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ly 17, 2012

Brighton의 초기 정착민의 이야기.

Brighton의 초기 정착민의 이야기.

초기 이곳 Brighton의 정착민에 대한 비문에는 이렇게 씌여 있다.






"지금  이 비석(Monument)이 세워져 있는 골짜기는 Brighton의 첫 정착민인, Simpson 가족들을 기념하기위해 후손들이 세워 놓은 것이다……."라고.

"고향떠난 10 여년에 청춘만 늙었다"  라는 우리말 유행가 가사를 떠올려 본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이민자로서의 삶을 살면서, 조국 한반도가 얼마나 작은 나라인지를 새삼 실감 하고, 그안에서 지지고 볶으고 …. 정치꾼들은  국민들을 향하여 되지도 않은 말로 현혹하여, 다가오는 대선에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입에 거품을 품어대는 모양새를 볼때면, 그들의 얼굴이 얼마나 두꺼울까?라는 상상을 하게된다.

동서 고금을 통해서 오늘을 사는 후세들, 특히 정치꾼들은 초기 정착민들의 삶의 진실성을 마음속으로 부터 터득하면서, 감사 하면서 살고 있을까?  아닐 것이다. 모든게 자기가 잘나고 똑똑해서 인것으로 착각(?)을 하면서 초기 정착민들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대다수의 국민들을 우습게 내려다 보면서……어떤 제스처를 써서, 달콤한 말을 해서 마음을 살로 잡을까?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것이다. 남의 뒷조사나 해서 마치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국가의 경제적 부흥을 위해서 큰 사건을 창출해 낸것마냥 떠들어 대면서…..그러한 열정을 갖인 그들이 이곳의 비문을 읽어 본다면 어떠한 생각을 하게 될까?  아마도, 개척자로서의 모험과 능력을 인정해 주기 보다는,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도망와서 숨어 살기위해 왔겠지?라는 억지 평가절하를 해서, 어느 한곳의 사람들이 뜸한곳에 던져 버릴 것이다. 초기 정착민처럼 순수한 열정으로 오직 봉사하겠다는 마음을 갖었으면 하는 마음이 가슴을 저며온다. 남북한 합쳐 7천만 국민들이 이들 몇명의 정치꾼들, 특히 사람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여기는 금수만도 못한 그자들이 이비문을 보고, 마음을 확짝 열었으면 좋겠다.

열사의 나라에 파견되여 중노동을 해서 외화를 벌어들인 노동자들, 월남 전쟁터에 가서 벌어들인 외화를 재투자하여 국가의 경제 건설의 초석을 다져 놓았더니, 그들에게 수고 했다는 소리는 고사하고,정치꾼들이 하는 소리라고는, 돈 몇푼에 목숨을 바꾸는 독재자였다라고 폄하하면서, 그후광을 제일 많이 입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가? 정치꾼들이다. 외화를 벌어들인 노동자들, 목숨을 담보로 해서 남의 나라에가서 싸운 용감한 군인들…. 그들이 바로 Obadiah Simpson같은 개척자들임에 틀림 없다고 높이 치겨 세우고 싶다.

시골의 농촌에서 얼굴은 새까맣고, 콧등에서는 누런 코가 흘러 내려 입안으로 들락 날락 하고, 흙투성이인 헐렁한 바지가랭이 한쪽은 걷어 올리고 다낡어 떨어진 고무신짝 앞코에는 엄지 발가락이 들락 거리던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가끔씩 여름철 방학때는 서울서 시골 나의 동네의 외할머니댁에 내려온 같은 또래의, 머리는 스포츠형으로 깔끔하게 깍은, 얼굴이 하얀 아이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나이는 불과 10살 전후 였을것으로 기억된다.

저녁때가 되면, 나의 어머니를 포함한 조그만 시골 동네의 어머니들은 '누구야' 라고 소리를 질러대여 진흙탕속에서 세월의 흐름을 잊은채 엉켜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찾곤 했던 그런 그시절에, 같은 또래의 12살난, 초기 이곳 Brighton의 정착민이었던 Obadiah Simpson씨의 아들은 황량한 벌판에서, 혼자남아 통나무집을 지키면서 가축들을 돌보았다고 기록은 써 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 코흘리개들은 부모님들의 사랑(?)을 너무나 많이 받았었다고 이해를 해야 될까?

