반도 제주에서 북한 두만강을 건너서 광할한 중국과 쏘련땅을 자동차로 달려볼수 있는 진정한 평화를 누려볼수있게 되기를, 마음속에 깊이 새겨볼 뿐이다.


http://www.theglobeandmail.com/news/world/asia-pacific/rise-of-kim-jong-ils-son-gives-birth-to-cult-legend/article1729489/

http://www.cnn.com/2010/WORLD/asiapcf/09/27/north.korea.promotion/index.html?hpt=T2

http://www.latimes.com/news/nationworld/world/la-fg-north-korea-successor-20100928,0,3334344.story

http://www.cnn.com/2010/OPINION/09/26/north.korea.future/index.html

http://www.nytimes.com/2010/09/28/world/asia/28korea.html?_r=1&ref=asia

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10/09/26/AR2010092603801.html?hpid=topnews

http://www.nytimes.com/2010/09/16/world/asia/16korea.html?_r=1&ref=asia

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10/09/13/AR2010091303245.html

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10/08/26/AR2010082601093.html

http://www.nytimes.com/2010/08/27/world/asia/27korea.html?_r=1&ref=asia

http://online.wsj.com/article/SB10001424052748703579804575441461274411060.html?mod=WSJ_hpp_sections_world

힘은 필요할때 꼭 사용하게 되면 평화를 다시 찾는것이고, 이를 함부로 휘두르면 많은 살상이 이루어짐을, 내삶속에서도 무수히 보아왔다. 전세계가 평범한, 진리라기보다는, 상식이 더 이상은 통하지 않는 지구로 전락했다. 9월6일 이후의 북한 Regime과 전세계의 종이호랑이들의 북괴눈치 보는 재미가 역설적으로 흥미로울것만 같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권력 세습체제가 김정일과 그일당이 계획하는데로 순조롭게 치러지게 될것이라는 낙관도 금물이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예기치 못하는 일들이 아무때고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부의 암투에서 김정일과 그일당이 쫓겨나서 새로운 얼굴이 바통을 이어받을수도 있다는 가설도 해 봄직하다. 그는 너무나 많은 죄를, 자기가 통치하고 있는 이북뿐만이 아니고 전세계를 향하여 뿌려 댔으니 말이다. 지금은 역사속으로 사라진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크'의 최후 순간이 언론을 장식했었던 당시의 모습이 떠오른다. 불쌍하여라.

사진은 김정일과 Regime이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해서, 권력세습을 위해 중국 권력층에 구걸을 끝낸다음 다시 특별열차로 귀국하고 있는 모습이다.

Tuesday, August 17, 2010

강제 합병된지 100년후의 조국을 본다....경제에 맞게 정신 연령이 성숙했으면...

금년이 조국이 일본에 강제 합병된지 100 주년이 된다고 한다. 지금으로 부터 50-60년전의 가난하고 못살았었던 기억이 나에게도 기억속에 생생하다. 지금의 발전된 조국과 당시의 나의 기억속에 저장되여 있는, 가난하고 희망도 없어 보였던 상황을 비교해 보면, 말로는 다 표현하지못할, 슬픔과 애환이 가슴과 머리속에서 메아리 쳐진다. 해방된 조국이였는데도 그렇게 어려웠던 기억만 떠오르는데, 하물려 강제로 합병된, 잃어버린 조국땅에서 주인 행세도 못하고, 노예같은, 기르는 말과 소처럼, 하라는데로 살아야 했던 조상님들과 선배님들의 당시의 삶의 질을 어렴푸시나마 그림을 그려볼수 있겠다. 얼마나 서럽고 원통했었을까? 지금의 김정일 치하의 이북동포들이 아직도 그때와 다름없는 굶주림과 고통과 노예의 생활을 하고 있음을 언론을 통해서 접하면서, 먼저간 조상님들 고달픔과 울분을 이해 할려고 한다. 조국 남한의 국민들은 이제는 정신적으로 더 성숙하여, 조국의 번영과 자유를 유지하기위한 마음의 다짐을 굳게 하시기를 바라고 싶다. 부모형제가 살고 있는 남한 조국의 정치판을 보노라면,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구별이 한되는 망나니짖들을 거리낌 없이 해대는 그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식민지 통치하에서의 그들의 부모, 친척들의 노예 생활상을, 역사를 통하여 공부하고, 현실을 직시하여, 번영된 조국의 앞날을 위해 헌신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픈 심정이다. 일제 강제 합병이나, 김정일과 그일당이 저지르는 만행이 하나도 다를게 없다는것을 정치꾼들이 마음으로 부터 이해하고 행동으로 옮겨, 정신적으로 성숙된 국민의 일원이 되여, 후세에 밀사 3인과 같은 인물들이 되기를 기대한다.

