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ne 20, 2010

연례행사, 오타와 한국전 참전 용사회 추념식에 가다.


























경제적으로 안정이 된 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는 숱한 어려움이, 특히 6/25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참극을 포함한 무척 힘든 과정을 거쳐 왔음을 기존 세대는 잘 알고 있다. 6/25 한국전이 끝난후에는, 춘궁기에는 보릿고개를 넘기느라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곤 하는 굶주림속에서 그 얼마나 잘 살아 보겠다고 힘들게 한손에는 총을, 다른 한손에는 농기구를 메고 달려 왔었던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세기가 훌쩍 흘러간, 추억속의 희미한 그림처럼 빛이 많이 바랜감을, 매년 행사때 마다 보였던 얼굴들이 안보이는 마음 아픈 광경을 보면서 느낀다. 금년도 6/25발발 60주년 행사는, 오타와까지 먼거리( 서울-부산 거리보다 약간 더 긴)를 전세뻐스를 타고 Commemoration Ceremony 에 참석하고, 오타와 시내 중심지에 있는 Art Centre의 큰 Hall에서 주캐나다 한국대사관에서 제공해 주는 부폐식 점심을 먹고, 고국에서 파견된 Little Angels의 고전 무용을 관람한 다음 다시 뻐스를 타고 토론토로 되돌아 오는, 이제는 노인들이 되여 버린 역전의 노장들인 향군 회원들에겐 약간 힘든 행사인 것이다.
오늘은 6월20일이지만, 달력에 6/25가 있는 같은 주간의 일요일에 행해지기 때문이다. 새벽 4시50분에 뻐스가 정해진 장소, 서울관에서 출발 하기에 행여나 자다가 시간을 놓치세라 자명종시계를 Setting하고 잠자리에 들기까지 하면서, 새우잠을 청해야 했다.
지금은 연로하신 동서분의 소개로 재향군인회원이 되고, 이곳 오타와 행사에 참석해온지도 벌써 15년쯤이 지난것을 새삼 느낀다. 모이는 장소에 도착했을때는 육군부회장한분만 나와 계셨고, 내뒤를 이어 각자 타고온 차량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처음 형님을 따라 이행사에 참석했을때는 많은 6/25참전 용사분들과 전우들이 젊었었는데... 그사이에 돌아가신분들도 많이 계시고, 후배전우들의 재향군인회행사참석이 미미해져, 뻐스 한대를 채우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금년에는 회원들의 평생 동지인 부인들이 많이 참석했다. 우리 회원들이 거의 5시간의 장거리 여행끝에 도착하여 먼저 참석한곳은 캐나다측 한국전 참전용사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는곳에 모여서, 주캐나다 대사를 포함한 한국측, 캐나다측 재향군인회원들이 조촐히 모여서 행해지는 짧은 추모식이 있었다. 비문에는 전쟁의 참상을 대변(?)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They shall grow not old
As we who are left grow old,
Age shall not weary them,
Nor the years condemn.
At the going down of the sun
and in the morning
We will remember them.
조국을 수호하기위해서, 우방국의 자유를 지켜주기위해, 이분들은 채 꽃다운 청춘의 삶을 피워 보지도 못하고, 떨어져 버린 분들이다.
그분들 덕택에 오늘 우리는 이렇게 풍요로운 삶을 누릴수 있음을 망각하고 살아왔음을, 이순간만큼이라도 감사하고 고마움을 묵념으로 표시해 보는 것이다. 다시 이동하여 본 추모식이 열이는 전쟁광장으로, 대오를 지어 군대정신을 발휘하여 행군을 했다. 캐나다 전국에서 모인, 한국전 참전 용사들을 비롯한 재향군인회원들과, 한국측 재향군인회원들이 토론토와 몬트리얼에서 참석하여, 광장중앙에 도열하고, 공적비앞의 귀빈석에는 참전 16개국의 대사또는 관련인사들 그리고 대사관 무관들이 착석해 있다. 캐나다측 향군회원님의 구령으로 추모식은 시작되고, 현역캐나다군의 슬픈 나팔소리를 시작으로, 전챙의 참상과, 낙화한 전우들을 생각케 하는 추모식의 6월의 작열하는 태양열 속에서 진행됐다.
현역시절에는 생각조차도 해 보지 못했던, 기수병이 된 나는, 태극기와 캐나다기를 든 다른 2명의 기수와 함께 향군기를 들과 대열 맨앞에서 구령에 따라 기를 올리기도하고, 내리기도하고..... 그모습이 오직 어설펐을까? 그래도 향군의 자존심을 대표한다는 마음에 정신을 곤두세웠다.
Clergy의 기도가 있었고, 뒤를 이어 한국대사의 헌화를 뒤이어 참전 16개국 대표들이 헌화하고, 이제 초등학생들쯤 되는 캐나다 아이들과 마침 공연차 이곳 캐나다에 들인 Little Angels맴버들인 귀여운 꼬마들이 차례로 참석하여 고인이된 전우분들의 공로를 잊지 않고 계속해서 기억 하겠노라는 다짐(?)을 하는 순서들로 식은 계속 이어진다. 이곳 저곳에서 사진들을 찍어대는 소리가 요란하고.... 인생은 유한한것, 어쩔수 없이 캐나다측의 전우들의 참석율도 매년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음이 이번에는 더 눈에 띈다. 광장 왼쪽에 마련된 관중석에는 많은 향군회원들의 부인들을 비롯한 가족들과, 이행사에 관심있는 시민들이 자리를 꽉 매우면서 앉아서 경청하고 있다. 추념식이 시작될때 군악대의 연주로 울려 퍼졌던, 애국가와 오 캐나다의 음율은 항상 똑 같지만, 지금 느낌은 아주 다르다. 마음이 무겁고, 전우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그기분이 식이 거의 끝나가는 이순간에도 가슴속에 묻여 있다. 이곳 광장의 비문에는 또 다른 문구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전쟁의 참상을 또 되새기게한다.
어린 아이들이 한구절씩 읽어가는 소리가 애잔하다.

