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20, 2013

"김지하와 그의 시대-허문명 기자" 기록이 주는 메세지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조국과 민족의 나아갈 길을,  꾸준히 보여준 그리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진정한 애국자요, 국민들의 귀감이 될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조국 대한민국이 있기 시작한 원년은 일제의 강점으로 부터 해방이 된후, 좌우 이념이 대립을 할때,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지도자들이 세운 대한민국 건국이후부터라고 생각해 본다.  공산주의를 최상의 이념으로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북의 김일성을 중심으로 따로 나라를 세워 그때부터 이념에 따른 남북 대결은 시작 됐었다.   당시의 남북 상황은 모든 면에서 북측이 훨씬 경제적으로 산업적인 면에서 남한보다 앞서 있었다.  더 부자였었다.
그러나 국가의 구성요소중의 하나인 주권은, 북한은 김일성 개인에게 있었고, 남쪽의 대한민국은 국민들에게 있었던 점이 크게 달랐다.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남한의 민주주의 정부는 아직 걸음마를 시작하기도 힘든때에 이북의 김일성의 사주를 받은 암약자들의 조종을 받는 데모꾼들로 한시도 조용한 날이 없었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나라의 살림살이가 너무나 가난했기에,  악순환만 계속되고,  그사이 북측의 김일성 정부는 군비를 증강시켜,  마침내 1950년 6/25 남침을 감행하는  민족앞에 대역죄를 저지르는 만고의 역적질을 해버린 것이다.

이념이 먼저냐? 배고픔을 해결하는게 먼저냐?라고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배고픔을 해결하는게 먼저라고 주저없이 대답한다.  먹지못해 겨울을 나고 새봄이 올때 쯤이면, 배고픔에 시달린 국민들의 얼굴은 누렇게 떠서, 부황이 들곤 하며,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방황할때,  보릿고개를 넘기는 어려움을 해결해야 겠다는 신념으로, 합법적이지는 않지만, 쿠테타라는 극단의 방법을 택해 국가의 살림을 맡은 박정희 장군을 중심으로한 혁명세력들이,  국민들의 자유를 일부 유보 시킨채 국가재건의 휏불을 지펴,  경제건설의 튼튼한 Foundation을 약 20년에 걸쳐 다져 놓은 위에 오늘의 조국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음은 우연이 아리라는점을 국민들, 특히 입만 열면 민주주의를 짖어대는 인사들은 꼭 알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소위 말해서 민주투사로 불렸던 백기완씨의 고백이 생각난다.
"박정희는 우리같이 민주주의 운동을 한 3만명을 괴롭혔지만,  이들 3만명은 민주주의를 쟁취 한답시고 5천만 국민을 불모삼아 팔면서 괴롭혔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박대통령의 경제강국건설이 아무런 기반도 없이 울부짖는 허울뿐인 민주주의보다 우선이고, 배고픔을 해결없이는 민주주의는  일종의 사기라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했던 것이다. 

김지하 시인도 유신체제하에서 무진 고생을 하면서 박통의 독재타도를 앞장서서 외쳐댔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그분이 십수년의 억울한(?)감옥 생활을 하고난후, 느낀점은 당시 시대의 처한 상황이 누구 한개인이나 집단의 영달을 위해 유신독재를 한것이라기 보다는 5천년 동안 내려온 가난을 해결하기위한 극단의 조치였음을 깊이 깨닫고,  힘이 없는 민주주의는 지켜질수도 또 배고픔을 해결해 주지도 못한다는것을  국민들에게 고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이해가 된다.

