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ly 28, 2020

대한민국정부는 북에 붙잡힌 6.25전쟁 국군포로,5만명이상을 버렸다. 탈북한 후손들 폭로. 이럴수가...


며칠전 통일부장관 청문회를 통과한 이인영, 이보다 앞서 지난해 법무장관 청문회에서 "나는 사회주의자다"라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던 좃꾹이..... 그리고 얼마전 Sexual Harrasment죄가 세상에 폭로되자 비겁하게 북악산으로 도망가서 자살(?)한것으로 경찰이발표했던 색마 박원순의 아들들, 그리고 수많은 권력가들의 아들들이 헌법에 명시된 "신성한 국방의무"를 교묘히 역이용하여, 군면제 판정을 받고,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국방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그시간에 학교다니던가 아니면 연애질 하는데 정신없이 시간들을 보냈었다.

그이유를 전에도 어렴푸시 알고는 있었지만, 오늘 BBC의 뉴스를 보면서 확실히 알았다.
6.25 휴전이 시작된지 7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문재인 사회주의 정부를 포함하여 역대정부에서 북한에 붙잡혀있었던 국군포로들을 한국으로 모셔오기위한 노력을 한 흔적을 찾을수가 없었다. 자그만치 50,000명 이상이지만, 그동안 Aoji탄광에서 중노동으로 많이 사망했고,  늙어서 세상을 뜬 숫자가 많다는것도 오늘 알았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을때는, 오히려 인도주의적 원조, 햇볕정책으로, 평화협정이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의 세금을 국민 모르게 북에 퍼다준 금액이 천문학적 숫자라는것을 모르는 국민은 없었다.
남북정상만남, 고위급 협상,실무자협상, 동계올림픽 핑계로 북한 사절단이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남한을 방문하여 휴전선부터 부산지역까지 관광이라는 미명하에 전국을 휩쓸고 다니는 쑈는 많았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Meeting에서 국군포로 송환문제가 의제로 채택되여 협상을 했었다는 얘기는 없었고, 오직 북한에 퍼줄 방법을, UN 안보리회의에서 통과된 "북한 경제봉쇄정책"의 허점을 교묘히 피해서, 찾기에만 혈안이었었다.
금년에 처음으로 6.25전쟁 추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여주기위해 모셔온 유해를 싣고온 비행기에 며칠동안 대기시켰었다는 비인간적인 행동을 관계당국이 했었다고 한다. 물론 6.25를 표시하는 노래도 없었다고한다.

위에서 언급한 이인영, 좃꾹이를 포함한 권력가들은, 6.25전쟁에서 이북에 붙잡혀 평생을 고생하고있는 국군포로들을 남한으로 모셔오기위한 대한민국 정부의 노력이 전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정부의 무관심을 잘알고있던 자들이었기에, 아들들이 군대에 끌려가서 포로가 될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그리고 혹시라도 근무중 예상치 않은 사고로 개죽음을 당할것이 염려되여, 쓸수있는 모든 권력을 다 동원하여 군면제를 시켰었다는 점을 오늘 확실히 알게 되면서, 역설적이지만, 이권력가들이 참 현명하게 세상살아가고 있었음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는 충동까지 일었었다.  이번에 색마 박원순의 장례식에 참석하기위해 귀국한 아들 박주신에 대한, 장례식 이후의 소식은 깜깜하기만 하다.

미국을 포함한 6.25전쟁 참전 16개 회원국에서는 북에 붙잡혀 있던 자국의 전쟁영웅들을 모셔오기위해 정부가 주동이 되여, 필요시 많은 댓가를 치르면서 유해송환을 위해 노력을 했었고, 미국은 현재도 돌아오지 못한 미군포로들을 모셔오기위해 온갖노력을 계속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BBC 기자, Subin Kim의 르포 기사를 간추려 봤다. 6.25의 참상을 심층취재한 BBC에 개인적으로 감사한다.

