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ugust 23, 2011
Jack Layton의 서거(Aug 22,2011)
Jack Layton의 서거(Aug 22,2011)를 보면서, 부질없는 인생살이라는것을 더 깊이 느낀다.
평소에는 아비인 내가 Text message를 보내야 겨우 답장을 하는식으로 연락을 하고 있던 아들녀석이 오전 10시경에 Text message를 보내왔다. 분명히 어떤 일이 벌어졌거나 아니면 내가 알아야할 뉴스가 있는것 아니겠는가?라고 생각하면서 내용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예측한 그대로 였다.
"Dad. Tell Mom kimchi is really good. Did you hear about Jack Layton?"
엄마가 만들어준 김치는 겉으로 하는 인사치례였고, NDP당수 Jack Layton의 서거 소식을 알려 줄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Cottage 아랫층에 세들어 살고 있는 Randy에게 Jack Layton을 물었더니, 오늘 새벽 4;45분경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래디오에서 들었노라고 전해준다.
카테지에는 TV도 있지만 Cable이 연결안돼 먹통이고, 모양은 찌그러지고 cassette뚜껑도 없는 래디오가 있어서 가끔씩은 노래와 뉴스를 듣고 했지만, 요며칠 사이는 그것 마져도 꺼놓고 있었기에 뉴스를 못들었던 것이다. 앞마당에 쌓아놓은 Fire wood를 사러온 사람들이 신호를 해도 행여나 래디오소리 때문에 우리가 못들을까봐서, Lunar가 꺼놓곤 해왔기 때문에 바깥세상의 뉴스통로는, 자동차를 타면 자동으로 나오게 되여있는 AM680을 듣는것 외에는, 거의 막혀 지내는 셈이다. 바깥세상과 접촉이 뜸하게 되면, 좋은점도 있고, 나쁜점도 있고....그래도 결론은 바깥세상과 연결되여 있어야 정상적인 생활인이 될수 있다는 나의 지론에는 아직까지는 변함이 없다.
우선 그의 운명에 대해 깊은 조의를 표하고 싶다. 그의 정치철학은 내가 생각하는것과는 상반되는 정치인이었기에 선거때마다 그가 속한 정당에 표를 던진일은 없어왔고, 앞으로 그럴것이지만, 똑똑하고 나름데로 신념이 있고 유머를 잃지않았던 유망한 정치인을 잃었다는것에 나 개인적으로는 무척 아깝다. 이제 갖 61세를 맞이한 아직 젊은 청년 같은 패기가 왕성한 그였었는데, 금년도 이른봄 연방선거 유세때에도 그는 지팡이를 짚고 어려운 발걸음을 하면서 유세 하는 그를 보면서 의아해 했었는데, 그때 뉴스에 의하면 넘어져서 hip을 다쳐 현재 회복중에 있는 중이라고만 발표했었다. 선거가 끝나고 뚜껑을 열어 보았을때, 결과를 보고 캐나다인들 모두가 다 놀랐을 정도로, 선거전 제1야당이었던, Michael Ignatieff가 이끄는 자유당을 압도적으로 물리치고 NDP가 제1야당으로 부상하는 큰 업적을 일구어낸 그를 다시 보면서, 역시 인물이구나 라고 다시 보게 됐었다. 그후 불과 몇개월이 안되여 TV화면에 비친 그의 상태에서 뭔가 잘못되여 가고 있구나 라고 생각을 하면서 지켜 보았었는데 약 한달전,즉 7월 25일날, 그가 암치료 때문에 임시로 당수직을, 쾌백주에서 당선된 초선의원출신에게 넘겨준다고 발표하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졌었는데, 오늘 아침 이렇게 참담하고 아까운 뉴스를 접하고 만것이다.
그는 Montreal소재 McGill대학을 다녔으녀, 19세때 같은 학교에 다녔던 여자친구 Sally Halford와 전격 결혼을 해서 두아이 Sarah, Michael이 있고, 딸에 대한 얘기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아들은 현재 그의 새엄마가 시의원으로 있을때의 토론토 다운타운의 선거구를 물려받아 현재 시의원으로 재직중에 있다.
