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장 정대위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던 밀림속의 그장소에 41년만에 나타나 당시 8명의 부하장병이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면서 타는 목을 추기기위해 소변에 커피를 타마시다가 적의 공격으로 저세상으로 가버린 그순간을 회고하면서, 준비해간 종이컵 8개에 500 ml 물병8개를 차례로 따서 진열시키놓고, 하나 하나 당시 부하 장병의 이름을 부르면서 오열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눈에서도 한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림을 행여나 옆에서 같이 TV를 보고 있던 Lunar한테 들킬까봐 얼굴을 돌렸었다.
"소대장 A 중위, 선임 하사관 B상사, 병장 C...... 41년이 지난 이제나마 영전에 물한병씩을 바치니 목을 추기시고 살아남은 나를 용서 하시고 편안히 잠드소서....."
1975년도에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합동작전에도 결국 공산게릴라 정권에 전국토를 념겨주고만 월남전의 참상을 Documentary로 꾸며 방영된 내용중의 일부이다.
지난 41년동안 그는 월남에 갈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8명의 젊은 부하를 지하에 묻고 혼자만 살아나온 죄책감에 감히 용기를 낼수 없었다는 눈물어린 고백도 들었다.
내가 1965년도 강원도 오음리 파월장병 훈련소가 있는 사단 통신중대에서 막 기성부대 생활을 시작할때, 전국에서 차출되온 장병들이 월남적진으로 떠나기전 훈련 받고 있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당시에는 얼마나 가난 했었던가. 배식되여 나온 육군 정량이 제대로 보급된다면, 비록 쌀은 조금이고 납작보리가 75%이상 들어있는 별로 색갈이 좋아보이지 않는 보리밥으로, 육군정량데로 배식이 됐었다면, 배고픔을 면할수있게 밥그릇을 고봉으로 채워졌었어야 했으나, 일차로 사단 병참중대에서 떼어먹고, 통신참모몫 떼고, 중대장 몫떼고, .......취사반 선임하사까지 떼어 가고 나니 양은 항상 밥그릇을 채우지 못하고 있는 어려운때였었다. 반찬은 아예 없었고, 배식받은 밥그릇을 다음 창구(Wicket)에 밀어 넣으면 취사병이 큰 국자에 콩나물국 또는 꽁치국물을 떠서 밥그릇 위에 덮어주면 그것으로 다 였었다. 항상 배가 고파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서는 견딜수가 없었던 기억이 이기록 영상을 보면서 Overlap 된다.
증언하는 동년배 또는 약간 후배되는 분들의 얘기도 대동소이 했다. 월남전에 참전하여 해외파병 전투 수당으로, 준장은 7달러, ...... 일등병은 1달러 50센트를 지급 받았었다고 한다. 그돈을 모아 조국의 가족들에게 보내면, 많은 가족들은 그돈을 모아 논을 사고 집을 짖고 해서 살림을 늘렸을 정도로 살림살이에 많은 도움을 주는 큰 돈이 됐었다고 회상한다.
정부는 그렇게 어렵게 벌어들인 돈을 헛되이 쓰지 않고, 국가기간산업시설 건설에 전액 투자하여 오늘의 잘 사는 한국을 만들기 위한 초석을 다졌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창원공업단지 등등..... 당시의 대통령이 누구라고는 다시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월남전과 휴전선을 지키고 있는 국군들이 필요로 하는 군수물자를 전량 일본에서 보급 받는것을 한국으로 돌리면 막대한 외화를 벌어 들일수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당시 박통은 미국과 협상하여, 한국에서 보급할수 있도록 해 달라는 승인을 받았으나, 이를 생산할 산업 시설이 없어 애를 태웠었다는 안타까운 일화도 소개 됐었다.
김치는 한국사람들에게는 떼어 놓을수 없는 기본 음식인데, 이것을 일본에서 보급받아 먹으니 원래의 맛이 나올수가 없었고, 달기만 했었다. 이에 박통은 서울대학교에 특명을 내려 단시간내에 김치캔을 만들라고 했었단다. 그런데 경험이 없어 실패를 연속한 끝에 겨우 만들어 월남 장병에 보급했었는데 김치를 실은 화물선이 뜨거운 적도를 지나 현지에 보급됬을때는 김치가 전부 Sour되여 먹을수가 없었거니와 김치국물은 마치 피처럼 빨갛게 변해 장병들이 먹지를 못하고 불평을 했었단다.
