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September 27, 2010

지지리도 가난하고 살기힘들었던 때의 삶자취가 지금은...세시봉이야기




몸둥이의 모형과 얼굴의 모습은 변했지만, 그들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온 리듬은, 그들이 60대 중반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그때나 거의 전연 변하지 않은 그음색 그대로 나의 귀를 즐겁게 해준, 기억통(Memory box)의 깊은 밑바닥에 쳐 박혀 있었던 기억을 되살아 나오게 하면서, 지나온 세월에 대한 삶의 회한과 안타까움과 TV와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Folk Song을 부르는 그들에 대한 동경과, 나자신에 대한 초라함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 주었었던 시절의 희비가 교차하는 그때를 다시한번 생각케 해준 의미있는 그들의 쇼가 무쇠같이 변해 버린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해주었고, 눈시울을 적시게 한 그런 마당이었었다.

Lunar와 나는 인터넷을 통해서, 요즘은 고국의 드라마를 비롯한 많은 프로그람들을 즐겨 보아 오고 있었는데, 오늘은 우연히 Lunar가 MC 유재석과 김원희가 사회를 보고 있는 "놀러와"를 연결시켰는데, 이게 바로 1970년대초 부터 당시의 고국에 막 밀려 들기 시작했던 Pop Song을 주로 불러 당시의 나처럼 젊었던 청춘들 사이에서 인기를 한몸에 받았었으면서도, 현재까지도 주옥같은 목소리와 새로운 노래로 국민들을 즐겁게도, 때로는 위로도 해주고 있는 같은 또래거나 한두살 아래인 4명의 가수들이 함께 출연하여, 당시의 사회상을 노래를 통해서 충분히 회상할수 있도록 해주는 값진 쇼를 두번에 걸쳐 펼쳐준 것이다. 특별히 며칠전에 지나간 '추석 한가위 특집' 프로로 방송된 것이었다.
그때는 장발단속도 심했었고, 국민들이 즐겨 부르는 대중가요들이 당국에 의해 금지곡으로 묶여 방송을 타지 못하고 그대로 묻혀 버리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김민기의 '아침이슬', 송창식의 '고래사냥'......들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고, 그시대에 트로트 가수로, 국민들의 애환을 그녀의 노래로 같이 느끼게 해 주었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도 한때 방송을 타지 못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때는 군인들이 세상을 주므르는 시절이라, 흔희들 '군바리'들이라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서로 쉬쉬 해가면서, 그들을 뒤에서 비난해 가면서, 숨소리를 죽여 가면서, 굶주린 배고픔을 헤쳐 나려고, 군대식에 따라서 불철 주야, 한손에는 총을 들고, 이북의 김일성 공산정권에 대항해서 싸워야 하고, 다른 한손에는 망치를 들고 국가재건 사업에 자의반, 타의반 몰입하던 때였었다. 이렇게 모두가 잘 살아 보겠다고 오직 하나의 목적을 향해 달리고 있는때, 당시로서는 퇴폐성이 짙은, 서양풍이 깊이 가미된 Folk Song을 부르는것은 시국정책에 역행하는것 쯤으로 보이기에 충분했었던 때였었다. 이러한 국내 사정에 비해 우리세대보다 조금 앞서 세계의 Folk Song계를 휩쓸고, 유럽은 물론, 특히 미국을 주무대로 활동했던 더벅머리 4중창단, 영국출신의 Beatles가 혜성처럼 나타나 젊은이들의 우상,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 Concert때마다 아우성으로 열광,아니 광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 휘청대던 뉴스가 짧막하게 비쳐지면서 유행을 했었고, 또한 당시 북미문화권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여,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들도 Folk Song 보급의 유행에 앞장 섰던것으로 기억하고 이해 했으며, Beatles의 영향이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에 그후에 상륙했는데, 그영향을 당대 무명의 4인방 가수들이 '새시봉'에 모여 대담하게 받아들여 자기들 나름데로의 장르를 만들어 시대를 주름잡았던 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다. 그때 열광하던 젊은이들의 모습을 오늘의 고국 젊은이들 한테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것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그때로 부터 벌써 거의 반세기가 흘러가 버렸음을 오늘 이프로를 보면서 회한과 아쉬움속에서 다시 느껴 봤다.