Today, we remember our Canadian and allied
comrades who sacrificed their lives for peace and
liberty during the Korean War.

Art Centre에서, Canada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제공한 점심을 추념식에 참석한 모든 전우들과 가족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즐겼다. 우연히 Turkey대사관의 무관 Colonel Mr. Goksen을 만나 얘기를 나눴다. 42세의 그는 미소년처럼 얼굴이 밝았다. 우선 당신네들의 6/25 참전을 우리는 항상 기억하고 감사하고 있다고 했더니 좋아한다. 지난 3월달에 터키방문때 느꼈던, 보았던 여러 애기들을 해주면서, 터키 동쪽지방을 아내와 둘이서 여행한곳의 지명( City name)들을 설명했더니 그가 깜짝 놀란다. 자기는 임기가 앞으로 1년 더 남았다고 하기에, 되돌아 가면 장군을 표시하는 별을 달게 되느냐? 물었더니 그에대한 희망이 강렬하다고 속심을 나타내기도 하면서 얘기를 나눴다. 군대에 대한 애기중에서 터키는 나토회원국중에서 두번째로 큰 군대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약 1.2백만대군이라고 한다. 지난번 터키여행때, 터키현지 가이드는 약 1/2백만명이라고 들은 기억이 있는데.... 현역 고위 장교의 말이 더신빙성이 있어, 나의 기억을 고쳐야 할것 같다. 이멜을 서로 교환 하기로 하고 약속하면서, '너의 장군승진을 나는 마음으로 부터 빌어 주겠다' 했더니, '감사하고 고맙다, 우리 두나라는 형제국이 아니냐?' 라고 화답해준다. 터키군의 계급장은 미국군이나, 한국군들과는 많이 다르다. 대령계급장이 그들은 별 3개로 표시되여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진짜 장군의 별은 어떻게 표시되여 있을까? 그도 터키군의 사관 학교출신이라고 자랑하던 모습이 어린애처럼 꾸밈이 없이 맑게 보였었다.