이에 당시 주월 한국군사령관이 그실상을 자세히 장병들에게 설명하고 그래도 원한다면 다시 일본으로 보급선을 돌리겠다. 그러면 그만큼 외화벌이가 안되고, 고국의 김치공장은 망하고 말것이다라고. 장병들은 그설명에 불평대신 조국의 경제 발전이 되는 외화를 벌어 들여야 한다는 애국심으로 변해 신김치를 맛있게(?) 먹어 고국의 경제건설에 일조를 했었던 해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배고프기만 했던 당시 상황을 회상 하면서 눈가에 눈물이 또 맺히고 말았다.
중대장 정대위가 격전지였던 638 고지를 향해 정글을 헤치고 들어가는 입구에서 조금만 잡화 상점에 들려 주인장과 마주치면서 얘기를 나누는데, 그주인장은 월맹군 장교로 맹호사단과 사활을 건 싸움을 그곳에서 했었다고 했다. 두명의 적군이 서로 41년만에 만난것이다. 그러나 이번 만남은 과거를 서로 회상하면서, 전쟁의 결과는 승자도 패자도 얻은것은 없고 수많은 고귀한 목숨만 사라져 버렸을 뿐이라는 교훈과 ,산화한 부하장병들의 넋앞에 죄인의 심정일 뿐이라고 두사람이 서로 오열한다.
민주주의의 꽃속에서 살고 있다는 미국도 그들의 역사를 보면 상상하기도 끔찍한 잔혹상들이 있었다. 인간을 짐승처럼 사고파는 노예시장까지 있었으니, 그들의 인권유린은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었다. 걸프전의 영웅으로 불리는 Colin Powel의 자서전을 보면 그간 ROTC장교생활을 시작하면서, 임지인 Texas주의 병영으로 동료장교들과 함께 가는 도중에 어느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들어가는데, 앞서 들어갔던 동료들을 따라 그가 식당에 들어가는데 식당 주인이 그가 들어오지 못하고 막아선 것이다. 이유는 그가 백인이 아니고 흑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불과 50여년전의 얘기다. 오늘의 조국 대한민국이 이정도로 살기 좋은 나라를 이룩하기까지, 전쟁터에 젊은이들을 내보내 그댓가로 벌어들인 외화가 기초가 됐었고, 고국에서는 박통의 정책에 반대했던 몇만명의 청치꾼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주야로 경체와 산업시설 건설에 매진 했었던, 지금은 70대 전후가 된 선배 세대들의 피 땀어린 희생위에서 가능했음을 국민들이 기억 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희생의 폭이 좁았고, 또 길지 않았음에 오히려 감사했어야 했다. 특히 젊은이들과 정치꾼들에게 강조하고 싶다.
그들이 은퇴를 하고나서, 남은 여생의시간을 현명하게 보낼수 있는 습관과 방법에 훈련이 안되 정신적 또는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뉴스를 많이 접한다. 그들은 여가 선용과 Leisure라는 뜻 자체를 이해 하지도 못했거니와 알려고 하지도 않았었고 또 이용하려 하지도 않았지만, 열심히 조국의 산업과 경제 건설에 참여 하여 다시는 고릿고개라는 생각하기도 싫은 배고픔을 없애 버렸고, 오늘날 조국 사회의 허리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자식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던 자부심으로 평생을 뛰다가 은퇴한 역전의 용사들이었었다. 나자신도 그대열에 참여 했음했음에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수 없다. 조국이여 계속해서 자유의 풍요속에서 번영 하여라.
