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y 15, 2012

MB의 미얀마 방문을 읽으면서....

http://news.ichannela.com/3/all/20120515/46253547/1


항상 주장해 오는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는 민주화 사회 건설은, 그것을 지킬만한 모든 조건, 즉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국민들의 정신적 건강등의 여건이 맞아야 결실을 맺을수 있다고 생각해 오고 있다.  국민들이 배가 고프면, 그들의 눈에는 서방세계사람들이 부르짖는 알량난 인권은
한낱 허구에 불과한것임을 우리는 경험으로 통해서, 시험공부하듯 머리로 암기해서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님도 잘 알고 있다.   굶주림 앞에는 먼저 허기진 배를 채우는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이를 가장 교묘히 잘 이용하는 부류가 바로 정치꾼들이다.

조국 대한민국이 아직 보릿고개를 넘기위해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오늘을 살고 있는 세대들이 향유하고 있는 인권을 뒤로한채 주야로 매진할때,  이를 가장 많이 자기네들의 야욕을 채우는데 악용했던 부류가 바로 정치꾼들이었다. 

그들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정치꾼은 전직 대통령을 지낸분이다.   아직 My Car라는 말의 뜻이 생소할때, 당시 군사정권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추진 하고 있을때로 기억되는데, 땅을 파서 계곡을 매워 고속도로를 건설하는데 사용되는 불도저의 Shovel앞에 드러누워 건설을 방해했던, 자칭 민주투사라는 사람이었다.
"고속도로를 만들어 놓으면 그위로 독재자들이 유람 다닐려고, 백성들의 배고픔은 아랑곳 하지 않고, 국가예산을 탕진하고 있다"라고 하면서 선동을 했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동아일보의 사진 자료에서 그러한 장면을 뚜렷히 최근에 또 보면서, 그분은 위선의 극치였음을 새삼 느끼기도 했었다.

독재자들은 사람들의 배고픔을 교묘히 이용하여, 마치 소와 말을 부리듯 사역에 동원 시킨다.
 자기의 사욕만 채리기위해 국민들을 부린다면, 국가는 발전되지 않고, 토탄에 빠져서 아우성 치고 있을때, 자기의 스위스 은행 계좌에는 부가 산처럼 쌓여 가는것을 보면서, 주색에 빠져 몸이 병들어 가는줄도 모르고 지내다 결국 빈손으로 삶을 마감한다. 그것도 비참하게....

독재를 하면서도, 오직 못사는 조국의 발전을 생각하면서 매진하면, 당시에는 고통으로 보여져 많은 비난을 받지만, 후에 그업적이 재평가되여 위대한 지도자로 국민들의 추앙을 받는 경우가 있다.  조국 대한민국이  그좋은 예로 손꼽히고 있다.   사후에 박통의 재산 축적은 거의 언론에 발표된게 없었고, 지금 처럼, 잘사는 서방세계보다 더 민주화의 맛을 보고 사는 오늘에도, 그분에 대한 재산축적을 놓고 시비하는 기사는 본 기억이 없다.   오직 가난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일념 하나로 자유를 유보하고, 독재를 하면서, 온 국민의 열정을 경제 건설에 쏟아 붓는,  근면의 본을 손수 보이면서 독려 했던 분으로 지금은 기억되고 있고, 그결과가 세계 12대 경제 대국으로 발전하는 터전(Foundation) 을 다진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그얼마나 많은 억압과 희생이 있었는가.   그러나 전체적으로 평가해 볼때, 그러한 희생이 같이 있었기에 배부른 민주화의 삶을 오늘의 세대는 즐기고 있다고 본다.

국민들의 배고픔이 사라지고, 배가 뚱뚱해졌을때, 사람들의 욕구는 더 커지게 되고, 그곳에서 파생되는게 개인의 자유, 인권등등을 부르짖게 되고, 때로는 그 욕구가 정부와 부딪치게 되고, 심하게되면 인명까지 희생되는 결과를 낳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을 잘 알고 있는 북한 지도자들은, 절대로 국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할려고 하지 않는다는것은 전세계가 잘 알고 있는 비극이기도 하다.  배고픔을 채워주면, 거기서 요구하는 인민들의 욕구를 감달할수 없기 때문이다.  그쪽의 변화는 현재로서는 요원하다고 본다.   천지개벽이 일어나지않는한 말이다.   그것이 바로 비극이다.  그것이 바로 남한의 젊은이들과 소위 말하는 정치꾼들을 선동하게 만든다.  마치 자비를 베푸는것은 자기들만이 가능한양 말이다.  감상에 젖어서 말하는 민주화는 위험 천만이다.  이를 지킬만한 경제적, 정신적 밑바탕이 되여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한의 무법천지같은 민주화의 흐름은 바로 경제적으로 이러한 무질서(?)를 극복해낼수 있는, 떠 받칠수있는, 경제적 여건이 갖추어져 있기에 가능한것이다.

MB가 1983년 그사건이후 처음으로 미얀마를 공식 방문 했다고 한다.   조국 대한민국보다 더 먼저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서 국가를 이끌어 왔지만, 군사독재자들의 정신이 개인 사리사욕에만 빠져 있었기에, 오늘날 까지도 국민들은 토탄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후진국이 미얀마가 됐다.  다행인것은 늦게나마 깨달은 군사정권이 작년말로 민정이양을 하고 민주사회로의 변환을 선언하고, 민주선거를 실시 하여, 개방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 MB가 국빈 자격으로 그곳을 방문하게됐었다는 신문기사를 시사하는바가 크다.