쇼에 참석한 4명이 당시의 가수들은, 그들의 옷차림이나 행동에서, 황혼기의 삶이 비교적 여유있게 살아가고 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그들이 불렀던 노래들은 공전의 힛트를 해서, 당시 젊은 새대들은 거의 모두가 그들의 노래를 즐겨 부르면서, 당시 정권에 풍자적으로 저항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이 시대를 빗대어 풍자했다고 하던 노래들, 머리가 길면 사회적 퇴폐라 해서 단속하는 경찰에 쫓고 쫓기다가 붙잡히면, 가위로 머리를 짤리고, 구류를 살고, 재수 없으면, 심한 경우에는 군대에 강제 징집당하기까지 했었던 그런것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은 도저히 이해를 할수 없다는것을 안다. 그랬던 노래들을 당시의 가수들이 직접 TV를 타고, 그때의 어려웠던 상황을 설명해 가면서 들려줄때는 나 자신도 가슴이 뭉클해 오고,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지기위해 온나라가 매진하고 있을때, 행여라도 기강이 해이해 질까봐, 고삐를 꽉 조일수 밖에 없는 조치였음을, 그후 많은 시간이 흘러간뒤에야 깨달을수 있었다. 그렇게 젊은이들이 젊음을 발산할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막아가면서 경제 발전을 위해 밤낯을 가리지 않고 뛰어왔는데도, 경제적으로 오늘날 처럼 부강해 지지 않은 상태가 계속 이어져 왔었다면, 억눌려 살면서 젊음을 보냈던 세월들이 아깝고, 그원망을 계속해서 당시의 정권에 화살을 돌리면서 비난 했을수도 있었을텐데, 그러한 희생(?)의 대가로 오늘날을 사는 젊은 세대들은 잘먹고, 자유분망하게 주위의 눈살에 개의치 않고 살아가고 있음에 흐믓한 마음이다.

당시 그들의 활동무대는 명동에 있었던 "새시봉"이라는 음악 감상실이었었다. 사회자의 소개에 따르면, "새시봉의 전설적인 보스이며 맏형인 조영남", "새시봉의 방랑자요 수도승 송창식", "새시봉의 최고의 귀공자 윤형주" 그리고 "새시봉의 귀여운 막내 김세환" 이라고 설명했다. 4명 모두가 "새시봉' 음악감상실을 통해서 가수로 데뷔 했었다고 잊혀졌던 과거를 일깨워 줬다. 그들이 쇼를 진행하면서, 당시의 노래들을 불러주는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동안만큼이라도 당시의 젊은세대로 돌아가서 과거라는 기차를 타고 달리면서, 웃기도하고, 설명이 안되는 서러움에 가슴이 막히기도 하고, 같이 불러 보기도하고, 세월이 덧없이 바삐 흘러갔음에 회한이 서리는것을 느꼈고, 잊혀질려고 했던 조국에 대한 향수 그리고 애국심.... 오직 가난을 물리치고 부강한 나라를 건설해야만 했었던 절대 절명의 시대적 요구와, 풍족한 경제적 유산을 물려주기위한 목적때문에, 욕구분출을 지금처럼 마음껏 할수 없이 생활터전에서 열심히 뛴 결과가, 오늘을 사는 젊은 세대들을 통해서 여유롭게 비쳐지고 있음에 인생선배로서의 보람을 한껏 느낀 프로 였었다고 자신하고 싶다.
조용남, 송창식, 윤형주 그리고 김세환 4명의 출연 가수들이 앞날에도 오늘 보여 주었던 패기와 자신감으로 살아가기를 기원해 본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2/09/2011120901381.html?news_Head2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0/26/2010102600413.html?Dep1=news&Dep2=headline1&Dep3=h1_12

http://news.joins.com/article/486/4490486.html?ctg=1200&cloc=home|showcase|special

http://news.joins.com/article/855/4488855.html?ctg=1200&cloc=home|list|list2

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9/24/4018107.html?cloc=nnc&ctg=1700

http://world.ahaidea.com/video/player.asp?idx=29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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