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y 08, 2012

토론토이민 역사의 산증인 '평화식품' 탐방












"야 가래떡 참 맛있다. 이걸로 사람들 떡국 잘 만들어 먹고, 고향 생각 하겠지?"
"혜영이 아빠, 물이 뜨거워진다. 찬물로 바꾸어야 되잖아?"
"이제 거의 다 뺐으니, 그냥 그 물로 식히자고잉"

혜영이 아빠가 한쪽 잘라 주면서 맛을 보란다.
"뜨거울때 한쪽 먹어봐. 쫄깃 쫄깃 하네. 맛있다.  이집사 맛이 어때?"
"김집사도 한쪽 맛봐. 그리고 집에 갈때, 가래떡하고 콩나물도좀씩 가지고 가잉"

이상은 35년전 Dundas와Roncesvalles에 있는 공장 건물의 지하실에서 처음 "평화식품"사업을 시작하면서, 구정을 맞이 하여, 같이 교회 생활을 하던 젊은 동료들이 새벽같이 나와서, 동업을 시작했던, 프랭크 아빠와 혜영이 아빠를 십시일반으로 도와주기 위해 자진해서 공장으로 나와 같이 그들을 도우면서 주고 받았던 추억속의 한장면을 표현해 본것이다.  그때는 우리 한국사람들의 성질로 보아, 제대로 동업이 잘 이어질수 있을까?를 모두가 걱정을 하기도 했었다.
맨손으로 젊음과 패기만을 무기로 삼아 생업에 뛰어들었던, 이민 초창기의 이민자들의 삶의
축소판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때는 인정도 넘쳐 났었고.......

며칠전  평화식품의 구사장님으로 부터 식품공장 자동화 공정을 Open하는데, 일정을 잡아
재향군인회장인 나와 주위 사람들을 공식적으로 초청하여, 지금은 Weston에 있는 거대한 공장에 들렸었다.  처음 이공장을 구입해서 기계를 설치 하고 있을때 한번 방문한일은 있었는데, 그로 부터 벌써 몇년이 무심코 흘렀는데 오늘은 초청객신분으로 구사장님의 브리핑을 받으면서 공장 시설을 탐방하는 것이다.

콩나물, 두부, 된장, 고추장, 떡국떡, 그외 내가 알지 못하는, 우리 식탁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많은 식품류들을 제조하는 대형 식품제조업체로 성장하여,  오늘은 몇백만 달러를 들여 설치한 만두제조시설을 둘러 본 것이다.   우선 규모면에서 내가 들은데로 표현 한다면, 전에는 7명이서 일주일동안 만들어 내는 물량을 이자동시설로 한명이 기계를 조정하고, Packing 하는 사람 둘이서 모든것을 처리하고 있다고 했다.   

위생이 우선이기 때문에, 공장입구에서 부터 옷에 혹시 묻어 있을수 있는 먼지 털어내는 턴넬을 통과한후, 다시 물에 젖어 있는 Mat위에 서서 신발을 닦아 내고서야 공장안 출입이 허용됐을 정도로 엄격했고, 만두가 기계를 타고 흘러가는 과정을 둘러 보면서 신기함을 느꼈었다.

브리핑을 마친 구사장님의 얼굴도 이제는 주름살이 보인다.   벌써 35년이 지났음을 실감한다.   구사장님과 프랭크 아빠인 이사장님과 인연을 맺은게 엇그제 같은데 눈깜짝할 사이 긴세월이 흘렀음을 새삼 깨닫는다.

지금은 온타리오주안에서만 판매할수 있어 시장확대를 위해 연방정부의 식품제조관리 판매 허가증을 신청중에 있다고 했다.  계획데로 허가를 얻게 되면 북미주는 물론 멀리 중국본토까지 시장확대를 설계하고 있다고 했다. 

평화식품은 우리 초기 한국이민자들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도 한국식품점에 가면 꼭 평화식품에서 제조한 두부와 콩나물을 구입한다.   진열장에는 풀무원에서 제조한 두부들이 더 많이 진열되여 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이유는 고국에서 풀무원에서 제조한 콩나물, 두부등등에 익숙한 새로운 이민자들이 많기 때문임을 나는 알고 있다.   풀무원 제품은 LA에서 제조되여 이곳까지 온다 들었다.  평화식품은 현지, 즉 토론토에서 제조한다.   유통 기한도 따라서 다르다.  어느쪽 제품이 자연산에 가까운지는 설명이 필요없이 쉽게 알수 있다고 하겠다.   요즘같이  Organic제품을 찾는 경우에는 더욱더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건강하고 장수하기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토론토 한인 사회의 토종기업, 평화식품은 우리 한인 동포들이 우선적으로 애용해 주어야 한다고, 그것이 바로 우리 한인 이민자들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평화식품이 성장 하는것 만큼 우리 한인사회의 이민역사도 깊어지고,  자존심도 높여준다고 하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평화식품의 두주인과 일찍부터 Fellowship을 해왔다는것은 어쩌면 나에게는 행운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분들을 사장님이라고 부른 기억은 거의 없다. 항상 혜영이 아빠, 프랭크아빠, 호칭은 영원이 그대로 이어질 것이다.  프랭크 아빠는 나보다 몇살 연장자이기 때문에 나를 부를때 항상 MR.Lee로 통한다.  그말이 그렇게 정겨울수가 없다.

그들 두분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동업이 안된다라는 통설을 깬 산증인이기도 하다.  그분들이라고 어찌 의견이 항상 같을수 있을까?마는 역경을 이겨내고, 맨주먹으로 시작하여 오늘의 기업을 일구어냈고, 동업은 실패다라는 징크스를 깬 표본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고, 한인사회의
한 Sample로 인용될 것이다.

관람을 다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오니,  두부와 콩나물 그리고 자동화 기계로 만든 만두가 들어있는 Package가 우리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구경시켜준것만도 고마운데, 한보따리 싸 주시니 고맙기만 했다.  같이 관람하는 일행중에는 탈북자 협회의 임원들과 탈북자 몇분이 있었다. 그분들의 현황도 들을수 있었다.  그분들이 정착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을 그들에게 전하기도 했다.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기원하면서 문을 나섰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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