북한에 붙잡혀 포로생활을 하던 아버지가 총살당하는 순간을 딸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만 기억에 떠올리기를 죽기보다 더 싫어 하고 있다. 아버지와 오빠를 끌고가 공개총살시키기위해 3방의 총성이 울리고 아버지와 오빠는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그순간으로 부터 30년이상이 흘렀다. 그때가 30살때였었다.

총살형을 당하기전에 어떤 일이 있었던가를 그녀는 생생히 기억하고있다. 북한 보안원들이 그녀를 Aoji탄광촌의 조그만 마을에 있는 인민경기장으로 끌고 갔었다. 나무다리밑에 앉아, 조금후에 어떤일이 벌어질지를 알지 못한채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었다.  많은 주민들이 모여들었고, 곧이어 추럭한대가 나타나 두사람이 포승줄에 묶인채 추럭에서 끌려 내려왔는데, 아뿔사 그들은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였었다.

"아버지와 오빠는 꽁꽁묶였으며, 민족반역자로 불러대면서, 간첩반역자다. 나는 이광경을 보면서 놀라 괴성을 질렀었고 그놀라움으로 나의 턱이 빠졌었는데 이웃집 주민이 나를 집으로 데리고와서 비툴어진 턱을 교정시켜줬었다"라고 그녀는 BBC에 당시의 순간을 설명하면서 절망적이었던 그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로 부터 잊혀진 국군포로들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났을때, Lee의 아버지는 북한에 전쟁포로로 잡힌 50,000 여명중의 한명이었었다. 전쟁포로들은 북한의 필요에 따라 재편성되여 국가재건에 또는 투입되였거나 또는 평생을 탄광에서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었다.

1953년 7월 27일 남북한간에 휴전이 성립됐을때, 북한에 붙잡혀있었던 한국군전쟁 포로들은 곧 포교교환으로 고향에 돌아갈수 있을것으로 기대가 컸었다.  그러나 휴전이 성립되기 약 한달전에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25,000명 이상의 북한군 포로들을, 휴전을 사보타지하는 뜻에서, 석방해 버린  이대통령은 UN군이 그를 도와서 한반도를 한국정부주도하에 통일시킬수있도록 도와주기를 원했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북한에 잡혀 있었던 한국군 포로들이 남한으로 되돌아오는 조건을 더 어렵게 만들었었다고 믿었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형식적으로 몇명의 국군포로들만을 남한으로 되돌려 보냈을 뿐이었다. 한국은 북한에 잡혀있던 국군포로들을 거의 잊은채 살아가고 있었고, 그후 3명의 한국대통령들이 북한측 지도자들과 만났었으나 북한에 붙잡혀있던 포로들에 대한 협의는 한번도 없었다.

북한에서 Lee의 가족들은 불순분자로 찍혔었다.  Lee의 아버지는 남한태생으로, 한국전당시 UN군과 함께 북괴군을 몰아내기위해 전쟁에 참여했었다는 죄목으로 불순분자로 분류된것이다.  가족들의 사회적 지위는 불순분자로 찍혀 허리가 뿌러지는 중노동에 투입됐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는 탄광사고가 밥먹듯이 수시로 발생하는 탄광에서 광부로 중노동을 해야 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조국이 통일됐을때 고향으로 되돌아갈 꿈을 꾸면서 중노동을 이겨냈었다. 일이 끝나고 집에 와서는 그의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과거 얘기들을 해주곤 하셨었다. 그러면서 그녀를 포함한 새끼들에게 기회가 되면 남쪽으로 도망가라는 신호를 보내시곤 했었었다.  "남한에 가면 나의 전쟁공포를 포상하는 메달이 있을 것이고, 너희들은 영웅의 자손으로 대접을 받게 될것이다"라고 설명하면서.