Little Angels 공연시간이 되여 공연장에 들어섰다. 원래 관람표는 60달러인데, 우리는 향군회원들이기에 무료로 티켓이 제공됐다고 한다.
이번 Little Angels 공연은, 한국정부와 협조로, 6/25 발발 60주년을 맞이 하면서 참전 16개국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각국을 순회공연하는 순서중의 하나라고 한다. Little Angels단장의 관람객의 대부분이 이곳 Canadian들을 향한 인사말에서,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우방인 한국을 공산침략으로 부터 구해 내고져 먼거리를 마다않고 전장에 뛰어들어 목숨을 바친 우방국 전우들이 있었기에 저자신도 오늘 이곳에 서서 이렇게 고마움을 표시할수 있게 된점을 강조하는 대목은 가슴에 닿는 표현으로 박혔다. 고국의 어린 아이들의 고전 무용은 너무나 잘 하기도 했지만, 향수를 달래 주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Little Angels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어 왔었지만, 그들의 공연은 오늘 관람이 처음이다. 의상과 무대 장치 등등..... 모두가 손녀들처럼 앙징맞고 귀여웠다. 나도 언젠가는 이아이들같은 손자 손녀들을 볼수 있게 될까? 하루빨리 그런날이 나에게도 왔으면 하는 마음이 이들의 공연을 보면서 더해진다.
조금 아위웠전점은, 토론토로 되돌아 오는 시간을 맞추기위해 공연이 다 끝나기전에 공연장을 나와야 했던 점이다.
뻐스안에서 참전용사중의 한분 실전담을 들려주어 그날들의 참상을 되씹어 보게 해주기도 했고, 이러한 참상의 깊은곳을 오늘 고국에서 편하게 배불리 먹고 삶을 즐기는 젊은 세대들이 듣고, 고국의 처해진 현실속에서 조국관을 올바르게 할수 있다면.....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이민 초창기의 어렵던때, 같이 믿음생활을 했던 쌍둥이 아빠가 몇년전부터 재향군인회에 참석하더니, 이제는 사무처장직까지 맡아 수고 하고 있는데, 그분을 보면서 어제 같았던 힘들고 어려웠던 이민초기의 생각들이 회상되기도 했다. 그렇게도 열심히 살더니 그분은 지금은 편안한 노후를 즐기고 있다는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 더 좋다.

여기에 재향군인회 캐나다 동부지회의 행사 내용과 고국의 조선일보 6/25특집기사를 옮겨놨다.

http://news.chosun.com/special/issue/war_625/

http://www.kvacanadaeast.net/bbs.php?table=board_05&query=view&uid=215&p=1

http://www.kvacanadaeast.net/bbs.php?table=board_05&query=view&uid=213&p=1

http://www.kvacanadaeast.net/bbs.php?table=board_05&query=view&uid=206&p=1

http://www.kvacanadaeast.net/bbs.php?table=board_05&query=view&uid=205&p=1






前 TBC-TV PD 이정웅씨가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글의 전문입니다.

끝까지 꼭 읽어 주세요

지난 3월1일 제가 청와대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입니다.



대통령님의 국사에 분주하신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저는 30년전인 1980년에 지금은 없어진 TBC-TV에서

6.25 30주년 특집으로 참전국들을 취재하여

60분짜리 프로그램을 3회 연속으로 방송했던 은퇴한 PD입니다.

그 때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때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시절이었는데도
우리나라는 6.25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는데

미국.카나다.호주.뉴질랜드 등, 내가 취재한 참전국들은

6.25가 마치 자기 나라의 전쟁이었던 것처럼
자료들을 전쟁박물관에 소중히 보관 전시하는 것은 물론

한국에서의 치열했던 전투와 전우들의 장렬한 죽음을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엄숙하게 추모하며 기리고 있었습니다.

만나 본 참전용사들은 물론 그 가족들도 그들의 남편과 아버지가

한국전쟁 참전용사였다는 것을

최고의 영광인양 자랑스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참전부대와 참전용사들이 살고있는 지방으로 취재차 이동할 때

마다 그 지역의 신문과 방송이 우리를 역으로 취재해 갔습니다.
그날 밤 방송 뉴스와 이튿 날 신문에서

우리는 취재당한 우리 취재팀 모습을 봤습니다.

