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anuary 31, 2022

77번째 맞이하는 설날의 회상, 그나마 70살이 훌쩍넘은 막내 동생의 이른 새벽 새해인사로 알게됐지만...

 이곳시간으로 새벽 6시경에 카톡소리에 새벽잠을 깼다.  지금은 70살을 살을 훌쩍 넘은 막내동생이, 새해인사를 보내온 것이다. '검은 호랑이의 해'라는 설명과, 새해에도 우리 형제 자매, 그리고 나이가 거의 비슷한 조카들까지도 모두 건강과 좋은일만 있기를 바랜다는 메세지였다.


                                                                     70을 훌쩍 넘긴 막내가 보내온 사진이다.

살아온 70대 후반의 삶을 돌이켜 볼때, 자랑보다는 챙피(?)한 지난시간들 뿐인것 같아, 가슴이 아리고, 지금은다 장성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2명의 자녀들에게도,  "New Year"에 대한 우리만이 느낄수 있는, 5천년 역사속에서 살면서 생활화 되왔던 Lunar Calendar의 오랜 풍습을 단 한번도,  명절의 맛을 느끼면서 같이 Share해본 기억이 없이 인생의 황혼길을 걸으면서, 그점이 회한으로 남는다.



개나리 봇따리를 주섬주섬 챙겨 멀리 이사를 와서 살게된지가 벌써 47년째의 새해 첫날이 내일 아침이면 밝아 오겠지만, 막내가 보내온 새해인사 카톡을, 어렴푸시 계산해 보니, 그곳시간으로는 아마도 New Year's Eve로 생각됐다.  잊지않고 보내온 그정성에 고마운 마음뿐이고, 그런 설날의 진정한 의미를 내 아이들은 깜깜 무소식이라는 점도, 지나고 보니, 다 나의 불찰인것으로만 여겨진다.

30세가 되던해까지만, 우리의 오랜전통인 설날의 맛을 즐겼고,  그이후는 달력에 새로운 1월1일의 장을 여는것으로 '또 한해를 맞이하는구나' 정도였고,  의미를 둘 겨를도 없이 삶의 현장으로 뛰어야 했으니까. 

그나마 30세가 될때까지의 사회생활을 회고해 보면, 설날의 풍속을 맘껏 즐겼던것만도 아니었던 기억이다.  당시는 '보릿고개'라는 배고픔의 한을 없애고, 다시는 우리 후손들에게는 가난을 대물림하지 말자는 결의를 다지면서, 불철주야로 산업현장에서 뛰던 시대였었고,  시간을 아끼기위해, '신정 연휴'2일간으로 족해야 했었고,  '음력설날'은 정부의 방침에 따라 '이중과세'라는 이유를 들어 평상시와 같이 직장출근을 했었던 때였었기에,  정확히 시간을 따져보면 아마도 1962년쯤 부터 음력설날 명절은 공식적으로 당시 우리사회에서는 사라졌다고 봐도 될것 같다.  물론 시골의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여전히 정부의 시책과는 상관없이 설빔을 하고 조상님께 제사를 지냈었지만....

오늘 아침 막내의 카톡을 읽고, 보내온 흙호랑이의 사진을 보면서 이삿짐싸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Settle down한 이후의 삶의 괘적을 되돌아 봤다.

지나고 보면 그리 잘살아온 삶이 아니었음을 후회 하지 않을수 없는 개척자의 삶이었다.  어찌 설명절 뿐이었겠나,  추석명절역시 똑같이,  많지 않은 가족들과 모여 음식상 차려놓고 여유있게 기억에 남을 명절을 보낸 기억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래서 두아이들은 설날이나 추석날의 그깊은 의미를 아비인 내가 행동으로 보여준 기억이 없기에,  그들이 신정설날에 결혼전에는 꼭 찾아와 새벽에 새배를 하고, 우리부부는 새배돈을 넣은 봉투를 하나씩 건네주는것으로 설명절 의식은 끝나고, 엄마가 끓여주는 떡국한그릇 먹는것으로 공식적인 명절의식은 끝났었다.   그리고 바로 삶의 현장으로 바삐 준비하여 달려야만 했었다.