그러나 그녀의 오빠가 하루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그녀의 아버지가 해줬던 말을 내뱉고 말았는데, 친구들중의 한명이 그내용을 밀고 한것이다. 그로 부터 몇개월후 Lee의 아버지와 오빠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2004년도에 딸 Lee씨는 남한으로 탈출하기로 준비하고 남한에 안착한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생각이 실수였음을 알게된것이다. 아버지의 조국 대한민국은 그에게 영웅대접을 해주지 않았고, 전쟁영웅들을 한국으로 모셔올 생각을 정책적으로 전연 생각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에 붙잡혀 있었던 한국군포로들은 괴로운 삶속에서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한국군 포로들은 북한의 적으로, 꼭두각시 남한군으로 싸웠다는 이유로 북한사회에서 가장 "성분(songbun)"이 낯은 개돼지로 취급되여 학대를 받아왔던 것이다.  그러한 사회적 위치는 그대로 자손들에게 까지 이어져 Lee의 가족들은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와 직업을 선택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었다.

'최'씨는 아주 특출난 학생이었었다. 그러나 대학을 가겠다는 그녀의 꿈은 그녀의 아버지 출신성분때문에 좌절되고만다. "너는 반동분자야. 너는 네조국으로 꺼져라. 알았어?"라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소리에 반항하지 않고, 조국(남한)은 전쟁포로들을 데려오기에는 너무 가난해서다라고 체념하곤 했었는데, 8년전 딸 '최'씨는 그녀의 가족을 버리고 남한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남기를 원했었고, 나역시 내평생을 통해 사랑하고 의지했었떤 가족들과 함께 하기를 원했었지만 그러나 그렇게만 살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아들, 딸들 그리고 내남편을 버렸던 것이다"

딸'최'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한국에서 서유상에 그녀는 아버지가 없다 왜냐면 전쟁관련 서유에는 그녀의 아버지는 전쟁중 사망한것으로 처리되여 있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의 유골 모셔오는것은

손명화씨는 40여년전에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가 유언으로 남긴말을 지금도 뚜렷히 기억하고 있다.  "만약에 네가 남한으로 가게 된다면, 내유골을 꼭 갖고가서 내고향선영에 묻어다오"라는.

딸 '손'씨의 아버지는, 부산으로 부터 약 18키로 떨어져있는 김해 출신이었다. 포로의 신세로 아버지는 탄광에서 또 벌목공으로 수십년간 중노동에 시달렸으며, 결국 암으로 돌아가시기 10여일전에 가족들품으로 되돌려 보내졌었다.  아버지는 딸'손'씨에게 유언하기를 "이곳에서 나의 부모님을 보지도 못하고 죽는것은 너무도 슬프다. 나를 고향선영에 묻히는게 유일한 꿈이다"라고.

딸'손'씨는 2005년도에 탈북했다. 그후로 8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아버지의 유골을 북한으로 모셔 고향땅에 모셔왔었다. 그녀는 북한의 가족들에게 중국출신의 브로커를 통해 아버지의 유품을 챙겨 주도록 요청했었고, 가방 3개에 필요했는데, 그때 손의 친구 두명이 동행 했었지만, 아버지의 유골만은 딸 손씨가 운반해 왔었다.

딸'손'씨는 아버지가 남한군인으로 전쟁에 참가하여 싸우시다가 되돌아오지 못한 전쟁포로였음을 인정받기위해 1년 이상을 당국과 투쟁해 왔었고, 그결과로 2015년에야 국립묘지에 유골을 안장할수 있었다.

"지금생각해보면, 이제야 딸노릇을 한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그곳에서 거두지 못한게 너무도 가슴을 아프게 한다"라고 한탄이다.

딸'손'씨는 그후에 아버지의 유해를 모셔오는데 너무도 많은 대가를 치른것을 발견했는데, 바로 이일 때문에 북의 가족들이 정치적 위험인물들로 분료되여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는것이었다.

딸'손'씨는 지금은 "한국전쟁포로가족협회"에 가입하여 회장으로 봉사하고있다. 이협회의 목적은 한국전쟁이 종료된후 아직까지도 조국 대한민국품에 되돌아오지 못한, 110명이 넘는 한국전쟁희생자 가족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싸우는 모임이다.

