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자, 남자 따로 팀을 이루어 라운딩 하기로 하고, C형의 반응을 슬쩍 안보는척 하면서 살펴보았다. 좋다는 신호가 나온다. 역시 골프장 친구가 도움을 주어 Pro Shop까지 편하게 도착했다.
Check-in하는 골프장 친구가 어제 처럼, 다른 골퍼들에게는 까다롭게 check하고 내보내는 절차를 거치는데, 필요한 라운딩 Fee 를 지불한 영수증 점검도 없이우리 일행을 후반부의 첫번째 홀로 가라는 신호를 하면서 반갑게 웃음을 보내면서 인사한다. 고마웠다. 그렇치 않고 일번홀에서 순서를 기다리게 됐더라면 족히 15분 이상은 기다렸을 것이다.
여자팀을 먼저 앞세워 내보래고, 남자들의 라운딩 시작 하는데 한분이 유난히 필요 이상의 말을 계속한다. 모두가 왜 그런지의 이유를 다 알고 있는것 같다. 겉으로는 태연한척 말상대가 되고, 골프의 속성에 대해서 서로간에 너스레를 떨고는 있지만 말이다. Sneak-in한 것을 Cover-up 하기위한 제스처 차원에서 였을 것이다. 후반 2번째 홀의 Tee Box에 도착하니 눈에 익은 이곳 특유의 칠면조와 외모가 비슷한 Waterfowl 들이 우리 일행을 반긴다(?) 자기네들에게 먹을것을 달라는, 골프장의 마스코트 존재같은 그들이다. 뒤뚱뒤뚱 걷는 그들의 모습에서 웃음이 절로 나온다. 골프를 많이 해 보았지만, 이홀의 Tee Box에서 처럼 야생의 조류가 길을 막고 먹을것을 달라는 협박(?)을 다른곳에서는 본 기억이 없다.
골프 라운딩이 다 끝나고 프로샾에서 골프장 친지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골프장 친구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Lunar에게 던진다. "오늘 전부 몇명이 라운딩 했지?"라고. 나는 금방 그의미를 알아챘다. 약간 멋쩍고, 챙피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첫날과 같은 8명이야, 친구야 무슨일이 있는거야?"..... 일행 모두의 체면과 신의를 지키기위해 나름데로 노력들을 하는데, 그분때문에 혹시나 우리 일행모두가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에 흠이 나지는 않았을까?라는 걱정이 마음속에 남아 있게 한다. 호텔로 돌아오는길에 8번홀에서 왼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대서양을 뒷배경으로, 잠시 타고 있던 커다란 Cart 에 모두가 폼잡고 앉아 한컷했다. 이런 순간을 우리 일행 모두는 오래 오래 기억속에 간직할것이다. 여유가 있어 보였다.
저녁식사후 8시 30분경부터 매일밤 진행되는 Live Show가 시작됐다. 4인조 여성 Dancer들이 큐바 전통의 춤을 추는데, 특히 바닥이 딱딱한 구두를 신고, 재빠르게 발을 Podium바닥에 쿵쿵 거리면서 발춤을 추는데는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멋지고 경쾌하고, 거기다 흔들어 대는 Hip의 율동은 역시 젊음의 상징임을 깊이 느끼게 해줬다. 슬쩍 옆에 앉아 구경하고 있는 Lunar를 쳐다 보았다. 그녀도 저나이때는 이들 이상었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이들의 Dance를 리드하는 2명중 한명은 특유의 4각 상자처럼 생긴 통위에 궁둥이를 걸치고 앉아 손으로 그통을 두들기는 Drummer이고, 다른 한명은 Guitar를 혼이 나간 사람처럼 튕긴다.
나도 모르게 궁둥이가 들썩 거린다. 이런때 내가 춤을 출수있는 기술이 있었더라면....
쑈가 끝나고, 공연장 겸 부페식당밖의 비치테이블에서 우리 일행이 Sanck Bar에서 한잔씩 들고온 San Francisco를 마시면서 쇼에 대한 느낌들을 애기하고 있는데, 그쇼Girl들이 어느새 뒤쫒아와서 자기네들 Show에대한 반응을 떠 보는게 아닌가. 이들의 목적이 다른데 있다는것을 알았다. Donation을 요청 한다. 그리고 CD도 판매 한다고 하면서 도움을 청한다. 3페소를 건네 주었다. 이들의 생활이 갈수록 어려워 지고 있다는 증거임도 터득했다. 지난번 방문때는 이런 구걸 비슷한 Donation 행각은 없었기에 비교가 쉽게 된다. 그녀들은 고맙다는 인사를 나누고 다른 Table로 발길을 옮긴다. 또 다른 2명의 Show Girl들이 나타나 같은 행동을 한다. 이번에는 그녀들에게 이미 다른팀들에게 Donation했다는 설명을 하고 되돌려 보냈다. 이들의 행동이 전과는 다르게 대담해 진것을 느꼈다. 2년전에 왔을때는 이러한 행동 대신에 음료수나 먹을것을 좀 구해다 달라는 요청을 받고 들어준 기억이 있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지는 않았었는데.... 이들처럼 Talent가 풍부한 연예인들이 토론토에 거주한다면, 그들의 수입은 확연히 달라지고 꺼꾸로 내가 그녀들을 가까이서 보기위해 발굽을 치겨들고 고개를 빼고 쳐다 보았을텐데..... 누가 원흉일까?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C형부부, H형부부는 이곳 여행이 처음이라, 오늘은 그분들은 Havana, 큐바수도로 일일 관광 여행을 떠나고, 같은 시간에 K형 부부와 우리부부는 골프장에서 친구가 보내준 Cart타고 골프장으로 향했다. 골프장 친구 덕택에 오늘도 우리는 Taxi를 타지 않고도 더 빨리 편하게 골프장에 가는 기분이 상쾌 하기만 하다.
오늘도 이른 아침인데도 골퍼들이 예전처럼 붐비지 않고 겨우 두팀정도가 첫홀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을 뿐, 한가해 보인다. 어제는 우리팀들이 오후에 Teed off를 했기에 골퍼들이 많지 않았었나 생각했었는데....그것만은 아닌것 같다. 들리는 말로는 관광객들의 약 52%가 캐나다인들이고, 나머지가 유럽에서 온 관광객들이었었는데..... European 들이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고 한다. 어쩌다 낯선 사람들과 만나서 얘기해보면 거의가 온타리오주 또는 쾌백주에서 온 캐네디언들이 대부분인것을 느낄수 있다. 식당에서 식사할때도 좌석들이 텅텅 비어있음을 첫날부터 쉽게 느낄수 있었다.
어제저녁 식사때 우리 부부와 잘알고 지내는 Waiter, Paulo가 우리부부를 알아보고 반겨 했었다. 그는 손님들에게 Serving하는것도 잠시 잊은채, 그동안 지내온 삶의 하소연 비슷한 얘기 하기에 바빴다.
그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관광객들이 줄어들어 지난해 4월부터 6개월간 Laid off 당해서 집에서 쉬다가 지난 11월 부터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됐었다고 불경기 영향을 하소연 한다. 어느 관광객에게 그런 하소연(?)을 쉽게 할수 있겠는가? 너희 부부를 다시 보게되니 너무나 기분이 좋고 반갑다고 만면에 웃음을 잃지 않는다. 식단을 보면 신선한 채소종류가 현저히 줄어 들었음을 느낄수 있었다. 필요한 음료수를 우리 일행모두에게서 주문을 받아서 금새 Serving 해 주었던 생각이, 줄어든 골퍼들을 보면서 오버랩된다.
Check-in하는 Eddy는 어제처럼 우리일행을 보더니, 첫번째 홀에 2팀이 있을 뿐인데도, Back 9홀로 보내준다. 고맙다. 오늘은 단촐하다. K형부부와 우리 부부뿐이다. Mrs K도 오늘은 홀가분해 보인다. Lunar와 Mrs K가 먼저 T-shot을 날렸다. 볼이 잔듸위에 떨어져 굴러간 자국이 아직 채 마르지않은 이슬을 가르고 지나간 자국이 선명하다. 순간적으로 지금 이시간에 캐나다에 있었다면, 맥도날드에 모여 앉아 잡담을 하면서 추위를 피하고 있을텐데....라는 생각이 문득 떠오르고 있다. Fair way에 자라고 있는 잡초를 일꾼들이 꼬챙이를 사용하여 뽑는 모습도 보이고, 겉으로는 한가롭기만 하다. 그들이 골핑 하는 우릴 볼때는 어떤 느낌일까? 부러워 할까? 아니면 볼빈 얼간이 들이라고 할까?
골프를 끝내고 호텔식당에 도착하면 정확히 오후 1시 30분 경이된다. Lunar는 준비해온 구두주걱을 Yuriana를 통해서 모든 종업원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준다. 값이 문제가 아니고 준비해와서 선물로 하나씩 주고 받는다는데 더 의미를 두면서 그들은 고마워 한다. 서로 알고 있다는 특권(?)때문에 재회하자마자 정을 나누는 것이다.
호텔방 Window를 통해 자기 Shift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식당 종업원들의 가방에는 아까 Lunar가 선물한 구두주걱이 하나씩 뚜렷히 보인다. 이들은 집에서 식구들과 오늘 식당에서 있었던 만남을 얘기할것이다. 이런것이 바로 주고받는 우리 인간들만이 베풀고 받고, 정을 나누고 할수있는 특권(?)아닐까. 돈으로 치면 몇푼안된다. 그러나 그속에서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어 주는 흐믓함의 가치가 셀수 없이 크다는것과 정성이 존재한다는데 의미가 깊은 것이다.
방안의 TV는 옛날 Brown Tube 그대로이다. 화면의 질은 Blurry이다. 전에는 우리 자신들도 이것과 똑같은 TV를 보았었는데, 지금은 볼수가 없을 정도로 답답하다. 인간의 간사한 면을 내가 내자신을 통해보면서 깜짝 놀란다. 그나마 converter가 고장나서 다른 채널로 돌려 지지도 않아, Front Desk에 통보하여 Repair를 당부했는데 한시간이 지나도 깜깜 무소식이다. 다시 전화로 문의 했더니, 현재 다른 빌딩에서 Technician이 일하고 있으니, 끝나는데로 곧 갈것이라는 태연한 대답이다. 물론 그말을 나는 100% 믿지 않는다.
Laptop computer를 들고 왔지만 무용지물이 되고말았다. Power plug는 3 prong인데 벽에 붙어있는 소켓은 2 prong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나라의 Realism의 표본이다. 맡은시간만을 때우고 나면 그만이기에 이런 분위기속에서는 creativity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laptop을 사용할수 있었더라면 손수 handwriting으로 힘겹게 Pen을 돌리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그래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2년전에 왔을때 보다 모든 시설들의 상태가 더 악화되여 있는것 같다.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은 구조가 Townhouse처럼 2층 구조다. 방문을 나서면 바로 앞에 넓다란 Garden이 이어진다. 점심후 내 Room으로 가는데 Gardening을 하고 있던 일꾼이 우리 부부를 보면서 인사를 한다. 지난번 왔을때 우리가 조그만 선물을 준일이 있는데 그것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그때 그분은 야자수나무잎으로 메뚜기를 만들어 나에게 답례 했었다. 선물을 미쳐 준비 못해 미안한 마음이다. 해수욕을 가는길에 내가 여분으로 가져온 T-shirt를 꺼내서 그에게 선물했다. 고마워한다. 대서양 푸른 바다는 여전히 출렁거리면서 사람들을 불러 들이는 손짖을 하는것 같은 느낌을 준다. 원두막 처럼 세워논 그속에는 뚱뚱한 미녀들(?), 백사장에 널려있는 간이 벤취에는 날씬한 인어같은, 겨우 가릴곳만 가린 아름다운 미녀들, 배가 남산만큼이나 불룩한 가분수형 남자들이 벌렁 드러누워있고..... 천태만상이다. 나도 그런 부류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호텔 우리방문앞에 누가 서성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까 해수욕 나갈때 만났던 Gardener가 아닌가. 손에는 지난번과 똑같이 손수 그가 만들었을 메뚜기 2마리가 들려 있다. 우리에게 선물하기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답례를 하고져 하는 그의 마음이 고마웠다.
이호텔에서는 오직 이친구만이 야자수잎을 사용하여 메뚜기를 만드는 손재주를 소유하고 있다고 Porter, Miguel이 해준 얘기를 기억하고 있기에 더 값진것으로 여겨졌다. 내가 토론토에서 부터 준비해간 밀집모자앞쪽에 나란히 두마리의 메뚜기를 부착 시키고 골핑때나, 식당에 갈때도 쓰고 다녔다. 어떤이들은 어디서 구했느냐?라고 물어 오기도 했었다. 자랑스럽게 친구로 부터 선물 받은것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메뚜기를 모자에 꽂고 있는 사람은 나말고 꼭 한사람 봤다.
저녁에 벌어지는 Entertainment는 첫Part에서 Classic Music으로 지루하고 무거웠으나, Part2 에서는 경쾌한 음악에 마추어 Magic show와, 남녀 한쌍이 묘기 부리는 Physical exercise는 구경꾼들로 부터 아낌없는 박수를 받고도 남을 훌륭한 쇼였다. 이런 Performance를 토론토에서 한다면 많은 사랑과 돈도 벌수 있었을텐데...... 누가 이들의 재능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할수 있는 길을 막고 있는 것일까? 이념이 무엇이길래, 빌어먹을...
Classic Music을 연주한 중년의 한쌍은 외모가 Entertainer들 같아 보이지는 않은 점잖은 모습이다. 남자는 기타를 연주하고, 여자는 우리 세대들이 많이 들어 귀에 익은 classic music을 계속해 불러주었었다. 한마디의 멘트도 없었다. 그래서 지루하게 들렸었나?라고 생각을 해보기도 했었다. Live show가 다 끝난후 MC가 그들에 대해서 소개를 해 주어서 알았는데, 그들은 인근의 병원에서 Medical Dr.로 일하고 있는 전문직 종사자들인데, 밤에 가끔씩 Resort안의 호텔을 방문하여 그들의 여가선용과 관광객들을 위한 일종의 위로 공연을 하는 고마운 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현직 병원의사들이...... 모든게 돈으로 계산되는 우리 서구사회의 전문직, 특히 의사들이 노래도 자원봉사한다는 소리는 못들어본 새로운 감동이다.
