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February 16, 2009

정신적 지도자, 김수환 추기경의 서거를 슬퍼한다.



추기경으로서 그분을 멀리서부터 알기 시작한것은 70년대 초반 부터 였다. 우선 대한민국국민의 한 사람인 그분이 최초로 교황청 살림과 모든 행정의 결정을 하게되는 추기경에 서품됐다는것, 그자체로 그당시에는 조용한 혁명이나 다름없는 대한민국의 경사였었다. 할아버지 같은 온화한 평상시의 모습이셨지만, 정권이 독재로 흘러 갈때는 과감하게 주위의 위협을 무릅쓰고 결연하게 국민의 살권리를 외쳐 댔으며, 정권이 부정부패로 얼룩질때는 국민을 위한다는 가면을 벗어 던지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서 국민을 위한 공복이 되라고 설파 하셨었고..... 그리고 항상 겸손한 자세로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 아니 추기경이기 이전에 지도자 역활을 그렇게 앞장서서 하셨던 분이셨다. 세월의 흘러감에 육신의 한정된 삶은 어쩔수 없이 우리 곁을 떠나야 하지만,영적인 지도력은 우리기억속에 오래 오래 간직되고, 개인이나 국가적으로 시련이 닦칠때는 또 찾게되는 추기경으로 오래 남게 될것이다.
안녕히 가십시요. 그리고 이제는 모든 인간적 고뇌도 놓으시고, 추기경님의 모든 정신적 은혜를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때가되면 뒤따라 갈것임을 약속합니다. 여기에 추기경님의 떠나심을 애도하는 고국의 조선일보 사설을 옮겨 적어 놓는다.



[사설] 김수환 추기경이 떠난 자리


한국 천주교의 큰 어른으로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인권과 민주화의 횃불을 들어 이 나라를 밝혔던 김수환 추기경이 16일 저녁 87세를 일기로 선종(善終)했다. 김 추기경은 평생을 가난한 사람, 장애를 겪는 사람,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 곁에서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기쁨을 함께 기뻐했다. 김 추기경은 주위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자신의 안구(眼球)를 앞 못 보는 사람들에게 남겼다.

김 추기경은 1969년 47세로 세계에서 가장 젊은 추기경으로 우리 곁에 와 이날 세계 최고령 추기경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를 사목(司牧) 지침으로 삼아 교회의 담을 헐어 사회 속에 교회를 심고 교회 안에 사회를 이끌어 오는 데 온 정성을 다했다. 김 추기경이 한국 천주교를 이끌던 기간 동안 천주교는 80만 신도에서 520만 신도로 크게 자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해 천주교 성인 103위 시성(諡聖)이 이뤄지고, 세계 성체대회 개최, 해외 선교지원, 북한 동포 돕기 운동 등 한국 천주교의 새 시대가 열린 것도 그와 함께였다.

김 추기경이 떠난 자리를 보며 이토록 허전함과 아쉬움이 큰 것은 그가 한 종교의 지도자를 넘어 험한 시대에 이 나라 모든 이들의 고난을 자신의 고난으로 껴안았던 우리의 든든한 이웃이었기 때문이다. 유신과 군사 쿠데타 등 이 나라 정치의 고비고비에서 추기경은 권력에 의해 입이 봉(封)해진 사람들을 대신해 자신의 목소리에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집념과 열망을 실어 날랐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언하자 김 추기경은 TV로 생중계된 성탄미사에서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이 땅의 평화에 해를 끼칠 것”이라며 성서 속 구약(舊約)의 예언자 모습으로 국민 곁을 지켜주었다. 80년 광주민주화항쟁 때는 “물리적 힘으로만 유지되는 침묵과 죽음의 질서를 바탕으로 해서는 폭력의 악순환이 거듭될 뿐”이라고 계엄령 해제, 유혈사태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국담화를 냈다. 87년 6월항쟁 때는 시민이 시위를 벌이던 명동성당에 경찰 투입이 임박하자 “나부터 잡아가라”고 팔을 내저어 가로막고 나섰다.

독재의 총검에 맞섰던 추기경의 힘은 강철같은 이념이 아니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상식이었다. ‘혜화동 할아버지’로 불리며 가요 ‘애모’를 열창할 줄도 알았던 추기경은 자신의 생활이 신앙에 일치하는가 끊임없이 고뇌한 하느님 앞의 약한 인간이기도 했다. 그는 경기도 시흥의 철거민 이주촌을 방문했을 때 주무시고 가라고 철거민촌 관계자들이 거처를 만들어줬지만 “공동화장실이 너무 불편해서 잠을 자고 올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렇듯 꾸밈없고, 솔직했다. 그래서 그가 유신과 군사정부 시대 손가락으론 민주화를 향한 길을 가리키고, 입으론 인간이 존중받는 정치의 꿈을 이야기해도 누구도 그걸 종교의 정치 참여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저 시대의 당연한 목소리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김 추기경은 정의를 말하면서도 나만이 정의의 사도인 양 비치는 오만을 꺼렸고, 불의를 나무라면서도 혼자만이 양심의 재판관인 양 비치는 독단을 경계할 만큼 평생을 낮게 살았다.

김 추기경에 대한 그리움은 세월이 흘러도 늘 새로 돋아날 테지만 이 나라 이 시대가 다시는 그의 역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정의로운 나라,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추기경을 기리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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