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September 29, 2011

9월 19일, 여섯째날, Potala Palace, 바위 절벽에 새겨진 Akshobhya Buddha

9월 19일, 여섯째날, Potala Palace, 바위 절벽에 새겨진 Akshobhya Buddha

 Lunar의 상태가 아직도 안좋다. 아침식사를 다시 Skip하겠다는것을 겨우 설득해서 조금 먹게 했다. 고산병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 식당에서 일행들을 만났는데, 아직도 상당수가 비실비실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심하면 좀 낳아질것이다. 나도 어제밤에 2알의 아스피린을 먹고 위기를 넘겼고, Lunar도 식사후 한알을 먹었다. 아픈 골치가 좀 멈출것이다. 이곳 Lhasa는 이상하게도 은행이 보이지 않았다. 호텔로비에서의 환전은 꿈도 꿀수 없는 실정이었고, Front Desk에서 알려준곳은 택시를 타고가야만 하는 먼곳에 있었다. Bank of China였다. Guide Hober를 앞장세워 달렸는데, 창구에서 작성하는 각종 서류들이 또 나를 어렵게 해준다. Hober의 도움으로 Fill it out하고 제출했는데,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라고 한다. 사람들이 내앞에 여러명이 있는데, 시간은 급해오고.... Hober가 내앞순서인 여성에게 다가가 Favor를 요청 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창구안에는 여러직원이 오가는데, 단한명만 고객을 대하고 있어 답답하게 보였다. 서구에서 보아온 은행의 서비스와는 전연 다른 느낌이다. Traveler's Cheque를 바꾸는데, 서류점검하고, 여행자수표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그것도 모자라 뒷쪽에 있는 더 깊은속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 다른 직원과 상의도 하고..... 겨우 필요한 돈을 바꾸어 호텔에 도착했더니, 은행에서 전화가 왔다고 알려준다. 서류를 잘못건네 주었단다. 주머니에서 꺼내보니, 은행보관용까지 나에게 다 건네준것을 알았다. 그만큼 은행이용이 적다는 뜻으로 받아 들였다. 그냥 호텔방에서 쉬고 있겠다는 Lunar를 설득하여 오늘 일정에 동참시켰다. 움직이는게 더 나을것 같아서 였다. 일행이 뻐스를 타고, 11시경에 Potala궁전으로 이동하는속에서 현지 Guide인 Migma가 설명을 해준다. 다기억을 할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궁전은 Lhasa시내의 붉은산( Red Hill)의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고, 면적은 약 41 헥타르라고한다. 꼭대기에 있어서 사방 어느곳에서도 전경을 볼수 있다. "Potala"의 뜻은 Lord Avolokitesvara 거주하고 있다는 뜻으로 그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모든 고통을 짊어진다는 암시를 포함하고 있단다. 서기 7세기경에 티벳왕 Songtsan Gambo가 창건 했으며, 5대 Dalai Lama, Ngawang Lhosang Gyamco때 증축했었으나, 그뒤 오랫동안 보호를 하지 않아 폐허가 되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1980년대에 대대적인 보수작업이 시작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한다. 궁의 전체길이는 동에서 서로 360 미터이고, 남에서 북쪽으로는 140미터라고 한다. 제일높은곳은 13층이고, 궁의 높이는 115.7미터이다. 궁의 전체벽은 돌로 쌓았고, 제일 두꺼운 벽은 5미터까지 두껍다고 한다. "Lhasa"의 뜻은 "신들의 땅"이라고한다. Lhasa는 지난 1,300여년동안 티벳사람들의의 정치적 그리고 불교인들의 삶의 전부를 대변하는 중심에 있었단다. 