이승만 대통령이나, 박정희 대통령이 살았던 동시대의 세계적 영웅들의 행적을 비교해 보았을때,  이들 두분의 이름앞에 "민족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부쳐서 후세들이 Respect하게 해 주고, 기념하게 해서 민족의 긍지와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할 의무가 오늘을 사는 국민들에게 지워져 있다고 생각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들을 기념하는 Mausolium을 하루라도 시급히 만들어서 어린 후손들의 역사교육에도 활용해서,  오늘의 조국 대한민국이 민주국가로 성장하여 세계무대에서 선진국들과 어깨를 겨누면서 당당히 나아가는 그기본은,  허울좋은 민주주의 보다는 독재자라는 누명을 쓰면서도 경제를 발전시켜 마침내 이를 발판으로 성장한 부강함 속에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린 그위에서 삶의 맛을 느끼면서 대한민국의 국호를 쓰기 시작한 이후, 조국은 아직까지 한사람도 국민들의 존경을 받을만한 지도자나 인물이 탄생시키지 못했다는 신기함에 놀라지 않을수 없다.

우리국민들은 남을 추겨주거나 칭찬해 주는데 너무나 인색하다.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헌신적 봉사와 치적에 대해 공평한 평가를 내리는데는 인색하고,  흠집을 내어 깍아 내리는데만 심혈을 기울여 왔음을 솔직히 모두가 인정해야 한다.   터키공화국의 창시자인 Artaturk, 공산주의의 종주국 쏘연방을 총한방 쏘지 않고, 지구상에서 없애버린 Ronald Ragan미국 대통령, Gulf War의 총지휘를 했던 미합참의장 Colin Powell 같은 분들은 각각 자기나라에서 영웅의 대접을 받고 국민들이 추앙하고 있다.  그러나 이분들의 뒷면을 보면 흠이 너무나 많다.  흠보다는 치적을 추겨 세워 국민적 영웅으로 만든것은 그나라 국민들이 바보라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다는점을  인정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들을 이분들과 비교 해 본다면  당시 조국의 처한 여건은 훨씬더 열악했었다고 본다.  그위에서 자유민주주의 공화국 대한민국을 창시했고,  가난하기로 세계에서 두번째로 못살았고,  의욕을 잃어버린 현실속에서, 하면 된다는 신념을 앞장서서 실천하여 5천년 이상 내려온 보릿고개를 없앤것은 물론이고, 경제적 정치적으로 잘살게 할수있는 Foundation을 만들어 오늘의 조국 대한민국이 세계무대에서 서방세계의 잘사는 나라들과 어깨를 겨누게 한 업적은, 그분들이 흠잡힐 행동을 한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박대통령의 잘살아 보기위한 "새마을운동"은 아프리카, 중동, 남아메리카의 여러나라에서 국가 정책으로 세워 국민계몽운동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직접 나는 목격하면서  가슴이 벅찬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었다. 

이러한 업적을 공식적으로 검증하고 인정을 해야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바로 국민들의 위임을 받아 국정을 논의 하는 국회의원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사상과 이념이 다르다고 무조건 반대하고 깍아내리는, 망국적인 풍조는 이제라도 청산하고 국가의 백년 대개를 생각한다면 지체없이 객관적 평가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지금과 같은  정치적 여건하에서는 앞으로 또다른 5천년 역사가 이어진다해도 한반도안의 대한민국에서는 영웅탄생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잘한것에 대해 칭찬을 전연 할줄 모르는  대한민국의 정치꾼들에게 이말을 꼭 전해주고 싶다.

" 남의 눈속에 있는 티눈은 잘 보면서 내눈에 있는 대들보는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들, 바로 당신들이라고", "사촌이 논사면 배아파하는, 국민들의 혈세만 축내는 밥버러지들", "이북의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도 구별 할줄도 모르는 주제에 민주투사인양 길거리로 뛰쳐나가 데모나 일삼으로면서,  김일성 Regime을 주군으로 모시는 빨갱이들을 국회로 영입시키는 얼간이들" 

김지하, 허문명 기자의 Documentary는 그래서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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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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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4·19는 미완의 혁명이었다

