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24, 2010

추석은 무척이나 기다려졌었던 명절이었었는데....







송편 한접시를 $10달러에 구입하여, 시골 카테지로 오던날 Lunar와 함께 차안에서 목에 넘기면서, 아 오늘이 추석이구나 라고 느꼈다.
고국에서 날아오는 뉴스에 보면, 대통령께서는 추석 하루전날 인기프로 '아침마당'에까지 바쁜 스케쥴을 쪼개어, 부부가 함께 출연하여 국민들에게 풍요로운 민족의 대명절을 뜻길게 보내시길 기원하면서, 청와대에서의 평상생활을 담담하게 들려주는 프로도 인터넷을 통해서 보았었지만,
이곳의 추석명절은, 여느때와 다름없는, 의미를 크게 부여하지 않는, 그저 추석절이구나 정도로 지내온 세월이 무척 길기만 하다.

아직 어렸을때,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에 다닐때의 추석명절을 기다리면서, 추석날 대식구가 조상님들의 묘소가 있는 선영으로 아버님을 선두로 당신의 자식들이 줄을 이어 뒤따라가서, 준비해간 간단한 음식을, 묘앞에있는 상석위에 자리를 깔고, 그위에 차려놓고 두번씩 절하면서, 조상님께 감사함을 드릴때, 우리 철부지들은 절을 하면서 서로 옆에 있는 또래의 형제들과 사촌들, 그리고 집안의 식구들과 의미도 모르는 절(Bow)을 따라 하면서 낄낄거리면서 웃고, 조상님에 대한 감사보다는 오랫만에 먹어 볼수 있는 별미에 더 신경을 썼던, 그런 때가 새삼 있었는데..... 시간상으로 따져 보면 반세기가 훨씬 지나갔음을 속절없이 느낀다.

6/25 사변후의 생활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모두가 초근 목피 하기에 여념이 없이, 모든 국민들이 그렇게 어렵게 살았었다. 조상님들에 대한 후손들의 정성은, 추석명절에 최상의 별식을 준비하여 조상님께 제사 드리고, 식구들끼리 오랫만에 흰쌀밥에 별식을 먹을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기에 나의 어린 기억속에는 산해진미를 쌓아 놓았던것 쯤으로 기억이 된것같다. 지금의 시각에서 쳐다 본다면, 기껏해야 떡과 좀 형편이 나은 집에서는 유과정도가 추가되고, 생선 조기, 그리고 나물종류들이었을 것이다.

지난번 고국을 방문하여 조상님 선영을 성묘 갔을때, 양지바른 산언덕에 위쪽으로 부터 모셔졌던 우리 형제의 직계로 4대조인 고조 할아버지를 시작으로 그아래로 부모님 묘까지 모셔지고 그바로 밑으로는 먼훗날 우리 형제들이 차지하게될 자리가 있는, 그리고 앞쪽으로는 아담한 시골 촌락이 보였고 좌우 뒷쪽으로는 인위적으로 만든 높지않은 언덕으로 둘러 싸여 있었던 기억속의 그모습이 완전히 달라진, 납골묘라는것으로 바뀌어져 있었고, 선조님들의 묘는 흔적도 없이, 넓은 공간 가운데에 대리석으로 만든 집이 있었다. 즉 납골묘라는 것이었다. 조상님들의 유골을 한데 모아 그안에 모셔 놓고, 돌아가신날을 기준으로 매년 모셔지던 제사도 이른봄철의 한식날에 모든 후손들이 한데모여 한번에 지낸다는것을 알았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의 바쁜 생활에 그렇게 밖에 할수 없었던 결정에 조상님들도 이해 하실거라고 이해 했었다. 나를 비롯한 아내와 두아이들은, 그곳에 계시는 후손들이 납골표로 모시기로 결정하고 통고해 주는것만으로도, 충분했다고 생각해야만 했다. 우리는 머나먼 이국나라에 사는 어찌보면 이방인(?)일수도 있기에.... 고급화강암으로 비석을 세우고, 거울처럼 매끈하게 깍아서 조합시킨 대리석돌들은 위엄있게 납골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고, 정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보니, 여러층의 선반이 설치되여 있었고, 위로부터 조상님들의 유골이 조그만 항아리에 모셔져 진열되여 있고, 이름이 새겨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가운데의 납골묘를 중심으로 넓은 공간의 바닥(Floor)에도 거울처럼 잘 다름어진 대리석으로 깔아놓아 후손으로서의 품위 유지를 위해 노력한 흔적이 잘 보였었다.