뉴스에 의하면, 많은 젊은 상춘객들이 어린 꼬마들을 동반하여 자연을 즐기러 제주도, 또는 유원지, 전국의 유명산들을 찾아 화사한 옷차림으로 Leisure를 즐기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그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부모님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는것 같아 가슴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같이 어울려 즐기지 못하고, 인생의 황혼길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많은 분들을 뉴스를 통해 접하면서, 이러한 인생여정이 정상적인 Course인지? 아닌지의 판단이 쉽게 서지 않는다.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좁아터진 나만의 느낌에서 본 작은 소견에서 비롯된 환상이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소대장 A 중위, 선임 하사관 B상사, 병장 C...... 41년이 지난 이제나마 영전에 물한병씩을 바치니 목을 추기시고 살아남은 나를 용서 하시고 편안히 잠드소서....."
1975년도에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합동작전에도 결국 공산게릴라 정권에 전국토를 념겨주고만 월남전의 참상을 Documentary로 꾸며 방영된 내용중의 일부이다.
지난 41년동안 그는 월남에 갈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8명의 젊은 부하를 지하에 묻고 혼자만 살아나온 죄책감에 감히 용기를 낼수 없었다는 눈물어린 고백도 들었다.
내가 1965년도 강원도 오음리 파월장병 훈련소가 있는 사단 통신중대에서 막 기성부대 생활을 시작할때, 전국에서 차출되온 장병들이 월남적진으로 떠나기전 훈련 받고 있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당시에는 얼마나 가난 했었던가. 배식되여 나온 육군 정량이 제대로 보급된다면, 비록 쌀은 조금이고 납작보리가 75%이상 들어있는 별로 색갈이 좋아보이지 않는 보리밥으로, 육군정량데로 배식이 됐었다면, 배고픔을 면할수있게 밥그릇을 고봉으로 채워졌었어야 했으나, 일차로 사단 병참중대에서 떼어먹고, 통신참모몫 떼고, 중대장 몫떼고, .......취사반 선임하사까지 떼어 가고 나니 양은 항상 밥그릇을 채우지 못하고 있는 어려운때였었다. 반찬은 아예 없었고, 배식받은 밥그릇을 다음 창구(Wicket)에 밀어 넣으면 취사병이 큰 국자에 콩나물국 또는 꽁치국물을 떠서 밥그릇 위에 덮어주면 그것으로 다 였었다. 항상 배가 고파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서는 견딜수가 없었던 기억이 이기록 영상을 보면서 Overlap 된다.
증언하는 동년배 또는 약간 후배되는 분들의 얘기도 대동소이 했다. 월남전에 참전하여 해외파병 전투 수당으로, 준장은 7달러, ...... 일등병은 1달러 50센트를 지급 받았었다고 한다. 그돈을 모아 조국의 가족들에게 보내면, 많은 가족들은 그돈을 모아 논을 사고 집을 짖고 해서 살림을 늘렸을 정도로 살림살이에 많은 도움을 주는 큰 돈이 됐었다고 회상한다.
정부는 그렇게 어렵게 벌어들인 돈을 헛되이 쓰지 않고, 국가기간산업시설 건설에 전액 투자하여 오늘의 잘 사는 한국을 만들기 위한 초석을 다졌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창원공업단지 등등..... 당시의 대통령이 누구라고는 다시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월남전과 휴전선을 지키고 있는 국군들이 필요로 하는 군수물자를 전량 일본에서 보급 받는것을 한국으로 돌리면 막대한 외화를 벌어 들일수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당시 박통은 미국과 협상하여, 한국에서 보급할수 있도록 해 달라는 승인을 받았으나, 이를 생산할 산업 시설이 없어 애를 태웠었다는 안타까운 일화도 소개 됐었다.
김치는 한국사람들에게는 떼어 놓을수 없는 기본 음식인데, 이것을 일본에서 보급받아 먹으니 원래의 맛이 나올수가 없었고, 달기만 했었다. 이에 박통은 서울대학교에 특명을 내려 단시간내에 김치캔을 만들라고 했었단다. 그런데 경험이 없어 실패를 연속한 끝에 겨우 만들어 월남 장병에 보급했었는데 김치를 실은 화물선이 뜨거운 적도를 지나 현지에 보급됬을때는 김치가 전부 Sour되여 먹을수가 없었거니와 김치국물은 마치 피처럼 빨갛게 변해 장병들이 먹지를 못하고 불평을 했었단다.