그는 1985년에 이혼하고, 현재의 부인, 당시에는 School Trustee였던, Olivia Chow와 재혼하여, 같이 정치인 생활을 해오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동시에 시의원으로, 2003년에는 연방 NDP당수 Alexa McDonough여사가 물러나자, 경선에서 당수로 선출되여, 그의 부인 Oivia Chow와 같이 연방의원에 도전하여 나란히 Ottawa에 입성 했었다. 당수로 선출당시 NDP 연방의원수는 13명이었었고, 그의 눈부신 활동으로 2004년선거에선 19명이, 그리고 금년도 5월에 실시된 연방선거에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선전하여 103명의 의원을 당선시키는 기염을 토했었다.
그는 1972년에 토론토로 이주하여 Ryerson College에서 Urban Politic을 강의 하면서, Ph.D자격도 획득하는 노력파이기도 했다. 그후 1982년부터 정치에 뛰어들어 시의원직을 시작으로 오늘에 이르렀었다.
그의 집안은 정치가의 기질을 타고 난것 같다. 그의 할아버지 Gilbert Layton은 퀘백주의 Nationale 정부의 Maurice Dupessis 수상이 이끄는 내각에서 장관을 지냈었고, 그의 아버지 Robert Layton은,Brian Mulorney가 이끄는 연방 보수당 내각에서 동력 자원부 장관을 오래 했었다.
그의 투병생활은 처음에 Prostate Cancer수술을 받고, 요양하면서 정치생활을 겸하면서, 암과의 싸움에서꼭이기고 말것이라고 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의지를 보여왔었으나, 뜻하지 않게 엉덩이 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하여, 지난번 선거때는 Cane에 의지하면서 유세를 했었다.
Harper연방정부 수상은 그의 장례식을 국장(State Funeral)으로 치를 것이라고 발표 했으며, 연방 정부 청사와 토론톤시 청사에서는 그의 서거소식이후 조기를 계양하고 있으며, 토론토시는 그의 장례식을 Roy Thompson Hall에서 치르기위해 현재 작업중에 있다라고 어제 오후 늦게 발표 했다.
그가 연방정치무대에 뛰어들어 활동한 기간은 길다고는 볼수 없지만, 그의 독특한 정치철학에서 나온 NDP사상은 Pro이든 Con이든 많은 캐나다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것만은 확실한것 같다. 서민들 특히 국가의 은덕을 많이입고 사는 사람들로부터 그는 천사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존경을 받아 왔었지만, 정치적 로선이 다른 정적들도 그의 서거에는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그가 없어진 정치무대에서 앞으로는 누가 그를 대신하여 정부에, 국민들에게 꼭 필요한 쓴소리를 해줄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그의 업적을 기리는것 같다.
사람이 살인을 하면 살인범은 꼭 그대가를 받게 되여 있다. 국가마다 죄에 대한 처벌은 다르지만, 심한 경우는 사형까지 받는다. 캐나다는 종신형이 최고형이라서 사형은 없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를 지키기위해 국가는 엄청난 돈을 쏟아 붙는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의 공격, 특히 암의 공격을 받을시에는 거의 사망하고 만다. 이암(Cancer)이라는 범인을 잡기위한 노력을, 국가나 관련단체가 살인범 하나를 잡기위해 쏟아 붓는 예산의 단 몇분의 일만이라도 투자하고 노력한다면, 살인범 암을 어렵지 않게 잡아내여 세상에서 격리 시킬만도 할것 같은데.....국가나 세상은 이분야에는 너무나 관대한것 같다는 생각이, 정치적 풍운아 Jack Layton의 서거를 겪으면서 느낀다.
Jack Layton, 당신은 이제부터 고통도 없고, 질투도 시기도 없고, 오직 웃음만이 흐르고 걱정없는 다른세상에서 삶을 시작하게 됐으니, 세상짐은 남은 사람들에게 모두 남겨두고, 안녕히 가십시요. 머지 않아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그렇게 당신이 간 새로운 나라로 갈것이요. 부탁이 있다면 우리를 위해 삶의 터전을 좀 여유있게 잡아 주시요라는 말을 인사로 대신합니다.
http://www.nytimes.com/2011/08/23/world/americas/23canada.html?_r=1&ref=americas
http://www.torontosun.com/2011/08/22/layton-had-a-human-touch
http://www.theglobeandmail.com/news/politics/jack-laytons-legacy-wont-end-here/article2138288/
http://www.thestar.com/topic/jack_lay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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