민주화는 꼭 어느나라이고간에 살아서 생활속에 있어야 하나, 이를 지키기위한 밑바탕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희비 쌍곡선이 그려진다고 본다.  지금 미얀마는 그러한 중대기로에 서 있는것 같아 보이는데...... 앞이 첩첩 산중으로 내눈에는 보인다.   정치적 지도자의 결단에 의해 국가의 융성이 결정됨을 나는 경험으로 보아왔기 때문에 그들의 앞길에 행운이 있기를, 그래서 시간과 기회가 되면, 배낭 하나 짊어지고 그곳에도 방문해 볼수 있는 기회를 맛볼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여기에 오늘자 미국의 와싱턴 포스트지의 기사를 옮겨놓는다.

양곤, 미얀마 - 한국과 미얀마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미얀마 대통령은 말하기를 지금까지는 약 20년간 북한에서 무기를 구입해 왔었으나, 앞으로는 그런일이 없을 것임을 다짐했다고 한다.   미얀마 대통령 Thein Sein은 무기 구입을 솔직히 인정 했으나, 핵관련 무기구입은 없었다라고,청와대 대변인이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미얀마가 북한으로 부터 핵무기를 구입했왔을것으로 추측해 왔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1983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방문이후, 국빈 자격으로 공식 방문중이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방문시, 미얀마 건국의 아버지 앙상장군의 사당이 있는 국립묘지 방문중 북한공작원이 설치해 놓은 폭탄세례를, 미리와서 대기중이던 각료와 고위인사 17명이 폭사당하는 사고를 당했었지만, 몇분늦게 도착한 전대통령은 참변을 모면 했었다.

미얀마는 작년말로 수십년간 해오던 군사독재 정치를 청산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출발 하면서 민주주의를 향해 가고 있는 나라이다.  그결과로 미얀마 방문중인 이명박 대통령은 오랫동안  가택연금을 당했던, 지금은 국회의원이자 야당 지도자인 '아웅산 수키' 전격적으로 만나 미얀마의 민주화를 향한 의견을 교환 했으며, 45분간의 회담중 '수키' 당수는 한국과 미얀마는
"민주화를 향한 험난한 길에서 서로 공통점이 많다"라고 설명 했습니다.
그녀는 "개발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인권이나 개인의 자유가 희생되여져서는 절대 안된다"라는 점을 서로 확인 했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이대통령은  월요일 Thein Sein대통령의 민주화를 위한 헌신적인 조치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잘진행되기를 기원한다 라고 그를 치겨 세웠다고 한다.

이대통령은 "유엔 결의안에 따라 북한으로 부터의 무기거래는 위법이므로 자제해 주기를 바랜다"라고 했지만, 상징적인 면이 강한 요구였다고 신문은 평했다.   유엔 결의안은, 북한으로 부터 가벼운 무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의 수입을 금한다"라고 되여 있다.

이대통령은 화요일 1983년도 폭탄세례가 있었던, 아웅산 수키 여사의 아버지이며,미얀마 독립의 아버지 '앙산'장군을 모신 "순교자의 성전"을 감깐 둘러 보면서 당시의 상황을 회상했다.
당시의 폭탄 공격으로 전부 21명이 사망했으며, 그중 17명이, 당시 몇분 늦게 식장에 도착한 관계로 화를 모면한 전두환 대통령의 각료들이었었다.

이대통령은 미얀마에 경제적 지원을 약속 하기도 했으며 그내용은 인적자원개발, Think Tank운영, 학생들을 남으로 초청하여 공부 시키는 프로그람을 상설화 하여 성공적 경제 개발의 경험을 전수 하기로 합의 했다고 한다.  아래는 신문 기사의 내용이다.

http://www.washingtonpost.com/world/asia_pacific/south-korea-says-lee-wins-myanmar-promise-to-stop-buying-arms-from-north-korea/2012/05/15/gIQAGnlZQU_story.html


Tuesday, May 08, 2012

토론토이민 역사의 산증인 '평화식품' 탐방












"야 가래떡 참 맛있다. 이걸로 사람들 떡국 잘 만들어 먹고, 고향 생각 하겠지?"
"혜영이 아빠, 물이 뜨거워진다. 찬물로 바꾸어야 되잖아?"
"이제 거의 다 뺐으니, 그냥 그 물로 식히자고잉"

혜영이 아빠가 한쪽 잘라 주면서 맛을 보란다.
"뜨거울때 한쪽 먹어봐. 쫄깃 쫄깃 하네. 맛있다.  이집사 맛이 어때?"
"김집사도 한쪽 맛봐. 그리고 집에 갈때, 가래떡하고 콩나물도좀씩 가지고 가잉"

이상은 35년전 Dundas와Roncesvalles에 있는 공장 건물의 지하실에서 처음 "평화식품"사업을 시작하면서, 구정을 맞이 하여, 같이 교회 생활을 하던 젊은 동료들이 새벽같이 나와서, 동업을 시작했던, 프랭크 아빠와 혜영이 아빠를 십시일반으로 도와주기 위해 자진해서 공장으로 나와 같이 그들을 도우면서 주고 받았던 추억속의 한장면을 표현해 본것이다.  그때는 우리 한국사람들의 성질로 보아, 제대로 동업이 잘 이어질수 있을까?를 모두가 걱정을 하기도 했었다.
맨손으로 젊음과 패기만을 무기로 삼아 생업에 뛰어들었던, 이민 초창기의 이민자들의 삶의
축소판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때는 인정도 넘쳐 났었고.......