 북미대륙의 북쪽, 특히 이곳은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고 춥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강추위와 폭설로 덮히기 때문에 오죽 했으면 '동토의 나라'라고 불려졌을까.  교통도 거의 없다시피하고, 겨우 말이 끄는 마차에 의지하던 시대에 미국의 South Carolina에서 이곳 동토의 나라까지 올라 왔다는 그의 Pioneer적인 개척 정신은 어디서 발원 됐을까?

기록을 보면, 그는 UEL(United Empire Loyalists)신봉자라고 했다. 미국은 당시에 영국과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던때와 맞물려, 영국왕실의 절대 신봉자인Obadiah Simpson이 미국에서 살기에는 힘들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고향, South Carolina를 일찌기 떠나 오래 살아왔던 뉴욕주에서의 삶의 터전을 다시 Adolpustown으로 옮겨 살아오면서, 열심히 몇개의 Job을 뛰어 자금을 모은후 다시 Adventure를 감행, 이곳 Brighton에  1796년 2월달에 그의 아들과 함께 안착하게 된다.  좀더 마음에 평안을 얻을수 있는 곳에서 삶을 살기 위해서.

도착하자마 Simpson씨는 아들과 함께 통나무집을 짖고, 축사를 지어 삶의 터전을 닦은후, 바로 당시 12살 아들에게 집과 가축을 돌보도록 하고, 그는 바로 Adolpustown으로 되돌아 가는 마차를 집어타고, 3개월의 약정으로, 당시로서는 황야나 다름없는 벌판을 달렸다. 요즘의 아버지들이 Simpson씨와 같은 경우를 당한다면, 그런 결단을 내릴수 있었을까? 어떻게 보면 그아들은 씨받이 정도로 귀한 혈육이었을텐데….


밤이면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추위와 싸우고, 사나운 짐승들의 괴성이 무서워 움추러들고, 때로는 맹수들과 싸우면서 가축을 돌보았을 당시 12세의 아들을 생각해 보면서, 어린 그의 생각은 어떠했을까?를 추측해 보기는 어렵지 않을것 같다. 엄마 아빠를 그리워하면서, 하루의 해가 서산에 지면 분명히 또 하루가 무사히 지났음을 알리는 표시를 그어디엔가 했을 것이다. 먹어야만 삶을 지탱할수 있기에, 낯에는 토끼들같은 조그만 짐승 사냥에 사용키위한 도구들을 나름데로의 지혜를 짜서 만들고, 또 벌판을 헤맷을 것이다. 불도 피웠을 것이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요즘 우리들의 삶은 참으로 배부른것 같다.

Simpson씨 가족과 같은 개척자 정신을 갖춘 선구자들 때문에, 이곳 북미 대륙은 오늘날에는 세계의 선진국으로 발전하고, 국민들은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 또한 우리같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는 넉넉함을 유지 하면서 자유를 즐기는 나라가 됐다고 생각해 본다.

여기에 비문에 새긴 내용을 옮겨 본다.

UEI Rededicated, July 14, 1991.

In Yonder Sandy Dune lie the remains of the First settlers of Brighton District.
Obadiah Simpson of North Carolina, 1755-1809, and his wife, Mary Lord of west Chester county, N. Y. 1760-1805.

UE Loyalists DeLangeys Regt. settles on Lot 4. Con2. Then TP
of Cramahe. Now TP of Brighton March 1796.
Erected by their decedents 1931.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 Bulletin Board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이곳의 골짜기는 Brighton의 첫 정착민인, Simpson가족들을 기념하는 곳이다.
Obadiah Simpson과 그의 아들은 1796년 이곳에 안착, 바로 거쳐할 통나무집을 짖고, 가축 막사도 지었다.  그런다음 그는 남은 식구들을 데려오기위해 Adolpustown으로 되돌아 갔다.  그때 `12살인 그의 아들에게, 그들이 다시 되돌아 올때까지, 3개월간, 집을 지키고 가축을 돌보라는 부탁을 하고 떠났었다.

Simpson가족은 영국왕실의 신봉자로 영국에 끝까지 충성하기위해, 뉴욕주를 떠나고 만다.  그들은 Adolpustown에 정착후 Brighton으로 이사하기전까지, 돈을 모으기위해 가리지 않고 일을 해댔었다.

Obadiah Simpson과 부인 Mary Lord는 이곳으로 부터 남쪽에 있는 모래 언덕바지에 매장되여 있으며, 그들의 자손들은 지금도 이곳 Brighton지역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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