C형부부와, H형 부부는 Havana구경때문에 피곤했는지, 쇼를 끝까지 구경못하고 일찍 자기네 방으로 갔었다. 여행도 이들 부부를 보면서 건강이 허용할때 많이 해야 효과적이라는점을 여기서도 비유가 될것 같다.
약속한데로 방을 옮겨줄수 있겠는가? Front Desk에 확인차 오전 9시경에 들렸다. 벌써 Shift가 바뀌어 다른 Team들이 일하고 있었다. 12시경에 가능하다고 하면서 방번호까지 알려준다. View 또한 one of the best 라고 너스레까지 떨어댄다.
9시10분경에 Air Canada소속 직원을 Hotel Lobby에서 만나 어제밤에 같이 호텔에 들어온 여행객들을 모아 놓고 이번 여행에 대한 Orientation해준다. 일일 관광여행코스들, 마지막날 다시 토론토로 떠나는날은 오후 6:30으로 미리 짐챙겨 기다리면 뻐스가 당도하여 공항까지 Pick up해준다는 내용들이다. 규정상 마지막날 Check out은 12시전까지 해야 하므로 미리 준비 했다가 Hotel Front의 빈공간에 짐들을 맡겨 놓아야 된단다. 저녁은 매일 오후 7시에 시작하기에 떠나는날에는 저녁을 굶게 되는 셈이다. 얄팍한 상술이다. C형부부, H형 부부는 Air Canada 소속의 Guide인 Dahymara를 통해 내일 Havana 일일 관광을 예약하고 K형 부부와 우리 부부는 골프하기로 했다. 일일관광경비는 부부당 $145 CDN이다.
Front Desk의 전화를 빌려 골프장과 연결했다. 반가운 목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그녀또한 금방 내목소리를 알아 채린 눈치다. 2년만의 만남이다. Lunar와도 반갑게 통화했다. 우리 일행을 골프장의 Cart를 이용하여 직접 Pick up할테니 Hotel Lobby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녀의 호의가 없었다면, 부부당 편도 6페소씩 지불하고 Taxi를 Hire하여 골프백을 싣고 골프장 주위를 빙 돌아서 갔어야 했는데....
이번 여행중 발생하게될 공동운영 경비를 Couple당 공평하게 똑같이 모아서 Lunar가 책임지고 관리하기로 했다. Lunar가 CDN을 우선 필요한 금액을 Front Desk에서 Peso로 바꾸어 왔다. 자랑스럽게(?)바꾸어온 돈을 보여주면서, 돈을 계산해 보더니 Lunar의 안색이 조금 변한다. 바꾸어온 페소만큼 CDN이 Shortage난다는 것이다. 즉 페소로 바꾸면서 2번 지불한것으로 이해가 됐다. 남편인 나로서는 그녀가 못마땅했다. 어쩌다 처음부터 이런 사고가 발생하는가. 일행은 모두가 한마디로 걱정하지말고 다시 계산해 보라고 격려를 해준다. Lunar가 설명을 해준다. Front Desk에서 근무하는 6명의 직원들에게 그녀가 준비해간 조그만 선물을 주면서 너스레를 같이 떨다가, 그순간에 2번 지불한것 같다는 것이다. Luanr가 기지를 발휘하여, 믿거나 말거나 다시 front Desk에 가서 설명을 해주고 되돌아 왔다. 저녁에 Shift 교대할때 전부 계산을 하니까 차이가 나면 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설명해준다.
호텔 Operating Manager 가 2층의 자기 사무실에서 우리부부와 일행을 알아보고 내려와 반갑게 인사하고, Lunar와 나에게 2년만의 만남을 반가히 맞이한다. 지금 바로 meeting에 들어가야 하니 다음에 만나자고 하면서 헤여졌다. 그녀는 맨날 Meeting을 하는것 처럼 보인다. 공산당 아니랄까봐서 그런가 보다. 점심을 먹고 골핑하러가야 했기에 그녀에게 골프장에 연락하여 오후 1시 30분경에 우리일행을 Pick up해 달라는 시간 변경을 부탁했다. 물론 OK다. 일행들이 우리 부부를 부러운듯 쳐다본다. 어떤 Fellowship을 유지하고 있기에.....라고.
갑자기 Front Desk의 여자 직원 하나가 우리일행이 앉아있는 Hall 중앙의 소파로 다가 오더니 Lunar에게 CDN을 건네 주면서, "아직 Shift 바뀐지가 얼마 안되여, 바로 돈 계산을 해 보았는데 정확히 Lunar가 얘기한 금액의 돈이 더있었다" 라고 설명해주면서 마음이 가볍다고 한다. 일행 모두가 똑같이 큰 박수로 그녀를 Cheer해 준다. 고마울 뿐이다.
식당에서는 Yuriana가 우리 부부와 일행을 반가히 맞이한다. 몸에 익숙치 않은 Hugging도 하고..... Employee와 손님과의 관계를 떠나 옛친지의 재회를 반가워 하는 그녀다. 우리 부부 또한 같은 느낌이고, 반갑기만 하다. 그녀가 오늘은 Hamburger몇개를 준비해 줄까?라고 먼저 묻는다. Lunar가 10개라고 대답해준다. 그녀는 Lunar가 먹지는 않지만 준비해가는 목적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가 물은 것이다.
호텔 입구 주차장에는 8일승 Cart 를 끌고온 골프장의 옛친구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가용 운전수도 이렇게 미리와서 대기하고 있기가 쉽지 않을텐데..... 골프백들을 싣고 일행이 다 올라타자 Cart는 스르르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한다. 별로 말이 없는 그친구는 미소를 모두에게 보낸다. Cart를 보내준 골프장의 친구들이 고맙다. 지난번에 왔을때도 이친구들의 배려로 쉽게 호텔과 골프장을 왕래 했었다. 친구들이 Pro shop앞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이해준다. 고마운사람들이다. 준비해간 간단한 선물들을 친구들에게 전해주고, 또 같이 일하는 Staff들에게도 줄 마음의 선물을 그들에게 전해 주면서 나누어갖도록 설명했다. 한친구는 얼마전에 새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이번에 준비해간 선물이 새집에 잘 어울릴것이라고 고마워 한다. 일행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골핑이 시작된다.
First Hole에서는 그친구가 Check-in을 하고 있다가 반갑게 맞이해 준다. 1st 홀에는 다른 2팀이 밀려있고 Tee Box에는 또다른 팀이 Drive shot 을 하고 있다. 나에게 눈짖을 하더니 Back Nine쪽으로 내 보낸다. 배려가 고맙다. 그또한 우리 부부가 어젯밤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벌써 듣고 알고 있었다고 설명해준다. K형 부부가 지난해에도 왔었는데 Booking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던 기억을 되살리면서, 너무나 기분이 좋다고 하면서 우리부부를 부러운듯 쳐다본다. 처음온 C형 부부와 골프장의 생리에 대해서 잘알고 있는 H형 부부는 말은 안해도 의아해 하면서도 이러한 광경을 신기해 한듯 얼굴에 미소다.
오후에 시작한 골프는 일조시간때문에 17홀까지만 가능했다. 골프하는 동안에 느낀것은 불경기에 여파에 이곳에 까지 깊숙히 미치고 있다는것을 실감할수 있었다. 처음온 C형부부, 특히나 H형 부부는 골프장의 Layout에 만족해 한다. 특히 8번홀의 Tee Box에서 왼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끝없이 펼쳐지는 대성양의 파란물, 오른쪽은 언덕아래로 펼쳐지는 1번 2번홀의 야자수들과 어울려 뻗어있는 Fairway..... 볼이 잘 맞고 안맞고는 둘째 문제이다. 멋있는 한편의 그림이다. C형 부부, 특히 Mrs.C는 골프 초년병이라서, 남편인 C형이 같이 rounding하는 팀멤버들에게 민폐를 끼칠까봐, 부부가 한조가 되여 같이 rounding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여, 두부부가 한팀을 이루어, C형부부와 우리 부부가, 그리고 K형부부, H형부부가 한팀이 되여 라운딩을 하게 됐다. 옆에서 C형은 마나님 신경을 많이 쓴다. 역시 성실한 남편이다. 평상시 보아왔던 그대로이다. 골프 잘하고 못하고는 문제가 안된다. "얼마나 재미있게 즐기는냐가 관건이니, 모든것 잊고 이시간 만큼은 맘껏 즐기게 놓아 주시요" 거들었다.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도, 자꾸 눈길은 wife에게 보내는 C형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Mrs C는 남편의 엄살보다는 재치있게 좌중을 웃기면서 분위기를 잘 마추어 따른다.
호텔에 도착했을때는 피곤함이 엄습해 온다. 그래도 다행인것은 골프장에 나가기전, 12시경에 방을 옮겨놓고 갔었기에 다행이었다. 만약에 지금 방을 옮긴다고 생각해 보면 .....
H 형이 "이다음에 다시 이곳에 왔을때 여기 일하는 친구들로 부터 편의를 얻기위해 연결을 시켜줄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대답이 난처했다. 이것은 누구의 소개가 문제가 아니고, 본인들이 알아서 관계를 유지해오는 하나의 Fellowship인것을.....더욱히나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더욱 아니다. K형 부부가 그쪽 방향으로 노력도 상당해 했었다는 그간의 상황을 설명도 해준 기억이 난다. 2005년도에 이곳 큐바에 Lunar와 함께 처음 왔었을때는 이들 친구들과 Argue까지 했었다. 서로가 오해를 했었기에 말이다.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마지막날 그친구가 Lunar를 자기 방으로 초청하여 Cuban 술한병을을 건네 주면서 "너희 부부는 물건이나 돈이 아닌 마음의 큰 선물을, 즉 정을 듬쁙 선물해 준것을 잊지 못할것이다. 내년에도 만났으면 좋겠다"라고한 그말이 언뜻 되살아난다.
밖의 기온은 영하 1도를 가르키고 있다. 2년만에 다시찾는 Cuba 골핑여행, 오후 5시 20분발 비행기를 타기위해 준비를 마치고 Lunar와 함께 커피를 한잔 마시고 있는데, C형으로 부터 연락이 왔다. 지금 막 5분안에 차가 도착한다는 내용이다. 시계는 정확히 오후 3시를 가르키고 있다. 큐바 여행을 여러번 했었지만, 오후 늦게 떠나보기는 처음이다.
기분이 무척 가볍다. 우선 생각만 해도 숨이 탁 말힐것 같은 토론토를 잠시라도 떠난다는것 때문이리라. 원래는 잘알고 지내는 C형 부부와 단촐하게 떠나기로 계획했었는데, K형 부부가 합세하기로 하고, 우리가 구입했던 Travel Agent를 통해 같이 합세 했고, 또 떠나기 2일전에는 H형 부부가 Last Minute 찬스로 Package를 구입하여 합류하게되여, 전부 4쌍의 부부가 여행기간동안 행동을 같이 하게되는것이다. 우린 이분들을 잘 알고 지내는 친지분들이지만, 우리부부를 제외한 다른 3쌍은 서로간에 처음만나 같이 행동을 하게된셈이어서,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간편하게 모든걸 다 잊고 마음 편하게 마음비울려고 여행계획을 한것인데...... 마음의 짐이 무거워 지는 느낌도 있다.
밤 10시경이 되여 Super Club Breezes중의 하나인 호텔에 도착하여, 뻐쓰에서 일행들의 Luggage와 골프백들을 점검하고, 호텔 Front Desk에 Check-in 등 다른 여행객들과 어울려 북새통속에서 신경을 쓰다보니, 정작 우리부부의 luggage하나가 Missing된것을 발견하고, 바로 Front Desk에 설명하고, 그녀들은 바로 다음 호텔로 연락을 취하고... 곧뻐스가 되돌아 올것이니 걱정말라고 안심시켜준다. 시간이 흘러도 되돌아 온다고 했던 뻐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일단은 배정받은 각자의 방을 찾아 흩어지고, 우리도 여러번 온 경험을 되살려 쉽게 방을 찾아 짐을 던져놓고, 다시 Front Desk에 찾아갔다. 보여야 할 luggage가 안보였다. Front Desk에서 하는말은 간단했다. 다음 도착지인 호텔에 연락을 했었는데 벌써 뻐스가 지나쳤기에 연결이 안되 Travel Agent의 Depot로 가서 본인이 직접찾으라는 아주 퉁명스런 대답을 해대는 여자 직원의 말에 열이 올라 휴가여행이 시작되기도 전에 front desk의 여자직원과 설전이 벌어지고 말았다. 여기는 다른 나라와 달라 공산국가이다. 내가 결국 아쉬운 입장이기에 그녀로 부터 Travel Agent의 Depot주소를 받아들고, Taxi를 타고 달려 그곳에 가야만 했다. 다행인것은 Depot가 멀지않은 곳에, 즉 Varadero Pennisula 입구에 있다는 여자직원의 한마디가 그나마 조금 위안은 됐다. Front Desk에서 전화를하니 금방 2분정도 지나 택시가 Front에 당도했다. 겉모양의 택시는 무척 오래된 아주 낡은 차로 보였다. 전에는 골프장에 가기위해 택시를 탈때마다 거의가 다 새차였었는데..... 차에 올라타니 Gas냄새가 진동을 한다. 주소를 적어준 쪽지를 보고, 운전수는 35페소를 달라고 한다. 그금액이면 큐바 일반 노동자의 한달월급이 훨씬 넘는 큰 금액이다. 또 협상이 시작된다. 결국 합의끝에 20페소에 가기로 하고, 깜깜한 밤에 운전수 하나믿고 달리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차라고 운전수는 설명한다. 52세라고 한다. 그러나 얼굴에는 웃음을 잃지않은, 조금은 나이에 비해 늙어 보이는 Guy로 보였다. 10여분 달려서 Depot에 도착했다. 말이 Depot일뿐 어느 개인집 별채로 보이는 허름한 곳에 도착하니, 눈에 익은 luggage가 보이고, 같은방 한곳에는 책상하나가 보이고 직원이 앉아 있다. 내 luggage외에도 5개 이상의 가방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사고가 자주나는 모양이다. 인수 했다는 서명서에 signature를 올리고 Luggage를 끌고 나와 다시 호텔로 달린다. Lunar는 내가 오랫동안 안보이니 그녀데로 나를 찾아 다니다가 Front Desk에서, 직원들의 설명을 듣고 나의 행방을 알았다고 한다. 그녀의 불평은 남 도와 준다고 내것을 챙기지 못하는 바보같은 나의 행동이다. 초행인 C형 부부를 도와주기위한점도있었지만, 큰 Luggage 가 3개와 골프백 2개등 짐이 많은것도 그한원인이었었다.