멀리 이사를 올때만 해도,  우리 아이들한테만은 우리의 고유풍습과 그의미를 생활속에서 느끼도록 하겠다는 야무진 꿈도 있었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그렇게 실천하기는 거의 불가능 했었다. 이러한 삶이 어찌 우리 부부뿐이었겠는가마는.

아직 컴퓨터가 막 보급되기 시작했을때인 1980년대중간에,  두아이들은 학교에서 컴퓨터를 배우면서, 그분야에 좀 남달랐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들아이가 어느날 아침에 학교에 가면서, '아빠 나 오늘 컴퓨터 경연대회가 있어 학교 대표로 출전하게되요.  그리고는 아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가게오는 손님들에게 물건팔기에 쫒기고 있었다. 

그날 오후 손님 한명이 물건구입하면서 "Paul, 가게에 오면서 네아들 Lyon이 손에 상품과 상장같은것을 잔뜩안고 걸어오는것을 봤다. 오늘 무슨날이냐?"라고 물었을때, 아차 아침에 아이가 했던말이 생각났었다.  "그게 정말이야? Lyon이 얘기를 안해줘서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라고 거짖말로 내뱉었었다.  어찌 잊을수가 있었겠는가.  부모로서의 무관심을 말할수가 없어서 모르고 있었던것처럼 흘려 보냈던 기억도 있다.  딸아이는 항상 이다음에 커서 Disney Land에서 컴퓨터 Animation 작가로 일할것이라고 얘기했던 기억도 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들은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한 삶을 살아가고있는것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성장하여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이, 이아침에 느끼는 민족의 대명절, '설날'의 의미를 어떻게 알겠는가.  새배오는것은 말고, 카톡이라도 한줄 보내주었으면 하는 바램일뿐이다. 왜냐면, 부모인 내가 교육을 못시켰으니까.... 

그사이 두고온 내조국은 박정희 대통령의 "잘사는 나라건설하여, 다시는 후손들에게 가난은 물려주지말자"라는 기치아래, 이중과세까지 없애가면서 헌신의 노력을 한결과로, 지금은 젊은 세대들은 훨씬 풍요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이중과세를 맘놓고 즐길수 있는 삶의 여유를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는것 같다.  

나역시도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고 명절을 즐기는 그런 시간을 많이 갖지는 못했지만, 경제적으로 황혼의 인생살이에 쪼들리지는 않고 살아갈수있는 여건이 조성되여, 어느면에서는 감사한 마음이지만..... 아내, 아이들에게 여전히 미안한 마음뿐이다. 

은퇴후에 여행을 하면서,  젊었을때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지못하고, Settle Down하기에 시간을 다 보냈던 미안함을 보상받기위해 매년 여행을 다녔었지만, 그것마져도 나에게는 호사스러운 삶인것으로 창조주께서 생각하셨는지, Pandemic으로, 여행길을 막아 벌써, 집에서 거의 갇혀있는 생활을 하게된지가 햇수로 3년이 돼간다.  계획은 세운다해도 위에 계시는분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안되는것을.... 더 깊은 내가 알지 못하는 계획이 있으신것으로 믿으면서.... 오늘 이아침에 막내로 부터 받은 간단한 카톡이 너무도 고맙기만 하다. Pandemic전에 마지막으로 다녀온곳이 South Africa 남북 종단 여행이었다. 

https://lifemeansgo.blogspot.com/2019/03/s-africa-victoria-falls-217-33.html

"막내야 고맙다. 네가 이새벽에 설날임을 알려주지 않았었다면 아마도 무의미하게 보내는 또 다른 하루정도로 생각했었을 것인데...."  우리서로 건강하자.  그리고 기억할련다.  여기 시간으로는 오늘밤 지내고 나면 음력설날이라는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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