이에 당시 주월 한국군사령관이 그실상을 자세히 장병들에게 설명하고 그래도 원한다면 다시 일본으로 보급선을 돌리겠다. 그러면 그만큼 외화벌이가 안되고, 고국의 김치공장은 망하고 말것이다라고. 장병들은 그설명에 불평대신 조국의 경제 발전이 되는 외화를 벌어 들여야 한다는 애국심으로 변해 신김치를 맛있게(?) 먹어 고국의 경제건설에 일조를 했었던 해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배고프기만 했던 당시 상황을 회상 하면서 눈가에 눈물이 또 맺히고 말았다.
중대장 정대위가 격전지였던 638 고지를 향해 정글을 헤치고 들어가는 입구에서 조금만 잡화 상점에 들려 주인장과 마주치면서 얘기를 나누는데, 그주인장은 월맹군 장교로 맹호사단과 사활을 건 싸움을 그곳에서 했었다고 했다. 두명의 적군이 서로 41년만에 만난것이다. 그러나 이번 만남은 과거를 서로 회상하면서, 전쟁의 결과는 승자도 패자도 얻은것은 없고 수많은 고귀한 목숨만 사라져 버렸을 뿐이라는 교훈과 ,산화한 부하장병들의 넋앞에 죄인의 심정일 뿐이라고 두사람이 서로 오열한다.
민주주의의 꽃속에서 살고 있다는 미국도 그들의 역사를 보면 상상하기도 끔찍한 잔혹상들이 있었다. 인간을 짐승처럼 사고파는 노예시장까지 있었으니, 그들의 인권유린은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었다. 걸프전의 영웅으로 불리는 Colin Powel의 자서전을 보면 그간 ROTC장교생활을 시작하면서, 임지인 Texas주의 병영으로 동료장교들과 함께 가는 도중에 어느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들어가는데, 앞서 들어갔던 동료들을 따라 그가 식당에 들어가는데 식당 주인이 그가 들어오지 못하고 막아선 것이다. 이유는 그가 백인이 아니고 흑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불과 50여년전의 얘기다. 오늘의 조국 대한민국이 이정도로 살기 좋은 나라를 이룩하기까지, 전쟁터에 젊은이들을 내보내 그댓가로 벌어들인 외화가 기초가 됐었고, 고국에서는 박통의 정책에 반대했던 몇만명의 청치꾼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주야로 경체와 산업시설 건설에 매진 했었던, 지금은 70대 전후가 된 선배 세대들의 피 땀어린 희생위에서 가능했음을 국민들이 기억 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희생의 폭이 좁았고, 또 길지 않았음에 오히려 감사했어야 했다. 특히 젊은이들과 정치꾼들에게 강조하고 싶다.
그들이 은퇴를 하고나서, 남은 여생의시간을 현명하게 보낼수 있는 습관과 방법에 훈련이 안되 정신적 또는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뉴스를 많이 접한다. 그들은 여가 선용과 Leisure라는 뜻 자체를 이해 하지도 못했거니와 알려고 하지도 않았었고 또 이용하려 하지도 않았지만, 열심히 조국의 산업과 경제 건설에 참여 하여 다시는 고릿고개라는 생각하기도 싫은 배고픔을 없애 버렸고, 오늘날 조국 사회의 허리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자식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던 자부심으로 평생을 뛰다가 은퇴한 역전의 용사들이었었다. 나자신도 그대열에 참여 했음했음에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수 없다. 조국이여 계속해서 자유의 풍요속에서 번영 하여라.
뉴스에 의하면, 많은 젊은 상춘객들이 어린 꼬마들을 동반하여 자연을 즐기러 제주도, 또는 유원지, 전국의 유명산들을 찾아 화사한 옷차림으로 Leisure를 즐기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그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부모님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는것 같아 가슴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같이 어울려 즐기지 못하고, 인생의 황혼길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많은 분들을 뉴스를 통해 접하면서, 이러한 인생여정이 정상적인 Course인지? 아닌지의 판단이 쉽게 서지 않는다.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좁아터진 나만의 느낌에서 본 작은 소견에서 비롯된 환상이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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