1961년 12월 가난한 거지들의 삶을 조명한 동아일보 사회면에 실린 사진. 아기를 업고 구걸하는 엄마 거지와 그 옆을 지나는 거적때기 거지의 모습에서 비참한 생활상이 느껴진다. 당시는 도심 길거리에 이런 모습이 흔했다. 동아일보DB
4·19 직후인 1960년 12월 동아일보는 ‘세모비정(歲暮非情)’이란 제목의 12회에 걸친 시리즈물에서 1년 중 가장 살기 힘든 겨울을 힘겹게 이어가는 서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소개하고 있다. ‘염소장수’ ‘품팔이군’ ‘군밤장수’ ‘빈민굴’ ‘바가지장수’ ‘구두닦이’ ‘노점음식점’ ‘생선장수’ ‘고아’ ‘양로원’ ‘모자원’ ‘지지미 장수’라는 제목의 각각의 글을 읽다보면 ‘못살아도 이렇게 못살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산다는 것 자체가 무서워’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품팔이군’의 삶은 이렇다.

‘오직 나무로 깎아 엮은 지게와 좀 낫다면 ‘구루마’가 그들에겐 생명선이다. 생활근거지는 주로 시장주변. …시커멓게 때가 오른 두툼한 방한모. 농사에 지친 나머지 서울 가면 주먹만 갖고도 끼니는 때울 수 있다는 바람에 뛰어올라 왔으나 역시 서울도 바람은 모질다.…허리가 부러지도록 짐을 지고 십리 길을 가도 잘해야 단돈 사, 오백환…공(허탕)치고 빈 손을 힘없이 걸머쥔 채 허기진 배를 안고 처자식들이 쓰러져 있는 다리 밑 거적대기집으로 돌아갈 때는 산다는 그 자체에 몸서리가 치고 무서워만 진다.’

그때 우리는 너무 헐벗고 굶주려 지금 기준으로 가늠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정도다. 식민통치에 이은 미 군정, 여기에 3년이나 혹독한 전쟁을 치렀으니 다들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다. 오죽했으면 겨우내 묵은 곡식이 다 없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은 매년 음력 4월을 ‘보릿고개’라고 했을까. 마치 큰 고개를 넘는 것처럼 힘들어 농민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서민들은 굶어죽는데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다. 3·15부정선거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갈아엎지 않고서는 희망이 없다는 분노가 극에 달하자 시민들까지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4·19는 미완의 혁명이었다. 대통령을 하야시키기는 했지만 준비된 민주정부 플랜도 없었고 비전은 전무했다. 그 결과, 오히려 대통령의 하야는 민주국가의 건설이 아닌 한층 복잡한 혼란을 불러왔다.

승리의 영광은 기존 정치권으로 고스란히 돌아갔다. 외무부 장관이었던 허정이 정권을 이어받았다. 허정 과도내각은 7월 29일 총선을 통해 제2공화국을 출범시켰다. 8월 12일 대통령에 윤보선(1897∼1990), 19일 초대 국무총리에 장면이 당선됐다. 의원내각제이다 보니 대통령은 실권이 없는 명목상 대통령이었다. 진정한 정치권력은 장면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쥐었다. 이들은 기존 부패 정치인들에게 단호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국민들의 입장이 아닌 자신들만의 권력과 사리사욕을 위해 일하면서 파벌 싸움에만 몰두했다.

기자는 당시 한국 상황을 생각하며 지난해 5월 취재차 방문했던 ‘혁명 후 이집트’가 떠올랐다. 무바라크 독재시대가 끝난 이집트가 혼란스러울 것이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실제 현장에 가보니 혼란의 정도가 생각보다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규칙과 질서는 무너져 있었고 경제는 악화됐으며 시민들의 삶은 더 피폐해지고 있었다. 국가재정은 바닥나고 관광객의 발길도 끊긴 지 오래였다. 시민들 중에는 “무바라크 시절이 더 나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집트의 혼란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 이집트를 보며 파괴보다 건설이 더 힘들다는 것, 준비 없는 혁명은 혼돈을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끝 모를 혼란과 무질서의 소용돌이… 4·19 직후 대한민국이 바로 그랬다.

