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07, 2009

잊혀져 가는 고향의 정겨운 이야기와 Trail Walk












이제는 정말로 봄이 오는가 보다. 바람도 없고, 기온도 급 상승이다.
매주 토요일이면 해오던데로 Trail Walk을 오늘은 Halton Hill 쪽의 바위로 덮힌 험한 길을 걸었다. 많은 대원들이 참석하여 걸었다.
오늘은 Car Pool을 그동안 같이 Fellowship을 나누었던 일본인 부부 다나카씨와 대만출신 Walter Leu 그리고 한국분 Mr.강과 같이 5명이서
다나카씨의 차에 동승했다. 고향이 같은 정읍인 왕선배와 같이 트레일을 나란히 걸으면서 그분이 들려주는 고향 얘기를 나누면서 걷는, 아직은 눈덮힌 바위길은 어려운지를 못느낄 정도로 진지함과 새로운 기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했었다.
어렸을때 고향 동네에서 정읍까지 걸어서 다녔던 구간중에 '괴바래기'언덕길을 생생히 기억하고는 있었지만, 그낱말의 뜻은 전연 모르고 있었는데, 그말뜻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곳' 이라고 국어학자 출신답게 자세히 설명해준다. 그옆의 공동묘지는 완전히 밀어내고 공업단지가 들어서고, 그옆의 또다른 동네 '용리'는 고속도로 휴계소가 되였다고 한다. 괴바래기 언덕길 중간에 주막집도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다고 하자,
그집이 옛날 교통이 빈번하지 않을때 정읍에서 전주까지 사업차 떠났던 식구들을 괴바래기 언덕에서 기다리던 식구들이 들려서 한잔씩 막걸리와 소주를 먹었던 의미있는 주막집이었다고 설명한다. 그집의 외아들, 그이 이름은 김 수연(?)으로 기억되는데, 나와 같이 북면국민학교를 같이 한반에서 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상적인 나이에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나보다 몇살더 위였던것으로 기억된다.
눈이 유난히도 컷고 인자하셨던 담임 왕병환 선생님이 왕선배의 당숙이셨다고 한다. 그선생님은 유난히도 꼬마였던 나를 귀여워 해주시고, 잔심부름을 시키면 나는 마냥 좋아 했던 기억도 새롭다. 자전거를 타고 정읍매골에서 북면국민학교에 출퇴근 하신기억도 난다. 뒷짐실는 조그만 자리에 점심 도시락을 붙블어 매고 다니셨던 기억도 난다. 약 55년전 얘기가 된다. 벌써.... 그렇게 긴 세월이 흘르다니....
서울하면, 특별한 사람들만이 사는, 특수한 곳으로 상상하던 시골 꼬마였었는데.....벌써 55년의 세월이 흘렀다니.... 아깝다 그시간들이.
철길을 따라 정읍에 있는 학교를 걸어가면 '오정리'라는 동네를 지나는데, 그동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극성맞게도 지나가는 우리들을 괴롭혔던,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붙잡히지 않을려고 궁리를 하고 도망다니고, 때로는 붙잡혀 주머니에 있던것들(대개 지개차기 놀이개 등등)을 빼앗기고 또 때로는 얻어 터지기도 했었던 기억도 났는데, 왕선배의 말에 의하면 그동네아이들이 전통적으로 그렇게 까다롭게 굴었다는 것이다.
왕선배는 어쩌면 나와는 사돈 지간이 되는지도 모른다. '군대동'외갓집의 둘째 외숙모님의 친정이 왕씨가 많이 살던, 왕선배의 고향 '매골'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중학교 졸업이후 한번도 외갓집을 찾은 기억이 없다. 국민학교 다닐때는 외갓집 같은 또래의 사촌들과 어울려, 특히 여름철이면 학교 끝나고, 외사촌들과 어울려 외갓집으로 가곤 했었다. 외할머니께서 어린손자 왔다고 밭에 가시어 고구마를 캐어, 삶아 주시던 기억도 떠 올랐다. 밤고구마 였기에 맛이 그렇게 좋을수가 없었다. 여름에 날씨가 가물면, 논농사에 쓰기위해 만들어 놓은 저수지의 구정물 속에서 멱감던 기억들 그리고 나서 바로 옆에 있던 공동묘지의 빈잔디밭에서 축구를 하고 , 저녁에는 외할아버지와 겸상으로 같이 밥을 먹던일, 남자 식구들은 안방에서 별도로 상을 차려 주어 먹고, 여자식구들은 그옆 골방에서 우리 남자들이 먹던 정식(?)밥상이아닌 약식으로 간단하게 차린 상에서 먹었던 기억도 새롭다. 새상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 지금은 생사의 여부를 모르고 지낸 그세월이 너무나 길어 버렸다. 그사촌들과 같은 또래의 동네 아이들은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마도 내가 이렇게 부평초처럼 흘러 다니는것 처럼 그들도 고향을 등지고, 부평초 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을까? 당시의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느니까 흘러갈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느새 꿈같이 세월이 흘러 이제는 살아온 삶을 정리해야 할 시간이 앞으로 닥아 오고 있음을 실감하면서 섬찢하다. 벌써라니....
서러웁고,아련하고, 가슴아픈 기억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세월이 흘러간 만큼 서로간의 얘기도 끝이 나질 않을것 같다.
눈녹은 바윗길은 미끄럽기도 하다. 얘기에 취하다가 미끄러질번 하기도 했다. 그래서 왕선배는 사진을, 그것도 구도를 잡고 열심히 찍는가 보다. 벌써 몇장을 이멜로 보내 주셨다. 내일 모레는 부부 동반으로 한국을 방문 한다고 한다. 무사히 여행 마치시기를....
일기예보에서 오후에는 비가 온다고 하더니 드디어 Trail Walk 마치기 약 한시간 전 보슬비가 옷에 젖게 내린다. 걸음을 더 빨리 했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지난주 보다 더 요란한것 같다. 쌓인 눈이 봄이 오는 기운에 녹아 흘러가기에 신호를 보내는것 같다.
언덕과 계곡이 많지 않아 걷기에는 지난주 걸은 구간 보다 편하다. 건강을 지켜 이다음 다시 고국을 찾게 될 그날에는 외갓집동네도 가보고 싶은 충동이 가슴 가득하다. 이루어질까? 간다면 누가, 아니 옛동네를 기억할수 있을까?