“30년만에 한국이 우리를 찾아왔다!"라는 커다란 제목이 붙은 지역 톱 뉴스를......

그 때 저는 느꼈습니다.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를 때까지 한국은

이 나라들로부터 원조만 받고 거래만 해왔지

단 한번도 이들 참전국들에게 우리를 구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정식으로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으며 취재하면서 참 부끄러웠습니다.
6.25 60년이 되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건의드립니다.

이번 6.25 60주년을 맞이하여 참전16개국

(지원국까지 합하면 22개국?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의

대사관 영사관이 주축이 되어 전체 한국의 기업들과

상사의 주재원.교민과 유학생 관광객들까지 한데 모아

몇몇 생존해 있는 참전용사와 그 가족들,

그리고 당시의 참전 부대장들을 초빙하여

함께 그 나라의 국군묘지나 한국참전기념비를 참배하며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며 싸워준 그 은혜에 엄숙히 감사를
표하고 밤에는 성대한 파티를 열어 참전용사들과

그 가족들에게 즐겁게 감사를 표시하면서

당신들 덕분에 한국이 이렇게 발전했다는 것을 소개하고

푸짐한 선물을 안겨드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이 행사를 올 해를 기점으로 매년 계속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제 생각에는 불쑥 서울에 한번 초대하여

성대한 환영식을 갖고 마는 것보다

(물론 금년에는 그것도 병행해야 하겠지만)

한국에 대한 감동이 훨씬 더 잔잔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널리 퍼져나가 전 세계에서

한국을 편들고 응원하는 한국 팬들과 한국 문화와

한국 상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60년 전의 은혜를 잊지 않고

매년 성대한 의식과 잔치를 21개국에서 베푸는 것 자체가

감동이고, 이 감동들이 쌓여서 신뢰를 이룩하게 된다는 것은

개인이나 기업과 국가나 다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참전용사의 장례식에 한국 외교관이 조문하고

그 집의 애경사에 참여한다면 어떨까요?

각 나라의 외교관들이

자기 나라를 선전할 이벤트 꺼리가 없어서 혈안인데
우리는 6. 25의 혈맹이라는 너무나 좋은 소재를 가지고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만 허송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2002 월드컵 때 관중석 머리위로

파도처럼 춤추며 올라가던 대형 터키국기를 본

터키 국민들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감동,

UAE 원전 수주 때 대통령이 실권자 부친의 추도식에까지

동행하여 이끌어 낸 감동을 생각해 보면

그 효과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국내행사에 관해서 제안합니다.

수많은 6. 25 기념물들이 전국 각처에 산재해 있습니다.


부산의 UN군묘지로부터

각종 승전비.전적 비.순국 전몰 비.참전기념비 등등...
이 기념비들의 용도는 무엇일까요?



잊지 말자고 세워놓고 우리는 깡그리 다 잊고 말았습니다.
이 기념물들은 본래의 건립 목적에 맞게

효과적으로 기념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명이죠.


이번 6.25부터 그리고 매년 부산의 UN군묘지에서

참전 16(또는 21)개국의 대사와그 가족들,

UN 멤버들, 초청된 각국의 군인 대표들,
주한 미군 관계자들, 해외참전용사들, 우리 군원로들과 현역장성들,

각 나라의 한국에 거주하는 사람들, 외국 관광객들을 모시고

부산시 아니 대한민국이 떠들썩하고 전 세계가 놀랄 정도로

성대하고 엄숙한 감사의 추모식을 거행하고

밤에는 부산 영화제 못지 않는 성대한 조명,

불꽃 위령제와 감사의 파티.거창한 규모의 공연을 하여

한국인들이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이만큼 발전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입니다.