며칠전  평화식품의 구사장님으로 부터 식품공장 자동화 공정을 Open하는데, 일정을 잡아
재향군인회장인 나와 주위 사람들을 공식적으로 초청하여, 지금은 Weston에 있는 거대한 공장에 들렸었다.  처음 이공장을 구입해서 기계를 설치 하고 있을때 한번 방문한일은 있었는데, 그로 부터 벌써 몇년이 무심코 흘렀는데 오늘은 초청객신분으로 구사장님의 브리핑을 받으면서 공장 시설을 탐방하는 것이다.

콩나물, 두부, 된장, 고추장, 떡국떡, 그외 내가 알지 못하는, 우리 식탁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많은 식품류들을 제조하는 대형 식품제조업체로 성장하여,  오늘은 몇백만 달러를 들여 설치한 만두제조시설을 둘러 본 것이다.   우선 규모면에서 내가 들은데로 표현 한다면, 전에는 7명이서 일주일동안 만들어 내는 물량을 이자동시설로 한명이 기계를 조정하고, Packing 하는 사람 둘이서 모든것을 처리하고 있다고 했다.   

위생이 우선이기 때문에, 공장입구에서 부터 옷에 혹시 묻어 있을수 있는 먼지 털어내는 턴넬을 통과한후, 다시 물에 젖어 있는 Mat위에 서서 신발을 닦아 내고서야 공장안 출입이 허용됐을 정도로 엄격했고, 만두가 기계를 타고 흘러가는 과정을 둘러 보면서 신기함을 느꼈었다.

브리핑을 마친 구사장님의 얼굴도 이제는 주름살이 보인다.   벌써 35년이 지났음을 실감한다.   구사장님과 프랭크 아빠인 이사장님과 인연을 맺은게 엇그제 같은데 눈깜짝할 사이 긴세월이 흘렀음을 새삼 깨닫는다.

지금은 온타리오주안에서만 판매할수 있어 시장확대를 위해 연방정부의 식품제조관리 판매 허가증을 신청중에 있다고 했다.  계획데로 허가를 얻게 되면 북미주는 물론 멀리 중국본토까지 시장확대를 설계하고 있다고 했다. 

평화식품은 우리 초기 한국이민자들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도 한국식품점에 가면 꼭 평화식품에서 제조한 두부와 콩나물을 구입한다.   진열장에는 풀무원에서 제조한 두부들이 더 많이 진열되여 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이유는 고국에서 풀무원에서 제조한 콩나물, 두부등등에 익숙한 새로운 이민자들이 많기 때문임을 나는 알고 있다.   풀무원 제품은 LA에서 제조되여 이곳까지 온다 들었다.  평화식품은 현지, 즉 토론토에서 제조한다.   유통 기한도 따라서 다르다.  어느쪽 제품이 자연산에 가까운지는 설명이 필요없이 쉽게 알수 있다고 하겠다.   요즘같이  Organic제품을 찾는 경우에는 더욱더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건강하고 장수하기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토론토 한인 사회의 토종기업, 평화식품은 우리 한인 동포들이 우선적으로 애용해 주어야 한다고, 그것이 바로 우리 한인 이민자들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평화식품이 성장 하는것 만큼 우리 한인사회의 이민역사도 깊어지고,  자존심도 높여준다고 하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평화식품의 두주인과 일찍부터 Fellowship을 해왔다는것은 어쩌면 나에게는 행운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분들을 사장님이라고 부른 기억은 거의 없다. 항상 혜영이 아빠, 프랭크아빠, 호칭은 영원이 그대로 이어질 것이다.  프랭크 아빠는 나보다 몇살 연장자이기 때문에 나를 부를때 항상 MR.Lee로 통한다.  그말이 그렇게 정겨울수가 없다.

그들 두분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동업이 안된다라는 통설을 깬 산증인이기도 하다.  그분들이라고 어찌 의견이 항상 같을수 있을까?마는 역경을 이겨내고, 맨주먹으로 시작하여 오늘의 기업을 일구어냈고, 동업은 실패다라는 징크스를 깬 표본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고, 한인사회의
한 Sample로 인용될 것이다.

관람을 다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오니,  두부와 콩나물 그리고 자동화 기계로 만든 만두가 들어있는 Package가 우리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구경시켜준것만도 고마운데, 한보따리 싸 주시니 고맙기만 했다.  같이 관람하는 일행중에는 탈북자 협회의 임원들과 탈북자 몇분이 있었다. 그분들의 현황도 들을수 있었다.  그분들이 정착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을 그들에게 전하기도 했다.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기원하면서 문을 나섰다. 감사.





Tuesday, May 01, 2012

북한이란곳은?-탈북자들의 두려움을 보면서

이지구상에는 마음만 먹으면, 국가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인간들이 세상을 살아갈수 있는 나라들이 대부분이다. 공산국가인 큐바나, 월남같은 나라들의 국민들도 이북에서 처럼 수용소에 끌려가는 두려움 때문에 할말을 못하고, 서로 감시하는 통제된 사회에서 살아가지는 않는다. 다만 문제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개인들 스스로 자제할 뿐이다.   그러면 이북의 국민들은 어떤가? 먹을것이 없어 굶어 죽은 숫자가 90년 중반이후 부터 지금까지 UN 통계에 따르면 3백만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이러한 개념은 그들 통치자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못먹이게 하므로써 그들이 통치하는데 유리한 지렛대 역활을 하고 있기 때문임이 세상에 밝혀진지 오래다.  이것도 모자라, 먹을것을 찾아 북-중 국경을 헤매는 탈북자들을, 북한Regime은 보는데로 마치 사냥꾼이 짐승을 사냥하듯, 겨냥하여 목숨을 끊어 버린다.  우리 서방세계의 생각으로는, 배가 고파 탈북하려고 하면, 오히려 모자란 식량을 줄일수 있어, 좋아라 할듯 한데.....