현재는 티벳자치주의 수도이다. 7세기경 한창 번창할때의 티벳은 커다란 왕국으로 발전하여 가장 흥성했을때는 그면적이 티벳분지가 형성되는 Quiinghai지역부터 이곳 희말라야 산맥이있는 티벳지역을 통치했었단다. 그면적의 크기를 쉽게 비교하기위해, 오늘날의 불란서와 독일의 국토를 합친면적과 같은 넒은 땅이었었다고 한다. 지금은 중국의 한 자치주로 줄어들어, 많은 티벳인들이 외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을 위해 힘쓰고 있는 많은 노력들중인데, 현재 인도에 기거하고 있는 달라이라마가 그중심이 되고 있다고 한다. 가끔씩 폭동이 이곳 Lhasa에서 일어나 군대가 주둔하고, 때로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막기도 한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시내를 구경할때 한때의 군인들이 무장한채 순찰하는 장면을 가끔씩 목격할수있었다. 속으로는 그만큼 긴장상태가 이어지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뻐스에서 내린곳은 커다란 주차장이었다. 그만큼 찾는 관광객이 많다는 뜻일것이다. Guide의 설명은 해발 3700미터 이상이니 절대로 뛰지 말고, 궁에오르는 계단수가 약 300인데, 걷다가 어려운분은 다시 되돌아오면 된다고 설명을 해준다. 관광객의 대부분은 중국인들인것 같았고, 가끔씩 서양인들도 눈에 띄었다. 그동안 여러번 인터넷을 통해서 본 궁의 전경이 눈에 익다. 한쪽은 외벽이 흰색이고, 다른쪽은 붉은 색인데, 흰색쪽은 주거지역이고, 붉은색쪽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통치기관으로 이용됐었다고 한다. 이궁은 불교와 함께 하는 곳이어서, 입구에는 고국의 절을 구경할때 절입구의 사천왕상이 버티고 서있는 모양을 쉽게 상상할수 있는, 똑 같은 사천왕상이 무서운 표정을하고 지나는 관광객들을 응시하고 있는것 같았다. 궁입구를 비롯한 궁의 수많은 창문에는 거의가 다 담요처럼 생긴 천이 가리워져 있었던점이 특히 했다. Guide의 설명에 따르면, Yak의 털로 만든 일종의 커튼인데, 이커튼의 특징은 바람을 차단하고, 온기를 유지하고,몰아치는 빗물을 막고, 강한 햇볕을 막아 준단다. 이곳 티벳인들은 거의 100%가 불교인라는 것을 거리 어디에서고 확인 할수 있었다. 불교의식에 따라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한손에는 원추형의 동으로 만든 기구를 돌리면서, 또는 염주를 돌리면서 거리를 걷는다. Potala궁 주위를 돌기도하고, 시내 중심가의 Side Walk을 걸으면서 의식을 행한다.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지않고 행하는것 같았다. Guide에게 이사람들은 언제 일하여 생계를 유지하는가?라고 물었더니, 젊은이들은 일터로 오고 갈때 그런의식을 곁들이고, 어떤이들은 계절에 따라 삶의 터전을 이동하기 때문에 다른곳에 있을때는 일을 하고, 이곳으로 이동하여 살고 있을때는 이의식을 계속 한다고설명 해주는데, 그말이 쉽게 수긍이 되지는 않았다. 이궁은 7세기 전까지는 'Kieb'이라 불리는 조금만 불교의 성지였고, 이곳에서 불교를 보호하는 성자인 Mendela들이 수행을 했었단다.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전부 타 없어져 버린것을 그후 7세기경에 위에서 언급한 티벳왕이 중건을 하고 Potala 궁전으로 불려지기 시작 했단다. '멘델라'는 Buddah를 지키는 직책으로 승려와는 다르다고한다. 왕이 궁에 살았고 '달라이라마'도 이궁에서 거주하면서 지도자로서의 일을 수행 했었단다. 궁의 중간쯤 꼭대기에 이르니 조그만 광장이 있었다. 바로 윗쪽으로는 힌색으로 칠해진 4층 높이의 건물이 있고 창문이 보였는데, 설명에 따르면, 이광장에서 사람들이 춤추고 즐기는것을, 윗쪽 빌딩에 거주하고 있던 Dalai Lama가 창문을 통해 보면서 즐겼었다고 한다. 