실은 전 세계에 알리는 것보다 우리 국민에게 알리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세계 최고속으로 이룩했다는 조그만 경제발전에 취하여

적인지 아군인지도 구별 못하고,
우리가 받은 것이 은혜인지 침략인지도 구별못할 정도로

우리 국민들의 정신과 도덕적 판단력 역시

세계 최고속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으니까요.

6.25때 5만명이 넘는 전사자를 낸 미국에게

효순이 미순이라는 두 소녀의 훈련 중 사망사고 때문에

몇 달간의 반미 촛불 데모를 벌였을 때 얼마나 억울했으면,

은혜를 원수로 갚는 한국에 대해서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으면

4성 장군인 당시의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의 반미 촛불 데모에 대한 본국 의회청문회 직후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그 때 저는 KBS에 그 인터뷰를 구해서

우리 국민에게 방송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묵살 당했습니다.)



그 후 정권이 바뀌고 미국산 쇠고기 때문에
또다시 국가가 위태로울 정도로 흥분해서

반미 촛불시위를 몇 개월 동안 벌이는 한국을 보면서

미국사람들이 과연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니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정말 애국심 없어지더군요.

저렇게 은혜를 모르고, 신의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들과

한 동포이고 한 국민이기가 싫어지기까지 하더군요.

그 때 이민가려고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국내용 행사를 건의합니다.

전국 각지의 6.25 관련 기념비와 전적비에는

기념해야할 날짜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날을 기념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 기념일의 기념행사는

그 기념비가 세워져있는 지역의 지방 자치단체와

그 지역의 각 사회단체, 기업, 학교, 주민들이 주최하게 해야 합니다.



참전국의 기념비일 경우,

앞의 두 제언에서처럼 해당국 주한외교관들과

해당 참전부대장과 의장대, 생존 참전용사와 그 가족들,
한국에 거주하는 그 나라 사람들을 초대하여 전몰자를 추도하며

그 나라와 그 부대, 그 용사들, 그리고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그 나라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엄숙한 추도식과

감동적인 뒤풀이 행사와 공연, 파티와 선물이 이어져야 하겠지요.

이마 국내에서 벌이는 외교 이벤트가 될 것이며,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살면서 일부 못된 한국인들에게서 당한

절치부심의 원한을 조금쯤 녹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흔해 빠진 자매결연도 그 때 한다면

양쪽을 위해 더욱 더 좋을 것 같고요.
우리 국군전승기념일과 전적지행사도 성대하게 할 수 있고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날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대의 부대장 이하 고급 장교들,

의장대와 군악대를 초청하여 옛날의 전승 기념지에서

생존해 있는 역전의 용사들과 그 지역에 사는 그 부대 출신 예비역들,

그리고 그 지역 주민들이 어울리는

한바탕 기념행사와 지역잔치를 베푼다면
군부대는 군부대대로 자기부대에 대한 긍지와 사기가 높아질 것이며

주민들은 주민들대로 자기 지역에 대한 애향심과

선열, 선배들에 대한 존경심이 높아질 것입니다.


전국에서 이런 행사가

매년, 꾸준히, 그리고 신나고 성대하게 베풀어진다면

6.25가 무엇인지도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젊은이들과 학생들에게

살아있는 우리나라 현대사 현장학습도 시킬 수도 있겠고,

자기나라 군대를 군바리라고 부르는 못된 풍조도

조금씩 고쳐 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잘 하면 그 지방의 관광상품으로 만들 수도 있겠습니다.

세계 각 나라의 정부와 외교관들이

제 나라를 선전할 명분있는 이벤트꺼리를 못찾아 애태우는 것처럼
지금 각 지방자치단체와 지역들도 자기 지역을 선전할 이벤트꺼리를

부지런히 찾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요즘 흔히들 브랜드를 띄우려면 스토리를

만들어라 하고 이야기 하죠.


국가와 민족이 겪은 참담하기 짝이 없는 비극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6.25의 보은 기념 이벤트는

세계적으로도 지방적으로도
우리 한국을 세계와 결속시키고 국민을 단합시킬 히스토리이고

너무도 훌륭한 스토리깜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가장 지방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도 있었지요.