세상은 그래도 계속해서 바뀌고, 세계곳곳에서 발생하는 뉴스는 국경없이, 두려움 없이 날아다니는 전파의 덕택에 이북에도 깊숙히 파고 들어가, 북한주민들에게도 세상돌아가는 광경을, 소수이나마 TV를 통해 또는  Cell Phone을 통해 알려주고 있다는 소식은, 그런속에서도 언젠가는 북한주민들도 김일성, 김정일 그리고 김정은 체제로 세습되여온,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정체였음을 알고, 그들의 속임수에 지난 60여년 이상을 공포와 굶주림에 살아왔다는것을 알게 해주고, 그들이 입만 열면 새빨간 거짖으로  Brain wash 했다는것을 알게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서방세계, 특히 한반도의 남쪽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것 같다.

운이 좋아 무사히 탈북하여, 그때 부터 유랑생활을 하면서 남한땅에 정착한 탈북자들은 그래도 행운이 있는 분들이다.  문제는 이들중 상당수가, 색안경을 끼고 이상한 눈초리로 내려다 보는 덜떨어진 주위 사람들의 비난과 행동때문에 남한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다시 짐을 싸서 한반도를 떠나 다른 나라로 옮겨가고, 요즘은 그영향이 북미 대륙, 내가 살고 있는 캐나다에도 탈북자들의 삶이 현지 언론에 부정적으로 보도되는 참상을 보면서, 과연 한반도 북쪽의 땅을 지배하는 그들은 어떤 심보를 갖은 인간들일까?라고 마치 어렸을때 읽었던 갈리버 여행기를 상상하게 한다.

어제 아침에는 이곳 토론토의 여론 형성에 영향력 많은 '스타'신문에 전면 톱 기사로 이들 탈북민들의 실태를 심층 취재한 내용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우선 숫자적으로 400-900명이상이 토론토에 들어와 살고 있는데, 대부분 난민신청을 하고, 북한에 두고온 혈육이 피해를 당할까봐서 결과를 두려움과 외부에 알려지는것을 몹시도 꺼려 하는, 그래서 사진찍히는것도 거부하면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만, 이곳 캐나다 정부는 또 그들데로의 난민허용 기준이 있기에 때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다시 여권(Passport)을 받아온 한국으로 되돌려 보내지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이 보도 된 것이다.

목숨을 건 사투끝에 탈북하여 남한에 둥지를 튼, 가까이에 있는 그들을 안정되고 편안하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여건을 만들어 주지도 못하면서, 이북에 퍼주자는 주장을 펴는 종북좌파들과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어떤것일까? 

스타신문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본다.

3명의 탈북여성들은 이름 밝히기를 거부하고, 사진 찍히는것도 한사코 거부했다.  그러나 그들이 북한에 있을때, 먹을것이없어, 나무껍질을 벗겨 이것을 솥에 넣고 끓여서 나온 묽은 국물을 마시고 연명했던 쓰라린 경험과, 국경을 넘어서는 부로커들에게 팔려가 중국의 가정에 식모로 또는 한량들의 첩으로 팔려갔던 경험담은 해주었다.  그리고 굶주렸던 주민들중에서 먹을것을 훔치다 붙잡히면, 공개처형을 시킴으로서 공포심을 심어주었던 북한당국의 무자비함을 공개하기도 했다."우리들의 목숨을 파리목숨과 다를게 없었다"라고 참상을 설명한다.

북한의 잔혹함을 피하여 탈북한후 이곳 토론토에 난민으로 살고 있지만,  캐나다에서 편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 "민주주의 인민공화국"리라 불리고 있는 북한 당국에 알려지는 날에는 그들의 혈육이 죽음을 면치 못하는것을 잘 알기에, 두려움은 더해가고 있는것 같다.

이번주에 13살먹은 'Sol Han' 소년(?)이 살고있는 피난처에서 뛰쳐나가, GTA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이유가, 이들의 신분이 세상에 알려지는것을 자체를 두려워하는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부분이라고 해설해 주고 있다.  그소년에 대한 행방은 어쩌면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수도 있다하겠다.

오타와의 국회 청문회실은 안전한데도, 북한에서 정치범으로 몰려 옥고를 치렀던 한여인은 청문회동안 북한의 가족들이 해를 당하지 않을까?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나의 핏줄들이 지금 그곳의 감옥에서 형을 치르고 있어요. 그때문에 나는 내자신을 대중에게 밝힐수 없읍니다" 라고.