DNA테스트를 거쳐 '손'씨는 그녀가 모셔온 아버지의 딸로 인정을 받을수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것은 한국정부로 부터 그동안 지급받지못한 병사로서의 월급을 신청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비록 남한으로 가족들이 탈출한다해도, 전쟁포로의 아이들은 공식적으로 그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되돌아오지 못한 많은 북한억류 포로들은 사망한것으로 간주되고 있거나 아니면 전쟁중 군제대를 했거나 또는 실종처리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운좋게 남한으로 탈출한, 전쟁포로 몇명만이 국가로 부터 전쟁수당을 수령할수 있었을뿐, 전쟁중에 북한군에 잡혀 전사했던 분들은 보상혜택을 받을수 없는게 한국의 현실이다.

지난 1월에, '손'씨와 그녀의 변호사는 북한땅에서 죽은 전쟁포로 가족들에 대한 국가의 대우가 너무나 불공평하다는점을 들어, 정부는 되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분들이 조국의 품에 안기도록 해야한다는 이유를 들어서 헌법재판소에 그소원을 냈었다.

"우리는 전쟁포로의 아이들로 태어났다는 신분때문에 너무도 괴롭고 슬프다. 더욱더 우리를 슬프게 하는것은 전쟁후 후손들이 어렵게 한국으로 돌아왔는데도 그사실이 전부 무시되고 있다는점에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라고 딸 손씨는 한탄이다.

"우리 자식들은 아버지들의 영웅적 전쟁행동이 조국 대한민구긍로 부터 대접을 받지 못하고, 아버지들이 전쟁포로로 북한에 붙잡혀 지옥같은 삶을 살았다는점과 그분들의 자손들이 완전히 국가로 부터 무시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재인 한국정부에 부탁한다. 제발 지금이라도 북한과 협상한다는 주접떨지말고, 앞으로 만나게 될때, 미송환 포도들의 상황과 이미 돌아가신불들의 유해만이라도 모셔올수 있도록, 세계경제 10대 대국이라고 폼만 잡지말고, 그 경제규모에 맞는 애국영웅들에 대한 대접을 하기를 바란다.  허긴 6.25전쟁영울 백선엽 장군의 유해마져도 동작동 현충원에 모셔서는 안된다고 떠들어 대는 문재인 패거리들에 이런 주문을 하는것이 어리석은 짖인지도 모르겠다. 내조국 대한민국이여..... 대한민국이여.... 국민들도 잘사는 조국이 어떻게 만들어져 여기까지 왔었는가를 이번 기회에 한번만이라도 깊이 생각해 보시길....


The children of Korean War prisoners who never came home




When the Korean War ended in 1953, about 50,000 South Korean prisoners of war were kept in the North. Many were forced into labouring jobs against their will. Some were killed. Now their children are fighting for recognition, writes BBC Korea's Subin Kim.

No matter how hard she tries, Lee cannot recall what happened after three shots were fired by the executioners who killed her father and brother. It was three decades ago, when Lee was in her thirties.

She does remember what happened just before. Security officers had dragged her to a stadium in a remote village in North Korea called Aoji. She was forced to sit under a wooden bridge, waiting for something - she knew not what - to happen.

A crowd swelled and a truck pulled up, and two people were escorted off the truck. It was her father and brother.

"They tied them to stakes, calling them traitors of the nation, spies and reactionaries," Lee told the BBC in an interview recently. That's the moment her memory falters. "I think I was screaming," she said. "My jaw was dislocated. A neighbour took me home to fix my jaw."

The forgotten prisoners

Lee's father was one of about 50,000 former prisoners of war who were kept in the North at the end of the Korean war. The former prisoners were regrouped against their will into North Korean army units, and forced to work on reconstruction projects or in mining for the rest of their lives.

When the armistice was signed, on 27 July 1953, the South Korean soldiers had assumed there would soon be a prisoner exchange and they would be sent home. But a month before the armistice, South Korean President Syngman Rhee unilaterally freed more than 25,000 North Korean prisoners, in order to sabotage the ceasefire. He wanted UN forces to help him reunite the country under South Korea. Many believe the move made the repatriation of South Korean prisoners more difficult.