그리고 60주년이 되는 금년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정부가 아마 이 모든 것들을 이미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천만다행으로 여기고 혼자 행복해 하겠습니다.

은퇴한 늙은 PD의 조그만 애국충정으로 아시고

참고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대통령님의 건투와 건승을 기원합니다.

아~ 잊으랴

아버지는 그날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고전하고 있는

우리 미 24사단을 독려하고 후퇴작전 중에
큰 전과를 올린 우리 사단에 대한 부대표창과 미국 정부가

저에게 수여한 은성무공훈장을 제 가슴에 직접 달아주시려고

짚 차로 달려오시다가
의정부와 문산 간의 어느 도로에서 후퇴중인

한국군 트럭에 부딪쳐 현장에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계속되는 추위와 끝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려

전 전선이 계속 패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모처럼 아군이 큰 승리를 했고

그 승리의 주인공이 아들이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크리스마스 이틀 전인 1951년 12월 23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며칠 전 맥아더사령관은

미국 정부에 아버님의 대장진급을 상신해 놓았더군요.

이렇게 해서 우리 부자간의 한국에서의 첫 만남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불 독’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아버지 월튼 H 워커 대장

(중장으로 전사, 사후 대장으로 추서)의

우락부락한 모습과는 달리 멋진
미 육군 정장에 네 개의 별이 반짝이는 바나나 모자를 쓴

훤칠하고 잘생긴 아들 워커 미 육군 예비역 대장은

알링턴 미 국립묘지의 아버지 무덤에 한참이나 거수경례를 한 뒤

눈물을 글썽이며 30년 전,

TBC-TV 6.25 30주년 다큐멘터리 제작팀과의 인터뷰를 이어갔다.

“이틀 뒤 나는 도쿄의 UN군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불려갔습니다.

사령관이 제게 말씀하시더군요.
‘워커 대위! 아버님의 전사를 진심으로 애도한다.

월튼 워커 대장은 정말 훌륭한 군인이었다.

그의 죽음은 우리 미군은 물론 미국의 커다란 손실이다.
귀관에게 고 월튼 워커 대장의 유해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임무를 맡긴다.’



저는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각하, 그것은 안 됩니다. 저는 일선의 보병중대장입니다.
그리고 지금 저희부대는 후퇴중입니다.

후퇴작전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하다는 것을 각하는 잘 아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 부하들은 목숨을 건 위험에 노출되어

악전고투하고 있습니다.
지금 중대장이 바뀌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 중대에 제가 없으면 안 됩니다.

고 월튼 워커 대장의 유해는 의전 부대에 맡기십시오.

각하의 휘하에는 반드시 의전 부대가 있습니다.
저는 전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 때 이미 문을 향해 걸어 나가던 맥아더 사령관이 뒤돌아서더니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것은 명령이야"

그리고는 방을 나가버렸습니다.

군인이 명령을 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버님의 유해를 가슴에 안고

이곳 알링턴까지 와서 바로 이 자리에 안장 했습니다.


예상했던 것처럼

저는 이미 워싱턴의 육군본부로 발령이 나 있었습니다.

이기기가 싫었겠죠. 그러나 결코 그 결정에 찬성하지는 않습니다.
다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군인이 부하를 위험한 전장에 남겨놓고,

치열하게 전쟁 중인 한국을 떠나왔다는 생각이

지금도 가슴을 무겁게 합니다.

그러나 그가 결코 한국을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었다.

초대 주한 미8군사령관이었던 고 월튼 워커대장과 함께

최초의 미군 父子大將(4 star)이며
미 육군 최연소 대장 진급자였던 전도 유망한 워커가

젊은 나이에 예편된 것은 바로 한국 때문 이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불화로

카터가 주한 미군을 철군하려고 했을 때

한국에서는 주한 미군 참모장인 싱그러브 소장이 반대했다가
예편되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미 육군의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이며

차기 참모총장이나 NATO군 사령관으로 유력하던 워커 대장이

카터에게 반대를 했고 결국 예편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월튼 워커 대장에 대해서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이 또 있다.