제18수용소에서 지난 28년간을 억울하게 감옥생활을 했던 한여인은 야구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썬글라스를 끼고, 그것도 모자라 카메라멘들을 전부 방에서 내보내 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박혁신이라고 밝혔지만, 사진 찍기를 거부한 남자는,2008년도에  목선을 타고 28시간만에 남한으로 넘어와, 지금은 난민신청을 하면서 토론토에서 삶의 둥지를 틀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무산될것 같다.   지난 18개월 동안, 캐나다에서 살기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지만 난민 자격이 주어지지 않아 곧 남한으로 추방당하게 될것 같다.  46세인 그는 남한에서 여권도 받고, 살곳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에 난민 자격이 거부되여, 이곳 캐나다에서 태어난 딸과 이북 출신의 아내와 함께 다시 남한으로 추방당하게 되여 있다.  캐나다에서는 한국정부가 받아들인 탈북자들에 대한 난민신청은 효력이 없다.    전직 군인이었던 박씨는 "죽을 맛입니다. 탈북후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집회에 다닌후 그의 신변안전을 위해 숨어 살아야 하는데 진절 머리가 났기 때문에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했던것이다" 라고 통역관을 통해 하소연 했다.
"나는 이곳에 살면서 캐네디언으로 살고 싶고, 다시 북한정권의 비인간적인 행위를 성토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라고 향변한다.

토론토시가 복합문화의 중심지라고는 하지만 2006년도 경부터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한 탈북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바가 없었다.  토론토에 몇명이나 거주하고 있는지는 알려진바 없다.  인권위원회의 추측과 교회봉사관계자들에 따르면 약 400-900여명 정도의 탈북자들이 있는것으로 보고 있다.

GTA에 약 55,000명이 살고 있는 한인사회는  북한 탈북자들에게는, 문화가 비슷하고 같은 언어를 쓰고 또 해외에서 같이 편하게 지낼수 있어, 매우 매력적인 곳으로 꼽혀지고 있다.

이민과난민관계 부처의 말에 의하면 캐나다정부는 지난해에만 385명의 탈북난민을 받아 들였고, 이는 2006년도에 26명만이 받아들였던것에 비하면 엄청난 증가라고 설명한다.  또 2011년에는 117명에게 난민신청이 허락되였고, 12명이 기각되고, 41명은 신청자체를 포기했거나 자진 취소 했었다.  이들중 몇건은 몇년씩 끌어온 경우도 있었다 한다.

요즘에는 난민신청자들중에는 인권유린과 출생지에 대한 설명에서 신빙성이 떨어져 혼선을 주기도 한다.  어떤이는 한국출신이면서 마치 탈북자인양 설명하면서 너무나 많은 박해를 받았었다고라고 우기는 경우로 밝혀지기도 했다고 한다.   앞서말한 박씨의 경우 자유를 찾아 뗏목을 저어 남한으로 탈출했다는 - 다른 탈북자들이 같은 해에 이와 비슷한 경우를 이용하여 탈북했것이 국제적으로 보도 됐었던 - 비슷한 설명을 '스타'신문은 객관적으로 그의 주장을 확인할수가 없었다.   박씨는 이북을 탈출하기위해 참게잡이 어부로 취업하여, 2달동안 바닷물살과 상태를 체험하기도 했었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그는 북한에 있는 그의 첫번째 아내와 두명의 아이들에게 탈북한다고 알리지 않은채 탈북했는데, 만약에 그러한 사실이 알려지면 가족들이 목숨을 부지할수 없기 때문이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중간에 부로커들을 통해 북한의 가족들과 접촉하여 했으나, 너무도 어렵고 힘들었었다고 하소연 하기도 했다.  결국 새로운 삶을 남한에서 시작하기로 하고 생각을 바꾸어 새장가를 들었다라고 설명했다.

한인사회에서 Chris Kim이라는분은 박씨외 다른 2가정과 지금은 친구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박씨가 10여년을 북한에서 군생활한것에 대해 잘알고 있다.
"그들과 접촉할때는 마치 북한 태생인것 처럼 접근해야 한다"라고 1975년도에 이곳에 이민와서, 현재 Thornhill에서 '대박'식당을 경영하고 있는 52세의 그는 박씨의 통역관으로 봉사하기도 한다.

한반도는 1953년에 두쪽으로 갈라졌다. 양측의 세력들이 38선을 다라 비무장 지대를 만들어 양쪽으로 양분한후 정전(armistice)에 서명했기 때문이다.  그이후 양측은 서로 적대관계에 있어 북쪽은 악랄한독재전재 국가로, 남쪽은 민주사회를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치적 긴장감은 머리를 섬뜩하게 할 정도로 첨예하며, 이는 북쪽의 군사행동으로 남쪽을 공격하겠다는 공갈에서 시작되곤 한다.

지금은 작고한  작가 '크리스토퍼 히친스'씨는 북한의 노동감옥 - 그곳에는 약 200,000명 이상의 죄수(?)들이 삶을 연명하는곳 - 은 지구상에서는 볼수 없는 비인간적인 그리고 굶주림에 시달니는 유일한 곳이다 라고 적고 있다.

목숨은 창조주로 받은 오직 하나인데, 운좋게 탈출하여 이곳 토론토 캐나다까지 밀려와서 좀더 낳은 생활을, 인간답게 해보겠다는 그들을, 우리 인간들이 무슨 권리로, 잣대(Ruler)를 들이대어 자격이 있다 없다를 가름한다는 말인가?  물론 옥석은 가려야 하겠지만, Ruler에서는 보이지 않는, 느낄수 없는 인간적인 뒷면을 염두에 두고 탈북자들이 새로운 삶의 둥지를 무사히 틀수 있도록 지혜를 짜야할 시기라고 본다.

http://www.thestar.com/news/article/1169769--north-korean-refugees-in-toronto-carry-burden-of-fear?bn=1



Wednesday, April 25, 2012

한반도 분단의 현장 판문점 관람































안내 뻐쓰를 타고 1번 국도를 달려 말로만 들어왔던, 민족 분단의 현장 "판문점" 주차장에서 새까만 군대 후배벌 되는 안내병으로 부터 설명을 들으면서 관람은 시작됐다.