호텔에는 전과는 달리 여행객들이 꽉차지 않은 느낌을 금방 알수 있었다. 전세계적으로 불어닥치고 있는 경기불황때문인것으로 추측이 갔다. 어쨋던 휴식취하러온 기분이 한껏 있었기에 잠자리에든 기분은 그래도 좋기만 하다. 우선 말많고 시끄러웠던 곳을 탈출했다는, 그리고 심적 고통을 털어냈다는 홀가분한 기분.....겪어본자만이 느낄수 있는 짜릿한 기분이다.
일행들에게 전화를 할려고 수화기를 들었는데, 아뿔사 전화가 불통이다. 타성에 젖어있는 공산국가사람들의 자기 Shift의 정해진 시간만 무사히 때우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을 여기서도 본다. Front Desk에 찾아가 설명했더니, 대답은 간단하다. 내일 다른방으로 옮겨주겠다는 사무적인 확답만 얻었을뿐, 고객에 대한 미안함같은것은 전연 찾아볼수 없는 곳, 공산국가 큐바.
내일은 원래 계획은 아침 일찍 골프를 하고 오후에는 끝없이 펼쳐지는 Varadero백사장에서 해수욕과 Sun Tan을 할계획이었으나, 첫날이니 준비를 하고 또 정리할것을 하기위해 계획을 바꾸어 골프는 오후에 했으면 좋겠다는 K형 부부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큐바 여행의 첫날밤은 역사속으로 흘러가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기후 이상변화가 심하여, 추워야 할곳이, 더워야 할곳이 그렇치 못하여, 혼란이 심하다는 미디아의 보도는 어제오늘일이 아니다.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어야 할 나목에서 꽃봉우리가 솟아나지를 않나, 눈이 내렸어야 하는곳에는, 여름철 가뭄으로 농부들이 애타게 비를 기다리는것과 같은, 칼바람만 휘몰아 치지를 않나.....
오늘도 기온은 영상으로 기록하여 Trail Walk하는데는 좋았으나, 한겨울속에서 걸을때는 꽁꽁얼은 기후속에, Trail위에 쌓인 눈을 밟을때 싸그락 싸그락 한발 한발 내딧는, 계절에 맞는 운치를 느꼈어야 했으나 대신에 muddy한 Trail위를 걷는기분은 두툼한 등산용 자켓을 걸친것 외에는, 꼭 한여름 장마뒤에 걷는 기분이었었다.
오랫만의 산행길이었었다. 그래서인지, 산행에서 항상 보아왔던 회원들의 얼굴이 많이 보이지 않아, 계속적으로 정규산행을 하지 못했었다는 표시로 생각되기도 했었다.
정해진 시간을 지켜야 했기에, 무한정 기다릴수는 없고, 일단은 Car Pool을 하여 약 40분을 달려, Stony Creek에 도착 하고, 약 10을 기다렸더니, 현지에서 만나기로 했던 회원 R이 아직 어린 딸 Jenny와 함께 도착 했다. 넓직한 주차장에는 벌써 다른산행구룹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차들이 빽빽히 주차되여 있다.
주차장에서 능선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잔듸밭에는 옅은 연두색 같기도하고, 또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하고 보면 약간 노란색갈이 눈(Snow)대신 덮고 있다. 작년 이맘때 왔었을때는 하얗게 뒤덮고 있었는데.... 그래도 바람끝은 옷깃을 여미게 한다. 창조주께 신고식을 하고 총 여섯명의 대원들이 한식구가 된 기분으로 산행의 첫발을 옮겼다.
이구간은 QEW를 타고 나이아가라쪽을 향해 달리면서 Burlington Skyway Bridge의 정상을 넘을때 거의 매일 바람이 세게 불어 조그만 차들은 원치 않은 방향으로 흔들거리는 경험을 하게하는, 그래서 바람이 센 날에는 아예 통행을 경찰이 통제하는 경우도 있는, 스릴을 느끼게 하는 명물 다리이기도 하다. 이곳을 지나 조금만 더 달리면 Hwy 20 Exit이 오른쪽에 보이고 그길을 따라 멀리 오늘쪽으로 높은 능선이 보이는 그밑에 있는 주차장에서 부터 Trail Walk을 시작하는,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구간중의 하나이다. 이곳에서 더 달리면 나이아가라쪽이고, 북쪽으로는 Hamilton을 지나 Halton Area 그리고 Caledonia지역의 등산코스가 이어진다.
오늘 우리회원들의 마스코트격인 꼬마 Jenny는 그사이 많이 변한것을 느낄수 있었다. 요즘 10아이들의 기본 필수품인 Smart Phone에서 연결된 Earphone을 귀에 끼고 뭔가를 열심히 들으면서 걷는다. 따라서 전에는 자주 했었던 대화가 줄어들었음도 느끼게 됐다. 능선밑으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철길을 넘어 오른쪽으로 꺽어 Hamilton쪽으로 방향을 잡고 걷는다.
나목이 울창하게 들어서 있는 사이로 꾸불꾸불 이어져 있는 Trail은 여전히 Muddy하다. 가끔씩 아직은 덜 녹아서 남아 있는 얼음위를 걸을때는 한발짝 옮길때마다 신경이 쓰인다. 대원들 대부분이 Crampon과 Gaiters를 신발과 장단지에 부착했기에 별 문제는 없었으나, 나이드신 대원 한분이 Crampon을 차에 두고 그냥 왔기에 어려움이 더하여 서로가 보이지 않게 신경을 써가면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발짝씩 옮긴다.
온몸에서는 땀이 흐르기 시작한지 오래다. 등산모는 땀으로 젖어 손으로 안쪽을 만져 보면 젖어 있음을 눈으로도 확인 할수 있다. 온몸에서도 땀으로 옷들이 젖어 드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오랫만의 산행이고, 또 Trail이 미끄러워 한발짝 옮길때마다 미끄러질수 있는 상태에서의몸의 균형을 잡아야 하고, 신경을 써야 하기에 필요 이상의 땀까지 흘러 나오게 하는것 같다.
능선위를 걸으면서 아래로 펼쳐지는 경관은 항상 그랬듯, 오늘도 한폭의 그림이다. 평화롭게만 보인다. 멀리로는 Lake Ontario가 아스라이 보이고, 바로 그앞으로는 우리가 조금전에 차를 달려왔던 QEW가 보이고, 그위로는 여전히 지나는 차들이 개딱지 처럼 땅바닥에 붙어 있는것처럼 보인다. 멀이 보이는 이런 풍경이 바로 상상의 세계에서만이 존재하는 '유토피아'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면서 또한번 응시해본다.
발걸음이 조금은 무거워 지는것을 느낀다. Lunar도 마찬가지 일것이다. 정기적으로 걸을때는 3시간 4시간을 걸어도 못느꼈던, 다리의 피곤함을 오늘은 조금 느낀다. 그래서 땀도 더 많이 흘리고 있음을 안다. 연속적인 운동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몸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규칙적인 몸놀림은 꼭 필요함을 절감한다. 어찌 나만이 이런 느낌이겠는가? 그래도 대원들은 아무런 흔들림이 없이, 묵묵히 잘 걷고, 대열을 지킨다. 가끔씩 옆으로 눈길을 돌려보면, 쓰러져 있는 고목위에는 먹을수 있는 버섯들이 눈,비 그리고 추위와는 상관 없다는듯이 위용을 자랑하면서 고목에 붙어 있는 모습에서 생명의 끈질김을 느끼게 한다.
눈에 익은 폭포가 나타난다. 변치않는 모습으로 우리대원들을 맞이 해주는 기분을 느낀다. 오늘은 물이 좀 적은것 같다. 눈이 덜 내려서 녹아 내리는 물의 양도 적어졌나 보다. 날씨가 추었더라면 얼음이 온통 폭포를 뒤덮고 그속으로 흐르는 물소리만이 귓전을 때렸을텐데.....어찌 보면 폭포가 갖고 있는 온갖 비밀을 다 보여주는꼴이 된것 같은 아쉬움이 한편으로는 느껴진다.
온몸의 에너지를 다 소모한 다음의 점심을 먹는 그기분은 경험해본 사람만이 느낌을 말할수 있는 오묘한 맛이다. 특히 오늘은 Lunar가 어젯밤 늦도록 까지 준비한 밀가루 반죽을 한 수제비 국이다. 지난 X-mas때 먹고 남겨두었던 터키고기와 뼈를 오랫동안 Stove위에 올려놓고 끓여서 만든 하얀 국물에 수제비를 익혀서 준비해온것을 Shelter안의 Table위에 휴대용 Gas range을 켜서 뜨겁게 다시 데운 수제비이기에 별미중의 별미다. K 대원이 준비해온 만두를 곁들이니 산해진미가 하나도 부럽지 않는 Gourmet이다. 말은 안해도 대원들 모두가 Lunar에게 고마워 하고 그래서 Fellowship은 더 깊어짐을 느낀다.
식곤증이라고 했던가? 배를 채우니 슬며시 졸음이 온다. 내차에 Car Pool한 대원들을 싣고 되돌아 오는데 졸려서 무척 애를 먹었다. 길지 않은 구간을 운전하는데, 오늘은 무척이나
멀고, 지루한 느낌이었다. 나오는 하품을 대원들이 눈치채지못하게 해야 하는 어려움도 뒤따르고, 옆좌석에 있는 Lunar는 걱정하는 눈빛이 역력히 보인다. 뒷좌석에 앉아 있는 대원들은 이야기 나누기에 바빠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사 제치고 도착하자마자 샤워장으로 달렸다. Luanar는 짐을 꾸려 사우나탕으로 가고.....
이런맛에 기회만 되면 다시 Trail Walk은 계속될 것이다. 감사.
오늘이 2013년 1월 11일, 금요일이다. 저녁 6시경이다. 3일후에는 중남미로 골프 여행을 떠나서, Varadero의 골프장 8번홀과 18번 홀의 Tee Box에서 볼을 날리기전, 끝없이 펼쳐지는 대서양의 푸른 물결위로 한가롭게 날아다니는 바닷새들을 초점없이 쳐다 보면서, 쉼호흡을 하고 힘껏 드라이브를 휘둘러 파란 하늘을 가르고 날아가는 골프볼을 연상해보는 이저녁이다.
지난해에는 지금은 쳐다보기도, 생각하기도 지긋지긋한 동부지회를 맡아서 정신없이 뛰어 다니고, 생각도 지각도 없는 늙은 회원들의 뒷바라지를 한답시고, 시간을 낼 기회가 없어, 매년 연례행사로 날아가곤했던, Varadero 골프장에서 대서양의 바닷물 냄새를 맡을 기회를 놓쳐 버렸었다.
오늘 낯에, 생각하기도 보기에도 소름이 끼치는 동부지회의 다음 책임자에게 인수인계를 할때만 해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었다. 이얼간이같은 늙은이들이 어떤 생트집을 잡아 나를 골탕 먹일지? 방향을 종잡을수 없었기에 그랬던 것이다. 그렇타고 비굴하게 그얼간이 들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는 물론, 하등의 책잡힐 일이 없는데 될데로 되라지 하는 굳은 마음으로, 준비해간 인수인계서를 설명하고 또 설명하고..... 업무이관을 마치고, 은행 구좌까지 바꾸어 주고, 완전히 멍애를 벗어 던져버린 기분이, 오늘 아침과는 완전히 다른, 그져 가벼운 마음이다. 내뒤를 이어 책임을 맡은 늙은이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지난 7일전에도 나를 골탕먹인일이 있었기에 더큰소리로 두번 세번 앵무새처럼 한말을 되뇌이곤 하는 어려움이 있긴 있었다.
업무인수인계는 양측의 사무처장들이 회장들 입회하에 해야 했으나, 인수인계자 명단에서 사무처장은 아예 삭제해 버리고, 회장들끼리 해야만 된다고 우겨서, 사무처장 배석없이 했었다.
이것이 동부지회의 현실이고, 이런 불법이 정석처럼, 요지부동으로 자행되고 있는 곳이다.
7일전 아침에 그가 전화를 걸어와 새해인사를 하기에 고맙기만 했었다. 불과 한시간도 되기전에 그가 전화를 걸어온것이 완전 Camouflage였음은 앞서 올린 블로그에 상세히 기록되여 있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런 그가 오늘도 업무인계 하기에앞서 "나는 간단한 것을 좋아 합니다. 복잡하게 캐묻고 그러지 않습니다"라고 전제를 깔고 시작했는데, 필요이상의 것을 물고 늘어 지는 그의 두얼굴을 마주 본다는것 조차, 내쪽 참관인으로 참석했던분들까지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하곤 했었다.
이곳의 동부지회는 1987년초에 창설됐었다. 그후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본국에서 지원해주는 보조금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흥청 망청 쓰고도 남을 많은 액수었었다. 그때당시에 회장을 했던 얼간이들은 국가에서 보조해 주는 공금으로 마치 자기 주머니에서 꺼내 쓰는양, 밥먹이고, 술먹이고, 한푼 저축해둘 생각을 하는것 조차 향군조직 운영에 누를 끼치는것으로 생각될 정도로 다 탕진해 버렸다. 조그만 사무실 하나 운영하지 못하고 회장집이 사무실인양 본부에 보고하는 촌극을 자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양 속담에 "해뜨는 밝은날뒤에는 반드시 비오는 날이 온다"라는 우리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완전무시하고, 다 탕진해 버렸던 얼간이 늙은이들이 지금은 자문위원이랍시고 앞길을 꽉 막고 길을 비껴주지를 않고 있는 단체가 바로 동부지회다. 임기가 다되여 회장바꿀때가 되면, 자기네들끼리 작당하여, 먹이감을 찾아서 사냥을 한다음, 더 늙기전에 마지막으로 봉사를 한번 해 보시라는 내용으로 계속해서 하루는 A가, 다음날에는 B가 하는 relay식으로 접촉해 오면, 사람인지라, 노인네분들의 마지막 부탁인데....라는 쪽으로 마음이 움직이게 된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이 후보로 나서 경쟁할것 같으면, 아예 차단해서, 단독후보로 세워놓고 회장을 선출한 첫 케이스에 내가 걸려든 것이다.
