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anuary 23, 2021

"강치 하는날 또 나가냐. Testicle얼면 이담에 사람구실 못혀 썩을놈아..." 오늘처럼 추운날엔 어머님 생각에...

 오늘은 금년들어 가장 추운날씨로 기억될것 같은 날이다. 영하 12도에 체감온도는 영하 20도 라고 TV에서는 계속 건강에 주의 할것을 부탁하면서, 추운 날일수록 Covid-19 Pandemic에 주의 하라는 당부다.  

내가살고있는 콘도에서는 밖의 온도에 전연관계없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에 피부로 밖의 온도를 느끼지는 못한다. 요즘은 하루의 일과중 가장 큰일은 콘도뒤로 끝없이 이어져 있는 Board Walk Trail하는 것이다. 약 한시간 반 또는 많게는 2시간쯤 걷고오면, 입고 있는 속옷들은 땀에 흠벅 젖어 바꾸어 입어야 하고, Shower를 해야한다.

12시경에 출발하여 항상 걷곤했던, Ontario 호숫가를 따라 연결된 Board Walk을 걸으면서, 금년들어 처음겪는 찬공기와 체감온도 영하 20도를 얼굴에 직접 맞으면서 걷는데도 기분은 Fresh하여, 걷는 발걸음도 가볍다. 

문득 지금으로 부터 65-70여년전의, 6.25전쟁이 끝나고, 20여호가 모여살았던 시골동네의 모든 이웃들이 가난하게,  모진 추위를 이겨내면서 살았었던 기억들이 훤이 떠오르게 했다. 걷는 발걸음을 옮기면서 다마치고 집에 도착할때까지 그때의 기억속을 헤매다 어느새 집문을 열고있는 나자신을 발견했었다. 정확히 약 7.8킬로를 걸었다고 Cell Phone의 만보기가 알려주고 있었다.

밤에 잠자리에 들기위해 모든 집안 식구들이 커다란 이불한장속에 웅크리고 잤었던 그때의 가난했던 기억,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은 작은옆방에서, 그리고 나머지 형들과 동생 그리고 아버지 함께 7명이 큰방에서 어울려 자다보면, 새벽녘에는 방바닥이 식어서 더웅크리고 엉겨 잠을 자곤 했었지만, 새벽만 되면 그추운 날에도 아버지는 창호지를 바른 문을 다 열어 젖히고 누워있는 새끼들을 다 깨우곤 하셨던 생각이 유난히 오늘은 많이 났었다. 늦게 일어나면 먹거리 차지가 없다는 논리셨다는 이유를 후에 알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외풍이 많은 부엌에서 어머님이 가마솥에 만들어 주신 무우밥(보리쌀과 채썰은 무우), 고구마밥을 개눈감추듯이 먹어치우고, 동네 코흘리개 친구들과 어울려 동네앞에 있었던 조그만 방죽(Pond)에서 설매타기 하거나 얼음위에서 팽이치기를 하느라 추운줄도 모르고, 때로는 점심을 거르기도 일쑤였었다. 점심이라고 먹을수있었던것은 고구마, 밀기울(밀가루빼고 남은 찌꺼기), 어쩌다 운좋으면 꽁보리밥 정도였었다.  입고 있는 옷은 윗형들이 입다 적어지면 물려받은, 다 낡아서 누덕누덕 기워서 입었던 바지 저고리 였었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면으로 만든 내복이 내차례가 됐지만, 그내복역시 형들로 부터 물려받아 다 누덕누덕 기워서 입었던 기억뿐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추운데도 나가 뛰노는데 정신이 팔려, 배꼽친구들과 어울려 놀기위해 나갈때는, 항상 쏘아 부치던 말이 있었다 " 야이썩을놈, Testicle 얼지않을까 몰라. 혹시라도 얼으면 이담에 사람구실 할랑가 몰라, 썩을놈. 집에서 좀 몸좀 녹이면 좋으련만...." 아마도 어머님은 형들에게도 똑 같은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그말이 내귀에 들어올리는 없었다. 시골 동무들과 어울려 싸돌아 다니는것 그이상으로 재미있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신발(검정고무신)이 뛰놀면 더 빨리 닳아 없어진다고 항상 진노하신것은 물론이었다.


그런속에서도 세월은 흘러, 학교도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늦게서야 어머님이 추운 겨울철이 되면, 따뜻하게 입을 옷을 충분히 입히지 못하셨기에 이담에 자라서 사람구실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Testicle을 그렇게도 염려하시고, 걱정 하셨었다는것을 스스로 터득하면서, 먹을것도 없는 가난한 살림살이에 10남매를 낳아 키우셨으니, 입에서는 항상 "썩을놈들" 아니면 "무슨 죄가 많아 새끼들은 퍼질러 낳아놓고 입히지도 못하면서..."라고,  푸념을 하셨던 기억은 나지만, 단 한번도 "애야 추운데 조심 하거라...."등등의 따뜻한 말씀은 없으셨었다. 종족보존의 본능에서 어머님은 그렇게도 걱정 하셨던 것임을 후에 알았었지만....

세상을 살아보고, 새끼를 낳아 직접 키우면서,  어머님의 가장 큰 걱정은 행여라도 이담에 성장하여 결혼생활할때, 사람구실 못할까봐, 그표현을 위에 언급한데로, 퉁명스럽게 말 한마디로 안타까움을 나타내시었던 그애틋한 마음을 느꼈을 때는 이미 어머님은 늙으신 할머니가 되였었다.

사회생활 시작하면서, 첫월급으로 생전처음으로 어머님에게 가짜 털오바를 하나 읍에 같이 나가, 사드렸었다. 그렇게 좋아 하실수가 없었다.  눈도 어두워져 돋보기 한켤레를 안경집에 들어가서 사드렸었다. 끼워 보시더니, " 야 참으로 잘 보인다. 됐다. 더이상 돈 쓰지 말거라. 힘들게 벌은 돈인데..."  그게 전부였었다. 그래서 어머니 아들은 불효자다.

어머님의 새끼들은 다행히도 어머님의 걱정과 마음으로 부터의 기도응답이 있으셔서, 새끼들은 결혼하여 사내구실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살이에 시달리면서 살다 어느날 되돌아 보니, 이미 아버님은 물론, 어머님은 자식들 곁을 떠나 멀리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하고 계시는것을 늦게야 깨달았다.  그옛날 정철의 시조가 어렴푸시 기억속에서 되살아 난다.  

 어버이 살아신 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찌 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그렇게 평생동안 깔깔거리면서 같이 살아갈것처럼 지내던 그친구들과의 교류가 끊긴지가 벌써 50년이 훌쩍 넘었다. 뭐가 그렇게도 바빠서 전화한통 못하고 살아 왔는가. 

어머니,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모든 근심걱정 다 내려 놓으시고 잘 계시지요. 어머님의 새끼들도 이제 곧 어머님 계시는 하늘나라로 영생의 여행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 그곳에서 만나면, 그때는 절대로 어머니 속 않썩일께요.  사랑합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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