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30, 2016

육영수 소통법-가까이서 본 인간 육영수 - 이제는 하고싶어도 할수없는 나라꼴이 한심하다.

돌아가신 박통시대가 너무나 그립다.  후손들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 보겠다고 불철주야 대통령을 중심으로 온나라가 오직 잘살아 보겠다는 일념하나로 뛰었던 그시대에 미력하나마 동참했었다는데 자부심을 느끼고 살아오면서, 잘사는 나라, 세계일등국가로 발전하기를 그렇게게도 바랬었는데....

요즘의 고국 뉴스를 보면, 그렇게도 당당하게 세계일등으로 달리던 조선업이 하루아침에 곤두박질해서, 조선강국의 상징도시였던 울산이 지금 태풍전야를 맞이한 불안초조속에서, 구조조정을 앞두고, 정부로 부터 수혈을 기다리고 있다는 슬픈 소식이다.  불과 1년전만 해도 BBC에서는 조선강국한국을 대서 특필 했었다.  정치꾼들과 노조들의 합작품 결과다.

http://www.bbc.com/news/world-asia-32811866


국민들은 돌아가신 박통과 육여사때처럼, 더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 달라는 뜻으로 따님인  박근혜 대통령을 힘겹게 선택하여 나라운영을 맡겼었다.  그사이 세상이 많이 변하여, 여의도 정치꾼들이 딴지를 걸면 대통령이라도 식물인간을 만들어 버리는 괴상한 논리를 펴서, 지난 3년반동안을 대통령과 정부각료들의 손발을 꽁꽁묵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산물이 바로 일차로 조선강국을 폐업위기직전의 불실기업으로 만들고,  희망도 없어 보인다.

일자리 창출을 위한 입법안을 여의도 정치꾼들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보내고, 하루같이 법안통과를 기다리면서 3년이상을 애걸하다시피 했으나, 몇개월전에는 더이상은 기다릴수 없어 어렵게 직권상정할려는 것을 저지하기위해 필리버스터까지 동원하여 깽판을 쳤었다.

설상가상으로 총선시기를 앞두고 정치판은 국회의원 출마를 원하는 후보자들을 상대로 사상유례없는 엉터리 공천장사를 하면서 박대통령과 정부의 발목을 더 꽉 붙잡고 말았다.  이제는 정말로 시기적으로 아무것도 할수없는 식물 대통령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는데,  정치꾼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모든책임을 대통령에게 떠넘기고,  국가경제를 꽉 붙잡고 희희락락 거리고 있는 조국을 보는게 너무도 답답하다.

꼬리가 9개 달린 늙은 불여우는 시류에 따라 쓸개에 붙었다 간에 붙었다 하는 쓰레기 정치꾼의 정체를 못버리고, 이번에는 3년전에는 원수로 여기던 정당의 수장으로 들어가 주군으로 모시던 박대통령을 정면에서 들이박고, 또 계집애같은 모습의 아마추어수준급인 또 다른 정치꾼은 정치개혁을 한답시고 떠들어 대더니 결국 지역당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를 중심으로 한 패거리들을 끌어들여, 총선이 끝난지금 마치 대통령이라도 된듯이 기고만장이다.  이광경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난파직전에 처해있는 경제대책에 대해서는 강건너 등불식으로 내팽개치고 대통령과 정부의 목조이기에만 전력투구하고 있는 그들이 과연 국민의  대표일까?

아직도 거의 2년이라는 대통령의 임기가 남아있는데도,  흑심과 욕심으로 가득차있는 몇명의 정치꾼들은 마치 대통령이 된것처럼 기고만장한 망국적 행위를 보면서, 혼자 독백을 해본다.
"정의를 지켜주시는 신이 계신다면, 먼저 이들을 쓸어 버리십시요. 그리고 경제와 안보위기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는 조국을 지켜주시옵소서" 라고.

돌아가신 박통과 육여사의 발바취를 다시 읽어봤다.  아래에 써 내려간 내용들을....


육영수 여사 지시로 쌀가마 들고 철거민촌 찾아갔더니…

육영수(陸英修·1925~1974) 여사.
1974년 8월 15일 현직 대통령 부인으로 북한의 흉탄에 49세의 짧은 생애를 마친 지 올해로 
만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많은 이들은 아직도 그 분의 고결한 생애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젊은이들로부터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육 여사에 대한 비판적인 글이나 말을 
어디에서도 보고 들은 일이 없다. 육 여사는 진정 어떤 분이었나?" 나는 내가 겪은 사소한 일들을 
통해 인간 육영수의 편린을 소개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려고 한다. 서투른 솜씨로나마 나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추억한다./필자


아카시아 꽃과 할머니

북한에서 만난 북녘 동포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한결같이 쇠고깃국에 흰 쌀밥 한번 
실컷 먹어보는 것이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고 한다. 그들이라고 왜 고대광실에 천석꾼으로 살고 
싶은 꿈이 없겠는가. 남쪽에 살고 있는 우리도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온 가족이 쌀밥을 배불리 
먹어보는 게 소원인 때도 있었다. 인구는 많고 식량은 절대량이 부족해서 심지어 전국적으로 
밤나무 같은 유실수 재배를 권장해 그 열매로 주린 배를 채워보려고 서글픈 안간힘을 썼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득한 지난 날의 전설같은 이야기이다.