우리 일행은 모두가 재향군인회 해외지부의 회장들로 이번 본국에서의 모임에 참석하고, 안보차원에서 이곳을 찾은 역전의 용사들이다.

원래 1번 국도는 목포에서 시작되여 북쪽의 신의주까지 연결된 도로라고 한다.  이 도로는 오래전 "정주영"현대구룹 창시자께서 소 1000마리를 직접 이끌고, 이곳을 통과하여 북쪽으로 넘어갔던 도로였었다라고 설명을 부연해 준다.

이에 앞서 판문점에 도착하기전 뻐스창으로 멀리 내려다본 두개의 국기 계양대가 커다란  Flag 를 펄럭이면서 서로 '기' 싸움을 하는것을 본기억이 떠오른다.
안내자의 설명에 따르면, 가까이 보이는 마을은 '대성동', 우리 조국쪽에서 관리하는 마을이고, 건너편쪽은 북쪽에서 관리하는 '기정동' 마을이라고 한다.  국기 계양대에 대한 설명에서 북쪽의 선전이 얼마나 허구에 차있는가를 금방 알수 있었다.  즉 기정동마을에 서 있는 국기계양대는 높이가 160미터, 거기에 매달린 flag는 무게가 230킬로그람, 조국 남쪽의 '대성동'마을에 있는 계양대는 높이가 100미터, Flag의 무게는 100킬로 그람 이라고 한다.  속빈 강정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세상사람들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북쪽의 참상인데, 이렇게 기를 쓰고, 남쪽보다 더 크고 높게 유지 하는 그목적이 어디에 있으며,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믿는다고 생각하는가?  계양대에 매달린 Flag는 비바람에 시달려 금방 망가지기 때문에  25일마다 바꾸어 달고 있으며, 그비용은 관할 구역인 파주군에서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평화의 집을 통해 말로만 들어왔던 38선이 지나는곳에 아담하게 서있는 6채의 가건물이 보이는곳에 안내 됐다.   지붕의 색갈이 3동은 Green이고, 다른 3동은 Silver였다.  3동은 조국대한민국의 재산이고 다른 3동은 북쪽의 재산이라고 했다.   Green색의 가건물에서 군장성급들의 고위회담이 열렸었다고 하는 곳에 안내되였다.  주의 사항이 참으로 많다.  북쪽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권총을 뽑아들고 사격을 하는것으로 오인 할수 있기 때문이란다.

건물중앙에 회담용 테이블이 있고, 그가운데로 마이크선이 놓여 있다. 그곳이 바로 38선이라고 했다.  전에는 선을 넘어, 같은 건물안이지만, 북쪽 관활에 갈수없었지만 지금은 이건물안에서는 마음데로 움직일수 있다고 했다.  대신에 북쪽이 관리하는 건물에는 남쪽에서 들어갈수 없는, 협약아닌 협약을 맺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건물안에는 우리측 헌병이 독수리의 눈으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신체도 건강하고 믿음직 스러워 보여, 마음이 놓이게 해준다.  전에는 미군이 경비를 섰으나, 업무이관으로 지금은 완전히 우리군이 경비를 맡고 있었다.  유엔군 장성과 북측의 장성이 이 테이블에 마주앉아 협상이 시작되면 서로간의 인사도 없이 각자 독설이 포함된 할말만 토해내고 헤여지곤 했었던, 그현장에 지금 내가 서있다. 

북측의 판문각은 조용하고, 두명의 경비병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한병사는 Binocular 를 통하여 남쪽을 경계하고, 한병사는 부동의 자세로 서 있다.  왜 저쪽은 조용한가?라고 묻자, 안내병의 설명은 의외로 간단했다. 우리측도 마찬가지이지만, 관람객이 있을시에만 북적거린다고 한다.

미류나무사건을 설명해 준다.  내가 이민오던 그해에 있었던 도끼만행의 참옥함을 떠오르게 한다.  당시에는 판문점 공동구역안에서는 북측경비병과 유엔군 경비병들이 뒤엉켜 경비를 서고 있어  남측구역에 북측의 초소가 여러개 있었고, 남측또한 유엔군 초소가 북측에도 있었다고 한다.  북측지역에 있던 유엔군 초소와 바로 남쪽에 있는 유엔군 초소 사이에 큰 미류나무가 자라고 있어 두초소간에 시야가 가려 경비에 어려움을 겪자, 유엔군측에서 사전에 북측에 통고를 하고, 유엔군측의 경비중대장 '보나파스' 대위의 지휘하에 유엔측 경비병들이 나무를 자르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북측 경비병들이 나타나 항의를 하면서 중대장 보나파스와 Barret 중위를 도끼로 찍어 죽인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고 도망간 사건으로 당시에 한반도에 긴장을 초고조로 조성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후에 초소를 비워두고, 지금은 경비 카메리로 대체하여 경비를 서고 있다고 했다.   지금 계산해보니 벌써 37년이 흘렀다. 무상한 세월.....

