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y 22, 2009

목포 - 다시 방문하게 된 행운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라고 옛 시인이 읊었다는 시조 구절이, 유달단 노적봉비석에 서서 내려다본 목포 시내를 내려다 보면서 감회에 젖게 한다. 촌락의 틀을 벗어나, 목포시라고 불렀던 그때는 삼학도 역시 멀리 그리고 뚜렷히 섬으로 나타났었는데....
낯으막한 유달산 중턱에, 내 기억이 맞다면, 옛 한량들이 즐겨 찾았다는 정자같은 조그만 집들이 더 눈에 띈다. 멀리 내려다본 목포시가지는 많이도 변했다. 주위의 산들이며 지형은 그모습 인것 같은데, 그아래 우리 인간들이 만들고 변화시킨 삶의 환경터는 무던히도 변해 버렸다.
정확히 40년전에, 그때 학교 다니면서, 여름 방학때 친구의 집을 방문하느라고, 처음 목포를 방문했었다. 그친구의 행방은, 그뒤로 세상살이를 헤쳐 나간다는 핑계와 나의 무심함 때문에 Fellowship은 이어지지 않아, 아직 이세상 사람인지, 아니면 먼저 가버렸는지도 알수가 없다.
친구부부가 귀중한 기회를 제공해, 다시 이곳을 방문하는 의미깊은 발걸음을 하게 된것이다. 이친구 부부는, 우선 차를 달려 목적지 목포를 향하면서도, 시간이 너무 늦어서 '쑈'를 보지 못할가봐, 그렇게되면, 다시 기회를 포착하기가 쉽지 않을텐데.... 정작 우리 부부는 크게 마음에 두지 않고, '잘 되겠지' 라고 오히려 그들을 마음쓰지 않게 할려고 한마디 거들기도 했었다. 차를 바로 유달산 기슭에 있는 긴 돌계단으로 몰았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친구가 그광경을 보면서 너무도 아쉽게 안타까워 했다. 아직 까지도 그연유를 알리없는 그에게 도대체 뭔데 그렇게 차를 몰아 이곳에 오는 동안 그렇게도 염려 했었느냐고 이제는 물었다. 사실은 매일 시간이 되면, 한 무명의 음악도가 '트럼펫'을 약 30 분동안 구슬프게, 구성지게 불러제껴, 구경온 사람들과 한몸이 되여 고달픈 삶의 피로를 풀곤 한다는 것이다. 화려한 무대도 아닌 돌계단위에 서서 아래 모여든 구경꾼들을 향해 목포 시민들의 마음과 생각을 대변 한다고 하는데..... 그이야기를 듣고 보니, 우리가 조금 늦어 그다름다운 광경을 보지 못했다는게 아쉽기 그지 없게 느껴졌다. 그악사는 그렇게 트럼펫을 불어대어, 뭔가 그음으로 대중을 향해 호소하고져 하는 바램이 깊이 묻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는것은 어렵지 않았다. 친구부부에게는 모처럼의 발길이었고, 우리 부부에게는 어쩌면 생전에 다시 또 올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귀한 발걸음이었었는데..... 계단을 올라 선곳에는 공원 등산객을 위한 가게가 있었다. 그위로는 조그만 정자가 목포시내를 내려다 보면서, 서 있는것 같은 느낌을 준다. 바로 아래로는 지금부터 몇백년전 임진 왜란때, 일본군들의 침략으로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그어려운때, 살신성인의 심정으로, 빈약한 장비를 모아 왜군을 격침 했던, 성웅 이순신의 동상이 목포 시내를 굽어 보고 있었다. 서울의 광화문 큰 거리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이번 방문이 아니고, 오랫동안 지나다니면서 무심코 지나쳤던 기억이 떠 오르는데, 해전이 벌어졌던 현지에서 장군의 동상을 올려다 보는 느낌은 사뭇 다른다. 당시 이순신장군이 안계셨더라면.....원균이 계속 수군 통제사의 직을 수행 했었더라면......원균의 모함과 질투와, 왜군의 북상이 코앞에 와 있었는데도, 오직 당리 당략에 이끌려, 국가의 안녕을 내팽개치고, 탁상공론에 젖어 있던 조정으로 부터의 갖은 고초와 시련을 당하면서도, 조국의 안위와, 왜군의 질주를 막기위한 일념으로 백의종군했다는 그성웅 이순신 장군의 동상에서 국운을 세운 크나큰 인물 이었음을 가슴 저미며 다시 본다. 편히 쉬소서. 아직 조국통일은 안되었지만, 그래도 국민들의 삶의 질이 당시 계셨을때보다는 훨씬 풍부한 감사함을 당신에게,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당신이 보호하고 지켜주셨기 때문이라고 즐기면서 보내고 있다고 믿고 있읍니다. 저희들은 한번 왔다가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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