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ne 25, 2011

Gale선교사 생가 방문과 그의 행적 탐방























James Scarth Gale, 그는 1863년에 Alma Ontario Canada에서 태어나 1937년에 생을 마감한, 초기 한국의 기독교 복음화를 위해 헌신 하신 선교사분중의 하나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목사이다.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 30 여명이 그분의 행적을 탐방하기위해 그가 태어나서 자랐던 생가와 그가 아직 선교사가 되기전에 신앙생활을 했던 교회를 방문하는 귀한 기회를, UT(University of Toronto)에서 오랫동안 Gale선교사에 대한 연구를 하시면서 교수로 봉직 했고,지금은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한인출신 Y교수의 인도로 Elora를 향해 아침일찍 부터 차를 몰았었다.

그분이 어렸을때 신앙생활을 했었던 St. Andrew Presbyterian Church에 도착하니 자유중국계 후손으로 현재 담임목회를 하고 있는 Pastor Song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준다. 그분이 우리의 방문을 환영하는 내용에서 나는 속으로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Gale목사님의 행적을 높이 평가하고, 여기서 살고 있는 우리들도 그분을 추앙하면서 신앙의 모델로 삼고져,그분의 업적을 탐구할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대해 마음깊은곳으로 부터 감사의 말씀을 드리지만, 정작 그가 어렸을적부터 선교사로 파송되기 전까지 신앙생활을 했던 본교회에서는 그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선교사로서의 그분에 대한 행적을 탐구할려는 노력도 없을것입니다라고 인사말을 해주셨기 때문이다. Y교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지금 우리가 pew에 앉아 있는 이교회가 여러 정황으로 봐서, 분명히 그분이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틀림없다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이교회를 비롯한 인근의 여러교회를 둘러봐도 그분에 대한 자료가 전연 없기 때문에, 추측만 가능하다는 내용이다.

Gale은 토론토 대학을 졸업하고, 1883년 토론토대학에서 선교기금을 받아 아직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으로 파송되는 최초의 선교사가 된다. 선교중간에는 선교기금지원이 안돼, 교적을 옮겨 미국의 북장로교단으로 부터 선교지원을 받아 계속해서 선교사 생활을 하면서 한국을 알게돼고, 한국화 되면서 한국사람처럼 먹고자고 행동 했다는 설명에 고개가 숙여졌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선교사로서의 기본 자질을 그분은 먼저 행동으로 실천하고 생활화 했다는 설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보여준 자료 사진은 이를 더 극명히보여 주고 있었는데, 어느 행사장에서 그와 그의 부인이 당시의 우리 선조들이 입고 있던 전통적인 한복을 입고, 갓을 쓰고 있는 광경이었다.

Gale선교사가 1892년 원산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파 할때 '황찬식'이라는분과 같이 신앙생활을 했었는데, 그분의 후손중 한명이 일찍히 Canada로 이민와서, Medical Dr.로 평생을 살다가신 '황대연'씨라고 소개할때는 깜짝 놀랐었다. 이렇게 인연이 맺어지는것이로구나 하고. 또 오래전에 '미국의 소리'방송의 아나운서였던 '황재경'목사님도 황찬식 초기 장로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한국에 6/25전쟁 발발의 소식을 맨먼저 알려준분이기도 했다고 한다. 1988년 6/25일에 Gale선교사의 선교 100주년 기념으로 재캐나다 한인 기독교인들이 당시로서는 거금인 $3,000 달러를 모아 Gale선교사의 업적을 기리는 동판을 새겨 교회벽에 걸어둔것을 오늘 직접 목격 하기도 했다.

1892에 총각이었던 Gale선교사는, 당시 재중원의 의사로 재직하다가 병사한 Dr. Heron의 부인인 Mrs Heron과 결혼을 했다. 총각과 미망인과의 결혼은 당시로서는 흔치않은 사건과도 같았는데, 그렇게 맺어진 내용이 엉뚱했다고 한다. Gale 선교사외에도 선교팀에는 다른 두명의 총각 선교사가 있어, 일종의 경쟁이 있었는데, 결국 Gale과 맺어지게 됐었다고 하는 얘기도 해 주셨다.

Gale목사님은, 최초로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한글로 번역했었고, 또 최초로 한국에 파송된지 7년만에 영한사전을 발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분의 선교사상은 무엇보다도 선교현지에서 토착화에 중점을 두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미국식 선교와는 완전히 분리된 것이며, 복음의 예를 들때도 한국의 풍습과 문화에서 찾을려고 무척 애를 쓴 분이라고 한다. 성경뿐 아니라 '천로역정(Pilgrims of Precessing)을 한글로 번역하여 많은 사람들이 읽게 했다고 한다. 선교사들이 제일 많이 겪는 어려움중의 하나는 음식이라고 한다. 한국도착후 3개월만에 황해도의 소래에서 한국의 토속음식을 익히기위해 때로는 코를 막고, 음식을 입에 집어넣고 꿀꺽 삼키면서 넘겼는데,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배(Stomach)에 전연 탈이 나지 않고 소화해 냈다고 하여, 사람들이 그의 배를 가리켜, 선교를 하기위해 특별히 하나님께서 제작해주신 것이었다라고 농담삼아 사람들이 신기해 하곤 했다한다. 이는 그의 철저했던 Koreanized Christian이 되기를 생활화 했었던 그의 행적의 일부분임을 알수 있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을 비롯한 다른 동료들이 Gale목사로 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이승만씨도 그에게서 세례를 받을려고 했으나, Gale선교사는 거절 했다고 하는데, 이유는 이승만씨가 장로교인이 아니고 감리교출신이기 때문이었었다고 한다.