월튼 워커 미8군 사령관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의정부 문산 간의 도로가 바로 얼마 전
미군이 탱크 훈련 중 미선과 효순 이라는 두 소녀를 치어 죽게 한

바로 그 도로이며 사고지점도 거의 같다는 사실이다.

그 뿐 아니라 워커 미8군 사령관의 짚차를 운전한 한국인 운전병과

짚 차와 부딪친 한국군 트럭 운전병을

이승만 대통령이 사형시키려 하자
미군 참모들이 적극 만류하여 사형을 면하게 해주고

대신 가벼운 징역형으로 감형케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의정부와 문산 간의 같은 길에서 난 교통사고

1951년 미 8군 사령관을 죽게 한 한국 병사를

미군과 미국은 용서해 주었는데

2002년 훈련 중에
두 소녀를 과실로 죽게 한 미군 탱크 병을,

아니 미군과 미국 전체를 싸잡아서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증오하고 저주하며
촛불을 켜들고 한국을 떠나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나라에 많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이보다 앞서 1950년 8월,

대전을 사수하라는 워커 8군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탱크를 앞세워 밀려오는 적을 보병만으로 막아야 했던

불리한 전황 속에서 어떻게든지 대전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소 3.5인치 로켓포를 발사하여

적의 T-34 탱크 한 대를 직접 폭파시키면서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던 미 24사단 사단장 윌리암 딘 소장이

부대와 떨어져 홀로 36일동안 산속을 헤매다가 한국인 농부의 밀고로

북한군에게 잡혀 3년동안의 포로생활을 하였다는 사실,

포로생활에서 풀려나자 그의 조국 미국은

사단장이 직접 적 탱크와 맞닥뜨려 싸울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급박한 상황과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리고 3년 동안의 포로생활 중 보여준

미군 장성으로서의 군인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미국이 줄 수 있는 최고 훈장을 수여했지만
‘내가 한국에서 사단장으로서 한 행위는

나무 훈장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적 탱크를 격파한 것도 어느 하사관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부끄러워하며 은둔했던 그가


단돈 5 달러에 자기를 밀고해서

미군 장성으로서의 인생을 포로라는 치욕으로 마치게 한

그 농부가 5년형을 받아 복역 중이라는 것을 알고는
분연히 일어나 무지한 농민이 살기 위해서 한 행동이니

감형해 줄 것을 한국정부에 간청하여

기어코 출옥시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딘 장군의 포로생활은 북괴군이 그를 심문할 때

통역을 했던 민간인 이규현이 탈출 귀순하여 진술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이규현씨는 후에 중앙일보사장과 문공부장관을 역임했다)

만약 외국에 파견한 한국군 사단장이

그 나라 민간인의 밀고로 전투 중에 포로가 되고

군사령관이 전사하는 경우를 당했다면

우리 국민과 나라는 어떻게 했을까?

이런 것을 한번 생각이라도 해 본 사람들이 있기나 한가?

지극히 의심스럽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이 편지는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입니다.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머니 저는 지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機首에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後尾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지금 한국에서 싸우고 계십니다.

드디어 저도 미력한 힘이나마

아버님에게 힘을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애인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이 편지는 워커 장군의 후임이었던 릿지웨이 장군이

맥아더 장군이 해임됨에 따라 UN군 총사령관으로 영전한뒤
그 후임으로 부임한

벤프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아들 지미 밴프리트 2세 공군 중위가

이제 막 해외 근무를 마쳤으므로

한국전에 참여할 의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원해서 아버지가 사령관으로 있는 한국전에 참여하면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리고 그 것이 마지막 편지였다.

1952년 4월 2일. 이 훌륭한 군인은

압록강 남쪽의 순천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새벽 세시 김포 비행단의 레이더와 접촉한 후

표적을 향해서 날아가더니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겼다.


즉시 수색작전이 시작된 것은 물론이다.

4월 4일 아침 10시 30분 8군 사령관 밴프리트는

미 제5공군 사령관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지미 밴프리트 2세 중위가 폭격비행 중 실종되었고

지금 수색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고 한다.
“지미 벤프리트 2세 중위에 대한 수색작업을 즉시 중단하라.