지금은 공동구역 경비를 유엔군측에서 한국군에 2004년도 부터 이관하여 JSA구역은 한국군이 경비를 맡고 있었다.  어느면에서는 더 든든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전에는 양측 경비병들이 같이 경비를 했었다고 한다.  북측과 남측의 최가까운 경비초소는 약 25미터로 뻐스 두대의 길이만큼 간격을 두고 서로 응시하고 있다고 했다.

북측의 '기정동'마을은 2004년에 개성공단이 가동하기전까지는 선전용으로만 이용되여 주민들의 거주가 없었으나, 지금은 주민들이 살고 있는것으로 파악되고 있다한다.  아마도 남측의 '대성동'마을이 항상 주민들이 평화롭게 살면서 농사를 짖는 모습을 보고 태도를 바꾸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멀리서 보아도 겉모습 부터가 경직되여 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남측의 '대성동' 마을은 겉으로 보아도 모든게 풍부해 보였다.  주민들은 우선 정부에 세금을 면제받고 있다한다.  마을 주민들은 6/25 이전부터 살았던 주민들이 그대로 대를 이어 살고 있으며, 이곳에서 새로이 입주하여 살수 있는 자격은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결혼하게되는 경우에만 배우자가 외부에서 들어와 거주할수 있으며, 이곳 주민이라 해도 8개월 동안 대성동마을을 떠나 살게되면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고 했다.  단 외부에 나가 공부하는 학생들의 경우는 예외라고 한다.
주로 농사를 짖고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모두가 부자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각가정은 논 3만 평방미터, 밭 3천평이상을 소유하고 있어 년간 수익이 가정당 약 7천 내지 1억 5천만원 정도되며, 생산품은 모두 관할농협을 통해 팔린다고 했다.

판문점 휴계소 바로 오른쪽에는 북한이 파놓은 지하땅굴을 관람객들에게 관람시키고 있었다.
지하 깊숙히 북측에서 땅굴을 남쪽을 향해 파놓은 비밀 통로가 별견 됐을때 남한 전체가 떠들썩 했었지만, 지금은 관람객들에게 안보교육 훈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것 같아 든든했다.  북한 병사들이 고난에 시달리면서 굴착작업을 하는 Mockery가 보는 마음을 아프게 했다.  설명에 의하면 북측은 유사시 이통로를 이용하여 삼십분만에 일개 사단병력을 남파할수 있다는 것이다.  땅굴이 발견되면서 그들의 꿈이 얼마나 허망한짖인가를 전세계가 비웃고 있는가를 그들은 알고 있을까?
지하 땅굴이 한개가 아니고 발견된것만 여러개라고 하니.....

북쪽의 판문각은 오히려 남측의 통일의 집보다 더 반듯하게 지어놓았다.  여기서도 기싸움이 이어지고 있음을 본다.  그렇게 해서 뭘 얻을것인가?  바로 그뒤에는 굶어 죽어가는 주민들이 목에 넘길 풀뿌리를 찾아 민둥산을 헤메고 있는데.... 언제 이러한 비극이 끝날까? 

안내 경비병은 육군 신참내기 였지만, 아주 질서정연하게 설명을 해주어 이해도 쉬었지만,  자신있게 경비에 임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들 때문에 후방에서 국민들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감사해 하고 있을까?

도라산역사에는 몇년전 미국 대통령 Junior Bush께서 판문점을 방문하고 이곳을 방문하여 기념으로 짧막한 Rail조각에 서명한것을 진열해 놓은것을 보았다.  또 며칠전에는 서울에서 핵안보에 관한 세계정상들이 모여 회담을 한후, 오바마 대통령이 이곳 판문점을 방문했다는 설명도 있었다.  세계최강의 국가 원수들이 이곳을 가끔씩 방문했다는것은 그만큼 이곳이 지구상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그래서 신경이 쓰이는 곳이라는점을 알수 있었다.  도라산 역사안에는International Airport에서 custom clearance를하기위해 검색대를 지나는것 처럼 설비를 해놓고, 남과북이 합의 하여 남북간에 선로를 연결하여 처음 몇년 동안은  이곳으로 부터 개성공단까지 열차가 상징적으로 하루에 한두번 운행될때, 이곳 검색대를 이용했었다는 설명도 있었다.

지난해 중국, 홍콩, 마카오 그리고 타이완을 여행하면서 느끼고 부러워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들 4개 국가는 정치적으로는 다른 체제를 유지하고 있어 껄끄러운 관계에 있기도 하지만, 일반 국민들이 이들 나라를 여행하는데는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마음데로 드나들고 있는 현장을 보았을때의 기분을, 지금 이곳에서 되뇌이면서, 특히나 타이완과 중국은 서로 적대관계이면서 정치적으로 서로 비난하고 있었지만, 국민들은 합당한 여권을 소지 하면 마음데로 왕래를 하고 있음이 무척 부럽게 또 기억에서 떠 오른다. 감사.

Tuesday, April 17, 2012

친지부부들과 함께 남해안 일대 벗꽃 여행





































홍천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친지부부는 새벽같이 짐을 꾸려 서울에서 준비하고 있는 우리 부부, 숙자부부 그리고 또 다른 두친지들한테 달려왔다. 지난해에도 그랬드시 이번에도 친지분들은 우리를 위하여 남해안 섬진강과 지리산 그리고 하동일대를 둘러 보러,일행 모두가 홍천친구의 차에 몸을 싣고 복잡한 서울거리를 빠져 나가기위해 한남 대교를 거쳐 경부고속도로위를 달렸다. 이른 아침의 상쾌한 공기맛을 느낄것 같다.