궁안에서는 사진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여 그점이 아쉬웠다. 전체적으로 궁전안의 방들은 불교의식 그대로 화려하게 장식되여 있었으나, 방들은 무척 좁아 보였다. 방과 방들을 이어주는 좁은 복도에는 불교의식에 따라 가마솥보다 더 큰 촛대가 있어 촛불을 수십개씩 켜놓아 그곁을 지날때는 촛불 특유의 냄새가 코를 진동한다. 촛불에서 나오는 그을음 때문에 오랜시간을 거치면서 화려하게 드려져있는 벽화들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려져 있는점이 보는이들의 느낌을 아쉽게 한다. 이어지는 복도는 때로는 가파르게 설치되여 있는 계단을 타고 오르기도하고 내리기도 해야 한다. 행여나 발을 잘못 짚으면 떨어지기 십상이다. 6대 Dalai Lama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를 끈다. 달라이라마는 결혼을 할수 없이 금욕생활을 해야 한다. 그런데 5대 달라이라마가 오래 살지는 못했었지만 업적이 무척많아 사람들의 추앙을 받은분이었었단다. 후계 달라이라마를 모시는 의식은 보통 서거후 8년안에 하게 되는데, 그의 서거를 사람들에게 알리면 너무나 심적으로 충격이 클것 같아 이를 비밀에 부치고 20여년을 넘겼다가 6대 달라이라마를 모시게 됐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20을 넘긴 장년으로 이미 성년이 된 세상사람들이 하는짖을 다한 어찌보면 망난이 였었고, 그때 그는 여자친구들이 여럿있어 여색을 즐기고, 술도 잘마시고....그래도 공회에서는 그들 달라이라마로 모셨던 특별한 사유가 있었을 것이었다. 한번은 그가 궁전안에서 소변을 보는 엄청난 망난이짖을 했단다. 사람들이 기가 막혀서 의아해 하고 있는데, 그는 방뇨했던 오줌을 역으로 다시 다 거두어 드림으로써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고 하는데, Guide의 설명에 의하면 그는 그렇게 마술에도 능했었다고 한다. 여자를 멀리하게하고, 술을 못마시게하면 그가 달라이라마 수도생활을 할수 없을것이기에, 그에게 만은, 예외를 두었었다고 하는데, 그규율은 현재도 지켜져 달라이라마는 여자를 모른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후임 달라이 라마는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 동자들중에서 모신다고 한다. 여러방에서 석가의 강해내용이 모셔진 상자들이 선반에 꽉차 있는것이 보였는데, 명주천이 그박스를 감싸고있었다. 그양이 상상할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분량이라고 한다. 상자를 감싸고 있는 천이 낡고 망가져 이를 다시 보수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장면도 보았다. 한국의 합천해인사에 보관되여있는 팔만대장경 목판이 유명하다는것을 잘 알고 있는데, 여기것은 목판이 아니고 요즘으로 애기하면 종이에 적혀져 있어, 이를 다시 상자에 넣고 명주천으로 감싸고 보존해 오고있다고 했다. 이를 생전에 다 읽어본 Monk들이 있을까? 평생을 통해서도 읽어보기조차 어려운 이엄청난양의 설법을 Buddah는 설파 한것이다. 궁전의 어떤부분의 벽은 'Pema Stick' 이라는 해발 5000미터 이상에서만 서식하는 갈대같은 붉은색갈의 갈대풀로 쌓았다고한다. 이갈대의 성능은 차거운 바람으로 부터 온기를 지켜주고, 오랫동안 부식하지않으며, 또한 땅을 보호해주는 특성을 갖고 있다고한다. 해발 4000미터 이상의 분지중의 산꼭대기에 있는 궁전을 차거운 기후로 부터 보호하기위한 인간의 노력의 결정이라는것을 느낄수 있을것 같았다. 궁전의 제일높은곳에 있는 넓은방에는 역대 달라이라마의 시신이 모셔진 관(Tomb) 여러개 있었다. 모두가 화려하게 황금으로 치장되여있었고, 크기는 다 달랐다. 