적지에서의 수색작전은 너무 무모하다.”라고

아버지가 아들 구출작전을 무모하다고 중지시킨 것이다.


이것은 인접 한국군 부대장으로서 회의에 참석했던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장군의 증언이다.

며칠 뒤 부활절을 맞아

그는 전선에서 실종된 미군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모두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말한 벗이 곧 한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밴프리트 미 8군 사령관은 한국을 벗이라고 생각했고

그 벗을 위해 자기 자식을 희생시킨 것이었다.
이런 강직하기 짝이 없는 군인 앞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와 놀라운 부탁을 하였다.

1952년 12월,

대통령 당선자인 노르만디의 영웅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한국 전선을 살피기 위해 방한하여 8군 사령부를 찾은 것이었다.
8군과 한국군의 고위 장군들과 참모들이 모두 참석하고

전 세계의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밴프리트 사령관이 전선 현황에 대해서 브리핑을 끝내자

조용히 듣고 있던 차기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뜬금없는 질문을 하였다.
“장군, 내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 안 있어 대통령에 취임할

당선자의 전투 사령관에 대한 첫 질문치고는
너무나 대통령답지 않은 사적인 질문이기도 했지만

상대가 아들을 잃고도 꿈쩍하지 않은 밴프리트였기에

모두들 무슨 일이 벌어질까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젠하워 소령은 전방의 미 제3사단 정보처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라고

밴프리트 장군이 사무적으로 짤막하게 대답하자



아이젠하워는

그야말로 참석자 모두가 놀라자빠질

사적인 부탁을 공공연히 했다.


“사령관, 내 아들을 후방 부대로 배치시켜 주시오.”

참석자들이 모두 서로 두리번거리면서 웅성거리고

밴프리트 사령관도 언짢은 표정으로 아이젠하워를 응시하면서

의아해 하자 당선자가 조용히 말했다.


“내 아들이 전투 중에 전사한다면 슬프지만

나는 그것을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존 아이젠하워 소령이 포로가 된다면
적군은 분명히 미국 대통령의 아들을 가지고

미국과 흥정을 하려 들 것입니다.

나는 결단코 그런 흥정에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령관이 잘 알다시피

미국 국민은 대통령의 아들이 적군의

포로가 되어 고초를 겪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대통령의 아들을 구하라’고 외치며

나와 미국에게 적군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압력을

가할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태를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령관이 즉시 내 아들이 포로가 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장면인가!

순식간에 두리번거리면서 의아해하던 분위기가 반전되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표정이 되고 곧이어
“즉각 조치하겠습니다. 각하!”라는

밴프리트 장군의 우렁찬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고

이 자리에 참석했던
미 2사단 72탱크 대대의 대대장 T.R Fehrenbch 중령이

전역 후 쓴 This kind of war(한국 전쟁)이라는 책에서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페렌바하는 전역 후 유명한 역사 저술가와

칼럼니스트가 되었다.)

마지막 UN군사령관인 마크 클라크 대장의 아들 클라크 대위도

금화지구의 저격능선에서 중대장으로 싸우다가

세 번에 걸친 부상으로 전역을 했으나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한국전에 참가한 미군 장성의 아들들은 모두 142명,

그중 35명이 전사하였다.
한국전에서의 미군 전사자는 모두 54,000여명 부상자는 10만 명이 넘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하여 사령관이 전사하고 사단장이 포로가 되며

자기 자식들마저 참전시켜 전사를 당하게 하는 장군들과,
남의 나라 전쟁에 54, 00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도

꿈쩍 않는 국민을 둔 미국 !



끔찍히도 자식들을 사랑하여 거대한 재산을 물려주려고
온갖 부정을 일삼던 전직 대통령들과,

어떻게든 자식들을 군대에 안 보내려고

갖은 수를 다 쓰는 벼슬 꽤나 하고 돈 꽤나 있다는 고위층 사람들

무슨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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