아래의 글은 고국의 조선일보에서 발췌하여 옮겨 실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7/201008270167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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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5/2010082501539.html?Dep1=news&Dep2=top&Dep3=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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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 강제병합 100년… 조선의 운명 가른 '다섯 조약' 현장을 찾아] '나라로서의 한국은 이번 주 사라진다'
이한수 기자 hslee@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기사100자평(10)
입력 : 2010.08.18 03:06
뉴욕타임스 1910년 8월 22일자 제목


미국과 영국 등 서구 언론들은 한·일 강제병합 조약 체결 전부터 일제의 한국병합 사실을 타전하고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1910년 8월 18일자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다(JAPAN IS ABOUT TO ANNEX KOREA)'라는 제목의 도쿄발(發) 기사에서 "오래전부터 예견되던 일본의 한국 병합이 곧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의 독립은 이미 1905년 11월 17일 일본과 맺은 조약(을사늑약) 때 실질적으로 종식됐다"고 보도했다.


▲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을 보도한 뉴욕타임스 1910년 8월 22일자. ‘나라로서의 한국은 이번 주 사라진다’는 큰 제목과 ‘어떤 소요도 예상되지 않는다’ ‘철저한 경찰 통제 때문에 한국인들은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전혀 모른다’는 소제목들이 달렸다.
뉴욕타임스는 이어 8월 20일자에 "한국 전역은 일본의 강력한 군사적 감시하에 있으며, 수많은 일본 군함이 한국 해안을 순찰하고 있다"면서 "일본은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여러 정황들을 볼 때 병합은 임박했다"고 썼다. 8월 22일자에는 '나라로서의 한국은 이번 주에 사라진다(KOREA AS A NATION TO END THIS WEEK)'라는 제목 아래 "일주일 내에 '은둔의 왕국' 대한제국(Empire of Korea)은 역사적 용어가 되고, 1200만 인구는 일본에 더해지며, 잉글랜드만 한 크기의 영토는 일본제국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후 '한국은 이제 일본'(23일), '일본, 한국병합 공포한다'(25일) 등 연일 한·일 강제병합 소식을 전했다.

영국 유력지 더타임스도 8월 25일 "일본의 한국병합이 언제든 실현되리라는 것은 이미 예견되어 왔으며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면서 "대영제국은 영·일동맹에 따라 일본이 한국에서 우월한(paramount) 정치·군사·경제적 이익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했었다"고 보도했다. 더타임스의 관심은 한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영국의 경제적 이익에 관한 것이었다. 8월 27일자 더타임스의 '편집자에게' 코너에 '일본과 한국'이란 글을 실은 독자는 "일본은 상업 및 산업에서 모든 나라에 동등한 기회 원칙을 약속했는데 이것이 제대로 실행되어야 한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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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ㆍ학술
[韓·日 강제병합 100년… 조선의 운명 가른 '다섯 조약' 현장을 찾아] [4]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입력 : 2010.08.11 02:43 / 수정 : 2010.08.11 07:12

고종 밀사 3명(이상설·이준·이위종) 쫓아냈던
'기사의 집(당시 회의장·The Hall of Knights)'…
이제 6유로 (약 9300원)내면 맘껏 관광
믿었던 러시아 초청 거부…
"을사늑약은 효력 없다" 회의장 앞 울분의 연설
국제형사재판소 소장 등 지금은 한국인들 맹활약
和 "G20 초청해달라" 로비도…

네덜란드 의회와 정부 사무실이 모여 있는 헤이그 도심 비넨호프(Binnenhof) 광장 한가운데 자리 잡은 '기사의 집(The Hall of Knights)' 탑의 시계가 오후 3시를 가리켰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자동차가 한가롭게 손님을 맞았다. 관광객과 행인들이 벤치에서 잠시 지친 다리를 쉬었다. 1907년 6월 26일 지구 반대편 대한제국에서 온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밀사 3명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이보다 훨씬 분주했을 것이다.

1907년 6월 15일 오후 3시, 45개국 대표 239명이 참석한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가 '기사의 집'에서 막을 올렸다. 헤이그시(市) 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사진은 이날 비넨호프 광장에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각국 대표단이 마차를 타고 잇달아 회의장에 입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개막 열흘 뒤인 6월 25일 헤이그역(Hague HS)에 도착한 이상설 등은 회의장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다. 1905년 9월 이범진 주러시아 대한제국 공사가 만국평화회의 주최국인 러시아로부터 초청을 받았으나, 정작 회의 직전에는 일본의 보호국이란 이유로 공식 초청장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1905년 을사늑약은 무효다." "일본은 우리를 식민 상태로 몰아넣고 독립을 존중한다고 한다." 프랑스어와 영어에 능통했던 스무살 청년 이위종은 닫힌 회의장 앞에서 연설한 뒤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입장료 6유로(약 9300원)를 내고, 안내원이 딸린 '기사의 집' 투어에 참가했다. '기사의 집'은 높이 26m의 천장 아래 쇠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를 끼워 맞췄다. 13세기 중반에 처음 세워졌고, 1900년쯤 대대적 수리를 마친 이곳은 제2차 만국평화회의 당시엔 더 당당하게 보였을 것이다.

