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라운딩을 잠깐 접고, 오후에는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약 서남쪽으로 약 25마일 떨어져 있는,큐바의 아테네 라고 불리는, Matanzas도시와 도시 외곽에 있는 Bellamar 동굴을, 호텔 로비에 상주해 있는 Tour Agent를 통해, 개인당 25 패소를 지불하고 투어 팩키지를 구입해서 우리 일행 8명이 나섰다.
시간이 되여 전용 버스가 호텔로비앞에 도착하여 5시간의 투어를 시작했다. 버스는 중형으로 다른 호텔에서 온 관광객들을 포함하여 약 20명 정도가 동행이 되여 같이 구경하게 됐다.
투어 Guide는 50초반의 남자로, 먼저 자기를 소개 했다. 그내용이 재미 있었다. 자기 이름은 큐바사람들이 다 아는 유명한 이름이라고 하면서 좌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을 향해 맞추어 보라고 질문을 던진다.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다른 소리를 해대자, 웃으면서, '카스트로'가 자기 성이고 이름은 Alex라고 소개했다.
먼저 Bellamar Cave 의 발견과정을 설명했다. 1861년경에 평지에 놓여 있는 약간 큰 바위덩위를 옮겨 다른곳으로 이동시키고져 Bar를 이용하여 움직이던, Justo Wong이라는 중국계 큐바인이, 실수로 사용하던 지렛대를 손에서 놓쳤는데, 지하로 빠져 들어가 없어져 버렸다. 이상히 여긴 그간 계속 파혜져 보았더니 속이 텅빈 지하 동굴이 발견됐다고 설명한다. 동굴의 길이는 총 3킬로 347미터이고 지하 30미터에 위취해 하고 있으며, 현재 약 750 미터가 개발되여 관람되고 있다고 전했다.
입장료는 무료였으나, 휴대 카메라 한대당 5패소를 징수 했다. 우리 부부는 똑 같은 모델의 디카를 각각 하나씩 소지하고 있어 10 패소를 징수 당하는것은 좀 억울한 생각이 들어, 내 카메라는 주머니에 넣고, 아내것을 내가 손에 들고, 한장만 구입해서 검문소를 통과해서 들어 갔는데 무사하게 통과 되였다. 형식적이면서도, 돈을 징수하기위한 행위였기에 검표원이 표를 받기에만 바빠, 다른 검사를 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굴안에는 굉장히 습기가 많아 축축한 기분이었고, 무척이나 더웠다. 조명도 매우 빈약해 아름다운 지하동굴의 참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돌 고드름과 괴암은 수정같아 보였고, 웅장 했으나, 관리 소흘로 본래의 모양이 많이 훼손되여 안타까웠다. 그런데도 동굴안에는 아무도 감시하거나 안내자가 없어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파괴하거나 작란을 칠수 있는 위험이 뒤따르고 있다는것을 느꼈다.
조명이 약해 사진을 촬영했지만, 바라는데로 잘 찍히지는 않았다. 마침 중국의 젊은이들과 조우하게 되였는데, 그들은 십대 후반의 학생들로 큐바의 수도 하바나에서 서반아 어학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이었는데, 교육비는 전액 중국정부에서 부담하고, 다만 본인들은 이곳까지 오고 가는 Air Fair만 지불 했다고 하는 설명을 해줘 깜짝 놀랐다. 중국정부에서 세계를 상대로 젊은 인재들을 육성하고 있다는것이 내 눈으로 확인된 셈이었기 때문이다. 대국이 돼기위한 한발 한발을 잘 다지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들도 휴일을 위하여 우리처럼 관광을 왔다고 당당히 설명한다. 부럽기도 하고, 고국 대한민국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라는 의문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기둥처럼 생긴 돌기둥, 여러모양의 종류석들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Matanzas라는 본래의 말뜻은 영어로 Massacre로 대량 학살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연유는 1510년도에 29명의 스페인들이 하바나 큐바를 공격하기위해 이곳에 도착하여 이곳의 원주민들을 징용하여 그들이 사용하는 Boat를 이용하여 항해 하는데, 이상하게도 스페인 정복자들이 항해중 다 죽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연유하여, 마탄자스라는 말을 사용하게 됐는데, 도시이름으로 불리게 됐다는 유래였다.