The North only sent back a small fraction of the prisoners it had taken.

Soon South Korea largely forgot the men. In years since, three South Korean presidents have met North Korean leaders, but the prisoners of war were never on the agenda.

In the North, the Lee family were viewed as bad stock. Lee's father was born in the South and had fought alongside United Nations forces in the Korean War, against the North - a black mark against him. The family's low social status relegated them to backbreaking jobs and dim prospects. Both Lee's father and brother worked at coal mines, where fatal accidents were a regular occurrence.

Lee's father harboured a dream of going home one day, when the country was reunited again. After work, he would tell his children stories of his youth. At times, he would prod his children to escape to the South. "There will be a medal for me, and you will be treated as children of a hero," he would say.

But Lee's brother, while drinking with friends one day, let slip the things their father would say. One of the friends reported it to the authorities. In a matter of months, Lee's father and brother were dead.

In 2004, Lee managed to defect to South Korea. It was then that she realised her father's error - his country did not see him as a hero. Little had been done to help the old prisoners of war get home.

The soldiers kept back in North Korea suffered. They were viewed as enemies of the state, men who had fought in the "puppet army", and assigned to the lowest rank of North Korean social caste of "songbun".

Such status was hereditary, so their children were not allowed to receive higher education or the freedom to choose their occupation.

Choi was a star student, but her dream of going to a university was impossible because of her father's status. She once yelled at her father, "You reactionary scum! Why don't you go back to your country?"

Her father didn't yell back, but said to her dejectedly that their country was too weak to repatriate them. Eight years ago, Choi abandoned her family and fled to the South.

"My father wanted to come here," she said. "I wanted to come to the place the person I loved the most in my whole life wanted to come but never could. That's why I abandoned my son, my daughter and my husband."

Choi's father is now dead. And in South Korea, on paper, she has no father, because official documents say he died in action during the war.

Bringing my father’s bones home

Son Myeong-hwa still clearly remembers her father's last words on his deathbed nearly 40 years ago. "If you get to go to the South, you've got to carry my bones with you and bury me where I was born."

Son's father was a South Korean soldier who was from Gimhae, some 18km (11 miles) away from Busan. In the North he was forced to work in coal mines and a logging factory for decades and only allowed to go home 10 days before he died of cancer.

He told Son: "It is so bitter to die here without ever seeing my parents again. Wouldn't it be good to be buried there?"

Son defected in 2005. But it took her eight years to get her father's remains out of North Korea. She asked her siblings to dig up her father's remains and bring them to a broker in China. Three suitcases were needed. Two of Son's friends came along, but it was Son who carried her father's skull.

Son protested for more than a year for the recognition of her father's status as an unrepatriated soldier, and eventually she was able to bury his remains at the national cemetery in 2015.

"I thought that I finally fulfilled my duty as a daughter," she said. "But it breaks my heart when I think of him having had his last breath there."

Son discovered later that the family paid a terrible price for the burial. Her siblings in the North were sent to political prisons.

Son now heads the Korean War POW Family Association, a group that fights for better treatment of roughly 110 families of South Korean soldiers who never came home.

Through a DNA test, Son was able to prove that she was her father's daughter - which was essential for her to file for his unpaid wages from South Korea. Even if they manage to escape to the South, the children of prisoners of war are not officially recognised, and many of the unrepatriated prisoners were considered dead, or discharged during the war, or simply missing.

Only a handful of prisoners of war who managed to escape to the South ever received unpaid wages, and those who died in captivity in the North were not eligible for any compensation.

In January, Son and her lawyers filed a constitutional court case, arguing that the families of the prisoners who died in the North had been treated unfairly and that the government had done nothing to repatriate the prisoners, making it responsible for the prisoners who never came back.

"We were so sad to be born the children of the prisoners, and it was even more painful to be ignored even after coming to South Korea," Son said.

"If we can't recover our fathers' honour, the horrendous lives of the prisoners of the war and their children will be all forgotten."

Some names were changed to protect contributors' safety. Illustrations by Davies Sur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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