막내 동생이 좋지 않은 납골묘에 대한 얘기를 해 주는게 아닌가. 다름아닌 이장(Tombs must be removed to other Place)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새로 건설되는 호남 고속철도가 조상님들이 모셔져 있는곳을 관통하게 되여 있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이장비를 포함한 경비는 국가에서 보상해 준다고 했다. 현대 문명의 발달에, 후손들의 생활은 편리해 졌겠지만, 그핑계로 제사밥도 제때에 얻어먹지 못하시고, 궁여지책으로 일년에 한번 공동으로 얻어 자시는판에 이제 또 다시 자리를 옮겨야 한다니.....조상님들이 지하에서 뭐라고 생각하실까?
그리고는 까맣게 잊어 버리고 지내 왔는데, 다시 추석이 되니, 막내 동생이 이멜을 보내 왔다. 멀리 떨어져 사는 나와 딸린 식구는 별도로치고, 고국에 남아 있는 형제들마져도 다 모이지 못한 속에서 성묘를 다녀 왔다는 내용이다. 곁들여진 사진속의 납골묘는 여전히 번쩍번쩍 빛나고 있고 깨끗해 보였다. 관리하는분의 정성이 보통이 아니겠다 싶게 느껴졌다. 다시 동생에게 물었다. 조상님들 모신 납골묘는 아직 다른곳으로 옮겨지지 않은것같은데, 잘 준비되고 있느냐고 말이다. 이에 동생의 대답이 이미 그곳에서 멀지 않은곳으로 이장하여 전에 납골묘보다 규모가 조금 더 크게 건축하여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사진속에서는 지난번 성묘때 보았던 그모습이 그대로 보이는것 같아서 물었었는데.....
납골묘를 전문적으로 건축하는 업자를 통하여 모든것이 완료 됐었겠지만......수고를 했을 형제분들의 면면이 떠 오르면서도, 한편 이방인이 된 기분도 들었다. 이멜 한통으로, 전화 한통으로라도 사전에 납골묘 이전을 알려줄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까?라는.

추석 고유명절의 깊은 뜻을 잊고 살아온 세월이 너무도 길어, 두아이들은 고사하고 나자신도 평일처럼 살아왔기에, 이번 추석도 동생의 이멜이 없었더라면 평일처럼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어쩌면, 비록 한국식품점에서 구입한 것이기는 하지만, 송편한쪽도 먹어보지 못한채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제갈길을 가고 있는 두아이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며칠전 아이들에게 추석인데 같이 식사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전화를 했을때, 친구들과의 약속때문에, 일때문에....등의 핑계로 그기회마져도 얻지를 못했었다. 그뒤로는 우리부부도 새까맣게 잊은채 지냈었다. 두아이가 친구들이라도 만나서 시간을 갖게 된다면, 우리 부부보다 더 자상한 부모를 둔 친구들로 부터 추석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서 좋은 시간 갖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이다음에 다시 고국을 방문하게 된다면, 이번에는 좀더 진지하게 조상님께 늦은 인사라도 드리고 싶다. 어렸을적의 성묘는 대식구였었는데, 사진에서 보는 식구는 불과 몇명뿐이었다. 문명의 발달을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조상님들을 더 정성으로 모실수 있었던 옛날을 그리워 해야 할지? 조상님께 죄송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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