해외지회장들 안보교육모임이 있어서 본국에 출장 가서 지회장들과 지회운영에 대해 애기들을 나눈적이있었다. 특히 북미대륙, 즉 미국과 캐나다 서부 지회장의 얘기에 동부지회를 대표한 나는 챙피해서 얼굴을 들고 같이 대화를 하기가 부끄러운 지적을 받은일이있다. 그분들의 설명에 따르면, 6/25행사, 7/27휴전행사같은 큰 향군행사의 주관은 당연히 한국쪽 해당 지회장들이 하는것으로 되여 있고, 그렇게 행사를 하고 있었다. 내가 책임지고 있었던 동부지회는 캐나다쪽 향군에서 그러한 행사를 주관하고, 우리 동부지회원들은 꺼꾸로 초청받아 참석하는것으로 책임(?)을 완수를 하고 있는것으로 인식되여 있고, 지회창설이래 그렇게 해오고 있는것이다. 선배회장에게 "무슨 이유가 있느냐?"라고 물었더니, 대답은 간단했다. "더이상 깊숙히 알려고 하지말고 임기나 채워.."그것이 전부였었다. 쉽게 한마디 더부친다면, 제 밥그릇도 못찾아먹고 다 빼앗긴 얼간이 선배회장들이, 뒤에 버티고 서서 수렴청청 할려고 하는, 방안퉁수같은 자들인것을 깨끗이 인정하고, 이제라도 자성하여, 제자리를 찾기위해 모든힘을 기울여야 함이 마땅하다고 믿는다. 한국전 참전용사는 미국이 캐나다보다 훨씬 많고, 한국전에서 목숨을 잃은 미국병사의 숫자는 캐나다군의 백배가 훨씬 넘는다. 이러한 통계를 이해 한다면, 당연히 동부지회가 이러한행사를 주관하고, 캐나다 향군들을 초청하여 같이 추념식을 하고, Fellowship을 했어야 한다. 이얼마나 챙피한 일인가. 동부지회에서 이러한 수치심을, 나와 뜻을 같이 하는 몇회원들을 제외하고, 가슴깊이 느끼는 자들이 또 있을까? 천만에.....
이러한 잘못을 어떻게든 바로 잡아 볼려고 캐나다 향군회장과 밀착하여 업무를 협의하고, Fellowship을, 그어느 회장때 보다 강화하고 실천했더니, 직접나서서 비난하지는 못하고, 뒤에 숨어서 "뭘 얻어 먹을게 있기에 코쟁이 향군회장한테 굽신 거리는가?"라고 모함을 지독하게도 들었었다. 이런 동부지회의 내막을 잘알고 있는 공관역시 향군동부지회를 괄시하는것은 어쩌면 당연하다하겠다. 이곳 서구사회에서 조국의 안보를 위해 맨앞에서 뛰는 단체가 향군말고 또 어느 단체가 있단 말인가. 나이든 늙은 향군회원들의 생각은 어디에 있는것인지? 분간이 쉽지않다. 늙으면 어린애가 된다고 한 옛말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이분들을 보면서, 고급장교였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하는것 외에는 귀담아 들을게 아무것도 없다.
이분들의 정기 모임에 초청받아 참석해 보면, 더욱 한심하다는 생각뿐이다. 향군발전을 위한 토론이나 의견 교환은 전연없고, 세상돌아가는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듯이 다내려놓고, 오직 어느식당음식이 맛있다는 이야기, 약복용이야기가 전부다. 같은 이치로 향군운영에 대해서도 다내려놓고 돌아가는것 쳐다보고 있으면 될텐데....그것은 싫어하는것 갇다. 그래서 지금 동부지회원들중에는 젊은 회원이 거의 없다. 앞으로 이러한 상태로 운영된다면, 앞날은 매우 부정적일수 밖에 없을것 같다.
요즘은 인터넷 세상이다. 회장을 도와 같이 회를 이끌어 가는 부회장들이 변심하기를 밥먹듯하는 요즘의 세상에 환멸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회장단 회의에서 장시간의 토론끝에 합의점을 도출하여 이를 다시 이사회에 상정하여 토론하고 표결에 부칠때는, 안면몰수하고 반대편에서서 회장에게 돌을 던지는 배신행위를 저지르고, 그다음날에는 갑자기 언론사에 찾아가, 갖은 모함을 다 담아 회장을 규탄하는, 언론 플레이를 서슴없이 해대고, 인터넷에 돌리고.....
내용인즉은 이미 회장단회의에서, 이사회의에서, 마지막으로 어린아이처럼 장난감 하나 사주면 좋아라 하는, 얼간이 늙은이들의 모임에서 조차, 내용이야 어쨋던, 토론하고 합의 하고 인정했던, 사무처장임명과 묘지조성건을 들어, 회장 독단으로 처리 했었다는 모함이 그것이다. H일보는 큰 특종이나 만난것 처럼, 일방적으로 회장독재했다라는 기사를 써버리고.... 이에 맞대응해서 언론플레이를 하게되면, 얻는자는 아무도 없는것이 분명하고, 향군의 명예와 자존심만 크게 상처를 받을 것을 잘 알기에, 꾹참고 무응답으로 일관했었을때의 책임자의 심정을 어느누가 읽을수 있었을까? CKBA웹에서 H일보에 대한 비난 기사를 보면서, 늦게나마 그신문이 찌라시같은 쓰레기로 널리 알려져 있음을 파악했었다.
지금 동부지회에는 해병대가 완전히 빠져나가 이빨빠진 조직으로 운영돼 온지가 6년기간이다. 원인이야 어쨋던 같이 활동하던 옛전우가 조직을 빠져 나간다는것은, 조직운영상 가장 큰 사건 사고 일수밖에 없다. 언론플레이는 양쪽에서 하지 않았고, 안에서 해결하여 지금까지도 향군회원들외에는,한인 사회에 별로 이슈화 되지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점에 대해서는 조직의 체면과 명예를 포함한 모든면을 위해 당사자들이 자제를 잘 했다고 칭찬아닌 인내였음을 높이 사주고 싶다. 앞서 언급한 부회장 또라이들의 행동과 확연히 구분되는 내용이다.
취임초에 본부와 약속을 했었다. 즉 본부와 지회와의 공식 대화 채널은 오직 지회장을 통해서 투서나 민원까지도 포함된 모든 행정은, 운영하게 된다라고. 그러나 그약속은 본부스스로 한번도 지켜준일이 없었다. 그들의 의도는 본부는 지회에서 폭동이 일어나는 큰 사건이 터져도 자기네 손에 피를 안묻히고 해결 되여서 형식상으로 모양새만 갖추어 나가기를 바라는, 즉 시간만 떼우고, 그순간만을 모면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으로 꽉찬 얼간이 실무자들의 집합소이다. 그들은 본부회장의 입과 귀를 그런식으로 막아 버리게 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그진상을 이번 소용돌이를 통해서 파악하면서, 무서운 세상인심의 또다른면을 본것이다. 역설적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인생살이에서, 나와 교제를 했던 친지분들이 나처럼 바보같은 삶을 살아왔다는 말이 되기도 할것 같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조직을 운영하면서 상당수의 젊은 회원님들을 새회원으로 영입했었다.
어떻게든 그분들에게 조직에 합류시켰기에, 그분들이 활동할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고 궁리를 많이 했었다. 조직은 물흐르듯 계속적으로 흘러가야 소생할수 있기에 말이다. 얼간이 늙은이들의 생각은, 새회장이 늙은이들을 괄시하고 돌보지 않는다는 억지 논리로 빈공간을 만들지 못하게 원천봉쇄해 버리는 작태들만, 몇명의 훼방꾼들을 선동하여, 연출하고 말았다. 지금의 모양새로는 앞으로 불과 5년후면 겉모양은 큰변화 없을지라도 속내용은 완전히 고사하고 말것이다. 어느 누가 이런 걱정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조직의 운영방식을 고쳐 볼려고 바지가랭이 걷어 부치고 나설수 있을까?
어쨋던 멍애를 벗어 던져 버린 지금의 심정은 하늘을 나르는 기분이다. 어느 친지분이 해줬던 한마디가 기억에 떠오른다. "발을 들여 놓아서는 안되는 세상속에 너무 깊이 빠졌던것을 늦게나마 깨닫고, 건저 내려는 뜻일것이야" 라고. 그말에 전적으로 동감이고, 오늘 완전히 발을 빼냈음을 마음이 가볍고 시원하게 느끼는것으로 확인되는 셈이다.
나를 아끼는 어느친지는, 차라리 늙은이들의 얼간이같은 요구를 모른채 들어주면서, 밥사주고, 술사주고, 모임에 초청하고..... 눈딱감고 그분들의 비유를 마추어 주었더라면, 그리고 새로운 계획을 세울 필요없이 시간 흘러가는데로 임기동안 물흘러가는데로 처신했더라면, 지금처럼 악의에 찬 모함과 slandering은 피할수 있었을수도 있었을텐데..... 언론에 밑도 끝도 없이 자기네 마음데로 써갈려버린 언론사들의 횡포를 막을수 있었을텐데.... 우리 부부를 보면서, 우리 부부가 느끼는 비애감보다 더 애통해 하는 모습이다. 괜히 그분들에게 미안하기만 하다. 시간이 가고 해가 바뀌면 관심밖으로 사라지게 되는 그날이 있을 것이다. 고맙기만 하다.
며칠전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Play Boy잡지사의 주인장인 90대 연령의 Hafner씨가 26세의 아름다운 금발의 여인과 결혼을 했다는 뉴스는 뭇 남자들의 부러움을 불러 일으키고도 남을 정도의 빅뉴스거리 였었다. 그는 합법적으로 또 결혼을 했기에 법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음이 분명하다.
26세의, 일생에서 신체적으로 완전 mature된, 신부가 신혼생활의 맛을 과연 얼마다 느끼고, 만끽할수 있을까?라는 의문점은 계속적으로 뭇남자들의 관심 거리가 될것이다. 결혼은 장성한 남녀가 만나 가정을 꾸리고 자손을 퍼뜨리고….신체적 결합에서 쾌감을 얻는 목적도 있지만, 이에 못지않게 후손을 생산하는 의무가 수반된다고 본다.
요즘의 세계는 그러한 인류역사 이래로 내려온 전통이, 즉 가정의 개념이 뿌리채 흔들리고 있음이 대세로 보여진다. 장성한 젊은 남녀들은 육체적 쾌감은 그 어느시대보다 더 많이 만끽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 즉 가정을 꾸리고 자손을 퍼뜨리는 일에 대해서는 냉소적임을 실감한다. 선직국일수록 그러한 현상은 유행의 정점을 달리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고,한국전을 치르고 산업화의 격동기를 거쳐 오늘에 이른 Old Generation들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좀더 과장되게 표현한다면, 지구의 종말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되기도 하는, 인류 공동의 걱정거리이기도 하다. 정작 당사자들인 젊은 세대는 태평하기만 한데……
오늘 본 CNN의 짧막한 뉴스는 일종의 까십기사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아직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주위의 강권에 의해 팔려가는 결혼식, 그것도 신랑은 며칠후에 창조주를 만나러 먼 여행길을 떠나게 될 지경에 있는 늙은이라는데 문제가 귀결된다. 늙은이들은 비단 결혼뿐만이 아니고, 뒷감당을 하지도 못할 일에 발을 담그고 보는 못된 행동들을 거침없이 한다는 증거를, 그결과로 표적이 된 당사자는 남은 인생동안 큰 상처로 가슴속에 남게될,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세상을 떠날때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잘 없어졌다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북망산을 향해 길을 재촉하는 현실을 많이 봤다. 반면교사라고 했던가? 옷깃을 여미면서 나 또한 조심스럽기만 하다. 여기에 뉴스내용을 옮겨 놓는다.
cnn뉴스에 의하면, 70세의 노인이 15세 소녀와 결혼을 하여 항간의 논란이 되고 있으며, 소녀의 식구들을 그가 지불한 약 2만 달러에 달하는 결혼지참금을 내동댕이 쳤다고 합니다.
인권위원회에서 봉사하는 직원들의 말에 의하면 신부는 분명히 15세 된 소녀로서,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분개하지 않을수 없다고 열변이다.
cnn은 화요일 신랑인 당사자를 만나서 그가 신부의 부모에게 북미돈으로 약 2만달러에 상당하는 결혼지참금을 지불했었다고 밝혔다. 이러한 사실은 신랑인 70세 노인이 그가 살고 있는 지방의 한 관공서에 그의 신부가 그녀의 친정 부모의 도움을 받아 그로 부터 도망쳐서, 자기의 인생을 망가뜨렸다고 진정하게 되면서 외부에 알려지게 된것이다. 또한 신랑은 신부가 15세의 소녀가 아니라 이미 장성한 25세의 여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70세된 신랑은 신상을 밝히기를 거부해 이름은 알수 없다고 전했다.
"내신부는 15세의 소녀가 아니라, 25세의 성숙한 여자로 모든것을 본인 자신이 결정할수 있는 성숙한 여자인데, 그녀의 가족들에게 나는 당한 셈이다"라고 항변이다.
신부의 아버지는 Yemeni, 어머니는 Saudi이며, 신부는 Yemen과 접경지역있는 사우디 남쪽 지방에 있는 Jizan주의 Al-Hurath마을 출신이라고, 사우디 정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는 인권위원회의 책임을 맡고 있는 Dr. Hadi Al-Yamani씨는 CNN에 설명하고 있다. Al-Yamani씨의 설명에 따르면, 인권위원회에서는 검사관을 Al-Hurath마을에 파견하여 조사중이라고 설명을 덧붙혔다.