70년대 초 아카시아 꽃이 산과 들에 흐드러지게 핀 어느 해 늦은 봄날이었다. 경기도 성남에 사는 
한 가정주부로부터 청와대 대통령 영부인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그 편지의 사연은 
이러했다.

그녀의 남편이 서울역 앞에서 조그만 행상을 해서 다섯 식구의 입에 겨우 풀칠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얼마 전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누워있기 때문에 온 가족이 굶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 자신과 어린 자식들이 끼니를 잇지 못하는 것보다 80세가 넘은 시어머니가 아무것도 모른 채 마냥 굶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애절한 사연이었다.

그때만 해도 육영수 여사는 이런 사연의 편지를 하루에도 몇 통씩 받았고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많이 
도와주셨다. 그 편지를 받은 바로 그날 저녁, 나는 영부인의 지시로 쌀 한 가마와 얼마간의 돈을 
들고 그 집을 찾아 나섰다. 성남은 지금은 모든 게 몰라보게 달라진 최신 도시가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철거민들이 정착해가는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그 집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 집을 겨우 찾아갔을 때는 마침 온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상을 받아놓고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청와대에서 왔노라고 인사를 건넨 후 어두컴컴한 그 집 방안으로 들어갔다. 초막 같은 
집에는 전깃불도 없이 희미한 촛불이 조그만 방을 겨우 밝히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누가 찾아왔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밥만 먹고 있었다. 밥상 위에는 그릇에 수북한 흰 쌀밥 한 
그릇과 멀건 국 한 그릇 그리고 간장 한 종지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갑자기 매우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쌀이 없어 끼니를 굶고 있다고 하더니 
돈이 생겼으면 감자나 잡곡을 사서 식량을 늘려 먹을 생각은 않고 흰 쌀밥이 웬 말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한참 앉아 있으려니까 희미한 방안의 물체가 하나 둘 내 눈에 선명
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내가 받았던 충격과 아팠던 마음을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노파가 
열심히 먹고 있던 흰 쌀밥은 밥이 아니라 들판에서 따온 흰 아카시아 꽃이었다. 그 순간 가슴이 
메어오고 표현할 수 없는 설움 같은 것이 목이 아프게 밀고 올라왔다.

나에게도 저런 할머니가 계셨는데…. 저 할머니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나는 가지고 간 
돈과 쌀을 전해주고는 아무 말도 더 못하고 그 집을 나왔다. 그 며칠 후 나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과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무심코 그 이야기를 했다. 내외분은 처연한 
표정에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그때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던 박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나라에서 가난만은 반드시 내손으로….”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매서운 결심을 
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60년대 초 차관을 얻기 위해 서독을 방문해 우리나라 광부들과 간호원들을 만난 박 대통령.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과 가난한 나라에서 돈 벌기 위해 이역만리 타국에 와 있는 광부와 간호원. 
서로 아무런 말도 못하고 붙들고 울기만 했던 그때, 박 대통령은 귀국길에 야멸차리만큼 매서운 
결심을 하시지 않았을까. ‘가난만은 반드시 내손으로….’ 이런 결심을.


크림전쟁(1853~1856) 때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부상병을 돌보았던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1820~1910)이 영국 왕 에드워드 7세로부터 받은 공훈 훈장증서에는 이런 내용의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한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물질로 도와라, 물질이 없으면 몸으로 도와라, 
물질과 몸으로도 도울 수 없으면 눈물로 위로하라.”

광부들과 간호원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던 가난뱅이 나라의 대통령 내외가 그들을 
눈물 아닌 그 무엇으로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었을까.

나는 매년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5월이 되면 어린 시절 동무들과 함께 뛰어놀다 배가 
고프면 간식 삼아서 아카시아 꽃을 따먹던 쓸쓸한 추억과 70년대 초 성남에서 만난 그 할머니의 
모습이 꽃이 질 때까지 내 눈앞에 겹쳐서 아른거리곤 한다. 그날 밤 내가 만난 올망졸망한 
꼬맹이들은 지금은 50대를 바라볼 텐데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8/05/2014080503653.html?cs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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