Car Pool까지 다시 오는 동안에, 내가 제안을 다나카 부부를 포함한 모든 동승자에게 제안을 했다. 우리 서로 한짝이 되여 순번제로 운전수가 되여 자기 차량을 제공 하자고, 모두가 환영이었다. 그렇게 하는것이 현재 7달러씩 Ride 비용으로 갹출하는것 보다 편리하고, 여러면에서 좋을것 같아서 였다. 그래서 다음주에는 내가 운전수가 되겠다고 발표하니 모두가 동의 한것이다.
옷속으로 스며든 비가 끈적거린다. 바지 가랑이도 젖었고..... 차안이 뿜어대는 입김으로 차창문은 자꾸 흐려진다. 차창옆에 앉은 모두가 닦아 내기에 바쁘게 말이다. 그래도 무사히 대원 모두가 길고 험한 산행을 마침에 감사 한다
집에와서 내가 Mistake한것을 발견하고, 바로 Walter씨에게 메일을 보냈다. 물론 그가 앞서 부탁한 사진을 보내기 위해서도 였지만,
다음주 산행은 할수가 없음을 발견했기에 더 그랬다. 다음주에는 내가 리드하는 다른 산행팀의 산행날임을 깜박 잊고, 운전수가 되겠다고 제한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제발 모두가 행여나 오해가 없기를 바랠뿐이다. 그다음주에 만나자고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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