이동굴을 발견한 '웡'씨는 당시에 건축중에 있던 극장이 완성되자, 평생을 무료로 관람할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아 극장출입을 마음데로 이용했다고 한다. 큐바 전체 인구는 약 11.2백만명인데, 그중에 약 8백만명이 캐톨릭 신자로 등록되여 있다고 한다. 허지만, 캐톨릭 교회로 이용될듯한 건물은 눈에 많이 띄지 않았다. 극장 옆건물은 경찰서이고, 극장 건너편 건물은 재판소라고 설명했다. 그사이에는 조그만 시민 광장이 있었다. '수도 하바나'는 2.5백만명이 상주하고 있는데 비해, Matnazas Province는 겨우 인구가 15만명밖에 안된다고 설명하면서, 이곳은 두개의 강(River)합류해 바다로 흘러 가기 때문에 유난히 다리(Bridges)들이 많다고 설명한다.
4개의 지방정부가 Matanzas 주안에 있으며, 이곳의 Bay는 그깊이가 650 미터로 북미에서는 가장 깊은곳이라고 전했다.
또 특히한 점은, Matanzas Province, Matanzas City, Matanzas Bay, Matanzas Section등 Matanzas 라는 단어가 지명에 사용되고 있었다. 도시 한복판에 설탕공장으로 오래전에 사용했었던 건물이 있고, 건물밖에는 큰 나무 한그루가 지금도 자라고 있는데, 설탕공장에서 사용됐던 Sugar Mill에 사용됐던 큰 Gear wheel가 나무 Trunk기대여 전시되여 있고, 그위의 나무 가지에는 종이 걸려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1843년 11월 15일에, 노예로 팔려와서 이곳에서 일하고 있던 아프리칸들이 만여명이 넘었는데, 반란을 이르켰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그 반란의 리더는 여성으로 Carlotta 였는데, 그들을 기념하기위한 조치에서 이렇게 당시의 물건들을 진열하여 관람시킨다고 했다.
그래서 그나무 이름은 Savia 즉 반란운동을 honor하기위한 뜻으로 Gear wheel과 Bell을 나무에 묶어 진열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한블럭 건너 현재 Art Centre로 사용되는 커다란 빌딩이 아름답게 단장되여 있었다. 대부분의 건물이 낡고, 보수유지가 안되여 있는데, 이건물은 달리 새건물로 보였다. 설명에 의하면, 이빌딩은 1970년까지 성냥공장으로 이용되여 왔었는데 1997년에 화재로 전소되여, 2003년에야 다시 당시의 모양을 유지한 건물을 몇명의 자본가와 Professional 들이 중심이 되여 신축하여 현재는 Artists Centre 사용되고 있으며, 이곳에서 훈련받은 졸업생들만이 Certificate를 발부받아 다른 지방으로 가면 같은 업종의 장사를 할수 있게 된다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같이 구경간 일행중 한명과 그곳의 Senior woman과 함께 기념 촬영도 했다. 이곳의 관람이 끝날무렵, 가이드가 특별 써비스 한다고 하면서 건물안의 한 상점에 들어가, 우리 일행에게 맥주를 포함한 음료수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것도 무료로....
큐바 혁명(1959년도에 카스트로 주도)전까지는 Matanzas Bay를 중심으로 한 살기좋은 지역에는 미국의 부자들이 살면서, 설탕농장이나 기타 다른 산업을 장악하고 있어 큐바인들은 고통을 많이 당하면서 살았다고, 혁명의 당위성을 가이드는 역설했다.
Matanzas Freedom Square 에는 큐바 독립의 지도자 Jose Marti 동상이 아담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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