좁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자 당시 밀사들이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했던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오른쪽 왕좌(王座) 위에 알파벳 'B'가 새겨져 있다. 베아트릭스(Beatrix) 현 네덜란드 여왕 이름의 첫 글자다. 여왕은 매년 9월 셋째 화요일에 황금마차를 타고, '기사의 집'에 와서 왕좌에 앉아 다음 해 시정 방향을 알리는 연설을 한다. 네덜란드 상·하원, 정부 각료는 물론 왕족과 외교관들까지 참석하고, 언론이 열띤 취재경쟁을 벌이는 성대한 행사다. 1904년 빌헬미나 여왕이 시작한 이래 100년 넘게 이어지는 전통이다.

열강들이 각축하던 시기에 세계 평화를 도모한 만국평화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안으로 제1차 회의가 1899년 헤이그에서 2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헤이그가 회의 장소로 선택된 것은 네덜란드가 당시 대표적 중립국이었고, 여러 차례 평화회의를 개최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07년 6월 제2차 회의가 속개됐고, 그해 10월 18일 폐막한 만국평화회의는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관한 협약' 등 협약 13개와 선언 2개, 권고 5개 등 국제 사회의 새 규칙을 만들어냈으며, '국제중재재판소' 설치(1909년)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남겼다.


▲ 네덜란드 정치 1번지로 꼽히는 헤이그 비넨호프 광장의‘기사의 집’. 1907년 한국의 밀사들이 입장을 거부당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곳이다. /헤이그〓김기철 기자
45개 참가국 대표들이 20세기 국제 사회의 새 판을 짜는 회의에 한창일 때, 회의장 밖으로 밀려난 밀사들은 일본의 침략과 한국의 독립을 알리는 외교 활동에 착수했다. 숙소인 드 용 호텔(Hotel De Jong·현 이준 기념관)에 태극기를 내건 이들은 6월 27일 각국 대표들에게 탄원서를 보내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렸다. 7월 8일, 이위종은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를 발표했다. "일본이 기마병, 보병, 그리고 포병부대를 동원해 서울을 둘러싸고 왕궁을 포위한 가운데 1905년 11월 15일 이토는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소위 을사조약을 강요했다… 우의와 형제애를 말하면서 주머니를 훔치는 위선자인 일본은 백주의 강도보다도 더 비열하고 야수적인 것이다."

헤이그 중앙역에서 서쪽으로 운하를 건너면 프린세스가(街) 6·7번지에 닿는다. 붉은 벽돌색 낡은 3층 건물 앞에는 내부수리 때문인지 출입금지선이 드리워져 있었다.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당시 각국 대표단과 사회운동가, 기자들이 모이는 '국제서클(Circle International)'이 이 자리에 있었고, 그곳에서 이위종이 '한국의 호소'를 발표했다.

고종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기대 일본의 주권침해를 고발하려 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오히려 밀사 파견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일본의 위협에 밀려 강제로 퇴위당했다. 하지만 쿤 드 퀘스터(Koen De Ceuster) 네덜란드 레이덴대 교수는 "헤이그 특사단이 한국의 식민지화를 막지 못했지만, 한국을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과 국가의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국제법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 이위종이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는 연설을 한‘국제 서클’이 있던 건물. /헤이그〓김기철 기자
고종의 밀사들이 '길거리 외교'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흔히 일본의 방해공작을 거론한다. 그러나 최근 학계는 일본뿐 아니라 영국·미국·러시아 등 서구 열강들도 한국의 만국평화회의 참가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당초 한국을 초청했던 러시아는 1906년 이즈볼스키 외상 취임과 함께 영·일과의 타협을 추진하면서 입장을 바꿨다. 제2차 영일동맹(1905년 8월 12일)으로 한국의 보호국화를 승인했던 영국은 을사늑약 이후 주한 공사관을 철수했을 뿐 아니라 러시아와 프랑스 등 다른 열강들의 공사관 철수도 종용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7월 27일)으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승인한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약한 국가' 때문에 '문명국가' 간의 전쟁이 벌어지는 사태를 막자는 것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지금 헤이그에는 송상현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과 권오곤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 부소장 등이 국제기구 간부로 활약하고 있다. 화학무기금지기구(OPCW)에도 사찰관 3명이 진출해 있다. 김영원 주네덜란드 대사는 "네덜란드로부터 오는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에 초청해달라는 로비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100년 전 회의 참석조차 거절당했던 세 밀사들이 하늘과 땅처럼 달라진 한국의 위상을 보면 자신들의 활동이 헛되지 않았다고 기뻐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일보·동북아역사재단 공동기획

http://news.joins.com/article/065/4392065.html?ctg=1005&cloc=home|list|list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