앞으로 인권위원회에서는 소녀신부의 가족에게 그녀를 돕기위한 모든 조치를 강구할것이며, 특히 법원에서 이번 결혼에 대한 시비가 벌어질때 모든 비용을 포함한 법적 대응을 도울계획이라고 한다. 사우디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는, 사우디 전국을 관장하는 인권위원회의 Dr. Suhaila Zein al-Abedin씨는 결혼에서 나이 차이에 대한 문제도 있지만, 결혼에 대한 양가의 상황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라고 설명한다.
"결혼을 앞두고 신랑 신부의 나이차이가 엄청날때, 이것은 축복받는 결혼이 아니라 인신매매, 즉 신부가 팔려가는 기분이다. 이번의 경우 분명코 신부의 부모에게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수 없다."라고.
결혼적령기에 대한 나이를 주장하는 인권단체들중의 하나인 HRC구룹은, 비록 최소한 몇살에 도달해야 결혼 적령기인가를 정확히 주장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18세 이하의 소녀가 결혼을 하고 싶어 할때는 법원의 허가를 받아야함이 마땅할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강경 보수주의자들은 강력히 반대하며, 이는 결혼연령을 정부가 간섭하는 합당치않는 법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이문제에 대한 이론가인 이집트의 Mona씨는 "이번사건과같은 결혼문제에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문제를 제기 했을때에만 관련단체들이 소녀들을 보호하기위해 투쟁할수 있는 사회적 문제이기에, 이번 사건의 당사자인 15세 소녀의 경우 크게 분노하지않고 또한 이와 비슷한 경우에 처한 사건도 우리가 관여할 사항은 아닌것으로 본다"라고 Tweeting하고 있다. 또 다른 Yemeni사람 Noon Arabia씨는 "어린소녀를 결혼시키는것은 인권을 유린하는것이다"라고 Tweeting하고 있다.
또 인디아 출신 Arun Kumar씨는 "적령기가아닌 어린 아이들의 결혼은 심각한 인권문제에 해당된다"라고 장문의 기고문을 올려놓고 있다. 요약해 보면 대충 다음과 같다.
즉 현재 전세계적으로 어린 아이들의 결혼은 비난을 받고 있다. 어린 소녀들이 늙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심각한 인권유린이다. 아직 정신적, 신체적으로 완성되지 않고, 충분히 자아판단이 덜 성숙된 강제 혼인은 감정을 깡그리 뭉개 버리는 행위이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의 혼인은 강제성이 포함되여 있나를 심도깊에 따져봐야 한다. 그렇지않은 경우에는 분명히 그안에 강압적이고, 개인의 의사가 무시된 인권유린이 포함되여 있기 때문이다. 어린소녀들의 혼인요구는 국제적으로 합의된 인권유린이 분명하다. 현재의 추세로 간다면, 앞으로 10년 동안에 약 1억명의 18세미만의 아동들이 강제 결혼에 직면하게 될것이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어린아이들의 강제결혼은 저주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인권유린행위로 간주되고 있다. 대부분의 결혼상대는 늙은남자와 어린 여자사이에 이루어진다. 어린여자아이들은 아직 자아가 발달안되 부모나 주위의 강요에 의해 본인 동의없이 강제적으로 행해지고 있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여자아이들의 조기 강제결혼은 인도, 나이제리아,방글라데쉬,파키스탄, 기니아, 버키나 파소, 아프리카지역 그리고 네팔에서 관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신부들은 거의가 다 18세 미만이라고 한다.
Present time, child marriage is a curse in the global society. Child marriage is a violation of human rights. In most cases young girls get married off to significantly older men when they are still children. Child marriages must be viewed within a context of force and coercion, involving pressure and emotional blackmail, and children that lack the choice or capacity to give their full consent. Child marriage must therefore always be considered forced marriage because valid consent is absent - and often considered unnecessary. Child marriage is common practice in India, Niger, Bangladesh, Pakistan Guinea, Burkina Faso, Africa and Nepal, where mostly girls are married below the age of 18.
어느 늙은 얼간이는 약 한달전 나를 씹어대는 이멜을 온세상 천지에 뿌리고 돌리고 난리 법석을 피웠었다. 이멜을 프린트 해보니 무려 12페이지나 됐다. 이렇게 값비싼 메일 내용은 그날 이후로 잘 보관 하고 있다. 오늘은 그얼간이가 일본식 영어로 또 캐나다쪽 관계자에게 나에 대해서 이멜을 보내면서 나에게도 참조자로 메일을 보냈는데 내용은, "그는 이미 그직에서 떠난 사람이니 참고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12페이지에 달하는 악의에 찬 내용같은것은 차마 쓰지 못하고, 혹시라도 사칭을 하고 다닐까봐서 그렇게 보낸 모양이다. 역시 일본식 영어답다. 불쌍한 그늙은 얼간이..... 몇년전에는 그가 interpret로, 토론토공항에서 캐나다를 방문하는 한인을 통역하는 일이 있었단다. 통역은 통역을 요청한 사람의 발언을 가능한한 있는 그대로 옮겨서 전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한인의 얘기를 듣고 나서는 마치 경찰이나 법관이 된양, "당신같은 사람들 때문에 한인들이 욕을 먹는다. 당신은 캐나다에 입국할 자격이 없다"라는식으로 몰아부치고, 심사를 맡은 이민관에게 불리하게 통역을 해주어, 그사람은 결국 캐나다 입국이 거절되여 다음 비행기가 떠날때까지 감금되여 있다가 추방당한 일이 있었음을, 그날 현장에서 근무하고 있던 내가 잘아는분이, 그얼간이의 추잡스런 행동을 보면서, 어이없어 했던 사건을 얘기해준 기억이 오늘 다시 생각난다. 평소 그얼간이는 돌출행동을 이런식으로 해오곤 하면서, 주위에 곤욕을 치르게 하는데 선수라고 해야 할것 같다. 요즘은 우리쪽 행사에는 코백이도 안보이고, 월남 사람들 모임에 얼굴을 내밀곤 한다. 그런 그가 어떤 자격으로 이런내용의 메일을 흘리는가. 이런사람들이 늙은 얼간이라는것을 이번에 알았다.
H일간지는 신년들어 또 나에 대한 기사를 써대는데 신이 들렸나 싶게 써대고 있다. 어제도 써대더니, 오늘은 전격사퇴라는 내용으로 써댄것이다. 사실여부를 본인인 나에게 전화나 이멜로 물어 보지도 않고 써대고, 사진을 실었다. 약 20여년전에 내가 하던 가게앞의 주차장을 시(City Hall)에서 갑자기 시멘트 블록으로 막아버려 곤욕을 치렀을때, 너무도 억울하여 Sun Newspaper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한 일이 있었다. 취재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약 3시간후에 현장인 가게에 기자가 나타났었다. "금방 뒤따라 온다고 하더니 이렇게 늦은 이유가 있었는가?".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바로 뒤쫒아 왔는데, 가게 앞에서 지나는 사람들을 인터뷰 했기 때문이었다"라고. 그다음날 바로 신문에 관련 기사가 나올줄 알고 뒤져 보았으나 없었다. 그다음날도...... 무려 일주일이 다 지나고 일요판 특집기사로 Whole Page를 장식했었다.
일이 잘해결되여 훗날 다시 그기자와 만났을때, 그가 또 얘기를 해준 기억이 지금도 뚜렷하다.
"그날 취재후 바로 또 시청에 들려서 관련부서에 들려 자료를 뒤적이고, 관련공무원들을 만나 취재하고..... 그래서 예상보다 시간이 좀 걸렸었다"라고. 그신문기사를 H일간지 기자가 보고 나에게 전화를 해서 사건 개요를 알려 달라고 했었다. 난 기자에게 한마디로 "기사화 하지 말라. 기사화 하고 싶으면, 현장에 나와서 취재를 해라. Sun기자는 무려 일주일 이상을 뛰어서 만든 기사내용이다. 그런데 당신네들은 앉아서 공짜로 먹을려고 그러는 심보를 이해를 못하겠다. 이사건에 대한 내용을 Diary 형식으로 기록해 두고 있는데, 만약에 기사화하면 당신네 신문사에는 제보하지 않겠다" 라고 언쟁을 벌인 기억도 떠 오른다.
또 다른 사람으로 전화가 왔다. "회장직 사퇴하면 안되요. 한인사회내 다른 단체장들에게 영향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그는 평소 알고 지내는 나보다는 젊은분인데, 부회장으로 들어와서 도와 달라는 부탁도 했었던 분이다. "이미 다 매듭지어진 일이니 더이상 재론하고 싶지 않다. 나를 조용히 있게 해달라"라고. 그때는 다른 이유를 대고 도와줄수 없다고 했던 분이, 오늘은 이런식으로 나를 조용히 있게 두지를 않는다. "K라는 사람이 그렇게 못살게 굴었지요?"라고 묻는다.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만큼 K라는자는 한인사회에서 그런쪽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음이 증거로 나타난 것이다.
세상인심을 지난 몇개월 동안에 심도깊에 들여다 보고 느끼고, 비통함도 씹었었다. 봉사해달라고 권유를 할때는 언제고, 자기네 마음에 들지 않게 일한다고 몇놈들과 합세하여 몰아 부치면서, 모함과 질투로 신문지를 도배하는 그들의 작태를 보면서, 같이 맞상대로 싸운다는것도 치사하고, 꾹참아오다 기회를 포착하여 짐을 내려 놓았더니, 또다른 쪽에서 쪼아대는 세태가 너무나 싫다.
내일의 신문에는 또 어떤 기사로 나를 흔들어 댈까? 오늘 저녁에는 Richmondhill에 사는 친지의 집에서 저녁을 대접받았다. "오늘 아침 H일보 신문기사를 보면서 너무도 속상해서 배가 뒤틀려 설사까지 했었다"라고 위로 하면서, 괜찮느냐?라고 본인인 나보다 더걱정이 태산이다.
"지난해는 신문지상에 가장많이 오른 이름이 바로 '이형'일거야. 암튼 세상 참 더러워. 그래도 지금까지 참아왔으니 더 참아. 불원간 모든게 모함과 Slandering 그리고 질투에서 비롯된, 이형을 시기하는 몇사람들의 농간이었음이 밝혀지게 될거야"라고 오히려 나를 설득하기에 바쁜 C형댁이다.
지난 3일날 년초에 같이 일했다가 도중에 그만둔분으로 부터 예상치 않았던 전화가 왔었다.
"안녕하셨어요? 나 C입니다. 부회장으로 재직시 제대로 보필도 못해 드려 죄송했습니다. 신년에는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 라고. "전화 주셔서 감사하고요. 지난일은 다 잊었으니 심려치 마십시요. 건강하세요"라고 덕담을 주고 받고 통화를 끝냈다. 약 한시간후 서울본부로 부터 P부장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 회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본부회장님께서 지회장님 놓아 주시라는 말씀이계셨습니다. 그리고 임시회장대행으로 C전부회장과 통화하여, 그분이 임시로 회장대행을 맡아 수고해 주시기로 했습니다."라고. " 강력히 부정했던 3명을 제외 시키고, C를 지명해서 불행중 다행입니다". 그리고 통화끝이었다. 조금전까지 C에 대해 고맙게 여겼던 나의 생각이 확 바뀌었다. 어쩌면 이럴수가있는가? 전화를 했을때, 사건전말을 톡 까놓고 본부와 통화에서 일어났던 얘기를 사실데로 알려주고, 오해 없기를 바랜다라는식으로 신년인사를 했었으면 더 고마워 했을텐데..... 이런자들이 고급장교를 했었다고 자랑삼아 얘기하니.... 역시 그사람은 그릇이 그것밖에는 안되는구나. 앞으로 Transition때문에 얼굴을 보아야 할텐데, 그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그사람이 괘씸하다기 보다는 측은하게 느껴졌다. 나이를 먹었으면 그만큼 진정성을 보였어야만 했다.
전직회장을 했던 P씨는 2일전 전회원들을 상대로 이멜을 돌렸었다. 나에게도 전달됐다. 그것도 본인명의로 된 이멜이 아니고 자기 마누라것을 이용해서..... "덜 떨어진 얼간이는 배앓이도 없나? 맨날 몇명의 자문위원뒤만 쫒아 다니면서 비유 맞추게. 그렇게 회장이 시간이 많아?" 라고 뜻있는분들이 그에대한 푸념을 했던 이유를 지금은 알것 같다.
"존경하는 이사님들, 자문위원님들..... 지난해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처지였었습니다. 이제는 마무리 되여 가고 있으니...."
신문광고에 본인 승락없이 이름이 올려져 있어도 광고주동자에게 항의하나하지 않고 처신하던 그사람이 마치 자기가 중재하여 해결되여 가는것처럼 떠벌리는 꼴이, 그가 임기동안에 해댔던 그꼴볼견을 드러냈다. 그래도 그가 봉사한점을 가상히 여겨 공로패를 만들어 줄려고 information이 필요하여 연락했더니, 이건 한술 더떠서 훈장을 상신해 달라고 하면서 본인의 공적 조서를 만리장성으로 작성하여 나에게 보냈었다. 이것은 한인상위원회에서 수여하는 공로상을 타겠다고 공적조서를 본인 자신이 작성하고, 나에게 추천서명을 요구하는 그자( 송씨)와 똑같은 부류의 심장에 털난 사람들만이 할수있는 행동을 서슴없이 해대는 별난 세상의 사람들임을 이번에 똑똑히 보았다. 이런때 사용되는 사자성어가 얼른 떠오르지않아 아쉽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봉사 한다고 허둥대는것은 시기하는자들의 안주거리가 되기 십상이고, 또시간과 주머니돈 낭비로 귀결되기에 짐을 내려놓기 잘했다라는 생각밖에는 없다. 내가 너무나 세상밖으로 깊이 발을 들여 놓았음을 늦게나마 깨닫고, 발을 씻기를 잘했다.