지리산은 여전히 우리를 반긴다. 뱀사골, 피아골, 노고단, 그리고 천혜사입구를 거쳐 지리산횡단을 하면서 펼쳐지는 파노라마는 우리일행을 유혹하고도 남는다.

피아골을 지나 조그만 이름모를 마을에서 '고로쇠'물을 사용하여 간장을 담그는 광경도 목격했다. 고로쇠물은 지난 2월초부터 추출하기 시작하여 아직도 채취하고 있었다. 고로쇠물은 캐나다에서 Maple Syrup을 만들기위해 채취하는 Sap(수액)과 같은 것 같으나, 열심히 간장독에 고로쇠물을 퍼붓는 주민의 말로는 단풍나무와는 다른 나무에서 채취하는것이라고 설명도 해준다. 고로쇠물의 맛은 Sap과 비슷했다. 감칠맛나는 간장맛을 볼수 없음이 아쉽기만 하다.


쌍매화 마을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북적인다. 길가에서는 갓 만들어온 쑥떡을 콩고물에 묻혀서 구경하고 있는 관광객들에게 Packing 하여 팔기도 한다. 그옆에는 길가에 좌판을 벌려놓고 산에서 채취해온 봄나물들을 팔고있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면서, 옛날 고향생각을 하게 했다. 쌍매화 농원의 주인은 한국에서는 유명한 인사가 되여 TV에 많이 출연하여 이곳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것 같았다.

인터넷을 통하여 '오늘만 같아라'연속극에서 거만하고 깍쟁이 엄마로 출연하고 있는 Talent 견미리씨가 이곳에서 촬영을 마치고 언덕을 내려오면서 우리 일행과 마주쳤다. 뜻밖에 배우를 보다니.... 화면에서는 몸집도 큰 여인으로 보였었는데, 실제로 옆에서 보니 자그만한 체구에 중년의 여인으로 빈틈이 없어 보이는 암팡진 여인으로 보였다. 같이 사진 한컷하자고 제안 했더니, 웃으면서 같이 사진촬영을 해준다. 캐나다에서 온 교포인데 '오늘만 같아라'연속극을 잘 보고 있었다라고 얘기 했더니 화사하게웃는다. 역시 배우는 아무나 못하게 되는가 보다. 그렇게 깍쟁이 엄마가 '복희 누나'에서는 아주 시골스런, 시어머니를 정성으로 모시고 사는 착한,아낙네 역활을 하는것을 보면서.....

섬진강변을 따라, 활짝 만개한 Cherry blossom은 포근한 겨울 날씨에 사뿐히 내리는 함박눈이 하늘에서 내리는것 같은 착각이 들정도로 나무에서 떨어지면서 흩날린다. 분명 봄이 오고 있다는 신호인것 같다. 이상하게도 남쪽지방 어디에서나 길가에는 벗꽃나무들로 꽉 들어서 있다. 그옛날 내가 고국에서 살때는 벗꽃나무는 일본사람들의 꽃이라 해서 진해 군항제에서나 겨우보게 되는 정도로 희귀 했었는데.....

변산반도를 거쳐 새만금 방파제위로 뚤린 군산까지의 30킬로가 넘는 방파제위를 달리면서, 인간의 힘은 그능력이 무한정임을 느끼게 하고도 남는것을 깊이 느꼈다. 몇년전 이곳을 방문했을때는 아직 일부구간이 완성되지 못하여 중간쯤 달리다 다시 부안쪽으로 되돌아왔던 기억도 난다. 자연환경 훼손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매일 데모해대는 환경론자(?)들 때문에, 국책사업이 중단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그때는 난무 했었다.
방파제위를 달리지만 그끝이 나오지 않는것 같은 착각이 든다. 옛날에는 부안에서 군산을 갈려면 자동차를 타고도 하루가 걸렸었지만, 이제는 불과 20여분안에 해결된다.

논개의 사당도 구경했다. 강가의 누각에서 술향연이 벌어지고 있을때, 기생 논개는 일본적장을 껴안고 수천길 낭떨어지 강물속으로 떨어져 최후를 마치고 적장을 죽인 애국자였던것은 알고는 있었지만, 새로운 사실은 그의 성(Family name)이'주'씨였고, 그는 원래 기생이 아니었었다고 한다. 나라를 일본야만인들에게 빼앗긴것을 안타까이 여겨, 당시 진주군수였던 남편의 양해를 얻어 기생으로 변장하여 적장과 술좌석을 벌이다가 장열하하게 최후를 마쳤다는 역사속의 얘기는 나로서는 처음듣는 애국자의 모습을 보는것 같았다.

일행 모두는 흘러가는 시간들을 아쉬워 하는것 같았다. 이제 헤여지면 언제 다시 또 재회를 할수 있을것인가(?)에 대한 애틋한 아련함으로, 즐거워하는 한편으로는 어두움이 되살아나는것을 본다. 몇시간 후면 우리는 짐을 꾸려 다시 수만리 멀리 떨어져 있는 토론토로 되돌아 가야만 한다. 왜 떨어져 살아야 하는가?

차창밖으로 멀리 보이는 전주 근교의 마이산이 여러 형태의 모습으로 시야에 들어온다. 다시 또찾게 될것이라는 기약이없는 우리 일행의 이번 여행길을 저 마이산은 마치 훤히 꿰뚫고 있는것 같이 보인다. 두귀를 쭝끗하게 세우고 이상한 소리를 들을려고 하는 한마리의 말이 움직일려고 하는것 같은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