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November 11, 2011

10월28일, 사십사일째, 완도안녕, 벌교의 꼬막축제,( 오전 )





















10월28일, 사십사일째, 완도안녕, 벌교의 꼬막축제,( 오전 )

낙안읍성 한옥촌은 용인에 있는 민속촌과 같은 concept으로, 고려시대때부터 주민들이 살면서 촌락을 이루었으나, 이씨조선을 창건한 태조때에 토성을 쌓고 부락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4대왕 세종때에 돌로 성벽을 쌓고,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계획된 도시의 형태를 갖춘, 보기드문 성곽도시를 이루어 지방각지에서 모여든 서민들이 살아가면서 그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했다. 현재 이한옥촌에는 108채의 한옥과 관리들이 사용했던 기와지붕으로된 관청과 그외 성곽으로 들어오는 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무한당"이라고 간판이 올려져 있는 기와집은 옛날에 이고을의 현감이 일을 보았던 곳으로, 현감이 대청마울에 앉아 죄인(?)으로 끌려온 주민 한명을 문초하고 그옆에는 창을 든 관리들이 서 있는 모습의 Mockery가 보는이들의 눈을 모으고 있었다.

이곳을 방문하게된것은 정말로 우연이었다. 어젯밤 묵었던 민박집에서 짐을 챙겨 인사겸,떠나기전 커피한잔 마시러 아랫층가게에 들렸더니 민박집형이 동생을 대신하여 일하고 있었다. 민박집주인인 동생은 새벽에 낚씨꾼들을 모시고 바닷가로 나갔고, 어제 공원에서 만났던 민박집 여주인은 밤새 가게에서 일하고 교대하여 쉬러가고, 이들을 대신해서 일하고 있다고 인사한다. 그는 청산면에서 면장으로 재직하다 제대했다고 한다. Lunar가 광주로 발길을 옮겨 서울로 갈려고 한다 했더니, 한군데 꼭 둘러보고 갔으면 하는곳이 있다고 하면서, 벌교의 '낙안읍성'을 지명해 주었다. 옛선조들의 삶의 얼이 서려있는 보기드문 촌락을 그냥 지나칠수 없어, 그분이 가르켜준데로, 강진행 버스를 타고, 그곳에서 운좋게 바로 연결되는 벌교행 버스를 타고 약 2시간 30분을 달려 벌교읍에 도착하여 다시 그곳에서 낙안읍성에 가는 군내(city bus)버스를 탔던 것이다. 벌교읍의 시장통에서는 '제10회 꼬막축제'가 오늘부터 열리고 있어 큰 잔치가 벌어지고 있음을 화려하게 걸려있는 현수막과 축제음악소리로 알수 있었다.

낙안읍성에 가는 길을 먼저 알아놓고, 벌교고등학교정에서 열리고 있는 꼬막축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중앙무대에서는 아마추어 가수들이 노래에 열중하고 있었고, 운동장 바깥쪽으로는 수많은 탠트들이 드리워져있고, 특산물과 선물들을 팔고, 운동장 건너 반대편쪽에서는 주민들이 윷놀이를 포함한 각종 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를 본 진행요원이 한쪽의 탠트를 가리키면서, 그곳으로 빨리 가보라고 권한다. 벌교 특유의 비빔밥이 모든이들에게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운(?)을 잡지는 못했다. 약 10분전쯤에 끝났단다. 대신에 그옆의 텐트에서는 수고했던 진행요원들, 주로 아주머니들이 그들만의 점심을 하면서, 우리부부를 정답게 끌어들여 점심을 제공해주어, 다른 지역에서는 느낄수없었던 푸짐한 반찬이 곁들이 점심을 잘 먹었다. 우리의 모습이 그들과는 어딘가 모르게 다르게 보였는가 보다. 우리의 신세를 설명했더니 더 반가워 하면서 고향의 정취를 맘껏 느끼고 또 즐기라고, 옛날 어렸을때 느꼈던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인심을 보여준다. 건너편에 있는 특산물파는 코너로 발길을 옮겼다. 어렷을적에 보았던 "약장사"을 연상케하는 희극같은 장사꾼들의 입담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어떤곳에는 시식하라고 이것저것들을 권해 먹어 보기도하고...
저녁늦게까지 이런 축제가 계속된다고 구경잘하시라는 인사들이 이어진다. 축제의 주제인 "꼬막축제" 내일 갯벌 현장에서 벌어지게 된다고 했다. 여기까지 온 목적인 낙안읍성을 가야 했기에 발길을 돌리기로 하고, 발길을 제촉했다. 뻐스로 불과 15분 거리에 낙안읍성은 있었고, 행정구역으로는 순천시에 속해 있다고 했다.