얼간이들아, 나이 먹었으면 먹은데로, "무심코 던진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라는 심플한 진리를 항상 염두에 두고 언론사는 법관의 심점으로 양쪽의 억울함을 귀담아 들은후 정론을 쓰고, 모두가 남을 아프게 하는 그런 못된짖은 신년들어서는 그만들 해라. 참고 또 참으면서 인내하는데도 한도가있다. 그런한도가 이제 거의 Maxed out 되가고 있음을 강조해 둔다. 봉사를 한답시고 헤매면서 잃어 버렸던 은퇴생활의 Pattern을 되찾아 바삐 뛰어야 겠다.
흑룡의 해라고 하는 2012년도 마지막날 이른 오후에, Lunar와 난 Super Market에 들려, 신년아침에 아니면 점심에 아이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시간을 보내기위한 준비를 하기위해, 이것 저것 장바구니에 주어담았었다. 집에와서 시장본것을 풀어보았을때는, 풍족해 보인다기보다는 뭔가 빠진것 같은 아쉬움이 그속에 있는것을 느꼈다.
고국의 막내동생과 여동생으로 부터 새해축복 인사를 겸한 소식이, 컴퓨터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그네들도 생활에 바쁠텐데 잊지 않고, 이렇게 소식주니, 이또한 형제자매가 있다는게 큰 위안이 되는것을 진하게 느낀다. 막내동생의 큰 딸이 신년도에는 결혼을 한다는 소식도 그안에 들어 있다. 날자도 자세히 적혀 있지는 않다. 다만 흘러가는 소식정도로 잠깐 언급한 것이다. 그이유를 내가 모를리 없다. 태평양을 다시 건너가서 새삶을 출발하는 조카딸을 축하해줄 여건과 부담(?)을 고려해서, 마음의 부담을 없애려는 배려에서 였을 것이다.
TV에서는 세계각국의 신년맞이 행사를 보여준 화면이 생각난다.
맨먼저 보여준곳이 New Zealand의 화려한 불꽃놀이가 그곳시간으로 신년도 0시를 시작으로 하늘위로 치솟았고, 그뒤를 이어 Australia에서 비슷한 형태로 밤하늘을 수놓았고, 고국 서울의 보신각에서는 타종하는 모습이 보여 졌었다. 그리고 홍콩, 베이징 등등..... 그리고 한바퀴를 다 돌아서 이곳 토론토의 시청앞 광장에서, 뉴욕맨허턴의 Time Square에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시작되면, 정말로 뱀띠의 계사년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신성하고 남 시기하지 않은 마음들이 이순간만이 아니고 계속 365일 동안 이어진다면, 군대증강에 사용되는 귀중한 돈들이 이순간을 환영하며 반기는 뭇사람들의 화사한 얼굴과 신체적 건강을 위해 값있게 쓰여 질수 있을텐데......
오늘, 새해 첫날에 아이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 새해 떡국을 먹으면서, 살며시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아빠 엄마에게 금년에는 국수먹여줄수 있겠니?"라고 의견이라도 떠봐야 겠다.
그들의 대답은 항상 같다. "엄마, 아빠 잘알고 있어요."다. 마음이 조금은 급해지는 기분이 지난해 보다는 더 할것 같은 생각이다. 내가 낳아 키워서 지금은 장성했지만, 그들의 삶은 그들의 것이기에 Force할수만은 없는 것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한인회관에서 새해신년인사 행사가 있다고 한다. 당연히 참석해서 서로 악수하면서 Hugging하는 상대방의 건강과 신년축복의 인사를 교환 해야 하나, 참석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힌지가 벌써 며칠이 됐기에, 어쩌면 또 비난의 화살을 받을지 모르겠다. 그속내를 모르는 사람들이나 친지분들께서는 핀잔에 가까운 한마디씩을 할것이다. "책임감이 없는......" 그러나 책임감 때문에 얼굴을 내밀어야 할만큼 나는 내얼굴이 두껍지 못함을 한탄해서 뭘하겠는가. 2012년은 돌이켜보면, 나를 위한 삶은 거의 없었던, 결과로 보았을때는 불구덩이 속으로 내가 파고 들어가 뜨거운 화를 당한 해였기에, 2013년 새해의 신년 하례식에, 화상을 입어 그형체를 알수도 없을만큼 험악해져버린 그얼굴로는 안된다는 나의 결론에서다.
2013년은 4자리 숫자 모두가 제각각이라고 TV에서 어느 앵커가 하는 멘트가 생각난다. 처음에는 무심코 들어 넘겼는데, 2012년, 2011년 그리고 계속해서 지난 햇수들의 숫자를 생각해 보았다. 그의 멘트가 맞다. 신기하다. 어떻게 그런생각을 해 냈을까? 아마도 새로운 마음과 행동으로 새로운 그무엇을 찾아 지혜롭게 새삶을 개척해 나가라는 신호가 아닐까?라고 나를 기준으로 해석해 본다. 제발 그렇게 건강을 위시한 모든일들이 잘 진행 됐으면 하는 바램이다
벌써 신년을 향해 달려왔던 시계바늘이 출발지점을 지나 5시간을 훌쩍 넘긴 지금이순간, 나는 컴퓨터에 이렇게 나의 모든 염원을 담아 수놓아보고 있다. 이제는 늙었다고 국가에서 장학금을 수령하기 시작한지도 한해가 지나고, 또 새해를 맞이했다. 희망을 잃지 말라고, 꿈을 꾸라고, 다 듣기좋고, 하기 좋은 소리지만, 실행은 쉽지가 않다는것을 매년 터득하긴 했었다.
뱀띠라고 하는데.... 그의미가 그리고 해석이 각자의 기준에 따라 엇갈릴것이다. 나도 Wish를 곁들여 좋게만 해석할려고 할것이다. 별수없는 수많은 군중들의 생각과 별로 다르게 생각할 여유가 없는 한 평범한 사람이기에.
내가살고 있는, 온타리오 호수를 향해 크게 달려 있는 콘도 창문을 통해 솟아 오르는 신년 아침의 태양이 미소를 머금고 모습을 들어낼때, 한장 찰칵해서 보관해야겠다. 2013년의 첫날 첫 Sun Rise는 어제와는 어떻게 다른 모습일까? 더 커졌을까? 아니면 나의 삶처럼 지나온 세월만큼 시들어져 있을까? 디카도 몇년 사용해서 이놈 또한 제대로 일을 해낼지? 괜히 디카에게 푸념이다. 겨울이면 거의 매일 구름이 뒤덮는 하늘뿐인데, 오늘 이아침에는 구름이 없기를 바랜다. 이것 또한 나만을 위한 욕심이 아니기를 아니 않을지어다.
요즘과 같은 연말 연시에는 온타리오주에 있는 맥주판매소와 440여개의 맥주outlets가 호황을 맞아 문을 열면서 닫을때까지 북새통이다. LCBO에서 맥주가게를 control하고 있는것으로 우리 온타리안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득을 남겨 온타리오주 정부에 많은 이득을 남겨 주는것으로 알고 있다.
얼마전에 온타리오주의 야당 당수, Tim Hudak이 한발언이 그냥 스칠일이 아님을 다시 음미해 본다. "온타리오주민들의 정신적 성숙도를 아직도 믿지 못하고, 맥주판매를 LCBO에서 지정한 판매소에서만 구입할수 있도록한 오랜법을 이제는 버리고, 퀘백이나, 남쪽의 뉴욕주에서 처럼 Convenience store에서 자유롭게 구입 할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여름철 더운때는 맥주는 음료수 대행으로 많이 마시게 된다. 맥주 한Pack를 구입하기 위해서 차를 운전하고 다녀야 할 정도로 불편을 겪고 있는 주민들이 많이 있음도 알아야 한다.
Queen's Park에서 Columnist로 활동하고 있는 Martin Cohen씨의 설명에 의하면, 온타리오주에서 판매되고 있는 맥주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것 처럼 그판매액이 LCBO를 통해서 정부의 금고로 들어가지 않고 있다고 폭로했다. 실제로 맥주판매의 독점권을 갖고 있는 회사는 전부 외국자본이라고 했다. Anheuser, Busch Invev, Molson Coors 그리고 Sapporo맥주회사로서, 이들은 벨지움, 브라질, 미국 그리고 일본에 본사를 두고 있다고 했다.
Labatt, Molson, Sleeman등의 캐나다 맥주회사는 이미 그 ownership이 외국자본에 넘어간지 오래됐다. 이들 외국맥주회사들은, 독점권을 이용하여, 정부에서 행할 모든 권한을 행사하고, 정부는 그냥 보고만 있는 셈이다. 고객인 온주민들이 입맛에 맞는 compact package 맥주를 구입 할려고 하면, handle하기에 편리한 6병으로 포장된 맥주는 거의 없다. 입맛에 맞는 브랜드를 구입할려고 찾으면 대개는 24병으로 포장된 Package를 구입해야 하는데, 이렇게 해서 필요한 양 이상을 구입해야 하는데, 이런 간접적인 편법을 이용하여 이들 외국회사들은 시장점유율을 약 80%이상 차지하게 되여 자동적으로 좌지우지 맥주판매에 횡포를 부려도, 정부는 손도 못대고 있는 상황이다. 누가 이들을 선택했는가?
시간은 계속흘러 오늘에 이르렀는데, 우리는 아직도 1927년도에 만들어 놓은 법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다. 즉 와인이나 기타 술은 LCBO에서 관장하고, 맥주는 업주들끼리 조합같은 형태의 판매조직을 통하여 판매 하여오는 동안에 몇개의 회사들을 그판권을 독식하여 위에서 언급한 외국회사들이 판매권을 독점하도록 한 법이 바로 이시간에도 적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횡포는 오래전 영국이 인도에 "동인도회사"를 설치하여 인도의 무진장한 시장을 점유하여 착취를 했던 경우에 비교 될수도 있다고 할수 있겠다.
아무런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지 않은채 독점 알코홀판매 제도를 해체해 버리면, 여러면에서 정부로 들어가는 이득금에 대한 차질을 빗을수 있는것도 배제 할수 없다.
LCBO전체를 팔고 민영화 시키겠다는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우선 맥주판매에 대해서만 전매사업에서 떼어서 Convenience Store등에서 판매 하도록 법을 바꾼다면 온주민들이 우선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맥주판매가게와 440개에 달하는 맥주취급점에 대하여 잘 못알고 있는 내용을 알아야하는게 먼저 일것 같다.
만약에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온주정부가 맥주판매에 대한 비즈니스에 대한 권한이 없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을 웃음거리로 만든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내가 그렇게 말하는데는 분명한 이유가있다. 분명한것은 정부가 맥주를 판매하는 권한이나 Store가 없다는것을 말한 것이다.
지금으로 부터 10여년전에 Burlington에 맥주가게를 새로 open 했었다. 그때 Perry Davidson씨는 부사장으로 300종류이상을 Store에 진열하여 고객들의 호응이 무척 좋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주인은 이를 환영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객들은 이것 저것 골라서 입맛에 맞는 맥주를 맘껏 구입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Labatt, Molson Blue 그리고 Cnadian등의 맥주는 판매가 줄어들어, 맥주 Cartel주인들은 궁리끝에 또 다른 방법을 만들었었다. 그내용은 약 30 종류의 맥주는 취급하면서, 시원하게 냉장시켜 손님들을 유인하는 방법을 썻다고 한다.
1940년에 몇개의 맥주제조사들은 맥주소매판매망을 연합하여 사들이기 시작했고, 그후에 그들은 이름을 바꾸어, Brewers Retail로 바꾸어 맥주제조에서 부터 소매 판매망까지 전부 직접 그들이 판권을 장악하여 그들의 입지를 굳히기 시작했다. 다시 몇십년이 흐른후, 이들 맥주회사들은 전부 외국회사들이 접수하여 위에서 언급한데로 오늘날에는 온타리오주 정부의 간섭을 벗어나 맥주판매를 온주민들에게 하고 있는데, 온주민들은 이같은 깊은 내막을 거의 모르거나 안다고 해도, 이의 시정을 요구할 권한도, 의지도 없기에 정치인들이 선거철만 되면, LCBO를 민영화 시켜야 한다는 공약을 해오곤 했었던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하지만, 맥주판매는 LCBO에서 운영이 별도로 되여있어, 정확한 정보를 온주민들에게 제공하기위해서는 정치꾼들이 LCBO에 대한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할 필요성을 깊이 느꼈으면 한다. 맥주판매 시스템은, Brewers Retail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낡아빠진 운영체제를 온타리오 정부는 비밀에 부치고, 지금까지 숨겨온 이엄청난 사실에 온주민들의 상당수는 우리가 인질로 잡혀 몸값을 지불해온 꼴이 된것이라고 한탄을 퍼붓는 심정이지만,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야당인 보수당에서만 당수가 한번 언론에 의견을 비쳤을뿐, 여당인 자유당 정부는 이에 대해 일체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소수정부인 자유당은 예산안 처리를 앞두고 온주민들이 지금으로 부터 어느순간에든지 투표소에 가야할 처지에 있다. 현재로서는 어느 뚜렷한 언급이 없다. 계속해서 온주민들은 비싼 맥주를 마셔대겠지만, 이득금은 온타리오 정부의 금고로 들어가지 않는다는게 문제다. 그래서 Convenicence Store에서 맥주를 판매할수 있도록 정치꾼들의 각성이 절실이 요구되는 때가 바로 지금이다.
이제는 나보다 훨씬 더 커버린 두아이와 같이 온 친구가 식탁에 삥 둘러 앉아, 엄마가 아침부터 준비해온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괜히 코끝이 찡해 옴을 느낀다. 지금은 각자의 집에서 자기의 삶을 살아가기에 자주 만나지 못하다가 오늘 다시 만남을 만든것이다. 평소에는 그렇게도 커보이던 식탁이 오늘 이시간에는 꽉 찬느낌이다. 어제낯에 Super Market에 나가 터키를 사고, 또 다른 식품도 구입 했었다. 쇼핑을 하면서도 아이들이 성탄절 저녁에 꼭 참석할것이라는 보장도 없이 우리 부부는 그렇게 음식준비를 끝내고, 아이들에게 전화를 했었다. 다행 스럽게도 엄마의 offer를 받아 주어서 식탁에 둘러 앉아 음식을 먹게 된것이다.