1908년 Herriet부인이 병사 하자 2년후인 1910년 4월에 실업가의 딸인 루이스와 재혼하였다.
그는 1900년에 연동교회에서 목회를 하기 시작하여 1927년에 은퇴하고 그의 부인의 고향인 영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37년 1월 31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성경을 우리한글로 번역할때, God을 어떻게 옮겨야 하는가를 놓고, 당시 번역에 참여했던 Underwood와 논쟁을 벌린일도 있었다 하는데, Underwood는 '천주'로 해야 한다했고, Gale은 한국사람의 정서에 맞는 '하나님'으로 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주장을 관철 시켰던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는것 같다.

교회에서 가까이에 있는 그의 생가를 방문했는데, 지금은 그와는 아무런 인척관계가 아닌 Farmer가 현재 3대째 살고 있다는것을 알았다. 당시의 집은 아주 조그만 했는데 현재는 본채에 잇대어 또 다시 집을 지어 상당히 커 보였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Gale발자취를 보기위해 이곳을 방문하는것 같아 보였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서 한켤레의 신발에서 잘 자라고 있는 화초는 특히했고, 큰나무를 자르고 남아 있는 Stump있는 그위에 shelter를 지어 놓아 보기에 운치 있어 보이는 여유도 보았다. 일행들이 본채 건물을 보러 몰려간사이 나는 본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Garage에서 Tig Welding으로 자동차의 앞뒤 Bumper를 만들고 있는 청년과 인사를 하게됐다. 그의 설명으로는 3대째 이곳에 살고 있는데, 그의 Grand Father께서 1940년대초에 이농장을 구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시간적으로 따져볼때, 현재의 농장주인전에 또다른 사람이 이곳에서 살았었지 않았나 하는 계산이 된다. 그는 누구였을까? 어쩌면 Gale이 어떤 사람이었었나를 모른채 그에게서 직접 구입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원을 아주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 놓아 사진 몇장을 찰칵 하기도 했다.

탐방후 Elora Gorge Covservation에서 모두가 둘러앉아, 오늘의 Gale생가 및 교회 탐방에 대한 보충 설명을 Y목사님으로 부터 듣고 질문도 하면서, 준비해온 BBQ와 곁들인 점심은 일품이었다. 예상치도 않게 모든분들이 음식을 많이 준비해와 푸짐한 파티를 연상케 하는 맛있는 진미를 실컷 먹는 야외소풍의 기분을 내기에 손색이 없었다. 집에서 가꾼 상추를 얌전하게 다듬어 큰 Container에 듬뿍 담아와 돼지고기 불고기와 쌈장에 싸서 먹게 했고, 나물반찬, 그리고 밤샘하면서 말았다는 맛있는 김밥, 귀한 달래김치등등 모두가 오늘의 탐방을 위해 정성껏 준비한 그손길들을 감사할뿐이었다. 어린 아이들은 끝없이 펼쳐진 Lawn위에서 축구를 하면서 딩굴고, 항상 그렇치만 여성분들은 다시 먹고남은 뒷치닥거리를 하느라 바빳고..... 식사후 계곡을 따라 이어진 Trail을 걸었다. 바위위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과 기암절벽들...기억에 남을 나들이였고, 이제 이고마운 모임이 좋은 열매를 맺는 모습도 머지 않아 보게 되리라 확신해 마지 않는다.

오늘의 탐구여행에서 나는 보기 드물게 내가 직접 운전을 하지 않고, 같이 간 동료 Elder분의 차에 동승하여 편하게 다녔다. 항상 운전을 하다가 승객신분으로 있으니 처음에는 뭔가 잘 맞지 않는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으나, 이내 편하고 Relax해졌다. Kitchner Waterloo 지역을 지날때는 오래전 아들이 이곳에서 학교 다닐때 가끔씩 들렸던 기억이 아렴푸시 떠 오르기도 했다. 그후로는 오늘이 이지역을 통과하는것은 처음인것 같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실감나게 한다. 차창으로 비쳐지는 끝없이 펼쳐지는 농장의 파란 전경은 평화롭게 보이기도 한다.

현재는 Gale목사의 후손은 완전히 대가 끊기어, 캐나다에는 직계 가족이 존재치 않는다고 한다. 아쉬운 대목이다. 이것도 그분의 뜻으로 받아 들여야 하나? 잘 모르겠다.

참고: 혹시 찾아가실분들을 위해 교회 주소를 추가 합니다.

St.Andrew's Presbyterian Church

325 George St. W. Fergus, Ont. N1M 1J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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