완도에서 벌교까지 오는 동안에 뻐스 차창밖으로 내다본 고향땅은 낮은산과 벼농사를 짖고 있는 논들이 있고, 가끔씩 특용작물을 재비하는 비닐 하우스들이 있는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이었다. 평화로운 모습으로 느껴지기만 했었다. 논바닥에는 벼를 털고난후 나온 볏짚이, 캐나다의 시골길을 달릴때 많이 보았던 Hay를 묶어논 둥지와 똑같은, 흰비닐로 둘러싼 뭉치들이 널려 있는 모습이 평화로우면서도 인력이 딸려 Combine에 의지하여 기계농사를 짖고 있음을 금새 알수 있게 해주었다. 옛날에는 볏짚으로 지붕을 덮어 비바람을 막았었는데..... 군데군데에는 정부에 수납하는 벼의 값을 제대로 받아내자는 구호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정부을 대표하는 농협과 대치중에 있는것으로 이해됐다.

농촌인구는 현재 전체인구의 약 6%가 정도 된다고 한다. 그들중 대부분이 전라남북도에 있는 평야지대에서 거주하고 있다고한다. 그들은 전적으로 벼농사에 의지하고, 이를 소비하는 국민들의 쌀의 양은 계속줄어들어, 정부에서 수매하는 양도 줄어드는 형상이고, 농부들은 정부가 농부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낯은 가격으로 수매할려고 한다하여, 매년 행사처럼 줄다리기 싸움을 하는것으로 이해 됐다. 이러한 악순환 때문에 전라도 지역은 정부를 비판만 하는 야당성 기질이 강하다는 인식이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는 틈새를 이용하여 정치꾼들이 이를 교묘하게 농부들을 부추기고 있음을 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걱정하는것을 들어 알고 있었는데, 오늘 그현장속을 달리면서 느낄수 있을것 같았다. 정부로서도 6%의 농부들을 만족 시키기위해 94%나되는 대다수 국민들의 의견을 외면할수는 없는 현실적 어려움을 이해할것 같았다. 이를 가장 많이 이용한 정치꾼들중의 한사람이 김대중씨였는데, 그가 대통령으로 집권했었지만, 고향지역이 달라진것은 거의 없어, 그의 임기말에는, 이지역에서 신처럼 모셔졌던 그역시도 비난을 받고 말았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떠오른다. 대한민국은 수출을 해서 먹고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손익계산을 따져 단 1%만이라도 이익이 남는다면 그길을 택해서 나라를 먹여 살려야 한다고 생각이 드는데.... 그렇타면 벼농사를 주로하는 이지역의 농부들도 생각을 바꾸어 수익성이 더 높은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길이 먼장래를 보아 현명할것으로 사료되는데, 이를 뒤에서 교묘히 조정하는 못된, 자기의 밥그릇만을 챙길려는 정치꾼들의 선동이 이를 많이 가로막고 있는것이 아닐까라고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그래야 세계무역시장에서 왕따 당하지 않고 수출과 수입을 하면서 조국이 살아남고 번영하는 길이라는 결론에 생각이 미쳤을때, 뻐스는 벌교읍 터미날에 우리 부부를 토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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