이민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한인들중에는 명절때는 특히 성탄절에는 온식구가 모여 음식을 나누면서 혈육의 정을 나누는 얘기들을 들을때면, 가끔씩은 상상을 해보곤 했었다.
"나도 고국에서 삶을 살고 있다면, 그런 분위기속에서 하루저녁을 뜻있게 보낼텐데....라고"
이곳에는 내쪽은 나혼자다.
이민 36년동안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삶의 즐거움보다는 어렵고 힘들었던 기억들이 더 많이 뇌리에서 떠오르는것은, 어쩌면 우리 한인 모두가 경험했던 삶의 현실이었을수도 있었겠지만, 몸서리 쳐지도록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기도 하다. 만약에 지난 36년간 살아온 삶을 다시 반복해서 하라고 한다면, 삶을 차라리 포기하는쪽을 택했을지도 모르겠다.
식탁에 둘러 앉아 Turkey고기를 Cranberry Sauce에 찍어 먹으면서, 아이들이 가끔씩은 어렸을적의 얘기를 무심코 저희들끼리 할때면, 괜히 마음이 아파온다. 그때 좀더 잘해줬어야 했는데...... 먹고살기위한다는 핑계를 대고 같이 놀아주지도 못한때가 많았었고, 때로는 초등학교, 중학교 최근에는 Executive Course 로 MBA 학위를 받을때도 그현장에 있어주지 못했던 점들이 아빠의 가슴속에서 옥죄어 나옴을 느끼면서, 그래도 잘자라서 자기 앞길을 헤쳐 나가는 아이들이 보배처럼 느껴진다.
초등학교때, 아이가 학교 밴드부에서 큰 나팔을 맡아 불면서, 때로는 집에 까지 들고와 연습을 하느라 삑삑 소리를 낼때면, 피곤한 몸을 쉬러 방에 들어왔는데, 그소리에 쉴수가 없을때는, "야 빨리 빨리 불고 끝내라" 라고 아이를 야단치는 무식한 아버지 였었던 기억이, 지금 식탁앞에 앉아 있는 아들 아이를 보면서 주마등 처럼 기억속에서 흘러 나온다. 아이는 아마도 기억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럴때면 아이는" 아빠 3/4박자 노래인데 어떻게 빨리 불수가 있어?" 라고 대답하면서, 무식한(?) 아빠를 쳐다보곤했던 코흘리개 아들이었었다.
삶의 현장에서 손님을 상대로 장사 하기에 바쁜 그때, 손님중에 한분이 가게에 들려, "네 아이가 지금 학교 밴드부에서 리더로 Performance준비를 하고 있는것을 보고 왔다. 아주 잘 하더라. 가서 Cheer해주어라" 라고 아이가 학교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알려 준일도 있다. 그럴때면 부모인 나를 위해서 해주는 소리인지? 아니면 넌 장사만 생각하고 아이의 학교생활에는 관심이 없느냐? 라고 비아냥 거리는 소리로 들리기도 했었다. 학교의 Arena안에 Podium에서 연주를 하고 있던 아이가 아빠인 나를 보더니, 더이상 나팔을 불지 못하고 뻔히 한참을 아빠를 쳐다 보다가, 이를 목격한 선생님의 손짖으로 다시 나팔을 부는 순간도 목격한 기억이 떠 오른다. 아이는 아빠나 엄마를 생각할때, 의례히 우리 부모는 장사에 파묻혀 학교에 올것이라고는 상상도 안해왔었다는 증거였으리라.
중학교 졸업식에 모처럼 시간을 내여 참석했었다. 예상치도 않게 아이가 Award를 많이 받는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부모로써 아이에게 신경써 가면서 보살펴 준일도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봐도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미안한 마음뿐이었음이 더 있었다.
아이가 어쩌다 아침에 늦잠을 자느라 학교 등교시간에 늦어도, 아이들에게 성화를 부린일이 없었다. 학교 다니는일은 부모가 해줄일이 아니고, 아이들 본인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만 미루면서, 생업과 연결시켜 왔었던 기억이 오늘 저녁 이저녁에 새삼 떠 오른다.
언제 준비 했는지, 선물 꾸러미를 엄마에게 아이들이 내민다. 겨울이니까 춥지 않게 입으라고 두툼한 샤쓰와 부엌에서 엄마가 사용키좋은 Juice Mixer기를 사왔다. 내눈에는 아직도 그들이 어린 아이로만 보여, 선물로 가져온 그물건들을 사느라 지출했을 돈을 속으로 먼저 계산을 해본다. 적은 돈이 아닌것 같다. 고맙기도 하지만, 괜히 마음이 쓰리고 아프고 안타깝게 느껴진다. "내가 아이들에게 해주어야 하는데...."라고. 엄마의 마음은 더 한것 같다.
부모의 마음은 어느 누구나 다 한결 같은 생각일 것이다. 아까워서 함부로 몸에 걸치기가 쉽지 않을것 같다. 엄마 또한 Juice Mixer기에 대해서 같은 생각일 것이다.
오래전 내가 지금 우리 아이들처럼 사회 초년병이었을때, 어머니 돗보기 안경과 털오바를 사드린 적이 있었다. 그땐 어머니가 "괜찮다 나는 그런것 없어도 할일 다한다" 라고 말씀 하셨던 그뜻을 오늘 이저녁에야 어렴푸시 깨달은것 같다. 아이들이 사온 선물을 열어 보면서.
그뒤 주말이 되면 서울에서 시골집에 들리면, 어머님은 돗보기 안경을 끼시고, 양말을 꿔매고 계시는 모습을 보았었고, 읍에 나들이 가실때는 꼭 오바를 입고 다니셨던 기억이 떠 오른다.
아마도 동네 친지분들과 같이 읍에 걸어서 다니면서도 은근히 자랑을 하셨을 것이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인것을 식탁에 마주 앉아 감사한 마음으로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 실감한다.
식탁에 모여 앉아 식사를 할려고 하는 순간, 아이가 아빠 내가 식사감사 기도 할께요. 의외의 발언에 속으로 깜짝 놀랐다. 언제 아이가 이렇게 기도까지 하는 신앙생활을 삶의 일부로 생활화 하고 있었단 말인가. 물론 한국말 보다는 영어가 그에게는 쉽기에, 그점이 약간은 아쉽긴 했지만.
터키를 roasting하는 법은 오히려 아이들이 더 잘알고 익숙해 있는것으로 생각돼지만, 그래도 한점 고기를 씹으면서, "엄마 고기가 참 맛있다. 몇도에 마추고 얼마동안 roasting 했어요?" 라고 엄마에게 고개를 돌리는 모습도 보기좋다. 이런 흐믓한 순간들을 아이들이 보여 주기에
산고의 고통도 이겨 내면서 자식을 생산하고, 그래서 역사는 계속 이어진다는 Simple한 진리를 머리속에 깊이 각인 한다.
먼훗날, 나의 아이들을 통해 새생명이 태어나고, 기하학적으로 산술적으로 후손들이 늘어나서,오늘과 같은 식구들, 아니 자손들의 모임이 있을때, 우리의 시조(the father of progenitor)에 대한 뿌리를 찾는다고 한다면, 나와 내아내의 이름이 거론될 것이다. 어렷을적 나의 부친께서 족보에 대한 설명을 해주신 기억이 어렴푸시 생각난다. 정처없이 개나리 봇짐을 싸서 헤매다가 한곳에 정착하여 자손들을 생산하고....... 몇대가 흐르고 난뒤, 그가 바로 소위 고국에서는 가보로 여기는 족보의 시조로 등재된것처럼, 나도 그런위치에 서있음을 아이들과 테이블에 같이 앉아서 성탄감사 식사를 하면서, 우리 부부의 위치가 매우 중요(?)한것임을 느끼면서 그러한 그림을 그려보기도 한다. 세월이 흘러가는 앞에서 나도 별수없이 인생황혼기를 살아가는 한초로의 심정으로 생각이 좁아짐을 느낀다.
바라기는 건강하게 그리고 평범하게 맡은바 삶의 책임을 다해가면서 사회인으로서 반듯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 부부의 삶이 다 할때까지 흐믓한 마음으로 볼수 있도록 살아가기만을 바랄뿐 더이상의 아이들에 대한 욕심은 없다. 오늘밤의 식탁은 온식구가 한자리에 모여 감사의 요건으로 채워진 음식을 먹을수 있는 축복을 주신 그분에게 진정으로 아뢰고 싶은 순간이다. 창문너머 온타리오 호수위에는 한떼의 백조가 한가롭게 거북선처럼 먹이를 찾아 바삐움직이는 모습이 많은것을 느끼게 한다. 감사.
괜히 마음이 들뜨곤 했던 연말의 축제 기분이 이제는 역사속으로 사라진것을 새삼 느끼고 있다. 오늘은 12월 21일, 금요일이다. 특별히 누구에게 선물할 물건을 살 계획이 있어서 쇼핑몰에 간것은 아니지만, 쇼핑몰의 중앙지점에는 어김없이 어린 아이들의 동심을 현실로 보여주는 산타할아버지와 사진찍기위해 어린아이들과 함께온 젊은 부보들의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는모습이 정겹게 보인다. 나도 오래전에, 아직 아이들이 어렸을때, 산타 할아버지와 함께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는 크리스마스 캐롤송이 정겹고 은은히 흘러나와 온 쇼핑몰에서 바삐 움직이면서 선물사기에 여념이 없는 뭇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당연히 Christmas 하면 캐롤송이 쇼핑몰에서나 상가지역의 가게에서 은은히 흘러 나오곤 했던 기억이 있다. 괜히 기분이 들떠서 꼭 필요치도 않은 물건들을 사곤 해서 경기부양에도 한몫했었던 기억도 있다. 선물을 사는 사람이나, 파는 가게주인 똑같이 분위기속에서 희망을 느낄수 있었다.
오늘 들린 쇼핑몰안의 Main Hall의 천장과 벽에는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장식이라기 보다는 Holiday기분을 내기위한 화려한 Decoration이 걸려져 있고, 여전히 산타 할아버지는 크리스마스 Tree옆에 잘 단장된 Podium에서 어린아이들을 무릎에 얹혀놓고,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고, 덩달아 젊은 부모들도 사진을 찍어대는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무드는 전연 느낄수가 없었고, 그위에 뭔가 빠진게 있는것 같았지만, 쉽게 찾아낼수가 없어 아내에게 물어 보기도 했었다. 뭔가 빠진게 있는것 같은데 생각해 낼수가 없네라고. 쇼핑몰안의 분위기가 쇼핑객들의 기분을 up되게 해주질 못해서인지, 쇼핑객들의 발걸음도 활기가 없어 보이고, 가게마다 사람들이 붐비는것도 옛날과는 확연이 다르게 한가하기만 내눈에는 보여졌다.
캐나다와 미국은 분명 청교도정신을 근간으로 해서, 초기 청교도인들이 중심이 되여 기독교 정신이 사회의 저변에 깔려서, 매년 이맘때면 당연히 성탄 Tree가 세워지고, 12월 25일 까지는 듣기 실어도 들어야 했던 X-mas Carol Song들이, 일년동안 살아오느라 지친 삶에 활력소를 불어넣는 청량제 역활을 했었다. 그러한 전통이 200년이 넘게 이어져 왔었는데.....지금은 공공장소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송이 흘러 나오면 어느 특정종교를 두둔 한다는 불평이 들어와, 종교의 자유를 들이대어, 크리스마스 캐롤송이 자취를 감추어 버린 사실을 오늘 새삼스럽게 느꼈다. 그래서 쇼핑몰안에서 흘러나왔어야할 캐롤송이 사라져 버렸지만, 대신 흘러나오는 멜로디는 전연없어, 적막강산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쇼핑객들의 기분을 down시켜, 쇼핑할 마음도 없어져 버리게하고 분위기를 무겁게 해서,가게는 매상도 오르지 않아, 전체 사회가 웃음을 잃어 버린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종교의 자유와 개인의 평등을 주장하는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민주주의의 맹점이 여기에 있는것 같다. 정치꾼들이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해서 각계층의 요구를 들어주다 보니, 북미의 국가, 미국과 캐나다가 본래의 색갈을 퇴색시켜,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빨간색은 지난 수년전부터 거의 자취를 감추고, Identity가 확인되지 않은 색갈들로 바뀌었다. 그색갈에 크리스마스 캐롤송이 흘러나올수가 없다. 신화속의 산타 할아버지를 만나기를, 그래서 빨간 양말을 거실 벽난로위에 걸어 놓고 밤잠을 설쳐가며 기다리는 어린 동심들에게 그런꿈을 이루게 하는 분위기는 집에서도, 쇼핑몰에서도 완전히 사라져 버린것을 느끼는 안타까움은 나만이 보고 느끼지는 않을 것이겠지만, 세태가 그렇게 그렇게 흘러가는것이려니..... 체념해 버린 군중들의 표정에서 밝음을 볼수 없음이 안타깝다.
Smart Phone이 세상에 등장하여 지구촌이 이제는 옛날 어렸을때 이웃 동네 마실을 가는것 보다 더 간편하게 빠르게 사는 모습들을 주고 받고 하지만, 기계적일뿐, 마음을 따듯하게 하는, 인심을 나누게 하게 그런 포근하고 의지하고 싶은 정서는 실종됐고, 삭막하기만 하다. 좋은 뜻으로 문명의 이기가 사용되기 보다는 반대의 방향에서 서로에게 경계하고 질시하는쪽으로 흘러가는 세태도 크리스마스 캐롤송의 실종과 무관 하지만은 않은것 같다.
중동의 여러나라를 관광차 들려서 그곳 사람들과 친교도하고, 풍습도 겪어보고......
그곳의 사회적 변화는 거의 없음을 보았었다.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의 사고 방식이 확고하게 서있어, 국가로서의 존재성의 변혁에 거의 손을 대지 않고 그들 고유의 풍습과 문화를 지켜 나가는것을 여행중에 많이 느꼈었다. 소수의 불평이 있을수 있겠으나, 다수의 의견을 쫒아 가는 지도자들이 사회적 관습을 지켜가는 의지의 발로가 아닐까 생각됐다.