중앙에 제일큰 관이 특히 눈에 띄었는데, 그관이 바로 5대 달라이라마의 시신이 모셔진 관이라고 한다. 그옛날에 이렇게 엄청난 양의 황금을 어떻게 사용했을까를 생각해보면서, 그때 당시는 삶의 목적이 오직 부처에 다 연결 되여 있어서 였을것이라고 짐작을 해봤다. 궁전의 바깥벽이 하얀부분은 매년 색칠을 반복한다고 한다. 페인트를 사용하기도하고, 때로는 밀크를 사용하기도 한단다. 나의 짧은 생각으로는 Oil base인 흰색의 페인트를 칠하면 몇년동은 편히 지낼수 있을텐데.... 라는 망상을 해본다. 내가 이해 못하는 또다른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세히 곁에서 보면 페인트가 거칠고, 또 어떤 부분은 색칠이 벗겨져 있었다. 구경꾼들의 행령에 밀려 관람을 마치고 주차장에 왔더니, Guide가 한군데 더 보여 드리고 오늘 관광을 마무리 하겠단다. Yaowang Mount의 서쪽끝 벼랑에 그수를 셀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부처의 모습이 벽화로 그려져 있는 곳이었다. 지금은 지붕도 해놓아 보호를 하고 있었으며 그앞에는 Altar가 크게 만들어져 있고, 광장바닥은 대리석으로 넓게 잘 다듬어져 있었다. Altar가 있는 앞쪽에는,서울의 남산에서 본 봉수대 처럼생긴, 커다란 화로가 있고 한쪽에 구멍을 뚫어 그곳에서 사람들이 향을 피우고 있었다. 한 티벳인이 불교의식에 따라 온몸을 던져 절을 하는데, 옆에서 보기에도 무척 힘들어 보인다. 그는 절을 하면서 뭔가 계속해서 주문을 외운다. 우리 생각으로는 불공을 드릴때는 깨끗한 옷으로 단장하는 정성을 드리는데, 이남자의 입고있는 옷은 거지옷 같다. 그만큼 외형에는 신경쓰지않는다는 뜻일까? 모르겠다. 이벽화들에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14세기경에 티벳의 유명한 고승 Duoran Pandits가 주동이 되여 이바위벽에 부처를 각인하기 시작했었단다. 그가 죽은후 죄에서의 고통을 벗어 보고져 계속해서 부처상을 각인 해야 했었으나, 가난한 티벳인들은 이를 감당할 능력이 없어, 정신적 지주로 모시고 싶은 Redeem Thangka Buddah를 모실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염색물질을 조금씩 구입하여 Redeem Thangka Buddah 를 대신했는데, 현재도 그전통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뒤쪽의 언덕에는 또다른 건축물이 웅장히 버티고 있었고, 이곳에도 자선을 의미하는 금빛색갈의 회전통들이 설치되여 있어, 지나는 티벳인들과 관광객들의 손길이 계속이어져 통을 돌리고 있다, 이곳에 들어 오는 입구쪽에는 구들장 같은 얄은 돌판에 티벳어로된 글씨를 색이는 두명의 기술자가 돌가루먼지를 퉁기면서 일하고 있었다. 또 Altar앞쪽에 있는 조그만 상가에서는 한기술자가 티벳인들이 불교의식에 따라 길거리를 돌면서 손에들고 돌리는 원추형의 기구를 열에 달구어 망치로 때려서 이쁘게 만들고 있어 사진한장을 찰칵했다. 티벳인들은 사진찍히는것을 무척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Lhasa는 한국의 도시대구처럼 고산지역의 분지에 자리하고있어 높은 지역인데도 낯동안에는 더워서 윗옷을 벗어야 했는데, 저녁이 되자 갑자기 서늘해져 벗어논 윗옷을 입고도 싸늘함을 느꼈었다. 고산지대에서의 삶은, 평지에서만 지내온 우리같은 관광객들에게는 큰 짐인것 같다. http://www.youtube.com/watch?v=EpbLeznfdOM http://www.youtube.com/watch?v=iI7DHW8cKWc http://www.youtube.com/watch?v=Wc_hwR3wo2s http://www.youtube.com/watch?v=Hb-ppZQAz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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