학생과 시민들은 승리감에 도취됐다. 그동안 억눌려 있던 민중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날이면 날마다 시위를 벌였다. 오죽했으면 ‘데모로 해가 뜨고 데모로 해가 진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책 ‘제2공화국과 장면’에는 당시 상황이 자세히 나와 있다.

‘남자나 여자, 노인과 아이 가릴 것 없이 모두들 나서 목청을 높였다.…초등학생들이 ‘교사전근반대’ ‘어른들은 이제 데모를 그만하라’고 요구하며 데모를 했는가 하면 경찰관들은 ‘국회의원이 경찰관 따귀를 때렸다’고 시위를 했다. 군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논산훈련소에서는 정훈부 사병들이 ‘송모 중령이 우리를 머슴처럼 부려먹는다’고 항의데모를 벌이려고 해 장교들이 가까스로 저지한 일도 있었다.’

책에 따르면 실제로 제2공화국 민주당 정권 10개월 동안 일어난 가두데모 건수는 총 2000건이었으며 데모에 참가한 연인원만 100만 명이었다. 서울에서는 하루평균 7.3건, 3867명이 거리로 나왔다. 노조 활동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4·19 직전만 해도 전국에 621곳이던 노동조합은 4·19 직후인 60년 9월 1일 현재 821곳으로 급증했다. 노동쟁의도 58년에 50건, 59년 109건에서 60년 218건으로 급증했다.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4·19 이듬해인 61년 3월 31일 국무원 사무처에 등록된 정기간행물 숫자는 그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일간신문은 4·19 전 41종에서 112종으로, 일간 통신은 14가지에서 274가지로, 주간 신문은 136종에서 476종으로 급격히 늘었다. 사무실 한 평에 등사판 하나만 갖추면 통신사 간판을, 실업자 서너 명만 모으면 신문사 간판을 내걸 수 있었다.

대학가도 수업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소설 ‘무진기행’으로 한국문학의 감수성을 혁신시켰다는 평을 듣는 소설가 김승옥(서울대 불문학과 60학번)이 2004년 펴낸 산문집 ‘내가 만난 하나님’에서 밝힌 당시 회고다.

‘4·19 후 학교가 다시 문을 연 것은 1960년 5월 1일부터였는데, 수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열광적인 분위기는 여름방학이 될 때까지 학교 안을 지배했다. 특히 서울대 문리대가 가장 심했다. 정치과, 외교과, 사회학과 고(高)학년생들이 주동이 되어 대강당에서 거의 매일 외부 인사, 주로 정치인들을 초청하여 시국 강연회를 열었다. 학생들은 강당으로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교수들은 아주 겨우 학생 몇 명만을 앉혀놓고 강의하거나 그나마도 학생들이 ‘휴강합시다’ 하면 휴강할 수밖에 없었다. ‘어용 교수’ 축출 운동을 벌임으로써 실제로 몇몇 교수를 쫓아내기도 했고, 일부 노(老)교수들은 (학생들이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야단을 치기도 했다.’

지식인들도 제2공화국의 상황이 ‘무정부 상태’라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정치학자 서석순은 4·19 1주년을 맞아 사상계에 쓴 글(이병국 ‘대통령과 언론’에서 재인용)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국민들 사이에는 배반당한 4·19 자유혁명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만연되고 있다. 잃었던 자유만 도로 찾으면 만사가 해결되고 이 땅에 하루아침에 지상천국이 출현하리라고 국민들은 기대하였다. 자유로이 행사된 투표권에 의해 선출된 정부는 최단시일 내에 혁명과업을 완수하고 현명하고 과감한 지도력으로 국민들이 더 잘살 수 있는 새 질서를 확립해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와 실현 사이에는 너무나 먼 거리가 있다. 자유? 그렇다. 이 땅에 자유가 범람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국민들이 (당초) 기대했던 어떤 질서 내에서의 자유가 아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횡행하는 자유는 ‘배고픈 자유’ ‘실업의 자유’ ‘생명과 재산에 위협을 받는 자유’ 그리고 ‘데모하는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는 국민들이 기대했던 자유가 아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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