민주주의가 서구사회에서는 잘못 이해돼 가고 Practising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선거때 지지표로 연결되는 맹점을 소수의 입심센사람들이 잘이용하고, 리더들은 이용당하고 있음에 한탄을 금할수 없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왜 크리스마스만 성스러운 축복의 날이냐?라고 함축된다. 비난받기 싫고, 또 표잃는것을 염려하여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다 보니, 이러한 회색빛갈의 축제 분위기가 되여, 캐롤송하나 흘러 나오지 못하게 되는 성탄절이 되고 만것으로 이해된다.
요즘의 캐나다와 미국은 건국정신을 전연 찾아 볼수가 없을 정도로 실종돼 버린지 벌써 오래다.
표현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찾아 그옛날에 돛단배 타고 유럽을 탈출하여 끝없이 펼쳐지는 대서양의 가파른 파도를 가르고 항해아여 이곳 북미까지와서 오늘의 잘먹고 잘사는 북미대륙의 초석을 다졌던 선조들의 건국정신을,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뿌리채 뽑아 던져 버린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 정치적 지도자들은 오늘 그들의 아이들, 아니면 손자손녀들의 손목을 잡고, 선물을 사기위해 쇼핑몰, 아니면 상가를 걸어다니면서, 뭔가 가슴이 꽉 막힌, 뭔가 꼭 있어야할 Ingredient가 빠져 맛이 나지 않는 음식을 먹는것 같은 기분을 느낄것이다.
성탄축하의 Carol Song들을 이제는 겨우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서만이 잠깐 들을수 있는 시대의 변화에,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는지는 나는 해석할수가 없다. 이시대가 향하여 달리고 있는 최종목적지는 어디일까?라는 의문점만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뿐이다. 역사에서 배운 십자군전쟁같은, 생각키도 싫은, 그런 참극이 되풀이 되서는 안된다는 걱정뿐이다.
이글을 읽기전까지는 외국기자가 쓴 글이 얼마나 한국을, 그것도 이번에 대통령에 당선된 박근혜를, 잘 안다고 감히 그녀에 대한 대선뒤의 숨겨진 얘기를 쓴다는 것일까?
모르는 그녀에 대한 진실을 이글을 통해서 알아본다기 보다는 외신기자가 어떤내용을, 사실과 다른 얘기들이 나열되여 있는것을 확인(?)하기위함에서 들여다 본것이다.
나의 상상은 다만 상상으로 끝나고 말았음을 알았고, 외신기자의 전문성이 많이 깃들여진
취재 내용은 "아 그래서 역시 기자생활을 하는구나"라는 긍정을 부정할수 없었다.
좀처럼 얼굴의 표정이 보통사람들 처럼 변화하지 않고, 내면에서 조절하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파악하고 있는 기자의 예리한 눈초리에,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 같은 풍습속에서 같이 살아왔다고 생각하면서 그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고 자만(?)했던 한국사람이 어찌 나혼자 였겠습니까? 그예가 그녀가 광주를 방문했을때 아주 잘 표현된것으로 기자는 보고 있었다.
그녀의 부친은 군사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18년 동안 통치한 분이다. 아버지의 고향, 한반도의 남단 동쪽지역을 공업화 시키고, 그반대편인 서쪽, 그중에서 광주는 역사적으로 다른지역에 비해 liberalism을 부르짖는 대표적 도시였는데, 공업화에서 제외시켜, 그지역 국민들에게 좀 심하게 표현하면 한을 더 심어준 격이 되는 좋지 않은 선물을 준격이 됐다. 차거운 그곳에서 그녀는 주민들로 부터 냉대를 받는 대신에 지혜롭게 잘 처신해 "무슨 염치로 이곳에 왔느냐" 라는 비난을 받지 않고, 선거운동을 하고, 사상 처음으로 두자리 숫자의 지지를 얻어냈다고 했다.
박근혜는 한국사람이라면 오늘의 한국이 있게된 초석을 다진 그의 아버지로 부터 유산을 물려 받았다. 어떤이에게는 좋은 인상으로 또어떤이에게는 독재자로 남아 있지만, 동시대를 살아온 국민들은 그의 아버지에 대해 신앙처럼 고마워한다. 혁명과 같은 개혁을 해서 경제기틀을 다졌고, 특히 한국전쟁이후 경제적으로 거의 쓸모없는 곳으로 여겨지던곳에 경제 기적을 일으킨 그의 쉬지않고 정직을 밑천으로 열심히 일하고 이끌어온 영도력에 후한 점수를 주고 공경한다.
그러한 아버지에 대한 향수를 Senior들은 박근혜를 통해서 다시 보기를 원하고 그래서 이번 선거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고 보고 있는것 같다. 특히 아버지가 암살당했다는 첫소식을 접한 그녀는 첫마디가 "휴전선은 이상 없나요?"라고 했던 그녀를 믿음직 스럽게 생각하고 있는것 같다.
이에 앞서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이북의 사주를 받은 자로 부터 암살당했을때,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젊은 처녀로, 어머니가 맡았던 First Lady역활을 하면서 국가와 국민에 대한 확고한 사상을 자리매김한것으로 보고 있는것 같다. 이제 집권한지 겨우 1년차인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어떤식으로 그녀를 시험할지(?)가 그녀가 준비해야할 과제이기도 하다. 현 이명박 정부에선 북한은 2번씩이나 공격을 감행 했었다. 첫번째가 천안함 폭침사건, 두번째가 연평도 포격사건, 두번다 이명박 정부는 그에 상응하는 반격을 취하지 못한것으로 기록되고 있는것 같고, 그뒤에는 진보를 부르짖는 야당과 젊은 세대들의 지지를 전폭적으로 얻지 못한점도 한몫했다고 본다.
가난했던 세대가 겪었던 인생의 맛과, 전쟁의 참상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게, 호시탐탐 틈새만 보이면 Agitating할려고 하는 북한 정권의 실상을 리얼하게 알리고 홍보하는, 그래서 조국 대한민국은 무장을 해야만 하는 특유의 이유가 있음을 계속적으로 교육차원에서 알려줬으면 하는 나의 생각도 곁들여 본다.
한국사회의 구조상, 아직은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대우는 갈길이 멀다고 하겠다. 경제적 규모는 세계 11위로 성장했지만, 여성의 사회적 대우는 챙피하게도 전세계에서 108위라고 한다.
이러한 사회적 구조속에서 여성대통령이 됐지만, 과연 이러한 Gap을 얼마나 좁힐지는 그녀의 향후 대통령직 수행에서 피부로 느낄만큼 변화 시킬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고 분석한것 같다.
야당후보였던 문재인이 주창한 개혁보다는 바로 코앞에 대포와 장갑차로 무장하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는, 안보개념과 안정을 더염려하는 기성세대들의 생각과 박근혜의 생각이 맞아 떨어져 승리를 이루었지만, 압도적 승리(Landslide)는 아님이 또한 부담이 될수도 있다는 분석같다. 또 그냥 지나칠수 없는 고민은, 아직 한국은 민주주의라는 날개를 달고 부상한지 얼마 안되는 새와 같아, 성숙되기까지의 여정에서 야당을 지지하는 많은 국민들의 욕구와 충돌을 면할수 없게 될것이라는 점이다.
그래도 꾸준히 역경을 이겨내고 오늘까지 달려와, 그것도 처녀의 몸으로, 흔히들 여성의 본능중의 하나인 상황에 따라서 표정이 칠면조처럼 변하는 행동을 겉으로 거의 나타내지 않은 단호함은, 그래서 Ice Queen(얼음공주)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단다. 여성이 국가의 수반이 되고, 세계정치무대에서 활동한 예는 많지만, 결혼안한 처녀의 신분으로 국가의 수장이 된 예는 역사상 두번째라고 한다. 첫번째는 영국여왕을 지냈던 엘리자베스 1세 이고, 그뒤를 이어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라고 한다. 이점은 두고두고 한국역사와 세계의 역사에 기록될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당선자가 선거운동때 주창했던 모든 공약들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잘사는 조국이 되기를 기원한다.
A man looks at the wall paintings of South Korea's
President-elect Park Geun-hye of ruling Saenuri Party and national flag at the
Korean Civic Education Institute for Democracy in Seoul, South Korea, Thursday,
Dec. 20, 2012.
On Dec. 19, conservative candidate Park Geun-hye won
the race for the South Korean presidency. The 60-year-old career politician
will be South Korea’s first
woman President when she is inaugurated in February. She is also the daughter
of former President
Park Chung-hee, the dictator who ruled the country from 1961 to 1979. TIME
Asia Associate Editor Emily Rauhala wrote about Park and her campaign for a
recent magazine cover
story. The day after Park’s election victory in a tight contest, TIME spoke
to Rauhala to get the story behind the story of Park’s historic return to the
Blue House. What surprised you when you followed Park on
the campaign trail?
I saw Park Geun-hye campaigning in enemy territory. I followed her to the
city of Kwangju in the country’s Southwest, which is part of a region that has
historically supported liberal candidates. I had heard that she was very cold
and I knew she had the nickname “Ice Queen.” So what surprised me was her
demeanor with people: she had a strange mix of being very reserved and yet very
personable at the same time. She is great about shaking people’s hands, about
making eye contact, about politely bowing to the people before her, but—at least
in Kwangju—she rarely lingered to ask questions. I got the impression that her
image was tightly controlled.
Park’s father, General Park Chung-hee, who ran the country for 18 years,
developed South Korea’s economy in a way that split the country from East to
West. The Southeast, where he was from, became the industrial heart of the
country, while the people in the West now feel that they have been left behind.
Yet she operated well in this hostile environment. Looking back at her successful campaign, was her father’s legacy an asset
to Park Geun-hye’s presidential aspirations?
Her father Park Chung-hee is probably the single-most influential and
single-most divisive figure in contemporary South Korean history. The legacy is
both her blessing and her curse. On the plus side, her father is idolized,
particularly by some older South Koreans. He is credited with
revolutionizing the economy, transforming South Korea from an economic wasteland
after the Korean War to the
economic powerhouse it is today. The older generation and Park Chung-hee’s fans
in general tend to see him as someone who was hard-working and honest. Park
Geun-hye gets to bask in that glow.
On the flip side, her father’s rule is still something the country is coming
to terms with. He seized power in a military coup and became
increasingly authoritarian over the course of his tenure. By the 1970s he
started jailing critics and implemented a repressive constitution; a lot of the
current crop of liberal and progressive leaders cut their teeth as student
leaders and activists fighting his rule. During South Korea’s democracy
struggle, public sentiment toward General Park hardened. After her father was
killed, Park Geun-hye lived in relative seclusion, staying out of the public eye
until she re-entered public life, as a politician, in the wake of the 1998 Asian
financial crisis. For some people, she will always be the
dictator’s daughter, nothing more, nothing less. In your story you recounted how, when she first learned of her father’s
assassination, she asked whether the border with North Korea was safe. How will
Park deal with the North’s dictator: Kim Jong Un?
This is one of the biggest questions going forward. Park Geun-hye has an
incredibly difficult history with North Korea. In 1974, her mother Yuk
Young-soo, then the First Lady, was assassinated by a North Korean sympathizer.
That forced her to become the de facto First Lady at age 22. North Korea has
been very critical of her.
Over the coming months we can expect Kim Jong Un to be testing Park Geun-hye
and seeing what she is made of. During the campaign, Park promised to return to
engagement with Pyongyang, a departure from the hardline policy of incumbent
President Lee Myung-bak—which was seen as a failure by many South
Koreans because of two attacks during his tenure: an artillery attack on a South
Korean island, and the alleged sinking of a South Korean naval vessel, both in
2010. She has said she hopes to build trust with the North. We’ll see if she can
do it. South Koreans have elected their first woman president. Can her
conservative policies bring about more gender equality in the patriarchal
society that is South Korea
Considering that South Korea is the world’s 11th-biggest economy, it’s quite
striking that it ranks only 108th in terms of the World Economic Forum’s
gender-gap index. There is no shortage of highly educated and accomplished South
Korean women, but their rates of labor force participation and their rates of
pay lag behind their peers in advanced economies. A South Korean woman can
expect to make an average of 39% less than a man in the same job. Women are
also over-represented among contract workers, who often don’t getbenefits, work
irregular hours, and are paid less. There is a lot to do.
Park Geun-hye made women’s rights one of the cornerstones of her campaign.
She promised a “women’s revolution” for South Korea, mentioning issues such as
childcare. The word “revolution” might be a bit of a stretch: according to her
critics, her feminist credentials are somewhat lackluster and her identity as a
woman has never been front-and-center until this campaign. The question is
whether she can make good on the pledge of changing the reality of South Korean
women without alienating the more conservative old-school members of her Party’s
base. In her victory speech in Seoul, Park promised to revive what is Asia’s
fourth-largest economy. Will she be able to deliver?
It’s going to be tough. One of the things that surprise outsiders most is the
extent North Korea didn’t figure prominently in the election. The campaign was
very much more about domestic economic concerns and quality-of-life issues,
rather than the question of North Korea, which looms large in South Korea, but
much more so in the international imagination. South Korea is growing. HSBC
Research predicts 3.8% growth for 2013. While many Western countries could only
wish for suchfigures, for South Korea that represents the end of 50 years of
breakneck growth. There is a growing concern about the gap between the rich and
the poor, and household debt is at 154% of household income. Ordinary South
Koreans increasingly feel that they are scrambling and struggling to make ends
meet, let alone to get ahead. The big challenge for Park will be trying to find
a balance between her more populist campaign rhetoric—she talked about reining
in the corporate conglomerates that dominate the economy, lowering the cost of
education, helping women access affordable childcare—while maintaining her
popularity with the conservative base. The left-leaning opposition candidate Moon Jae-in conceded defeat after
running on a platform of more social spending and a softer stance on North
Korea. Does the South Korean left have to rethink itself?
Moon ran a strong campaign. About 51.6% of South Koreans voted for Park, who
represented the legacy of state-led development and stability, and just over 48%
voted for Moon, with his more progressive, more liberal vision for the country.
This has certainly not been a landslide victory for Park or a crushing defeat
for the opposition. South Korea is a young democracy, but has an incredibly
vibrant tradition of activism and protest. You can expect that, over the course
of Park’s single five-year term, the liberal camp will continue to push its
vision for economic democratization and engagement with the
Nor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